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창대했다. 아니 창대함 그 이상이었다. 화려한 캐스팅은 물론이고 이게 TV 화면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현란한 영상들까지. 당연 드라마 첫 방에 대한 기대감은 컸다. 하지만 첫 방을 보고난 마음은 어딘지 허전하다. 아니나 다를까 첫 회에서 20% 가까운 시청률을 올리며 대박 드라마를 예고한 작품들은 중반을 지나면서 시청률이 뚝뚝 떨어졌다. 이른바 용두사미 드라마들이 걷는 운명이다. 왜 이런 현상이 최근 들어 자꾸 창궐하는 것일까.

'아이리스'의 스핀오프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아테나'에 대한 기대감은 클 수밖에 없었다. 드라마로서는 보기 힘든 완성도 높은 영상연출과 무엇보다 정우성, 차승원, 수애 같은, 영화가 왠지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배우들의 대거 출연. 게다가 태원엔터테인먼트의 작품이라는 것에 대한 신뢰감이 높았다. 게다가 예고편에 잠깐 등장한 수애의 플라잉 니킥 장면은 시청자들의 시선을 끌어 모았다. 우아함의 대명사처럼 여겨져 온 수애의 변신. 전작 '아이리스'의 김태희에서 어떤 아쉬움을 가졌던 시청자라면 수애의 그 장면 하나가 어쩌면 이 작품이 전작을 넘어설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을 하게 했을 지도 모른다.

폭발적인 액션 신들을 연거푸 선보인 첫 방은 2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기대가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4회까지 이 기대는 그대로 이어졌다. 007을 오마주한 정우성의 이태리 액션 장면과 잔인하지만 냉혹하게 적을 살해하는 수애의 동작 하나하나가 예술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부터였다. 볼거리는 충분히 충족되었는데, 스토리는 좀체 보이질 않았다. 납치와 구출이라는 단순한 스토리가 반복적으로 이어졌고, 그러자 '아테나'의 즐거운 볼거리는 이미 예측 가능해진 스토리 때문에 힘을 잃어갔다. 무엇보다 '아이리스'에서 이병헌이 김태희와 사탕 키스를 하며 만들어낸 강력한 멜로를 '아테나'에서는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이것은 드라마의 주 시청층인 중장년 여성층의 흥미를 잃게 만들었다. 시청률은 서서히 빠지고 있는 중이다. 물론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반등할 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애초에 기대했던 만큼의 몰입은 바라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런 상황을 예고라도 하듯 보여준 작품이 '도망자'다. '도망자'에 대한 기대감을 증폭시켜놓은 건, '추노'라는 명작을 만들어냈던 곽정환 감독과 천성일 작가의 후속작이라는 후광 때문이었다. 슬로우 모션으로 달리고 뛰고 넘어지는 비와 이나영의 액션으로 이루어진 예고편은 저 '추노'에서 장 혁이 테이블을 손으로 짚고 휙 날아올라 발차기를 하는 그 장면의 기대감을 재현했다. "이거 또 대박이구나!" 했다. 하지만 첫 방을 본 후의 느낌은 "이거 겉멋이 들어도 잔뜩 들었다"는 느낌뿐이었다. 얼만큼의 투자를 받았는지, 일본과 태국과 한국을 휙휙 순간이동하며 주인공들은 그 이색적인 배경 위에서 달리기를 반복했다. 첫 회는 아무래도 시선을 잡아끌어야 하니 그럴 수밖에 없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이 배경을 바꿔가며 달리는 시퀀스가 9회까지 지속되면서 시청자들의 반응은 싸늘해졌다. 아무리 볼거리라도 맥락을 찾기 어려운 스토리 속에서 계속 달리는 장면의 반복을 계속 지켜볼 시청자는 없었다. 결국 시청률은 반 토막이 났다. 9회부터 비로소 인물들이 국내로 들어오면서 스토리를 찾기 시작했지만 이미 늦었다. '도망자'는 완벽한 용두사미를 그려내며 시청자들로부터 도망쳤다.

