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셰프’, 셰프 임윤아, 폭군 이채민도 시청자도 사로잡았다

폭군의 셰프

‘이 식감 이 맛은 생전 처음 느껴보는 맛.’ ‘고기가 씹히는 게 아니라 녹네..’ ‘입안 가득 담기는 육즙과 이 양념 맛은 대체 뭐란 말인가.’ 먹어보지도 않고 고기 몇 점 올라온 소반의 음식을 보고 대접이 소홀하다는 둥 일부러 트집을 잡는 채홍사 부자 임송재(오의식)와 임서홍(남경읍)은 일단 먹어보고 평가해달라는 연지영(임윤아)의 제안을 받아들여 한 점 고기를 입에 넣고는 그 맛에 절로 눈이 커진다. 

 

<대장금> 같은 사극 배경에 쿡방과 먹방이 결합한 전형적인 요리 드라마의 한 장면 같지만, 이 요리를 만든 연지영이 그들의 반응을 보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말들은 어딘가 사극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표고버섯의 구아닐산, 멸치의 이노신산, 그리고 새우젓의 글루탐산, 각기 다른 계열의 아미노산 성분을 특정한 비율로 배합하면 감칠맛이 수십 배까지 증폭된다. 이른바 감칠맛 폭탄. MSG. 현대의 합성조미료와 같다.’ 

 

사극 배경에 들어간 이 현대적인 어투의 대사는 tvN 토일드라마 <폭군의 셰프>가 타임리프 판타지라는 걸 보여준다. 연지영은 프랑스에서 열린 요리대회에서 1등을 수상한 후 귀국하던 차에 ‘망운록’이라는 신비스런 고서를 열고 조선시대로 타임리프 됐다. 어쩌다 폭군 이헌(이채민)과 악연으로 연결되고, 살아남아 다시 현재로 돌아가려 안간힘을 쓰는 연지영은 그 곳에서는 집도 절도 없고 신분도 미약한 무력한 존재지만 요리 실력 하나로 생존해 나간다. 

 

판타지 설정이지만 그럴 듯해 보이는 건, 현대 요리 과학의 정수를 꿰뚫고 있는 연지영이 그 실력으로 조선의 입맛을 좌지우지하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해 보여서다. MSG 개념의 감칠맛을 만들어낼 줄 아는 요리사라면 조선에서 그 누구의 입맛을 사로잡지 못할까. 그런데 하필이면 연지영이 붙잡은 자가 이헌이라는 왕이고, 그가 역사에 잘 알려진 폭군 중의 폭군이라는 사실이다. 연지영은 폭군의 입맛을 사로잡고 그 마음까지 돌려 자신을 구원할 수 있을까. 

 

최근 들어 이른바 ‘혐관 로맨스’가 트렌드라면 <폭군의 셰프>는 거기 딱 맞는 판타지 사극 버전의 혐관 로맨스가 아닐 수 없다. 어머니의 처참한 죽음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는 이헌은 그 죽음의 진실을 파헤치고 거기 연루된 이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폭군 행세를 한다. 일부러 전국의 여자들을 붙잡아가는 채홍사를 파견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자들에게 똑같은 고통을 선사하려 한다. 

 

폭주하는 이헌의 이 불타는 복수심은 과연 잠재워질 수 있을까. <폭군의 셰프>는 연지영의 요리로 그의 마음을 되돌리려 한다. 어쩌다 연지영이 만들어준 고추장 버터 비빔밥을 맛본 이헌은 어머니 폐비 연씨가 어려서 밥을 입에 넣어주던 때를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다. 수비드로 부드럽게 만든 소고기와 감칠맛이 나는 조미료를 더한 음식을 맛본 이헌은 “어쩐지 그리운 맛이 나는 게 참으로 오랜만에 음식맛이 만족스러웠다.”고 말한다. 그 그리움이란 도대체 뭘까. 그건 결국 무참하게 죽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들이 아닐까. 

