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출동 SOS24>가 경계해야 할 TV의 만용

폭력은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법은 너무 멀다. 그래서 이제 방송사가 나선다. 카메라는 이제 폭력이 은밀히 자행되고 있는 사생활 속으로 몰래 들어간다. 그 장면들은 충격적이다. 가족관계에서의 상식의 선은 넘어선 지 오래고, 그것은 상식을 넘었기에 비정상으로 다뤄진다. 21세기에도 불구하고 노예 할아버지, 노예청년, 노예 며느리... 왜 그리도 ‘노예들’은 많은지. 정신적인 문제를 가진 이들을 위해 ‘긴급출동 SOS24’는 이른바 솔루션 위원회를 결성해 각종 해결책을 제시해준다. 그런데 여기서 한번 짚어보아야 할 것이 있다. 과연 TV가 이렇듯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TV는 이 시대에 남은 마지막 정의의 기사인 것 같다. 심지어 이런 개개인의 문제들까지 일일이 방송이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는 점에서는 감동마저 온다. 프로그램을 보면서 수도 없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방송마저 없었다면 저들의 삶을 누가 알고 도와줄 수 있었을까.’ ‘저 모래알처럼 구분하기 힘든 그래서 더더욱 보이지 않는 음지의 삶을 비추는 카메라는 이 시대 TV가 해야할 진정한 일이 아닐까.’ 실제로 이 프로그램에서 그런 순기능이 있는 건 사실이다. 시청자들은 바로 그 순기능에 보기에도 괴로운 장면들을 참아내고 그 문제의 해결을 보면서, 안도하게 된다. 저런 프로그램이 있어 여전히 세상은 살만하다고.

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프로그램에 왜 논란이 일고 있을까. ‘아들의 벽’ 편에서 패륜아로 그려진 김재현(33·가명)씨는 왜 게시판에 SBS가 편파방송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는가. 혹 이 사건은 이 프로그램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주고 있는 건 아닐까.
사회적 문제를 잡아내는 프로그램은 ‘긴급출동 SOS24’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장수 프로그램으로 ‘추적60분’, ‘그것이 알고싶다’, ‘PD 수첩’ 등 역시 사회문제에 메스를 댄다. 그들 프로그램들 역시 간간이 잘못된 취재로 인해 곤욕을 겪기도 했다. 그런데 유독 ‘긴급출동 SOS24’에 그 화살이 집중되는 이유는 뭘까. 그건 아무래도 이 프로그램이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치부되어 온 사생활에 카메라를 들이댔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긴급 출동 SOS24’의 문제 접근 방식은 타 프로그램과 비교했을 때 더 직접적이다. 타 프로그램들은 개인의 문제보다는 거기서 도출되는 사회적 의미 또는 문제를 다룬다. 따라서 사회적 문제를 상정하고 다양한 사람들의 문제들을 취재해 문제의 양면을 때로는 긍정적으로 때로는 부정적으로 보여준다. 똑같은 충격적인 장면이 있다 해도 어느 정도 균형점을 찾으려 하는 노력(실제로 그것이 성공하는 지는 별개의 문제다)이 보인다. 하지만 ‘긴급 출동 SOS24’는 바로 개인의 문제로 접근한다. 그것을 통해 사회적 문제를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쪽을 선택한다. 그러다 보니 방안에 CCTV가 설치되고 마치 몰래카메라 같은 선정적인 폭력의 장면들이 고스란히 방영된다. 카메라는 놀라울 정도로 어느 한 방향성을 갖고 접근한다. 거기 등장하는 문제는 악으로서 그려진다. 그것은 절대악이기에 균형 운운하는 잣대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그런데 TV의 이런 방향성 있는(?) 방송에는 반드시 선의의 피해자가 생기게 마련이다. 특히 이 프로그램은 개인의 사생활을 파고든다는 점에서 만일의 사태가 가져올 파장은 더욱 커진다. 그 위험성은 방송이 가진 편집과 구성에 있다. 방송은 똑같은 내용을 다루더라도 편집과 구성에 따라 그 논지가 180도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상황을 호도할 수 있는 위험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방영된 내용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방송은 균형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또한 TV라는 매체가 가진 일 방향성으로 인해 한 개인에게는 또 다른 폭력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죽어야만 죄를 씻을 수 있는 사형수라고 하더라도 변호의 권리는 주어진다. 하지만 지금껏 이 프로그램이 다룬 수많은 가해자들은 아무런 말이 없다. 그들은 대부분 어떤 주장을 펼만한 능력이 없는 알코올중독자, 정신질환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희생자라고 주장하는 김재현(33·가명)씨는 달랐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는 들어보지도 않은 채 일방적으로 방송이 보여주고 싶은 대로 자신을 패륜아로 몰고 갔다고 주장한다. 김재현(33·가명)씨의 편파방송 주장은 그 진위여부를 떠나 이 프로그램이 침묵하는 가해자들에게 가해하는 폭력의 힘을 은연중에 보여주고 있다. 해결책으로 제시된 방송에 노출되는 그 순간부터 사생활은 파괴되는 것이다. 그간 잘못한 게 있으니 당연히 이 정도 폭력은 정당화되는 것 아니냐는 투의 방송편집은 폭력을 근절하겠다는 애초의 기획의도와도 상반되는 것이다.

