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밤거리를 한 소녀가 걸어간다. 음악이 흐르고 그 소녀의 모습은 실사에서 툰스타일의 2D로 또 캐주얼 3D로 변신한다. 변신할 때마다 전자음이 들리고 픽셀이 흩어지고 뭉쳐지는 이미지를 통해 이 존재의 특이성이 설명된다. 이 ‘Done’이라는 첫 번째 싱글 앨범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이 소녀의 이름은 나이비스(naevis)다. SM엔터테인먼트의 에스파의 세계관에서 탄생한 버추얼 아티스트다. 사람은 아니지만 인공지능과 VFX 기술이 결합되어 만들어낸 버추얼 아티스트. 그가 공식적으로 첫 번째 싱글을 내고 본격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최근 몇 년 간 인공지능을 활용한 보이스 기술과 다양한 모델링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버추얼 휴먼이 점점 늘어났다. 그들은 모델로 활동하기도 하고, 인플루언서, 유튜버로 활동하기도 하며 음원을 내고 가수로 활동하는 아티스트들도 생겨났다. 사실 1998년 국내1호 사이버가수로 아담이 등장했을 때만 해도 약 20여년만에 이런 놀라운 기술발전에 의한 진화가 생겨날 거라고는 예상하기는 어려웠다. 물론 당시 사이버 가수 아담 시연회를 통해 내놓은 아담소프트측의 선언은 이 분야에 대한 창대한 꿈이 담겨 있었던 건 사실이다. 당시 아담소프트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기술적인 디지털 혁명의 시대는 이제 문화혁명으로 진행하고 있다. 갓 탄생한 아담은 외형이 완성된 수준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인공지능, 목소리합성 등의 기능을 부여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명실상부한 문화의 전사로서 발전시킬 것이다.”
당시 아담은 그 차별성 때문에 괜찮은 성과를 냈다. 1집 앨범을 20만장 판매했고, 광고 모델도 했으며 갖가지 캐릭터 상품도 만들어졌다. 하지만 창대했던 포부와 달리 지속 가능하기는 어려웠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아직까지 이러한 꿈을 실현하기에는 기술력이 따라주지 않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이러한 버추얼에 대한 대중적 인식이 아직까지는 낯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로부터 26년이 훌쩍 지난 현재는 어떨까. 나이비스를 보면 저 아담의 탄생과 함께 꾸었던 꿈이 이제 막 열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진화한 VFX 기술과 인공지능 기술이 어우러져 거의 실제와 가까운 3D 캐릭터 애니메이션이 구현되고 있고, 목소리 또한 인공지능 보이스로 만들어져 인간과 기계 사이의 어느 지점을 들려주는 듯한 몽환적인 느낌을 구사하고 있다. 나이비스의 싱글 ‘Done’ 뮤직비디오는 바로 그걸 시연해 보여주는 것으로 드디어 이 세계가 본격적으로 열렸다는 걸 말해준다.
앞서 아담이 처했던 두 가지 장벽으로서 기술력과 가상에 대한 대중적 인식이 완벽하게 해결됐다고 보긴 어렵다. 두 가지 장벽이 야기하는 건 바로 ‘불편한 골짜기(uncanny valley)’다. 아이러니하게도 버추얼 아티스트는 실제와 너무 멀어져도 또 실제와 너무 가까워져도 불편함이 느껴진다. 너무 먼 건 조악해서 너무 가까운 건 마치 완벽한 마네킹이 사람을 흉내내는 것처럼 보여서 오싹한 기분을 준다. 이것은 결국 인간이 아닌 버추얼 형상에 대해 우리가 갖게 되는 인식과 감각의 문제인데, 이를 넘어서기 위한 방법들은 꽤 오래 전부터 고민되어 왔다. 그 하나는 차라리 인간과는 다른 존재라는 걸 드러내는 방식이다. 키시로 유키토가 그린 만화 ‘총몽’을 원작으로 한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실사영화 ‘알리타’는 인간의 두뇌를 가진 기계 소녀 알리타의 눈을 비정상적으로 큰 캐릭터로 구현했는데 이건 원작이 그렇기도 하지만 다분히 불편한 골짜기를 넘기 위한 의도가 들어있었다. 인간과 다른 존재라는 걸 아예 캐릭터 이미지로 드러냈기 때문에 보는데 별 불편함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나이비스의 뮤직비디오에서 굳이 툰 스타일 2D와 캐주얼 3D를 혼용하는 건 비즈니스적 포석의 의미도 있지만 바로 이런 불편한 골짜기를 넘어서려는 의도도 깔려 있다. 국내에서 아직까지 가장 성공한 버추얼 아티스트로 꼽히는 플레이브가 가진 강점도 바로 여기서 나온다. 실사 3D가 아닌 툰 스타일의 2D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우고 실제 아티스트들이 뒤에서 본체로서 활동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개념 자체는 사이버 가수 아담과 똑같지만 달라진 기술력이 완벽한 차이를 만들었다. 리얼 타임 기술을 통해 실시간 소통과 콘서트도 가능한 플레이브는 오히려 인간적인 면을 내세움으로써 이 가상 개념에 팬들을 과몰입하게 만들었다.
나이비스는 이 불편한 골짜기를 넘기 위해 꽤 공을 들여 탄생했다. 일단 바로 등장한 게 아니라 에스파(aespa)의 등장과 함께 그 세계관을 통해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는 점이 그렇다. 에스파는 사실상 태생적으로 바로 이 버추얼 아티스트의 세계를 열겠다는 SM엔터테인먼트의 의지가 담긴 걸그룹으로 세계관 자체가 리얼 월드와 버추얼 월드가 연결되고 결합되는 형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에스파라는 그룹명 자체가 그렇다. 에스파(aespa)는 ‘아바타 X 익스피리언스(Avatar X Experience)’를 표현한 ‘ae’에 영단어 aspect(양면)이 합쳐진 이름이다. 이를 풀어서 해석하면 아바타를 통한 두 세계(리얼 월드와 버추얼 월드)를 경험하라는 뜻일 게다. SM엔터테인먼트는 에스파의 등장과 더불어 그 세계관을 담은 세 개의 에피소드를 내놨는데 거기에는 리얼 월드에 사는 이들과 짝을 이루어 버추얼 세계에 생겨난 ‘아이(ae)’라는 일종의 아바타 같은 존재들이 등장한다. 그래서 애초 에스파의 멤버는 카리나, 윈터, 지젤, 닝닝만이 아니라 이들과 각각 연결된 ae들을 합쳐 8명이다. 아바타 개념의 버추얼 아티스트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이비스는 이 세계관 속에서 리얼 월드의 에스파를 버추얼 월드로 인도하고 그 곳을 경험하게 해주는 중간 매개자로 등장한다. 본래 그 곳을 벗어나면 안되는 존재지만, 에스파를 돕기 위해 그 곳을 벗어나는데 이것은 버추얼 캐릭터가 일종의 ‘자유의지’를 갖는 과정처럼 그려진다. 나이비스는 이 에스파의 세계관을 통과해 리얼 월드로 나오는 것이고, 그래서 ‘Done’이라는 싱글은 이 버추얼 아티스트의 출사표가 되는 셈이다.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 에스파의 세계관에는 반복되어 나오는 장 폴 사르트르의 이 문구는 이 버추얼 아티스트의 세계에 대해 가상과 실재 사이의 경계가 사라질 거라는 걸 예고하고 있다. 본질이 버추얼이라도 그것이 세상을 움직인다면 실존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세계가 우리 눈앞에 성큼 다가와 있다. (글:이데일리, 사진:SM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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