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에 대한 따뜻한 시선

지금의 드라마들을 보면 퓨전사극, 트렌디 드라마의 변용으로서의 로맨틱 코미디, 미국 드라마와 우리 드라마 사이에서 접합점을 찾아가는 우리 식의 전문직 드라마의 부상이 눈에 띈다. 이것은 어떤 면으로 보면 모두 새로운 시도로 보여진다. 이런 시도는 구태의연한 설정의 트렌디나 불륜, 불치 같은 자극적인 설정의 과거 드라마들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비롯된 바가 크다.

그 과거 드라마들의 소재 중 현재 그나마 질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불륜드라마뿐이다. 시절이 독하다 보니 ‘독한 불륜(불륜드라마)’이나 ‘중독성이 강한(전문직 드라마, 사극)’ 혹은 독한 시절 잊고 웃고 싶은(로맨틱 코미디) 쿨한 드라마들만 살아남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따뜻한 인간애 같은 소재를 다루는 드라마를 찾아보는 건 더욱 어려워졌다. ‘고맙습니다’란 드라마가 가치를 발하는 것은 모두가 외면한 따뜻함을 드라마 속으로 가져 왔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의 미덕은 작중 캐릭터에 대한 따뜻한 시선에 있다. 어떻게 보면 평범한 시골 처자, 그것도 에이즈에 걸린 아이와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를 둔 영신(공효진)과 잘 나가는 의사 민기서(장혁), 그리고 석현(신성록)이 만들어내는 삼각구도는 전형적인 트렌디 드라마의 구조를 의심하게 한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전혀 트렌디가 되지 않는 이유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 때문이다. 민기서와 석현은 영신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지만 소유하려 한다기 보다는 그녀의 행복을 빌어주는 인물들이다. 더욱이 그들은 단지 영신만을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그들은 이 집에 살아가는 사람들, 할아버지(신구)와 이봄(서신애)을 같이 끌어안는다.

드라마를 보다가 불현듯 떨어지는 눈물은 독한 관계 등으로 억지스럽게 짜내지는 눈물이 아니다. 그것은 진짜 눈물, 감동이다. 그것은 짐이 될 수도 있는 할아버지와 딸을 늘 밝게 끌어안는 영신의 모습에서, 그런 영신의 어려움을 알고 집을 뛰쳐나가려는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어린 나이에도 현실을 밝게 받아들이는 조숙해져버린 봄이의 모습에서, 그리고 이들이 서로 엮어 가는 가족애에서 흘러나온다. 그것은 진짜 눈물이기에 구질구질한 눈물이 아닌 웃으면서도 나오는 그런 눈물이다.

감동을 증폭시키는 것은 거의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출연자들의 명연기이다. 울음을 참고 밝게 웃는 공효진과 천연덕스런 아이 서신애 게다가 ‘치매연기의 달인’으로까지 불리는 신구의 연기가 그렇고, 군 제대 후 더욱 깊어진 연기를 보이는 장 혁이 그렇다. 특히 장 혁은 본래부터 투덜이의 아이콘을 가진 배우였지만, 이 드라마 속으로 들어와서는 가볍지만은 않은 연기를 선보인다. 아픔을 가진 장난기 가득한 소년 같은, 결코 쉽지 않은 캐릭터를 소화해낸다.

이런 명 연기자들이 엮어가는 드라마는 가족 내에서 벌어지는 감동적인 삶에 안주하지 않는다. 그 틀을 빠져나와 민기서와 석현의 따뜻한 시선을 끼워 넣는다. 그러자 가족의 범주는 더 넓어진다. 따뜻한 눈길을 주고받는 것, 그래서 거기에 가족 같은 관심과 사랑에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시청자들은 공감과 감동을 갖게 된다. 이야기가 가족의 범주를 넘어서게 되자 드라마는 가족의 차원에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약자들의 차원으로 확장된다. 영신과 그 가족은 사회적 약자의 대변인들이 된다. 미혼모라는 굴레의 여자와 에이즈에 걸린 아이, 거기에 치매를 앓는 노인은 어찌 보면 이 한 가족이란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는 것조차 불가능할 것 같은 생각마저 들게 만든다. 이 사회적 약자들에게 보내는 드라마 속 캐릭터들의 따뜻한 시선에서, 작가의 따뜻함이 느껴지는 것, 이것이 독한 세상에 ‘고맙습니다’란 드라마가 고마운 이유다.

