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콘서트'(사진출처:KBS)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 생각일까. 함께 음식을 먹다가 마지막 하나가 남았을 때, 그들도 누가 그것을 먹어야 할지 고민할까. 누군가를 사귈 때 스킨십은 언제부터 해야 할까. 또 지하철에서 할머니와 임산부가 동시에 탔을 때 누구에게 자리를 양보해줘야 할지 그들도 애매해할까. 영화관에서 팔걸이는 어느 쪽으로 해야 할까....

어찌 보면 쓸데없는 고민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실상 현실에서 이런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애매할 때가 많다. 물론 그 남은 음식 하나를 누가 먹든, 팔걸이를 마음대로 한다고 '쇠고랑을 차거나 경찰이 출동하는' 건 아니다. 이건 몰라도 하등 사는데 지장 없는 소소한 일들이다. 그런데 궁금하다. 다른 사람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애매한 것을 정해주는 남자', 이른바 애정남은 바로 그 생각들을 보여준다. 어쩌면 좀스럽다고 여겨져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던 그 속내를 애정남이 끄집어내놓는 순간, 같은 생각을 했던 우리들의 웃음이 터져나온다. 밖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그 공감의 순간. "맞아 맞아"하는 끄덕거림과 함께 웃음으로 만들어지는 개그. 이른바 '공감 개그'인 셈이다.

사실 애정남이 제시하는 해법이 대단한 것은 아니다. 즉 예를 들어 마지막으로 하나 남은 음식은, 밑반찬일 경우 아무나 먹고(리필이 되기 때문에), 육류는 집게를 가진 사람이 먹으며(일한 사람이 먹는다), 나머지 기타 음식은 돈 내는 사람이 먹는다는 식의 답은 그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답이 아니다. 그것이 곤란하고 애매한 상황이라는 것을 똑같이 공감한다는 것 자체가 더 중요하다. 물론 정한 답에 살짝 사심이 섞인 메시지를 넣어주면 일종의 '인기발언'이 성립된다.

지난 추석 다음 아고라에 애정남이 올린 글에 대한 여성들의 엄청난 공감은 바로 그 '인기발언'의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명절 때 시댁에 들렀다 친정에 가는 애매한 시점에 대해서, "추석 당일 차례를 지내고 아침 먹고 설거지가 끝나는 순간 출발입니다잉"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아마도 모든 며느리들의 마음일 것이다. 물론 그는 시어머니에 대한 공감 포인트도 잊지 않는다. "잘 생각하세요. 시어머니들. 이게 지켜져야 따님도 빨리 볼 수 있는 겁니다잉." 이처럼 그들의 간지러운 부분을 살짝 긁어주었을 때, 일상 속에 묻어 놓았던 자잘한 삶의 간지러움은 시원해진다. 애정남이 특히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은 남녀를 비교했을 때 아직까지는 남성보다 여성들에게 일상의 가려운 부분이 더 많다는 반증일 것이다.

사실 '개그콘서트'에서 이러한 현실 공감을 바탕으로 하는 이른바 공감개그는 흔한 소재들이다. '두분토론'이나 '동혁이형' 같은 세태적이고 풍자적인 코너들은 '개그콘서트'만의 특징을 잘 보여 온 개그들이다. '애정남' 최효종 역시 과거부터 줄곧 공감개그를 선보인 전력이 있다. '독한 것들'이나 '최효종의 눈' 같은 코너들이 그렇다. 하지만 최근 들어 '개그콘서트'의 공감개그는 훨씬 더 강해졌고 많아졌다. 일상 속에서 만들어진 습관에 의해, 상황과 맞지 않는 부조리한 행동들을 보여줌으로써 웃게 만드는 '생활의 발견'이나, 그 부조리한 상황을 마치 심층 보도하듯 풀어내는 '불편한 진실'도 '애정남'과 마찬가지로 현실 공감을 바탕으로 하는 개그다.

