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구미호’들은 어떤 변신욕구를 갖고 있을까

드디어 21세기 식으로 재해석된 ‘전설의 고향’이 베일을 벗었다. 그 첫 타자는 ‘전설의 고향’의 상징이 되어버린 ‘구미호’. 여전히 아홉 개의 꼬리를 달고 소복을 입고 산발한 모습으로 등장하지만 뭔가 느낌이 확 다르다. 물론 1970년대의 구미호와 2000년대의 구미호가 같다면 구태의연한 재연에 불과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재해석에 있어서 원전의 기본 틀이나 전제, 즉 전통에 대한 존중은 필요한 법이다.

본래 ‘구미호’의 백미는 착하고 순하기만 한 아내가 순간적으로 끔찍한 구미호의 얼굴로 변신하는 그 장면에 있다. 흐릿한 호롱불 아래, 남편과 아내의 평범한 저녁의 일상이 보인다. 아내는 바느질을 하고 있고, 남편은 그런 아내에게 불현듯 떠오른 듯 옛날 산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구미호를 만났던 이야기를 해준다. 해서는 안 되는 그 얘기를 하는 순간, 카메라는 살짝 남편 뒤쪽으로 가려졌던 아내를 비춘다. 거기에는 아내는 사라지고 분노와 한에 서린 구미호가 앉아있다.

이 초창기 구미호가 열렬한 환호를 받았던 것은 당대 여성들의 억압과 해방이 그 특별한 공포 속에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구미호의 캐릭터는 무엇보다 그 변신능력과 사람의 간을 빼먹는 두려움으로 구성된다. 변신하기 위해 재주를 폴짝폴짝 뛰어넘기만 하면 되던 구미호가 왜 사람이 되려 하며, 또 한 사람의 아내가 되려 하는지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것은 다분히 전통적인 사회의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가치관이 반영된 결과다. 따라서 한 남편의 아내로서 사람행세를 하기 위해 긴긴 세월을 참으며 살아가는 구미호의 모습은 가부장적 세계관에서 억눌려온 우리네 며느리들을 대변한다.

중요한 것은 이 아내로서 사람으로서 살려 했던 구미호가 결국은 그것을 포기하고(이것은 남편의 저버린 약속 때문이다), 다시 여우로 떠나간다는 설정이다. 이 부분에서 당대의 시집살이하던 며느리들은 공포라는 장르 속에서나마 억압의 탈출을 경험한다. 떠나간 구미호를 뒤늦게 그리워하며 아쉬워하는 남편의 뒤늦은 후회는 ‘구미호’가 인간이 되기 위해(며느리가 사람대접 받기 위해) 겪은 천 년 동안의 힘겨운 시집살이에 대한 소극적인 위안이 된다. 자유로운 한 인간이 보수적인 사회 속에서 아내라는 변신을 강요받고, 또 그 아내가 다시 자유로운 인간으로 변신하고자 하는 이 욕구의 반복은 ‘구미호’가 가진 핵심적인 재미를 구성한다.

하지만 사회가 바뀌어서일까. 새로 재해석된 ‘구미호’에는 남편의 비밀얘기와 그 순간 변신하는 아내의 모습이 들어가 있지 않다. 즉 변신욕구는 이 새로운 ‘구미호’에서는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오히려 여기에는 현대적인 여성의 가치관이 더 많이 투영되어 있다. 혼례를 치르는 것이 사실은 죽음을 은폐하기 위한 의식이 되는 부분에서 ‘결혼은 죽음이다’라는 현대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건 그 때문이다.

사회는 개화되고 있지만(시대적 배경이 근대 초이다) 남성들은 여전히 부귀영화를 누리고 무병장수 하기 위해서는 지켜야 하는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전통에 빠져 있고, 여성들은 그 전통 속에서 여전히 신음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이것은 여성들에게 더 많은 기회와 권리가 주어지고 있다 말해지는 지금 사회가 여전히 그 속을 들여다보면 이렇게 남성들의 암묵적인 불합리의 전통에 싸여있다는 것을 강변하는 것만 같다.

‘구미호’의 공포는 그 억압의 강도가 높고 따라서 변신의 욕구가 강할수록 더 강렬해진다. 이렇게 착하던 얼굴의 그녀가 사실은 그 속에 끔찍한 여우의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는 그 사실이 공포의 고갱이가 되는 것이다. 만일 이 ‘구미호’가 과거의 틀, 즉 변신욕구를 충만히 가진 구미호의 모습을 재연했다면 공포는 더 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지금 달라진 사회에서 그다지 의미가 없는 향수 어린 억압의 기억에 머무르게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새로운 ‘구미호’에서 아쉬운 것은 지금의 구미호들(?)이 어떤 변신욕구를 갖고 있는지에 대한 좀더 깊은 연구가 필요했다는 점이다.