마왕’을 좀더 재미있게 보는 법

“한 꺼풀 벗겨내면 또 다른 의문이 증폭된다. 마치 양파껍질을 벗기는 것만 같다.” 드라마 ‘마왕’이 주는 새로운 재미이다. 하지만 그 새로움이 낯선 시청자들은 “도대체 무슨 얘기인지 알 수가 없다. 너무 지루하고 복잡하다”는 의견을 표하기도 한다. 그래서 일찌감치 ‘매니아 드라마’라는 낙인을 찍는다. 하지만 이 드라마를 그렇게 치부하기에는 어딘지 억울한 느낌이 있다. ‘다르다’는 것이 외면의 사유가 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확실히 여타의 우리네 드라마들과는 다르다. 재미를 주는 요소도 다르고 재미를 전달하는 방법도 다르다. 좀더 재미있게 보는 방법은 없을까.

첫 번째 - 기본구도로 사심 없이 바라보기
무언가 긴박한 사건들이 벌어지고 카메라는 현장을 훑어내면서 많은 추측과 단서들을 쏟아낸다. 12년 전 사이코메트러(물건에 기록되어 있는 잔상을 읽어내는 능력을 가진 자) 해인(신민아)은 현장에 떨어진 물건들을 통해 한 고등학생이 칼에 찔려 살해되는 장면을 보게 된다. 이 사건은 이 드라마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된다. 드라마가 하려는 얘기가 그 자리에 있던 인물들의 12년 후이기 때문이다.

그 장소에는 오수(엄태웅)와 그의 친구들이 있었고, 오수에게 칼을 맞은 승하(주지훈)의 형이 있었다. 승하는 죽어 가는 형을 위해 긴박하게 구조를 요청하고, 뒤늦게 현장의 잔상을 통해 해인은 그 장면들을 보게 된다. 관계는 이 장면 하나로 명확해진다. 12년 후 변호사가 된 승하가 형사가 된 오수와 그의 친구들을 향해 복수의 칼날을 날릴 거라는 것. 이 대결구도는 너무나 명확해 심지어 맥이 빠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 단순한 구도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드라마가 앞으로 끌고 들어갈 미궁에서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할 실마리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 미궁을 즐기기
막상 이런 설정을 갖고 보면서도 복잡한 느낌이 드는 것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이 대결구도에 장애물들을 수없이 설치해두었기 때문이다. 그 첫 번째는 직업이다. 오수는 자신의 말대로 ‘나쁜 놈 잡는 형사’이지 자신이 나쁜 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친구들은 객관적으로 ‘나쁜 놈들’이다. 오수의 형인 강희수가 운영하는 호텔에서 비서로 일하는 석진(김영재)은 희수의 처와 바람을 피운다. 윤대식(한정수)은 해결사에 가까운 사채업자이고 김순기(오용)는 절도, 폭력 전과자이다.

오수라는 털털한 인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가 헷갈리기 시작한다. “칼잡이를 싫어한다”는 대사는 ‘칼쓰는 나쁜 놈들’을 싫어한다는 말이지만, 동시에 12년 전의 악몽과 연관되면서 ‘그랬던 자기 자신을 싫어한다’는 말로도 중첩된다. 여기에 변호사로 등장하는 승하는 상황을 더 미궁 속으로 빠뜨린다. 억울한 사람을 구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살인자를 구원하기도 하는 변호사라는 직업의 양면성이 활용되면서 승하라는 인물이 나쁜 놈인지 좋은 놈인지 판단하기 어렵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오수의 집안은 무언가 범죄의 냄새를 풍긴다. 드라마의 첫 희생자인 권현태(이도련) 변호사는 부와 권력의 상징처럼 보이는 오수의 아버지 강동현(정동환)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며 그 집안의 문제들을 덮어왔다. 그가 살해당했다는 사실은 12년 전 오수의 사건에서도 그가 진실을 덮어버리는데 일조했다는 사실을 추리하게 만든다. 그의 살인범으로 승하가 아닌 조동섭이 자수를 하지만 조동섭의 대리역으로 승하가 변론을 맡는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여전히 승하와 관련을 짓는다.

