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꿈꾸는 ‘아들’

지금 영화 속에서 아버지들은 고군분투 중이다. 아버지들은 ‘파란 자전거’에서는 손이 불편한 아들에게 희망을 넣어주고, ‘눈부신 날에’에서는 딸을 만나 잃었던 가족애를 찾아가며, ‘날아라 허동구’에서는 IQ 60인 아들을 향한 뜨거운 부성애의 모습을, 그리고 ‘우아한 세계’에서는 가족들의 우아한 세계를 지켜내기 위해 자신은 전혀 우아하지 않은 진창에서 뒹굴어야 하는 상황을 보여준다.

가부장적 가치관의 퇴조, 여성성이 중요해진 사회, 경제적으로 더 힘겨운 상황에 몰린 남성들, 그리고 무엇보다 권위 있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지만 정작 자신은 아무런 권위도 갖지 못하게 된 이 시대의 아버지. 최근 들어 이른바 ‘아버지 영화’라고 불릴만한 아버지에 대한 영화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는 것은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문화가 포착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들 영화들 속에서 아버지는 과거 어머니가 그러했던 것처럼 희생하는 존재다. 모성애의 빈 자리는 이제 부성애가 차지한다.

아버지 영화가 가진 미덕과 한계
물론 어떤 영화는 아버지를 내세운 신파의 구조를 따라가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들 ‘아버지 영화’들의 미덕은 그간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비껴나 있던 아버지들이 그 중심에 서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그것은 사라진 모성애의 뒤를 채워줄 부성애로서 아버지가 등장했지만 이것이 자칫 과거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신(新)가족중심주의’로 흐르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점이다.

‘가족의 탄생’과 ‘좋지 아니한 가(家)’가 해체되어가고 있는 가족에서, 어떤 새로운 가족에 대한 패러다임을 제시했다면 이들 아버지 영화들은 과거의 가치로 회귀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때 아버지 영화는 과거 ‘어머니의 눈물’로 대변되던 가족영화의 아버지 버전이 될 가능성이 짙다. 장 진 감독이 들고 온 가족영화, ‘아들’은 그런 면에서 여타의 ‘아버지 영화’들과는 맥을 달리한다. 어찌 보면 아버지 영화로 착각될 수 있는 이 영화는 바로 그 착각을 의도함으로써, 극적인 반전을 도모한다. 반전의 이유는 명확하다. 위에 언급한 대로 ‘아버지 영화’가 갖는 버전만 바꾼 가족영화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다.

내레이션이 주는 난감한 유쾌함
15년 간, 단 하루도 생각이 떠날 수 없었을 아들, 준석(류덕환)을 만나러 가는 강식(차승원)의 마음은 짠하기 그지없다. 아무리 강심장을 가진 관객이라 해도 그 설정의 거미줄에 일단 걸리면 왠만해선 눈물을 참을 수 없다. 아기의 손을 잡고 있는 아버지의 손에서 시작한 영화는 곧바로 인터뷰로 이어지는데 강식의 멍한 표정 하나를 보는 것만으로 거미줄에 잡히는 것은 충분하다. 그런데 장진 감독은 그것도 모자라 내레이션이라는 형식으로 강식과 준석의 속내를 그대로 드러낸다.

그것은 마치 일기장에 써내려 가는 듯한 이야기들이다. 거기엔 관객을 울리는 그들의 진정어린 속내에서부터 관객을 웃기는 엉뚱한 속내까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따라서 내레이션은 그저 절절한 그네들의 사연만을 전하는 장치에 머물지 않는다. 그 장치를 통해 장 진 감독은 특유의 유머를 구사하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한다. 장 진 감독 특유의 화법을 통해 관객은 울다가 웃음을 참지 못하는 자신을 느끼면서 ‘이거 참!’하는 난감한 유쾌함을 경험하게 된다.

기대가 배반되는 순간, 새 패러다임이 열린다
차승원의 아버지 연기와 류덕환의 아들 연기는 장 진 감독의 전략에 딱 들어맞는다. 손짓 하나 표정 하나에서 그들의 감정은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되고, 내레이션은 그 감정들을 극대화하면서도 동시에 관조적인 입장에 서게 만든다. 그것은 일기 같은 내레이션이 갖는 상황 정리의 속성이 장 진 감독 특유의 쿨함과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15년 간 만나지 못한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단 하루’라는 어찌 보면 심각한 이 영화에 난데없는 철새들의 삽화가 만화처럼 끼여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장 진 감독의 이런 스타일 덕분이다.

