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서 법의학 드라마를 한다는 것은

"CSI 같은 드라마 보고 멋있겠다 싶어 깝치는 부류를 보면 구역질난다." '싸인'에서 법의학자인 윤지훈(박신양)은 고다경(김아중)에게 이렇게 소리친다. 이 대사에는 '싸인'이라는 드라마가 지향하는 바가 함축되어 있다. '싸인'은 'CSI'처럼 쿨하지도 않고, 또 쿨할 수도 없으며 그래서도 안된다. 왜? 그것이 다루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네 삶과 직결된 인권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싸인'은 'CSI'가 보여주는 놀라운 과학의 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죽은 자의 인권'이라 생각하는 드라마다.

물론 'CSI'가 인권을 다루지 않는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만큼 우리네 법의학의 역사에서 인권의 문제만큼 화두가 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민주화 시대에 빈번하게 불거져 나왔던 의문사들, 그리고 권력과 연계되어 묻혀버린 죽음들이 여전히 우리네 공기에 흩어져 있는 상황에, 화려하게 꾸며진 연구실과 고가의 장비들이 다 무슨 소용일까. 물론 그런 과학적인 지원은 중요한 것이지만, 적어도 우리에게 있어 법의학은 법의학자들의 도덕적인 판단이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

윤지훈과 이명한(전광렬)의 대결구도는 바로 그 점을 부각시킨다. 학교 분교를 재건축한 듯 보이는 초라한 남부지원의 윤지훈과, 'CSI'를 방불케 하는 화려한 장비와 시설로 무장한 이명한의 부검실은 확실한 대비를 만든다. 몇 백 억을 들여 만든 장비로 사체를 부검하고 사인을 분석하는 이명한은 그러나 차관의 방문에 더 신경을 쓰는 반면, UV조명장치가 없어 노래방 조명을 떼다가 사인을 분석하는 윤지훈은 온통 사체에만 집중한다.

인권의 사각지대처럼 여겨져 온 강압수사가 횡행하던 시절, '과학수사'는 모든 걸 투명하게 해줄 것처럼 여겨져 왔지만, 과연 과학은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었을까. 문제는 과학이 아니라 법의학의 기본정신인 인권을 다루는 법의학자들의 도덕성이다. 그래서 '싸인'은 'CSI'처럼 쿨하지 못하다. 보험금을 받기 위해 한 가장이 저지른 자살을 '과학적으로' 규명해내는 것보다, 그 가장이 왜 그런 자살까지 시도하면서 가족들을 챙기려 했는지에 더 주목한다. 윤지훈이 그 가족을 찾아가 안타까운 사정을 설명하는 장면은 'CSI'와는 다른 '싸인'이란 드라마의 정체성을 잘 말해준다.

혹자는 미드와 비교하며 왜 '싸인'이란 드라마가 쿨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관계에 집착하는지 의아해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우리네 사회 속에서 법의학이라는 소재를 다룰 때 가져야 되는 태도다. 과학보다 중요한 건 인간관계이고, 정의에 대한 신념이다. 그래서 윤지훈이 있는 남주지원의 인물들은 전문가들의 집단이라기보다는 가족 같다. 윤지훈의 부검결과를 번복하면서 옷을 벗고 떠난 전 국과수 원장 정병도(송재호)가 윤지훈의 아버지 같은 인상을 주는 건 그 때문이다.

또 윤지훈이라는 캐릭터가 어떤 천재적인 능력을 보유한 인물로서 그려지지 않는 점도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드라마의 메시지 속에서 윤지훈이라는 캐릭터는 능력보다 신념이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화려한 기술보다, 냉철한 판단력과 따뜻한 가슴을 지닌 인물이어야 한다. 그것이 설령 드라마라고 하더라도, 이 땅에서 법의학에 접근하는 최소한의 예의이기 때문이다.

'시크릿 가든'의 엔딩, 새드일까 해피일까

노트에 비가 올 날짜를 적고,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 모습을 그대도 똑같이 봤으면 좋겠다고 편지를 쓰는 김주원(현빈)의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을 시리게 만든다. 그는 뇌사 상태에 있는 길라임(하지원)과 영혼 체인지를 통해 그녀를 살리고 자신이 대신 죽으려 한다. 저 앞에서부터 밀려오는 검은 구름과 섬뜩하게 내리치는 번개. 그 속으로 길라임과 함께 차를 몰고 달려 들어가는 김주원. 비가 오기 직전, 하늘이 어둑해지고 쿠르릉 천둥소리가 울리는 그 전조만으로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처럼, '시크릿 가든'은 어떤 설렘과 두려움이 뒤섞인 '전조의 드라마'다.

