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혁과 봉달희가 원하는 사회

병원드라마를 가지고 이것이 진짜 병원의 실상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병원의 실상을 보고 싶다면 ‘닥터스’나 병원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면 된다. 물론 병원드라마는 그 소재에 걸맞게 이야기도 병원에서 나올 수 있는 것으로 갖춰지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현실적인 결론에만 집착한다면 드라마가 가진 극적 장치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할 수 있다. 드라마는 때론 실상은 아니지만 실상이었으면 하는 환타지를 다루며, 그 환타지와 현실의 차이를 통해 더 강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최근 병원드라마들이 갖춘 요건들은 바로 이 부분에 있다. 이미 종영한 ‘하얀거탑’이나 앞으로 종영될 ‘외과의사 봉달희’는 드라마로 구성된 병원이야기일 뿐, 실제 병원의 이야기하고는 거리가 멀다. ‘하얀거탑’의 외과과장 장준혁(김명민)은 우리나라 외과의를 리얼하게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거탑의 꼭대기에 군림하며 외제자동차를 몰고 다니고 일식집을 들락거리는 외과의사는 실제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외과의사 봉달희’ 역시 마찬가지. 물론 병원에서 벌어질 수 있는 환자들과 의사들의 생과 사를 두고 싸우는 모습은 리얼하지만 1년 차 레지던트가 교수들과 벌이는 연애는 실제가 아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맞다. 이건 드라마다. 현실이 아니다. 이들 병원드라마는 허구다. 장준혁과 봉달희(이요원)는 허구로 만들어진 인물이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이 인물들은 매력적이다. 이 캐릭터들 속에는 외과의사 아니 인간이라면 가질 수 있는 욕망과 욕구가 잠재되어 있다. 그리고 그 욕망과 욕구는 일반 시청자들이 투사해도 될 만큼 보편적인 것들이다. 상승욕구 혹은 성장욕구. 장준혁의 거탑을 향한 상승욕구는 일반 샐러리맨들의 욕구와 맞닿아 있으며, 봉달희의 연애를 포함한 성장욕구는 우리 일상인들의 보편적인 욕구이다. 두 병원드라마가 하는 이야기는 결국 의사의 이야기를 빌어서 하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이 같은 병원 소재를 다루면서도 서로 다른 스타일을 고수하는 이 두 드라마에서 유일하게 같은 설정을 가진 부분에서 드러난다. 그것은 ‘의사와 환자의 역할 바꾸기’이다. 장준혁이 결국 담관암에 걸려 자신이 종횡무진 활약했던 수술대에 오르는 것은 의사 이야기에서 환자 이야기로 연결되면서 ‘의사→환자→인간’의 구도로 회귀하기 위함이다. ‘외과의사 봉달희’는 일찌감치 이 역할 바꾸기에 몰두해왔다. 봉달희의 캐릭터 설정 자체가 선천성 심장병 환자이며, 이건욱(김민준)은 폐암수술을 받고, 조문경(오윤아)은 아들이 급성확장성심근증으로 수술을 받는다. 모두 역할 바꾸기의 사례들이다.

이러한 역할 바꾸기의 목적은 그것이 극적인 연출에 효과적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의사라는 자칫 차갑기만 하게 느껴지는 기계적인 직업인을 따뜻한 피가 흐르는 인간으로 환원하기 위함이다. 의사가 환자가 되고, 의사가 의사를 수술하며(더욱이 평사시에는 경쟁자로 있던 의사가), 수술을 받아야할 병을 가진 의사가 기다리는 환자를 먼저 수술하는 이 장면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다. 죽어 가는 환자를 보면서 적어도 살아있는 자신에 ‘부끄러운 안도’를 갖는 봉달희는 그래서 의사이지만 한 인간이기도 하다.

병원드라마는 의사들을 빌어 사람들의 환타지를 다루었다. 거기서 의사들은 의사이면서도 한 명의 인간들이었다. 그들은 성공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고 결국 죽음 앞에 경건해지는 인간(장준혁)이며, 자기도 아프고 두렵고 연애하고 싶은 한 인간(봉달희)이다. 그것이 진짜 의사의 이야기가 아닌 허구라고 해도 그 허구는 보편적인 진실을 향해 간다는 점에서 더 리얼하다. 웃음, 눈물, 증오, 사랑, 절망, 희망, 질투, 고뇌... 병원드라마를 통해 본 의사들의 인간적인 감정들을 보면서 우리는 새삼 따뜻한 병원을 느낀다. 그것 역시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병원의 모습이란 건 분명하다. 병원드라마에서 발견한 인간은 거꾸로 실제 병원에서 찾기 힘든 인간적인 의사의 모습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병원드라마를 너머 인간드라마로 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병원만의 이야기가 아닌 인간 냄새나는 사회에 대한 희구가 되기도 한다.