재미있는 것은 승하가 오수의 친구인 김순기를 변론해 풀려나게 해주면서도, 사건의 키를 쥐고 있는 조동섭의 대리인이 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오수에게 승하라는 존재가 아군인지 적군인지를 판단하기 어렵게 만든다. 게다가 승하는 살해된 권현태 변호사를 ‘스승 같은 인물’이라 말한다. 그런데 이것 역시 장치로 보인다. ‘스승’이란 늘 좋은 것만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우리네 통념을 뒤집는 것이다. 어쩌면 승하가 말한 스승이란 ‘진실을 덮는’ 권현태 변호사로부터 뼈저린 상처를 통해 배웠고 그래서 변호사가 된 자신도 그 같은 방법으로 복수를 하려한다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첫 번째 단순했던 대결구도는 직업과 주변인물들의 관계를 통해서 점점 미궁 속으로 빠지게 된다. 하지만 이럴수록 더 단단히 최초의 실마리를 잡고 나가야 한다. 이 야누스처럼 변하는 인물들이 주는 미궁의 즐거움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말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추측해야 한다. 그 추측이 맞았을 때 느끼는 쾌감은 배가 될 것이다. 틀린다 하더라도 그것은 반전의 의미로서 쾌감을 줄 것이다.

세 번째 - 작가와의 두뇌게임
여기서 한 차원 더 나간다면 이젠 작가와 한 판 두뇌게임을 벌여보는 것이다. 작가와 연출자가 의도적으로 가려놓은 수많은 장애물들을 하나씩 들춰보는 재미를 가져보는 것. 그 첫 번째 단서는 사이코메트러라는 독특한 능력자가 왜 등장하느냐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사실 오수와 승하의 대결구도와 그 속에서 말하려는 선악의 문제나 진실과 정의의 문제를 이야기 하는데 있어서 꼭 사이코메트러 같은 평범하지 않는 인물이 필요할까 라는 의문이 든다. 그녀의 역할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것은 작가와 연출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일이다.

‘남이 못 보는 것을 보는 능력’은 이 드라마의 의도가 보여주는 ‘진실은 무엇인가’에 적합하다. 그런데 과연 그녀는 시청자들에게 진실을 보여주는 가이드 역할을 하고 있을까. 물론 후반에 가서는 좀더 명확한 진실에 근접할 것이지만, 초반부인 지금은 오히려 시청자들의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거나 추측을 하게 만드는 장치로서 활용된다. 그러니 그녀가 보는 비전에 너무 의미를 두다가는 작가가 만들어놓은 덫에 걸리기 십상이다.

먼저 생각해야 할 점은 드라마 상 사이코메트러인 해인이 이 사건에 끌어들여지는 것이 과연 형사들의 수사를 위한 것이냐는 점이다. ‘예전에 그녀의 능력으로 사건을 해결했다’는 점은 그녀가 마치 수사를 돕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녀를 사건으로 끌어낸 것은 형사가 아니라 그녀가 만든 타로카드가 살해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카드를 놓거나 택배로 보낸 인물은 처음부터 그녀를 사건으로 끌어들이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그녀의 능력을 알고 있는 형사가 아닌 살인자가 그녀를 불러낸 것이다.

그러니 그녀의 역할은 사건해결이 아니다. 그녀는 오히려 살인자가 살인을 통해 보여주려고 하고 있는 진실로, 12년 전 그 장소에 있던 인물들을 가이드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마왕’이 단순한 범죄물이나 형사물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드라마는 범인을 잡는 드라마가 아니라 ‘진실이란 무엇인가’라는 조금은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드라마다. 이것은 승하가 오수에게 던지는 대사 속에 집약되어 있다. “사람의 기억이란 제각기 다르죠.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유리한대로 조금씩 거짓말을 합니다. 나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 대사에서 방점이 찍히는 부분은 ‘기억’, ‘거짓말’, ‘사실’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작가는 왜 이다지도 시청자들을 혼란 속에 빠뜨리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현실생활에서 혹은 드라마적 관습에서 굳게 믿고 있는 편견들을 효과적으로 부수기 위함이다. 형사와 변호사의 역할, 선악구도에 대한 편견 같은 것 말이다. 사실 혼란에 빠진 것은 작가가 의도한 것이 아니고 우리들의 편견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니 ‘마왕’은 좀더 작가와의 즐거운 두뇌게임을 요구한다. 그것이 즐거울수록 견고했던 편견들이 깨져나가는 카타르시스의 깊이는 더 클 것이다.