방송이 해야될 역할은 문제제기가 되어야지 섣부른 결정과 해결책 제시가 돼서는 안 된다. 방송은 양면의 칼날과 같아서,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줄 때, 다른 한쪽의 그림자가 생기게 마련이다. 또한 방송은 수많은 개인들의 문제를 일일이 해결해줄 수 없다. 그 중 뽑혀진 몇몇 개인들만 수혜를 입을 뿐이다(그게 진정한 수혜인지는 모르는 일이며 받고 싶지 않은 것을 받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폭력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개인의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이 프로그램의 거창한 기획의도가 말하는 것처럼 실질적인 문제해결을 해주지는 않는다. 아들이 아버지를 폭행하고, 장애인을 노예처럼 부리고, 동생을 오빠가 앵벌이시키는 이러한 현상은 정상적인 사회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해놓으면 얻어질 수 있는 건, 마치 문제가 해결된 것 같은 착각뿐이다. 방송은 개인이 아닌 사회적인 시각으로 문제제기를 하고 그 해결은 정부가 떠 안는 것이 진정한 해결책이 되지 않을까.

<투명인간 최장수> vs <돌아와요 순애씨>

수목 드라마가 아줌마, 아저씨들의 장이 됐다. 기혼자들의 시각을 제대로 담아낸 드라마 두 편이 호평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투명인간 최장수’와 ‘돌아와요 순애씨’다.

‘투명인간 최장수’는 이 시대에 가족에게 있어 ‘투명인간’이 되어버린 가장의 이야기다. 드라마는 시작부터 조폭들과의 일전을 보여준다. 각목이 난무하고 피가 튀는 그 현장에 최장수는 깨지면서도 유쾌한 웃음을 짓는다. 상황은 극적이고 과장된 면이 있지만 이 장면은 우리네 가장들에게는 익숙하다. 가정을 지키기 위한 아버지들의 사회생활은 최장수가 벌이는 사투와 다르지 않다. 그것이 아무리 전쟁 같을 지라도 그것을 가족에게 일일이 늘어놓지 못하는 처지 역시 최장수가 우리 시대의 가장들과 같은 점이다. 그래봤자 이해는커녕, 괜한 불안감만 더 만들 테니까.

가정을 위해 노력하다가 그렇게 된 것이지만 최장수가 가족에게 소홀했던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아내는 온갖 부업을 전전하면서 쥐꼬리만한 월급으로는 도저히 꿈꿀 수 없는 전원주택까지 마련한다. 아이 역시 아내의 몫인데다, 그 아이 중 하나는 성장장애를 겪고 있다. 이것이 최장수의 가족을 위한 알리바이가 도저히 인정 안 되는 사유이자 오소영의 이혼요구가 정당한 이유이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한 남자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이 옳았냐 틀렸냐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그 남자가 그래서 이혼을 당하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드라마는 오히려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다룬다. 당신은 당신 가족들에게 기억될만한 아버지로 남아 있느냐는 것이다. 돈 벌어오는 아버지가 아닌, 추억으로 남을 그런 일들을 공유한 아버지냐는 것이다. 최장수가 겪을 알츠하이머라는 병은, 인생을 길게만 이어질, 그래서 추억은 나중에 돈 벌은 다음에 해도 될 어떤 것으로 치부해왔던 이 시대의 가장들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앞으로가 아닌 지금 당장, 현재가 중요하다고 드라마는 말한다.