돌아온 ‘전설의 고향’, 그 재미요소와 관전 포인트

하얀 소복에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 그 속으로 핏빛 한으로 이글거리는 두 눈. 마치 TV에서 튀어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이불을 뒤집어쓰고 연실 “지나갔어?”하고 물어보던 그 귀신이 돌아왔다. 다름 아닌 ‘전설의 고향’의 재림이다. 77년부터 무려 12년 간 매주 570여 편을 방영했고, 96년부터 99년까지 70여 편이 방영되었으며 이제 2000년대 들어 다시 방영되고 있으니, 이 드라마는 세대를 뛰어넘는 고전 중의 고전인 셈이다.

‘전설의 고향’의 특별한 공포
이렇게 된 데는 ‘전설의 고향’이라는 형식이 가진 무궁무진한 이야기들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드라마는 각 지방마다 하나씩은 꼭 있게 마련인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傳說)를 극화한 것이다. 거기에는 특이한 자연물에 대한 유래나 인물에 얽힌 이야기들이 무궁무진하다. 이 이야기들은 기본적으로 재미있는데다가, 지방의 연원이나 특색을 담고 있고, 또한 적정한 교훈도 갖고 있기 때문에 드라마 컨텐츠로서 그만일 수밖에 없다.

‘전설의 고향’의 상징이 된 꼬리 아홉 달린 구미호나, “내 다리 내놔”란 유행어로 잘 알려진 ‘덕대골’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 이 드라마의 기본 힘은 공포에 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공포물이면서도 아이와 어른이 함께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아이들이 보기에는 끔찍한 피와 살점이 튀는 요즘의 공포물들과 비교해보면 ‘전설의 고향’의 영상은 그저 밋밋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뇌리 속에 오래도록 남는 그 공포감은 직접적인 장면의 잔혹함보다는 간접적으로 상상력을 자극하는 스토리의 무서움에서 비롯된다.

게다가 억울하게 죽은 귀신들의 한 속에는 저마다 복수의 이유들이 들어가 있다. 이것은 결국 이 스토리들이 권선징악의 보편 타당한 교훈들을 갖게 만든다. 따라서 마지막에 가서 “이 이야기는 ○○○에서 전해져오는 것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라는 정리 멘트로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퓨전사극 시대, ‘전설의 고향’은?
초창기의 ‘전설의 고향’이 이런 모든 장점들을 다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조악했던 특수효과와 영상기술 덕분이다. ‘전설의 고향’만이 갖는 공포에는 사실 어색한 분장이나 연출 같은 것에서 비롯되는 촌스러움의 미학이 숨겨져 있다. 그것은 마치 처음 봤을 때는 화들짝 놀라고 나서, 다음에는 ‘내가 이런 어설픈 것에 놀랐어?’하는 안도감으로 웃음을 짓게 만드는, 과거 조악했던 괴기전의 공포와 유사하다. 90년대에 새롭게 제작된 ‘전설의 고향’은 CG효과를 너무 쓰다가 오히려 이러한 ‘전설의 고향’만의 특별한 공포체험을 잃게 된 부분이 있다.

그렇다면 지금 새롭게 시작하는 ‘전설의 고향’은 어떨까. 일단 컨텐츠는 과거의 것들 속에서 나온 것이라 그다지 새로울 것은 없다. 하지만 본래 전설이란 그 화자의 이야기 방식에 따라 전혀 새로운 재미를 주게 마련. 공포와 액션과 스릴러와 해학까지 겸비한 ‘전설의 고향’의 새로운 버전에서 주목해야할 것은 과거와는 달라진 사극 그 자체다. 이제 사극은 좀더 현대적인 퓨전사극의 시대로 가고 있다. 이 새로운 사극을 주도한 ‘한성별곡-正’의 곽정한 PD(구미호 편 연출), ‘쾌도 홍길동’의 이정섭 PD(오구도령 편 연출)의 연출이 기대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한편 최수종, 안재모, 이덕화, 이민우 같은 걸출한 사극 연기자들이 등장하는 것도 새로운 볼거리 중의 하나이다.