사실 이 전조는 첫 회에서 길라임이 화려한 액션을 선보이는 스턴트우먼으로 등장했을 때부터 이미 예고된 것이다. 왜 하필 스턴트우먼인가. 이런 질문을 던져본 시청자라면 그 직업이 갖는 위험성에 앞으로 그녀에게 벌어질 사고의 전조를 예감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스꽝스럽게 시작된 영혼 체인지라는 상황 역시 후반부에 김주원이 빗속을 뚫고 뛰어드는 장면의 전조가 된다. 두 사람의 영혼이 서로 묶여버리는 이 상황이 주는 코믹한 스토리들은, 그 영혼 중 하나가 죽음 앞에 서게 되면서 순식간에 비극으로 돌변한다.

이 희비극을 넘나드는 사랑의 이야기 역시, 김주원이 길라임을 만난 뒤, 자꾸만 자기 주변을 서성대는 길라임의 잔상을 느끼는 장면에서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만질 수도, 안을 수도 없지만 거기 분명히 늘 존재하는 그녀. 그것은 축복이면서 비극적이다. 그리고 이건 사랑의 본질이다. 사랑은 기억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영원히 물질적인 세계에 남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후반부에 길라임 대신 뇌사에 빠졌던 김주원이 깨어난 후, 엘리베이터 사고 이후의 기억을 잃어버리는 건 이 드라마가 결국 가야됐던 숙명처럼 여겨진다. 그들은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한다. 분명 만났던 것 같은 기시감은 있지만, 마치 처음처럼 시작되는 사랑같이.

'시크릿 가든'의 엔딩에 쏠린 지대한 관심과 다양한 해석들은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 때문이지만, 또한 이 드라마가 '전조의 드라마'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언가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가 역력한데다, 그 벌어지는 사건이 늘 시청자들이 기대했던 어떤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것도 아니다. '한 발 다가가면 두 발 도망가는' 김주원과 길라임의 관계는 핑크빛으로 물들다가 핏빛으로 변하는 종잡을 수 없는 행보를 보인다. 그러니 이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스토리에 언뜻언뜻 보이는 전조는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엔딩은 그 어떤 것이든 될 수 있다.

아마도 이 사랑스런 커플의 해피엔딩을 요구하는 건 인지상정일 것이다. 하지만 통상적인 해피엔딩은 자칫 이 드라마가 구축해온 세계를 훼손할 수도 있다. 이 드라마는 신데렐라 이야기가 늘 그러하듯, 결혼에 골인하고는 "그래서 왕자와 신데렐라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그런 스토리를 그리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자와 신데렐라가 만나 완전한 소통에 이르는 길, 그래서 궁극의 행복에 도달하는 그 과정을 그리려 한 것이 '시크릿 가든'이다. 영혼 체인지는 바로 그 역지사지의 과정을 겪기 위해 동원된 방법이 아닌가.

만일 김주원이 길라임에게 몸을 내주고 대신 뇌사 상태가 되는 것으로 결말을 맺었다면 어땠을까. 그것은 과연 새드엔딩일까. '타자가 만나 완전한 하나가 되는 길'. '시크릿 가든'이 추구하는 이 주제의식을 두고 본다면, 김주원의 몸에 길라임의 영혼이 깃든 상태는 반드시 새드엔딩이라 치부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 길라임의 영혼이 차츰 세월을 겪으며 김주원의 몸과 완전히 동화되어갈 때, 그들은 비로소 완전한 하나가 될 테니까.

물론 이 드라마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시 김주원을 살려내고 청년 시절의 기억으로 되돌려 다시 길라임과의 사랑을 이어간다. 도대체 어떤 엔딩이 최선이 될까. 양자가 서로 만나 사랑하게 되었다거나 결혼에 골인했다는 식의 통상적인 엔딩이 과연 최선일까. 아니면 충격적일 수 있지만 오랜 여운을 남길 수 있는 새드앤딩 속에서 어떤 긍정을 찾아내는 게 최선일까. 이 '전조의 드라마'는 엔딩에 대한 어떤 전조를 미리 보여주었을까. 귀추가 주목되는 지점이다.

