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 "나는 고장 나고 있어"

'천일의 약속'(사진출처:SBS)

두 여자가 운다. 한 여자는 갑자기 생긴 존재의 허기를 채우겠다는 듯, 한 바구니 사온 꽈배기, 도넛을 꾸역꾸역 입으로 밀어 넣으며 울고, 한 여자는 무언가 자신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을 모두 뱉어내겠다는 듯이 끊임없이 토해내며 눈물을 흘린다. 한 여자는 채우면서 울고 한 여자는 비우면서 운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눈물 흘리게 하는 걸까. 드라마 '천일의 약속'이 그려내는 기막힌 풍경이다.

존재의 허기를 느끼는 여자는 이서연(수애)이다. 그녀는 알츠하이머다. 그녀의 사라져가는 기억은 점점 자신의 삶을 갉아먹는다. 그녀는 그 떠나가는 기억을 부여잡으려 작가들 이름을 줄줄이 외우고 수첩에 빼곡하게 기억해야 할 것들을 적어 넣는다. 그런 그녀지만 떠나 보내야할 기억도 있다.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 박지형(김래원)이다. "당신의 삶까지 삼켜버릴 수는 없어." 그녀의 사라져가는 기억이 그의 삶마저 삼켜버리는 걸 원치 않기 때문이다.

속에 있는 것들을 모두 빼내려는 듯 토하고 또 토하는 여자는 노향기(정유미)다. 그녀는 아무런 삶의 질곡 없이 말끔한 인생을 살아왔다. 그 인생 위에 오롯이 박지형이라는 남자만을 주름으로 채워 넣은 채. 그녀의 삶의 기억은 온통 그 남자다. 그런데 그가 떠나려고 한다. 그가 원하는 것은 뭐든 해주는 것이 그녀가 하는 사랑의 방식인지라, 그녀는 그를 보내주려 한다. 그래서 자신 속에 선명히 남아있는 기억마저 토해내려 한다. 그럴수록 더 깊어지는 것이 기억의 주름이 남긴 상처일 것이지만.

'천일의 약속'은 두 여자가 보여주는 것처럼 우리네 삶에서 기억이 가진 이중성을 드러내는 드라마다. 우리는 기억하고 싶은 만큼 잊고 싶은 존재다. 기억은 달콤한 삶의 추억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지독한 고통의 악몽이 되기도 한다. 그것이 똑같은 사랑의 기억이라고 하더라도. 하지만 기억이란 놈은 불가항력적인 것이다. 사라져가는 기억이나 잊혀지지 않는 기억, 그 무엇도 우리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누구나 다 잊게 되고 누구나 다 잊지 못하게 된다.

상투적으로 들리겠지만 삶의 기억으로 남는 것은 결국 '사랑'이다. 그래서 '천일의 약속'은 그 상투적일 수 있는 사랑이야기를 다룬다. 하지만 사랑을 표피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라는 삶의 잣대로 바라본다는 것이 큰 차이다. 삶이 결국 하나의 짧은 기억에 불과한 것이라면, 그 기억을 누구와 함께 나누고 누구의 기억으로 채우며 누구의 기억 속에 남게 되는가는 실로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 결혼식을 이틀 앞두고 갑자기 파혼선언을 해버리는 남자 박지형을 이해할 수가 있다. 박지형의 선택은 결혼식이라는 그 짧은 순간을 염두에 두고 바라보면 양가 가족들이 입을 모아 말하듯 '미친 짓'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인생 전체를 두고 바라본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다. 자신의 삶의 기억일 수 있는 여자의 마지막 기억 속에 남고 싶고, 그녀의 마지막을 자신의 기억 속에 남기고 싶은 그 삶의 욕망.

'천일의 약속'은 제목처럼 시간(천일)과 기억(약속)에 관한 김수현 작가의 진중한 시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와 함께 피자를 먹고, 콜라를 마시고, 트림을 하며 밀어를 나누던 이서연의 그 일상적인 기억들은 지극히 소소한 것들이지만, 그녀의 기억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현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아련하고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한 장면으로 그려진다. 그녀의 직업이 책을 만드는 출판이라는 사실은 이 지극히 한 개인의 이야기를 우리네 삶의 이야기로 확장시킨다. 그 기억을 잡고 싶고 남기고 싶은 욕망. 책이라는 인간의 욕구.

