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넘긴 <백년의 유산>이 남기는 씁쓸함

 

지난 주 MBC <백년의 유산>은 30% 시청률을 넘겼다. 이 수치는 늘 최강자로 군림해왔던 KBS 주말극을 앞질렀다는 것 때문에 더 많은 의미부여가 되었다. 드라마 제목은 <최고다 이순신>이지만 이 드라마의 시청률은 최고가 아니었던 셈이다. <백년의 유산>의 시청률이 30%를 넘기자, 그간 막장 논란을 줄곧 제기했던 언론들 중에서도 과연 이 드라마가 막장인가 하는 의문 제기를 하고 나섰다. 시청률만 높으면 막장도 좋은 드라마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우리네 드라마의 현실이다.

 

 

'백년의 유산(사진출처:MBC)'

먼저 이른바 어떤 드라마를 막장으로 부를 것인가에 대한 정의가 필요할 듯싶다. 여러 기준이 있겠지만 크게 그 정의는 두 가지로 압축되곤 한다. 하나는 완성도가 떨어져 개연성을 찾기가 어려운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도무지 TV 드라마로서는 다뤄지기 어려운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행태들이 자극적으로 배치되는 경우다. 두 가지 정의가 복잡하다면 한 가지로 정의내릴 수도 있다. 그것은 시청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상투적으로 자극적인 코드를 반복하는 경우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백년의 유산>은 위에서 제기한 것들 중 적어도 두 가지 경우에는 해당된다. <백년의 유산>이 그나마 갖추고 있다고 보이는 것은 개연성이다. 물론 이것도 좀 더 심층적으로 들어가면 주인공 채원(유진)의 캐릭터가 초반에는 능동적이었다가 어느 순간 늘 당하는 수동성을 보이는 등 그 일관성을 찾기 어렵다는 점에서 완전하다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간 막장드라마들의 전개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개연성이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두 번째 경우인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행태는 <백년의 유산>의 시청률을 끌어올린 주요 요인이다. 아들에게 집착하면서 거의 엽기 수준으로 며느리를 괴롭히는 방영자(박원숙)가 그 주인공이다. 심지어 정신병원에 며느리를 집어넣는 건 거의 범죄행위나 다름없다. 물론 이러한 방영자의 악행은 다분히 시청자들의 공분을 이끌어내려는 계산이다. 드라마가 어떤 자연스러운 이야기를 전개하려는 것이 아니고 시청자들의 감정을 자극함으로써 시청률을 목표로 할 때 그 드라마는 막장에 가까워진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가장 큰 문제는 이른바 시청률로 성공한 드라마들의 공식들을 가져와 얼기설기 엮어놓은 상투성이다. 지독한 시월드의 시어머니와 며느리 그리고 마마보이 아들의 갈등 관계는 전가의 보도처럼 가족드라마들이 사용했던 공식이고, 여기에 복수극의 구조와 최근에 많이 사용되는 성장드라마 미션 구조가 뒤섞여 있다. 물론 출생의 비밀도 빠지지 않는다. 만일 이 다양한 코드들을 섞어서 창의적인 이야기를 뽑아냈다면 얘기가 다를 수 있겠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그 구조만 봐도 떠오르는 몇몇 드라마들이 있을 정도다.

 

이 드라마의 구조는 같은 방송사 같은 시간대에 방영되었던 <신들의 만찬>과 거의 유사하다. 음식이 메인소재이고 그 음식을 다루는 가문의 이야기가 등장하며 그 대를 이어가기 위한 후계자 경쟁이 들어간다. 물론 거기에는 과거에 라이벌이었던 주인공 윗세대들의 갈등과 숨겨진 출생의 비밀이 깔려 있다. 그런데 이 <신들의 만찬> 역시 과거 성공드라마로 지목되었던 <제빵왕 김탁구>의 공식들을 떠올리게 하는 드라마다. 그러니 반복된 구조를 답습하는 <백년의 유산>을 과연 창의적인 드라마라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백년의 유산>이 내세우고 있는 백년을 이어온 국수집의 이야기도 과도한 PPL로 인해 그 진정성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화면 곳곳에 배치된 오뚜기 브랜드의 제품은 드라마 몰입을 방해할 지경이고, 심지어 채원이 입사한 회사이자 그녀의 연인인 세윤(이정진)의 회사 이름도 ‘오뚜기’다. 여기에 채원 가족이 이끌어온 국수집 이름은 ‘옛날 국수’. 드라마는 채원이 세윤의 회사의 국수 공모에서 ‘옛날 국수’를 제안해 채택되는 과정을 그리지만, 실상은 오뚜기 ‘옛날 국수’의 노골적인 광고나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시청률 30%라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혹자들은 이를 가리켜 진화된 막장이라 하지만 그 말만큼 슬픈 건 없을 게다. 오죽 진화할 것이 없으면 막장을 진화시킬 것인가. 그렇다면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의 퇴행일까. 이것 역시 슬픈 얘기다. 드라마가 가진 자극적인 면들만 소비되고 있다는 걸 말해주는 것일 테니.

