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기록' 불공평한 세상, 박보검을 응원할 수밖에 없는 이유

 

"요즘은 부모가 자식한테 온 평생이야." tvN 월화드라마 <청춘기록>에서 원해효(변우석)의 엄마 김이영(신애라)은 사혜준(박보검)의 엄마 한애숙(하희라)에게 그렇게 말한다. 아들들은 친구지만, 한애숙은 김이영의 집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처지다. 입던 옷을 마치 선심이라도 쓰듯 김이영이 내주면 한애숙은 속도 좋게 잘도 받아 집으로 가져온다. 사실 자신의 사는 모양이 김이영과 비교되는 건 그러려니 하는 한애숙이다. 하지만 자식의 인생을 비교하고 나서자 한애숙도 참기가 어렵다.

 

"그런 세상은 죽은 세상이죠. 부모가 온전히 커버해준다는 게 어떻게 가능해요?" 그렇게 대거리를 하지만 속으로는 그게 현실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다. 자신의 자식이 자신처럼 살 거라는 말에 발끈하고는 있지만. 한애숙은 아들에게 친구 집에서 가사도우미 일을 하게 됐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아들이 그 일로 기죽어 산다면 자신은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사혜준 역시 어찌 고민이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 착한 아들은 엄마에게 엄마 인생이니 엄마 마음대로 하라며 이렇게 말해준다. "생각해보니까 엄마 인생하고 내 인생하고 다른 데 내가 왜 엄마 인생 선택해줘야 돼? 내 인생도 골치 아파 죽겠는데."

 

부모의 인생과 자식의 인생은 다른 것이라는 아들의 이야기를 맞장구 쳐줬던 한애숙이지만 그건 과연 사실이었을까. 세월이 흐르고 한애숙은 경사진 골목길을 오르며 혼잣말로 넋두리를 한다. "거짓말. 어떻게 부모가 자식한테 사기를 치냐? 어떻게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는 형편은 나아지지도 않니? 우리 아버지가 부자였음 내가 이렇게 까진 안됐어... 나쁜 년. 엄마 아버지 원망하는 거야? 보고 싶어. 엄마 보고 싶은데.. 살아있음 내가 진짜 잘해줄 건데. 아휴 진짜 주책이다. 왜 혼잣말을 해. 왜 살수록 엄마를 닮아가냐."

 

<청춘기록>의 현실인식은 냉정하다. 누구나 노력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섣부른 판타지를 먼저 말하지 않는다. 사혜준이 처한 현실이 그렇다. 그는 친구 원해효의 진심어린 배려를 고마워하지만 그가 성취하고 누리고 있는 것들이 그가 가진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는 걸 알고는 마음이 불편해진다. 한남동에 산다고 하면 그저 다 잘 사는 사람이라고 치부하는 세상이지만, 자신은 그 곳에 살아도 그렇지 않다는 걸 안다. 친구 도움으로 화보 동반 촬영에 나서고, 엄마는 그 친구의 집에서 가사도우미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간다.

 

그의 매니저가 되겠다고 자처하고 나선 이민재(신동미)는 영화 캐스팅에서 원해효가 되고 사혜준이 떨어진 게 실력 때문이 아니라 인지도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리며 모든 걸 잠시 포기하고 군대에 가겠다는 사혜준을 만류한다. 행복이 별거냐며 오늘이 즐거우면 된다 말하는 사혜준에게 이민재는 뼈 때리는 충고를 던진다.

 

"갖고 태어난 거 없으면 평생 가난하게 살아야 돼. 나아지지 않아. 보통 그걸 서른이 넘어서 깨달아. 20대는 꿈꿀 수 있고 이룰 수 있다는 환상도 갖거든? 똑똑한 애들은 20대에도 깨달아. 이룰 수 없는 꿈보단 돈을 벌자. 근데 넌 그 꿈에서 아직도 못 헤어 나오고 있어. 왜 니 인생의 기준이 최세훈 감독이야? 아 그 감독님 훌륭해. 그치만 그 감독님도 틀려. 네가 맞을 수 있어. 남은 시간 1초까지 다 쓰고 수건 던져."