 

<폭군의 셰프>는 그래서 타임리프 판타지와 요리를 만들고 먹는 장면들로 문을 열지만, 결국 이를 통해 이헌이라는 폭군의 마음을 여는 연지영의 이야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건 또한 폭주하던 그 마음을 음식으로 사로잡음으로써 폭정을 바꿔 제대로 된 정치로 되돌리는 그런 이야기가 아닐까. 심플한 기획이면서도 보는 이들의 마음을 초반부터 꽉 쥐어버리는 이 작품만의 강력한 매력이 아닐 수 없다. 

 

이 현대에서 조선으로 날아간 셰프 역할을 맡은 임윤아는 그간 필모를 통해 차곡차곡 쌓아왔던 코미디 연기가 제대로 물이 오른 모습이다. 영화 <엑시트>로 조정석과 함께 940만 관객을 동원하며 코미디 연기를 제대로 경험한 임윤아는 그 후 <킹더랜드>에서는 이준호와 합을 맞춰 달달하면서도 빵빵 터지는 로맨틱 코미디의 정수를 보여줬다. 최근 개봉한 영화 <악마가 이사왔다>에서는 새벽이 되면 악마로 변신하는 1인2역 역할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제 <폭군의 셰프>는 사극 버전의 판타지 로맨틱 코미디도 이제 척척 해내는 임윤아표 코미디의 안정감이 느껴진다. 

 

<홍천기>에서 <밤에 피는 꽃>을 거쳐 <폭군의 셰프>로 돌아온 장태유 감독의 연출도 이 작품이 2회만에 6.6%(닐슨 코리아)를 기록하며 경쟁작인 KBS <트웰브(5.9%)>를 따라잡는데 일조했다. 코믹하게 처리해 판타지를 납득가게 하면서 이헌과 연지영의 혐관로맨스를 적절한 긴장과 이완으로 풀어나가는 장인의 모습이 느껴진다. 마동석에 박형식, 서인국, 성동일 등등 쟁쟁한 출연진으로 무장한 <트웰브>를 2회만에 압도해버린 <폭군의 셰프>. 벌써부터 심상찮은 모습이다. (사진:tvN)

'첫, 사랑을 위하여', 첫주연에 최윤지 입소문난 이유

첫,사랑을 위하여

효리 너무 예쁘다... tvN 월화드라마 <첫, 사랑을 위하여>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이런 이야기들이 자주 나온다. 가수 이효리가 아니라 <첫, 사랑을 위하여>의 주인공인 이효리(최윤지) 이야기다. 이효리 역할로 첫 주연을 맡은 최윤지 배우에 대한 관심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첫, 사랑을 위하여>가 최윤지 배우의 첫 주연을 위하여 마련된 작품처럼 보일 정도다. 

 

이렇게 된 건 <첫, 사랑을 위하여>라는 작품이 그리고 있는 이효리라는 인물의 매력 때문이다. 어렵게 공부해 의대에 들어갔지만 뇌종양이 머리에서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모든 걸 접고 청해라는 시골로 떠난 이 인물은 그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억척스럽게 자신의 삶을 희생하면서 딸을 위해 달려왔던 엄마 이지안(염정아)도 그 사실을 알고는 효리와 함께 새 삶을 열어간다. 

 

이들은 시골에 자신들이 원하는 집을 짓고, 자연과 전원의 삶을 만끽하며 그간 경쟁적인 도시 생활에서는 할 수 없었던 것들을 누리고 경험하게 된다. 그건 다분히 판타지가 더해진 풍경들이지만 시청자들로서는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삶이다. 자연에 둘러싸인 예쁜 집이 있고, 원하면 서핑을 하거나 산에서 캠핑을 한다. 로맨스도 빠지지 않는다. 이효리를 좋아하는 류보현(김민규)은 그녀와 함께 산마루에 올라 별을 보며 풋풋한 첫사랑의 마음들을 주고받는다. 

