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적 대화의 시대, 토크쇼에서 살아남기

‘투나잇쇼’로 잘 알려진 자니 카슨이나, 그 계보를 이어받은 제이 레노, 그리고 역시 토크쇼의 귀재로 동명의 쇼를 진행하는 데이비드 레터맨 같은 이들은 혼자 북치고 장구치는 1인 MC 체제를 꽤 오랜 세월 동안(‘투나잇쇼’는 거의 50년 가까운 전통이 있다) 유지해왔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1인 MC체제의 쇼가 유행했던 적이 있다. ‘자니윤쇼’, ‘주병진쇼’, ‘이홍렬쇼’, ‘이주일쇼’, ‘서세원쇼’, ‘김형곤쇼’ 등등이 그것이다. 그 이름만 봐도 한 시대를 풍미한 개그맨들이라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형태의 토크쇼는 이제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다. 이제 대세는 집단 토크쇼다. 한 명의 MC가 아닌 여러 MC들이 나와 말들을 쏟아낸다.

인터넷 환경을 닮은 집단 토크쇼
이것은 정확히 쏟아낸다는 표현이 맞다. 과거의 1인 MC 체제의 토크쇼에는 기본적으로 질문-답변이라는 순서가 있었다. 하지만 집단 MC 체제에는 이러한 순서는 거의 무시된다. ‘명랑히어로’에서 김성주가 좀 진지하게 어떤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할 때, 김구라는 아예 그 이야기 자체를 끊어버리고 자신의 이야기로 방향을 돌린다. 그리고 김구라의 이야기 도중에도 신정환은 계속 엉뚱한 이야기로 맥을 끊으려 노력한다. 심지어 카메라가 신정환을 잡고 있는 와중에도 말들을 계속 튀어나온다. 그것은 자막의 형태로 마치 만화를 보는 것처럼 화면 속에 들어온다.

집단 토크쇼의 묘미는 비록 글자로서라도 화면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고 싶을 정도로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는 말의 상찬에 있다. 아마도 과거의 토크쇼에 더 익숙한 분들이라면 이 정신산란한 말과 글자가 범람하는 화면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정보들의 홍수와 그 홍수 속에서의 순간적인 집중에 대한 훈련을 늘 디지털 사회 속에서 해오고 있는 요즘의 시청자들이라면 말이 다르다. 그것은 너무나 익숙한 풍경일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정보가 너무나 일목요연한 1인 체제의 토크쇼를 보며 그 단순함에 하품을 할 지도 모른다.

과거의 중앙 집중식 토크쇼 형식이 점점 사라지고, 중앙이 없이 서로 주장들이 난무하는 집단 토크쇼로의 변화는 작금의 인터넷 환경을 닮아있다. ‘라디오스타’에서 서로 자신이 메인 MC라고 주장하는 것은 고스란히 인터넷에서의 대화방식을 닮았다. 인터넷에서의 대화 방식이란 중앙이 없고 대신 무수한 중앙들이 서로의 주장을 하며 부딪치는 형태다. 이처럼 수직적인 대화구조가 수평적인 형태로 변모하면서, 어느 한 사람의 주도 하에 끌려가는 1인 MC체제의 토크쇼는 점점 과거의 유물이 되어가고 있다.

집단 토크쇼, 달라지는 MC들
이렇게 대화방식이 달라지고 그 방식을 수용한 집단 토크쇼들이 등장하자 MC들도 달라졌다. 물론 집단 토크쇼에서도 메인 MC는 존재하지만 그 힘은 현저하게 약화되었다. ‘해피투게더’의 유재석은 메인 MC임이 분명하지만, 프로그램에서 너무 전면으로 나서지는 않는다. 적당한 선에서 그 날 출연한 게스트들의 웃음 포인트를 콕콕 집어내는 것이 그의 역할이다. 이것은 유재석이 이 시대에 어떻게 예능 프로그램 MC 0순위의 자리에 올랐는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이것은 최근 주목받는 MC로서 강호동도 마찬가지다. 강호동의 스타일이 좀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유재석과는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그 역할은 그렇지 않다. 강호동은 좀 공격적인 방법으로 게스트들의 웃음 포인트를 끄집어 내주고 있을 뿐이다. 공격적인 질문만큼 답변에 대한 과장된 리액션을 아낌없이 보여주는 것은, 씨름을 했던 선수라면 당연할 ‘천부적인 균형감각’을 토크쇼에 있어서도 강호동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강호동의 장점은 좀더 강한 토크의 세계 속에서도 유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초창기 ‘무릎팍 도사’의 성공을 가능하게 한 원인이다.

