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여자들>에 나타난 아줌마상

‘발칙한 여자들’이 꿈꾸는 세상은 끈적임 없는 상큼 발랄 경쾌한 세상이다. 우리네 드라마 세상에서 아줌마들이란 ‘불륜’과 ‘신파’를 오가며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 구질구질한 관계도 궁상맞은 눈물도 안녕이다. 과거 아줌마 이미지에서 기름기와 물기를 쪽 빼내자 이제 ‘여자’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간에 잘 보이지 않던 새로운 아줌마들의 등장이다. 이름하여 ‘발칙한 여자들’이다.

드라마 속에서 여성의 이미지는 시대에 따라 변신을 거듭했다. 1970년대에는 말 잘 듣고 시어머니에게 구박받는 며느리가 대부분이었다. 요즘 같은 시면 바보스러울 정도로 착한 며느리는 심지어 다른 남자와 바람났다고 모함 받기까지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평 한 마디 없을 정도다(1972년 드라마 ‘여로’에서). 이러한 경향은 1980년대까지 계속 이어졌다. 강인하고 착하게 보이긴 했지만 남성 권위주의 사회 속에서 책임과 의무에만 절어있는 그들에게서 ‘발칙한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자 여자들은 이제 신데렐라를 꿈꾸기 시작했다. 물론 아줌마들이 나오는 드라마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트렌디 드라마들이 등장하면서 보다 환타지를 자극하는 젊은 미혼의 여자들이 브라운관을 가득 메웠다. 상대적으로 아줌마들의 문제가 소외되고 있을 때, 등장한 MBC의 ‘아줌마’라는 드라마는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킬 정도로 기존 아줌마 상에 반기를 들고 나왔다. 권위주의적인 남편과 당당히 이혼하는 원미경의 모습에서 시청자들은 충격을 넘어서 박수를 쳐주었다. ‘발칙한 여자들’의 태동을 알리는 현상이었다.

‘발칙한 여자들’의 미주(유호정 분)는 지금까지의 드라마 속 여자들의 삶을 단번에 뛰어넘는다. 조강지처였던(1단계) 미주는 정석에게 버림받으면서 미국으로 건너가 갖은 고생을 다해가며 치과의사가 된다(2단계). 그리고 그녀는 귀국해 전 남편 정석에게 복수하기 위해 접근하고 그 과정에서 젊은 남자 루키는 그녀를 좋아하게 된다(3단계). 이 3단계의 변신을 보면 그녀가 저 조강지처의 70년대를 넘어서 전문직 종사자가 되고, 나중에는 아줌마지만 젊은 남자의 사랑을 받는 어엿한 여자가 되는 그 변신의 과정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드라마 속 여성상의 변화는 그 반대 역인 악역을 들여다보면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과거의 드라마들에서 주인공 여성들을 억압하고 핍박하는 자는 남성일까, 여성일까. 언뜻 가부장적인 사회가 그네들을 핍박했다는 생각에 남성을 떠올리겠지만 그건 사실과 다르다. 아이러니하게도 여성의 적은 여성이었다. 70년대 착한 며느리의 대척점에는 악한 시어머니가 있었고, 90년대 이후의 신데렐라를 꿈꾸는 여성의 대척점에는 일과 사랑 둘 다를 쟁취해야하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커리어 우먼들이 있었다. 이렇게 억압의 주체는 드라마 상에서 정면으로 주인공과 부딪치지 않고 오히려 여성을 내세워 대리전을 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직격탄을 날린 게 1999년 방영된 ‘아줌마’다. 그리고 ‘발칙한 여자들’의 대척점에 선 이들은 물어볼 것도 없이 상처를 준 남성이다. 이 드라마에 나오는 가정에서는 부부만 있을 뿐, 모실 부모들은 없으며, 직장에서는 각각 인정받는 전문직 종사자만 있을 뿐 라이벌 관계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이 발칙한 여자의 복수극이 유혈이 낭자하지도 않고, 눈물이 철철 넘치지도 않는 귀여운 장난 같다는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이전의 드라마 속 여자들처럼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다. 사실 처절하고 질척질척한 복수극의 이면에는 아직도 남은 미련과 집착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알고 경제적으로도 독립했고, 혼자서도 충분히 행복한 이 발칙한 여자는 복수조차도 즐길 줄 아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알게된 여자는 이제 다른 남자들에게 사랑 받을 자격이 갖춰진 셈이다. 이로써 ‘아줌마의 사랑 = 불륜’이라는 악의적인 등식은 깨지고 당당한 ‘중년여성의 사랑’이 등장하게 된다.

