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 넘버 원'은 시사회에서 한지훈 작가가 말한 것처럼 쿨하지 못하다. 한 작가는 "동창과 친구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자신이 공부했던 학교와 생활한 마을에 폭탄이 터지는" 한국전쟁을 다루는 작품은 할리우드 전쟁 영화처럼 쿨할 수 없다고 말했다. 맞는 이야기다. 도대체 참혹한 전쟁을 다루면서 액션영화처럼 멋진 장면들을 어찌 연출할 수 있을까. 하지만 '로드 넘버 원'이 쿨하지 못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한국전쟁이라는 소재가 가진 함의, 한때 반공용으로 거의 다루어지면서 생겨난 편견, 그런 것들의 강박 때문일까. 이 작품은 서두부터 장우(소지섭)와 수연(김하늘)의 멜로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이장수 감독은 "전쟁 같은 멜로"라고 했지만, 그것은 연출과 연기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인 것 같다. 장우와 수연이 서로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지독히도 상투적이고 관습적인 장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장우가 수연을 몰래 그리고, 그걸 수연이 받아들이며, 성장한 두 사람이 갑자기 "사랑한다!"고 외치고, 갑자기 장우가 수연의 학비를 위해 빨치산 토벌을 위해 떠나고, 또 갑자기 전사통보를 받고는 자살을 하려는 수연을 태호(윤계상)가 구하고는 둘이 결혼식을 준비하는데 살아 돌아온 장우가 그걸 막아서고... 장우와 수연이 다리 위에서 격렬하게 서로를 껴안고 키스하는 행위는 말 그대로 '전쟁 같은 멜로' 같지만, 그들이 왜 그렇게 흥분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 드라마의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뭔가 인상적인 '로드 넘버 원'만의 멜로이야기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이장수 감독과 한지훈 작가가 시사회에서 밝힌 것처럼 '추억이 담긴 나무' 위로 폭탄이 떨어지는 그 정서적 공감대가 '로드 넘버 원'이 취하는 자세라면, 이 멜로는 실로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두 사람의 멜로가 전쟁으로 인해 갈기갈기 찢어지고 흩어지는 것이 결국 그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드 넘버 원'은 급하게 관습적인 장면으로 멜로를 구성해놓고, 이제 곧바로 전쟁으로 들어간다. 장우와 수연은 그 전쟁 속에서 어떤 멜로를 통해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할 것인가.

전쟁은 분명 쿨하게 다룰 수 없는 것이지만, 멜로는 좀 더 쿨할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전쟁 같은 멜로'는 겉으로 드러내는 것보다는 속으로 꾹꾹 눌러줄 때 더 폭발력이 생기지 않았을까. '여명의 눈동자'에서 최재성과 채시라가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격렬하게 키스를 하는 장면이 두고두고 명장면으로 기억되는 것은 그 단계에 오기까지 두 인물의 멜로가 꽤 쿨하게 접혀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어느 결정적인 순간, 그것이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며 드러났던 것.

'로드 넘버 원'은 이제 그 1번 국도에 첫 발을 디디고 있다. 멜로가 여전히 아쉽지만, 그래도 남은 것은 '휴머니즘'이다. 전쟁 속에서 두 사람의 멜로뿐만 아니라, 다른 병사들의 휴머니즘이 녹아난다면 '로드 넘버 원'은 어쩌면 본래 의도했던 '정서적 공감대'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로드 넘버 원'은 아름다운 장면이 밑그림이 되고, 그 위에 전쟁이라는 폭탄을 떨어뜨려 궁극적으로 전쟁의 참혹함을 말하는 드라마다. 그러니 이 밑그림을 얼마나 잘 제시하느냐가 성패를 가름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밑그림은 전쟁 앞에서 쿨하지 못함을 더 강하게 보여줄 수 있을 만큼 쿨해야 하지 않을까. 그저 먼저 인물들이 우는 것만으로는 정서적으로 공감하기가 오히려 어려워질 수 있다.

