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자>, 그들의 대사에 담긴 인간관

 

<추적자>를 보다 보면 고통스럽지만 고개 끄덕이지 않을 수 없는 공감을 접하게 된다. 이 시대 서민들의 아버지를 대변하는 백홍석(손현주)에 대한 깊은 연민과 동정을 갖게 되면서도, 그를 핍박하는 욕망과 권력의 화신들인 서회장(박근형)과 강동윤(김상중)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백홍석보다 훨씬 더 많은 서회장과 강동윤이 쏟아 낸 명대사로도 나타난다. 이 명대사들 속의 그 무엇이 우리를 통감하게 했을까.

 

'추적자"(사진출처:SBS)

“동윤아, 내가 민성이 만할 때, 명절 때마다 동네에서 소싸움을 했다 아이가. 거기서 내리 몇 년을 이긴 황소가 있었다. 글마 그게 어째 죽었는지 아나? 껄껄껄 모기한티 물리 죽었다. 지보다 두 배나 더 큰 놈들을 넙죽넙죽 넘기던 놈이 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모기한테 물려죽었다 아이가?”

 

강동윤이 대선에서의 승리를 장담하자 서회장이 던지는 이 대사에는 큰일을 그르치는 것이 아주 사소한 것에서 비롯된다는 내용이 비유적으로 담겨있다. 하지만 이 비유 밑에 깔려있는 건 세상을 ‘싸움’으로 바라보는 서회장의 시선이다. 강동윤의 대사처럼 그들에게는 “누군가 꿈을 이루면 누군가는 꿈을 잃는 법”이고, “큰 마차가 먼 길을 가다보면 깔려주는 벌레도 있기 마련”이다. 이 무한 경쟁 속에서 꿈을 잃지 않으려면 꿈을 반드시 이뤄야 하고, 벌레가 되지 않으려면 마차가 되어야 하는 권력욕이 탄생한다.

 

권력에 대한 강박은 세상이 승자독식의 구조라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이 세상에서는 “용서도 힘 있는 사람만이 하는” 것이다. “힘이 없는 자가 할 수 있는 것은 포기뿐”이다. 모든 것이 권력에 맞춰져 있는 그들에게는 사랑마저 정치 같은 게임이다. “사랑은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게임이야. 정치도 그래, 먼저 찾아가는 사람이 지는 거야. 상대방이 찾아오게 만들어야지.” 이렇게 말하는 강동윤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그 누구에게도 먼저 찾아갈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 이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그들은 못할 것이 없는 괴물이 되어간다. “욕 안 먹고 어떻게 이 자리에 올라왔겠노, 지원아. 사람들이 내보고 손가락질 하고 한오그룹이 악덕그룹이라고 하제? 그른데 지 아들이 한오그룹 입사하면 사방으로 자랑하고 다닌다.” 그 괴물은 자신의 행동을 인간은 본래 그런 종자라고 단정함으로써 이 분열적인 상태를 버텨나간다. 자신이 괴물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세상이 괴물이라고 말하는 것.

 

“이 나라 국민들이 동윤이에게 속고 있다고 생각하나? 한오그룹 사위가 서민을 위해서 정치한다고 하는데 이 나라 국민들이 그걸 진짜 믿고 있다고 생각하나? 동윤이 공약을 한번 보래이. 집 가지고 있는 놈은 집값 올려준다 하지, 땅 있는 놈은 땅값 올리준다 카제, 월급쟁이한텐 봉급 올려준다 하제? 다 즈그들한테 이익이 되니까 지지하는 기다. 그런데 집값 올려준다고 해서 지지한다고 하면 지가 부끄러운 기라. 그래서 개혁의 기수다 뭐다 해서 지지하는 기다. 국민들은 자기가 자길 속이고 있는 거다.”