김수현이 ‘내 남자의 여자’를 가지고 또 한번 시청자들의 가슴에 불을 확 질렀다. 들고 온 기름은 화력 좋기로 소문난 ‘불륜’이다. 기름 위에 얹어진 장작들도 여느 장작들과는 달랐다. 그저 불륜이란 소재에 기대 평이한 설정과 연기를 해 이제 식상해져버린 기존 불륜에 넣어진 장작들보다 몇 배는 더 잘 타들어가는 김희애, 배종옥, 하유미라는‘명품 장작들’이다. 그들의 혼을 불사르는 듯한 연기는 김수현이 내지르는 직설화법이란 기름을 만나 활활 타올랐다.

불륜 드라마가 나올 때마다 “이제 불륜 좀 그만해라”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던 것에 비하면 첫 방송을 끝낸 이 드라마의 반응은 남다르다고 봐야 한다. 그것은 자칫 불륜에 집중될 수 있는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는 요소들이 있다는 것. 그 장본인은 김수현이란 작가와 작품 속에서 신들린 듯한 연기를 보여준 김희애라는 연기자다. 이 조합이 만들어내는 불륜드라마를 통해 역시 드라마는 소재보다 중요한 것이 완성도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불륜 드라마도 완성도 있게 만들어지면 인간 본질의 사랑 이야기로 발전하는 것인가.

‘내 남자의 여자’는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듯 남자에 초점이 맞춰진 드라마가 아니다. ‘내 남자의’는 수식어고 결국 그 뒤에 붙는 ‘여자’가 중심이 된다. 그래서일까. 드라마는 아예 내놓고 여성 시청자들을 타깃으로 삼고 있다. 시작부터 중반까지 김지수(배종옥)의 일상을 따라가며 계속되는 대사들은 여성들의 수다에 가까우면서도 대단히 연극적이다. 일상적인 사설은 지겨울 정도로 쏟아져 나오고 그를 통해 관계는 ‘보여지기보다는 설명’된다. 드라마라는 영상언어가 있는데 왜 이렇게 대사중심의 극을 이끌어가는 것일까, 하고 의아해하게 된다. 혹 김수현이란 작가가 PD의 몫을 빼앗아간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된다.

하지만 결국 그 목적은 더 치밀한 데 있다는 걸 알게된다. 평온한 가족의 파티에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인물, 이화영(김희애)이 그 장소에 오기 전까지 거의 노출된 몸을 보여주었던 것은 그녀가 앞으로 불붙게 될 극적 순간을 예고했던 것이고, 유난히 천사표이자 세상물정 모르는 김지수가 그녀의 보호자격(적어도 불륜에 관해서는)인 김은수(하유미)와 너스레를 떨며 명랑한 하루를 보내는 장면 역시 그 순간의 폭발을 위한 장치였다. 물론 연극적인 대사 중심의 극 전개 역시 후에 벌어질 시각적 자극의 극대화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보아야한다.

김수현이란 작가는 소위 작가들이 말하는 ‘눌러주기’의 대가이다. 한참 겉으로 도는 관계를 평이하게 눌러주다가, 어느 한 순간에 폭발시켜주는 것. 그것이 ‘내 남자의 여자’가 시청자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게 만든 요인이다. 이 정도 되면 김수현은 ‘언어의 마술사’라는 호칭이 무색하지 않을 장인임을 증명한 셈이다. 게다가 김수현은 ‘감춰지는 불륜’이 아닌 ‘드러내는 불륜’을 선택했다. 이 차이는 분명하다. 전자는 감춰진 게 드러나는 순간 맥이 빠져버리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불륜드라마 공식 속의 불륜이고, 후자는 드러낼수록 점점 더 강도가 높아지는 불륜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김희애라는 연기자가 거의 완벽에 가깝게 소화해내는 이화영이란 캐릭터에 있다. 이 캐릭터는 불륜이 드러나는 순간, 자신의 잘못된 관계를 되돌리려 하기보다는 자포자기하면서 파멸을 향한 선택을 하는 인물이다. 즉 드러나서 해결되지 않고 드러나면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캐릭터란 얘기다. 여기에 맞상대역으로 먼저 등장하는 김은수 역의 하유미도 만만찮은 연기력을 과시한다. 이 팽팽한 대결구도 앞에서 더 몸서리처지는 것은 ‘지금 이건 맛보기에 불과해’라고 말하는 김수현 작가의 모습이 언뜻 보이는 것 같기 때문이다.