 

하지만 어쩌면 이 둘 다가 아니고 다만 시청률 추산의 문제일 수도 있을 게다. 지금의 TV 본방사수로만 계산되는 시청률 추산으로 잡히는 시청자들은 결국 특정 세대로 국한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젊은 시청자들과 나이 든 시청자들의 시각차가 극명히 드러나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백년의 유산> 같은 드라마는 지금의 잘못된 시청률 추산이 만들어낸 돌연변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 역시 슬픈 이야기다.

진정성 찾은 '정글', 이젠 재미를 찾아야

 

<정글의 법칙> 뉴질랜드편은 여러모로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끝을 맺었다. 박보영의 소속사 대표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 몇 줄이 지금껏 <정글의 법칙>이 진정성으로 쌓아놓은 공든 탑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뉴질랜드편은 진정성을 의심할만한 조금치의 의혹도 남겨서는 안 되는 상황에 놓여졌다.

 

 

'정글의 법칙'(사진출처:SBS)

편집은 투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첫 회부터 사전 답사하는 장면을 미리 보여줘야 했고 중간 중간에도 자막 등을 통해 ‘관광이 가능한 지역이나 전문가이드가 반드시 따라야 함’ 같은 고지를 붙여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또 누구나 다 갈 수 있는 관광지나 여행하고 왔다는 식으로 호도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똑같은 관광지를 간다고 하더라도 그 곳을 어떤 방식으로 체험하느냐에 따라 그 강도나 결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것을 제대로 보여준 것이 바로 채텀섬에서 초심으로 돌아가자며 병만족이 한 석기시대 체험이다. 그 섬은 물론 관광이 가능한 곳이고 또 살고 있는 주민도 있는 곳이지만 그들은 말 그대로 석기시대로 돌아가 야생 그대로를 보여주었다.

 

동굴에서 자고 석기만을 써서 물고기나 흑전복을 잡거나 웨카라는 날지 못하는 새를 잡아먹으며 지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게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정글의 법칙>이 정글을 체험하는 방식이라는 것은 이번 뉴질랜드편을 통해 확실히 보여준 셈이다. 이미 전 지구 어느 곳이든 들어가지 못할 곳이 없는 시대에 완전히 외부로부터 차단된 곳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나마 야생이 살아있는 곳으로 들어가 야생 그대로의 삶을 체험하는 것이 더더욱 의미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조금치의 오해도 만들지 않기 위해 선택한 편집은 결과적으로 극도로 스토리텔링이 자제될 수밖에 없었다. 찍어온 촬영분에 적절한 편집과 스토리텔링을 덧붙여야 하나의 맥락이 생기고 재미가 생길 수 있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자유로운 스토리텔링을 할 수 없는 뉴질랜드편은 상대적으로 상당 부분의 재미를 포기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재미를 뽑을 수 있는 부분이 사냥을 하거나 그 잡은 것을 같이 먹는 장면이었을 게다. 이번 뉴질랜드편이 <정글>판 최고의 먹방이 된 것은 그런 이유다. 흑전복에서부터 웨카 같은 새, 각종 물고기, 거대 뱀장어, 웨타나 후후 애벌레 같은 벌레에 이르기까지 뉴질랜드편은 끝없는 식탐을 주 스토리텔링의 재료로 삼았다.

 

결과적으로 나온 장면들을 종합해볼 때, 아마도 진정성 논란이 없었다면 뉴질랜드편은 굉장히 다채로운 스토리가 가능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채텀섬에서의 석기시대를 거쳐 쥐라기 숲을 지나 빙하를 보고 마지막으로 <반지의 제왕>이 촬영된 영화 속을 체험하는 일련의 과정이 거기서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들을 좀 더 자유롭게 스토리로 이을 수 있었다면 시청자들로서는 훨씬 재미있는 <정글의 법칙> 뉴질랜드편을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번 논란을 계기로 <정글의 법칙>은 확실히 자기들만의 진정성을 제대로 보여줬다고 생각된다. 그러니 이제는 좀 더 과감한 스토리텔링을 통해 재미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 만일 그래도 논란이 걱정된다면 사전 방지 차원에서 프로그램 시작 부분에 ‘재미를 위해 약간의 스토리텔링을 했다’는 식의 고지 정도를 넣어주는 편이 낫지 않을까. 진정성도 좋지만 예능 프로그램으로서의 재미를 어떻게든 복원해야 한다. 이젠 좀 더 과감해질 때다.