 

서회장의 이 대사 속에는 인간의 선한 의지에 대한 일말의 기대나 희망이 없다. 이것은 서회장이 자신을 똑 닮았다고 말하는 강동윤의 인간관과도 맞닿아있다. “사람이 그렇죠. 모두들 말은 그럴듯하게 합니다. 우리의 우정은 영원하다. 법과 정의를 지키는 파수꾼이 되겠다... 하지만 선택의 순간이 되어서야 그 사람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30억이면 친구의 딸도 죽이고, 총리 자리 준다면 평생을 지켜 온 신념도 버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들을 하지요. 난 어쩔 수 없었다고.. 사람은 똑같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면 많은 것들이 쉬워지죠.” 일종의 인간에 대한 포기 선언이다.

 

하지만 그들 자신도 인간인 이상, 이러한 인간관이 분열적이고 공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막연하게나마 이 권력욕이 어느새 자신을 잡아먹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뜻이 사라져버린 욕망에 대한 무한 추구. 욕망의 욕망. 서회장은 젊은 시절 좋아했던 옆집 딸내미가 시집을 간 후 배운 술에 비유해 이 허무한 무한 욕망의 끝을 드러낸다. “두어 달 지나니 그 딸내미는 잊어버리고 술 먹는 버릇만 남은 거다. 지금은 그 딸내미 이름도 기억이 안 나고 술은 요새도 먹지 않나. 꿈이 그런 거다. 처음엔 페어한 세상을 만들겠다 뭐 하겠다 하면서 정치판에 끼어들지만 인제 너는.. 내가 잊어버린 그 딸내미 이름처럼 처음 하겠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권력을 갖겠다는 욕심만 남은기라.”

 

그들은 이미 욕망의 쟁취가 그 욕망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어느새 욕망하는 기계가 되어버린 것이다. 서회장은 딸 지수에게 남편 강동윤을 버리지 못하자 이렇게 말한다. “지수야, 사람이 무엇인가를 간절히 가지고 싶을 때는 진짜로 그게 좋아서 그라는 게 아이다. 내 앞에 없으니까 만지고 싶고, 주머니에 넣고 싶고, 안 그러면 죽을 것 같고 하제? 근데 막상 가지면 별것도 아이다.”

 

권력욕의 화신이 자신을 잡아먹어버린 이 괴물들은 자신 속의 수많은 얼굴들을 가면 아래 감추고 살아간다. 그 얼굴의 실체를 보게 된 서회장의 막내 딸 지원(고준희)에게 강동윤은 자신의 수많은 얼굴을 드러내고 그것이 모든 인간들의 실체라고 주장한다. “난 다정한 형부, 개혁의 기수, 가난한 집의 아들, 아내의 사고를 숨겨서라도 권력을 가지고 싶던 정치인이다. 이게 전부 나다. 사람은 앞도 있고 옆도 있고 뒤도 있는데 처제는 내 한 부분만 본거다.” 하지만 이런 분열적인 상태는 심지어 아버지가 딸을 내치는 상황마저 정당화시킨다. “누가 그카드라 시상에서 제일 위험한기 사랑에 빠진 딸이라꼬. 그 누고 자명고 찢은 공주도 나라 망하게 안했나. 내한테는 오늘부터 딸래미는 지원이 하나뿐이데이.”

 

<추적자> 속에 등장하는 이 ‘인간 포기선언’의 명대사들은 아프게도 우리를 고개 끄덕이게 한다. “적어도 괴물은 되지 말자”는 어느 영화 속 명대사가 허무한 다짐처럼 여겨지는 건 우리네 현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 권력욕에 대한 비뚤어진 행동들이 이제는 마치 모든 인간들이 본래 그렇다는 식으로 긍정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하지만 이렇게 포기된 인간으로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꿈을 꿀 수 있을까.

 

그래서 이 괴물이 된 그들이 내뱉는 명대사들의 깊은 통감을 지나치고 나면 우리 눈앞에 비로소 “난 수정이 아빠니까”라는 단 한 마디를 던지는 백홍석이 다시 보이게 될 것이다. 인간 포기 선언이 일상화되어가는 세상에 던지는 그의 이 한 마디는 그래서 그 어떤 명대사보다 더 뭉클하고 절절하게 다가온다. 그런 점에서 <추적자>는 그 잃어버린 ‘인간’을 추적하는 드라마인지도 모르겠다.

