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 감독 영화에 길이 자주 등장하는 건, 그가 만드는 영화가 인생을 담고, 그 인생의 비의를 담지한 시대를 포착해내기 때문이다. 그러니 길 위의 풍경은 임권택 영화가 가진 영상미학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먼저 길 위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길 자체가 내포한 표정이다. 길은 장관을 이루다가도 애조 띤 정서로 감아 돌고 때론 바다를 만나 반짝거리다가 인간에 의해 매몰되기도 한다. 정일성 촬영감독의 카메라는 구성진 소리처럼 구불구불 논길 사이로 이어진 길 풍경으로부터 우리네 구비진 인생살이의 고단함까지 잡아낸다.

그리고 그 풍경을 자세히 보면 길 위를 걷는 사람이 보인다. ‘천년학’에서는 소리꾼의 비루한 삶과 아버지에 의해 누이가 되어버린 사랑하는 여인 송화(오정해)로부터 도망친 동호(조재현)가 그 길 위를 전전하며 살아간다. 한편 눈이 멀어버린 송화는 그 길 위에서 소리로 연명한다. 동호의 길과 송화의 길은 자꾸만 엇갈린다. 동호는 자꾸만 송화의 길을 따라가고픈 욕구에 사로잡히고 송화는 마치 표식처럼 소리를 길 위에 남겨놓는다.

이러자 송화의 길을 좇는 동호의 길은 송화가 만들어놓은 소리 길을 좇는 길이 된다. 따라서 길 위에서 우리가 다시 만나는 건 저 ‘서편제’의 길을 따라 듣게된 우리의 소리다. 그런데 그 소리에는 바로 우리 민족의 한과 정서가 오랜 세월 깃들어 있다. 인물과 길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소리 길이 되면서 영화는 좀더 시대적 아픔을 잡아내며 시간 길을 날줄을 끌어들인다.

길 자체가 가진 표정에 그 길 위를 걷는 애틋한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주고받는 소리길에 시간의 표정이 곁들여지자 ‘천년학’은 더 이상 억지로 이야기를 끌고 가지도 영상의 잔재주를 피우지 않아도 그 자체로 작품이 된다. 임권택 감독만이 가능했을 이 담담한 시선은 바로 인생과 삶, 영화를 모두 집약하면서도 늘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길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영화는 시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과거와 현재를 교차시킨다. 이 단순해 보이는 플래시백은 그러나 과거의 길과 지금의 길, 그리고 그 위에 살아가는 인물들을 보여주면서 안타까움을 더해간다. 그 안타까움은 동호가 송화에게 갖는 그리움만큼의 거리에서 비롯된다. 그 그리움은 성장한 현재의 동호가 선학동 선술집에 도착해 처음 상상하던 어린 시절의 송화만큼 먼 거리에서부터 시작해 점점 가까워지면서 만남의 기대감을 높인다. 선술집에서 펼쳐놓은 이야기 길을 따라 동호는 여러 차례 송화와 엇갈리지만 그들은 결국 실재 존재하는 길 위에서는 만나지 못한다.

매몰되어 사라져버린 강처럼, 예전 날아들었다는 학도 사라진 그 선술집 선학동으로 이야기는 먼 거리를 돌아 제자리로 돌아온다. 결국 만나지 못한 동호와 송화는 그러나 소리로 길을 낸다. 그 소리 길 위로 사라졌던 강도 살아나고 사라진 학들도 날아든다. 학들은 동호와 송화의 못다 나눈 정담을 나누듯 소리 길 위에서 춤을 추며 강 위를 날아다닌다. 길은 소리 길을 따라서 영원이 된다. ‘천년학’은 그렇게 임권택의 100번째 길 위에서 영원으로 만들어진다.

인간에 대한 예의, ‘고맙습니다’

드라마를 하나의 캐릭터로 볼 때, ‘고맙습니다’는 얼짱도 몸짱도 아닌 훈남이다. 그런 조어가 가능하다면 이 드라마는 ‘훈작’이라 할만하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엉뚱한 설정에 웃음이 나다가도 그 웃음 끝에 갑자기 울컥하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느껴지는 것은 ‘따뜻함’. 어쩌면 이다지도 훈훈한 사람들, 훈훈한 이야기로 가득할까.