"나는 고장 나고 있어." 그녀는 자신을 이렇게 말한다. 이미 '고장 난' 것도 아니고. 아직 멀쩡하지만 '고장 날' 것도 아닌, 현재 '고장 나고' 있는 상황. 이 한 줄의 대사는 우리네 삶을 그대로 드러내준다. 서연은 알츠하이머라는 특수한 상황을 통해 기억의 관점에서 이 '고장 나고' 있는 인생을 깨달았던 것뿐이다. 사실 그 누구도 '고장 나고' 있지 않은 인생은 없지 않은가. '천일의 약속'이 보여주려는 건 바로 그 '고장 나고' 있는 우리네 삶의 운명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삶을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을, 기억을, 추억을.


세종의 무엇이 그들을 날게 하는가

'뿌리깊은 나무'(사진출처:SBS)

사실 이건 대단한 오해다. 한석규는 지금껏 많은 작품을 통해 다양한 연기의 결을 보여 주었다. '쉬리' 같은 작품에서 액션을 보여줬다면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는 차분하고 잔잔하지만 그 밑에 출렁대는 내밀한 감정의 멜로를 보여줬고, '넘버3' 같은 작품에서는 한없이 껄렁껄렁한 삼류 깡패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음란서생' 같은 사극에서도 그의 진가는 그대로 드러났고 '이층의 악당' 같은 로맨틱 코미디에서도 그 존재감은 여전히 빛났다. 그런데 우리는 이상하게 한석규를 광고 속에 그 중후한 목소리로 기억하곤 한다. 이건 아마도 한석규의 TV출연이 많지 않은데다, 그가 여러 예능 프로그램에서의 성대모사의 대상으로서 소비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그런 일면적인 면만 갖고 있을 거라 생각한 한석규라는 배우가 '뿌리 깊은 나무'에서 세종 이도를 연기하는 모습에 대중들이 놀라는 건 당연한 일이다. 더욱이 이 작품의 세종은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 막연히 생각했던 그런 세종이 아니다. 아버지 태종 이방원(백윤식)의 밑에서 그 피의 집권을 바라보며 깊은 트라우마로 갖고 있는 왕이며, 그래서 태종과는 달리 백성 하나의 목숨에도 눈물을 흘리고 애통해하는 그런 왕이다.

게다가 때론 저잣거리 농담에서부터 욕을 툭툭 뱉어내기도 하고, 속으론 아파하면서 겉으론 웃으며 신하들 앞에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는 인물이며, 자신의 아픈 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겨우 나인 소이(신세경)에 불과할 정도로 외롭고 고독한 왕이다. 이런 복잡한 심사를 가진 역할을 제 옷 입은 듯 자연스럽게 소화해내는 일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한석규라는 배우가 우리 앞에 툭 불거져 나와 보이는 건 그 깊은 오해를 삽시간에 무너뜨리는 농익은 연기력과 세종이라는 섬세하고 입체적으로 잘 구축된 캐릭터가 만났기 때문이다.

이런 오해는 송중기도 마찬가지다. 꽃미남이라는 칭호의 대변자처럼 예쁘장한 얼굴은 어쩌면 송중기라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가능한 배우의 진면목을 가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트리플'의 지풍호라는 캐릭터에서도 그는 꽃미남의 이미지 속에 있었고, 그의 존재감을 한껏 높여준 '성균관스캔들'이라는 사극에서조차도 그는 꽃미남 선비에 갇혀 있었다. 그래서 송중기가 젊은 세종 이도의 역할을 한다고 했을 때 대중들이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다 여겼던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송중기는 '뿌리 깊은 나무'의 첫 회에 첫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부터 이런 꽃미남 이미지를 보기 좋게 부숴버렸다. 송중기는 아버지 태종의 말 한 마디에 친인척은 물론이고 자신의 장인까지 죽는 것을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세종의 깊은 트라우마를 연기해냈다. 동시에 어딘지 겉으론 유약해보이지만 내면 깊숙이 백성 하나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 만큼의 강인함 또한 보여주었다. "내가 조선의 왕이다! 감히 왕을 참칭하지 말라!"고 그가 아버지 태종에게 소리치는 장면은 그래서 송중기라는 유약해 보이는 꽃미남 배우가 껍질 하나를 벗어던지는 장면처럼 보여지기도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젊은 세종에서부터 나이 지긋한 세종의 두 역할에 걸쳐 송중기와 한석규 이 두 연기자를 다시 발견하게 된 이유는 도대체 뭘까. 그것은 아마도 이 작품이 가진 세종이라는 인물의 매력 덕분일 것이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왕이면서도 사실은 가장 몰랐던 왕, 세종을 성공적으로 그려냄으로서 결국 세종이란 왕을 재발견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니 그 캐릭터를 입은 송중기와 한석규 또한 그들이 가졌던 본래 연기자로서의 진면목을 드러내고 있는 것일 게다. 그들 역시 우리가 잘 알고 있었지만 사실은 잘 몰랐던 연기자들이 아닌가.