집단 MC 체제는 그 형태가 기본적으로 이야기 배틀의 구조를 가져가기 때문에 그 상황 속에서 특유의 재능을 가진 MC들을 주목시킨다. 그 대표적인 MC가 신정환이다. 신정환은 특유의 순발력과 재치로 TV에 등장하자마자 토크쇼의 강자로 떠오른 인물이다. 물론 탁재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최근 탁재훈은 메인 MC의 이미지가 너무 강하게 생기면서 오히려 초창기의 이미지를 아쉽게 만들고 있다. 지금은 옆자리에 앉아서 툭툭 던지는 촌철살인의 말들이 가장 중심에 서서 하는 말보다 더 주목받게 되는 시대다.

옆자리 토크에 적응해야 살아남는다
바로 이 ‘옆자리 토크’가 우세한 시대가 낳은 스타가 김구라다. 그는 누군가 하는 말을 받아치는 방식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세울 수 있었다. 받아친다는 것은 어찌 보면 강렬한 인상을 줘 독한 이미지로 비춰질 수 있지만 김구라는 그 부분을 솔직함과 공감으로 넘어선다. 실제로 가끔씩 던지는 사회에 대한 쓴 소리는 그것이 의미가 있든 없든 간에 보는 이의 마음을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구석이 있다.

오랫동안 메인 MC로서의 확고부동한 위치를 차지해온 이경규는 이렇게 달라진 환경 속에 스스로를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명랑히어로’에 나온 이경규가 박미선에게 “너랑 같이 했어야 했다”고 말하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박미선은 메인의 입장에서 한참 동안의 공백을 통해 변방으로 내려와 집단 토크쇼 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가 제일 먼저 한 것은 ‘해피투게더’에서 후배 박명수를 웃기기 위해 굴욕을 거듭하며 한없이 낮아지는 것이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박미선은 편안한 아줌마의 이미지로 집단 토크쇼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새로 돌아온 김국진도 마찬가지다.

달라진 시대의 대화방식을 차용한 집단 토크쇼는 거기에 걸맞은 MC들의 변화를 요구한다. 그 변화는 바로 수직적 체계에서 수평적 체계로의 이행이다. 라인 문화가 공공연히 프로그램 속에서 회자되던 적이 있었다. 그것이 실제로 수직적인 체계인지는 의문이지만 어쨌든 지금은 라인 문화(일단 이 용어부터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보다는 팀 문화가 더 어울리는 시대다. 옆자리에 앉아 편안하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이 변화된 토크쇼 환경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Daum 블로거뉴스
블로거뉴스에서 이 포스트를 추천해주세요.
추천하기

이 시대의 아버지들, ‘되고송’을 불러라

아버지는 늘 한 자리 물러나 앉아 계셨다. 다들 모여 밥을 먹을 때도, 함께 놀러갈 때도, 심지어 저녁에 모처럼 모여 TV를 볼 때도 늘 한 자리 뒤쪽에 앉아 계셨다. 어찌 보면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예우처럼 보였다. 특별대우 말이다. 하지만 퇴직 전에도 그랬지만 퇴직 후에도 아버지는 특별대우를 요구한 적이 없었다. 그저 가족 중 누가 말하면 빙긋이 웃으면서 뒤로 물러나실 뿐이었다. 왜 그랬을까. 혹시 자기 삶을 늘 뒷전에 두고 계셨던 아버지는 새삼스레 자기 삶을 살 시간이 주어진 것이 못내 어색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늘 뒷전에 있는 아버지에 익숙해진 가족들의 관성은 아니었을까.

