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드라마', 국책성인가, 새로운 소재의 발굴인가

올해로 6.25가 60주년을 맞이한다. 그래서일까. 올 6월에는 전쟁 콘텐츠들이 대거 쏟아져 나올 예정이다. MBC가 새 수목드라마로 한국전쟁을 다룬 '로드 넘버 원'을 방영할 예정이고, KBS는 1970년대 인기 드라마였던 '전우'를 리메이크해 방영한다. 또 한국전쟁 당시의 학도병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포화속으로'가 6월에 개봉된다. 한편 곽경택 감독의 신작으로 관심을 모으고 있는 '아름다운 우리'도 곧 제작을 앞두고 있는데, 이 작품은 제2차 연평해전을 소재로 하고 있다고 한다. 아무리 60주년이라고는 하지만 과거와 달리 전쟁 콘텐츠들이 갑자기 쏟아져 나오는 진짜 이유는 뭘까.

대외적으로는 두 가지 이유가 제시되고 있다. 그 하나는 역시 6.25 60주년을 기념한다는 것. 물론 이유는 되지만 이것만으로 한동안 사라졌던 전쟁 콘텐츠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는 것을 모두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다른 하나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이 전쟁 콘텐츠가 사실은 너무나 다루어지지 않았던 미지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물론 영화는 사정이 다르다. '태극기 휘날리며'나 '웰컴 투 동막골' 같은 작품들이 6.25를 다뤘다. 또 한국전쟁을 다룬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남북의 대치상황을 다룬 작품으로 '공동경비구역 JSA', '실미도', '한반도' 같은 작품들이 있었다. 하지만 드라마는 70년대부터 80년대 초반까지 '전우'나 '3840유격대' 같은 전쟁 드라마가 있었지만, 냉전 시대가 끝나던 80년대 중반 이후부터 전혀 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이 없었다. 즉 반공시대가 종지부를 찍으면서 사라진 콘텐츠라고 할 수 있는데, 최근 들어 한동안 다뤄지지 않았던 한국전쟁이 미지의 영역으로 주목받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항간에는 웬 반공드라마의 부활이냐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전쟁을 다루는 콘텐츠는 그 성격상 어느 한 쪽의 시각을 담을 수밖에 없는데, 그렇기 때문에 한국전쟁 또한 우리측의 시선이 담겨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고, 또 그 안에서의 인간을 발견하는 것이 이들 전쟁 콘텐츠들의 기획의도라고 해도 거기에는 남북으로 갈라진 시각이 극명하게 존재할 수밖에 없다. 물론 제작자들은 그저 반공적인 획일적인 구도 자체로는 현재의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어내기 어렵다고 말한다. 따라서 남북전쟁이라는 관점보다 좀 더 보편적인 전쟁과 인간이라는 관점을 내세울 것이라고들 한다.

이건 어쩌면 당연한 접근방식일 것이다. 하지만 전쟁 콘텐츠는 거기 담겨진 메시지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 전쟁 콘텐츠가 지금 방영되고 있다는 그 사실이다. 왜 지금 전쟁 콘텐츠인가 라는 질문 속에 반공은 아니더라도 국책성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천안함 사태로 인해 뒤숭숭한 시국에는 더더욱 그런 뉘앙스를 풍길 수 있다. 물론 반공드라마는 부활할 수도 없고, 부활해서도 안되지만, 자칫 전쟁 콘텐츠 자체가 남북 간의 위기나 갈등 구조를 부각시킬 수도 있다는 우려다.

