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추얼 아티스트가 열고 있는 새로운 세계
최근 SM엔터테인먼트의 첫 버추얼 아티스트 나이비스가 싱글 ‘Done’을 발표하며 본격행보에 나섰다. 버추얼 휴먼이 붐처럼 등장하고 있는 시대, 버추얼 아티스트의 심상찮은 행보는 음악산업에 어떤 변화를 예고하는 걸까.
에스파의 세계관에서 빠져나온 나이비스
에스파는 그 세계관 자체가 버추얼 세계와 맞닿아 있는 걸그룹이다. SM엔테터인먼트는 에스파에 일종의 아바타 개념인 ‘아이(ae)’ 캐릭터를 덧붙였다. 그래서 에스파의 멤버는 카리나, 윈터, 지젤, 닝닝과 더불어 이들과 연결되어 버추얼 월드에 존재하는 ae들을 합쳐 총 8명이다. 리얼 월드와 버추얼 월드. 에스파가 가져온 이 세계관은 이제 이들의 활동 역시 두 세계를 넘나드는 것이라는 걸 예고했다. 이건 에스파(aespa)라는 그룹명에도 담겨있다. ‘아바타 X 익스피리언스(Avatar X Experience)’의 첫글자를 딴 ‘ae’에 영단어 aspect(양면)가 합쳐진 이 이름은, 아바타를 통한 두 세계(리얼 월드와 버추얼 월드)를 경험하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에스파의 등장과 함께 SM엔터테인먼트는 이례적으로 이러한 세계관을 담은 세 편의 에피소드를 내놨는데, 그건 실사와 버추얼 이미지, 툰 스타일 이미지들이 결합된 것이었다. 버추얼 월드에 존재하는 각각의 ae들과 소통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에스파는 블랙맘바의 등장과 함께 그 연결이 끊겨버리자 버추얼 세계로의 모험을 떠나 블랙맘바와 대결한다. 여기서 리얼 월드로부터 버추얼 월드로 인도하는 존재가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나이비스다.
에스파가 리얼 월드에서 버추얼 월드로 들어가 그 세계를 경험하게 해주는 서사를 보여준다면, 나이비스는 이제 정반대로 버추얼 월드에서 리얼 월드로 빠져나오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본래 그 곳을 벗어나면 안되는 존재지만, 에스파를 돕기 위해 그 곳을 벗어나게 된 나이비스는 이제 가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활동을 시작한다. 나이비스라는 이름은 ‘사이버 항해사(cyber+Navigator)’라는 뜻이다. 최근 발표한 싱글 앨범 ‘Done’은 그래서 나이비스의 본격 독자 활동의 출사표다.
나이비스가 이렇게 리얼 월드로 나오는 과정을 보면 그간 SM엔터테인먼트가 이 버추얼 아티스트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가가 느껴진다. 에스파의 세계관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과정은 사실상 앞으로 인공지능 기술에 의해 버추얼 휴먼이 어떻게 탄생할 것인가를 예고하는 대목 그대로다. 리얼 월드에 사는 이들이 각각 버추얼 월드에 연결되어 갖게 될 ae란 사실상 개인 데이터에 기반해 만들어질 아바타 개념이고, 데이터들이 점점 축적되고 스스로 학습을 하기 시작하면 어느 특이점에서 독자적으로 대화하고 움직이는 버추얼 휴먼이 가능할 거라는 상상이다. 그 세계를 빠져나오면 안되는 룰을 어기고 리얼 월드로 나오는 나이비스는 그래서 일종의 ‘자유의지’를 획득한 버추얼 휴먼의 스토리를 담고 있다. 하나의 세계관이지만, 버추얼 세계에 대한 비전과 철학이 들어 있는 것이다.
나이비스라는 존재가 뛰어넘는 본질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 에스파의 세계관에서 반복되어 등장하는 장 폴 사르트르의 이 문구는 나이비스가 앞으로 해나갈 행보와 이로 인해 변화할 음악산업(나아가 엔터 산업)을 예감하게 만든다. 가상이지만 그 존재가 실제 세상을 움직인다면 그것은 실존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걸 말해주는 이 문구는, 이미 우리네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최근 봇물 터지듯 등장한 무수한 버추얼 휴먼들을 생각해보라. 이들은 갖가지 산업에 들어와 모델, 가수, 아나운서, 인플루언서 등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이들을 대하는 팬들의 자세다. 플레이브 같은 버추얼 아이돌을 떠올려보라. 물론 2D 캐릭터의 이면에 실제 아티스트들이 존재하는 그룹이지만 버추얼 캐릭터로만 하는 활동에도 팬들은 진짜 ‘존재’로서 이들을 받아들이고 열광한다. 라이브 방송을 통해 실시간으로 소통하기도 하고, 심지어 콘서트도 일반 아티스트들과 똑같이 한다. 물론 스크린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지만, 관객들과 호흡을 맞춰가며 보여주는 무대는 여느 콘서트의 풍경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 가상이라는 본질은 적어도 팬과 호흡하는 이 과정에서는 무화된다. 실제 존재하는 아이돌 그룹으로서 세상을 움직이고 있으니 말이다.