최장수는 모든 걸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가족을 위해 무언가를 준비하지만 그게 영 서툴다. 반면, 오소영의 옛 남자친구인 하준호는 그런 일에 능수능란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절망적 상황에 있지만 최장수는 활달하고 쾌활하며, 늘 웃는 모습이다. 어찌 보면 바보 같다. 그래서 더 슬프다. 무언가를 가족을 위해 열심히 하지만 그게 항상 서툴고 그러면서도 바보처럼 웃기만 하는 우리네 아버지들을 닮았다. 웃으면서 우는 연기가 물에 오른 유오성은 그런 아버지의 초상을 제대로 그려낸다. 이것이 사나이 울리는 최장수가 주목받는 이유다.

반면 한편에서는 아줌마 웃기는 ‘돌아와요 순애씨’가 상종가다. 40대 아줌마와 20대 처녀의 영혼이 바뀐다는 이 황당한 설정의 드라마는 그러나 그 전하려는 메시지에 있어서 아줌마들의 감성을 매료시킨다.

10여 년이 넘게 가정을 지키며 남편 뒷바라지를 해온 아줌마들은 어느 날 매력이 사라진 자신과 그런 자신을 등한시하며 다른 여자를 찾는 남편을 발견한다. 남편과 가족을 위해 온갖 일들을 해왔지만 정작 남편은 다른 여자를 찾는 이 아이러니 속에서 아줌마들은 분노한다. 아끼려고 쓰는 싸구려 화장품에, 뒷바라지하느라 정작 자신은 챙기지 못해 늘어만 가는 살과 주름에, 이제 후회해봐야 이미 늦어버린 아줌마들은 뒤늦게 자신의 삶을 한탄한다. 그런데 만일 상황이 역전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40대의 몸이 20대로 변하고, 부엌데기가 젊은 재벌이 쫓아다니는 미모의 여인이 된다면.

설정이 아무리 황당해도 그것은 모름지기 대부분 아줌마들의 환타지 속에 있던 것이기에 드라마는 설득력을 얻는다. 이 드라마가 장르적으로 코미디를 지향한 것은 그 웃음 속에 환타지를 녹이고, 그 웃음 끝에 진한 페이소스를 달 수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여자들의 연대(허순애와 한초은이 서로를 미워하면서도 남자들은 똑같다는 식의 어떤 공감을 갖는 것)에서부터, 생활력에서부터 만들어진 아줌마 속성에 대한 웃지 못할 풍자, 젊은 여자에 대해 갖는 남자들의 속물근성 등등 남녀 관계에 대한 다양한 시각들을 다룬다. 그 많은 시각들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40대 아줌마에서 20대 처녀로 탈바꿈한 순애씨(모습은 한초은이지만)이다. 그녀의 거침없는 비판과, 욕망의 분출은 TV 앞에 앉은 수많은 우리 시대의 아줌마들에게 커다란 카타르시스를 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 드라마에서 유독 한초은 역을 소화해내는 박진희가 주목받는 이유는 지금 드라마의 초점이 변신한 순애씨(한초은)에게 있기 때문이다. 대책 없이 씩씩한 그녀는 남편이 바람 핀 여자의 속으로 들어와 남편의 마음을 속속들이 다 알게 되었다. 평상시 같으면 웬만한 것에 눈 하나 까닥하지 않을 아줌마는 눈물을 흘리고 한숨을 쉰다. 그런데 그 눈물과 한숨이 웃음을 만든다. 박진희는 아줌마들의 때로는 뻔뻔하고, 때로는 감상적이며, 때로는 현실적인 속성을 실감나게 연기한다. 20대 몸에 40대의 행동이 주는 웃음은 그러나 그 뒤끝이 찡하다. 우리네 아줌마들의 가족을 위해 상실한 혹은 상실되고 있는 자존감을 고스란히 보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수목 드라마에서 맞닥뜨린 ‘사나이 울리는 최장수’와 ‘아줌마 웃기는 순애씨’는 이 시대의 아저씨 아줌마들에 대한 헌사다. 한쪽에서는 울고 한쪽에서는 웃지만 그 하려는 얘기는 똑같다. ‘가족과 현실’에 대한 우리시대 부모들의 자화상인 것이다. 그래서 한참 울고, 한참 웃다가 문득 서로를 보게 되면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측면이 있다. 그것은 바로 현실의 각박함이다.