경제력이 있고, 자신감이 넘치며, 인생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이들의 사랑과 삶은 여유가 있다. 아마도 ‘발칙한 여자들’이 보여주는 여성상은 과거 결혼 전과 확연히 달라지는 결혼 후의 여성에서, 이제는 결혼 후에도 당당하게 직업을 갖고 살아가는 요즘의 여성들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희화화된 남성과 어떤 면에서는 지나치게 아줌마들의 환타지를 자극하는 면모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것 역시 어찌 보면 그간 불륜과 신파의 대상으로서 핍박받아온 아줌마상을 염두에 둘 때 고개가 끄덕여지는 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이제 막 태동하기 시작한 신 아줌마상, ‘발칙한 여자들’이 앞으로 드라마 속에서 꿈꿀 세상들이 궁금해진다.

적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최근 드라마 최대 이슈는 아무래도 사극열풍의 주역인 ‘주몽’과 ‘연개소문’이 될 것이다. 그 중 ‘주몽’의 인기는 실로 대단한 것이어서 저 월드컵 시즌에도 식지 않는 열기를 과시했고 월드컵이 끝나자 마의 시청률 40%를 넘겼다. 심지어 휴가철을 맞은 지금에도 여전히 35% 전후의 시청률을 유지하는 괴력을 보이고 있다.

월드컵도 휴가철도 누르지 못한 ‘주몽’의 독주로 인해 타 방송사의 월화드라마는 아예 시작도 하기 전에 전의를 상실하고 있다. ‘주몽’의 강력한 견제자로 등장했던 ‘연개소문’ 역시 역부족이었다. 간신히 20% 정도의 시청률을 유지하던 것이 휴가철을 맞아 17%대로 떨어지는 수난을 겪고 있다. 이렇게 되자 고개를 드는 것이 주몽의 매너리즘이다.

고산국 소금산 모험에서부터 불거진 이 매너리즘의 정체는, 한 단계씩 문제를 해결하며 자신을 성장시키던 주몽의 독특한 영웅상이 과거의 영웅상으로 퇴행하는 과정에서 비롯됐다. 해모수 밑에서 자신의 처지를 괴로워하면서 스스로를 갈고 닦던 주몽의 모습은 사라지고 이제 주어진 운명으로서의 주몽의 모습이 전면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운명이 주몽에게 드리워지자 그는 살아있는 이 시대의 영웅이 아닌 과거의 무기력한 운명적 영웅으로 변질되었다.

소금산 모험에서 주몽이 한 역할이라고는 어머니 유화부인이 했던 소금산에 대한 옛이야기를 떠올렸다는 것과 그 곳 주민을 만나보고 모험을 떠나기로 결정했던 것뿐이었다. 무모하기 이를 데 없는 산채로의 침입에서 그가 얻은 건 비적들에게 포획되는 것이었다. 그를 구해내는 건 소서노며, 소금산까지 가게 되는 것 역시 소서노의 역할이 컸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된 것은 소금산의 소금을 얻는 과정을 그저 과거 유화부인과의 고리에서 연유된 운명으로 그렸다는 점이다.

주몽이 운명적인 영웅이 되자, 그에 도전하는 다른 무리들(대소나 영포)은 빛이 바래기 시작했다. 운명 앞에서 도대체 그 어떤 도전이 가능하단 말인가. 유일하게 주몽에 도전할 수 있는 인물은 운명과 맞설 수 있는 인물, 신녀 여미을이다. 여미을은 과거 해모수의 운명을 꺾어놓은 전과가 있다.

그러자 드라마는 이제 여미을과 그녀가 말하는 ‘부러진 다물활’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간다. 부러진 다물활이 부여의 

앞길에 암운을 드러내는 하나의 신탁이자 주몽의 운명이라면, 그 사실은 금와왕을 비롯한 부여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어야 마땅했다. 금와왕이 주몽의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어야 했지만 맥이 빠진 것은 금와왕 역시 해모수와의 틀에 박힌 운명적 우정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여미을과 틀어져 있다는 것이다.