‘하얀거탑’이어 ‘마왕’ 주제가 부르는 바비 킴

고현정이 드라마로 복귀해 화제가 되었던 ‘여우야 뭐하니’에서 천정명이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며 나오는 노래, ‘고래의 꿈’. ‘하얀거탑’에서 장준혁의 고뇌 어린 얼굴에 흐르던 노래, ‘소나무’. 모두 ‘힙합대부’에서 ‘소울의 제왕’으로 돌아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바비 킴(본명 김도균)의 곡이다.

드라마에서 그의 목소리를 찾는 이유는 바비 킴 특유의 음악적인 맛 때문이다. 그 맛은 마치 레스토랑에서 먹는 시큼털털한 김치 같다. 힙합이라는 서구적 음악형식에 있어 극도로 세련되어 있고 높은 완성도를 갖고 있으면서도, 우리 식으로 흔히 말하는 ‘뽕끼’가 가득한 음악을 내놓으니 말이다. 즉 매력적이고 세련된 멜로디에 자신만의 아이덴티티가 묻어나는 음색과 개성이 드라마 같은 극적인 장르에 잘 녹아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가 바비 킴으로서의 개성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가 비로소 자신만의 개성을 발하며 주목을 받게된 2집 앨범 ‘Beats Within My Soul’에 오기까지 그는 무려 10여 년의 세월을 돌아왔다. 1994년 레게 힙합을 선보인 닥터레게 싱글의 성공으로 장밋빛 미래가 보였던 것도 잠시, 앨범 출시 2주만에 그룹이 해체되는 비운을 겪은 그는 줄곧 실패를 거듭해왔다. 그에게 힙합대부라는 호칭이 붙은 것은 윤미래, 리쌍, 다이내믹 듀오, 버블 시스터즈, 드렁큰 타이거 등의 가수들과 작업해온 결과. 정작 본인은 늦깎이 힙합 가수로서 ‘랩 할아버지’란 별명이 더 어울린다고 한다.

98년 솔로로 낸 1집 앨범 ‘Holy Bumz Presents’에서 그 변화의 조짐을 보여준 바비 킴은 2집에 와서는 완전한 자기 스타일의 소울을 선보인다. 흑인음악을 그저 흉내내는 것이 아닌 온전히 우리 것으로 소화하는 작업을 보여준 것. ‘고래의 꿈’으로 대표되는 그 곡들은 아련한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단순한 리듬에 바비 킴만이 소화할 수 있는 나른한 음색이 만나 절묘한 음악적 세계를 구축해놓는다. 1집에서처럼 그의 목소리는 굳이 격하지도 않고 메시지는 강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넋두리처럼 쏟아내는 그 가사들은 오히려 더 강하게 청자의 감성을 자극한다. 어깨의 힘을 빼자, 호소력은 더 짙어진다.

최근에 낸 3집 앨범, ‘Follow your soul’은 앨범명에서 드러나듯 좀더 소울이 깊어진 느낌이다. 2집의 실험적인 스타일에서 좀더 안착한 느낌이랄까. ‘파랑새’라는 곡은 여러모로 전작 ‘고래의 꿈’을 떠올리게 하는 노래다. ‘고래의 꿈’이 바다를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으로 그려냈다면, ‘파랑새’는 그 향수의 대상을 하늘에서 찾아낸다. ‘고래의 꿈’의 분위기를 그의 아버지인 김영근씨의 트럼펫이 만들었다면 이번 ‘파랑새’는 전제덕의 하모니카가 합세한다. 랩보다는 힙합 베이스에 멜로디 중심의 소울을 구사하는 바비 킴의 스타일과 잘 어울리는 곡이다.