<추적자>, 왜 강동윤과 서회장의 대결에 집착할까

 

루저와 약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흔히들 변변한 직업도 없고 돈도 없고 배경도 없어 그저 그렇게 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을 낮추어 루저(패배자)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들이 왜 이런 상황에 몰렸는가를 사회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루저란 표현은 지나치다고 여겨진다. 이들은 열심히 노력했지만 이 태생적으로 모든 게 정해져버리는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사회적 약자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다시 묻자. <추적자>에서 백홍석(손현주)은 사회적 약자인가 아니면 루저인가.

 

'추적자'(사진출처:SBS)

아마도 우리의 도덕적인 의식은 백홍석을 사회적 약자라고 부를 것이다. 하지만 도덕적인 선택이 진실인 것은 아니다. 드라마가 그리고 있는 백홍석이라는 인물에 대한 깊은 연민과 동정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 끊임없이 권력의 힘에 의해 당하기만 하는 인물이 어딘지 답답하게 여겨질 수 있다. 사실 <추적자>라는 드라마가 백홍석과 강동윤(김상중)의 대결구도로 끝까지 달려가지 않고 중간에 갑자기 강동윤과 서회장(박근형)의 대결구도로 바뀐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백홍석이라는 사회적 약자가 끊임없이 실패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루저 같은 이미지로 바뀌게 되면 드라마의 매력 또한 사라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반을 넘어서면서 <추적자>에 더 집중되는 관심은 백홍석과 그가 밝혀내려는 진실이 아니다. 오히려 대통령이 되려는 야심가 강동윤과, 그를 막는 것과 도와주는 것 사이에서 주판을 튕기고 있는 서회장 사이에 벌어지는 팽팽한 대결구도다. 과연 강동윤은 서회장과의 정치적 대결을 이겨내고 대통령이 될 것인가. 아니면 서회장이 강동윤의 야심을 무참히 꺾어버릴 것인가. 최근 몇 회 동안 <추적자>에 보인 언론의 관심은 백홍석이 아니었다. 그것은 서회장과 강동윤을 위시하여 그 변화를 만들어내는 서지수(김성령), 신혜라(장신영) 같은 인물들이 보여주는 반전드라마였다.

 

백홍석과 강동윤의 대결이 뻔해 보이는 반면, 강동윤과 서회장의 대결은 흥미진진하다. 그런데 이렇게 되자 기묘한 상황이 생겨난다. 백홍석과 강동윤의 대결지점에서 강동윤이란 인물은 절대적인 악으로 위치하지만, 강동윤과 서회장의 대결에서는 다르게 그려진다는 점이다. 이발사 아버지를 둔 소시민의 아들 강동윤의 성공스토리가 그 안에는 깔려 있다. 성공하기 위해 뭐든 했던 이 인물은 어쩌면 우리네 근대사의 아버지들을 표징하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성공을 향해 질주하는 강동윤이란 인물에 묘한 동정심을 갖게 된다. 무표정한 얼굴, 그 뒤에 놓여진 처절함 같은 것.

 

우리는 드라마를 통해 강동윤 같은 인물을 만난 적이 있다. <하얀거탑>의 장준혁(김명민)은 대표적인 사례다. 성공하기 위해 뭐든 하고, 누구와도 손을 잡는 속물적인 인간이지만 많은 대중들은 그가 그토록 성공하려는 그 마음을 동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런 인물은 남성 캐릭터에만 있는 게 아니다. <선덕여왕>의 미실(고현정)도 넓은 의미에서 이들과 같은 부류다. 성공을 향한 강력한 욕망과 그 좌절의 캐릭터. 이런 부류의 캐릭터들에 열광하는 건 아마도 우리네 불행한 근대사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강동윤의 말처럼 “마차가 달려가다 보면 바퀴에 벌레가 밟히기도 한다”는 것이 우리네 개발시대의 정서가 아니었던가. 그렇게 발밑과 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살피지 않고 강박적으로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네 아버지들. 우리가 아버지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래서 양가적이다. 어떤 이들이 개발의 결과를 놀랍도록 눈부신 성장으로 바라보는 반면, 어떤 이들은 그 개발이 누군가를 짓밟은 결과로 인해 생겨난 것으로 바라본다. 이것은 자식이 아버지를 바라보는 양가적인 시선과 겹쳐진다.