 

“예쁘다.” 저도 모르게 그런 말이 툭 튀어나온 류보현은 그 말에 깜짝 놀라는 이효리에게 괜스레 별을 이야기한다. “별이 예쁘다고..” 그러면서 지나가는 말처럼 속내를 꺼내놓는다. “너도 조금 예쁘고.” 산마루에서 별을 보며 건네는 이 풋풋한 청춘들의 대화는 저 알퐁스 도데의 소설 <별>을 떠올리게 한다. 어깨에 기대 잠든 스테파네트를 보며 ‘별들 중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별 하나가 길을 잃고 내려와 내 어깨 위에 잠들었다’고 생각하는 목동의 이야기가.

예쁘다는 건 외모에 대한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그것만이 아니다. 이 작품 속 이효리라는 인물의 마음 씀씀이가 이 인물을 예쁘게 느끼게 만든다. 엄마와 툭탁대며 갈등을 빚기도 하지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엄마와 진짜 딸의 관계로서 살아오며 더 절절하게 노력해 온 마음이 느껴진다. 그래서 싸우다가도 금세 엄마를 향해 손을 내밀고 함께 별을 보러 나가는 그 마음이 예쁘다. 

 

그런 그들의 관계를 류보현은 ‘첫사랑’에 비유해서 표현했다. “두 사람 꼭 첫사랑 같애. 첫사랑처럼 어설프고 서툴고 근데 온통 진심 덩어리인 거. 난 그게 솔직히 미울 정도로 부럽더라.” 이 대사는 바로 이 드라마의 제목이 왜 <첫, 사랑을 위하여>인가를 잘 드러낸다. 서툴지만 진심이 꺼내지는 그 순간을 위하여 이 드라마는 쓰인 것처럼 느껴진다. 서툴러서 부딪치지만 그 진심이 꺼내지며 풀어질 때의 감동은 영락없이 눈물을 쏙 빼게 만든다. 

 

엄마와의 관계를 통해 이효리가 뭉클한 감동을 선사한다면, 류보현과는 설레는 첫사랑의 감정들을 전해준다. 비 오는 날 두 사람이 우비를 같이 쓰고 달리는 장면은 저 유명한 <클래식>의 손예진과 조인성이 달리는 장면이 오버랩된다. 그 축축하게 젖은 채로 이효리가 류보현에게 꺼내놓는 고백은 여지없이 마음을 간지럽힌다. “아프고 나니까 선택이 복잡해져. 너가 날 동정한 걸까? 배려한 걸까? 인간적인 연민일까? 순수한 애정일까? 감정이 막... 엉망으로 얽히는 기분이지만 뭐가 됐든 분명한 건 너가 날 설레게 하고 그렇게 설레는 내가 좋다는 거야. 나 너 좋아하나 봐.”

 

물론 이효리에 대한 “예쁘다”는 반응이 터져 나오는 건 이 인물을 그렇게 그려낸 성우진 작가의 만만찮은 필력이 만들어 낸 것이다. 이 작가는 이 작품이 첫 입봉작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만큼 인물의 감정을 섬세하게 들여다볼 줄 알고, 그걸 대사로도 유려하게 표현해 낼 줄 안다. 그래서 아마도 성우진 작가에게 이 작품 역시 ‘첫사랑’ 같은 풋풋하지만 강렬한 기억으로 남는 작품이 되지 않을까. 첫 감정을 꺼내놓는 이효리라는 인물과, 그 인물로 첫 주연을 맡은 최윤지 배우 그리고 첫 작품을 펼쳐낸 성우진 작가의 그 첫 걸음들이 모여 ‘예쁜’ 드라마를 만들었다. (사진:tvN)

‘나는 생존자다’, 다 알고 있는 이야기? 우리가 제대로 아는 건 없었다

나는 생존자다

“이런 사고가 나게 되면 늘 보상이 먼저 나와요. 보상이. 생명 앞에 돈을 이야기하고.. ‘돈을, 보상을 잘해 줄게’, ‘돈 때문에 너희들 그러지?’ 이 한마디에 그냥 다 무너져 내리고..”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나는 생존자다>에서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유족의 이야기는 못내 아프다. 그건 삼풍백화점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참사를 대하는 경박하고 무례하기 이를 데 없는 태도를 콕 집어내고 있어서다.