바비 킴은 오는 3월21일 새롭게 시작하는 엄태웅, 주지훈 주연의 KBS 드라마 ‘마왕’에서도 주제가를 부를 예정이다. ‘하얀거탑’의 ‘소나무’에 이어 이번엔 어떤 음악으로 우리를 찾아올지 자못 궁금하다. 드라마를 통해 새삼 바비 킴의 음악을 기대하는 것은 최근 OST 시장이 새로운 가요계의 탈출구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획된 가수가 아닌 진정으로 노래하는 음유시인, 바비 킴의 드라마 나들이가 여타의 실력 있는 가수들의 전범이 되기를 바라는 까닭이다.

장준혁을 위한 변명

‘하얀거탑’은 결국 환타지보다 현실을 선택했다. 장준혁(김명민)에 대해 쏟아지는 애정의 근원은 바로 그가 우리네 3,40대 샐러리맨들의 자화상을 담고 있기 때문. 성공을 위해 밤낮 없이 달리던 그들이 어느 날 갑자기 픽 쓰러지는 장면들은 이제 낯선 장면이 아니다. “장준혁을 살려내라”는 거센 요구는 바로 그런 현실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시청자들의 욕구가 반영된 결과이다. 그렇다면 장준혁이 달려온 길은 이 시대 샐러리맨들의 자화상을 어떻게 대변했을까.

장준혁도 이주완(이정길) 과장이 딴 맘을 먹기 전까지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다. 개원의도 아니고 종합병원에서 그것도 모두가 기피하는 외과에서 10여 년을 숨죽여가며 주는 봉급 받아가며 살아온 샐러리맨. 실력은 최고지만 조직의 생리가 어디 실력만으로 되는 것인가. 그 이유는 바로 조직이 거탑의 모양새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위로 갈수록 숫자는 줄어드는 그 구조는 밑에서 올라가기는 힘들어도 위에서 올라오지 못하게 막기는 쉽다. 그러니 아직 현역인 이주완 과장의 눈밖에 난 장준혁의 선택은 생존을 위해 당연한 것이다.

거탑의 구조가 갖는 생리는 오르지 않으면 떨어진다는 것. 가만히 있는다고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그런 구조가 아니다. 인사철에 누락된 자신을 현상유지로 받아들이는 샐러리맨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공을 향한 질주는 사실 생존을 위한 강한 몸부림의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어떤 면으로 보면 장준혁은 그래도 운 좋은 인물이다. 적어도 그런 상황에 접했을 때, 현실에서라면 그저 고개 숙이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에게는 뒤를 밀어주는 든든한 백(장인이나 아내 같은)이 존재했다.

그렇게 해서 오른 거탑의 꼭대기에 서면 더 많은 잔인한 결정들에 직면해야 하는 것이 현실. 그의 위치는 윤리적 결정보다는 실리적 결정을 해야한다. 장준혁은 조직이 요구하는 대로 거침없이 질주하기 시작한다. 꼭지점에 존재하는 자는 앞만 보고 달려야지, 옆도 쳐다보고 또 뒤도 돌아보고 하면 조직 전체가 둔화된다. 문제는 어느 순간 과도한 욕망에 사로잡혀 본분을 잊는 순간에 발생한다. 여기에 물론 극화되어 과장된 캐릭터지만 늘 조직이라면 존재할만한 염동일(기태영) 같은 인물이 엮이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이미 벌어진 사건은 조직의 차원에서는 최대한 막아야 한다. 그것은 조직의 차원이 들어감으로써 인간적인 판단은 결여된다. 윤리적으로도 법적으로도 패한 장준혁이 가졌을 상실감의 깊은 근원 속에는, 단지 패했다는 사실 이외에도 조직이란 구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비윤리적인 선택마저 해야만 하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과장된 해석일 수 있지만 그가 가진 암은 그런 심적 고통을 이겨내지 못한 몸의 반응처럼 읽힌다. 성공의 뒤안길에 나타나는 죽음의 그림자. 그것은 저 ‘성공시대’라는 영화에서 안성기가 그랬던 것처럼 욕망의 끝으로 나타나는 징후이다.