이른바 아버지 수난 시대에 살아가는 지금의 아버지들은 가장이라는 이름 하에 자신의 삶을 저당 잡혀 살아왔다. 젊어서는 경제개발이라는 이름 하에 산업의 현장에서 밤낮 없이 일했고, 이제 그 결실을 얻어야 할 나이에 IMF를 맞았다. 평생 등골 휘게 살아온 대가로 돌아온 보상이라곤 구조조정으로 일찌감치 명퇴한 아버지가 앉을 뒷전뿐이었다. 어린 시절 권위의 상징처럼 보였던 아버지, 그 자리에 자신이 와 있건만 자꾸 뒤로 밀려나면서 가슴 한 편에 남는 공허함은 도대체 뭘까. 권위의 끝자락에서 보게 되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한없이 작게만 느껴지는 이유다.

엄마가 뿔날 때, 아버지는 왜?
주말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의 주인공은 제목처럼 엄마 김한자(김혜자)다. 제 맘대로 되는 자식 없다고 김한자는 자식 하나 하나가 미덥지 못하다. 참다 참다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되면 김한자는 결국 뿔을 낸다. 엄마의 뿔은 온 가족을 비상으로 몰고 간다. 가족들은 모두 엄마를 의식하면서 어떻게 하면 그 뿔을 가라앉힐까 고민한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아버지 나일석(백일섭)은 어떤가. 같은 부모 입장이 다를 리 없겠지만 나일석은 그 와중에도 아내 김한자의 심기를 살피기에 바쁘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 아내를 뿔나게 한 자식에게도 똑같이 마음을 쓴다. 마치 제3자의 입장인 것처럼 늘 어느 한 편만을 고집하지 않는 이 몸에 밴 습관은 어디서 온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사회생활 속에서 위로 눈치보고 아래로 눈치보며 살아왔던 세월의 흔적은 아닐까.

이렇게 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엄마인 김한자는 축복 받은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뿔나는 일이 있어도 늘 살뜰히 신경 써주는 남편이 있고, 권위라고는 눈곱만치도 발견할 수 없는 멋진 시아버지(이순재)가 있다. 게다가 시누이(강부자)는 거의 친구라고 해도 좋을 만큼 격이 없고 친근하다. 이 뿔난 엄마네 가족을 찬찬히 살펴보면 가장 쓸쓸한 자리에 서 있는 인물을 발견할 수 있다. 낮이면 세탁소 한 구석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가 저녁이면 밥상머리에서 아내의 눈치를 보는 아버지가 바로 그 존재다.

엄마의 세상, 지워져버린 아버지들
요즘은 이른바 엄마의 세상이라고 한다. ‘엄마마케팅’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가정의 대소사는 물론이고 자잘한 선택의 순간에까지 엄마의 파워는 그만큼 강력해졌다. TV드라마는 바로 이런 변화를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인다. 최근 들어 우후죽순 등장하고 있는 아줌마드라마의 배경 역시 바로 이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드라마 속에서 엄마들은 서민적 삶이 주는 끈끈함을 체험하다가(엄마가 뿔났다), 바람난 남편에 대한 상쾌한 복수를 하고(조강지처클럽), 상류층의 삶을 대리경험(행복합니다)하기도 한다. 심지어 사회적으로 안정된 직장에 잘 생긴 젊은 남자들의 사랑을 받는 아줌마 신데렐라(천하일색 박정금,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뒤안길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사라지거나 왜소해지고 있다. ‘천하일색 박정금’의 박정금이나 ‘온에어’의 서영은(송윤아)은 남편이 존재하지 않는 싱글맘이고, ‘행복합니다’에서의 남자들은 여자에게서 선택받는 신데렐라거나(이준수, 이훈역), 아이까지 갖게 하고는 도망친 남자거나(박상욱, 이종원역), 그 버려진 아이까지 떠맡아 기르려는 남자이거나(이용재, 김철기역), 죽은 아내를 평생 그리워하며 사진에 대고 대화를 나누는 남자(이철곤, 이계인역)들이다.