한국 최초의 본격 정치드라마에 그것도 여성 대통령을 그리겠다고 야심차게 시작했던 '대물' 역시 마찬가지의 결과를 만들었다. 고현정이 그 대통령 역할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대를 키웠던 드라마는 그러나 작가와 PD가 교체되는 등의 내홍을 겪은 후, 스토리가 지지부진해지면서 서서히 하락하기 시작했다. 서혜림이라는 캐릭터의 연설은 처음에는 깊은 인상을 남겼지만 차츰 동어반복을 하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이 작품 역시 '도망자'와 마찬가지로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첫 방에서 최고 시청률을 찍은 후, 서서히 내리막을 걸었다.

안타까운 것은 최근 시작한 '드림하이'에서도 이런 징후가 엿보인다는 점이다. 이 작품은 배용준이 출연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것도 지금은 제2의 한류가 아이돌로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제1의 한류를 이끌었던 배용준이 아이돌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에 출연한다는 것 자체가 그 야심찬 기획을 엿볼 수 있었다. 여기에 실제 아이돌인 택연, 우영, 은정, 수지, 아이유가 박진영과 함께 등장한다는 것만으로도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드라마 예고편에서 택연이 자동차를 짚고 뛰어넘으면서 기대감을 높여놓은 장면이 드라마 상으로는 그다지 드라마틱한 설정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 실망감도 클 수밖에 없었다. 연출이 스토리가 가진 극적 상황과 맞닿지 않고, 그저 멋진 장면으로만 끝날 때, 그것은 겉멋에 그칠 수 있다. 여전히 배용준에 대한 기대감이 크지만, 아이돌들이 설익은 연기는 불안하다. 연기력을 보완해주는 것이 캐릭터여야 하는데, '드림하이'가 그럴 만큼의 스토리를 내장하고 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첫 방 시청률은 기대 이하로 10%대. 보통 드라마라면 성공적이라고 하겠지만 이건 배용준이 얼굴을 내민 드라마다.

결국 방영 전까지만 해도 한껏 기대를 하게 했던 드라마가 막상 방영되면서 서서히 실망으로 바뀌게 되는 이유는 대본 문제다. 그저 뒷심이 부족하다는 식의 그런 얘기가 아니다. 애초부터 기획은 창대했지만 충분히 매력적인 대본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기획은 연출도 가져올 수 있고, 연기도 가져올 수 있지만 대본은 가져올 수 없다. 대본은 말 그대로 작가에 의해 창조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역량 있는 작가에게 충분한 투자(시간적이든 물적이든)가 이뤄진 연후에나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방영 전이나 첫 방에서 연출이나 연기력으로 어느 정도 시선을 잡아끈다고 해도, 대본의 부재로 결국 고꾸라지는 상황을 맞게 되는 것이다. 포장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 안에 내용물이 부실하면 이제 시청자들은 외면한다. 그만큼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져 있다.

한류 초반에 우리는 이미 이 상황을 충분히 겪었다. 몇몇 연기자가 출연한다는 전제조건만으로도 해외의 투자가 될 수 있는 상황 속에서 한류의 거품은 만들어졌다. 많이 걷어내졌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이 거품은 남아있다. 무엇보다 작가에 대한 투자와 시스템이 절실하다. 그것이 없다면 나올 수 있는 건 겉멋만 가득한 드라마들뿐이다. 물론 그것으로 세계 시장은 어불성설이다.

실시간 드라마? 100% 사전제작? 무엇이 해답일까
흔히들 대본의 문제에서 가장 시급한 것으로, 사전제작이 되지 않고 실시간으로 만들어지는 쪽대본의 문제를 든다. 그러면서 늘 고개를 드는 것이 100% 사전제작 드라마다. 하지만 우리네 드라마 시장 상황에서 100% 사전제작으로 성공한 드라마는 전혀 없다. '로드넘버원'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미 다 제작되어 있는 상황에서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시청자들의 반응을 고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해외에서는 우리네 드라마의 실시간적인 제작이 경쟁력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것이 쌍방향적인 드라마를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시간 제작은 결국 완성도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안적인 것이 반 정도를 사전제작 하는 형태지만 이것도 정답은 될 수 없다. 문제는 어느 정도 제작되었는가가 아니라 이것을 충분히 감당해낼 수 있는 작가 시스템이 아닐까. 혼자, 혹은 한두 명이 몇 십부작에 이르는 드라마를 온전히 감당한다는 것은 작가에게도 무리지만, 작품에도 무리가 될 것이다.
(이 글은 시사저널(http://www.sisapress.com/)에 게재된 글입니다.)