 

가진 것 없이 태어난 청춘들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을 이 드라마는 냉정하게 알려주는 것에서 시작한다. 보다 절박하게 남은 1초까지 다 써야 겨우 무언가를 해낼 수 있는 현실. 이런 현실 앞에 놓여 있어서인지 사혜준과 안정하(박소담)가 만나 서로에게 건네는 자그마한 호의나 위로는 그 무게감이 달라진다.

 

갑자기 비가 내리자 우산을 사가지고 온 사혜준은 그 우산을 안정하에게 가져가라며 자기 동네에는 비가 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자 안정하는 같은 서울인데도 어디는 비가 오고 어디는 비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신기하다고 한다. 그건 마치 이들이 처한 현실을 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는 곳에 따라서도 비를 맞는 청춘들과 그렇지 않은 청춘들이 나눠지는 현실. 안정하는 홀로 버스정류장에서 우산을 같이 쓰고 연인들이 떠나간 자리에 혼자 앉아 있던 기억을 떠올린다. 사혜준이 건네준 우산은 안정하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준다. 헤어져 혼자 집으로 가는 길이 외롭지 않게 느껴진다.

 

<청춘기록>이 담고 있는 건 가진 것 없이 태어난 청춘들 앞에 놓인 냉정한 현실이다. 그들은 꿈을 꾸지만 그것은 쉽게 이뤄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들은 보다 현실적인 삶을 살라고 하고 심지어 막장드라마 같은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자식의 꿈을 가로막기 위함이 아니라, 그것이 이뤄질 수 없는 꿈이라는 걸 알기에 자식이 상처받는 게 싫어서다.

 

과연 이 냉정한 현실 속에서 사혜준과 안정하는 자신의 꿈을 향해 나갈 수 있을까. 결코 쉽지 않은 길이겠지만 시작부터 불공평한 출발선에 서 있는 이들이 그걸 해내길 응원하게 된다. 부서지고 깨지더라도 한 바탕 그 현실을 뒤집어 놓기를 바라고 상처 입은 영혼들이 서로를 보듬어주고 위로해주며 버텨내기를 바라게 된다. 현실에서는 결코 쉽게 일어나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 더더욱.(사진:tvN)

'비밀의 숲2', 보다가 졸았다는 이야기도 공감되는 까닭

 

너무나 많은 대사들이 그것도 너무나 빠른 속도로 쏟아져 나온다. 그 대사들 속에는 또 무수히 많은 인물들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그 이름을 모두 기억하고 있는 시청자가 아니라면 옆에 인물표라도 펼쳐 놓고 봐야 지금 저 대사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를 이해할 지경이다.

 

게다가 이들의 대사는 결코 직설적인 의미만을 담고 있지 않다. 그 말에 담긴 뉘앙스에 정치적 의도나 노림수가 들어있고, 어떤 대사는 주인공 황시목(조승우)이나 한여진(배두나)이 예리하게 파고들면서 상대방의 허점을 드러내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tvN 토일드라마 <비밀의 숲2>는 마치 '대사의 숲'처럼 느껴진다. 그 안에 들어서면 무수히 서 있는 대사 하나하나의 나무들이 둘러서 있어 자칫 잠시만 집중하지 않으면 길을 잃어버리게 되는.

 

<비밀의 숲2>가 다루려는 이야기는 더할 나위 없이 충분한 의미와 재미를 갖고 있다. 검찰과 경찰 사이에서 수사권을 두고 벌어지는 대립구도 속에서 서로 헤게모니를 잡기 위해 상대 조직의 비리를 찾아내고 그러다보니 조직의 이익과 직업적 윤리가 부딪치는 지점이 발생한다. 그 검겸협의회에 검찰 대표로 황시목이 경찰 대표로 한여진이 들어 있다는 사실은 조직의 이익과 배치되는 검찰, 경찰 각각의 비리를 마주한 이들이 과연 소신대로 직업윤리를 따라갈 것인가에 대한 흥미진진한 궁금증을 만든다.