하지만 이런 우려는 별로 실현화될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먼저 일련의 전쟁 영화 콘텐츠들이 대중들의 한국전쟁에 대한 정서를 감지할 수 있게 한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전쟁의 비극성을 알리고 그 안에서 형제애 같은 가족애에 천착했고, '웰컴 투 동막골'은 남북이 대결하는 구도를 정반대로 뒤집어서 오히려 반전과 평화의 메시지를 담아냈던 작품이다. '공동경비구역 JSA'도 남북 간의 화해에 더 집중한 영화였고, 또 최근에 개봉됐던 '의형제'도 남파된 스파이와 의형제 같은 관계를 맺게 되는 전직 요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즉 현재 대중들에게 공감 받기 위해서는 그저 남북 간의 대결구도를 극대화하는 스토리로는 어렵다는 이야기다. 남북 간의 대치상황은 아주 특수한 소재지만 그 속에서 남북의 차원을 넘어서는 좀 더 보편적인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 이것이 성패가 될 것이라는 점을 현재의 제작자들이 이해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물론 드라마는 차이가 있을 지도 모른다. 많은 이들이 '로드 넘버 원' 같은 작품은 꽤 높은 완성도를 가진 작품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전우' 같은 작품은 자칫 보수성이 짙은 국책성 드라마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갖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작품 자체가 얼마나 진지하게 한국전쟁을 바라보고 있는가, 하는 그 진정성 때문일 것이다. '로드 넘버 원'은 꽤 야심차게 한국전쟁 콘텐츠를 통해 세계에 어필하는 한류 콘텐츠를 겨냥한 흔적이 있다. 제작자의 말을 빌리면, 해외에서는 한국하면 전쟁과 태권도 같은 소재가 매력적이라는 얘길 한다고 한다. '로드 넘버 원'은 그 소재들을 다룬다는 것인데, 이렇게 해외를 겨냥하고 있다는 점이 상당히 믿음을 가게 만든다. 즉 그만큼 남북이라는 특수성에 천착하기보다는 전쟁과 인간이라는 보편성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전우'는 과거 반공드라마의 리메이크라는 점 때문에 그 향수에 기대는 작품이 아닐까 하는 혐의가 짙다.

이러한 전쟁 콘텐츠에 대한 우려와 걱정은 당연히 현 정국과 관련이 있다. 현 정권의 성향을 두고볼 때, 전쟁 콘텐츠가 자칫 반공적인 시선을 그 속에 담지 않을까 우려하는 것이다. 이러한 우려와 걱정은 사실 전쟁 콘텐츠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자이언트' 같은 작품은 사실상 현 정권과 그다지 관계가 없는 시대극이라고 할 수 있지만, 많은 대중들은 이 작품이 현 정권을 찬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7,80년대 강남의 개발을 둘러싼 이야기지만, 이러한 개발시대에 대한 향수 자체가 그런 뉘앙스를 풍긴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꽤 괜찮은 드라마적인 완성도를 갖고 있는 대작임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시청률은 10%대 중반에 머물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은 대중들이 드라마 같은 콘텐츠를 통해서도 현실에 얼마나 민감한가를 보여준다. 우리에게 전쟁 콘텐츠는 지나치게 회피된 것이 사실이다. 우리 국민이라면 누구에게나 깊은 트라우마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기회에 오히려 이들 전쟁 드라마들이 그 트라우마를 다독이는 콘텐츠가 되길 기대한다. 그리고 만일 그런 작품이 아니라면 대중들과의 공감은 어려울 것이다. 6월에 쏟아지는 전쟁 드라마의 성패는 바로 이 현 대중들과의 소통에 달려 있다.

'신데렐라 언니', 희생과 용서의 드라마

'신데렐라 언니'가 전한 감동에는 그저 '슬프다', '기쁘다' 같은 표현으로는 담지 못할 그 무언가가 있다. 누구든 바라보면서 그 몇 줄의 대사를 듣기만 하면 속절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당 못하게 만드는 그 감동의 실체는 뭘까. 대성도가의 주인 구대성(김갑수)이 거실 벽면에 붙여놓은 가훈, '역지사지(易地思之)'처럼, 신데렐라 이야기를 언니의 입장에서 풀어낸 그 스토리 때문에? 물론 이것이 표면적인 '신데렐라 언니'의 이야기지만 그것만으로 심지어 영혼을 건드리는 듯한 그 눈물의 실체를 모두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신데렐라 언니'는 여러 차원의 눈물들을 만들어내지만 그 중심에 서 있는 단 한 명의 인물이 있다. 그것은 주인공인 은조(문근영)도 아니고 신데렐라 당사자인 효선(서우)도 아니다. 그저 제 궤도에서 살아가며 버텨내고 있던 인물들을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뒤흔들고는 스스로 모든 걸 떠안고 가버림으로써 그들을 다시 한 자리로 모아 놓은 인물, 바로 구대성이다. 이 드라마에서 구대성은 자상한 남편에 아버지로서 완벽한 인간의 표상처럼 그려진다. 심지어 배신하는 아내를 보면서도 오히려 그녀를 걱정하고, 아들처럼 여기던 기훈(천정명)이 사실은 다른 목적을 갖고 대성도가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고는 충격으로 죽어가면서도 그를 용서한다. 이것은 범인의 모습이 아니다. 차라리 성인에 가까운 모습이다.