 

사실상 원인이 분명히 있는 인재지만, 마치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천재인 것처럼 취급하고 그래서 그 진상을 규명하기보다 서둘러 보상 이야기를 꺼내며 돈으로 덮어버리려 하는 듯한 천박한 행태들이다. 그건 삼풍백화점 유족이 눈물을 꾹꾹 삼키며 피처럼 토해놓는 말처럼, 그들이 먼저 보낸 가족으로 이미 헐어버렸지만 애써 버텨내려 했던 삶의 옹벽을 또 한 번 무너뜨리는 일이다. “금전으로 목숨을 대신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나는 신이다>로 사이비종교의 추악한 민낯을 적나라하게 꺼내놓음으로써 사회적 충격과 파장을 일으켰던 조성현 PD가 그 후속편으로 <나는 생존자다>를 내놨다. 총 8회로 형제복지원, JMS, 지존파 그리고 삼풍백화점을 다뤘다. 전작에 비해 유사한 사건들로 묶이지는 않지만, 대신 조성현 PD가 하나의 연결고리로서 들여다본 건 제목에 담겨있는 것처럼 ‘생존자’라는 키워드다. 그저 피해자가 아니라, 살아남은 이들이고 그 후에도 여전히 생존의 고통스런 삶을 버텨내며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에서 ‘생존자’다.   

 

당시 끔찍했던 사건들을 실제와 재연된 영상을 통해 꼼꼼히 그 진상을 담아내면서도, 생존자들과 피해자 가족들의 절절한 인터뷰가 중심이 되어 이들의 여전히 끝나지 않은 고통의 삶을 전한다. 초등학생 정도의 어린 나이에 아무 것도 모르고 경찰에게 붙잡혀 형제복지원이라는 지옥에 끌려 갔다 몸도 정신도 망가져 버린 채 현재까지도 그 시간에 멈춰 살아가는 생존자들이나, <나는 신이다>를 통해 교주 정명석의 성범죄를 용감하게 폭로했지만 그로 인해 생명의 위협까지 받은 메이플이나 조성현 PD, 또 지존파에 의해 살인 공장에 납치되었다가 9일 간의 사투 끝에 도망쳐 살아 남았지만 그 지독한 후유증에 시달리는 생존자, 그리고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삼풍백화점 붕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과 유족들... 

 

<나는 신이다>가 숨겨진 사실을 꺼내놓는 폭로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나는 생존자다>는 이들의 고통을 들여다보면서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에 대한 구조적인 접근도 빼놓지 않았다. 거의 홀로코스트에 가까운 형제복지원의 만행에도 불구하고, 그 폭력을 주도한 박인근 원장이 미미한 처벌을 받고 그 가족들이 지금도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는 건 당시 이 사건이 군부독재의 비호 아래 이뤄졌기 때문이었다. 사건이 공개됐지만 제대로 된 진상규명 없이 유야무야 처리된 것. 

 