하지만 이 '불편한 진실'이나 '생활의 발견' 같은 개그들과 '애정남'은 근본적으로 다른 지점이 있다. 그것은 상황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자세다. '생활의 발견'과 '불편한 진실'이 그 우스운 상황을 그저 보여주는 것이라면, '애정남'은 그 상황에서 해야 할 지침(?)을 제시해준다. 물론 애정남의 말대로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쇠고랑을 차지는' 않는 것이지만 '서로 지킴으로써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행동을 하자고 말한다. 이러한 행동강령을 부여했기 때문에 '애정남'은 좀 더 적극적으로 사회 일상 속에 존재하는 '애매한 상황'들에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 추석 시점에 맞춰 애정남이 아고라에 올린 글은 이런 적극적인 개그의 특성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굳이 지침 같은 건 필요 없어 보이는 '애정남'의 소재들이다. 그 소재들은 명절에 받은 문자에 답장을 보내야 할까, 결혼축의금은 도대체 얼마를 내야할까, 심지어 시식코너에서 몇 개까지 먹는 게 시식일까 같은 자잘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바로 이 중요하지 않게 취급된 자잘한 소재라는 것이 사회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크다. 그것들은 이른바 이 사회가 폼나게 전면에서 드러내는 거대담론에 의해 소외된 이야기들이라는 점이다. 그 거대담론을 이끌고 있는 건 누구인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힘 있는 이들이다. 서민들이 제아무리 바꾸려 해도 바뀌지 않는, 저들끼리 만들고 꾸려가는 거대담론이 주는 소외감은, 거꾸로 서민들로 하여금 일상적이고 자잘한 것들에 대한 애착을 갖게 만든다. 즉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거대한 것보다는 그래도 우리끼리 정하고 바꿀 수 있는 소소한 것들이 훨씬 마음이 간다는 얘기다. '애정남'이 제시하는 일종의 행동강령은 그래서 아무런 구속력이 없는 비정치적인 행위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행위 자체는 굉장히 정치적인 것이다. 이 자잘한 일상의 변화는 어쩌면 뜬구름 잡는 거대담론보다 훨씬 현실적으로 우리 사회를 아름답게(?) 바꿀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애정남'에 열광하는 사회의 이면에는 이 단단하게 바뀌지 않는 세상에 대한 소극적인 복수(?)가 들어있다. 그래서 이렇게 자잘하고 애매한 것들을 목숨 걸고 정해주려는 '애정남'은 우스우면서도 때론 처절하고 비애스럽게 보일 때조차 있다. 왜 그토록 작은 것들에 집착하는 것일까. "이거 안한다고 쇠고랑 안차요. 경찰 출동 안 해요. 그저 우리들만의 아름다운 약속이에요." 이 반복되는 얘기 속에는 짠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동지의식을 느끼게 되는 구석이 있다. '우리들만의'라는 내밀한 표현이 우리의 허전한 마음 한 구석을 채우는 건 그 때문일 게다. '애정남'은 거대담론으로 굴러가는 '그들만의' 세상 속에서 작지만 실제적인 '우리들만의' 작은 약속을 던져준다. 그 약속이 얼마나 적절하고 효과적인지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저 이 작은 세계를 함께 공유하고 공감한다는 것. 우리끼리 약속을 정한다는 것. 그것이 주는 위안은 결코 작지 않다.
(이 칼럼은 중앙선데이에 기고된 글입니다)


'슈스케3', 어디서 이런 보석들이...

'슈퍼스타K3'(사진출처:mnet)

정말 이들이 아마추어란 말인가. '슈퍼스타K3(이하 슈스케3)' 얘기다. 사실 노래 잘하는 친구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누군가의 어려운 노래를 곧잘 따라하고 자기 식으로 소화해내는 그런 가수 지망생들. 하지만 마치 태생이 가수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철저히 자기들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이들은 드물다. 자기 노래를 스스로 작곡 작사하고 자기 스타일을 만들어내고 노래에 맞는 안무까지 척척 연출해내는 이들은 심지어 프로의 세계에서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이런 이들을 우리는 가수라 부르기보다는 뮤지션, 혹은 아티스트라 부른다.

'슈스케3'가 발굴해낸 울랄라세션, 투개월, 버스커버스커가 그렇다. 지금껏 계속해서 슈퍼세이브(문자 투표와 상관없이 심사위원 최고점을 받은 이는 합격 되는 제도)로 경연을 통과한 울랄라세션은 최고의 엔터테이너로서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가창력은 기본으로 갖춘데다가 곡 해석력 또한 뛰어나고, 네 명이 만들어내는 하모니나 구성, 게다가 안무까지 뭐 하나 빠지는 데가 없다. '달의 몰락' 같은 곡에서는 애절함과 경쾌함을 잘 섞어놓고, 'Open arms'는 절절함을 그대로 잘 살려낸다. 세 번째 무대에서 부른 '미인'은 노래에 스타일, 입체적인 안무의 완벽한 조화를 보여주었다.