그런데 클라이맥스에서 던져지는 반전은 우리가 “이건 장 진 감독이니까”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던 전반부의 이야기들을 모두 뒤집는다. 그 모든 것들이 철저한 계산에 의한 의도적인 것이었다는 걸 느끼며 기대가 배반되는 순간, 한창 감정에 젖어있던 관객은 불현듯 고개를 쳐드는 이성을 느끼게 된다. 관객들 중에 어떤 분들은 이 당혹스런 반전을 불쾌함으로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왜?”라는 질문이 계속해서 감정을 두들기는 동안 우리는 지금까지 전개되어 왔던 영상들이(심지어는 날아다니는 철새들까지) 모두 복선이었다는 걸 알게된다. 우리가 기대했던 아버지 영화의 환상이 깨지면서 장 진 식의 가족영화가 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겪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 영화에 대한 비평은 이 정도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영화의 핵심이 바로 이 반전에 있기 때문이다. 이 반전을 드러내야 영화가 가진 진짜 메시지를 잡아낼 수 있지만, 그 순간 영화의 매력은 떨어질 것이다. 그러니 이 글로 전달될 수 있는 이 영화의 이야기는 장 진 감독이 제목에서부터 관객들이 선입견으로 갖고 있는 자신의 스타일까지 모두 반전의 장치로 활용해 의도한 ‘아들’의 메시지를 충분히 전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 좋은 영화에 대한 편견이나 평가절하가 두려워 한 가지 정도는 밝혀둬도 되겠다.  물론 ‘아들’은 아버지 영화가 주는 절절한 맛을 느낄 수 있는 영화지만 그렇다고 그저 아버지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아버지 영화가 갖는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영화이다.

기적을 부르는 ‘고맙습니다’의 드라마 화법

MBC 수목드라마, ‘고맙습니다’를 그저 훈훈한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그것이 반쪽 짜리 정답이었다는 걸 알아차렸을 것이다. 보는 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준 ‘고맙습니다’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우리들 모두를 부끄럽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그것은 마치 작은 선행을 담은 이야기가 인터넷에 대서특필됐을 때, 따뜻해지는 가슴과 함께 밀려오는 부끄러움 같은 것이다.

작은 이야기에도 민감해지는 건, 그만큼 감동 없는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는 반증. ‘고맙습니다’는 이 감동 없는 세상에 던지는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반어법이다. “고맙습니다”라는 작은 한 마디가 가진 울림은, 그런 한 마디 해주지 못하는 고맙지 않은 사회에 대한 통렬한 대결의식이 된다. 당신은 과연 그 누군가에게 “고맙습니다”라고 말해본 적 있는가 하는 뼈아픈 질문이다.

그들의 고통은, 그들이 아닌 우리가 만들었다
미혼모에 치매 할아버지 그리고 에이즈에 걸린 딸이지만 이들만큼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까. 봄(서신애)이가 에이즈라는 사실이 알려져 마을사람들이 이들을 쫓아내려 할 때도 가족들 품으로 돌아온 영신(공효진)은 애써 웃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려한다. 에이즈에 걸렸지만 아이라는 점, 그리고 나이든 할아버지지만 치매라는 점이 이 모든 가족의 고통을 영신에게 지우지만, 그녀는 그 고통을 행복으로 치환하는 요인을 또한 그 가족에게서 찾는다. 그녀는 영신이가 아닌 봄이 엄마일 때, 미스터 리의 손녀일 때 가장 행복하고 강하다. 그러니 이 가족의 고통은 외부에서 볼 때 그렇게 보일 뿐, 그들의 실상은 다르다.

하지만 드라마 속에서 그들은 고통받는다. 그것은 그들을 그렇게 행복하게 가만 놔두지 않는 주변 사람들의 편견 때문이다. 영신네 가족이 원하는 것은 그저 푸른도에 발붙이고 사는 것이지만 마을 주민들은 그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에이즈에 걸린 어린아이를 괴물 보듯 대하고, 수혈을 받지 못해 죽어 가는 영신에게 그 누구도 헌혈을 하려들지 않는다. 이런 편견과의 대결구도 속에서 작가가 선택한 것은 부정이 아닌 긍정의 힘이다. 그들에게 누구도 ‘고마운 짓’을 하지 않지만 그녀는 늘 “고맙습니다”라고 말하고, 그들에게 늘 미안한 짓을 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미안합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녀는 스스로를 ‘무생물’이라 말하면서까지 자신이 당하는 고통스런 상황을 긍정하고 끌어안으려 한다.