사람 울리는 민폐 캐릭터의 탄생, '괜찮아, 아빠딸'의 강성

“그러던 중 자기를 만난거야 드디어. 자기가 진짜로 좋아지면서 내가 얼마나 후회스러웠는지 알아? 내가 살아온 게, 내 한심한 인생이. 미안해. 이 정도밖에 안 되는 놈이라서 너무 미안해. 자기 속이고 시작해서. 그렇게 알게 해서 너무 미안해. 자기가 떠날까봐 무서워서 말 못했어.” '괜찮아, 아빠딸'에서 진구(강성)가 애령(이희진) 앞에 하는 참회다. 이 참회로 인해 진구라는 어딘지 마마보이지만 정이 가는 독특한 캐릭터가 완성되었다.

'괜찮아, 아빠딸'의 진구란 캐릭터는 독특하다. 어찌 보면 그저 그런 돈 걱정 없이 자란 재벌가 망나니처럼 보인다. 여자들 뒷꽁무니나 졸졸 쫓아다니고, 그러다 사고 치면 쪼르르 달려와 부모에게 손을 내민다. 그런 식으로 결혼하고 헤어진 여자가 한둘이 아니다. 우유부단한데다 이렇다 할 일도 없고 그저 부모 덕에 빈둥빈둥 사는 전형적인 철부지 망나니 캐릭터가 바로 진구다.

이것만이 아니다. 진구란 캐릭터에게는 숨겨진 딸이 있는데, 다름 아닌 여동생이 바로 그 딸이다. 심지어 엽기적이라고 여겨질 이 가족관계 속에서 진구는 바로 그 딸로부터(물론 딸이 이 사실을 모를 때) 여자 뒤나 졸졸 따라다니는 오빠라고 질책 받는 그런 캐릭터다. 그러니 이 망나니에게 어쩔 수 없이 결혼하게 된 착하디 착한 애령이 불쌍해 보일 수밖에 없다. 진구는 민폐 캐릭터에 전형적인 악역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이 망나니 캐릭터가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애령을 만나고 나서부터 차츰 마음을 잡기 시작하더니, 그녀를 구박하는 시어머니에게 대거리를 하는 모습이 밉지만은 않다. 애령 덕분이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배워왔던 것처럼, 이 이상한 시댁식구들에게도 진심으로 대한다. 그녀를 사랑하게 된 진구는 이제 자신이 자포자기하듯 살아왔던 과거를 후회하기 시작한다.

결국 여러 차례 결혼을 했다는 것과, 여동생이 사실은 딸이라는 걸 알게 된 애령 앞에서 진구는 참회를 한다. 탕자의 귀환. 바로 이 드라마가 가진 미덕이자 매력이다. '괜찮아, 아빠딸'은 이제는 가진 것 없이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지만, 바로 아빠가 가르쳐준 덕목들 덕분에 주변 사람들까지 변화시키며 살아가는 딸들의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진다. 애령은 거의 팔려가다시피 진구의 집안에 며느리로 들어가지만, 그 선한 심성은 오히려 이 집안을 변화시킨다.

'괜찮아, 아빠딸'이 투박해도 어떤 깊은 감성을 건드리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부자랍시고 거들먹대고, 돈이면 뭐든 다 된다 생각하며 살아가는 그들에게, 이 가난하고 선한 자들이 변화의 불씨를 심어주는 것. 그래서 오히려 그들이 착한 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 참회하게 되는 것. 이 드라마는 무례한 현실을 뒤집는 카타르시스를 보여준다. 애령은 그 변화를 주는 동인이고, 진구는 그 변화하는 인물이다.

