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쌍 논란, 갑의 횡포? 잘못된 법이 문제다

 

리쌍이 지난해 산 건물에 임차인과의 갈등으로 빚어진 이른바 ‘갑의 횡포’ 논란은 시시비비를 따지기가 쉽지 않은 사안이다. 리쌍의 입장에서 보면 36억의 빚을 내서 산 건물의 임차인이 계약서에 명시되어있는 계약기관과 상관없이 전 주인과 5년을 구두계약 했다며 보상을 요구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게다. 하지만 임차인의 입장에서 보면 전 주인이 구두로 보증금이 3억을 넘지 않으니 임대차 보호법에 해당되어 5년을 장사할 수 있다고 구두계약 했다가 후에 슬그머니 임대료를 조정해 보호받지 못하게 된 사정이 억울할 것이다.

 

'리쌍(사진출처:정글엔터테인먼트)'

임차인의 입장에서는 그 임대료 조정조차 새로운 건물주인 리쌍에게 임대인으로서의 유리한 조건을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했던 일처럼 여겨졌을 수 있다. 물론 리쌍의 입장은 완전히 다르다. 건물주로서 계약기간이 만료되는 임대사업장에 어떤 사업 계획을 갖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지만 그들은 임차인의 사정을 감안해 도의적인 보상을 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임차인이 이를 거듭 거부하고 리쌍이 연예인이라는 입장을 약점 삼아 버티는 모습은 그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을 것이다.

 

흔히 건물주와 임차인 사이의 관계를 그저 모두 갑을 관계로 치환해서 마치 갑이 을에게 늘 횡포를 부리는 것으로 바라본다. 물론 일종의 권력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에 그런 경우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경우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임대 사업을 하는 입장에서 제대로 임대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고, 이른바 권리금을 제 멋대로 올리는 임차인 때문에 그 피해가 건물주에게 미치는 경우도 많다. 게다가 이번 리쌍의 경우는 연예인이라는 공인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이 여론의 약자가 될 가능성이 더 많다.

 

즉 이번 리쌍과 임차인 사이에 벌어진 사안을 단순히 갑의 횡포니 을의 억지니 하며 바라보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중요한 건 왜 이런 분쟁이 생겨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리쌍이 애초에 전 건물주와 계약할 때 임차인들과의 이런 미묘한 입장들을 사전에 고려하지 못한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고, 임차인 역시 전 건물주가 보증금 액수를 조정할 때 확실하게 서면 계약서로 5년을 보장받지 못한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다. 즉 현재의 법에서는 건물을 사거나 임대차 계약을 할 때 이런 복잡한 문제들을 사전에 모두 서면으로 남겨놓아야 분쟁의 소지가 없다는 얘기다.

 

사실 이 문제는 보는 입장에 따라 누가 잘했고 잘못 했는가가 완전히 다르게 해석될 수밖에 없다. 누구는 건물주로서 정당한 권리를 보장받고 싶지 않겠는가. 또 누구는 임차인으로서 손해보고 가게를 빼주고 싶겠는가. 문제는 이렇게 분쟁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야기시키는 법 조항이다. 법이란 것이 결국 이런 사회적으로 벌어지는 분쟁에 대해서 합리적인 판단을 내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닌가.

 

임차인이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 2조’ 위헌법률심판제청신청서를 제출한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른바 ‘임대차 보호법’이라는 것이 실로 애매한 기준으로 그 보호대상을 결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서울의 경우에 보증금이 3억 원을 초과하지 않는 상가건물 임차인들만을 보호대상으로 한다는 점이다. 이 얘기는 임차인이 억울함을 토로하는 것처럼 “5천에 250만 원짜리 세입자는 보호를 받고, 5천에 251만 원짜리 세입자는 보호 안 되는” 이상한 현실을 보여준다.

 

리쌍이라는 연예인의 문제이기 때문에 공론화된 것이지만, 이런 건물주와 임차인의 문제는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일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단순히 갑을 관계로 치환해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은 문제의 핵심을 놓치고 자칫 감정싸움으로 흘러가게 만들 수 있다. 갑의 횡포니 을의 눈물이니 하며 최근 갑을 관계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은 긍정적인 면이 많다. 하지만 모든 것을 갑을 관계로 환원해 바라보는 것은 자칫 특정 사안의 핵심을 놓치는 일이 될 수 있다. 리쌍 논란의 핵심은 갑을의 문제라기보다는 잘못된 법의 문제가 더 크지 않을까.

정치인 유정현이 방송인 유정현의 발목을 잡다

 

정치인으로 활동했던 유정현이 정치를 접고 방송복귀를 선언했다. tvN <택시>에 강용석과 출연한 유정현은 여배우와의 모텔 출입 루머를 특유의 유머감각으로 해명하기도 했다. 유정현이 복귀한 첫 방송으로 김구라가 진행하는 <택시>에 강용석과 함께 동승한 데는 그만한 포석이 있다고 여겨진다. 유정현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면서 강용석 못지않게 비호감을 산 인물이다. 강용석이 김구라를 통해 부활할 수 있었듯이 유정현도 그런 일종의 김구라 효과를 기대했을 수 있다.