나이비스가 싱글로 내놓은 ‘Done’의 뮤직비디오를 보면 가상과 현실을 과감하게 넘나드는 이 존재의 야심이 엿보인다. 3D 실사 캐릭터와 더불어 애니메이션 주인공 같은 2D 캐릭터 등 다양한 형태로 변신하는 이른바 ‘플랙서블 캐릭터’를 선보인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캐릭터들은 앞으로 나이비스의 활동이 다양한 매체에 맞게 가상과 현실을 자유자재로 오갈 것이라는 걸 예고한다. 예를 들어 가수로서 음악프로그램에 등장할 것이지만 향후 게임 속 캐릭터가 될 수도 있고, 웹툰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실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활동들(이를테면 가상 캐릭터로서의 활동 같은)을 나이비스는 할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이다.
버추얼 아티스트가 넘어가는 불편한 골짜기
과거 사이버 가수 아담이 처음 버추얼 아티스트의 탄생을 예고하며 등장했을 때 신기해하면서도 넘지 못한 벽은 이른바 ‘불편한 골짜기(uncanny valley)’였다. 실제와 너무 멀면 조악해서 또 너무 가까우면 마치 완벽한 마네킹이 사람 흉내내는 것 같아서 느껴지는 불편함이 그것이다. 이것은 결국 이러한 버추얼 이미지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과 감각의 문제인데, 최근 들어 가파르게 빠져들던 이 골짜기는 점점 완만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가상에 대한 낯설음이 과거에 비해 점점 흐려지고 있어서다.
플레이브나 이세계아이돌 같은 2D 기반의 버추얼 아이돌에 열광하는 팬덤이 형성되고 있는 건, 이제 만화나 애니메이션 같은 캐릭터 산업을 통해 대중들이 이를 마치 실제처럼 과몰입하는 일이 그만큼 익숙해졌다는 걸 의미한다. 이들 툰스타일의 캐릭터들이 오히려 실사 3D 캐릭터보다 더 친숙하게 느껴지는 건 이들 캐릭터들이 실제 인간과 비교되기보다는 캐릭터로서 다가오기 때문이다.
반면 최근 실사 캐릭터로 등장해 모델에서 가수까지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는 버추얼 휴먼들이 불편한 골짜기를 넘는 방법은 이미지 재현 기술을 통해서다. 말그대로 진짜 사람처럼 구현해내는 것. 그런데 여기서 ‘진짜 사람처럼’이라는 표현에는 인간다운 면 또한 포함하는 걸 말한다. 그래서 일부러 완벽한 피부보다는 주근깨가 있는 피부를 구현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버추얼 휴먼에 대한 거리감을 줄이려는 노력이다.
나이비스가 툰스타일 2D와 캐주얼 3D, 실사 3D를 오가는 플랙서블 캐릭터를 내세운 것 역시 다양한 활동을 전제한 것이면서 동시에 그 캐릭터성을 전면에 끄집어냄으로써 불편한 골짜기를 넘으려는 전략 또한 담겨져 있는 선택으로 보인다. 이렇게 하면 실제 인간과의 비교를 슬쩍 벗어나 캐릭터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지금은 물론 버추얼 아티스트는 이를 디자인하고 애니메이션 작업을 통해 탄생하고 대중들과의 소통에 있어서도 아직 자율적으로 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데이터가 점점 축적되고 이를 바탕으로 하는 인공지능 기술이 진화하게 되면 자율성을 어느 정도 갖게 된 존재로 진화할 가능성이 높다. 에스파의 세계관을 빠져나온 나이비스가 이 새로운 특이점을 향해 가는 버추얼 아티스트의 세계로 우리를 어떻게 인도할지 기대되는 대목이다. (글:시사저널, 사진:SM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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