진구를 연기하는 강성이라는 연기자는 신인답지 않은 연기력을 선보인다. 어딘지 얄밉고 가볍게만 느껴지는 캐릭터 속에서 뜨거운 진심을 끄집어내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일까. 강성은 때로는 과장된 몸짓으로 가벼움을 드러내다가 차츰 진지하게 변해가는 진구라는 캐릭터를 제대로 연기해냈다. 결국 그 많은 망나니짓들 속에 어떤 아픔 같은 것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이 드러났을 때, 그래서 오히려 그 과거의 행동들마저 가슴 시리게 다가올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진구라는 독특한 캐릭터는 이 드라마를 그대로 닮아 있다. 처음에는 어딘지 구닥다리처럼도 느껴지고, 때로는 탕자 같은 자극에 몰두하는 듯 여겨지다가도 그 속에서 어떤 진중한 진심을 만나게 하는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시크릿 가든'의 희비극, 현빈의 눈빛을 닮았다

현빈이라는 배우는 독특한 매력을 가졌다. '내 이름은 김삼순'에 출연할 때만 해도 그저 미소년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그 눈빛에 우수가 깔리기 시작하더니 '시크릿 가든'에 와서는 이제 아예 장난스런 미소년에서 우수어린 눈빛의 남자를 넘나든다. 그 눈빛은 어딘지 여성적으로도 보이지만 때론 마초적일 정도로 강렬하다. 그저 지그시 바라보는 것만으로 여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배우, 현빈은 마성의 눈빛을 가졌다.

'시크릿 가든'에는 스킨십보다 더 많이 눈빛을 맞추는 장면이 등장한다. 윗몸일으키기를 하면서 하지원의 눈을 바로 코앞에서 바라보는 장면은 단박에 화제가 되었다. 누워 있는 하지원의 얼굴 바로 앞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현빈의 눈빛은 그 어떤 스킨십 이상으로 보는 이를 녹진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물론 그 눈빛을 제대로 제 눈에 받아주며 어딘지 수줍고 어딘지 설레는 하지원의 연기 역시 빼놓을 수는 없는 일이지만.

때론 장난기어린 모습으로, 때론 깊은 슬픔이 담겨진 모습을 연출하는 현빈의 눈빛은 희비극을 넘나드는 '시크릿 가든'이라는 드라마의 기본 힘이다. '시크릿 가든'의 구조는 비극 위에 희극이 얹어져 있는데, 이 희비극을 제대로 표현해내는 게 바로 현빈의 그 양면적인 눈빛이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 사고를 통해 길라임은 아버지를 잃고, 김주원(현빈)은 기억을 잃는다. 그리고 그렇게 돌아가신 아버지의 주재로 길라임과 김주원의 영혼은 하나로 묶여진다.

이 영혼 체인지라는 소재는 로맨틱 코미디에서 주로 사용되어졌다. 그만큼 남녀가 뒤바뀌는 상황이 주는 웃음에 주력했던 것. 하지만 '시크릿 가든'은 코미디만큼 비극에도 주목한다. 영혼이 뒤바뀌어 성별과 사회적 위치가 달라지는 포복절도의 웃음을 먼저 살짝 보여준 후, 그렇게 서로 연결된 영혼의 한쪽이 비극적인 상황에 이를 때 발생할 수 있는 다른 한쪽의 비극을 다루었다. 뇌사 판정을 받은 길라임을 살리기 위해 영혼을 바꿔서 자신이 대신 죽고서라도 그녀를 자신의 몸속에서 살게 하려는 김주원의 결단은 희극에서 비극으로의 극적 체인지를 만들었다.

한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다른 한 사람이 죽어야 되는 상황. '시크릿 가든'은 이를 왕자를 위해 물거품이 되고야마는 인어공주의 비극에 비유한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깨어나 비록 엘리베이터 사고 이후의 기억을 잃어버린 채 다시 살게 된 김주원에게, 길라임은 "네가 뭘 어떻게 해도 이젠 용서가 된다"고 말한다. 죽음을 겪고 난 영혼에게 세상이 갈라놓는 빈부의 문제든, 남녀의 문제든 뭐가 중요할까. '시크릿 가든'은 완전히 타인인 두 사람이 완전히 하나의 영혼이 되는 과정이 사랑이라고 말하는 드라마다.

이 복잡한 과정 속에서 때론 희극의 주인공이 되었다가, 때론 비극이 되고 심지어 남성에서 여성으로 역할을 바꿔야 하는 그 연기를 현빈은 마치 맞춘 듯이 해낸다. 그것이 바로 현빈이라는 배우가 가진 매력이기 때문이다. 희비극을 넘나드는 그 눈빛은 그래서 김주원이라는 캐릭터를 만나 시청자들을 울리고 웃긴다. 해피냐, 새드냐, '시크릿 가든'의 엔딩에 온통 관심이 쏠리게 된 것은 김주원을 연기하는 현빈이라는 배우의 그 알 수 없이 깊은 눈빛에 우리가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시크릿 가든'은 시크한 현빈의 눈빛을 그대로 빼닮은 드라마다.