골방도 막을 수 없는 '1박2일'의 즐거움

'1박2일'(사진출처:KBS)

여행 가서 비오면 뭘 할까. 어디 가볼만한 곳이 있어도 돌아다니기 뭐 하고 그렇다고 방구석에만 콕 박혀 뒹굴자니 어딘지 허전하고. '1박2일'이 떠난 영월 가정마을의 하룻밤은 그 답을 알려준다. 떠나는 과정에서 정확한 시간에 도착하는 미션을 치른 것을 빼고, 가정마을 편은 그들이 머문 베이스캠프를 떠나지 않았다. 심지어 비가 추적추적 내리자 카메라가 머문 곳은 다섯 사람이 누우면 꽉 차는 작은 방이 전부였다. 여기서 과연 예능이 가능할까?

가정마을편은 적어도 '1박2일'이라면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한 회였다. 작은 방에서 갑자기 떠오른 이수근의 아이디어는 즉석에서 올림픽(?)을 연출하게 했다. 코끼리 코로 열 바퀴를 돈 후 벽에 만든 과녁에 검지로 인주를 찍는 이 기상천외한 경기는 좌중을 포복절도의 도가니로 빠뜨렸다. 비틀거리다 과녁에는 가지도 못한 채 넘어지고 쓰러지는 장면은 자연스럽게 몸 개그의 향연을 만들었고, 경기는 발가락으로 과녁을 찍는 것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 두 평 남짓한 작은 방에서 벌어진 게임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결과였다.

올림픽(?)이 끝나고 나자 이수근의 멤버들 행동관찰 내기가 이어졌다. 제작진이 바지에 커피를 쏟았을 때 김종민의 반응이 "괜찮아요"라는 걸 걸고 벌어진 내기에서 김종민은 거짓말처럼 "괜찮아요"를 반복했고, 음식을 먹는 장면을 보았을 때 3분 안에 "달라"고 할 거라는 은지원의 반응을 이수근은 기막히게 예견해서 내기에 이겼다. 사실 별거 아닌 내기지만 예견한 대로 딱딱 맞아 떨어지는 말과 행동은 충분히 재미를 주었다. 게다가 이를 '동물의 왕국'을 패러디해 연출해 넣자 효과는 만점이었다.

흥미로운 내기는 진한 페이소스를 남겼다. 즉 이 내기는 5년 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1박2일'을 해온 멤버들의 끈끈함을 말해주는 것이니 말이다. 이제 그들은 어떤 상황에 멤버들이 어떻게 반응을 보일 것인지까지 척척 알고 있는 사이다. 그러면서 이것은 김종민의 착한 심성이나 은지원의 초딩스러움이 진짜 리얼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몰래카메라이기도 하다. 물론 후에 자막으로 들어간 것이지만, 이수근의 야외취침을 걸고 한 이 내기는 '하룻밤쯤 걸 수 있는 그들의 애정'을 보여준 결과가 되었다.

이 작은 방에서의 '1박2일'의 절정은 기상미션에서 보여진 엄태웅의 반전이다. '제가 다 할게요'라는 메모를 갖고 있는 사람이 아침밥을 하는 미션에서 이승기는 메모를 은지원에게 주었고, 은지원은 이것을 이수근의 주머니에 넣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메모가 이승기의 주머니에 들어있었던 것. 이 기막힌 상황은 사건(?)을 오리무중으로 이끌었고 결과는 후에 촬영된 카메라를 되돌려본 데서 밝혀졌다. 엄태웅이 슬쩍 이수근의 주머니에서 메모를 빼내 이승기의 주머니에 넣었던 것. 이를 확인한 작가와 PD는 "소름이 돋는다"며 '유주얼 서스펙트'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작은 방에서 벌어진 '1박2일' 간의 에피소드지만 거기에는 포복절도의 몸 개그를 보여준 게임이 있었고, 훈훈한 관계를 재확인해준 관찰 카메라가 있었으며, 마지막 드라마틱한 반전을 만들어낸 엄태웅의 심리 스릴러(?)가 있었다. 그리고 이 각각의 에피소드들은 다섯 명의 캐릭터를 공고하게 만들었다. 거기에는 잠시도 쉬지 않고 아이디어로 웃음을 만들어내며 동생들을 생각하는 이수근의 마음이 있었고, 초딩 같은 천진함의 은지원, 바보스러울 정도로 착한 김종민, 막내로서 형들을 따르고 챙겨주면서도 노래할 때는 황제 같은 면모를 잃지 않는 이승기, 그리고 맏형으로서 때론 버럭 하고 때론 우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뭉스러운 면모까지 보여주는 엄태웅이 있었다.