미안하고 사랑한(미안하다 사랑한다) 후에 고마움(고맙습니다)을 들고 온 이경희라는 작가는 아마도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말하고 싶었나 보다. 그 소망이 너무나 작기에 아름답고 감동적인 ‘고맙습니다’라는 정성어린 밥상은 그래서인지 다 먹고 나면 배의 포만감보다 가슴부터 따뜻하게 채워주는 구석이 있다. 그것은 예의 없는 세상 속에서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야했던 시청자들이 처음으로 예의로서 인간대접을 받았을 때 느껴지는 가슴 먹먹한 기분이다.

죽음 앞에 선 그와 그녀, 그녀의 딸
이야기는 세속적인 도시를 떠나 심지어는 상상 속의 이상향처럼 보여지는 ‘푸른도’에서 펼쳐진다. 잘못된 수혈로 에이즈에 감염된 아이, 봄(서신애)이 있고, 아버지를 여의고 치매를 앓는 할아버지를 모시면서 미혼모로 그 아이 봄이와 함께 살아가는 영신(공효진)이 있다. 그의 수술대 위에서 저 세상으로 사랑하는 애인 차지민(최강희)을 보낸 민기서(장혁)가 자포자기한 채 그 집으로 하숙을 들어온다. 잘못된 수혈을 했던 장본인인 그녀의 마지막 부탁, 봄이와 영신에 대한 참회를 대신 전하기 위해서다.

구도를 보면 전형적인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하지만 관계는 죽음을 중심으로 얽혀있어 좀더 인생에 대한 관조가 가능해진다. 자신의 손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는 사실에 민기서는 죽음에 민감하다. 병원에서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로 병자보다는 병을 보며 살았던 민기서가 푸른도에 와서 자신과는 하등 상관없는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려 애쓰는 것은 바로 이런 캐릭터 때문이다. 여기에 푸른도라는 정의 공간에서 만들어진 의사와 환자가 아닌 인간 대 인간의 관계는 더욱 ‘그들의 죽음’을 남 일이 아닌 내 일로 받아들이게 한다.

민기서가 죽음에 민감한, 그래서 어떻게든 살려보려 애쓰는 캐릭터라면, 영신은 죽음을 많이 겪은, 그래서 여전히 아프지만 어느 정도는 고통을 감내하는 캐릭터다. 어느 날 갑자기 죽음으로 돌아온 아버지, 치매라는 기억의 죽음을 달고 살아가는 할아버지, 그리고 핏속에 죽음의 냄새를 품고 살아가는 딸. 그녀는 죽음을 회피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끌어안는다. 이 과정에서 민기서와 영신의 사랑은 좀더 폭넓어진다. 거기에는 죽음을 안고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태도가 들어있다. ‘고맙습니다’는 누구나 죽음을 안고 살아가며 그래서 사랑하게 되는(사랑할 수밖에 없는) 인간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는 드라마다.

숨겨진 진심이 가슴을 울린다
이 드라마의 힘은 ‘진심’에 있다. 영신과 그 가족, 민기서, 석현(신성록) 등 주요인물은 물론 심지어는 보건소 의사 오종수(류승수)에 이르기까지 드라마 캐릭터들은 힘겨운 삶 속에서 ‘괜찮다’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살아간다. 때론 서로 다투고 때론 미워하면서 그래도 하루 하루를 버텨내는 푸른도 사람들의 모습은 다름 아닌 우리의 얼굴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마치 우리가 퇴근 후 걸친 술 한 잔에 속내를 드러내듯, 아주 가끔씩 진심을 드러낸다. 짧은 순간의 진심은 오래도록 ‘괜찮은 얼굴로 살아왔던’ 당사자의 삶을 반추하게 만든다.

영신은 꿈속이나 술에 취했을 때 진심을 보이며 그것은 민기서에게 번번이 목격된다. 민기서는 잠을 자면서 잠꼬대처럼 갑자기 엉엉 우는 그녀와, 술 취해 민기서를 아버지라 부르며 오열하는 그녀를 목격한다. 민기서는 바로 시청자의 시선이 된다. 그가 겪었을 먹먹한 감정은 고스란히 시청자에게 전달된다. 그러니 민기서라는 이방인이 푸른도라는 섬에 들어가 겪는 일련의 변화과정은 또한 시청자들이 드라마를 보며 겪는 변화과정과 일치된다. 그들의 진심을 목격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생각하게 된다. 타인으로 치부하며 생존경쟁 속에서만 살아가다 잊게 되어버린 인간에 대한 예의 같은 것을 말이다.