아버지들이여 ‘되고송’을 불러라
“부장 싫으면 피하면 되고, 못 참겠으면 그만 두면 되고, 견디다보면 또 월급날 되고 생각대로 하면 되고.”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모 통신사의 ‘되고송’. 특유의 긍정어법으로 수많은 패러디를 낳으며 화제를 일으키고 있다. 이 노래 가사의 구조는 간단하면서도 강력하다. 그것은 ‘○면 ☆되고’가 반복되는데 여기서 ‘○면’의 ○은 부정적 상황을 말하고, ‘☆되고’의 ☆는 그 부정적 상황에 대한 ‘긍정적 생각’을 말한다. 그러니 가사가 계속 반복되면서 안 좋은 상황들은 하나하나 긍정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 쐐기를 찍듯이 후렴구처럼 ‘생각대로 하면 되고’로 끝나면서 ‘모든 건 생각에 달렸다’고 되짚는다.

이것은 어쩌면 지금 아버지들이 처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아버지는 이제 이 달라진 세상을 긍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긍정 속에 자신도 포함시켜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스스로 자책하면서 뒷전을 찾아 서는 아버지들의 진짜 자리를 찾는 길이다. 그리고 그 자리는 누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란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 이제 잊고 있던 꿈이라도 들춰내 자신을 위한 투자를 아끼지 말자. “회사 잘리면 내 생활하면 되고, 누가 뭐라면 그저 웃어주면 되고, 삶이 힘들면 잠시 쉬면 되고, 못 참겠으면 뿔 내면 되고,” 그렇게 되고송을 부르자. 뿔이라도 내보자.
(이 글은 한국원자력연구원 (http://www.kaeri.re.kr/) 사보에 게재된 글입니다)


Daum 블로거뉴스
블로거뉴스에서 이 포스트를 추천해주세요.
추천하기

시청자의 눈이 되려는 카메라의 눈

MBC 드라마 ‘스포트라이트’의 한 장면. 서우진(손예진) 기자는 일본인 관광객으로 위장한 채, 그들을 대상으로 짝퉁 명품을 팔아온 일당들을 잠입취재 한다. 이것은 ‘스포트라이트’의 ‘탐사저널’이라는 코너로 뉴스 심층 취재의 한 방식인 ‘탐사보도’의 전형을 보여준다. 탐사보도란 사실보도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사건 그 이면을 파헤치는 적극적인 언론보도방식을 말한다. 탐사보도가 주창하는 것은 사실은 진실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명제다. 그 진실을 캐기 위해 기자들은 현장으로 직접 다가가며 그 과정을 잡아내는 것은 다름 아닌 몰래카메라다.

대중들의 눈이 된 TV
우리에게 이러한 탐사보도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추적60분’이나 ‘PD수첩’, ‘그것이 알고싶다’같은 코너들은 늘 사실로 포장된 것들을 파헤쳐 카메라에 담음으로써 사회적 이슈로 끄집어올리는 역할을 해왔다. 정치인의 문제나, 권력 비리 같은 거대담론들이 탐사보도의 도마 위에 올려져 부끄러운 속살을 보인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최근 이 탐사보도는 이러한 거대담론에 주로 붙박여 있던 시선을 생활 저변으로 넓히고 있다.

‘PD수첩’의 미국산 쇠고기 안전성 관련 보도와 그 파장으로 알 수 있듯이 이제 정치적, 사회적 사안은 국회에서 벌어지는 ‘저들만의 리그’가 아니라 바로 우리 생활이 되었다. 카메라가 상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하는 소비자들의 눈이 되어준다거나(‘이영돈 PD의 소비자고발’이나 ‘불만제로’), 인권에 있어서 사회적 폭력에 집중됐던 카메라가 가족 내 폭력에 눈을 돌리는(‘긴급출동 SOS’) 것은 이제 카메라의 시선이 좀더 생활 속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들이다.