 '자이언트', '야망의 세월'이 아니라 '대조영'을 닮았다

'자이언트'는 지금껏 우리가 개발시대를 다루던 시대극이라고 하면 으레 떠올리던 것과는 결을 달리한다. '자이언트'를 '에덴의 동쪽'이나 '야망의 세월'의 연장선으로 바라봤던, 그래서 이 시대극이 국책성 드라마가 아닌가 하던 그 의구심은 전혀 다른 드라마 진행으로 인해 봄날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 '자이언트'가 닮은 것은 '야망의 세월'이 아니라 오히려 장영철 작가의 전작인 '대조영'에 가깝다. 하나의 땅덩어리를 차지하기 위해 끝없는 음모와 암투가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도 모를 정도의 복마전으로 벌어지는 세계. 그것이 '자이언트'다.

사극 속의 영토는 이 시대극으로 와서는 강남땅으로 바뀌었다. 개발을 앞두고 누가 그 땅의 개발권을 차지하느냐가 이 개발 시대에 벌어진 전투이고, 또 그 개발예정지를 땅값이 오르기 전에 누가 더 많이 차지하느냐가 이 전투의 승리를 가름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하철 공사권을 대륙건설에 빼앗긴 후 절치부심하던 조민우(주상욱)가 지도를 보면서 노선을 바꾸는 것으로 역세권의 땅을 매입해온 대륙건설에게 치명타를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장면은 전형적인 사극 속 전투의 한 장면처럼 보인다.

이 강남땅에서는 때론 조폭들을 앞세운 분쟁지에서의 실제 전투가 벌어지기도 하고, 이 영토 전쟁에서의 장군 격인 건설사 대표들과 참모들의 끝없는 음모가 자행되기도 한다. 정치인들과 건설사 대표들 간에 경쟁적으로 벌어지는 로비와 정보전은 그러나 이 전쟁이 그 땅에 살아갈 우리네 민초들을 위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위해 전쟁을 벌일 뿐, 국민들은 염두에도 두지 않는다. 오랜 세월동안 벌어졌던 대부분의 전쟁이 그러하듯이.

장영철 작가가 생각하는 전쟁이란 우리가 그저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니다. 그것은 어쩌다 말려든 싸움 속에서 끝없이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이고, 그 싸움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똑같은 욕망의 화신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초반부 황태섭(이덕화)이 매립지 공사를 사이에 두고 대륙건설의 홍기표(손병호)와 대결구도를 벌일 때, 마치 황태섭이 선이고 홍기표가 악인 것처럼 드라마가 흘러가던 것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후에 홍기표가 이미주(황정음)를 돌보는 인물임이 드러나고, 황태섭 역시 이 전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못할 것이 없는 모습을 보이는 과정 속에서 이러한 선악 구도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것은 악의 화신인 조필연(정보석)과 민홍기 국장(이기영)이 벌이는 대결구도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한 때 '대조영'이 보여주었던 그 '양파 껍질 같은 대결구도'의 현대판이다. 당장에는 선과 악의 대결처럼 보이지만 껍질 하나를 벗겨내면 그 구도가 180도 바뀌고 또 벗겨내면.... 이 집요한 진흙탕 싸움은 굉장한 극적 재미를 만들어주는 것인 동시에, 이 시대극이 말하려는 '화려한 강남의 마천루가 얼마나 더럽고 피가 철철 흐르는 복마전을 통해 세워진 것인가'를 잘 드러내주는 요소들이다. 그 진흙탕 싸움 위에 원치 않게 생존을 위해 서게 된 강모(이범수)와 성모(박상민) 그리고 미주는 이 욕망의 싸움을 옳다 그르다 판단하는 존재들이 아니다. 과장되지도 미화되지도 않은, 그저 그 싸움 속에서 한 시대를 살아낸 가족의 한 표상일 뿐이다.