다시 돌아온 ‘전설의 고향’은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한 여름의 킬러 컨텐츠가 분명하다. 거기에는 우리 식의 토속적인 공포와 해학이 있고, 권선징악의 보편타당한 정서가 있다. 이 기본 골격 위에 새로운 뉴웨이브 사극 감독들이 펼치는 연출의 묘미와 걸출한 사극 지존들의 연기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관전 포인트가 된다. 어쩌면 ‘전설의 고향’ 같은 컨텐츠는 스토리에 목말라하면서, 사극에서조차 고증보다는 상상력을 더 요하게 만드는 지금 같은 시대에 더 잘 맞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설의 고향’이 다시 전설이 될 것인지, 아니면 그저 과거의 전설로만 남게 될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대장장이 경철, 정형사 강편수, 치매할머니 그리고 꽃순이

경남 하동에서 만난 치매할머니(김지영)와 며느리간의 보이지 않는 끈끈한 정을 녹차김치를 통해 풀어내는 이야기 속에서(거의 2회에 걸쳐 방영되었다) 진짜 주인공은 누구일까. 간간이 성찬(김래원)과 진수(남상미)의 애정모드가 연출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봉주(권오중)와의 대결구도가 존재하지만 적어도 이 에피소드에서 본래 주인공들은 뒤편으로 물러나 있다. 치매할머니가 김치를 담그기 위해 이것저것 심부름을 시키는 것처럼 이 에피소드 속에서 성찬과 진수는 보조적인 역할만을 하고 있을 뿐이다.

‘식객’의 조연들이 중심에 온 이유
이것은 치매할머니의 경우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위암에 걸린 채, 교도소에 있는 아들을 위해 게장을 가져다주는 대장장이 경철(유순철)의 에피소드에서도 그렇고, 백정이라는 편견으로 가족들과 멀어지게 된 정형사 강편수(조상구)의 에피소드에서도 그러하며, 심지어 최고의 조연(?)이라 찬사를 받았던 꽃순이라는 소의 에피소드에서도 그렇다. 이들이 등장했을 때, 주연들은 아낌없이 자리를 비워주었고, 그 빈자리는 그들의 몫이 되었다.

이 한 순간씩 주연이 뒤로 물러나는 장면들은 ‘식객’이 가진 색다른 구조를 말해준다. 물론 ‘식객’에도 드라마라면 늘 등장하기 마련인 삼각관계(성찬-주희-봉주)와 대결구도(성찬-봉주)가 있어 이것이 드라마를 이끌어 가는 주된 힘인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에서 그쳤다면 ‘식객’은 그저 앙상한 드라마에서 끝났을 것이다. 이 드라마의 클리쉐에 해당되는 기본구조가 ‘식객’의 뼈대를 만든다면, 그 뼈대 위에 붙어있는 먹음직스런 살들은 조연들이 만들어가는 철학적이고 감동적인 에피소드에 의해 구성된다.

이런 구조를 가지게 되자 ‘식객’은 누구나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대중적인 뼈대를 가지면서도 동시에 그 위에 깊이를 더하게 된다. 이렇게 된 것은 ‘식객’의 원작이 이미 충분히 곰삭은 에피소드들을 거의 무한정 많이 갖추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허영만 화백의 원작만화 ‘식객’은 사실상 에피소드별로 나눠지게 되어있어, 드라마나 영화로 극화했을 때 점차적으로 쌓여져 가는 이야기 구성이 쉽지 않다. 너무 감동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에피소드에 치중하면 극의 추진력이 떨어지게 된다. ‘식객’의 드라마가 영화보다 나은 점은 감동적인 에피소드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인물간의 경합을 통해 추진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식객’의 맛이 깊어질 수 있었던 이유, 그들
물론 이러한 이중구조(성찬과 봉주의 대결구도와 서민들의 이야기)가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게 된 것은 이 두 요소를 성찬과 봉주라는 캐릭터 속에 구현함으로서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닌 하나의 이야기로 잘 묶어두었기 때문이다. 서민적인 맛 속에서의 위대함을 찾는 성찬은 자연스럽게 이들 서민들 속으로 들어가 에피소드들을 들으면서 성장하고, 동시에 맛의 세계화를 추구하는 봉주와 부딪치게 된다. 대결구도가 만들어질 때, 성찬이 서민들의 삶 속에서 해답을 찾아내는 것은 이 이중구조의 정교한 접합지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연이 정작 자리를 내줬을 때, 그 자리를 온당히 차지하는 조연의 힘이다. 주연들이 상대적으로 짧은 연기경력에 젊고 잘 생긴 배우들로 캐릭터가 서서히 구현되면서 차차 시선을 잡아끌었다면, 조연들은 오랜 연기경력의 힘으로 단번에 배역을 장악해버린다. 노인 역할이라면 이력이 난 국민 할아버지 유순철의, 얼굴만 봐도 느껴지는 세월의 흔적이나 아픔은 자잘한 설명 없이도 대장장이 경철의 사연을 전해주기에 부족하지 않으며, 시라소니 조상구는 그 포스 그대로 정형사 강편수가 되었고, 대사 한두 마디로도 가장 인상깊게 보는 이의 마음을 파고드는 김지영의 치매할머니 연기는 김치 담그는 손끝하나로도 정을 느끼게 만들었다.