훈작을 만들어 가는 훈남들
‘고맙습니다’라는 훈작에는 그래서 훈남들이 출연한다. 공효진이란 배우가 뿜어내는 가공하지 않은 듯한 풋풋한 연기는 훈훈한 인간애를 전하는데 커다란 힘으로 작용한다. 화장기도 없고 화려한 옷도 없으며 아줌마들의 일상과 피곤한 하루에 찌든 얼굴은 여타의 자극적인 드라마에서는 비루하게 취급될 수 있었겠지만, ‘고맙습니다’에 와서는 반짝반짝 빛나는 살아있는 인간으로 빛을 발한다.

장혁은 이 드라마에서는 오히려 단점이 될 수 있는 ‘잘 생긴 얼굴’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이것이 얼굴이 아닌 연기력으로 정면승부 한 그가 얻어낸 최대의 수확이다. 신성록은 프로정신이 투철한 현대인, 그러나 가슴 속 깊은 곳에 최후의 보루처럼 남겨진 순수를 지닌 캐릭터를 섬세한 연기로 소화해낸다. 무엇보다 대단한 건 봄이 역할을 하는 서신애와 치매노인을 리얼하게 보여주는 신구의 연기다. 그들의 목소리는 곁가지처럼 작게 또는 지나치듯 흘러나오지만 그 여운은 오래도록 남는다.

각박해진 세상 속에서 그 세상을 고스란히 반영한다는 드라마가 각박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살기 힘들어 죽겠는데 무슨 놈의 인간이고 예의냐’고 항변하듯 지금의 드라마들은 인간애보다는 감각적인 사랑을, 메시지보다는 자극을, 따뜻함보다는 쿨함을, 그리고 감동보다는 재미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이 시기에 ‘고맙습니다’에 대한 시청자들의 애정은 ‘그래도 진심은 통한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준다. 얼짱이니 몸짱이니 하는 외모 중심적인 생각에서 그것보다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표방한 훈남이 등장했듯이, ‘고맙습니다’는 폼생폼사보다는 진심을 담은 감동을 전해줄 요즘 보기 드문 ‘훈작’이다.

‘히트’의 멜로 vs ‘내 남자의 여자’의 불륜

월화 드라마 대전에 새롭게 등장한 김수현 작가의 ‘내 남자의 여자’ 바람이 거세다. ‘주몽’의 후속으로 부동의 1위 자리를 내주지 않을 것으로만 생각됐던 ‘히트’가 계속 부진의 늪을 헤매고 있는 사이, 단 4회만에 ‘내 남자의 여자’가 파죽지세로 거의 ‘히트’를 따라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드라마는 단순한 비교대상이 되지 않는다. 단지 월화에 방영된다는 점에서 그 시청률이 비교될 뿐이다. 그런데 이 ‘월화의 경쟁’은 지금 우리나라 드라마가 겪고 있는 성장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가장 고전적인 드라마의 단골 소재인 ‘불륜’은 여전히 되지만, 변화의 바람 속에서 시도되었으나 지나치게 ‘멜로’가 강조된 전문직 드라마, 범죄수사물의 경우는 특히 더 안 된다는 것이다.

히트의 디테일 부족, 미드 때문이 아니다
물론 ‘외과의사 봉달희’ 역시 멜로가 있는 전문직 드라마로서 성공한 드라마지만 ‘히트’는 그것과는 양상이 다르다. 먼저 다른 것은 디테일이다. ‘외과의사 봉달희’ 역시 설정에서는 현실과 동떨어진 극적 상황이 전개되었지만 그래도 그 병원 장면이나 스토리에 있어서는 리얼한 디테일이 살아 있었다. 하지만 ‘히트’의 경우는 스토리 자체가 그다지 전문적이지 않다.

관습적인 액션들이 몇 번 오갈 뿐, ‘전문직 드라마’라면 보여줘야 할 시청자의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전문적인 디테일’이 부족하다. 처음 드라마가 시작했을 때는 이 디테일 부족이 단지 미국드라마에 익숙한 시청자들이 가진 선입견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8회가 끝난 지금 이 문제는 단순한 비교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홍콩 시퀀스에서 굳이 차수경(고현정)과 김재윤(하정우)을 크루즈에 태워 멜로 라인을 만들어야 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남는다. 그렇게 긴박한 상황에 멜로의 등장은 드라마 흐름의 맥을 끊어버리는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여기에는 홍콩해외로케로 올라간 시청자들의 기대심리가 멜로로 인해 급격한 실망감으로 이어졌다는 점도 한몫을 차지한다. ‘도대체 홍콩에 가서 뭘 했다는 말인가’하는 비판이 나오는 건 당연하다.