그러므로 장준혁의 죽음으로서 이 드라마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정의는 이긴다’같은 통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왜 그가 죽어야 했는가 하는 질문에서부터 왜 그토록 성공에 목말라 했나 하는 질문으로, 또 어째서 그런 비윤리적인 일까지 서슴지 않게 되었는가 하는 좀더 사회에 대한 질문으로 환원된다. 그것은 거탑의 구조 속으로 뛰어들어가야만 하는 사회, 그 거탑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별의 별 짓을 다해야 하는 사회, 그리고 그 결과로 돌아오는 것이라곤 갑작스런 사망선고 같은 허망함뿐인 사회에 던지는 질문이다. 이것이 할 짓 못할 짓 다 해가며 거침없이 거탑을 향해 질주하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장준혁에게 숙연해지는 이유다. 고인에게 명복을. 이 땅에 그처럼 살아가다 끝을 보아버린 모든 샐러리맨들에게도.

전문직 드라마의 이유 있는 선전

값비싼 스포츠카에서 내려 조금은 풀어진 듯한 모습으로 건물로 들어서는 남자. 그를 전날 길거리에 우연히 만났던 말단 여직원(하지만 늘 굳건하고 씩씩한 우리의 여주인공!)이 막 회사로 들어서는 남자에게 다짜고짜 말을 건다. 옆에서 수행하던 비서들이 제지하면서 여자는 그가 이 회사 총수의 아들이라는 걸 알게된다….

식상한 트렌디 드라마의 전형적인 구조. 한 때는 한류의 한 공식처럼 통용되던 이 구조는 작년 한 해 시청자들에게 철저히 냉대를 받았다. 이로서 제작자들은 알게 되었다. 적당한 삼각 사각구도의 멜로 라인과 몇몇 스타들을 캐스팅하면 무조건 된다는 안이한 방식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올해 들어 새롭게 선보인 것이 이른바 ‘전문직 드라마’.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외과의사 봉달희’, ‘하얀거탑’ 같은 병원드라마가 그것이다.

트렌디는 가고 전문직이 뜬 이유
이제 통상적이고 구태의연한 구조의 드라마에 왠지 눈이 가지 않게 된 것은 달라진 매체 환경의 영향이 크다. 그것은 바로 인터넷의 힘이다. 인터넷이란 매체는 무엇이든 그 속에 담겨질 때 매니아화되는 경향이 있다. 초창기 미드(미국드라마), 일드(일본드라마)를 접해본 몇몇 매니아들이 그 저변을 꾸준히 인터넷을 통해 퍼뜨리자 그 영향은 네티즌들 전체로 파급되었다. 방송과 인터넷이 공존하는 시대에 이런 영향은 곧바로 드라마 소비자들의 입맛을 바꾸어버렸다. 몇몇 식상한 국내 드라마에 대한 비판과 외면은 거세졌고 그러자 방송은 변할 수밖에 없었다.

전문직 드라마(진정한 의미의)가 등장했고 그 첫 번째 타석에 선 것이 병원드라마이며, 이것은 이어서 형사드라마 같은 분야로 영역을 넓혀갈 예정이다. 반응은 예상대로 뜨겁다. 미드와 일드를 보며 우리에게도 저런 드라마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그들이 ‘우리나라’라는 딱지가 붙은 전문직 드라마에 어찌 애정이 없을 수 있을까. ‘하얀거탑’ 같은 경우 실제 시청률은 15∼20% 사이에 머물고 있지만 인터넷을 통한 파괴력은 50%를 넘기고 종영했던 ‘주몽’에 못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이들 전문직 드라마들이 선전하고 있는 것은 이런 외적인 조건만큼 중요한 요인들이 있다.

‘하얀거탑’, 전문직 드라마로 조직을 말하다
장준혁(김명민)이란 천재 외과의사의 성공을 향한 무한질주를 담은 ‘하얀거탑’. 병원드라마의 뚜껑을 열어보니 거기엔 정치가 있었다. 병원 내에서 외과과장을 두고 벌어지는 권력다툼이 그것이다. ‘강한 놈이 살아남는 게 아니고 살아남는 놈이 강한’ 그 세계는 선도 악도 없는 곳. 바로 우리들이 사회에서 몸담고 매일 살아남기 위해 싸워나가야 하는 ‘조직’이라 불리는 곳이다. 병원이란 공간이 우리들이 경험하는 조직이란 공간으로 환치되자 거기 서 있는 장준혁은 모든 샐러리맨들의 욕망을 부여받은 캐릭터가 된다. 때론 비열하고 비정한 그의 무한질주는 그래서 용납된다. 스포츠카와 성공, 돈, 권력 같은 것을 추구하는 장준혁은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조직에 몸담은 이들의 로망이 된 것이다.