공교롭게도 이야기 구조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모티브를 닮았다.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통해 거의 완벽한 사랑을 전하고는 저 세상으로 떠났지만, 구대성은 드라마 속에서 계속해서 부활한다. 대성도가에 남은 가족들, 은조를 포함하여 효선, 아내인 송강숙(이미숙) 그리고 막내 준수는, 대성이 사라지고 난 후에도 여전히 그의 사랑을 느낀다. 그의 사랑은 대성도가 구석구석에, 그가 남긴 일기장에, 준수의 스케치북 속에도 살아 움직인다. 그리고 그가 남긴 사랑의 힘은 남은 가족들을 변화시킨다. 구대성의 희생은 사랑으로 부활하고, 그것은 남은 사람들을 참회하게 하고 그것을 통해 다시 가족을 결속시킨다.

은조는 뒤늦게 대성의 깊은 사랑을 깨닫고는 차마 부르지 못했던 이름, "아버지"를 부르며 목 놓아 운다. 독하디 독한 계모 송강숙(이미숙)은 스스로 "고개를 들지 못하는 게 뭔지를 알게 됐다"고 말한다. "뜯어먹을 게 있어 좋다"던 이제는 고인이 된 남편 구대성(김갑수)의 무차별적인 사랑 앞에 세파에 말라버렸던 그녀의 눈은 결국 눈물을 흘린다. 구대성이 전한 '대가없는 사랑'은 그대로 효선에게 똑같이 이어지고, 막내 준수의 아름다운 기억 속에서 생생히 살아 움직인다. 심지어 자신으로 인해 구대성이 죽음을 맞이했다는 죄의식을 가진 기훈은 이제 그 희생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아, 자신이 희생함으로써 대성도가 사람들을 살리려 한다.

이 우리의 가슴 속 깊이 내재되어 있는 희생과 용서에 관한 원형적인 이야기가 우리의 영혼을 울리는 것은 당연한 일. '신데렐라 언니'는 그런 의미에서 희생과 용서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구대성이 희생을 통해 전한 사랑으로 인해, 남은 이들은 비로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송강숙이 친구의 딸이 자신의 엄마 때문에 우는 모습을 보고 "그게 그렇게 속상해? 미안해. 그게 그렇게 속이 상하는 줄. 어린 것이 그렇게 피눈물 흘리는 줄 어떻게 알았겠냐. 미안해. 미안해."하고 말할 때, 그녀의 앞에는 또한 은조가 서 있었을 것이다.

툭하면 "마귀할멈!"이라고 독한 소리를 해대는 준수의 스케치북에서 가족들 그림 속에 자신만이 빠져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어쩌면 은조는 준수의 독한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지도 모른다. 늘 웃고만 있는 기훈의 눈물을 보고는 "이제 나한테 기대"라고 말했을 때, 거기서 은조는 쓰러지지 않기 위해 바락바락 소리를 치면서도 절대 기대려하지 않았던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지도 모른다. 이처럼 대성이 남긴 가훈, '역지사지'처럼, 서로가 서로의 입장이 될 때, 그들은 드디어 누구의 엄마이고 누구의 딸이며 누구의 자매이고 누구의 애인임을 떠나 한 인간으로서 서로를 껴안게 된다.

구대성의 희생적인 사랑이 남은 사람들을 서로 용서하게 만들고, 결국은 서로가 서로를 기대게 하는 이 드라마는, 은조의 표현대로, "뭔가 딱딱하게 뭉쳐져 있었던" 것을 녹작지근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운명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 무기력할 정도로 약하디 약한 우리네 인간이 살 수 있는 힘은 어쩌면 그 거대한 사랑을 믿는 것이고, 그 믿음 속에서 타인을 자신처럼 이해하면서 똑같은 가녀린 존재로서 서로를 기대는 일일 것이다. 비록 신데렐라 이야기의 모티브를 빌려왔지만, '신데렐라 언니'가 그토록 깊은 울림을 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무엇보다 이 격렬하면서도 아름다운 문학 같은 드라마가 주는 울림을 온전히 시청자들에게 전한 건 이른바 진정성으로 무장한 연기자들의 연기 덕분이다. 우리는 문근영을 통해 스스로 자기의 이름을 부르며 목 놓아 울던 은조를 이해하게 됐고, 서우를 통해 미움조차 이겨내지 못하던 사랑만 알던 효선의 성장을 보게 됐고, 이미숙을 통해 처절한 삶 속에서 사랑 없이 살아오다 덜컥 사랑을 알아버린 송강숙을 바라보게 됐고, 김갑수를 통해 자신이 부정당하면서도 결국은 모두를 끌어안은 그 큰 사랑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됐다. 또한 천정명의 여전히 소년 같은 미소와 택연의 마음까지 밝게 만드는 웃음 또한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빙의된 연기가 있어 가능했다. '신데렐라 언니'가 전하는 결코 범상치 않은 큰 사랑의 이야기는.