낚시를 하고 있는 강남의 큰 손에게 홍기표가 돈을 빌리러 오는 장면은 그래서 이 시대극이 말하려는 대부분을 간략하게 축약해낸다.

"오늘따라 입질이 없구나."는 큰 손의 푸념. 그러자 이어지는 홍기표의 말.
"썩은 물에서 고기가 나올 리가 없죠. 예전엔 이곳에서 고기가 제일 잘 잡혔었는데.."
"이렇게 만든 게 당신들이잖소. 강남을 개발하면서 가장 먼저 망가진 게 바로 이 한강이니까."하고 말하는 큰 손. 그러자 신념에 찬 듯 말하는 홍기표.
"강을 다시 살릴 수 있는 방법도 개발밖에는 없습니다." 거기에 반박하는 큰 손.
"그건 당신들 생각이지. 사람들 마음까지 혼탁해진 건 어떡하고."

이 대사들이 마치 개발시대의 한 시점에서 오고간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에 일어난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왜일까. 바로 이 부분은 이 시대극이 현재와 조우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동이' 27회의 스토리는 무엇이었을까. 장희빈(이소연)이 동이(한효주)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녀가 돌아와도 바꿀 수 없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스스로 독약을 마시는 자작극을 벌인 것? 그래서 향후 폐비(박하선)에게 누명을 씌워 아예 죽음으로 몰아넣으려던 사건? 만일 이것이 '동이'가 한 회분 사건이라면 이 스토리는 과거 흔하디 흔한 장희빈 이야기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물론 '동이'는 스스로 기획의도에서 밝힌 듯이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생모가 될 동이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다. 그러면 27회 한 회 동안 동이가 겪은 사건은 무엇일까.

궐 밖으로 도망쳐 가까스로 살아남은 동이(한효주)가 의주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아 도성으로 돌아오는 이야기. 동이는 무수리가 되어 궁으로 들어온다. 폐비의 누명을 벗겨줄 증좌를 왕에게 직접 건네기 위함이다. 한 회분의 스토리로 치자면 지나치게 단순하고 새로울 것이 없는 것들이다. 게다가 왜 동이가 꼭 스스로 궁으로 들어가 그것도 숙종(지진희)에게 직접 증좌를 건네려는 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장희재(김유석)와 오윤(최철호) 같은 인물들이 동이를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상황에서 동이는 왜 다른 인물을 통해 증좌를 대신 왕에게 건네려 하지 않는가. 또 궁에 들어왔다면 감찰부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인물들을 동이는 왜 찾아가지 않는가.

서용기(정진영)와 차천수(배수빈)는 왜 갑자기 동이가 찾을 수 없게 사라졌는가. 우연히 도성 저자에서 보게된 주식(이희도)과 영달(이광수)의 뒤를 좇는 인물들은 왜 갑자기 생겨난 것일까. 그들이 주식과 영달을 미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동이'의 이야기들은 너무나 많은 의문을 남긴다. 논리적으로 비약도 많고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물론 모든 사극이 완벽하게 논리적으로 짜여지는 것은 아니다. 이럴 경우 사극은 좀 더 인물의 감정라인을 통해 논리적인 허점을 메워야 한다. 즉 동이가 왕을 직접 만나려 한다면 시청자들에게 동이의 왕을 만나려는 그 애틋한 마음을 감정이입시켜야 한다. 안타깝게도 지금 '동이'는 그 부분이 부족하다.

지금 '동이'는 스토리가 잘 보이질 않는다. 물론 기본적인 스토리는 있지만 아이디어가 없다는 이야기다. 동이가 활에 맞고 거의 사경을 헤매다가 의주의 한 상인에 의해 살아남는 이야기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또 그 상인이 동이를 붙잡아 두려하고 마침 나타난 장희재에 의해 위기에 처했을 때 또 갑자기 심운택(김동윤)이 나타나 그녀를 돕는 이야기도 새롭지 않다. 그래서 이 에피소드들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동이가 왕의 행차를 멀찍이서 바라보며 애끓는 토로를 하는 장면이거나, 심운택의 캐릭터다. 즉 이야기보다는 외적인 것들에 더 치중해 있다는 것이다.