‘식객’이라는 음식의 맛이 깊어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소소해 보일 수 있는 서민들의 역할에 아낌없는 조명을 비출 수 있게 만든 드라마의 구조와 그 구조 위에서 깊은 연기의 맛을 펼친 이들 배우들의 몫이다. 어쩌면 이 부분은 이 드라마가 하고자하는 이야기의 진짜 핵심을 이루기 때문에, ‘식객’이 가진 맛의 본질이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대장장이 경철, 정형사 강편수, 꽃순이, 치매할머니 같은 ‘식객’의 숨은 주역은 단지 이 드라마의 양념이 아니다. 그들이야말로 이 드라마의 진짜 맛이다.

엄마의 로망은 불륜이 아니라 자기생활이다

주말 밤 가족들의 때아닌 토론(?)이 벌어진다. 그간 엄마로서 희생하며 살아온 것은 이해하겠는데, 그렇다고 ‘1년 간 휴가’를 간다는 건 좀 아니라는 의견과 그간 희생해온 대가로 ‘1년도 적다’는 의견이 팽팽하다. 다름 아닌 ‘엄마가 뿔났다’ 이야기. 모든 가사활동에서의 해방을 주장한 뿔난 엄마, 김한자(김혜자)는 결국 집을 나오는 길에 남편의 차안에서 “너무 좋아!”하고 소리지른다. 그 장면은 마치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하던 모 회사 광고를 떠올리게 한다.

한편, ‘달콤한 나의 도시’의 은수엄마(김혜옥)는 늘 자신을 무시해온 권위적인 남편에게 “이제 헤어지자”고 말한다. 애써 차려준 밥상에서 곱게 먹어도 시원찮을 판에 늘 투덜투덜 반찬투정을 해대는 남편은 그 말마저 무시한다. 은수(최강희)는 그런 아빠를 잘 알기에 엄마의 심정을 이해한다. 심지어 엄마가 아빠 몰래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었다는 사실까지도. 하지만 은수는 여전히 엄마가 이혼까지 하겠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못한다. 이유는? 엄마니까.

은수나 김한자네 식구들이 엄마가 집을 나가겠다는데 동의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많은 시청자들도 어쩌면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굳이 저렇게까지 해야하나’, ‘다들 그렇게 사는데 유난 떠네’하면서. 하지만 이런 정서에는 무언가 엄마라는 존재에 대한 암묵적인 동의, 즉 엄마로써 당연히 해야하는 의무 같은 것에 대한 가족 구성원들의 뿌리깊은 정당화가 숨겨져 있다. 이런 엄마들을 이해는 하지만 동의하지 못하는 이유가 단순히 ‘엄마니까’라는 건 무언가 문제가 있다.

이틀이 지나서야 엄마의 생일이 지난 걸 알게된 자식들에게 “너희들 왜 날 무시해?”하고 김한자가 말하는 것은 단지 그 기억 못한 생일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일 년 중 하루, 생일날에 선물이나 용돈 챙겨주고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말하면서 나머지 364일을 엄마로서의 의무에 더 충실하라 강요받아온 그 숨막히는 세월 때문이다. 뒤늦게 하게된 생일 상에 선물들을 바리바리 싸 가지고 온 자식들은 그것으로 또 일 년을 넘겨보려 했지만, 김한자는 이미 알아버렸다. 그런 매년의 이벤트가 자신의 인생에서 자기만의 삶을 지워버리고 있었다는 걸.

매년 5월8일이면 떠들썩하게 어버이날이라 해서 이 땅의 자식들을 부모님께 카네이션을 달아드린다. 자식이 부모 공경하는 것이 무에 나쁠 것인가. 중요한 것은 그 하루의 이벤트가 아니라 평상시에 부모의 행복을 살뜰히 살피는 것이 아닐까. 이 어버이날의 전신으로 만들어졌던 ‘어머니날(1956)’이 사실은 전통적인 부모의 상(신사임당 같은)을 내세우며, 끊임없는 인내와 희생을 강요하는 역할을 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은수가 이혼을 결심한 엄마에게 “엄마로 남아 있었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도 늘 엄마는 자신의 이름이 거세된 엄마로만 불려지길 바랐던 건 아닐까. 엄마가 원하는 건, 생일이나 어버이날 같은 기념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탈법적인 불륜이나 탈선도 아니다. 그저 자기 생활을 갖고 싶을 뿐이다. 드라마가 보여주는 엄마들의 자기 주장은 그저 뿔난 엄마들의 반란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에서는 여전히 꿈꾸기 힘든 엄마들의 로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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