'나는 별 일 없이 산다'가 던지는 질문

"살려고 그런 단 말야. 나도 살아야할 거 아냐!" 드라마 '나는 별 일 없이 산다'에서 황세리(하희라)는 늘 삶에 사기당하며 살아온 자기 신세를 한탄하며, 이제 자신이 누군가를 사기 쳐야 하는 이유로, '그래도 살아남아야 함'을 든다. 한편 나이 칠순에 접어든 신정일(신성일)은 "구차하게" 살아야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그의 삶은 집사람이 떠나면서 그 의미를 잃었다. 한 사람은 그저 관성적으로 살아남으려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살 이유를 찾지 못하지만, 사실 두 사람의 정조는 같다. 의미 없는 삶. 그들은 '별 일 없이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 앞에 갑자기 동네 깡패가 나타나 위협을 한다. 쌍팔 년도 멜로에나 등장할 전형적이고 상투적인 시퀀스. 하지만, 겉으론 '별 일 없이' 살지만, 속은 절망적인 이 노년과 중년여성을 만나자 특별해진다. "야. 이놈들아 나 말기암환자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너희들 손에 죽으나 매한가지야."하고 외치는 노년 남자. 그리고 "그래 이 새끼들아. 나도 겁날 거 없어. 막장인생이야. 이혼 두 번에 자식새끼도 앞세워 죽인 재수 더럽게 없는 년이야."라고 응수하는 중년 여자. 마치 '별 일 없는' 삶에 지쳤다는 듯, '별 일 좀 벌려보라'는 그들의 태도가 마음 한 구석을 찌른다.

나이 칠십이면 말기암 판정을 받고도 담담할 수 있는 것일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하루하루의 삶이 버텨내는 것이 되어버린 신정일에게 말기암은 그다지 충격적인 일이 아니다. 자신을 살뜰히 챙겨주고 기다려주는 아내가 있길 하나, 그렇다고 노년을 흡족하게 해줄 자식이 있길 하나. "늙으면 돈이 최고"라고 외치는 조회장 같은 속물도 있지만 신정일에게 돈은 스스로 거울을 들여다보며 "넌 돈이면 다냐"고 물을 정도로 그다지 위안이 되지 않는다. 동병상련이라고 아직은 젊은 나이에 인생의 험한 꼴을 많이 당한 자칭 막장인생 황세리가 신정일의 마음을 보게 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들은 외로울 때면 그 외로움을 털어내기 위해 혼자 추는 춤을 둘이 함께 추기 시작한다. 그러면 그 함께 추는 짧은 춤사위 속에서 행복을 느낀다. "죽는 순간까지 이렇게 웃을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는 신정일에게 사랑은 그처럼 외로움을 함께 나누는 일이다. 이것은 아무도 주변에 남지 않고 절망만이 남은 채, 승무원이 되어 아무도 없는 비행기를 타고 다니며 뉴욕과 파리가 뒤섞인 꿈을 꾸는 황세리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어느 밤 문득 외로움을 느낀 그녀는 신정일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한다. "우리 함께 외로워요."

'나는 별 일 없이 산다'가 보여주는 사랑은 그래서 겉보기엔 노년에 주책없이 찾아온 사랑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좀 더 본질적인 사랑에 가깝다. 젊은 나이의 그 모든 것을 다 가진 이들의 사랑이 청춘의 봄에 찾아드는 아지랑이 같은 사랑이라면, 이 지긋한 나이에 이제는 가질 것보다 놓아야 할 것이 더 많은 이들의 사랑은 그 유한함 앞에서 그저 그 한 순간 순간이 소중하고 행복해지는 사랑이다.