이 거대담론에서부터 생활까지 전방위에 걸친 ‘고발하는 TV’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 것은 그만큼 신뢰성이 사라진 사회를 말해주는 동시에, 그만큼 대중들의 눈을 장악한 TV의 힘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심심찮게 이러한 ‘고발하는 TV’의 영상 속에서 사건에 연루된 관할 공무원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 영상이 보여주는 것은 이제 법망보다 카메라의 신뢰성이 더 높다는 것이다. 우리는 정치인, 심지어는 대통령의 말보다 TV가 해주는 말을 더 신뢰한다. 이렇게 된 데는 불신의 사회와 그것을 파헤쳐 고발하면서 대중의 지지를 얻어온 TV의 유리한 입지가 만나서 생긴 결과이다. 이 때 그 영상을 잡아낸 몰래카메라는 대중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여주는 눈이 된다.

대중들의 욕망이 투영된 눈
하지만 이 TV의 공공성을 대변하는 듯한 탐사보도 형식의 ‘고발하는 TV’가 늘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면을 들추어낸다’는 이 말은 진실을 찾는다는 지적 호기심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또한 감추어진 것, 혹은 금기된 어떤 것을 보고 싶은 욕망이 자리한다. 이것은 영상과 만나면서 더 폭발력을 갖는다. 종종 탐사보도에 대해 지나치게 자극적인 영상에 대한 논란이 불거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최근처럼 이제 카메라가 거대담론이 아닌 생활을 비추게 되었을 때, 영상에 노출되는 사생활이 문제가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들 영상들이 자극으로만 흐르지 않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프로그램의 공익성이다. 공익성이 없이 ‘고발하는 TV’의 형식만을 취해 자극적인 엿보기 영상을 끄집어낸 대표적인 것이 케이블TV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페이크 다큐나 유사 다큐 프로그램들이다. 여기서 탐사보도의 시선을 따르는 카메라는 마치 시사고발 프로그램의 형식 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실제로 그런 스튜디오를 활용한다) 사실은 엿보기라는 드라마의 자극적인 코드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차용된 것뿐이다.

이것은 시사연예 프로그램이라는 슬로건을 달고 있는 ‘리얼스토리 묘’같은 프로그램이 고수하고 있는 카메라의 시선과 동일하다. 이러한 프로그램들 속에서 카메라는 사실 이면의 진실을 파헤친다기보다는, 시청자들이 보기를 원하는 은밀한 욕구의 대리자가 된다. 카메라를 두고만 봤을 때, 몰래카메라는 진실을 포착해내기 위한 훌륭한 장치가 되기도 하지만, 타인의 사생활과 은밀한 볼거리를 잡아내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이것이 몰래카메라의 두 얼굴이자 ‘고발하는 TV’의 두 얼굴이다.

TV 전반에서 보이는 고발의 흔적들
몰래카메라로 대변되는 ‘고발하는 TV’의 영향은 탐사보도 프로그램만이 아닌 TV 전반에 걸쳐져 있다. 이것은 TV라는 영상매체가 프로그램을 막론하고 새로운 카메라의 등장이나 그 기법들에 거의 모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이경규의 몰래카메라’의 등장 이후부터 차츰 연예인들의 사생활이 TV에 노출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또한 ‘야심만만’이나 ‘상상플러스’ 같은 연예인 사생활을 끄집어내는 토크쇼 형식이 우후죽순 쏟아져 나오고, 리얼리티쇼가 봇물이 터진 것도 마찬가지다.

