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을 담은 문제작, 왜 마침표를 못찍었나

“사람들은 작은 것에는 분노하지만 큰 것에는 분노하지 않아. 왜? 허락되어 있지 않으니까.” 백도식(김갑수)은 진정 분노해야할 대상에는 분노하지 않고 엉뚱한 것에 분노함으로써 스스로를 파멸에 이르게 하는 인간들을 비웃는다. 그러면서 불쑥 정치 이야기를 꺼내든다. “그래서 정치를 좀 해보려구 해.” ‘혼’에서 악역을 맡고 있는 백도식이란 인물의 대사를 들여다보면 이 드라마가 그저 공포극에 머무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정의는 법을 이길 수 없거든.” 법과 정의에 대한 그의 대사는 아프게도 현실이다. 그러니 법을 이길 수 없는 피해자들은 법 외부의 힘으로 가해자들을 응징하려 한다. ‘혼’이라는 공포물의 탄생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롯한다. 가해자들에게 당한 피해자들이 같은 방법으로 잔인하게 가해자들에게 복수한다는 것. 그리고 그 방법으로 혼령의 힘을 비는 빙의와 처단자로서의 연쇄살인을 동원한다는 것이 이 드라마 스토리텔링의 핵심이다.

연쇄살인범을 연쇄살인 하는 이야기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덱스터’라는 미드를 통해 보여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원혼이 복수를 하는 것도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것은 그 많은 ‘전설의 고향’ 귀신이야기의 단골메뉴다. 하지만 이 두 가지가 한 군데 얽혀있는 것은 새로운 것이다. 프로파일링 기술을 가진 신류(이서진)가 혼령에 빙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하나(임주은)를 이용해, 법으로 이길 수 없는 살인범들을 제거해나가는 이야기는 확실히 신선한 면이 있다.

게다가 공포 코드 이면에 사회적인 부조리를 넣어 그 공감의 울림을 키운 것도 이 작품을 명품으로 만든 요인이다. 우리는 사람(물론 살인범들이지만)이 혼령보다 더 무섭고, 그 사람을 혼령이 처참하게 죽이는 것에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놀랍게도 우리가 그런 경험이 통용되는 사회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우리는 혼령에 감정이입하는 경험을 하게 되며, 여기서 공포는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는 분노가 자리하게 된다. 무섭기보다는 화가 나고, 살인을 막아야 된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저런 자는 죽어도 싸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공포물이 사회극이 되는 순간이다.

그런데 바로 이것은 저 백도식이 경고한 부분이다. 엉뚱한 분노가 결국은 자신을 망치게 된다는 것. 이것은 예언처럼 들리고, 결국 그 예언에 따라 모두가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된다. 결말에 있어서 신류와 건일(정시우)의 죽음은 공포극으로 본다면 지나치게 허무하게 보인다. 무언가 힘 한 번 쓰지 못하고 죽은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백도식은 그 누구에게도 응징을 당하지 않했다. 그는 스스로 건물에서 밖으로 뛰어내렸고, 거기에서도 살아나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공포극의 틀 안에서 보면 이 드라마는 공포의 끝장, 즉 절대 악의 죽음, 문제의 해결 등이 보여지지 않은 채 끝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사회극의 틀로 보면 말이 달라진다. 신류와 건일의 허무한 죽음은 흔한 말일 수 있지만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또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그 복수의 순환을 통해 인간이 인간을 처단한다는 것이 가진 부조리함을 드러낸다. 그것에 분노하며 결국에는 이성을 잃어버리는 하나는 이 복수의 비극적인 순환이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는 뉘앙스를 준다. 게다가 사라져버린 백도식은 “정의는 법을 이길 수 없다”고 그가 말한 바 있는 그 현실을 그대로 우리 앞에 들이민다. 결국 아무 것도 해결된 것 없이 현재 상태로 돌려놓은 이 결말은 사회극으로서는 그 울림이 크다. 해결된 것은 없지만, 우리는 그 과정을 목도했고, 결국 현실의 문제는 드라마 같은 판타지가 서둘러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들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혼’은 사회극을 꿈꾼 공포극이다. 겉으로 공포극의 외관을 하고는 사회의 치부를 드러내는 드라마다. 그러니 공포극으로서는 여러 모로 그 장르가 갖는 재미를 빗겨간 면이 있다. 하지만 ‘혼’은 충분한 사회극으로서의 재미를 주었던 드라마다. 적어도 공포와 현실이 어떤 연관관계를 가지는지, 이 드라마는 충분히 보여주었다. ‘혼’은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미완에 남았지만, 그 시도만큼은 충분히 인정되어야 하는 드라마다.