'드림하이'의 브레이크샷 배용준 그의 역할

"브레이크샷으로 공들이 흩어지는 순간 게임은 시작됩니다." '드림하이'는 이른바 '브레이크샷', 즉 포켓볼에서 처음 볼들을 흐트러 놓는 그 샷에 대한 배용준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배용준의 역할이 바로 브레이크샷이다. 그는 '드림하이'의 특별출연이지만, 드라마의 도입부를 세팅하고 방향성을 만들고 추진력을 부여하는 인물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인생에서 중요한 변화도 마찬가지죠. 브레이크샷처럼 어느 날 갑자기 닥치고는 가지런한 일상을 순식간에 흐트러 놓습니다. 그런 변화 앞에서 대부분의 청춘들은 당혹스러워하고 두려워합니다.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면 이 친구들에게 이 말을 해주고 싶네요. 게임이 시작되었으니 겁내지 말고 즐기라고요."

배용준은 2018년 그래미 뮤직어워드를 휩쓰는 초특급스타 K라는 존재를 미리 예견해놓은 후, 그 K가 될 인물들이 첫발을 내딛는 지점으로 들어간다. 기린예고 이사장으로 자리한 그는 직접 신입생을 오디션하면서 특채생 3명을 무대 위에 더 올려놓는다. 윤백희(은정), 제이슨(우영), 김필숙(아이유)이 먼저 오른 무대 위에 올려진 고혜미(수지), 송삼동(김수현), 진국(택연)이 그들이다. 마치 테이블 위에 올려진 당구공처럼 그들을 브레이크샷 하는 인물은 바로 배용준이다.

이것은 드라마 속 이야기면서 동시에 드라마 자체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드라마는 배용준이라는 배우의 아우라 속에서 탄생한다. 특별출연이라고는 하지만 그 존재 자체가 초반 이 드라마의 경쟁력을 만든 건 분명한 사실이다. 만일 배용준이 아닌 다른 그 누군가가 그 자리에서 드라마의 브레이크샷을 했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이 드라마는 아이돌들이 실험적으로 출연하는 그저 그런 청춘물로 여겨졌을 가능성이 크다.

송삼동 역할을 하는 김수현은 연기파지만, 아이돌로 구성된 다른 출연진들은 연기가 본업이 아니다. 택연과 은정은 그나마 드라마 경험이 있기 때문에 나은 편이지만 우영이나 아이유 그리고 수지는 여전히 연기가 불안하다. 초반 수지의 연기력 논란이 불거진 것은 그런 불안함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회가 진행될수록 이들의 연기는 캐릭터와 잘 어우러지고 있다. 바로 이 시간을 벌어준 인물 역시 배용준이다. 자칫 연기 불안으로 붕 떠버릴 수 있는 드라마를 전체적으로 꾹 눌러줘 어떤 안정감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그런 배용준이 초반 역할을 끝냈다. 교장으로 시범수(이병준)를 세워놓아 장차 K가 될 인물들의 험난한 통과의례를 만들어놓고, 한편으로는 강오혁(엄기준)에게 그의 어린 시절 노트를 전해주며 아이들을 부탁한다. 게다가 마치 조커처럼 언제든 새로운 국면으로 인도할 양진만(박진영)을 입시반 영어교사로 세워놓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렇게 됨으로써 시범수 교장에 의해 입시반으로 쫓겨갈 아이들은 강오혁과 양진만을 만나 다시 성장할 수 있는 틀이 완성되었다. 드라마 상에서 떠나는 배용준은 어찌 보면 드라마 속 인물이라기보다는 실제 인물처럼 느껴진다. 마치 세계적인 스타를 꿈꾸는 아이들에게 높은 꿈(드림 하이)을 꾸라고 전해주며 떠나가는 것처럼.

그의 브레이크샷으로 틀을 잡은 '드림하이'는 앞으로도 잘 굴러갈 수 있을까. 여전히 불안한게 사실이다. 무엇보다 캐릭터가 그렇다. 고혜미와 진국, 송삼동과 윤백희, 제이슨, 김필숙은 물론이지만 이들을 이끄는 강오혁의 캐릭터가 더 시급하다. 지금 같은 어리버리한 캐릭터로는 약할 수밖에 없다. 배용준의 빈 자리를 채워주기 위해서는 좀 더 카리스마를 갖출 필요가 있다. 이것은 드라마의 주 시청층인 중장년층의 시선을 붙잡아두기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다.