대소는 이미 흔들리고 있고, 영포는 계속 헛된 짓만 하고 있는 상황에서 주몽은 적 다운 적을 만나기가 어렵게 됐다. 그러자 드라마는 커다란 중심축을 이루는 갈등이 사라지고 소소한 인물들 간의 갈등으로 진행되면서 긴장감을 잃고 매너리즘의 늪으로 빠지게 된다.

‘주몽’이 40%라는 달콤한 시청률 속에서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사이, ‘연개소문’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초반 안시성 전투 촬영에 5개월이라는 시간을 보낸 연개소문이 얻은 것은 20여 %의 시청률과 전투 신으로 반복되는 장면들에 대한 비판, 들인 제작비만큼의 효과가 보이지 않는다는 비난여론이었다. ‘고구려사의 재조명’이라는 민족적 사명감을 갖고 진지한 접근을 시도한 결과로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었다.

시청자들 중에서는 제작비 400억 원, 투입 연기자 400명, 보조연기자 1만 5000명이라는 이 기록적인 투자가 도대체 보이지 않는다는 볼멘 소리까지 들려왔다. 연개소문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10%대로 떨어졌던 시청률은 을지문덕의 출연으로 20%를 회복했으나 이 역시 무더위라는 복병을 맞아 17%라는 최악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연개소문’이 처음부터 고전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마도 그중 ‘주몽’이라는 ‘퓨전사극이 가진 강한 중독성’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주몽’은 일찌감치 시청자들을 퓨전사극의 맛에 길들여지게 했다. 작가의 상상력이 자유롭게 발휘되는 만큼, ‘주몽속에는 현대를 살아가는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사랑과 성공’ 같은 욕망들이 포진되었다. ‘주몽’이라는 캐릭터를 영웅이 아닌 최대한 보통 사람과 비슷하게 시작한 것은 일단 친근하게 접근하고, 차차 감정이입이 되는 시기부터 시청자들의 주몽을 통한 대리충족을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렇게 ‘주몽’은 월드컵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이미 많은 시청자들을 그 중독성 강한 설정 속으로 끌어들였다. 시청자들은 마음 속에서 이 어리버리한 ‘주몽’을 영웅으로 ‘키우는’ 데 온통 마음을 빼앗겼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월드컵이라는 휴지기는 오히려 ‘주몽’을 키우는 결과를 낳았다. 보일 듯 보일 듯 안 보이는 그 안타까움과 기다림 속에서 ‘주몽’의 주가가 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 ‘연개소문’이 시작됐다. 물론 퓨전과 정통이 다르지만 같은 사극이며, 또한 소재 역시 같은 고구려사라는 점에서 ‘주몽’의 시청자들은 ‘연개소문’을 시청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깊숙이 ‘주몽’이라는 게임의 재미 속에 빠져있는 시청자들을 ‘연개소문’은 만족시키지 못했다. ‘주몽’의 아기자기한 설정과 전개에 익숙해진 시청자들은 이와는 다른 선 굵은 ‘연개소문’의 면모를 ‘디테일의 부족’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것은 ‘연개소문’이 결코 ‘주몽’과 비교해 떨어지는 작품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환경이라는 굵직한 작가가 사극을 통해 늘 보여주었던 것처럼 역사 속에서의 ‘활달하고 호쾌한 사내들의 한판승부’가 때론 전쟁과 전투의 형태로, 때론 정치의 형태로 장면 장면에 잘 녹아들어 있었다. 시청자들이 느끼는 ‘디테일의 부족’은 아마도 ‘주몽’에는 있으나 ‘연개소문’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 ‘멜로 라인’이라든가, ‘성공에 대한 단계’ 같은 것일 가망이 높다.