‘아가씨를 부탁해’, ‘태양을 삼켜라’, ‘천만번 사랑해’

어딘지 2% 부족한 드라마들이 있다. 그저 보고는 있지만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설정과 장면들이 나올 때면 왜 이걸 보고 있어야 하는 생각이 드는 드라마들. 시청률은 그다지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더 좋아질 것 같지도 않은 드라마들. 어째서 이런 어정쩡한 드라마들이 나오는 것일까.

‘꽃보다 남자’의 아류작(?), ‘아가씨를 부탁해’
‘꽃보다 남자’의 아류작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는 ‘아가씨를 부탁해’. 실제로 이 드라마는 ‘꽃보다 남자’가 갖고 있는 소구점들을 거의 똑같이 활용하고 있다. 먼저 판타지에서나 볼 법한 초부유층의 환상을 드라마 속으로 끌어들인 것이 똑같다. 하인들과 집사들, 거의 성을 연상시키는 집, 잘 빠진 스포츠카에 패션쇼를 연상시키는 등장인물들의 화려한 의상까지, 이 드라마는 ‘꽃보다 남자’가 드라마라는 틀을 거대한 판타지 공간으로 만듦으로써 하나의 광고판 기능을 하게 했던 그 장치를 그대로 가져왔다.

캐릭터도 성별만 바뀌었지 성격까지 똑같다.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이민호)가 여자로 바뀌어 강혜나(윤은혜)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만 같다. 그래서 하려는 이야기는? 변함없는 멜로다. 윤상현이라는 매력적인 배우가 서동찬 역으로 등장해 강혜나의 집사 역할을 하며 멜로의 감정을 키워나가고 있지만, 그런 이야기 역시 ‘꽃보다 남자’가 금잔디(구혜선)를 통해 못된 부잣집 자제 길들이기를 했던 그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모티브를 그대로 따고 있다. 인물과 배경 그리고 사건까지 유사하니 그 달달한 맛은 있지만 이 드라마만의 엣지가 부족하다. 시청률이 안 오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인다.

제2의 ‘올인’, ‘태양을 삼켜라’
‘태양을 삼켜라’는 제2의 ‘올인’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 남자들의 세계를 다루는 드라마들이 늘 내세우는 야망과 복수의 코드는 ‘올인’이 했던 이야기의 연장선이고, 배경인 제주도와 카지노 도박의 세계 역시 판박이다. 인물들 역시 어디선가 봐왔던 캐릭터들이다. 늘 이런 드라마에 존재하기 마련인 재벌 장민호 회장(전광렬), 그 회장의 망나니 후계자 태혁(이완), 그 태혁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대신 감방에도 들어가는 정우(지성), 그리고 이 두 사람 사이에 서서 멜로를 연출하는 수현(성유리). 게다가 그 주인공인 정우가 사실은 장민호 회장의 아들이라는 출생의 비밀까지.

드라마가 여기저기서 무수히 봐왔던 익숙한 코드들을 조합한 느낌을 준다는 점은, 이 드라마가 가진 스케일과 화려한 볼거리를 무색하게 만든다. 새로운 스토리가 없는 볼거리는 맥락 없이 이어지고, 결국 스토리까지 잡아먹는다. 게다가 이 드라마는 ‘올인’에서 이야기를 더 절절하게 만들어준 이병헌과 송혜교 같은 배우의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딱히 연기의 문제라기보다는 캐릭터가 가진 식상함이 배우들의 연기마저 삼켜버리는 형국이다. 이 정도의스케일과 이 정도의 제작비를 투여하고 20%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새로움이 없기 때문이다.

‘찬란한 유산’이여 다시 한 번(?), ‘천만번 사랑해’
한편 새로 시작한 SBS 주말드라마 ‘천만번 사랑해’는 여러 모로 ’찬란한 유산‘의 코드들을 가져왔다. ‘천만번 사랑해’는 대리모 문제를 내세워 우리네 사회가 가진 핏줄의식을 다시 한 번 끄집어내려 하고 있다. ‘찬란한 유산’에서 유산을 통해 문제제기 되었던 핏줄의식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것. 그것 자체는 잘못된 것이 없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찬란한 유산’의 성공방정식을 거의 따라가고 있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부재가 만들어내는 가족의 파탄, 배다른 자식이 겪게 되는 고난과 역경, 그 역경을 일으켜줄 재벌집 아들의 존재 등등. 유사한 코드들이 곳곳에서 보여진다.