 

게다가 어떻게든 자기 자리를 버텨내기 위한 욕망으로 여기저기 과거의 사건들을 들쑤시고 다니는 이 드라마의 촉매제 역할을 하는 서동재(이준혁)라는 인물도 사건을 흥미롭게 만든다. 결국 검경의 어떤 비리에 의해 덮여져 있던 사건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하면서, 그가 납치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그 범인을 찾기 위한 과정들이 펼쳐지는 것도 잘 짜여진 이야기 구조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문제는 이 과정들이 대부분 인물의 액션이 아니라 엄청나게 쏟아지는 대사들로 처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제아무리 흥미진진한 극적 상황들이 담겨져 있다고 해도 대사들만으로 드라마를 계속 몰입해서 보기는 쉽지 않다. 만일 시즌1에 감명을 받아 시즌2를 넷플릭스를 통해 보게 되는 외국인이라면 과연 이런 대사의 상찬을 제대로 이해할 수나 있을까.

 

그래서일까. 너무 많은 대사들 속에 들어가 빠져들다 깜박 졸았다는 이야기가 공감되는 면이 있다. 사실 제아무리 드라마를 즐겨보는 시청자라도 1시간 넘게 인물의 액션이 별로 보이지 않은 채 대사들을 쏟아내면 멍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일 게다. 전 동두천 서장 전승표(문종원) 같은 인물이 폭력적인 언성과 행동들은 그래서 마치 이런 분들을 위해 번뜩 정신이 들게 하려는 '놀람 교향곡' 같은 느낌을 준다.

 

서동재의 실종 이후 드라마가 정체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건 사건 전개가 멈춰서 있어서라기보다는 무언가 시각적인 정보들이나 액션이 별로 없어서다. 박광수 변호사의 죽음에 의문을 품고 그가 죽었던 장소를 다시 가보거나, 서동재가 실종된 장소를 여러 차례 가보는 장면들 같은 인물의 장소 이동 정도만 등장할 뿐.

 

물론 이런 '대사의 숲'에 깊숙이 들어오다 보니 생겨나는 욕망들도 있다. 그것은 대사의 숲이 만들어낸 드라마 시청의 '고구마' 때문에, 이제는 좀 더 인물들이 움직이고 오리무중이던 사건의 진실이 드러나는 드라마 시청의 '사이다'에 대한 더 심한 갈증이다. 과연 <비밀의 숲2>는 이제부터라도 시청자들에게 대사의 숲 바깥으로 나오는 사이다를 선사할 수 있을까. 이미 그 숲에 갇혀 어쩔 수 없이 드라마를 보고 있는 시청자들의 갈증이 느껴진다.(사진:tvN)

'앨리스', 얽히고설켜도 김희선과 주원이 있어 따라가게 되는 건

 

만일 SBS 금토드라마 <앨리스>의 세계관을 제대로 이해하려 한다면 아마도 머리가 지끈해질 게다. 처음부터 등장한 '시간여행'이라는 세계가 먼저 시청자들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든다. 2050년 시간여행이 가능해진 세계, 그 앨리스라는 시스템을 만든 과학자가 바로 미래에서 유민혁(곽시양)과 함께 1992년으로 온 윤태이(김희선)다. 그는 모든 걸 종말로 이끌 수 있는 예언서를 찾기 위해 과거로 오지만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앨리스로 돌아오지 않고 과거에 남아 아이 박진겸(주원)을 낳는다. 윤태이는 박선영이라는 이름으로 진겸을 키우지만 드론이 나타난 어느 날 살해당한다.

 

그런데 형사가 된 진겸이 엄마와 똑같이 생겼지만 괴짜 교수인 윤태이를 만나면서 드라마는 시청자들을 혼돈에 빠뜨린다. 진겸은 그를 진짜 엄마로 착각하며 껴안고 눈물을 흘리지만 차츰 그가 자신의 엄마와는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엄마가 남긴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타임카드'를 갖고 다니던 중 자동차 사고를 당하며 카드가 작동해 과거로 넘어간 진겸은 대학생인 윤태이를 만나고, 그 시간대에 박선영이 있다는 걸 확인하고는 두 사람이 다른 존재라는 걸 알게 된다.