하지만 이건 애초부터 이야기의 방향이 틀린 것이다. 어느 정도 상상력이 들어있는 것은 둘 다 마찬가지지만 ‘연개소문’은 역사의 흐름을 축으로 흘러가는 드라마인 반면, ‘주몽’은 역사보다는 한 ‘영웅의 탄생’을 그 주요한 축으로 잡아가는 드라마인 것이다. 만일 ‘주몽’이라는 드라마가 없는 상태에서 ‘연개소문’이 방영되었으면 어땠을까. 불을 보듯 ‘연개소문’은 거칠 것 없는 저 시청률의 국경을 넘어 중원을 달리고 있을 것이다. ‘주몽’이 미리 만들어놓은 강한 퓨전 사극의 중독성은 결과적으로 역사 중심으로 풀어 가는 ‘연개소문’을 힘겹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이 모든 것이 ‘주몽 탓’이라고 하기에는 ‘연개소문’에도 나름의 허점이 많다. 지금 현재 ‘주몽’이 걷고 있는 매너리즘의 길을 꿰뚫고 들어갈 만한 새로운 구석이 별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스펙터클과 민족주의에 대한 소구는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힘이 약화되기 마련이다. 기왕에 민족주의적 영웅을 그려내는 드라마라면 역경과 고난이 있어야 하며, 눈에 보이는 강력한 적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연개소문’에는 아직까지 그럴 듯한 적이 보이지 않는다. 수문제는 황후에게 쥐여 사는 노망난 노인처럼 그려지며, 전투에 나가면 연전연패하는 양량은 자기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그려진다. 수양제는 좀더 교활한 면모를 가졌지만 아직까지 고구려의 적으로 등장하지는 못하고 있다. 1,2회에서 보였던 당태종과 같은 카리스마를 보이는 이는 아직 없다. ‘주몽’에서 주몽과 대적할 적이 없는 것처럼, ‘연개소문’ 또한 마찬가지다. 고구려는 연전연승이고 수당은 연전연패, 이제 드라마 속에서 전쟁의 승패는 운명적이 된다.

여기에 더 복잡한 것은 ‘연개소문’의 고전과 ‘주몽’의 매너리즘이 각자의 문제에서 머물지 않고 서로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주몽’과의 차별화 전략으로서 ‘연개소문’은 계속해서 전쟁장면을 통한 민족주의적 영웅을 부각하고 있으나 이것은 도리어 ‘연개소문’의 부진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반대로 매너리즘에 빠진 ‘주몽’을 살리는데 일조하기도 한다. 본래 중독성이라 하면 새로운 자극이 계속 해서 등장해야 그 기조를 유지하며 나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주몽’에 있어 새로운 자극을 한 회도 쉬지 않고 연달아 제시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럴 때마다 ‘연개소문’이라는 정통사극을 통해 다시금 ‘주몽’의 중독적 가치를 재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심하게 빠졌지만 익숙해진 연애에서 상대방의 가치를 잊고 있다가, 다른 사람을 만나 그 가치를 다시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연개소문’이 주말에 포진하고 바로 이어 ‘주몽’이 월화에 포진한 이 기막힌 상황은 ‘주몽’에 대한 기대감을 더 키워놓는 절묘한 장치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연개소문’이든 ‘주몽’이든 각자 따로 떼어놓고 보면 기대 이상의 작품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현재 이 두 드라마가 서로에게 주는 묘한 영향력 속에서, 양자가 동반추락의 길을 걷지 않으려면 드라마라는 장르의 본질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드라마는 갈등이며, 갈등에는 반드시 주인공과 상응할만한 강력한 적을 필요로 한다. 시청자들이 보고 싶은 것은 갈등을 스스로의 힘으로 헤쳐나가는 영웅이지, 이미 운명으로 정해진 영웅이 아니다.

주몽의 인물론

영웅이라는 말은 시대와 나라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르다. 영웅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 신에 도전하는 인물로서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삼국지나 각종 전쟁에서 보여지듯 전쟁지도자나 정복자의 의미를 갖기도 했다. 또한 영웅이 포괄하는 범위는 넓어서 때로는 순교자, 과학자 혹은 예술가가 영웅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시대와 나라에 따라 다양한 의미가 존재하는 것은 당대에 살아가는 소시민들이 영웅이라는 ‘현실을 뛰어넘는 이상적 존재’에 투영하는 의미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이제 영웅이라는 말은 월드컵에 나간 축구선수일 수도 있고, 기술적 발견을 해낸 과학자가 되기도 한다. 그것은 심지어 연예인이 되기도 하며, 작게는 가족을 지키는 부모가 되기도 한다. 그만큼 영웅은 이제 저 멀리에서부터 우리 옆으로 찾아온 것이다.