 

'택시(사진출처:tvN)'

하지만 강용석과는 달리 유정현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그다지 곱지 않다. 아무래도 그가 정치인으로 보였던 일련의 모습들이 대중들에게 깊은 잔상을 남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정치인으로 입문하는 과정에서도 꽤 많은 말들을 남겼다. 그다지 정치적인 소신을 보인 적이 없고, 그렇다고 사회활동에 적극적이지도 않았던 그가 갑자기 정계 입문을 선언했을 때 많은 이들은 그 행보에 공감하지 못했다. 당시 이명박 후보 지원 유세에 몇 차례 나왔을 뿐 특별히 정치와 관계가 없어 보이던 그가 정치참여의 변으로 밝힌 “한류를 살리기 위해서”라는 말도 그다지 실감나지 않았다.

 

어떤 정치적인 행보나 뜻이 삶에 묻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대중들로 하여금 방송인으로 얻은 인지도를 통해 국회의원이 된 인물로 각인되었다. 게다가 이명박 정권 하에서 한나라당 의원으로 했던 일련의 정치적인 행보들은 대중들에게 그다지 좋은 이미지로 남아있지 않다. 이런 그가 결국 한나라당 공천을 못 받고 무소속으로 출마해 낙선하자 다시 방송인으로 돌아온 것이 대중들에게 좋게 보이기는 어렵다. 너무 쉽게 정치계에 들어갔다가 또 너무 쉽게 방송계로 돌아오는 모습이, 소신 있는 정치인들이나 방송에 열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방송인들과 너무나 비교되기 때문이다.

 

사실 유정현은 정치에 뛰어들기 전까지만 해도 유머감각이 뛰어난 아나테이너로서 주목을 받았다. 아나운서로서 시작했지만 예능 프로그램과 시트콤, 드라마, 영화까지 종횡무진 활약하며 특유의 느물느물한 언변으로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깔끔한 외모에 서글서글한 풍모가 친근한 이미지를 만들었던 것. 하지만 몇 년 간의 외도(?)는 그 이미지에 상당한 흠집을 만들었다. 유정현은 그래서 스스로도 방송계에 들어와 정치적인 이야기는 아예 하지 않겠다며 선을 긋는 모습이다. 오로지 방송인으로서의 유정현을 다시 세워보겠다는 것.

 

하지만 이른바 소셜테이너가 일상화되어가는 요즘 연예인이 사회적인 이슈나 정치적인 안건에 대해 무관한 존재라는 인식은 사라져가고 있다. 모든 일상적인 것들이 정치에서 유리될 수 없는 대중정치 시대에, 개념 발언을 하는 이른바 개념 연예인들에 대한 주목도는 이제 사회적인 영향력을 가진 연예인이 어떤 식으로도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말해준다. 하물며 유정현처럼 정치인으로서의 강한 이미지가 잔상으로 남아있는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대중정치 시대에 대중매체를 통해 대중들의 지지를 얻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정치인과 연예인은 점점 닮아가고 있다. 따라서 이 둘 사이를 오가는 것도 과거보다는 훨씬 자연스럽게 여겨진다. 하지만 이른바 소셜테이너라고 불리는 분들이 그 어떤 정치인들도 해내지 못한 일들을 실제로 하는 모습을 목도한 대중들로서는 심지어 정치인으로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있으면서도 당리당략에만 휘둘리며 정작 국민들을 위해 일하지 않는 모습에 염증을 가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연예인이 대중적 이미지를 통해 정치인이 되고, 또 정치인이 어떤 계기로 인해 정치를 나와 방송인의 길을 택하는 최근의 이 일련의 흐름은, 정치와 연예 그 두 분야에 모두 똑같은 대중과 매체가 자리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또 이렇게 연예인이 정치인이 되고 정치인이 방송인이 되는 행보를 잘못됐다 말할 수도 없다. 하지만 어떤 진정성 없는 선택의 반복은 자칫 방송인으로서도 정치인으로서도 그 진심을 대중들에게 전하기가 어렵다. 유정현의 방송복귀 앞에 놓여진 벽은 바로 이것이다.