그렇다면 군부독재의 시대를 지난 현재까지 제대로 된 진상규명과 사죄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건 무얼 뜻하는 걸까. 과거의 잘못과 선을 긋지 못하는 현 정부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일까. 어쩌면 당장의 현실과 이익에만 집중하다 그런 일들은 이미 지나간 과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생존자다>는 그것이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생존자들과 유족들이 고통스런 싸움을 하고 있는 현재의 일이라는 걸 보여준다. 진심 어린 사과 한마디를 요구하는 생존자에게 비웃음을 던지는 가해자들이 존재하는 한 이건 결코 과거의 일이 될 수 없다고 이 다큐멘터리는 말하고 있다.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으로만 나아가라는 한국 사회의 강령은 개발시대 이후 끝난 게 아니라 아직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잘 사는 것, 부유해지는 것 그래서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이 가장 큰 가치로 여기는 그 풍조가 형제복지원, JMS, 지존파, 삼풍백화점 사건을 일으킨 근본적인 원인이다. 사건으로 발현된 증상은 저마다 달라 보이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원인은 강박에 가까운 돈과 성공, 성장에 대한 집착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생존자다>가 삼풍백화점 참사를 다룬 마지막 회의 부제가 ‘돈으로 쌓은 탑’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보다 많은 수익을 내려는 백화점 측의 무리한 설계 변경 요구가 있었고, 이를 허가하는 대가로 뇌물을 받은 공무원들이 있었다. 또 들어가야 할 철근을 빼돌린 부실공사가 있었고, 붕괴될 위험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백화점 영업이 인명보다 중요하다 여긴 경영진들의 무책임이 있었다.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건 결국 ‘돈’이다.

 

형제복지원과 경찰이 공조해 무고한 아이들까지 잡아간 데는 더 많은 국가보조금과 뇌물이 있었고, JMS의 정명석이 감옥에 수감된 이후에도 이 사이비 교단이 계속 유지된 데는 2인자 정조은의 돈과 권력에 대한 욕망이 있었다. 지존파의 엇나간 폭력의 이면에도 양극화된 돈에 대한 박탈감이 존재했고, 삼풍백화점 붕괴에는 보다 많은 이윤을 남기려 무리한 설계 변경까지 하려 했던 경영진과 뇌물을 받고 이를 무마해 준 공무원들이 있었다.  

 

그러니 가족을 잃고 절망하는 유족들에게 먼저 보상 이야기를 내놓는 건 돈이면 뭐든 다 된다고 믿는 여전한 돈 지상주의적 발상이 아니고 뭘까. 그래서 그런 비극을 과거로 빨리 밀어내고 앞으로만 가려는 행태는 광주 아파트 외벽 붕괴사고 같은 또 다른 삼풍백화점의 비극이 반복되는 이유다. 사실 생존자나 유족들도 그 끔찍했던 당시 사건들에 대해 인터뷰를 하는 건 고통 그 자체다. 그럼에도 왜 인터뷰에 응하게 됐는가를 묻는 조성현 PD의 질문에 한 유족은 이렇게 말했다. “이게 이렇게 안하면 잊어요. 우리 대한민국 사람은. 잊기 때문에 널리 좀 퍼지게 해주세요. 수고스러워도.” 그러니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우리 역시 이 사건들을 눈 부릅뜨고 바라볼 필요가 있다. 잊지 않기 위해서, 또 다시는 이런 일들이 반복되지 않아야 하므로.(사진:넷플릭스)

‘서초동’, 무한 시즌제 드라마로서의 확장 가능성이 엿보인다

서초동

종영했지만 드라마 <서초동>이 남긴 잔잔한 여운은 지금까지도 여전하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변호사 버전 같은 느낌으로 등장할 때부터 어딘가 심상찮았다. 극적인 서사가 있지만 자극적이지는 않고, 갈등이 존재하지만 파국 같은 과장으로 치닫지는 않았다. 제목이 그러한 것처럼 서초동이라는 법조인들이 모여 지내는 동네의 소소한 일상을(물론 드라마틱한 법정 스토리를 더해) 담은 작품이랄까. 

 

이 작품이 특이한 건 시작할 때만 해도 이종석 원탑의 드라마가 아닐까 싶었지만 그 엔딩에 이르러 보면 결코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안주형(이종석)과 강희지(문가영)의 로맨스가 전반적으로 강조되긴 했고, 법정 스토리에서도 안주형의 이야기가 초반에 주목을 끌기는 했다. 하지만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이야기는 조창원(강유석), 배문정(류혜영), 하상기(임성재) 등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래서 드라마가 끝날 때쯤에는 원탑 드라마가 아닌 이들 모두가 주인공인 드라마로 인지되었다. 