'동이'가 초반부에 그나마 촘촘했던 스토리에서 차츰 와해되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두드러지는 것은 연출이다. 사실 동이가 도성으로 돌아와 궁으로 들어간다는 이 한 회 분의 간단한 스토리를 그나마 긴박하게 만드는 것은 연출의 힘 덕분이다. 동이가 돌아오는 이야기 중간 중간에 왕의 심경이나 장희빈의 심경을 배치하면서 그 단순함을 조금씩 비껴가게 만들고, 결정적으로 엔딩 부분에서 마치 숙종이 동이를 보기라도 한 것처럼 놀라는 장면 같은 것이 삽입되는 것은 연출을 통해 지속적인 시선을 잡아끌려는 목적이 다분하다.

하지만 사극이 연출의 힘만으로 굴러갈 수는 없다. '동이'의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예상을 깨는 의외성이 없을 때, 이 사극은 그저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왕실암투에서 중간자 역할을 하며 성장하는 동이의 심심한 이야기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흔히들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할 때, 쉽게 멜로라인으로 회귀하려는 욕망은 이 사극이 처한 가장 큰 위기다. 숙종과 동이의 멜로는 이 사극에서 중요한 것이지만, 거기에만 매몰될 때 이 사극은 아무런 새로운 재미를 발견해내지 못하게 될 위험성이 있다. 심지어 차천수라는 인물까지 동이의 오라버니에서 남자로 변하려는 모습은 그래서 위험하다.

'동이'는 지금 스토리 실종상태다. 우리가 이미 다 알고 있는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대결구도 그 이상을 보여주는 동이만의 스토리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동이의 캐릭터로 다시 돌아갈 필요가 있다. 동이만이 가진 특징은 무엇일까. 또 동이의 약점은 무엇일까. 이런 부분들이 다시 세워지고 그 위로 이야기가 다시 구축될 때 '동이'는 잃었던 스토리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부디 '동이'가 그저 숙종과의 멜로드라마로 전락하지 않기를 바란다.

1970년대 인기를 끌었던 ‘전우’의 2010년판 리메이크는 화려한 스펙터클로 무장했다. 레드원 카메라로 찍어 선보인 첫 전투신은 안방극장을 뜨겁게 달구었다. 폭격기가 쏟아 붓는 폭탄과 기관포 세례에 튀는 흙가루가 그 미세한 입자까지 드러내며 허공에 흩어지고 빗줄기처럼 날아드는 총알 속으로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병사들의 모습은 과거 ‘배달의 기수’ 같았던 ‘전우’의 전투신을 더 실감나게 재현해냈다. 첫 방 시청률은 16% 남짓(AGB 닐슨). 반공드라마가 아니냐는 논란 속에서도 성공적인 수치를 기록했다.

‘제빵왕 김탁구’의 시대적 배경은 1970년대 경제 개발 시대. 김탁구(윤시윤)라는 인물이 갖은 고난을 이겨내고 제빵업계의 1인자로 서는 과정을 그린다. 배고픔의 시절, 빵이 심지어 어떤 판타지로 다가왔던 70년대. 이 드라마에는 어린 시절의 탁구가 당대 코미디언들을 흉내내듯 그 시대의 향수를 자아내는 장면들이 도처에 배치되어 있다. 게다가 드라마는 초반부부터 당대의 작품들을 떠올리게 하는 신파극과 치정극으로 물들어 있다. 월드컵 시즌의 특수를 맞아서(경쟁드라마가 없는 상황) 시청률은 벌써 25%에 육박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이들 드라마들이 모두 1970년대 개발시대를 향수하고 있다는 점은 이례적이다. 개발이나 성장에 대한 집착이나, 반공이라는 구시대적 가치관에서 완전히 달라진 2010년 현재, 왜 이들 드라마들은 여전히 그 과거의 가치에 대한 애착을 보이는 걸까. 이것은 과연 단지 시대에 대한 향수를 담아내는 복고 트렌드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이미 보수화의 길을 걷고 있는 드라마가 이제 노골적으로 그 정체를 드러낸 것일까.