강호동에게 약간의 시간을 줘야 하는 이유

 

강호동이라는 이름은 육중하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잠시 예능을 떠나있는 동안이 오히려 강호동의 이름을 더 육중하게 만들었다. 기대감만 더 커진 셈이다. 하지만 그가 복귀했을 때 바로 이 육중한 기대감은 강호동은 물론이고, 강호동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에게마저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맨발의 친구들'(사진출처:SBS)

<스타킹> 8.5%, <무릎팍 도사> 5%, <달빛 프린스> 4%, <우리동네 예체능> 7.5%, <맨발의 친구들> 4.7%. 강호동이 출연한 프로그램의 시청률은 낮아도 너무 낮다. 그래서 항간에는 강호동이 한 물 갔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강호동 출연 프로그램의 낮은 시청률이 오롯이 강호동만의 잘못일까.

 

먼저 <스타킹>과 <무릎팍 도사>의 시청률 추락은 강호동과는 그다지 상관이 없다. <스타킹>은 이미 강호동이 있던 시절에도 내리막을 걷던 프로그램이다.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쏟아지면서 일반인 스타를 찾던 <스타킹>은 차별성을 잃어버렸다. 제 아무리 놀라운 재주를 가진 일반인들이 나와도 마치 동네 경연 같은 느낌을 주게 된 것. 화려하고 한 가지 종목에 집중되어 더 전문화된 오디션 프로그램들의 영향이다.

 

<무릎팍 도사>는 강호동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는 토크쇼지만, 연예인 토크쇼 트렌드가 지나버린 지금 사실상 그 누가 맡아도 어려운 프로그램이 되었다. 발군의 유재석도 <놀러와>의 추락을 버텨내지 못했듯이. <스타킹>과 <무릎팍 도사>의 추락은 이런 변화하는 트렌드를 읽지 못하고 그저 강호동이라는 MC에 기대보려 했던 방송사들의 패착인 셈이다.

 

그렇다면 새롭게 런칭한 프로그램들은 어떨까. 일찌감치 폐지된 <달빛 프린스>는 새로운 시도는 좋았지만 책이라는 소재의 한계를 쉽사리 뛰어넘지 못했다. 무엇보다 강호동과는 소재적으로도 잘 맞지 않는 옷이었다. 오히려 이것이 기획 포인트라고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이 갖고 있는 정적인 분위기는 강호동의 동적인 장점을 살려내기는 무리였다.

 

<우리동네 예체능>은 복귀한 강호동으로서는 가장 효과를 발휘하고 또 기대해볼만한 프로그램이다. 시청률이 7% 대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지만 반응도 좋은 편이고, 확장가능성도 많은 프로그램이다. 동네 스포츠의 다양함은 물론이고, 동네의 숨은 고수들은 거의 무한대로 많다. 여기에 조달환이나 이병진처럼 미친 존재감들이 가세하면서 끊임없는 추동력을 만들어낸다.

 

4연승을 하면 동계올림픽에 가고 싶다는 소원은 동네 스포츠에서 국가대표 스포츠까지를 아우르겠다는 야심마저 보인다. 무엇보다 든든한 조력자 이수근과 합이 잘 맞는 강호동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예능과 체육이라는 옷을 제대로 찾아 입은 셈이다. 주말에 훨씬 어울리는 아이템을 주중에 편성시킨 것이 하나의 오점처럼 보이지만 그것마저 역발상으로 뒤집을 수 있다면 전체적으로 침체된 주중 예능의 기폭제가 될 가능성도 있다.

 

<맨발의 친구들>은 그 맨발로 뛰겠다는 의지는 좋으나 포인트를 잘못 잡았다. 이미 <런닝맨>이나 <정글의 법칙>을 통해 해외로케 예능의 가능성을 제대로 본 것은 맞지만 중요한 것은 거기에 우리네 대중의 정서를 담지 못했다는 점이다. <런닝맨>의 해외로케는 정규적인 것이 아니고 가끔 나가는 데다 예능 한류가 주는 자긍심이 있다. 또 <정글의 법칙>은 어떤 정글이라는 공간이 주는 고생에 대한 의미화가 분명하다. 거기에는 환경과 공존의 의미가 있다.

 

<맨발의 친구들>이 추구한 것이 없는 건 아니다. 이 프로그램은 이문화 교류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에 가서 그들과 똑같이 하루를 살아보는 체험은 그들과 맨발로 부딪치는 문화교류라는 의미를 찾아내려 하지만, 대중들에게는 그만큼 절절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눈물 나는 진짜 생고생이 아니라면 해외로케는 서민들에게는 그 자체로 배부른 얘기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더 힘겨워진 현실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얘기했듯이 <맨발의 친구들>은 그 의지가 나쁜 건 아니다. 따라서 이를테면 체험을 국내로 돌리고 진정으로 어려운 삶을 살거나 문화적으로든 나이로든 빈부의 격차로든 서로 섞이기 어려운 서민들 속으로 들어간다면 새로운 가능성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맨발의 진심이 아니겠는가.