 

물론 백홍석이라는 아버지는 <추적자>라는 이전투구의 장에서 없어서는 안 될 구원 같은 존재다. 사실상 강동윤과 서회장의 복마전이 허용되는 이유는 백홍석이라는 절대적인 선이 한 편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피해자이지만 가해자가 되어 쫓기고 있는 그가 눈앞의 진짜 가해자에게 총을 겨누고 있으면서도 쏘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문제 해결 방식이 단순한 복수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진실을 밝히겠다는 것. 백홍석은 그저 서민을 대변하는 아버지처럼 보이지만 이 부분에서는 인간적인 차원을 넘어선 인물처럼 보인다. 자식을 죽이고 아내마저 죽게 만든 장본인을 눈앞에 두고 복수가 아닌 진실을 선택한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일까.

 

하지만 이 절대 선으로서의 백홍석이라는 인물보다 강동윤이라는 인물에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은 <추적자>를 단순한 추적 장르물이나 복수극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아프게도 우리가 갖고 있는 성장과 성공에 대한 갈망(아마도 그토록 빠른 근대화를 가져오게 했던 동인이었을)과 그 결과로서 생겨난 희생들에 대한 죄의식이 겹쳐져 있다. 백홍석이 죄의식을 환기시키는 인물이라면, 강동윤은 여전히 욕동하고 있는 그 성공에 대한 갈망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다. 당신은 어떤 인물을 추적하고 있는가. 백홍석인가 강동윤인가.

<닥터 진>이 역사를 다루는 방식

 

“그러다가 이 사람에 의해 무고한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할 것이오. 그 억울한 죽음을 진의원이 책임질 수 있소?” 성난 민중들에 의해 깊은 상처를 입은 진주의 탐관오리 현감을 살리려는 진혁(송승헌)에게 영래(박민영)는 이렇게 묻는다. 하지만 “의원은 본디 사람을 가려가며 살리지 않는다”며 진혁은 진주 현감을 살려내고, 영래 역시 그를 도와준다. 하지만 바로 진혁이 살린 진주 현감이 영래의 오빠인 영휘(진이한)를 죽게 만든다.

 

'닥터 진'(사진출처:MBC)

그저 작은 시퀀스에 불과한 이야기 같지만 이 속에는 <닥터 진>이 역사를 다루는 방식이 담겨져 있다. 의사라면 마땅히 환자가 누구라도 일단 하나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 본분일 것이다. 하지만 그 환자가 히틀러라면? 그래서 죽을 인물이 살아나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게 만든다면? 이것은 생명에 대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닥터 진>은 현대에서 조선으로 던져진 천재 신경외과의 진혁을 통해 운명(역사)과 생명 사이에 놓여진 딜레마를 다룬다.

 

“모든 것을 본래대로 되돌려 놓아야 합니다.” 장안 최고의 기생 춘홍(이소연)은 진혁이 조선으로 와 행한 기적 같은 의술이 모든 것(아마도 운명 혹은 역사)을 어그러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그가 안동김씨 최고의 실세로 임금보다 더한 권세를 누리고 있는 좌상 김병희(김응수)를 살린 일은, 역사에 기록될 대원군이 꿈을 펼치기도 전에 죽음의 위기로 몰리는 이유로 작용한다. 역시 죽을 뻔한 영휘를 살려놓은 일 또한 진주 민란을 더욱 조직적으로 만들게 하고 결국 더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게 된다.

