‘나의 해방일지’, 흰자의 삶에 대한 박해영표 위로
“넌 그냥 딱 촌스러운 인간이고, 난 그 말이 상처가 될 수 있는 경계선 상의 인간이고. 걔가 경기도를 보고 뭐라는 줄 아냐? 경기도는 계란 흰자 같대. 서울을 감싸고 있는 계란 흰자.” JTBC 토일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창희(이민기)는 여자친구와 헤어지게 된 이유로 경기도에 살아가는 자기 삶의 환경을 이야기한다. 서울과 경기도를 계란 노른자와 흰자로 비유해 말하는 대목이 웃음을 준다. 그런데 그 뒤에 어딘가 짠한 페이소스 같은 게 남는다. 이건 대체 뭐지?
<나의 해방일지>는 경기도 남쪽 수원 근처 산포(가상의 지명이다)라는 곳에 살아가는 창희, 미정(김지원), 기정(이엘) 남매의 이야기를 가져왔다. 사실 어느 정도는 과장이 들어가 있는 것도 있고 어떤 건 너무나 공감가는 대목도 있지만, 서울의 변방에 살아가는 이들이 처한 상황들을 <나의 해방일지>는 빵빵 터지는 코미디로 먼저 채워 넣는다.
출퇴근만 했을 뿐인데 하루가 다 가는 이 흰자의 삶 때문에, 미정은 회사에서 지원하는 동호회 하나 들지 못하고 회식에 가서도 일찍 일어나야 한다. 이유는 하나. 집이 너무 멀어서다. 기정은 출퇴근 하다 인생이 끝장날 것 같은 답답한 삶을 토로한다. 만나자는 남자가 약속장소를 삼청동으로 잡는 것이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기정을 힘들게 한다. 경기도민이 주말에 서울 나오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모르냐며 그런 인간을 소개시켜준 이를 질타한다.
창희가 다른 남자가 생긴 여자친구와 헤어지면서 꺼내놓은 감정을 들여다보면 그 흰자의 삶이 준 고충이 담겨있다. 강북에 사는 여자친구 때문에 헤어지고 집에 가는데 매일 1시간 반이 걸렸다는 말이 툭 튀어나온다. 그러면서 갑자기 서울과 경기도, 도시와 촌스러움으로 나뉘는 노른자와 흰자의 삶이 애인과 남친이라는 지칭의 차이로까지 등장해 감정을 건드린다. 결국 창희는 “그 놈은 서울 사람이냐?”는 자격지심 가득한 말까지 터트린다.
박해영 작가가 돌아왔다. 우리에게는 <또 오해영>과 <나의 아저씨>로 기억되는 작가. 그런데 박해영 작가가 코미디도 이렇게 잘 썼던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의 해방일지>는 빵빵 터지는 웃음으로 채워진다. 그 웃음은 도시인들에게는 로망으로까지 여겨지는 전원생활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가져온 데서 비롯한 것들이다.
서울에서 양복 챙겨 입고 멀쩡하게 일하던 이 삼남매가 택시비를 아끼려고 강남역에서 만나 같이 택시를 타는 광경이나, 집에 도착하자마자 마당 한 편에 있는 수돗가에서 웃통을 벗어던지고 물을 끼얹는 창희의 모습이 그렇다. 주말에 전원생활을 즐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버지가 하는 파 농사로 땀에 절어 일을 하는 모습은 또 어떻고. 박해영 작가는 코미디도 잘 쓴다.
그런데 이러한 흰자의 삶을 전면에 내세운 건 단지 서울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경기도민이라는 지역이 가진 소외감이나 고충을 드러내기 위함만이 아니다. 그건 어떤 걸 중심으로 세워두고 그것이 마치 바람직한 인생인 양 내세워지는 세상에서 그 바깥에 놓여진 이들이 겪는 소외를 말하기 위함이다. 이들은 그 소외 속에서 답답하고 그렇게 살다 인생을 다 보낼 것 같은 불안감에 빠져 있다.
그런 소외는 단지 지역적 차이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물론 우리나라는 지역이 그 사람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지만), 회사 생활에서 동호회 같은 것에는 관심 없는 아웃사이더이거나 남녀관계에 있어서도 모두가 거치는 걸 자신만 빼놓고 지나는 일을 겪는 누군가에게서도 생기는 일들이다. 즉 창희, 미정, 기정은 본인들이 경기도민으로 흰자의 삶을 살아가는 소외를 겪고 있다 느끼지만, 그 집에서 일을 해주며 살아가는 구씨(손석구)는 이들보다 더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이다. 무슨 이유에선지 일을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그는 할 일이 없을 때는 멍하니 깡소주를 까는 걸로 시간을 죽인다.
<나의 해방일지>는 그래서 이렇게 소외된 이들이 그 답답한 일상을 버티다 버티다 드디어 폭발하고 그것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결국 모종의 무언가를 터트리는 이야기다. 2회의 마지막에 미정이 집으로 돌아가던 그 챗바퀴의 마지막 발길을 되돌려 갑자기 구씨(손석구)에게 다가가 “날 추앙해요”라고 어색한 단어까지 동원해 얼토당토한 제안을 하는 건 그래서 우스우면서도 짠하기 이를 데 없다. 그 누구도 자신을 사랑하거나 심지어 관심 갖지 않는 것 같은 소외 속에서 미정은 자기보다 더 바깥에서 살아가는 구씨에게 명령하듯 그런 말을 던지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웃음과 눈물, 희극과 비극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했던가. <나의 해방일지>는 흰자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빵빵 터지는 웃음으로 문을 열었지만, 점점 다가가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 웃음 뒤에 숨겨진 눈물이 왈칵 우리 앞에 쏟아진다. 과연 이 변방에서 흰자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그 곳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해방은 과연 노른자의 삶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진정한 해방은 어디서 찾아질 수 있는 걸까. 웃기지만 짠한 페이소스가 가득한 박해영표 희비극이 가진 매력이다.(사진:JTBC)
'동그란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과연 이게 사는 걸까... 웃다가 눈물 펑펑 나는 ‘나의 해방일지’ (0) | 2022.04.24 |
---|---|
김희선의 냉정함과 로운의 따듯함, 이것이 ‘내일’의 메시지다 (0) | 2022.04.20 |
제주바다 닮은 이정은, 차승원의 절망도 안아줄까(‘우리들의 블루스’) (0) | 2022.04.13 |
이주명, 시대와 싸우는 매력적인 청춘으로 급부상(‘스물다섯 스물하나’) (0) | 2022.03.26 |
‘돼지의 왕’, 연상호 감독 원작과 뭐가 달라졌나 (0) | 2022.03.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