사실 최근 드라마는 보수화의 길을 걸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주말 저녁 KBS1에 편성된 일련의 드라마들이다. ‘명가’는 하필이면 현 방통위원장의 종친인 경주 최씨 이야기를 다뤘다는 점 때문에 보수적인 것만은 아니다. 드라마가 내세운 ‘노블레스 오블리제’라는 메시지는 자칫 ‘가진 자의 논리’를 정당화해줄 소지가 다분하다. ‘명가’에 비해 그 후속작인 ‘거상 김만덕’은 여성 성장극을 집어넣어 그 보수적인 색채를 드라마적인 힘으로 많이 누른 흔적이 보이지만 그 메시지만은 동일했다. 그리고 이어 방영되는 ‘전우’는 여전히 반공드라마의 논란 위에 서 있다.

한편 주말극으로 끊임없는 막장 논란에도 불구하고 40%에 육박하는 시청률로 종영한 ‘수상한 삼형제’ 역시 드라마의 퇴행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과거의 틀을 더 독하게 현재에 재현했다. 과거 드라마들의 고질적인 소재였던, 고부갈등이나 불륜, 한 여자를 두고 벌이는 치정극은 이 드라마에서 더 자극적으로 무장한 채 반복되면서 많은 시청자들의 공분을 샀다. 이 퇴행적인 양상은 이 드라마가 경찰청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다는 사실(이것 때문에 한때 경찰만을 옹호하는 드라마로 논란이 인 적도 있다)보다 더 위험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막장이라 취급돼도 시청률만 높으면 마치 ‘국민드라마’인 양 심지어 자긍심까지 갖는 모습은 자칫 드라마의 상업화와 시청률 지상주의의 늪으로 타 드라마들까지 빠뜨릴 위험성이 있다.

올해 초에 큰 인기를 끌었던 ‘공부의 신’도 마찬가지다. 마치 입시경쟁 속에서 성공할 수 있는 비법이라도 가르쳐 줄 듯 나섰던 이 드라마는 그래서 시청률 고공행진을 거듭했지만, 기존 입시 제도를 결국은 두둔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물론 드라마 후반부에 와서 이런 메시지는 슬쩍 ‘진정한 공부’에 대한 이야기로 바뀌었지만, 이것은 ‘수상한 삼형제’가 패악스런 가족들의 자극적인 이야기로 점철되다 마지막에 급속히 봉합했다고 해서 착한 드라마라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의 결과다. 이들 드라마들은 어떤 면으로 봐도 시간을 거꾸로 되돌려 놓은 듯한 드라마 소재와 진행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드라마가 70년대를 향수하거나 6.25 같은 전쟁을 다루지 말란 법은 없다. 하지만 과거를 다룬다고 해서 과거의 메시지를 반복하는 것은 시대착오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2010년도에는 2010년도에 맞는 메시지를 가져야 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드라마는 현 대중들과 공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퇴행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으면서도 시청률에서 성공한 드라마들은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아직까지 리모콘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보수적인 중장년 시청층 때문일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이들 드라마들의 뛰어난 위장술 때문인지도 모른다. 화려한 스펙터클과 엄청나게 빠른 속도의 스토리 진행 같은 것은 드라마의 실체를 보기 어려울 정도로 현란하다. 게다가 이들 드라마들은 스스로를 복고라고 말하지 보수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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