작은 골방에서 이뤄진 '1박2일' 가정마을 편은, 그저 다섯 사람만 모여 있으면 그 곳이 어디라도(심지어 작은 골방이라도) 사실상 한 회 분의 방송 분량 정도는 충분히 뽑아낼 수 있는 이 예능 프로그램의 저력을 과시했다. 여행? 어디를 가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가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1박2일'은 그것을 이 작은 골방을 통해 보여주었다.


이정향 감독의 '오늘', 용서란 무엇인가

사진출처: 영화 '오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마이클 샌댈의 조금은 진지한 인문서적이 우리 사회를 뒤흔든 적이 있다. 물론 엄청나게 책이 팔린 것과 많이 읽힌 것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 사회에서 '정의'라는 문제에 대해 대중들이 그만큼 민감해하고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미술관 옆 동물원', '집으로...'의 이정향 감독이 들고 온 신작 '오늘'은 여러모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이렇게 묻고 있다. 정의는 무엇이고 또 용서란 무엇인가.

"용서하고 나니 편해?" 영화는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을 죽게 만든 소년을 용서한 다혜(송혜교)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녀는 정말 용서하고 나서 편해졌을까. 멀리서 바라보면 아름다워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보면 심지어 끔찍한 것이 삶이다. 용서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며 '멀리서 바라보는 삶'을 살던 다혜는 어느 날 자신이 용서한 소년이 누군가를 죽였다는 그 끔찍한 사실을 눈앞에 목도하게 된다. 그러자 자신의 편안함(?)이 사실은 자기 기만적인 위안에 불과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용서란 가해자가 진심으로 참회하고 사죄할 때 해줄 수 있는 일이지, 피해자가 저 혼자 용서한다는 것은 어쩌면 거짓이며, 나아가 정의의 시점으로 보면 또 다른 죄악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오늘'이 파고드는 건 바로 이 지점들이다. 끔찍한 사건을 당한 피해자에게 제대로 된 사죄도 없이 스스로 '용서'할 것을 종용하는 사회. 그래서 용서했으니 죄도 가볍게 사해주는 사회. 하지만 제대로 된 사죄 없이 용서받은 그들이 다시 죄를 짓게 되는 현실. 잘 살겠지 하며 용서해줬지만 살인을 저지르고 소년원에 들어간 소년을 찾아간 다혜는 '소년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피해자와의 대면조차 하지 못하게 하는 법을 맞닥뜨리게 된다. 이 즈음에서 정의는 애매해진다. 법은 피해자를 위한 것인가 가해자를 위한 것인가.

이 영화가 보여주려는 것은 사실 다혜가 극중 인물로 다큐멘터리를 찍는 감독이라는 장치 속에 들어있다. 이 액자구조는 어쩌면 다혜라는 가상의 주인공이 겪는 심경의 변화가 바로 이정향 감독 자신이 이 문제를 바라보는 시점의 변화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영화가 마치 심층다큐나 토론 프로그램처럼 여겨지는 건, 이 '피해자들의 고통스런 세계'를 감정적인 접근이 아니라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사회적인 맥락에서 바라보려는 감독의 노력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늘'이라는 영화가 건조하기만 한 영화라는 얘기는 아니다. 거기에는 이정향 감독 특유의 멜로적인 선이 들어가 있고, 가족적인 코드도 들어가 있다. 그래서 마치 멜로드라마와 다큐가 섞인 듯한 이 영화는 찡한 눈물과 우리의 이성을 두드리는 둔중한 질문이 공존한다.

하지만 이 '피해자들의 풍경'은 실로 처절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도 어려운데 그를 죽인 자를 용서한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일까. 하지만 자신에게 직접 찾아와 사죄도 하지 않은 그들을 세상은 모범수라는 이름으로 용서해준다. 피해자가 진정으로 용서하지 않은 자를 국가는 무슨 자격으로 용서하는 것일까. 다혜는 피해자들을 찾아가 용서의 모습을 찍으려 하지만, 피해자들은 거꾸로 용서할 수 없는 상황들을 늘어놓는다. 즉 다혜가 찍으러 다니는 인터뷰는 거꾸로 다혜에게 질문한다. '용서하고 나니 정말 편하냐'고.

이 영화는 피해자들이 겪는 고통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으로 이 질문에 대답한다. 그 '불편한 진실'을 관객들에게 끄집어냄으로써 '사과 없는 용서'라는 허울 좋은 세상의 밑그림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영화는 '오늘'이 바로 가해자들이 처참하게 빼앗은 피해자들의 미래라는 것을 아프게 말한다. 당신이 숨 쉬고 있는 그 오늘이 당신이 빼앗은 피해자들이 그토록 바라고 간절하게 여긴 그 시간들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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