멜로만 있는 전문직 드라마가 문제
크루즈에서 내려서 이어지는 사건의 해결(장형사를 구하는 것)에 있어서 너무나 손쉽게 처리한 점도 이 드라마가 과연 전문직 드라마를 표방할 수 있는가 하는 의구심을 만드는 요인이다. 찰리박(김병세)을 납치해서 장형사(최일하)와 맞바꾸는 장면은 그간 계속 어렵게 진행되어온 상황의 긴박감을 김빠지게 만들었다. 그 맥 빠진 자리를 채우는 건 장형사와 그 딸의 눈물겨운 상봉이다. 그러니 ‘히트’에서 무언가 긴박하고, 호기심과 아드레날린을 자극하는 전문직 드라마를 기대했던 시청자들의 실망은 시청률 부진으로 이어진다.

‘히트’의 시청자게시판은 이 ‘멜로’에 대한 공방이 한창이다. ‘히트의 멜로’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 애초부터 기획의도에 이 드라마는 ‘사랑이야기’라고 밝혀진 점을 들어 여타의 미국드라마와 비교하지 말자는 의견들이 있다. 그러나 기획의도를 보면 또한 ‘이 드라마는 전문직 드라마’라는 문구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멜로 있는 전문직 드라마’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멜로만 있는 전문직 드라마’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김수현의 불륜, 다른 건 자극의 강도일 뿐
반면 이 시간대에 새롭게 등장한 김수현의 ‘내 남자의 여자’는 그 자극적인 설정과 장면 연출로 여전히 ‘불륜 코드’는 된다는 걸 보여준다. 여기에 ‘김수현의 불륜드라마’는 무언가 다를 거라는 기대감이 작용했다. 그런데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있다. 김수현의 불륜드라마가 다르다면 도대체 뭐가 다르다는 말인가.

처음 김수현이라는 ‘언어의 마술사’가 하는 불륜드라마라고 해서 그것은 ‘불륜을 통한 인간욕망의 탐구’ 같은 깊이를 보여줄 것으로 생각됐다. 하지만 현 4회까지를 보면 그런 것은 좀체 눈에 띄지 않는다. 깊이는 없고 겉도는 자극만 가득하다. 저 액션을 표방한 ‘히트’보다도 더 액션(?)같은 주먹다짐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김희애의 소름끼치는 연기가 없었다면 이 드라마는 ‘사랑과 전쟁’과 같은 불륜드라마와 그닥 다를 것이 없다.

김수현이라서 달랐던 것은 자극의 강도였지 깊이가 아니었다. 의도적으로 화영 역의 김희애는 처음부터 노출신이 과도하게 등장했고, 홍준표(김상중)와의 애정행각은 ‘이러다 베드신 나오겠다’는 기대반 우려반의 시청자들의 반응을 끌어냈다. 욕망은 육체적인 것과 함께 정신적인 것을 동시에 포함하는데, 홍준표와 화영의 불륜에서는 정신적인 부분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이것은 욕망이 아니라 욕정이다.

욕망은 보이지 않고 욕정만 보인다
물론 적당한 선에서 화영과 홍준표의 불타는 욕정의 이유가 밝혀지면서 욕망으로의 전이를 꾀할 테지만 그것은 자극 끝에 달아놓는 변명이 될 수도 있다. 문제는 생활도 없고 삶도 없고 욕정만 가득한 이 ‘부족할 것 없는 사람들의 애정행각’을 왜 시청자들이 봐야하는가 하는 데 있다. 그 이유는 단 하나다. 자극적인 설정과 욕설과 주먹다짐이 난무하는, 액션보다 더 강력한 액션에 대한 호기심이다.