동성애 편견 깨준 대중문화 콘텐츠의 힘

 

5월은 결혼의 달인가. 백지영과 정석원, 한혜진과 기성용, 장윤정과 도경완, 그리고 서태지와 이은성의 깜짝 결혼 소식이 발표된 데 이어, 눈에 띄는 것은 그 대열에 김조광수와 동성연인인 김승환과의 결혼발표 기자 회견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공식 보도 사진 속에서 당당하게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두드림(사진출처:KBS)

동성애자들이 공식석상에서 결혼발표를 하고 입맞춤을 하는 사진 한 장의 의미는 크다. 1996년 국내 최초로 만들어진 본격 동성애 영화 <내일로 흐르는 강>을 본 관객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남자들의 사랑을 서로 주먹을 입에 대고 입을 맞추는 장면으로 대신했다. 영화 속에서마저도 직접적인 표현을 피하려 했던 것. 하지만 이번 김조광수의 결혼발표는 이제 영화도 아닌 실제 현실에서도 동성애자의 애정표현이 그만큼 당당해졌다는 걸 말해준다.

 

물론 몇몇 용기 있는 동성애자들의 커밍아웃이 가져온 변화가 크지만, 동성애에 대한 대중들의 달라진 시각에 일조한 것으로 영화,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 같은 대중문화 콘텐츠를 빼놓을 수 없다. 과거에는 <크라잉 게임>이나 <해피투게더>, <브로크백 마운틴> 같은 해외영화를 통해서나 겨우 동성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후로 <로드무비>나 <후회하지 않아>,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 같은 우리네 동성애 영화들도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영화야 한정된 공간에서 보는 것이니 그럴 수 있다 치지만, TV 드라마가 동성애를 소재로 다루게 된 것은 이제 이러한 달라진 시각이 일상화 단계로 넘어오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커피프린스1호점>이나 <바람의 화원> 같은 이른바 동성애 코드를 활용한 드라마는 큰 화제가 되면서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깨는데 일조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동성애 코드를 활용한 드라마였지 동성애를 직접적으로 다룬 드라마는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김수현 작가의 <인생은 아름다워>는 실로 파격적인 시도라고 여겨진다. 동성애를 직접 다루면서 그것을 가족드라마의 틀로 엮었다. 즉 동성애자인 아들을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는, 우리 사회가 동성애자를 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처럼 보였다. 드라마가 가족애를 통해 동성애자를 받아들였듯이, 사회는 인간애를 통해 그들을 수용할 수 있으리라는 메시지.

 

하지만 동성애에 대한 달라진 시선이 이제 일상 속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가장 확연히 보여주는 건 예능 프로그램 속에 자연스럽게 유머의 한 부분으로 자리해가고 있다는 점이다. 홍석천은 이른바 게이조크로 불리는 예능의 새로운 트렌드를 끄집어낸 인물이다. <라디오스타>에 나와 거침없이 김국진의 얼굴을 쓰다듬고 동성애를 유머 코드로 올려놓는 홍석천은 그런 점에서 대중과 성소수자 사이에 훨씬 편안한 가교역할을 해주었다.

 

<라디오스타>에 나온 2PM의 준호가 한 프로그램에서 홍석천에게 돌발 볼 뽀뽀를 당했다는 얘기를 자연스럽게 하고, 준호로 하여금 원빈과 이병헌을 세워두고 이상형 월드컵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다 홍석천의 선구적인 게이조크 덕분이라는 얘기다. 게이조크는 아직 예능에서 다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신선하기도 하지만, 웃음을 코드로 한다는 점에서 좀 더 대중적으로 동성애에 대한 선입견을 없애주는 힘을 발휘한다. <SNL 코리아>의 신동엽이나 김민교가 하는 게이 코드의 콩트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편견은 여전하다. 하지만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다. 비난의 목소리도 있지만 응원의 목소리도 많다. 무엇보다 다른 성적 취향을 이해해주자는 시각이 점점 힘을 얻고 있다. 심지어 동성애에 완강히 반대하던 기독교측에서도 이제는 논쟁이 되는 양상이다. 다 똑같은 하나님의 자식인데 누가 누구를 비난할 수 있겠냐는 것. 이러한 변화는 동성애의 편견을 자연스럽게 깨준 다양한 대중문화 콘텐츠들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다양성이란 대중문화가 추구하는 지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전효성의 역사의식 부재, 무지가 폭력이 되는 이유