안구정화의 미모에서 연기자의 얼굴을 보여준 김태희

김태희가 이렇게 예뻤던 적이 있을까. 겉모습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녀의 달라진 연기 때문이다. '마이 프린세스'에서 순종의 숨겨진 증손녀인 그녀는 말 그대로 공주다. 하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기억이 지워져버린 채, 알바를 전전하며 살아가는 그녀에게서 공주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돈이라면 뭐든 할 것 같은 뻔뻔함과 능글능글함으로 무장한 이설이라는 캐릭터에게서 '예쁜 척'은 발견할 수 없다. 그런데 왜일까. 이런 망가지는 김태희가 그 어느 때보다 예쁜 인상을 남기는 것은.

드라마를 할 때마다 불거져 나온 김태희의 연기력 논란은 늘 한결 같은 공주 모습(?) 때문이 아니었나. 그녀의 연기 속에서는 극중 캐릭터가 아니라 그녀 자신의 모습이 더 보였다. 그래서 겉모습은 공주처럼 예쁘지만 잘 맞지 않은 옷을 억지로 입은 듯한 연기에 시청자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김태희가 달라진 건, 아마도 전작이었던 '아이리스'부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이리스'에서 그녀는 비로소 얼굴과 몸을 쓰기 시작했다. 사랑스런 모습에서부터 분노하는 얼굴까지 표정이 다양해졌고, 액션 연기에도 아낌없이 몸을 던졌다.

그 연장선에서 '마이 프린세스'는 이제는 좀 더 연기가 편해진 김태희로 돌아왔다. 그녀는 극중 이설이라는 캐릭터에 완전히 동화된 모습이다. 늘 CF 속에서 방금 나온 것 같던 그녀가 김치를 포기채로 들고 죽죽 찢어 먹고, 입에 소스를 묻혀가며 스테이크를 통째로 뜯어 먹으며, 화장실에 가고 싶어 몸을 배배 꼬는 모습을 연기한다. 그런데 그것이 전혀 과장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언뜻 진짜 김태희의 모습이 그 속에서 느껴진다.

표정 연기는 더 감정이 깊어졌다. 있는 대로 감정을 표정에 싣기 때문에 언뜻 눈가와 미간의 주름이 잡히고 그 여신 같은 얼굴이 한껏 벌려진 입과 동그랗게 떠진 눈으로 사정없이 무너지지만, 바로 그런 과감한 표정 때문에 감정전달은 훨씬 좋아졌다. 살아서 돌아올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던 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펑펑 울어대는 얼굴에서는 그 진정성이 느껴진다.

도대체 무엇이 그녀의 연기를 이토록 바꿔놓은 것일까. 먼저 지목되어야 할 것은 그녀의 나이다. 그녀는 이제 서른을 넘겼다. 여전히 매력적인 미모지만 서른이라는 나이는 과거처럼 외모 하나로 버텨낼 수 있는 그런 나이가 아니다. 스타에서 배우로의 전환은 절실했을 것이다. '아이리스'부터 달라졌던 모습은 이런 자세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게다가 이 나이라는 무게는 거꾸로 그녀를 편안하게 했다고 보여진다. 서른은 숨기기보다는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 더 편안해진 나이가 아닌가.

하지만 그저 나이를 먹었다고 연기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마이 프린세스'에서 그녀가 이설이라는 캐릭터에 완벽히 빙의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캐릭터에 대한 연구가 철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권석장 PD는 그 누구보다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그려내는 감독이다. 초반 심지어 푼수 같은 모습을 과감하게 보여줌으로써 공주로의 인생 역전 과정은 더 코믹하면서도 드라마틱하게 보여질 수 있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김태희는 마구 망가진 얼굴을 보여줌으로써 더 예쁘고 사랑스러운 얼굴을 갖게 되었다. 그저 외모로서 안구정화를 시켜주는 얼굴이 아니라 연기자의 얼굴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연기자가 망가질수록 더 아름다운 이유는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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