‘주몽’이라는 드라마에 등장하는 주몽이라는 영웅은(본래 역사적 인물로서의 주몽과 드라마 속 주몽은 다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이 시대의 영웅이라 할만하다. 역사적 사료에 보다 충실한 정통사극이 아닌 퓨전사극을 표방한 ‘주몽’은 보다 더 폭넓게 현대인들의 욕망을 사극이라는 그릇 속에 담아 넣었다. 그러자 주몽이라는 역사적 인물은 역사와 민족이라는 무거운 갑옷을 벗어버리고 현대인들의 욕망을 대변하는 영웅으로서 재탄생되었다. 민족주의 영웅이 될 것 같았던 ‘주몽’은 현대인들의 욕망을 대변하는 인물이 되었다.

드라마는 완성된 영웅에서 시작하지 않고, 소시민이었으나 차츰 영웅이 되어가는 과정에 천착한다. 이것은 현대인들의 영웅관과 상당부분 맞닿아 있다. 과거의 영웅이라면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했지만, 지금은 보다 인간적이고 친근한 영웅을 희구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영웅이 손에 잡히지 않는 존경의 수직적인 대상이었다면, 현대의 영웅은 손에 잡힐 것 같은 그래서 때로는 질투가 나기도 하는 수평적인 대상이다. 드라마는 절묘하게 초기 해모수라는 과거 형태의 전형적 영웅을 등장시켜 안심시킨 다음, 주몽이라는 현대적 영웅을 그 테두리 안에 넣고 조금씩 키워나간다.

카리스마를 걷어내자 주몽은 이제 대화와 타협을 하는 이 시대의 인간경영자가 된다.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고 주변을 살피면서 조금씩 주변인물들을 끌어들여 일을 성사시킨다. 주몽의 이런 주도면밀함은 때론 그를 조금 소극적인 인물로 보게 만든다. 차라리 그의 어머니 유화부인이나 그를 돕는 소서노라는 여자 영웅들은 오히려 더 주체적이다. 그럼에도 주몽이 이들을 장악하는 이유는 우위에 있는 인간경영 능력 때문이다.

주몽은 이러한 능력을 가지고 역사적 영웅이 빠질 수 있는 민족주의적 환타지라는 함정을 피해나간다. 나라를 구원하는 영웅은 보기에 속시원할 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이루어낸 것 같은 환타지만 제공할 뿐이다. 드라마의 고구려 열풍이니, 영화 ‘한반도’니 하는 민족주의의 바람이 거센 요즘, 조금은 인간적인 영웅, 주몽이 주목받는 이유는 그가 오히려 그 민족주의의 환타지를 깨는 영웅이기 때문이다. <GQ>

유오성의 복합연기

유오성의 연기를 보면 참 복합적(?)이란 생각이 든다. 연기라는 것이 행복하면 웃고, 슬프면 울고, 화가 나면 화를 내면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유오성은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수많은 감정과 심리에 따라 표정과 손짓, 행동이 어찌 다 똑같을 수 있을까. 유오성의 섬세하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복합감정의 표현은 자칫 단순할 수 있는 드라마에 미묘한 힘을 실어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투명인간 최장수’는 유오성이 가진 이런 힘이 백분 발휘되고 있는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편의적인 것이지만 ‘투명인간 최장수’를 장르적으로 구분해보면 어떨까. 드라마 첫 회의 장면들은 이 드라마가 마치 조폭이 등장하는 형사액션물이라는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쇠파이프와 야구방망이를 든 일단의 조폭들과 대결을 벌이는 최장수의 모습은 과거 곽경택 감독의 영화, ‘친구’를 연상케 했다. 그런데 그 액션에는 무언가 다른 점이 있었다. 심각하다기 보다는 우스꽝스런 코믹이 있었다는 것이다. 늘 얻어터지고 깨지면서도 일상으로 돌아와서는 바가지를 긁히는 최장수의 모습에 시청자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좀더 드라마가 진행되자 장애를 겪고 있는 아이와 아버지로서의 사랑이 등장하며 휴먼드라마를 포함시키더니, 아내 오소영의 옛 남자친구 하준호가 등장하면서 멜로드라마로 연장된다. 물론 이 드라마의 기조는 휴먼드라마가 맞을 것이다. 하지만 이 속에는 액션과 코믹, 멜로가 복합적으로 녹아있는 게 사실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건 아무래도 유오성이 가진 연기의 힘이 아닐까.