사실 '별 일 없이 사는' 이들이 나이 지긋한 노년의 삶들뿐일까. 장기하의 '별 일 없이 산다'가 젊은 세대들의 고통과 좌절을 복수하듯 반어법으로 노래하는 것처럼. 극중 신정일이 자식에게 말하듯, 나이는 먹어서 먹는 것이 아니라 할 것이 없어질 때 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니 '별 일 없이 사는 삶'은 삶이 아니다. 그리니 여기서 말하는 '별 일'이란 사랑은 물론이고 사회적 의미로서의 행복과 다름 아니다.

가족드라마의 틀 속에 동성애도 있는 것

최근 보수적인 성향의 한국교회언론회는 "동성애 미화, 사회를 병들게 한다'는 논평을 통해 '동성애를 미화하는 TV프로그램의 방영은 동성애에 대한 동정심을 넘어 심각하게 비호하는 측면이 있다."는 논평을 냈다. 또 기도운동단체인 에스더 기도운동도 최근 회원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이대로 TV드라마를 방치한다면 이 땅의 많은 청소년에게 동성애는 아름다운 것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라며 시청거부운동을 촉구했다고 한다.

직접적으로 프로그램을 지목하진 않았지만 최근 종영한 드라마 '개인의 취향', 그리고 현재 방영되고 있는 김수현 작가의 '인생은 아름다워'에 등장하는 동성애자를 지목한 것일 게다. 특히 그중에서도 '인생은 아름다워'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폭발적이다.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동성애자 태섭(송창의)에 대한 시선은 극에서 극으로 옮겨졌다. 보는 이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동성애자 태섭이란 존재에 대한 반감은 어느새 동감으로 바뀌어버렸다. 어떻게 이 짧은 시간에 이런 변화가 가능했던 걸까.

그것은 커밍아웃을 통해서 비로소 태섭이 가족의 일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태섭이 차마 가족들에게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히지 못하고 있을 때, 그는 철저히 타자였다. 드라마 속에서 가족과 섞이지 않는 태섭의 모습은 바로 우리가 이 땅의 동성애자를 바라보는 그 시선 그대로였을 것이다. 나와는 다른 외계인 같은 존재. 하지만 그가 커밍아웃을 하는 순간, 모든 것이 바뀌었다. 양엄마인 민재(김해숙)에게 거듭 '죄송하다'고 말하는 태섭을, 민재는 "오히려 자신이 더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 사실을 민재에게 전해들은 병태(김영철) 역시 태섭을 탓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식의 앞날을 걱정해준다.

외계인처럼 겉돌던 태섭은 그 부모인 민재와 병태가 끌어안음으로써 비로소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바로 이 시점의 변화가 동성애자에 대한 시선을 극에서 극으로 바꿔놓은 김수현 작가의 마법. 그 마법은 다름 아닌 가족애다. 타인으로만 바라보던 시청자들의 시점을 가족의 시점으로 바꿔놓자, 거기에 외계인이 아닌 우리네 가족 중 하나로서의 태섭이 서 있었다. 그 어떤 가족이 자신의 가족이 동성애자라고 해서 그저 손가락질하고 비난할 수 있을까.

민재가 태섭에게 '우리가 너의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줄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처럼, 이 드라마는 김수현 식으로 동성애에 대한 접근을 하고 있다. 그것은 철저히 가족드라마의 시선으로 동성애를 바라보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분명 동성애에 대한 윤리적인 잣대나 사회적인 맥락 같은 것들이 존재하긴 하지만, 그것은 가족 바깥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즉 가족의 눈높이에서 동성애는 윤리적인 문제도 사회적인 문제도 아니다. 그저 부모 자식사이에, 형제 남매 사이에 놓여진 문제일 뿐이다.

따라서 '인생은 아름다워'는 동성애 드라마라기보다는 김수현 특유의 가족드라마가 맞다. 다만 그 가족의 일원 중에 동성애자가 들어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인생은 아름다워'는 양병태네 집안사람들이 저마다 문제들을 갖고 옥신각신하면서도 결국에는 가족애로 그것을 넘어서며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드라마다. 거기에는 일부에서 제기하는 '동성애에 대한 미화'가 전혀 들어 있지 않다. 아름다운 것은 동성애 자체가 아니라, 동성애자라도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그 가족애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해묵은 동성애에 대한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접근보다, 훨씬 실질적이고 인간적인 접근방식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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