다른 점이 있다면 ‘찬란한 유산’이 자극적인 소재를 다루면서도(심지어 자식을 내쫓는 계모 같은) 드라마 분위기가 늘 밝은 톤을 유지했던 것에 비해, 이 드라마는 전체적으로 자극 쪽으로 흐르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 드라마는 이제 시작이기 때문에 모든 걸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이 드라마가 주말이라는 시간대에 ‘찬란한 유산’이 거둔 성공을 다시 거두려 한다면, 자극적인 소재와 보편적인 정서 사이에 균형 있는 이야기를 구사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어디서 본 듯한, 그러나 어딘지 2% 부족한 드라마들의 탄생은 이미 확고히 성공한 드라마들의 성공 코드들을 다시 활용하려는 데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른바 장르라는 것은 바로 그 성공 코드의 재배열이 주는 이미 기대된 결과를 확인하는 반복적인 즐거움에서 탄생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장르에도 변주의 즐거움이라는 것이 있다. 타 드라마와는 확실히 다른 한 가지는 분명 갖추고 있어야 그 드라마만의 존재이유는 그제야 성립되는 것이 아닐까. 이 드라마들이 바로 그 존재이유를 찾아서 부족한 2%를 채우기를 기대한다.

임주은, 빙의연기가 끄집어낸 그녀의 스펙트럼

처음에는 그저 평범한 여고생 같은 이미지였다. '메리대구 공방전'에서 눈에 잘 띄지 않는 되바라진 중학생 역할을 했던 임주은이었기에 그것은 더욱 그랬다. 그 지나치게 평범해 보이는 얼굴은 임주은이라는 연기자를 그저 지나치게 만들었다. '여고괴담'류의 이제는 트렌디해 보이는 여고생 원혼의 연기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귀신에 빙의되는 윤하나라는 연기를 해야 하는 임주은은, 평범한 여고생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분노로 일그러진 원혼들의 얼굴로 변모하고 있었다. 이러한 변신은 임주은이라는 평범해 보이는 연기자의 속에 꽤 많이 내재된 연기의 스펙트럼이 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혼'은 표현이 자극적일지는 몰라도, 완성도로 보면 명품이라고 할 만큼 짜임새가 있는 작품이다. 얼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나 그것을 전하는 방식 또한 신선하다. 보통 공포물이라고 하면 원혼을 무서워해야 하는데, 오히려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이 더 무섭고, 따라서 이들을 처결하는 원혼의 복수가 속 시원하게 느껴지는, 그 아이러니한 체험을 이 드라마는 주고 있다. 공포물을 표방한 사회극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혼'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거의 모두 갖고 있는 양가적인 모습이다. 신류(이서진)는 연쇄살인범을 잡는 범죄자 프로파일러지만, 처참하게 파괴된 자신의 가족의 복수를 위해 그 능력을 사용한다. 따라서 과거의 피해자지만, 현재의 가해자가 된다. 살인범들에게 복수를 가하는 것이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그 역시 하나의 치밀한 연쇄살인범으로 볼 수도 있다. 바로 이 점, 피해자가 가해자로 돌변하는 것은 이 드라마가 가진 하나의 구조다. 그 핵심적인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 바로 윤하나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윤하나를 연기하는 임주은의 역할이 녹록치 않게 된다. 그녀는 피해자로서의 모습과 가해자로서의 모습을 동시에 품고 순간순간 오가야 한다. 그것도 한 인물의 변화가 아니다. 여러 원혼들이 그 속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그 많은 캐릭터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상대적으로 평범한 얼굴은 오히려 이 연기를 더 효과적으로 만든다. 조금 크게 떠지면서 힘이 들어가는 눈빛으로의 변신은 편안한 소녀의 눈빛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보는 이들을 더 소름끼치게 만든다.

'여고괴담'이 수많은 여성 스타 연기자를 발굴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이러한 여성이 원혼으로 등장하는 공포영화는 연기자들을 연기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한 가지 모습이 아닌 여러 모습을 한 작품에서 드러나게 해준다는 이야기다. 그런 면으로 보면 여러 인격체를 그 속으로 끌어들여 복수를 하는 '혼'이 임주은에게 요구하는 연기는 그 폭이 더 넓다. 그리고 임주은은 그것을 꽤 능숙하게 해내고 있다. 이 변신이 '혼'이라는 작품의 핵심적인 것이라고 봤을 때, 임주은의 연기는 말 그대로 '혼'을 살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신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드림', '친구', '태삼', 그들은 도대체 왜 싸우는 걸까

그만큼 키워줬는데 내 뒤통수를 치려 해? 드라마 '드림'에서 아시아 최고의 스포츠 에이전트 회사인 슈퍼스타코프 사장인 강경탁(박상원)이 남제일(주진모)에게 갖는 불만이다. 한편 남제일은 입장이 다르다. 충성해서 이만큼 회사를 키워냈는데 고작 나를 이렇게 취급해? 그는 개처럼 충성하며 회사를 키워온 자신을 바닥으로 내친 강경탁과 맞선다. 그런데 여기에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이들은 서로 대립하는 관계에 서 있고, 분명 남제일이 선이고 강경탁이 악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지만, 대결과정에서 보면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측면도 있다는 점이다.