작가가 모진 세상에 거는 시비
이것은 작가가 모진 세상에 거는 시비이다. “왜 그렇게 사느냐”는 우회적인 질문이면서도 그 어느 것보다 무서운 비판이다. 영신의 그런 행동은 그녀를 바라보는 민기서(장혁)의 시선을그대로 담은 드라마 주제곡 가사처럼 때론 바보 같고 때론 천사 같은 것이다. 그래서 민기서는 늘 그녀를 향해 고함친다. “왜 바보처럼 당하고만 사느냐”고. “고맙긴 뭐가 고맙냐”고. 이 민기서의 시선은 그대로 우리네 시청자들의 시선과 맞닿는다. 영신의 그런 모습 속에서 우리는 가슴이 먹먹하다가도 민기서의 마음처럼 답답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바보와 천사가 만나는 영신이란 캐릭터를 통해서 작가의 목소리는 더 신랄해진다. 이 말은 ‘천사처럼 사는’ 인간적인 삶을 ‘바보’로 여기는 세태의 정곡을 찌른다. 우리가 만약 영신의 행동에서 답답한 바보의 모습을 보았다면 거기서부터 우리는 자기 자신을 돌아볼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무엇이 우리의 삶을 이다지도 영리하고 약삭빠르며 이기적인 것으로 만들었을까.

희망을 버리지 않는 작가의 바람
드라마는 영신네 가족이라는 사회적 약자의 대변자들이 현실적 상황 속에서 겪을 수 있는 고통의 단면들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이것은 어찌 보면 잔인한 설정이 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시사다큐프로그램을 통해 보아왔던 실제 현실이라면 그 핍박은 눈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에 이르렀을 테니까. 하지만 작가는 이 각박한 현실에 대해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작가가 설정한 안전장치가 푸른도라는 가상의 섬이다. 편견 없는 사회, 약자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오가는 사회는 마치 기적처럼 일어나기 어려운 것이지만, 혹 이 섬에서라면 어쩌면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작가의 바람이다.

푸른도 마을 사람들의 면면들은 그래도 오로지 자신만 생각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보다는 많은 가능성들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마을 사람들간의 유대가 상대적으로 끈끈하다는 것. 부모들은 봄이가 에이즈라는 사실에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을 정도지만, 정작 아이들은 봄이를 걱정한다. 영신의 수혈을 위해 마을을 뛰어다니며 헌혈을 부탁하는 민기서의 행동은 즉각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들을 갈등하게 만든다. 그리고 결국에는 저마다의 핑계거리를 들고 보건소로 찾아오게 만든다.

당신도 기적을 느끼셨나요
사람들의 편견이 깨지는 것, 그것은 이 드라마가 원하는 기적이다. 그 기적을 위해서 작가가 만들어낸 영신과 봄이, 그리고 미스터 리라는 캐릭터는 푸른도 사람들을 향해 온몸을 내던진다. 그들이 던지는 것은 생명(봄이의 에이즈, 영신의 과다출혈 같은 상황)이기에 그들의 전부가 된다. 푸른도 사람들은 그제서야 편견과 생명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이 변화를 ‘저들의 세계에서 벌어진 일’에 국한시키지 않는 것은 민기서라는 캐릭터에 의해서다. 그는 우리와 같은 현실에서 살다가 그 이상한 섬으로 들어간 인물이다. 시청자들이 의식적으로 그에게 기꺼이 빙의되는 것은, 그가 푸른도에서 벌어진 일을 목격하는 사람으로서 드라마 속의 시청자 역할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기서가 바보처럼 착한 삶을 무능력으로 여기는 우리 사회 속에서 영신이란 진짜 바보를 만나며 변화되어 가는 과정은 시청자들이 이 드라마를 보면서 겪는 변화의 과정과 일치한다. 따라서 봄이와 영신이가 그에게 어떤 의미냐는 질문에 민기서가 “그건 개떡같은 내 인생에 그 어떤 놈이 주고 간 기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작가가 시청자들에게 전하는 진심어린 권유가 아닐 수 없다. 당신도 그런 기적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드라마는 민기서를 통해 얘기해주고 있다.