취재형식으로 초청된 게스트를 궁지에 몰아넣는 ‘무릎팍 도사’가 가능했던 것은, 연예계에 대한 사실이 아닌 진실을 알고 싶은 대중의 욕구들이 이른바 ‘고발하는 예능’과 맞아떨어진 결과다. 이런 면에서 최근 주목받고 있는 ‘명랑히어로’는 ‘고발하는 예능’이 연예인 사생활 폭로 위주에서 시사문제 같은 공익적인 포장을 요구하기 시작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다. 여기서도 TV의 힘을 느낄 수가 있는데, 미국산 쇠고기 문제에 대해서 ‘100분 토론’이 100분 이상의 시간을 써가며 토론했던 이야기만큼, ‘명랑히어로’에서 실현 불가능한 것일지라도 시원스럽게 쏟아낸 말에 대한 반향도 상당했다는 점이다.

최근에는 드라마마저 이런 기법들을 활용하고 있다. 종영한 ‘온에어’는 드라마 제작 과정에 벌어지는 연예계의 뒷얘기들을 폭로하면서 리얼리티를 확보하는 전략을 썼다. ‘온에어’ 자체는 환타지에 가까운 이야기를 갖고 있을 뿐이지만, 바로 이 ‘드라마가 드라마를 고발한다’는 이 부분에서 리얼리티라는 착시현상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현재 방영중인 ‘스포트라이트’에서도 마찬가지다. ‘스포트라이트’가 고발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탐사보도를 하는 방송기자들 자체다. 진실을 파헤치지만 그 진실은 정치적인 판단(드라마 상에서는 회장의 호화저택에 대한 진실과 방송기자의 성추행 문제를 서로 무마하기 위해 보도를 하지 않는다)에 의해 저지 당한다는 걸 드라마는 보여준다.

TV는 태생적으로 ‘보여준다’는 기능을 하고 있기에 몰래카메라로 대변되는 양면성, 즉 감춰진 진실을 드러내 보여주거나 혹은 감춰진 시각적 욕망을 들추어내는 두 가지를 모두 갖고 있다. 이것이 점점 더 TV가 대중의 눈이 되고 있는 요즘 같은 시대일수록 시청자의 예리한 눈과 냉철한 판단이 요구되는 이유다. 카메라의 전략은 점점 현란해질 것이고 그만큼 영상이 전하는 정보에 대한 해독은 어려워질 것이다. 그럴수록 우리의 눈은 더 밝아져야 한다.

지나친 시청률 경쟁, 컨텐츠 질 떨어뜨린다

주말이 되면 어김없이 리얼 버라이어티쇼에 대한 비교 기사들이 여기저기 뉴스로 올라온다. 그 대표주자는 ‘무한도전’과 ‘1박2일’. ‘무한도전’에 대한 기사가 뜨면 마치 반박이라도 하듯이 댓글이 달리기 일쑤인데, 눈여겨볼 점은 그 댓글 중에는 ‘1박2일’을 언급하는 대목들도 보인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만큼 이 두 프로그램에 대한 관심이 크다는 반증이지만 지나친 경쟁구도를 볼 때 꼭 그래야만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무한도전’과 ‘1박2일’, 시청률 비교는 넌센스
‘무한도전’과 ‘1박2일’은 서로 다른 시간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먼저 단순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시청률 비교는 넌센스다. 물론 리얼 버라이어티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어떻게 소재와 포맷, 그리고 캐릭터 구성이 다르게 연출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비교할 수는 있다. 하지만 ‘무한도전’을 좋아한다고 ‘1박2일’을 비난하거나, 또는 그 반대의 입장을 보이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왜 하루는 ‘무한도전’을 즐기고 다음날에는 ‘1박2일’을 즐기면 안 되는 것일까.

이것은 물론 지나친 시청률 경쟁의 결과다. ‘무한도전’과 ‘1박2일’이 경쟁구도를 갖는 것은 ‘무한도전’이 가진 ‘예능의 지존’이라는 별칭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하지만 예능 프로그램 전체에서 시청률이 가장 높다는 것은 사실상 별 의미가 없다. 시청률 비교라는 것은 동시간대에 경쟁하는 비슷한 프로그램들 사이에서만이 의미가 있을 뿐이다.