불륜드라마라고 무엇이 나쁠까. 불륜은 사실 저 드라마(drama)의 구조가 나왔던 그리스 로마 시대의 연극 속에서부터 지금까지 유구히 내려오는 전통적인 소재다. 그만큼 인간의 원초적인 모습을 담기에 용이하다는 말이다. 사회가 가진 가치개념과 인간의 욕망이 부딪치는 이 소재는 욕망을 가지고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이 존재하는 한 늘 유효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또 불륜이냐”는 목소리에는 우리 드라마가 다루었던 소재의 폭이 그만큼 좁다는 것에 대한 비판과 또한 같은 불륜이라도 너무 표피적인 자극으로만 다루었던 드라마들에 대한 비판이 들어있다.

김수현이 만든 불륜드라마는 일단 무언가 다를 것 같은 예감을 준다. 작가와 연기자들에게 신뢰가 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앞으로도 불륜을 통한 인간의 문제를 천착하지 않고 자극으로만 치닫게 된다면 또다시 비판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또 불륜이냐”는 말보다는 “불륜도 제대로 다루면 다르다”는 의견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헬로’라는 단어는 어떻게 ‘애기씨’와 만났을까

이 드라마 제목이 수상하다. 영어지만 일상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헬로’라는 단어에 우리말이지만 잘 쓰지 않는 ‘애기씨’란 제목을 붙였다. 혹자는 이걸 가지고 비판한다. 왜 좋은 우리말 놔두고 어울리지 않는 영어를 조합해 쓰느냐고. 즉 ‘안녕 애기씨’라 하면 안 되느냐는 말이다. 하지만 드라마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건 안될 말이다. 이 드라마의 재미는 바로 ‘헬로 애기씨’라는 제목처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질적인 요소의 절묘한 결합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자전거와 고급승용차가 만날 때
종가집 애기씨 이수하(이다해)가 갈치송(?)을 부르며 자전거를 타고 시골길을 달린다. 한편 교차로에서 부딪치게될 고급승용차에는 TOP그룹의 손자인 황동규(이지훈)가 타고 있다. 부딪치는 순간 이수하는 자전거와 함께 논둑길로 넘어져 갈치들의 세례를 받고, 갈치 한 마리는 황동규가 탄 승용차 뒤 트렁크에 달라붙는다. 이 단순해 보이는 첫 신 속에는 이 드라마가 앞으로 진행될 방향과 스타일, 캐릭터, 이야기까지 대부분의 복선이 숨어있다.

즉 앞으로 이 드라마는 자전거와 고급승용차처럼 시골스러움과 도회적인 것이 부딪칠 것이고, 그것은 자전거를 타고 있는 이다해와 승용차를 타고 있는 황동규라는 캐릭터로 구체화될 것이다. 부딪치면서 순간적으로 공중 부양하는 이다해와 자전거, 그리고 반짝이는 갈치들이 날아가고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는 점은 이 드라마가 정극이 아닌 코미디를 지향하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이것이 ‘헬로 애기씨’가 앞으로 그려갈 사항들이다.

몰락한 양반과 성공한 머슴이 만날 때
애기씨는 현대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몰락한 양반을 대변한다. 반면 이 종가집에서 머슴 살던 황만복(박인환)은 소를 도둑질해 이를 밑천 삼아 TOP그룹을 일으킨다. 성공한 머슴인 셈이다. 성공한 그룹 회장이지만 ‘본바탕’은 머슴인 그의 숙원은 자기가 머슴살던 종가집, 화안당 사랑채에서 말년을 보내는 것. 손자 황동규를 시켜 화안당을 사들이는 것이 어렵게되자 황만복은 손자를 애기씨와 결혼시키려 한다. 집은 물론이고 종가집이란 뿌리까지 얻기 위함이다.