 

진혁은 그저 의사로서 눈앞에 상처입고 죽어가는 모든 이들을 환자로서 바라보았던 것뿐이지만,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역사는 뒤틀어지기 시작한다. 죽어야할 운명에 있는 이들이 살아나자 그들은 멀쩡해야 할 이들을 죽음에 몰아넣는다. 운명의 힘과 생명의 의지 사이에 벌어지는 대결. 이것은 단지 의사인 진혁에게만 해당되는 질문이 아니다. 결국 실패로 끝난 진주민란의 역사를 알고 있는 진혁이 그 민초들을 이끌고 있는 영휘에게 “이것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고 말하자, 영휘는 진혁이 해오던 말을 되돌려준다. “진의원은 병자가 죽을 것이 뻔하다고 손을 놓으시오? 그러니 내게도 저들을 모른 척 하라 하지 마시오.”

 

이미 역사를 알고 있는 진혁에게 진주민란 같은 사건의 결과는 운명처럼 정해진 일로 여겨진다. 그래서 불나방처럼 역사의 불꽃 속으로 뛰어드는 영휘를 막으려 한다. 하지만 진혁은 또한 알고 있다. 자신이 한 죽을 생명을 살려 운명을 바꾸게 될 때 역사도 엄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것을. 여기에 진혁이 처한 딜레마가 있다. 그는 자신으로 인해 조선말의 역사가 다른 방향으로 틀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그래서 가까운 사람들이 죽지 않게 할 수 있으면서도), 그 역사를 바꾸는 것이 두렵다.

 

게다가 그는 의사가 아닌가. 의사라는 직업으로 돌아가면 그는 역사와 상관없이 모두를 환자로 바라보며 살려야 하는 것이 그의 본분이다. 그러니 이 지점에서 부딪침이 생길 수밖에 없다. 생명을 살리는 의사가 죽어야 할 인물을 살리면 그로 인해 역사가 바뀐다. <닥터 진>의 묘미는 바로 이 의학드라마와 사극을 타임리프라는 장치로 연결하면서 생겨나는 아이러니로 인해 진지해진다. 역사를 살릴 것인가, 생명을 살릴 것인가.

 

역사와 의술은 밀접한 관계에 있다. 페스트 같은 질병 하나는 중세의 역사를 바꾸었다. 페니실린 같은 항생제의 개발은 지금까지의 역사를 바꿔놓고 있다. 아마도 우리가 역사적인 인물이라 생각하는 수많은 이들이 생명을 위협받는 질병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 때마다 어떤 의사의 손길 하나는 이 역사의 흐름을 바꾼 것이나 다름없다. <닥터 진>이 그저 단순한 타임리프를 소재로 흥미로운 장면들(예를 들면 조선시대에 뇌수술을 하는 것 같은)만 보여주는 드라마가 아니라는 건 이런 역사와 생명에 대한 인식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닥터 진>은 장르적으로도 사극과 의학드라마가 가진 욕망의 부딪침을 잘 살려내고 있다. 사극이란 본디 갈등의 결과가 죽음으로 이어지는 드라마다. 그래서 이 현대극보다 극성이 강한 장르는 어찌 보면 죽음이라는 칼날 위에서 춤을 추는 인물들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런데 의학드라마는 죽어가는 이들을 살리는 것이 그 욕망이다. 따라서 이 두 장르의 욕망이 부딪치면서 만들어내는 기묘한 풍경은 <닥터 진>만의 독특한 매력이기도 하다.

 

<닥터 진>은 사극인가 현대극인가. 이런 질문은 이제 그다지 중요한 것도 아닌 시대에 접어들었다. 사극이 반드시 역사의 틀 안에 머물던 과거는 이미 지나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사극은 역사적 사실 그 자체보다 중요한 것이 그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닥터 진>은 그 어떤 사극보다 진지한 역사의식을 드러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와 생명의 의지 사이의 대결. 그저 박제처럼 정해져 있다 여겨졌던 역사가 사실은 무수한 생명들의 의지로 만들어지는 살아있는 결과물이라는 인식만으로도 <닥터 진>의 사극으로서의 가치는 충분하다 여겨진다.