예를 들면 9시대에 하는 뉴스 프로그램이나, 10시대에 하는 방송3사의 드라마, 혹은 일일드라마의 시청률 같은 것이 비교대상으로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갑자기 끼여든 프로그램(예를 들면 국가대항 축구경기 같은)으로 타방송사가 영향을 받는 것처럼 시청률이란 상대 평가된 수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간대도 다른 이러한 프로그램의 단순비교는 현재 방송사간의 치열해진 시청률 경쟁을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라인업’의 하차가 말해주는 것
그렇다면 이러한 시청률 경쟁이 가져오는 결과는 무엇일까. 일견 경쟁이란 좋은 컨텐츠의 전제조건처럼 여겨지곤 하지만, 실제는 이와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경쟁구도 속에서 프로그램들은 저마다의 독자성을 가지고 승부하는 것이 아니라, 된다 싶은 형식이나 소재에 쏠리는 경향이 있다. ‘무한도전’의 독주에 도전장을 내밀고 같은 시간대에 비슷한 형식으로 등장한 ‘라인업’의 하차는 많은 걸 말해준다.

시청률 경쟁의 측면에서 보면 ‘무한도전’과 정면으로 부딪친 것은 ‘1박2일’이 아니고 ‘라인업’이다. ‘1박2일’은 승승장구하고 ‘라인업’은 하차한 이유는 그 다른 방영시간대와 창조적 재해석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즉 ‘1박2일’은 ‘무한도전’과는 방영시간대도 달랐고, 형식에 있어서도 여행이라는 소재를 끌어들여 창조적으로 재해석해낸 데 반해, ‘라인업’은 그러한 전략들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라인업’의 하차는 지나친 경쟁구도 속에서 차별화 전략을 쓰지 않고 미투 전략을 쓴 결과가 가져온 시행착오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프로그램 사이에서 유난히 베끼기 논란이 많은 것도, 바로 이 시청률 경쟁으로 인해 생겨난 비슷비슷한 형식을 구사하는 프로그램들이 많기 때문에 일어나는 결과다. 즉 비슷한 형식 속에서 그 형식이 요구하는 소재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겹칠 수밖에 없게 된다. 국내의 프로그램이 해외의 프로그램을 표절했다는 논란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때론 시청률 경쟁의 압박감에 몰려 실제로 표절을 감행하게 되기도 한다.

‘무한도전’과 ‘1박2일’, 경쟁대상 아니다
이러한 쏠림 현상은 단지 예능 프로그램만 그런 것이 아니다. 드라마에서 비슷한 소재들이 된다 싶으면 거의 동시에 쏟아져 나오는 것은 시청률 경쟁이 낳은 또 다른 폐해다. 주말드라마들이 온통 아줌마 시청자들을 타깃으로 한 가족드라마이면서 신데렐라 이야기로 가득하며, 한 때는 고구려 사극으로, 다음에는 퓨전사극으로 몰렸다가, 최근에는 방송을 소재로 한 전문직 드라마에 쏠리는 현상도 단순한 우연의 결과가 아니다.

따라서 이제는 ‘되는 것만 된다’는 식의 시청률 공식이 생겨나고 있다. 예능은 어떤 식으로든 리얼리티쇼를 가미해야만 하며, 드라마는 사극이나 전문직, 혹은 가족드라마가 아니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식이다. 이렇게 되면 여타의 시도들은 점점 설 자리를 잃게 되며, 프로그램들은 소재나 형식면에서 획일화되고, 결국 시청자들은 그만큼 다양한 볼 권리를 누리지 못하게 된다.

‘무한도전’과 ‘1박2일’은 서로 경쟁하는 대상이 아니다. ‘무한도전’은 최고는 아니지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재미와 감동을 주며, ‘1박2일’은 답답한 도시에서 살아가는 시청자라면 누구나 마음이 설레기 마련인 여행이라는 단어에 끌린다. 각자의 영역에서 서로 다른 재미를 선사하는 이 두 프로그램이 서로를 의식하지 않고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내길 기대한다. 다행스럽게도 토요일 일요일로 나뉘어 편성되어 있는 이 두 프로그램으로 인해 주말이 내내 즐겁지 않은가.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