절대로 누군가에게 “고맙습니다”라고 말할 것 같지 않던 민기서는 자신이 그토록 미워하던 아버지의 도움으로 영신을 살리고 나서야 비로소 “고맙습니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깨어난 영신 앞에 선 석현(신성록)도 마찬가지. 심지어는 석현모까지 눈물 흘리게 하고, 결국 봄이로 하여금 그녀에게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고맙습니다”를 하게 만든다. 드라마는 이 바보처럼 “고맙습니다”를 연발하며 살아가는 가족으로부터 점차 전염되어 가는 희망의 징후들을 기적처럼 포착해준다. 그러니 ‘고맙습니다’는 지금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지 못하고 있는 당신과 사회의 변화를 꿈꾸는 반어법이다. 그 반어법 앞에서 자신의 삶이 부끄러웠다면 그것은 당신도 아마 기적이라는 전염병에 막 감염되었다는 반가운 신호가 아닐까.

‘히트’에 보이는 여성성 경향

MBC 드라마 ‘히트’가 그려내는 강력계의 풍경은 욕설이 난무하고 폭력이 행사되던 여타의 우리네 형사물들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먼저 강력계 팀장이 차수경(고현정)이란 여성이란 점이 다르다. 김영현 작가가 연쇄살인사건을 해결하는 히트 팀에 여성을 내세운 것은 이 드라마가 전작인 ‘대장금’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걸 말해준다.

김영현 작가는 여성들의 성장 드라마 혹은 사회적 성공에 대한 환타지를 제대로 포착해내는 작가이다. ‘대장금’의 장금이가 조선시대 수라간 이야기를 통해 현대적 여성상의 전형을 에둘러 보여주었듯이, ‘히트’의 차수경 역시 남성들만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강력계 이야기 속에 보란 듯이 팀장 자리를 꿰차고 앉는다.

강력계 팀장을 여성으로 세우는 순간부터, 이 드라마는 지금까지 형사물들이 다루었던 범죄와 수사라는 재미에, 직장(?)여성의 성공담 혹은 성장담이라는 새로운 재미가 덧붙여지게 된다. 그 두 재미 중 무게중심이 기우는 것은 당연히 후자이다. 이유는? 전자는 이미 다른 드라마, 영화에서 수없이 다루어진 닳고닳은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즉 히트라는 지리멸렬해 보이는 팀을 이끄는 차수경이란 여성 리더십이 진짜 볼거리란 이야기다.

다른 형사물과 다른 차수경의 리더십
차수경의 리더십을 보면 확실히 다른 형사물과는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녀는 지시를 내릴 때도 상대방을 배려하는 자세를 유지한다. 장형사(최일화)가 가출한 딸을 찾아 근무지를 이탈해 홍콩으로 갔을 때도 질책하기보다는 그를 도우려고 애쓴다. 물론 극화된 것이지만 그녀는 심지어 홍콩까지 그를 찾아간다. 심종금(김정태)이 비리를 저지르고 다녀도, 김일주(정동진)가 같은 팀원 뒤를 캐고 다녀도 그녀는 인상을 쓰면서 한숨을 푹 내쉴 뿐, 주먹질을 한다거나 욕을 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대신 팀원들을 가족같이 끌어안는다. 그 모습은 마치 속을 지글지글 끓이면서도 챙길 건 다 챙겨주는 우리네 어머니들을 닮았다. 모성으로 느껴지는 이 리더십을 보면서 팀원들은 자발적으로 움직인다. 명령이 아닌 대화를 이끌어내는 리더십은 요즘 회사 내에서 불고 있는 ‘펀(fun) 경영’이나 ‘위미니지먼트(womanagement, 매니지먼트 개념에 우먼이 합쳐져 만들어진 신조어)’를 연상시킨다. ‘히트’팀의 다른 풍경은 상명하복, 위계질서 등 과거의 남성성으로 대변되던 기업문화가 지금 상호존중과 조화 등 여성성을 내포한 문화로 변화되어가고 있는 현실을 포착해낸 결과로 보여진다.