이 드라마가 리얼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병원사회를 리얼하게 그리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하얀거탑’에서 그려지는 병원 사회의 모습은 오히려 심하게 왜곡되어 있다. 단 한 사람 꼭지점에 있는 외과과장이 전체 병원을 좌지우지하는 모습은 우리네 병원의 모습이 절대 아니다. 그래도 이 드라마에서 리얼함이란 바로 조직의 리얼함을 말하는 것. 바로 이 부분이 전문직 드라마로서 ‘하얀거탑’을 성공작으로 만든 주요인이다.

‘∼봉달희’, 전문직 드라마로 인간을 말하다
한 템포 늦게 시작한 ‘외과의사 봉달희’에 대한 초기 반응은 혹독한 것이었다. 거기에는 두 가지 비판이 있었는데 그 첫 번째는 이 드라마가 ‘하얀거탑과는 달리’ 멜로가 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미드 ‘그레이 아나토미’를 표절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는 점이다. 첫 번째 비판은 ‘하얀거탑’의 영향으로 ‘멜로가 있는 전문직 드라마’라는 것이 과거 ‘무늬만 전문직 드라마’를 연상시키는 데서 발생했을 뿐 근거는 희박한 것이었다.

두 번째 비판은 아무래도 원작 없는 ‘토속 전문직 드라마’에 대한 성공 가능성을 의심한데서 비롯된 바가 크다. 그만큼 일드, 미드에 익숙한 매니아들은 우리가 그런 드라마를 순전 우리 원작으로 할 수 있을 거라는 데 의구심을 가졌던 것 같다. 그러나 막상 이 드라마는 우리 식의 멜로적 상황에, 의사라는 특정 직업이 갖는 고민, 여기에 보편적인 생명에 대한 질문들이 겹쳐지면서 어떤 면으로는 우리 식의 전문직 드라마를 보여주는데 성공했다고 생각된다.

이 드라마는 우리가 병원에서 통상적으로 보던 의사의 모습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의사의 모습을 조명한다. 그러자 환자의 생과 사를 다루는 인간이자 의사란 양면성이 부딪치면서 존재론적인 질문들이 던져진다. ‘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 ‘의사인가 인간인가’, ‘의사로서의 선택인가 인간으로서의 선택인가’, ‘생명에 우선순위가 있나’ 등등 그 질문은 사뭇 진지하다. 그러나 자칫 무겁게 흐를 수 있는 드라마의 분위기는 정감 가는 캐릭터들이 엮어 가는 에피소드로 인해 경쾌해진다. ‘외과의사 봉달희’는 전문직 드라마가 결국엔 가야할 인간에 대한 이야기, 즉 본질에 접근하는 ‘본격 전문직 드라마’라 할만하다.

디테일을 통해 하는 현실이야기
이들 전문직 드라마들이 보여주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그 어떤 드라마보다 섬세해진 디테일이다. 이것은 과거 의사가운 입은 사람들의 멜로드라마였던 ‘무늬만 전문직 드라마’와 비교해서 말하는 그런 정도의 디테일이 아니다. 아예 알아먹기 힘들 정도의 전문용어들이 대사로 쏟아져 나오고 수술장면에 있어서는 실제 의사들이 참여해 리얼리티를 만들어낸다. 무엇보다도 그 에피소드에 있어서 병원이나 의사 같은 특정 상황 속에서 벌어질 수 있는 디테일들이 풍부하다. 이것은 새로운 전문분야의 재발견에 가까운 것이다. 생명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의사라는 성역의 이면을 훔쳐보는 것에 어찌 호기심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 놀라운 디테일이 말하려는 것은 그 전문직을 가진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의 이야기가 바로 사회에서 우리가 겪는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는 것. 결국 전문직 드라마는 그 복잡하고 다양한 디테일을 파고들지만, 그것을 통해 결국 우리 사회의 이야기를 다룬다. ‘하얀거탑’은 조직생활을 하는 모든 이들의 로망을 다루고 있고, ‘외과의사 봉달희’는 인간으로서 선택 앞에 고민에 빠진 의사를 다룬다. 그러니 전문직 드라마 속에서 발견하는 것은 ‘저네들의 세상’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디테일을 통해 보여주는 현실이야기. 이것이 전문직 드라마가 각광받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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