 

시간여행을 다루는 장르물들을 염두에 두고 들여다보면 박선영과 윤태이가 동시에 서로 다른 인물로 공존한다는 사실이 가능한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앨리스>에서는 죽은 딸을 살리기 위해 미래에서 온 은수모(오연아)가 과거의 자신을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른바 '타임 패러독스'가 떠오르는 이 장면은 시간여행이라는 세계관만으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즈음에 <앨리스>는 이 드라마의 세계관에 시간여행과 함께 겹쳐져 있는 '평행세계'를 드러낸다. 이른바 '미래인'과 '과거인'이 공존할 수 있고, 그들은 생긴 건 같아도 전혀 다른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 <앨리스>의 세계관은 이 시간여행 시스템을 통해 미래인들이 저 마다의 목적(주로 죽음 같은 이별로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이들을 시간여행을 통해 만나는 목적)으로 과거를 여행한다. 하지만 그 여행 속에서 은수모처럼 미래인들은 과거에 집착하며 사건을 일으킨다. 앨리스 시스템은 그런 일들을 과거인들 모르게 처리하는 일을 한다.

 

<앨리스>는 양자역학이 등장하고 그래서 슈뢰딩거 고양이 실험의 이야기가 은유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사실 과학에 그만한 관심이 없는 이들로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드라마를 굳이 과학까지 공부해가며 볼 필요는 없다. 그런 설정들이 어떤 세계관을 그리고 있는 것인가만 이해하면 충분히 즐길 수 있으니 말이다.

 

사실 과거와 미래를 오가고, 평행세계로서 과거인과 미래인이 공존하는 <앨리스>의 세계관은 복잡하다. 중요한 건 이 시스템을 통해 미래에서 온 어떤 세력들이 과거인들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앨리스에서 일하는 이들과는 다른 무리들이다. 그래서 드라마는 그 세력과 싸우게 되는 박진겸과 윤태이 그리고 아마도 유민혁 또한 그들을 돕는 이야기로 전개되지 않을까 예상하게 만든다.

 

도대체 과거에 어떤 일이 벌어졌고 그것이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가 얽혀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결코 <앨리스>는 쉬운 드라마는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복잡한 드라마가 의외로 편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그것은 드라마가 일일이 이런 세계관을 설명하는데 시간을 들이기보다는 인물들에 더 집중하고 있어서다.

 

윤태이와 박진겸은 이 복잡한 미로 속에서 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캐릭터들이다. 물론 윤태이는 미래에서 과거로 넘어가 박선영이 되어 살아가며 박진겸과 모자지간의 절절한 사별의 순간을 만들어내지만, 미래로 가기 전 현재의 과학자로 박진겸과 만나 연인 관계 같은 케미를 보여준다. 모자지간과 연인관계를 오가는 이 설정들은 시간여행과 평행세계라는 세계관 속에서 이해해야 하는 다소 복잡한 것이지만, 윤태이와 박진겸 사이의 오가는 감정들로 표현되고 있어 시청자들은 의외로 쉽게 몰입할 수 있다.

 

이걸 가능하게 해주는 건 역시 연기자들의 공이다. 20대, 30대, 40대의 윤태이를 오가는 연기를 보여주는 김희선은 사실상 이 드라마가 흔들리지 않게 만들어주는 중심 축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내고 있고, 그와 함께 다양한 감정들을 끄집어내는 주원 역시 시청자들이 드라마에 빠져들게 만드는 힘이 되어주고 있다. 복잡한 세계관을 가진 드라마지만, 흔들리지 않는 연기력으로 서 있어 이들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길을 잃지 않는다고나 할까. 물론 앞으로 그 복잡한 세계관과 많은 떡밥들이 어떻게 풀어질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 또한 적지 않지만.(사진:SBS)

'악의 꽃', 게임 체인저 김지훈이 끄집어낸 이준기의 흑화

 