이것은 박지원이 쓴 ‘양반전’의 변용이다. 다른 점은 ‘양반전’이 양반이 된 지체 낮은 부자를 통해 양반의 위선을 꼬집었다면, ‘헬로 애기씨’는 돈이면 뭐든지 된다는 식의 천박한 자본주의를 꼬집는다. 이것은 고풍스러운 옛것이 살아있는 시골을 구닥다리라 여기며, 장삿속으로 현대화시키는 작금의 자본주의와도 맞닿는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복잡한 구석이 생긴다. 애기씨라는 캐릭터가 그저 고전적 가치만을 대변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애기씨 역할을 하고 있지만 도시로 오면 좌충우돌 씩씩한 현대여성이 된다. 즉 애기씨는 과거에만 가치를 두고 변화를 무시하는 사람들 역시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말이다.

가난한 여성과 부자인 남성이 만났을 때
트렌디 드라마의 전형적인 구조는 바로 가난하지만 당찬 여성이 재벌집 아들과 만나는 것이다. 그래서 어찌 어찌해 결혼에 골인 혹은 실패했더라가 이야기의 골자가 된다. ‘헬로 애기씨’에서도 그 틀은 같다. 하지만 여기에 하나 더 들어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가난하지만 ‘지체 있는 집안의’ 여성이라는 점과 부자지만 ‘위신 없는’ 남성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좀더 확장되는 의미는 가치 중심적인 여성성과 돈이면 다 된다는 단순논리의 남성성의 대결구도이다. 전자가 지금 변화되고 있는 사회(여성성이 강조되는)라면 후자는 과거 ‘개발과 성장’으로 대변되는 남성 중심적 사회를 보여준다.

이 드라마는 남성성, 자본주의적 가치로 대변되는 남자와, 여성성(때론 현대적 의미의), 고전적 가치로 대변되는 여자가 서로 만나 티격태격 싸우는 이야기다.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로 봤을 때 해피엔딩을 예측할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된다면 이 둘은 결국 결합에 어떤 식으로든 성공하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가치는 고전주의적인 균형감각이 된다. 어느 한 쪽에 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양쪽이 조금씩 양보하여 소위 시너지를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결합은 단순히 남녀의 결합을 넘어서 남자로 대변되는 가치와 여자로 대변되는 가치의 결합을 의미하게 된다.

수많은 작품들의 변용, 진화일까
이 드라마는 재미있다. 그 이유는 로맨틱 코미디의 수많은 요소들을 거의 다 끌어안고 있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 속에서 수많은 고전들과 성공한 로맨틱 코미디 작품들의 냄새가 풍겨난다. 종가집 애기씨가 재벌집 아들과 만나는 그 구조 자체는 신데렐라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기 힘들고, 지체 없고 무식하기만 한 남성이 지체 있는 애기씨를 만난다는 설정은 온달 콤플렉스를 연상케 한다. 위에도 언급했듯이 몰락한 양반과 성공한 머슴의 만남은 양반전의 변용으로 보이며, 애기씨는 새엄마와 결혼한 아버지의 서울집으로 가게 되는 순간, 콩쥐가 된다. 이 좌충우돌 대략난감의 애기씨가 앞으로 변화하게 될 모습은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코드를 예감하게 만든다. 애기씨 옆에 따라다니는 오정숙(장영란)은 향단이의 현대적 변용이고, 황동규 옆에 따라다니는 장대리(문천식)는 방자의 변용이다.

또한 이 작품에는 ‘환상의 커플’, ‘넌 어느 별에서 왔니’, ‘궁’ 같은 성공한 로맨틱 코미디 작품들의 영향이 엿보인다. 무능한 상사 밑에서 할말 다하는 약방의 감초, 공실장은 이 드라마에 와서 거의 똑같은 캐릭터로 곽부장(김광규)이 된다. 시골여자와 서울남자의 만남에서 야기되는 에피소드들은 ‘넌 어느 별에서 왔니’의 정려원과 김래원을 떠올리게 한다. 애기씨의 화안당과 거기에 사는 사람들에게서는 ‘궁’의 재미요소들이 눈에 띈다. 로맨틱 코미디가 수많은 전작들과 그 전작들의 현대적 변용을 통해 진화의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면 ‘헬로 애기씨’는 바로 거기에 딱 맞는 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

‘헬로’와 ‘애기씨’의 만남은 현대와 과거의 만남이자 과거 트렌디한 로맨틱 코미디와 그 현대적 변용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것이 단순한 조합이 아닌 진화가 될 지는 아직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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