궁금한 것은 김수현이라는 부족할 것 없는 ‘언어의 마술사’가 왜 그 뛰어난 재능을 이렇게 쓰고 있느냐는 것이다. 불륜에도 격이 있다. 저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같은 영화에서 보여주는 불륜 속에는 육체적인 욕망을 뛰어넘는 그 무엇(셀레임 같은)이 있다. 불륜, 이룰 수 없는 욕망에 대한 자기성찰 없이 끝없는 파국을 통한 자극으로만 치닫는다면 이 드라마의 말미에서 ‘얻은 것은 시청률이요, 잃은 것은 작가다’라는 말이 나올 지도 모른다.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
월화 드라마 경쟁에서 보여지는 ‘멜로는 안되도 불륜은 되는’ 상황은 뒤집어 생각해보면 두 드라마의 완성도가 절반에만 미친다는 걸 말해준다. ‘히트’가 전문직 드라마를 성공시키지 못하고 멜로 드라마로 가고 있는 반면, ‘내 남자의 여자’는 불륜을 통한 인간욕망에 대한 탐구를 하지 못하고 그저 자극적인 불륜드라마로 가고 있다. 이 두 드라마가 이렇게 된 데는 아이러니하게도 모두 시청률 때문이다. 이것이 자칫 매니아 드라마가 우려되는 전문직 드라마에 적절한 멜로를 섞은 ‘히트’가 오히려 고전하는 이유이며, 불륜드라마로 시청률에 불을 붙인 ‘내 남자의 여자’가 자극적인 설정으로만 치닫는 이유이다. ‘멜로도 되고, 불륜도 되는’ 완성도 높은 드라마는 나오기 힘든 걸까.

가족, 우리 문화의 경쟁력?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이 중국시장에서 반응을 보인 데는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민감해진 중국영화시장의 분위기에 힘입은 바 크지만, 그 바탕에는 ‘괴물’ 자체가 갖고 있는 아시아적인 미덕이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가족’이다. 영화가 개봉되고 중국언론들은 이 영화의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와의) 차별점으로 가족을 들었다.

‘괴물’의 중국 성공, ‘가족’ 때문?
유력일간지 징화스바오는 ‘괴물’에 대해 “기존의 멜로물과 폭력물 위주에서 탈피한 한국영화”라며 “한 평범한 소녀를 괴물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평범한 가족들이 사생결단”을 “눈물 없이 보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관영 베이징르바오는 이 영화가 “으시시한 공포영화나 화려한 화면전시에 머무르지 않고 보통사람들의 단결력과 용기를 보여주며 화합의 메시지를 전해준다”고 평가했다. 사회주의 국가가 갖는 집단적 가치에, ‘가족’이라는 가치가 덧붙여졌고, 거기에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라는 확실한 경쟁자를 내세우자 반응은 더 폭발적으로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이 바로 이 ‘가족’이라는 소재이다. 우리이게 이 소재는 어딘지 구닥다리처럼 느껴지지만 흥행의 요소가 되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즉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쿨한 전개를 파고 들어오는 가족이란 이름의 끈끈함을 종종 비아냥대면서도 시선을 떼지 못하는 소재인 것이다. 헐리우드 영화들이 가족보다는 개인에 더 초점이 맞춰지는 반면,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권 영화들은 상대적으로 가족에 더 많은 무게중심이 맞춰져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 가족이라는 그림자는 ‘가족의 탄생’, ‘좋지아니한가’ 같은 가족을 표방한 영화는 물론이고 우리영화 속 어디에서든 어른거린다.

조폭 짓 왜 하냐고? 가족 때문에
최근 개봉한 송강호 주연의 ‘우아한 세계’는 이제는 하나의 우리네 장르가 되어가고 있는 조폭영화에 ‘가족’을 끌어들였다. 이것은 과거 ‘비열한 거리’에서 가족들이 살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하기 위해 철거촌 깡패짓을 하는 병두(조인성)의 연장선상에 있다. ‘우아한 세계’의 메인 카피, ‘조직에 몸담은 가장의 꿈’에서 조직은 중의적인 의미로 쓰인다. 즉 조폭 세계의 조직이란 뜻도 있지만 우리 현실사회에서 누구나 몸담게 되는 조직이란 의미도 갖고 있다. 따라서 이 영화는 단순히 조폭의 이야기가 아니다. 조폭은 하나의 상징이 되며 조폭에 ‘가장’이 붙게되자 영화 속 가장인 송강호의 삶은 더 독해진다. 그가 피가 튀고 죽음의 문턱을 왔다갔다하는 ‘조직생활(사회생활)’에 몸담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가족들 때문이다.