 

이런 방식은 저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애초에 보여줬던 것이기도 하다. 여러 인물들이 저마다의 개성과 매력을 드러내고, 그들만의 갈등 서사들을 꺼내놓고 직업적 사건들과 함께 풀어나가는 과정이 그려진다. 어느 한 사람에게 무게 중심이 쏠리지 않고 균질하게 초점이 배분되기 때문에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일종의 ‘선택권’이 주어진다. 누군가를 이종석을 중심으로 보지만, 누군가는 임성재를 중심으로 보고 또 누군가는 문가영, 강유석, 류혜영을 중심으로 볼 수 있게 되는 것. 

 

그래서 드라마의 끝에서 임성재라는 배우의 존재감이 갈수록 무게감을 갖게 되는 지점에서 <서초동>이라는 드라마의 진짜 저력이 드러난다. 그저 일 열심히 하는 변호사로만 보였던 하상기가 가난했던 자신이 변호사로 성장할 수 있게 해준 도움의 손길이 있었다는 게 드러나고,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되려 하는 모습은 소박하지만 이 캐릭터의 매력을 한층 높여 놓았다. 드러내려 하지 않고 속 깊은 모습이 주는 매력이 쌓여갈 때, 대표인 김류진(김지현)과의 로맨스 또한 기대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울 정도였으니, 이 캐릭터의 힘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알 수 있다. 

 

좋은 작품이 좋은 캐릭터에 달려 있다는 건 상식이지만, 그런 캐릭터들이 줄줄이 많은 드라마라는 건 예외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슬기로운 의사생활>도 그랬지만 <서초동>도 그런 캐릭터들을 줄줄이 만들어 놓아, 특별히 전체 서사를 끌고 가는 메인 사건이 없어도 시청자들의 눈을 떼지 못하게 했다. 사건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자꾸만 그 인물들이 계속 보고 싶어서 찾아보게 된다고나 할까. 

 

정반대로 말하면 극적 서사가 약했다고 볼 수 있지만, 대신 매회 꽉 채워진 디테일한 법정 사건들이 있었고, 무엇보다 이 사건들과 연결되는 매력적인 변호사들의 서사가 존재했다. 이건 아무래도 실제 변호사인 이승현 작가의 독특한 ‘경계인’의 위치가 만들어낸 장점일 게다. 실제 변호사와 드라마 속 변호사의 이야기를 써야 하는 작가 사이에 선 그 중간자적 위치가, 지나치게 극적이지도 그렇다고 너무 밋밋하지도 않은 현실적이지만 흥미로운 이야기를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런 작품이 가진 장점 중 하나는 무한한 시즌제의 확장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제목부터가 <서초동>이다. 서초동에 위치한 아무 변호사 사무실을 배경으로 새로운 매력을 가진 변호사들을 등장시켜, 새로운 사건들을 배치해 시즌제를 이어가도 아무런 무리가 없다. 전작과 새 시즌의 연결고리 정도로 한두 명의 동일한 배우가 출연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별 문제는 안 된다. 중요한 건 <서초동>이 보여준 톤 앤 매너를 유지함으로써 그것만으로도 시즌2라는 걸 누구나 인지하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의사나 변호사처럼 최근 들어 실제 그 전문직에 종사하는 이들이 작가로 데뷔해 쓴 작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전문직 드라마라고 하면 어딘가 극적인 장르물을 떠올리곤 했지만, 이제 이들의 등장은 진짜 리얼한 전문직의 세계를 기대하게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결국 사건 그 자체보다(사건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이들 전문직 종사자들은 당연히 그 리얼한 사건들을 갖고 있다는 의미에서) 어떻게하면 매력적인 인물을 창출해내는가이다. 임성재 같은 매력적인 배우가 재발견될 수 있는 작품인가 아닌가에 성패가 달려 있다는 것이다.(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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