 

“저희는 개성을 존중하는 팀이거든요. 민주화시키지 않아요.” 시크릿의 전효성이 SBS 파워FM <최화정의 파워타임>에 출연해 무심코 던진 이 말은 일파만파의 후폭풍을 만들고 있다. 아마도 80년대 민주화를 일궈낸 세대들에게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조차 생소할 것이다. 개성을 얘기하다가 갑자기 ‘민주화’라니. 그것도 이 말 속에서 ‘민주화’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닌가.

 

전효성(사진출처:예스)

그도 그럴 것이 ‘민주화’라는 단어는 대표적인 극우사이트인 ‘일간베스트’에서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건 ‘선동되어 획일화됐다’는 의미란다. 왜 ‘민주화’라는 단어를 이런 식의 부정적 의미로 쓰는 걸까. 거기에는 이 극우사이트가 보여주는 ‘민주화’에 대한 다른 해석이 깔려 있다. 그들은 흔히들 많이 사용되는 ‘민주화’라는 표현을 비꼬고 있다. 그들에게 ‘민주화’란 특정 목적을 위해 행해지는 집단행동(심지어 폭력)을 풍자하는 단어다. 그럴 듯한 보수적 논리지만 이런 식의 해석은 결국 민주화 운동 자체를 폄훼하는 시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논란이 일파만파 커지자 시크릿 측에서는 “효성이 ‘민주화’의 뜻을 모르고 쓴 것이다”라고 해명했다. 전효성 역시 트위터를 통해 거듭 사과의 뜻을 전했다. ‘오늘 '최화정의 파워타임'에서의 저의 발언과 관련해서 올바르지 못한 표현을 한 점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정확한 뜻을 알지 못하고 적절하지 못한 단어를 사용한 점 반성하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사과의 말씀 전합니다.’

 

황당한 것은 전효성 스스로가 반성과 사과의 글을 올리고 있는 상황에서도 ‘일간베스트’에는 ‘전효성을 지키자’며 시크릿 음반 구매를 유도하는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 ‘표현의 자유’를 운운하는 이들도 있고 이것이 ‘마녀사냥’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즉 ‘일간베스트’에서는 이렇게 벌어지는 논란 자체를 그들이 쓰는 의미로 특정세력이 ‘민주화’시키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어떻게 똑같은 ‘민주화’라는 단어가 이렇게 완전히 다른 의미로 사용되게 되었을까. 이런 식의 해석은 ‘민주화’가 들어간 수많은 역사적 행위들을 폄훼시킬 수밖에 없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87년 민주화 운동이 그렇고, 그 민주화 운동으로 희생된 수많은 젊은이들과 시민들도 그렇다. 또 정반대로 광주 시민들을 군화발로 짓밟은 이들의 폭력은 전혀 다른 행위로 해석될 수 있다. 벌써부터 전효성의 발언으로 커진 여론에 대해 ‘광주의 피해의식’ 운운하는 댓글이 나오는 건 그래서다.

 

때마침 <무한도전>이 아이돌들을 모아 놓고 ‘역사특강’을 하면서 우리네 역사교육의 문제를 꼬집은 것은 이 시점에서 다시 바라보면 선견지명이었다고 여겨진다. 5월18일 방송 예정인 ‘역사특강’ 2편은 그래서 더 큰 의미로 다가온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시크릿 출연분량을 편집해달라는 네티즌들의 요구는 정당하지만 그것이 어찌 전효성만의 문제일까. 이번 논란은 젊은이들의 역사의식을 부재하게 만들어버린 우리네 역사교육의 한계를 드러내는 일이다.

 

전효성은 ‘몰랐다’고 하지만 그 무지가 타인에게는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민주화 과정에서 상처 입은 분들에게는 ‘기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보상이고 예의이기 때문이다. 물론 정치적 이념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역사 자체를 전면 부정하거나 곡해할 수 있는 언어의 다른 사용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마치 서로 다른 두 나라가 존재하는 듯한 느낌이다. 언어도 다르고 생각도 다른 사람들이 아닌가. 정치 싸움의 편 가르기가 만들어낸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무한도전>이 제기한 제대로 된 역사의식과 역사 교육은 그래서 더더욱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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