오소영을 앞에 둔 최장수의 얼굴은 웃고 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앞에 두고 있기에 웃는 것이다. 그런데 오소영 옆에는 하준호가 있다. 그리고 오소영은 선언한다. “난 지금껏 단 한번도 당신과 행복했던 적이 없었다”고. 그러자 최장수의 얼굴은 순간적으로 찡그려지면서 폭발한다. 그는 애꿎은 하준호의 차를 부순다. 그리고는 다시 애원하는 얼굴로 바뀐다. “나 정신차리게 해주려고 그러는 거지? 거짓말이지?” 그렇게 다시 달래듯 대사를 건넨 유오성의 웃는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단 몇 분도 되지 않는 이 장면 속에서 유오성이 한 연기는 행복과 슬픔, 분노, 회유 같은 단 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심리의 표현이었다.

최장수가 여관방 욕조에 장미꽃잎을 뿌리는 장면은 섬뜩한 슬픔을 안겨주었다. 바보 같은 얼굴로 손에 피가 나는 지도 모르고 꽃잎을 따서 뿌리는 장면은 알츠하이머라는 막연한 병에 대한 실감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 장면에서도 유오성은 멍한 표정으로 바보처럼 웃다가 깨어나서는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슬픔에 빠지는 연기를 선보였다.

이것은 최장수가 오소영에게 위자료라며 돈을 건네주는 장면에서도 등장한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식사를 하자”는 최장수에게 오소영이 “약속이 있어서 가봐야 한다”고 하자, 실망스럽지만 그걸 숨기는 얼굴의 최장수가 봉투를 건넨다. 오소영은 “받지 않겠다”하고 최장수는 “단지 내가 미안해서”라고 말하며 봉투를 건네준다. 헤어지는 장면에서 횡단보도 건너편 오소영에게 최장수가 소리치는 장면은 아마도 다른 연기자가 했다면 실소가 나왔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찌 보면 간지러운 대사, “정말 나랑 결혼하면서부터 행복한 적이 없었어?”라는 그 외침 속에 그간 최장수가 속으로 웅크려 놓았던 수많은 감정들이 녹아들어 있었다. 고개를 가로젓는 오소영의 그 부정을 보기 위해 뛰고 또 뛰어야 하는 최장수의 모습에서 아마도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눈물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웃으면서 울거나, 울면서 웃거나 하는 연기가 시청자들에게 공감을 일으키는 것은 그것이 실제 인간관계에서의 진정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드러내놓고 그렇게 감정을 표현하지는 않겠지만 어떤 일을 겪었을 때 우리가 마음 속에 갖는 건 이러한 복합적인 것이지 단순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연기는 몸과 동작으로 그 감정들을 표현해내야 하는 것이기에, 실제로 웃으면서 울어야하는 것이다. 물론 그 장면을 통해 시청자들은 자신이 경험했던 유사한 상황에 공감하게 된다.

상황과 감정을 단선적으로 이끌어 가는 트렌디 드라마들은 이제 점점 설득력을 잃고 있다. 대신 사랑하면서도 미워하고, 분노하면서도 굴종하고, 군림하면서도 고뇌하는 복합적인 감정으로 진정성에 호소하는 드라마들은 설득력을 얻고 있다. ‘돌아와요 순애씨’에서 섹시하면서도 푼수 같고, 털털해 보이면서도 섬세한 연기를 펼치고 있는 박진희에 대한 극찬 역시 그 리얼함 이면에 ‘그 상황이라면 충분히 그랬을만한’ 진정성에 있었던 건 아닐까. ‘투명인간 최장수’라는 제목에서 풍기듯이 유오성이 가진 힘은 비극을 희극으로도 끌어안는, 그럼으로 해서 비극을 더 강력한 비극으로 만드는 데 있을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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