<서울 1945>와 이데올로기

‘서울 1945’는 현재 이데올로기와 전쟁 중이다.
가까운 근대사를 드라마화 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많은 논쟁거리를 낳는다. 예를 들어 박정희 전 대통령과 삼성, 현대가를 다룬 ‘영웅시대’의 조기종영이 그랬다. 이것은 그 때의 역사가 지금 현재까지 바로 영향을 끼치는 근거리에 있어 외압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웅시대’의 극본을 쓴 이환경씨가 다시는 근대사를 드라마로 쓰지 않겠다고 한 것은 바로 그런 어려움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서울 1945’의 경우에도 상황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일제시대의 이야기에서는 잠잠하던 것이 해방 후부터는 시끄러워졌다. 이른바 친일파에 대한 문제와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 등이 불거져 나온 것이다. 이 논쟁에서 우리는 다시 해묵은 ‘좌익과 우익’이라는 괴물을 만나게 된다. ‘좌파적 시각’의 드라마라는 보수언론들의 논평은 다분히 정치적인 색채를 드러낸다.

여기에 지방선거의 완승, 북한의 미사일 발사, 일본의 군사대국화 등등 최근의 국제정세는 우익적인 민족주의를 자극하고 있다. 대중문화에도 그 바람은 불어닥쳤다. ‘주몽’과 ‘연개소문’에 이어 가을께에 방영될 ‘대조영’, ‘태왕사신기’까지 고구려사를 중심으로 한 드라마가 준비되고 있고, 강우석 감독의 영화, ‘한반도’는 노골적인 반일감정과 민족주의적 시각을 담아내고 있다. 이러한 민족주의 바람에 힘입어서일까. ‘서울 1945’에 대한 좌우논란은 시대착오적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는 듯 하다.

“이 드라마는 이념드라마가 아니다”라고 수 차례 입장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드라마를 한쪽 이념의 호도로 몰아가는 것은 ‘드라마가 가진 이념적 색채의 위험성’ 때문이라기보다는, 다시 구태의연한 좌우논쟁으로 회귀함으로써 얻어지는 특정 집단이나 정파의 이득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최근 ‘서울 1945’를 보면 그것은 명확해진다. 드라마의 논조는 좌익도 우익도 아닌 ‘인간’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최근 이 드라마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은 ‘이게 그 잘난 혁명이었나요. 정녕 이런 것이었다면 나는 반대합니다’라는 투의 대사들이다. 이념의 갈등으로 인해 바로 옆에 있던 이웃을 죽음으로 몰아넣어야 하고, 이제 10살도 되지 않은 아이가 노역을 져야 하는 비인간적 처사에 대한 비판이다. 물론 여기서 죽음으로 몰아넣어지는 인물들은 과거 행적에서 친일파였거나 그만한 죄를 지었던 사람들임에는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처사는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드라마에서 김해경의 어머니로 나오는 고두심은 바로 그런 역할을 해준다. 동우의 아버지 이인평이 인민재판에 서는 장면에서 고두심은 ‘사람 사는 세상’을 외치며 부처 앞에 기도를 한다. 아무리 잘못을 했지만 이인평이 서는 인민재판에 나가는 것을 사람들은 꺼린다. 그것이 휴머니즘에 반하는 행동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김해경 역시 자신이 사랑했던 최운혁에게 ‘이런 혁명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앙상한 이념이 만들어낸 갈등에 대한 휴머니즘적 비판이다.

이러한 대사와 시각을 가진 인물이 고두심이나 김해경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것은 가장 적절해 보인다. 이성적 선택을 강요하는 환경 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사랑이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어머니의 사랑이고, 다음은 연인에 대한 사랑이다. 같은 자식이라도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지만 그것이 서로를 죽일 수는 없는 것이라는 사고가 고두심이라는 상징적 어머니의 비판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다. 김해경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두 사람을 모두 이해하고 보듬어 안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념이 아닌 사랑이라는 시각으로 상황을 보기 때문이다. 반면 드라마에서 점점 악역으로 변하고 있는 최운혁의 친구, 오철형이나 김해경의 동생 김연경은 이념에 점점 눈이 멀어 가는 사람들이다. 드라마는 ‘이념 VS 사랑’의 대결구도를 보인다.