게다가 암 투병을 하는 임윤택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울랄라세션의 아우라가 되어주고 있다. 그 어떤 힘겨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음악에 대한 그들의 열정은 가수의 뛰어난 기교나 무대매너, 음악적 성취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덕목이 아닐 수 없다. 심사위원 이승철이 "말이 필요 없다. 음악에 대한 열정, 무대 위에서 투혼을 발휘하는 모습에 심사위원 모두 감사와 경의의 박수를 보낸다."고 말한 것이 전혀 과하게 느껴지지 않은 것은 그들의 무대가 실제로도 그만큼 빼어났기 때문이다.

투개월은 그 독특한 음색으로 벌써부터 대중들의 귀를 사로잡고 있다. 김예림은 한 번 들으면 잊혀지지 않는 매력적인 목소리 톤을 갖고 있는데다가 독특한 분위기와 출중한 외모가 덧붙여져 묘한 그녀만의 색깔이 만들어졌다. 이처럼 투개월은 김예림을 전면에 세워두는 듀오지만 그 뒤를 받쳐주는 도대윤 역시 반드시 필요한 존재다. 기타는 물론이고 김예림과 어우러지는 도대윤의 화음은 이들의 노래를 좀 더 입체적으로 만들어낸다. 대중들의 반응은 폭발적이다. 기성 가수라도 이 정도의 존재감을 갖기는 어렵지 않을까.

버스커버스커는 늘 지적되는 장범준의 가창력 부족에도 불구하고 사전 인기투표에서 늘 1위를 차지하는 저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것은 '슈스케3'가 이제 시즌을 거듭하면서 가창력 대결만이 아니라 좀 더 다채로운 스타일을 요구하고 또 수용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버스커버스커의 '동경소녀'는 경쾌한 리듬이 잘 살아있는, 이 팀 특유의 스타일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곡이다. 노래가 아니라 음악을 아는 이들은 이미 뮤지션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이미 울랄라세션이나 투개월, 버스커버스커의 노래는 각종 음원차트에서 기성 가수들의 곡을 넘어서고 있다.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딘지 찍어낸 듯한 기성 가수들의 노래가 기성복 같다면, 이들의 노래는 마치 핸드메이드로 만들어진 음악 같은 신선함을 갖고 있어 그만큼 주목되기 때문이다. 이미 기성가수들을 넘어서는 음악적인 존재감을 보여주는 이들을 어찌 아마추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슈스케3'가 발굴해낸 프로를 뛰어넘는 아마추어들은 이제 오디션 프로그램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가를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슈스케'를 포함한 초창기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가창력 하나에만 그토록 천착해왔다면, '슈스케3'로 진화된 오디션 프로그램은 이제 좀 더 갖춰진 음악성이나 독특한 개성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니 이제 오디션 프로그램은 어쩌면 스타를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스타를 발견해내는 과정이 되어가는 지도 모른다. 참으로 세상은 넓고 그 넓은 세상에 숨은 인재들도 많다. 다만 이제까지 그들이 설 무대가 없었을 뿐이다. 그러니 이렇게 발굴될 인재들은 어쩌면 앞으로의 가요계 판도를 좀 더 다채롭게 만들지 않을까. 이미 여러 음원차트가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그 변화는 이미 시작되고 있다.

지붕 뚫던 '하이킥', 바닥 뚫은 이유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사진출처:MBC)

먼저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이라는 이 시트콤의 화자가 이적이라는 점을 생각해보자. 그는 대장항문과 의사로 줄곧 항문만 바라보면서 살아온 인물. 이 설정은 이 시트콤의 냉소적이고 풍자적인 시각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때론 더럽고 때론 힘겨운 현실을 마치 항문을 들여다보듯 보고 있다는 얘기다. 얼마나 기가 막힌 시점인가! 아마도 작가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 항문을 바라보듯 지독한 구석이 있다고 여기는 것 같다.

극 초반에 주목된 두 캐릭터, 백진희와 안내상은 이 현실을 잘 말해주는 캐릭터다. 대학을 나와도 취직이 되지 않는 청년백수에, 등록금 때문에 진 빚에 허덕이며 고시원을 전전하는 백진희는 이 시대 암울한 청춘의 자화상이다. 그녀의 악몽 같은 현실은 꿈에서조차 잊혀지지 않는다. 꿈속에서 윤계상이 면접관으로 나와 그녀를 면접하는 '취집시험(취업+시집)'은 여성들에게 있어서 두 가지 로망인 일과 사랑, 그 무엇에서도(이 둘은 사실 연결되어 있다) 철저히 루저가 되어버린 청춘의 한 단상을 그려낸다.