백홍석, 우리 시대 아버지의 초상

 

그가 잘못한 것이라고는 가족을 위해 사회를 위해 열심히 일한 것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돌아온 결과는 실로 참혹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 뺑소니를 당했고 간신히 이어붙인 생명줄을 돈 앞에 무너져 내린 친구가 끊어버렸다. 딸의 죽음에 비통해하던 아내마저 죽음을 맞이하고 진실을 밝혀내려던 그는 오히려 범법자가 되어 쫓기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진실은 은폐되었고, 그렇게 돈과 권력으로 진실을 은폐한 이들은 정치 일선에서 ‘서민 운운’하며 정권을 잡기 위한 쇼를 한다.

 

'추적자'(사진출처:SBS)

형사로서 그토록 지키려 애쓴 법 질서가 이제 거꾸로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는 현실, 그 누가 법에 정의를 기대할까. <추적자>의 백홍석(손현주)은 그렇게 끝단에 몰려 세상의 추악한 진면목을 바라보게 된다.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강동윤(김상중) 앞에 총을 들이대지만 백홍석의 그 행동을 강동윤은 거꾸로 정치적 음모론으로 덮어버린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마음이 없는 강동윤과 같은 권력자들 앞에서, 우리네 정 많고 눈물 많은 수정이 아빠 백홍석은 무력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늘 땀에 절어 번질번질한 얼굴에 반쯤 정신이 나간 듯한 표정, 그리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듯한 눈으로 처연하게 이 더러운 현실을 바라보는 백홍석에 똑같은 가슴 먹먹함을 느꼈다면 우리가 사는 현실이 그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인식 때문일 게다. 도대체 우리네 서민들이 잘못한 것이 무엇인가. 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왔고 무엇보다 가족들을 위해 헌신했던 우리들이 아닌가. 그런데 권력자들은 저들끼리 권력을 잡으려고만 혈안이다. 그들은 서민을 외치지만 서민 정치는 좀체 보이지 않는다. ‘서민’이라는 이름은 이제 그들이 권력을 잡기 위해 호명하는 이름이 되어버렸다.

 

IMF가 터졌을 때 우리네 서민들이 잘못한 것이 무엇인가. 하지만 그네들의 사라져버린 도덕성 위에 무너져가는 기업들을 회생하기 위해 저들끼리 공적자금이라는 이름으로 뽑아간 것은 서민들의 세금이었다. 잘못은 저들이 했지만 고통은 서민들이 겪었다. 수많은 전시행정들과 일관성 없는 정책들이 서민들을 향해 있었던 적이 몇 번이나 되던가. 백홍석이라는 이 시대 아버지의 초상을 바라보며 우리 또한 눈물이 나는 이유는 그의 진심이 보이기 때문이고, 그것이 처절하게 짓밟힌 현실이 보이기 때문이다.

 

<추적자>를 드라마 그 이상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이 진짜 서민들이 갖고 있는 정서에서 비롯된다. 사실 드라마적으로 보면 백홍석이 위기의 순간에 도주하는 장면이 어색하기 이를 데 없어 보인다. 강동윤 앞에 총을 들이대고 있는 백홍석을 향해 경호원이 총을 쐈다면 그 자리에서 사살했거나 그를 체포했어야 개연성이 있다 여겨지지만 사실 그런 것은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도 않는다. 그 자리에서 도주에 성공하는 백홍석을 시청자들이 마음 속에서 지지하는 마음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이것은 <추적자>가 단순한 드라마 이상이라는 반증이다.

 

그래서 <추적자>의 슬픈 아버지 백홍석을 보며 눈물을 흘린 시청자들은 그가 적어도 드라마 속에서라도 진실이 통하는 세상을 만나기를 희구한다. 우리를 닮아버린 백홍석이라는 아버지가 적어도 드라마라는 작은 공간에서나마 숨통을 틔기를 원한다. 그렇지 않다면 모진 현실을 드라마 속에서조차 확인하는 셈이 될 테니. 물론 섣부른 드라마의 판타지가 현실을 바꿀 수도 없고, 어떤 면에서는 바뀌지 않는 현실이 마치 바뀐 것인 양 호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그래도 백홍석이라는 우리 시대 아버지의 초상이 최소한 한 번은 웃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건 어쩔 수 없는 마음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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