놀라운 반전의 연속이다. tvN 수목드라마 <악의 꽃>은 게임체인저 백희성(김지훈)이 깨어나면서 이야기의 흐름이 또 바뀌었다. 남편이 도현수(이준기)라는 사실을 숨기고 살아왔다는 걸 차지원(문채원)도 또 그의 동료형사 최재섭(최영준)도 알게 됐지만 그들은 모두 그 사실을 덮어주려 했다. 그것은 차지원도 최재섭도 도현수와 그 누나 도해수(장희진)가 겪은 비극을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도민석(최병모)이 연쇄살인범이라는 사실 때문에 마을 사람들에 의해 마녀사냥을 당한 도현수는 그 충격으로 아버지의 환영을 보게 됐고 그래서 스스로가 귀신이 씌웠다 믿기 시작했다. 도해수가 마을 이장을 살해한 건 그를 범하려한 탓도 있었지만 그가 동생을 괴롭히는데 앞장선 인물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결국 그 살인사건으로 죄를 스스로 뒤집어쓴 도현수는 신분을 위장한 채 백희성으로 살아가게 됐다.

 

문제는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던 진짜 백희성이 눈을 떴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두 명의 백희성이 존재하게 됐다는 뜻이고, 그들 가족과 도현수 사이에 벌어진 일들을 덮기 위해서는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백희성이 깨어났다는 사실을 모르는 도현수는 그의 아버지 백만우(손종학)를 도민석의 공범으로 의심하고 그를 궁지에 몰아 체포하려 하지만 백희성은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이 사실을 모두 알고는 거꾸로 역이용하기 시작한 것.

 

그 집에서 일하던 가사도우미를 살해한 백희성은 도현수의 지문까지 사체에 남겨 그에게 누명을 씌우고 결국 차지원마저 남편을 의심하게 만든다. 형사로서 증거까지 나오게 되자 차지원은 남편 도현수에게 수갑을 채우려 하지만 그 때 도현수에게 아버지의 환영이 나타난다. 아버지는 말한다.

 

"네 엄마도 나를 사랑한다고 믿었어. 근데 네 엄마가 사랑했던 건 내 허상일 뿐이었지 내 본 모습을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결국 니들까지 버리고 내 곁을 떠나 버렸지. 사랑은 굉장히 간사한 감정이야. 아주 교활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착각을 일으키고는 더할 나위 없는 배신감을 주지. 현수야 잘 새겨들어. 살면서 누군가를 믿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면 그건 네가 나약해지고 있다는 증거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야."

 

이 장면은 이 드라마가 그려내고 있는 '악'이 어떻게 피어나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도현수가 아버지의 환영을 보게 된 건 마을 사람들이 그를 믿지 못하고 귀신 들린 사람이라 의심하며 심지어 아버지의 공범으로 몰아세웠기 때문이었다. 악은 이처럼 누군가의 '의심'에 의해 피어난다. 도민석이 그러했던 것처럼.

 

도현수는 아내 차지원과의 단란한 가정을 통해 그 악을 지워내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믿음과 신뢰가 만들어내는 힘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그것은 도현수가 자신을 숨긴 채 백희성으로 살아왔을 때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그의 정체가 드러난 후에도 차지원은 변함없는 사랑과 신뢰를 보내지만, 깨어난 진짜 백희성은 이제 거꾸로 도현수인 척 위장해 살인을 저지르고 누명을 씌운다. 그 누명은 차지원이 눌러 놓았던 의심을 깨워내고 그 의심은 도현수가 애써 지우려 했던 아버지의 환영을 다시 끄집어낸다.

 

<악의 꽃>이 놀라운 건 바로 이런 지점 때문이다. 사건이 끊임없이 전개되고 새로운 게임체인저의 등장으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지만 그 사건들을 통해 사랑과 신뢰 그리고 악의 탄생 같은 인간의 근원적인 면들을 탐구해낸다는 것. 그건 결코 이 작품이 그저 흔한 스릴러도 멜로도 아닌 그 이상을 추구하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물론 멜로와 스릴러라는 이질적인 장르를 완벽한 균형으로 시너지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악의 꽃>은 충분히 칭찬받을만한 작품이다. 하지만 그 장르의 결합이 사랑과 악이 어떻게 탄생하고 어떻게 변화해가는가를 담아냈다는 건 이 작품에 그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게 만든다. 도현수가 갑자기 흑화되어 아내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장면마저 공감되게 만드는 힘. 이런 게 가능한 건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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