대본에 있어서도 너무 상식적인 설정들이 많은 건 피해야 할 것이다. 이 드라마는 성장과정과 음악이라는 두 축으로 굴러가지만, 그렇다고 아기자기한 사건전개가 허술해도 되는 건 아니다. '슈퍼스타K'를 보는 것 같은 박진감 넘치는 극적 구성이 필요하다. 코믹한 연출은 필요한 것이지만, 너무 과도해지면 극적 긴장감을 해칠 수도 있다. 어쨌든 배용준의 브레이크샷으로 게임은 시작됐다. 이제 이 게임을 어떻게 겁내지 않고 즐기는가에 그 성패가 달려있다.

시작은 창대했다. 아니 창대함 그 이상이었다. 화려한 캐스팅은 물론이고 이게 TV 화면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현란한 영상들까지. 당연 드라마 첫 방에 대한 기대감은 컸다. 하지만 첫 방을 보고난 마음은 어딘지 허전하다. 아니나 다를까 첫 회에서 20% 가까운 시청률을 올리며 대박 드라마를 예고한 작품들은 중반을 지나면서 시청률이 뚝뚝 떨어졌다. 이른바 용두사미 드라마들이 걷는 운명이다. 왜 이런 현상이 최근 들어 자꾸 창궐하는 것일까.

'아이리스'의 스핀오프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아테나'에 대한 기대감은 클 수밖에 없었다. 드라마로서는 보기 힘든 완성도 높은 영상연출과 무엇보다 정우성, 차승원, 수애 같은, 영화가 왠지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배우들의 대거 출연. 게다가 태원엔터테인먼트의 작품이라는 것에 대한 신뢰감이 높았다. 게다가 예고편에 잠깐 등장한 수애의 플라잉 니킥 장면은 시청자들의 시선을 끌어 모았다. 우아함의 대명사처럼 여겨져 온 수애의 변신. 전작 '아이리스'의 김태희에서 어떤 아쉬움을 가졌던 시청자라면 수애의 그 장면 하나가 어쩌면 이 작품이 전작을 넘어설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을 하게 했을 지도 모른다.

폭발적인 액션 신들을 연거푸 선보인 첫 방은 2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기대가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4회까지 이 기대는 그대로 이어졌다. 007을 오마주한 정우성의 이태리 액션 장면과 잔인하지만 냉혹하게 적을 살해하는 수애의 동작 하나하나가 예술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부터였다. 볼거리는 충분히 충족되었는데, 스토리는 좀체 보이질 않았다. 납치와 구출이라는 단순한 스토리가 반복적으로 이어졌고, 그러자 '아테나'의 즐거운 볼거리는 이미 예측 가능해진 스토리 때문에 힘을 잃어갔다. 무엇보다 '아이리스'에서 이병헌이 김태희와 사탕 키스를 하며 만들어낸 강력한 멜로를 '아테나'에서는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이것은 드라마의 주 시청층인 중장년 여성층의 흥미를 잃게 만들었다. 시청률은 서서히 빠지고 있는 중이다. 물론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반등할 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애초에 기대했던 만큼의 몰입은 바라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런 상황을 예고라도 하듯 보여준 작품이 '도망자'다. '도망자'에 대한 기대감을 증폭시켜놓은 건, '추노'라는 명작을 만들어냈던 곽정환 감독과 천성일 작가의 후속작이라는 후광 때문이었다. 슬로우 모션으로 달리고 뛰고 넘어지는 비와 이나영의 액션으로 이루어진 예고편은 저 '추노'에서 장 혁이 테이블을 손으로 짚고 휙 날아올라 발차기를 하는 그 장면의 기대감을 재현했다. "이거 또 대박이구나!" 했다. 하지만 첫 방을 본 후의 느낌은 "이거 겉멋이 들어도 잔뜩 들었다"는 느낌뿐이었다. 얼만큼의 투자를 받았는지, 일본과 태국과 한국을 휙휙 순간이동하며 주인공들은 그 이색적인 배경 위에서 달리기를 반복했다. 첫 회는 아무래도 시선을 잡아끌어야 하니 그럴 수밖에 없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이 배경을 바꿔가며 달리는 시퀀스가 9회까지 지속되면서 시청자들의 반응은 싸늘해졌다. 아무리 볼거리라도 맥락을 찾기 어려운 스토리 속에서 계속 달리는 장면의 반복을 계속 지켜볼 시청자는 없었다. 결국 시청률은 반 토막이 났다. 9회부터 비로소 인물들이 국내로 들어오면서 스토리를 찾기 시작했지만 이미 늦었다. '도망자'는 완벽한 용두사미를 그려내며 시청자들로부터 도망쳤다.