김재윤은 왜 애교만점 캐릭터가 되었나
그런데 그것이 단지 차수경이란 여성 강력계 팀장 때문 만일까. 이 드라마에서 드러나는 여성성은 그녀에서 머물지 않는다. 차수경과 멜로 라인을 만들어가는 김재윤(하정우)이란 캐릭터를 보면 그것은 단박에 드러난다. 그 역시 검사라는 설정이 있지만 과거의 명령체계와는 전혀 다른 리더십을 구사한다. 그의 리더십은 지켜봐 주고 도와주는 것이지 억지로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다.

멜로 라인에서 보여주는 남녀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김재윤은 고압적인 인물이 아니다. 스스로 무너져 애교를 부리면서 상대방을 웃게 만드는 캐릭터다. 그가 여성 시청자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 것은 외모도 아니고 카리스마도 아니다. 그것은 배려하고 도와주는 그 캐릭터 속에 숨겨져 있는 여성성 때문이다. 그가 차수경에게 자꾸 잊고 있던 서랍장 속의 하이힐을 끄집어내 신겨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그녀가 잃어가는 여성성을 되살려주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남성식은 어떻게 미키성식이 됐을까
이런 캐릭터의 여성성 경향은 다른 팀원들에게서도 드러난다. 가장 남성적으로 보이는 남성식(마동석, 이름조차 남성식이다)은 겉으로 보기엔 남성성의 화신처럼 보이지만, 그 속내를 살펴보면 그렇게 여성적일 수가 없다. 무기 같은 근육질에 우락부락한 얼굴로 배신한 차수경에게 전화를 해 소리를 질러대지만 그 눈에 눈물이 흐르는 면모를 보여준다. 우람한 근육질의 사내가 수줍게 자그마한 꽃 한 송이를 들고 있는 듯한 분위기 탓일까. 유독 남성식은 미키성식이라 불리며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다.

‘히트’는 팀원들 간의 관계 역시 명령과 복종이 아닌 대화하고 고민하는 어찌 보면 가족 같은 수평적 관계를 그려낸다. 장형사(최일화)는 직급은 가장 낮지만 팀내에서는 맞형으로 대우를 받는다. 반대로 김일주(정동진)는 팀내에서 직급이 가장 높지만 막내 취급을 받는다. ‘히트’팀의 이런 관계는 거의 대부분의 권한을 위임받은 팀장이지만 팀원들과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직급 호칭을 파괴해버린 어느 회사를 연상케 한다.

‘히트’의 의미 있는, 위험한(?) 시도
‘히트’에서 드러나는 여성성 경향은 작금의 변화하고 있는 사회의 모습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미국 파이낸셜 타임즈의 칼럼니스트 리처드 톰킨스는 “기업 경영자들이 마르스(화성)형에서 비너스(금성)형으로 바뀌고 있다”는 말로 변화되는 조직을 표현했는데, 여기서 마르스는 전생의 신인 반면, 비너스는 미의 여신이다. 즉 정보화, 감성 마케팅 같은 새로운 환경 속에서 기업들은 경쟁력 강화를 위해 여성성을 극대화한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말이다.

남성들조차 남성성으로 요구되는 마초이즘의 피곤함을 느끼기 시작하는 시대. 그런데 이렇게 사회상을 잘 반영하고 있는 ‘히트’는 왜 히트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전술했듯이 이 드라마가 갖는 두 가지 재미, 즉 범죄와 수사라는 남성성으로 대변되는 재미와 직장여성의 성공담이라는 여성성으로 대변되는 재미 사이에 균형이 흐트러졌기 때문이다.

본격 수사물과 멜로 드라마, 아르레날린과 감성, 남성성과 여성성을 조화시키려던 ‘히트’의 의도는 매우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그만큼 위험성을 내포한 것이기도 하다. 여성성이 너무 강조되면 현실의 리얼함이 취약해지기 마련이고 남성성이 너무 강해지면 과거 여타의 형사물과의 차별점을 잃게 된다. 이것이 마초이즘을 버린 형사물, ‘히트’가 지금 처한 딜레마이다.

이번 주는 드라마들이 중반으로 치달으면서 호연을 펼치고 있는 연기자들이 유난히도 돋보인 한 주였습니다.