 

문제는 강호동을 세우고 새롭게 런칭한 예능 프로그램에 대한 조급증이다. 한때 <1박2일>로 40%가 넘는 시청률 기록의 사나이인 그에게 시청률 4%, 5%는 일찌감치 ‘글렀다’는 속단을 불러온다. 하지만 <1박2일>도 처음부터 40%는 아니었다는 것을 상기해보라. 강호동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이 만들어내는 조급증은, 될 프로그램도 안 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강호동은 여전히 육중하다. 그리고 그 육중한 몸을 더 열심히 놀리고 있다. 부담은 몇 배다. 프로그램이 안 되면 오로지 그 탓이 자신에게 온다는 걸 스스로 알고 있어서다. 또 자신 때문에 프로그램에 대한 관대함도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 또한 알기 때문이다. 조금만 기다려보자. 그에게도 어느 정도의 시간은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그가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죽을 힘을 다해 맨발로 뛰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만이 그 육중함을 이겨낼 유일한 방법, 바로 진정성을 끌어낼 수 있는 길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다.

진정성 찾은 '정글', 이젠 재미를 찾아야

 

<정글의 법칙> 뉴질랜드편은 여러모로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끝을 맺었다. 박보영의 소속사 대표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 몇 줄이 지금껏 <정글의 법칙>이 진정성으로 쌓아놓은 공든 탑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뉴질랜드편은 진정성을 의심할만한 조금치의 의혹도 남겨서는 안 되는 상황에 놓여졌다.

 

 

'정글의 법칙'(사진출처:SBS)

편집은 투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첫 회부터 사전 답사하는 장면을 미리 보여줘야 했고 중간 중간에도 자막 등을 통해 ‘관광이 가능한 지역이나 전문가이드가 반드시 따라야 함’ 같은 고지를 붙여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또 누구나 다 갈 수 있는 관광지나 여행하고 왔다는 식으로 호도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똑같은 관광지를 간다고 하더라도 그 곳을 어떤 방식으로 체험하느냐에 따라 그 강도나 결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것을 제대로 보여준 것이 바로 채텀섬에서 초심으로 돌아가자며 병만족이 한 석기시대 체험이다. 그 섬은 물론 관광이 가능한 곳이고 또 살고 있는 주민도 있는 곳이지만 그들은 말 그대로 석기시대로 돌아가 야생 그대로를 보여주었다.

 

동굴에서 자고 석기만을 써서 물고기나 흑전복을 잡거나 웨카라는 날지 못하는 새를 잡아먹으며 지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게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정글의 법칙>이 정글을 체험하는 방식이라는 것은 이번 뉴질랜드편을 통해 확실히 보여준 셈이다. 이미 전 지구 어느 곳이든 들어가지 못할 곳이 없는 시대에 완전히 외부로부터 차단된 곳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나마 야생이 살아있는 곳으로 들어가 야생 그대로의 삶을 체험하는 것이 더더욱 의미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조금치의 오해도 만들지 않기 위해 선택한 편집은 결과적으로 극도로 스토리텔링이 자제될 수밖에 없었다. 찍어온 촬영분에 적절한 편집과 스토리텔링을 덧붙여야 하나의 맥락이 생기고 재미가 생길 수 있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자유로운 스토리텔링을 할 수 없는 뉴질랜드편은 상대적으로 상당 부분의 재미를 포기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재미를 뽑을 수 있는 부분이 사냥을 하거나 그 잡은 것을 같이 먹는 장면이었을 게다. 이번 뉴질랜드편이 <정글>판 최고의 먹방이 된 것은 그런 이유다. 흑전복에서부터 웨카 같은 새, 각종 물고기, 거대 뱀장어, 웨타나 후후 애벌레 같은 벌레에 이르기까지 뉴질랜드편은 끝없는 식탐을 주 스토리텔링의 재료로 삼았다.

 

결과적으로 나온 장면들을 종합해볼 때, 아마도 진정성 논란이 없었다면 뉴질랜드편은 굉장히 다채로운 스토리가 가능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채텀섬에서의 석기시대를 거쳐 쥐라기 숲을 지나 빙하를 보고 마지막으로 <반지의 제왕>이 촬영된 영화 속을 체험하는 일련의 과정이 거기서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들을 좀 더 자유롭게 스토리로 이을 수 있었다면 시청자들로서는 훨씬 재미있는 <정글의 법칙> 뉴질랜드편을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번 논란을 계기로 <정글의 법칙>은 확실히 자기들만의 진정성을 제대로 보여줬다고 생각된다. 그러니 이제는 좀 더 과감한 스토리텔링을 통해 재미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 만일 그래도 논란이 걱정된다면 사전 방지 차원에서 프로그램 시작 부분에 ‘재미를 위해 약간의 스토리텔링을 했다’는 식의 고지 정도를 넣어주는 편이 낫지 않을까. 진정성도 좋지만 예능 프로그램으로서의 재미를 어떻게든 복원해야 한다. 이젠 좀 더 과감해질 때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