한국 최초의 본격 정치드라마에 그것도 여성 대통령을 그리겠다고 야심차게 시작했던 '대물' 역시 마찬가지의 결과를 만들었다. 고현정이 그 대통령 역할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대를 키웠던 드라마는 그러나 작가와 PD가 교체되는 등의 내홍을 겪은 후, 스토리가 지지부진해지면서 서서히 하락하기 시작했다. 서혜림이라는 캐릭터의 연설은 처음에는 깊은 인상을 남겼지만 차츰 동어반복을 하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이 작품 역시 '도망자'와 마찬가지로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첫 방에서 최고 시청률을 찍은 후, 서서히 내리막을 걸었다.

안타까운 것은 최근 시작한 '드림하이'에서도 이런 징후가 엿보인다는 점이다. 이 작품은 배용준이 출연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것도 지금은 제2의 한류가 아이돌로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제1의 한류를 이끌었던 배용준이 아이돌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에 출연한다는 것 자체가 그 야심찬 기획을 엿볼 수 있었다. 여기에 실제 아이돌인 택연, 우영, 은정, 수지, 아이유가 박진영과 함께 등장한다는 것만으로도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드라마 예고편에서 택연이 자동차를 짚고 뛰어넘으면서 기대감을 높여놓은 장면이 드라마 상으로는 그다지 드라마틱한 설정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 실망감도 클 수밖에 없었다. 연출이 스토리가 가진 극적 상황과 맞닿지 않고, 그저 멋진 장면으로만 끝날 때, 그것은 겉멋에 그칠 수 있다. 여전히 배용준에 대한 기대감이 크지만, 아이돌들이 설익은 연기는 불안하다. 연기력을 보완해주는 것이 캐릭터여야 하는데, '드림하이'가 그럴 만큼의 스토리를 내장하고 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첫 방 시청률은 기대 이하로 10%대. 보통 드라마라면 성공적이라고 하겠지만 이건 배용준이 얼굴을 내민 드라마다.

결국 방영 전까지만 해도 한껏 기대를 하게 했던 드라마가 막상 방영되면서 서서히 실망으로 바뀌게 되는 이유는 대본 문제다. 그저 뒷심이 부족하다는 식의 그런 얘기가 아니다. 애초부터 기획은 창대했지만 충분히 매력적인 대본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기획은 연출도 가져올 수 있고, 연기도 가져올 수 있지만 대본은 가져올 수 없다. 대본은 말 그대로 작가에 의해 창조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역량 있는 작가에게 충분한 투자(시간적이든 물적이든)가 이뤄진 연후에나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방영 전이나 첫 방에서 연출이나 연기력으로 어느 정도 시선을 잡아끈다고 해도, 대본의 부재로 결국 고꾸라지는 상황을 맞게 되는 것이다. 포장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 안에 내용물이 부실하면 이제 시청자들은 외면한다. 그만큼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져 있다.

한류 초반에 우리는 이미 이 상황을 충분히 겪었다. 몇몇 연기자가 출연한다는 전제조건만으로도 해외의 투자가 될 수 있는 상황 속에서 한류의 거품은 만들어졌다. 많이 걷어내졌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이 거품은 남아있다. 무엇보다 작가에 대한 투자와 시스템이 절실하다. 그것이 없다면 나올 수 있는 건 겉멋만 가득한 드라마들뿐이다. 물론 그것으로 세계 시장은 어불성설이다.

실시간 드라마? 100% 사전제작? 무엇이 해답일까
흔히들 대본의 문제에서 가장 시급한 것으로, 사전제작이 되지 않고 실시간으로 만들어지는 쪽대본의 문제를 든다. 그러면서 늘 고개를 드는 것이 100% 사전제작 드라마다. 하지만 우리네 드라마 시장 상황에서 100% 사전제작으로 성공한 드라마는 전혀 없다. '로드넘버원'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미 다 제작되어 있는 상황에서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시청자들의 반응을 고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해외에서는 우리네 드라마의 실시간적인 제작이 경쟁력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것이 쌍방향적인 드라마를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시간 제작은 결국 완성도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안적인 것이 반 정도를 사전제작 하는 형태지만 이것도 정답은 될 수 없다. 문제는 어느 정도 제작되었는가가 아니라 이것을 충분히 감당해낼 수 있는 작가 시스템이 아닐까. 혼자, 혹은 한두 명이 몇 십부작에 이르는 드라마를 온전히 감당한다는 것은 작가에게도 무리지만, 작품에도 무리가 될 것이다.
(이 글은 시사저널(http://www.sisapress.com/)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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