역시 배종옥, 변신 김정민
SBS의 월화드라마,‘내 남자의 여자’는 극의 흐름을 김희애의 독한 연기가 끌어왔는데 이번 주에는 반격에 나선 배종옥의 연기가 돋보였습니다. 남편의 외도로 인해 겪는 상처와 분노, 하지만 “그래도 용서해주세요”하는 아이의 애원에 흔들리는 엄마라는 복합적인 내면연기를 ‘역시 배종옥!’이라는 말이 어울리게 소화해냈습니다. 배종옥은 과장되지 않고 또 그렇다고 너무 가라앉지도 않는 역할에 딱 맞는 연기력을 선보였습니다.
MBC의 ‘히트’는 전문성에 대한 비판여론 탓인지 분위기를 멜로에서 전문직쪽으로 바꾸려는 시도로 소강상태를 보이는 가운데, 새롭게 전면에 나선 김영두 역의 김정민이 가수답지 않은(?) 훌륭한 연기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그의 거칠고 강한 인상을 주는 캐릭터는 멜로로 말랑말랑해진 ‘히트’에 조금은 강력계다운 강한 면모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성숙 공효진, 소름 주지훈
수목드라마에서 최강자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고맙습니다’는 달라진 공효진, 장혁의 물오른 연기가 시청자들을 감동에 젖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전 드라마에서 조금은 되바라진 캐릭터를 보였던 공효진은 이 드라마에서 바보스러울 정도로 착한 모성애 강한 미혼모역을 실감나게 소화해내며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한편 장혁의 깊어진 연기와 서신애의 아이답지 않은 연기력, 그리고 자타가 공인하는 신구, 강부자의 연기력들이 맞물려 따뜻한 드라마가 만들어지는데 강한 힘을 실어주고 있습니다.
시청률은 낮아도 여전히 화제에 중심에 있는 ‘마왕’은 주지훈의 야누스적인 캐릭터에 찬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무표정한 얼굴에는 그것이 선인지 악인지 알 수 없는 포커페이스를 보이다가, 순간 순간 씩 웃을 때 입꼬리가 올라가며 보이는 악마적인 느낌은 시청자들을 전율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과거의 아픔을 떠올릴 때면 그 고통을 공감할 수 있게 해주는 내면연기 역시 돋보이면서 이제 막 시작한 신인배우라고는 믿기기 어려운 연기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캐릭터와 연기력이 드라마를 살린다
TV 프로그램의 성패가 된 리얼리티는 이제 드라마에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얼마나 리얼하냐는 것이 공감의 바로미터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최근에는 캐릭터가 극의 중심으로 오면서 그 캐릭터를 연기하는 연기자가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과거 스토리 중심의 트렌디 드라마에서는 적당한(?) 연기력을 가진 외모출중한 배우들이 포진했던 반면, 최근에는 외모가 아닌 진정성이 느껴지는 연기를 하는 배우들이야말로 드라마를 살릴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제 착한 척하는 배우, 예쁜 척 하는 배우보다는 자신은 망가지더라도 극중 캐릭터를 100%로 살릴 수 있는 연기를 보이는 배우가 아름다운 시대입니다.
월화수목 드라마들이 중반을 치닫고 있는 지금이, 이제 제 궤도에 오른 연기자들의 명연기를 보는 맛이 가장 좋을 때입니다. 최고의 시청률을 보이고 있는 ‘내 남자의 여자’, ‘고맙습니다’ 뒤에는 연기자들의 호연이 빛나기 마련! 그러나 시청률과 상관없이 취향에 따라 그 다양한 맛에 취해보는 건 어떨까요.

재미로 보는 기대감 수치
▶ ‘내 남자의 여자’(기대감 80%) : 새로운 남자, 이종원이 등장하면서 배종옥의 갈등상황이 연출될 것으로 보입니다. 또 배종옥과 김희애의 대결구도는 여전히 기대감을 높이는 요인입니다.
▶ ‘고맙습니다’(기대감 80%) : 연기로 보자면 이 드라마 만큼 기대감을 높이는 드라마는 없을 것입니다. 모든 연기자들이 연기 9단의 모습을 보이는 드라마입니다. 공효진과 그 가족을 사이에 둔 장 혁과 신성록 간의 대결구도도 관전포인트입니다.
▶ ‘히트’(기대감 50%) : 아직까지 전문직 드라마로서의 긴박감이 살아나지 않는 반면, 김정민의 역할이 얼마나 그걸 해줄지 기대가 되는 드라마입니다.
▶ ‘마왕’(기대감 50%) : 주지훈의 야누스적인 카리스마는 물론이고, ‘인간으로서의 강오수’와 ‘형사로서의 강오수’ 사이에서 갈등하는 엄태웅의 연기도 기대감을 높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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