"내가 사람 하나는 제대로 가르쳤군", 하고 강경탁은 자신의 뒤통수를 치는 남제일을 인정하고 남제일 역시 그 앞에 서면 어떤 선배로서의 예우 같은 것을 지켜주는 모습을 보인다. 이처럼 남제일과 강경탁의 대결은 선과 악으로 나눠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저 비정한 대결구도로 그려진다. 강경탁이 이기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 쓰는 것처럼 남제일도 적당히 언론을 이용하고 국내종합격투기의 중계권을 쥐고 있는 장수진 PD(최여진)와도 손을 잡는다. 두 사람은 가진 것의 많고 적음이 있을 뿐, 사실은 같은 과다. 이것은 마치 링 위에 서 있는 두 명의 파이터들처럼 선악의 구분이 없다. 그들은 그저 링의 법칙에 충실할 뿐이다.

한편 남제일에 의해 파이터로 키워지게 된 이장석(김범)은 불우한 환경 탓에 소년원에도 다녀온 전력이 있다. 그는 자신이 길거리의 쓰레기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링 위에 선다. 이장석을 트레이닝하는 박병삼(이기영)은 전 복싱 동양챔피언 출신의 명트레이너지만 선수를 키워줄 능력은 부족한 인물이다. 그래서 기껏 키워놓은 선수를 빼앗기고 그러면서도 "그 놈을 위해서는 잘된 일"이라고 위안을 삼는 인물이다.

'드림'이라는 남성들의 세계를 다루는 드라마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이처럼 늘 무언가와 사투를 버리고 있지만 정작 행복해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모든 권력을 쥐고 있는 강경탁도 마찬가지다. 그는 아버지의 트라우마 속에 갇혀 자신을 학대하며 살아가는 인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남제일이 성공하려 하는 것은 이미 성공했던 자의 추락이 주는 회귀욕망이겠지만, 그는 그렇게 성공하려는 것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그는 강경탁이 되려는 것일까. 그들은 모두 링의 법칙이 가지는 비정함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 법칙과 대항하든가, 아니면 링을 떠나 새로운 삶을 모색하려 하지 않는다.

이장석은 자기존재의 증명을 위해 링 위에 서는 인물이지만, 그 과정까지 즐기는 인물인 것 같지는 않다. 즉 그는 이 드라마의 대부분 남자들이 그렇듯이 어떤 목표를 위해 현재를 감내하고 있는 인물이다. 남자들의 이런 모습들은 실제 사회생활에서도 전혀 낯선 것이 아니다. 모두가 지향하는 성공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고, 무작정 달리면서 정작 자기 자신의 생활을 즐길 줄도 모르고, 늘 누군가를 위해 살아가는 자세를 고수하는 이런 모습들은 우리네 사회의 남자들이 갖는 대부분의 태도를 보여주지만 그것이 이 시대에는 어떤 울림을 주지 못한다. 지금은 미래가치로 제시되는 성공보다는 현재적 행복을 추구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미래를 다가올 현재로 볼 때, 현재를 즐기지 못한다면 그 삶은 영원히 불행할 것이다.

이것은 '드림'의 불쌍한 남자들이 처한 환경이고, 실제로 '드림' 같은 삶을 살아가는 현실의 남성들이 처한 환경이며, '드림' 같은 남성의 세계를 그리는 드라마들이 처한 환경이기도 하다. '드림', '친구', '태양을 삼켜라' 같은 드라마 속에서 남자들은 모두 똑같은 성공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지만 그것이 주는 가치는 과거적 향수에 머물고 있다. 이 드라마들의 시청률이 낮은 것은 대진운 탓도 크겠지만, 그 스스로 취하고 있는 가치관이 현재의 시청자들에게 보다 큰 공감을 일으키지 못하는 탓도 크다. 막연한 성공의 욕망을 향해 질주하던 남자들의 세계는 이제 저물어가고 있다. 가끔씩 사투를 벌이는 드라마 속의 남자들을 보면서 저들은 왜 저렇게 싸우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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