‘서울 1945’가 드라마 상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은 특정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 그 자체이다. 그런데 이 이데올로기는 사실 구시대적 유물이다. 1990년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는 탈냉전, 탈이념 시대의 도래를 말해준다. 따라서 이러한 이념 논쟁은 진부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 1945’가 이제는 구시대의 산물인 이데올로기 자체(좌든 우든)와 전쟁을 벌이는 것은, 거꾸로 지금의 사회가 아직도 이 구태의연한 논쟁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비판으로 보인다.

지금 현재 우리 사회는 여전히 보혁 갈등과 좌우 갈등이 남아있다. 같은 집안에서도 어르신들의 입장이 틀리고 자식들의 입장이 틀리다. 어르신들은 좌파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이를 갈 정도이고, 자식들은 그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서울 1945’가 이 시대적 아픔에 대해 내놓는 대안은 이념이 달라도 서로를 끌어안을 수 있는 그 어르신과 자식간에 남은 사랑이다. 약간 단선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은 현재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도무지 해결될 것 같지 않은 갈등의 골이 그만큼 깊다는 반증이다.

<주몽>과 탈역사

월드컵의 집중포화 속에서도 유일하게 살아남은 드라마가 있었다. 바로 ‘주몽’이다. 월드컵으로 인해 결방되는 ‘주몽’을 틀어달라는 시청자들의 요청은 그 인기를 실감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월드컵이 끝난 현재, 주몽의 시청률은 마의 고지, 40%를 넘는다.

‘주몽’과 함께 뜬 단어는 바로 ‘퓨전 사극’이다. 역사적인 사실에 바탕을 두지만 극중의 대부분 인물과 설정은 작가의 상상에 의거한다는 점에서 ‘주몽’은 시작과 함께 역사왜곡의 논란에 휘말려야 했다. ‘주몽’의 인기와 더불어 불거져 나온 역사왜곡이라는 논란은 마치 드라마 ‘주몽’이 민족주의를 표방한 작품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런데 드라마 초반부에 ‘주몽’에 댔던 역사적인 잣대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드라마가 시작되기 이전, 홍보 마케팅의 일환으로서 주몽은 그 역사성이 강조되었다. 아직 드라마화 되지 않았으니 우리의 뇌리 속에 있는 주몽을 환기시키는 방법은 그것뿐이기도 했다. 따라서 역사적인 영웅으로서 재생산된 ‘주몽’이 역사왜곡의 소용돌이를 빗겨가긴 힘들었을 것이다. 뚜껑을 열고 보니 역시 그랬다. 아무리 퓨전이고 해석된 사극이라 해도, 역사적 해석에 있어서 무리한 설정들이 눈에 띄었다. 사료가 없고 남은 사료도 사대주의적 사관에 의해 쓰여진 것이거나 중국의 입장에서 쓰여진, ‘고대사’라는 점은 문제를 더 미묘하게 만들었다.

절대적인 호응이 있었지만 동시에 비판과 우려가 잇따랐다. 그 우려는 ‘주몽’이라는 민족적 영웅에 ‘퓨전’이라는 날개까지 달았으니 우리의 민족적 자부심인 주몽은 이제 저 무협지와 환타지 속에 등장하는 무소불위의 능력을 가진 영웅이 될 거라는 데 있었다. 역사는 드라마라는 장치로 인해 보호되고, 역사왜곡은 그것을 통한 민족적 영웅 만들기라는 장치로 막아질 것이었다. 그런 드라마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마력은 있으나 그다지 건강하지 못한 퇴행적 결과를 예고한다. 그런데 과연 이런 우려가 맞았을까.

우려와는 반대로 드라마가 중반으로 치달으면서 그런 우려는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몽은 타고난 영웅이라기보다는 보통사람에서 차츰차츰 커나가는 영웅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민족적이고 역사적인 영웅주의는 잘 드러나지 않았다. 역사왜곡 논란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것은 ‘주몽’의 재미가 애초부터 역사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퓨전 사극’이 갖는 환타지의 힘에 있었기 때문이다. 최초의 우려는 사실 ‘주몽’이라는 드라마의 제목에서 비롯된 것이지 그 자체는 아니었다. ‘주몽’은 갑갑한 현실 속에서 마치 무협지나 환타지 소설을 읽는 듯한 모험과 사랑 이야기로 일관했다. 드라마 ‘주몽’은 아이러니하게도 주몽이라는 역사적 영웅에 빠져들지 않았다.