송강호가 가족들의 ‘우아한 세계’를 지키기 위해 자신은 정작 ‘우아하지 않은 세계’ 속에 남아 있을 때,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스크린을 장식하고 있다. ‘파란 자전거’에서는 손이 불편한 아들에게 희망을 넣어주는 아버지로, ‘눈부신 날에’는 딸을 만나 잃었던 가족애를 찾아가는 아버지로, ‘날아라 허동구’에서는 IQ 60인 아들을 향한 부성애의 모습으로 찾아온다. 그들은 모두 어려운 선택을 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한 가지 공통된 이유가 있다. 바로 가족이기 때문이다.

형사 짓보다 가족이 우선이다
‘안방극장’이라 불리는 만큼, 드라마에 나타나는 가족의 모습은 좀더 직접적이다. 주간시청률 집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그 상위를 차지하고 있는 드라마는 대부분이 가족드라마이다. 거기에는 ‘하늘만큼 땅만큼’, ‘행복한 여자’, ‘나쁜여자 착한여자’, ‘사랑도 미움도’, ‘아줌마가 간다’등등 문제가 되는 불륜과 논란 드라마도 끼어 있지만 그것은 역시 가족이 중심테마이다.

하지만 이런 경향은 단지 가족드라마에서만 나타나는 건 아니다. 최근 들어 새롭게 시도되고 있는 전문직드라마에서도 그러한 경향이 나타난다. ‘하얀거탑’이 병원 내에서 숨가쁘게 벌어지는 정치드라마를 그리면서도 장준혁(김명민)이 어머니를 찾아가는 장면을 빼놓지 않는 것은 가족이 갖는 장치적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외과의사 봉달희’에서도 병원 내의 생사를 오가는 전문적 내용들이 다뤄지면서도, 기본적으로 그 속에서 가족의 이야기(예를 들면 이건욱(김민준)과 조문경(오윤아)의 에피소드 같은)를 끄집어낸다.

최근 시작한 한국형 범죄수사드라마 ‘히트’에서도 이런 경향은 나타난다. 수사경력 25년의 최고참 베테랑 형사이지만 만년 경사인 장용하(최일화)의 에피소드가 그렇다. 강력범죄 수사를 전담하는 ‘히트’의 멤버이면서 만사 제쳐두고 가출한 딸을 찾아 홍콩으로 가는 그는 우리 드라마에서 가족이 갖는 힘을 새삼 느끼게 한다. 이것은 외국드라마라면 상상하기 힘든 설정이 아닐 수 없다. 범인 잡는 형사이야기에서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는 딸과 그 딸을 보호하려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되자 드라마는 좀더 끈끈하고 절절해진다. 자극 중심의 아드레날린 드라마에 감성적 드라마가 뒤섞여지게 되는 것이다.

‘가족’이 우리 식의 경쟁력이 되려면
홍콩 느와르의 전성시대를 예고했던 ‘영웅본색’은 헐리우드 영화가 갖지 못한 피의 끈끈함을 다루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의리’이다. 소마(주윤발)가 자호(적룡)와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는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폭력과 피로 아드레날린을 자극하기만 하던 헐리우드 영화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갑작스레 던져진 감성의 자극이었다. 그 감성은 그러나 감성에만 머물지 않는다. 인물들 사이를 좀더 끈끈한 의리로 묶어놓자, 거기서 벌어지는 드라마에는 더 강력한 아드레날린이 가능해진다. 이것은 타인의 죽음이 갖는 의미보다 지인의 죽음이 갖는 의미가 더 강렬해지는 탓이다.

우리에게 ‘가족’은 그런 면에서 우리 식의 경쟁력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개인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서구가 뒤늦게 인정하게 된 가치이다. 점점 글로벌화되는 미디어 시장 속에서 세계는 국경 없는 전쟁에 돌입해있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중국과 우리나라 그리고 일본이 하나의 아시아권으로서의 영화적 경쟁력을 키워나간다고 가정할 때,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우리 식의 경쟁력이 되면서도 보편성을 띄는 가치이다. ‘의리’니 ‘가족’이니 하는 가치가 보편성을 갖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오랜 세월 똑같은 동양적 가치체계(예를 들면 유교나 불교 같은)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경쟁력이 되기 위해서는 선결되어야 할 조건이 있다. 과거의 구질구질함으로 대변되는 구태의연한 방식으로서 ‘가족’을 활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달라진 세상에 달라진 ‘가족’에 대한 새로운 가치부여의 시도가 끊임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 소재는 자칫 과거적 가치로의 회귀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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