드라마 속에서 주몽은 민족적인 영웅이라기보다는 역경을 딛고 왕이 되는 전형적인 모험담 속의 영웅이다. 그것은 역사극이라기보다는 무협지나 환타지에 보다 가깝다. 이것은 그의 적을 보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드라마는 주몽에게 한나라를 적으로 상정하고 그들을 물리치는 대업을 이루라고 공공연히 말하지만 그 한나라라는 적은 추상적이다. 가끔 현토군 태수 양정이 나타나 한나라 황제의 말을 전할뿐이다. 물론 그것은 드라마의 흐름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여전히 주몽이 실제로 처한 적은 한나라가 아닌 부여에 있다. 대소나 영포, 여미울이나 부득불, 도치 같은 인물들이 주몽의 적인 것이다. 주몽이 왕이 되는 것을 막으려는 이들과 주몽을 도와 왕위에 오르게 하려는 인물들간의 대결구도가 현재까지 이 드라마의 실제적인 재미이자 시청률 40%의 이유이다.

이러한 대결구도에서 주몽이 하는 역할은 과거 ‘대장금’이나 ‘상도’의 임상옥을 닮았다. 자신의 적과 경쟁하기보다는 자신 스스로의 힘을 키워가는 것이다. 자신의 역량 키우기 이외의 쓸데없는 일에 힘을 낭비하지 않은 대장금 혹은 임상옥처럼, 주몽도 당장 눈앞에 필요한 소금에 연연하지 않고 궁극적인 해결책을 얻기 위해 고산국으로 떠난다. 사실 주몽은 그들과 직접 대결하지 않는다. 대신 문제를 만드는 것은 대소 같은 적들이며 그들은 얼핏 당장의 우세에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해결이 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결국 실력 우위인 주몽에게 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적이 만들어 놓은 역경과 그 역경이 오히려 주인공에게는 기회가 되는 상황은 이미 ‘대장금’과 ‘상도’에서 익히 보았던 상황들이다.

최근 ‘주몽’의 기록적인 시청률은 이제 이 드라마가 굳이 그 이름이 ‘주몽’이 아니라고 해도 충분히 재미있어지는 지점까지 왔다는 걸 보여준다. 주몽은 이렇게 역사라는 두꺼운 옷을 벗음으로 해서 자유로워졌다. 사극, 그것도 고대사를 다룬 드라마지만 그 드라마 속에는 현재가 고스란히 녹아난다. 한나라에서 부여를 옥죄는 ‘소금’이라는 무기는 작금의 국제정세 속에서의 ‘석유’로도 읽히고, 현토군 태수의 징병 제안에 대한 금와왕의 거부,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경제제재는 이라크전 징병 문제를 떠올리게도 만든다. 심지어는 TV 사극에서 좀체 보이지 않던 동성애 코드까지 읽힌다.

현재의 문제를 가상의 시대와 공간(여기는 고대사라고 하지만 퓨전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주몽의 세계는 우리에게 미지의 세계인 것은 분명하다)에 집어넣어 자유롭게 엮고 푸는 재미는 아마도 퓨전 사극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일 것이다. 그것은 주몽이라는 민족적 영웅의 중압감에서 벗어나야만 가능한 일이며 실제로 이 드라마는 그 길을 걷고 있다. 역사왜곡 문제에 있어서도 ‘퓨전 사극’이 ‘정통 사극’에 비해 더 논란이 될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작가의 상상력이 더 많이 더해짐으로 인해서 ‘퓨전 사극’은 오히려 역사라는 틀 밖으로의 탈출이 용이하다. 드라마를 보면서 모두들 ‘이건 주몽이라는 소재를 다루지만 그래도 드라마일 뿐이야’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정통 사극’이라는 꼬리표는 그 역사적인 근거에 보다 치중해야된다는 점에서 ‘퓨전 사극’보다 불리하다. 드라마 작가가 역사가는 아니며 드라마가 또한 역사 그 자체도 아니기 때문이다. ‘주몽’과 경쟁하는 새로운 대하사극 ‘연개소문’. 정통사극을 주창하고 나온 이 사극이 불리한 점은 바로 거기에 있다. 만일 그 불리함을 이겨내기 위해 민족주의를 내세운다면 그것 역시 스스로 어려움을 자초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역사해석의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사극이 하는 말은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는 말이다. 이 말이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애초부터 민족주의에 대한 호소보다는 드라마적인 요소에서 승부를 내야한다. 드라마 외적인 것의 도움을 구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드라마라는 틀로 숨어버리는 이율배반은 없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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