백진희가 이 시대 청춘들의 힘겨운 자화상이라면, 안내상은 이 시대 가장들의 힘겨운 자화상이다. 친구의 야반도주로 하루아침에 파산해버린 그는 말 그대로 집도 절도 없는 홈리스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처남인 윤계상 집에 얹혀살면서도 여전히 반찬 투정을 하는 옛 삶에 머물러 있다. 그의 자화상이 비극적인 것은 그가 왜 파산했고 왜 그런 처지에 있게 되었느냐는 이유 때문이 아니다. 그의 비극은 그런 처지에 있으면서도 그가 아무런 변화나 노력을 시도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 이 시대에 갑자기 권위를 잃어버린 가장들처럼.

물론 그렇게 각박한 세상에 각박한 인물들만 있는 건 아니다. 박하선과 윤계상은 이 시트콤에서 천사표 캐릭터다. 그런데 이 시트콤이 바라보는 이들 천사표들은 착하기는 하지만, 그래서 늘 당하는 존재거나, 아예 현실을 잘 모르는 존재다. 박하선이 그 착한 캐릭터로 이 시트콤에서 웃음을 주는 방식은 한없이 망가지는 것이다. 그녀는 선의로 한 일이지만 세상은 그런 그녀를 눈물짓게 만든다. 윤계상은 물론 망가지는 캐릭터는 아니지만, 현실과 유리되어 있는 인물이다. 착하지만 그는 현실에 대한 실제적인 이해가 부족하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는 '웃으면서 회 뜨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이 각박한 현실이 그저 '착하게 산다'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캐릭터들이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이순재는 한방병원 원장이었고,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이순재는 학교에 급식을 납품하는 중소기업 사장이었다. 어느 정도 잘 사는 가족이 이 시트콤들의 배경이었던 것. 물론 힘겨운 현실을 반영한 캐릭터가 없었던 건 아니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는 빈둥빈둥 백수가 되어버린 가장 이준하(정준하)가 등장하고,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는 이순재네 집에 더부살이로 들어온 신세경과 신신애(서신애) 자매가 등장한다. 하지만 이들 두 시트콤에서는 이렇게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끌어안는 가족애 같은 것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하지만 애초부터 집을 잃고 길바닥에 나 앉게 된 안내상네 가족이나 청년 실업으로 오갈 데 없는 백진희를 안아주는 건 그런 가족이 아니다. 그들은 현실상황에 의해 파탄 나버린 채, 너무 착하거나 현실을 너무도 모르는 박하선 혹은 윤계상의 집에서 불안한 더부살이를 해나간다. '거침없이 하이킥'이나 '지붕 뚫고 하이킥'의 인물들이 그래도 여전히 성장을 꿈꾸는(때로는 신데렐라를) 상승하는 캐릭터들이었다면,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의 인물들은 현실에 짓눌려 한없이 바닥으로 하강하는 캐릭터들이다.

도대체 무엇이 달라진 걸까. 한때는 거침없었고, 한때는 지붕을 뚫던 '하이킥'은 왜 바닥을 뚫기 시작한 걸까. 빚쟁이들에게 몰려 우연히 발견된 지하 땅굴이라는 특이한 공간은 지금의 '하이킥'이 바라보는 지독한 현실을 그대로 상징한다. 기껏 탈출구라고 뚫은 것이 옆집 화장실이었다는 시퀀스 역시 이들의 우습지만 웃을 수만은 없는 상황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절망감뿐일까. 바로 그 바닥을 뚫고 들어간 지하 땅굴이 그동안 소통되지 않던 힘겨운 자들을 연결해주는 소통의 장이 되고, 때로는 '실크로드'가 되는 장면은 이 시트콤의 작은 희망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물론 그 짧은 다리의 역습은 현실적이지 않은 판타지가 되거나, 지극히 현실적인 비극이 될 수도 있겠지만.

'천 일', 얼마나 슬픈 얘길 하려는 걸까

'천일의 약속'(사진출처:SBS)

"스토리는 신파지만 이 대목은 들을 때마다 내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아." 나비부인의 한 대목을 들으며 서연(수애)은 지형(김래원)에게 말한다. "신파 싫어하잖아." 지형의 물음에 서연은 스스럼없이 자신의 삶이 사실은 신파였다고 한다. 이 짧은 대화는 이 '천일의 약속'이라는 드라마를 말하는 듯하다. 신파? 신파면 어떤가. 그것이 우리네 인생의 비의를 고스란히 보여줄 수 있다면.

'천일의 약속'에는 자주 인물들이 드라마에 나오는 상투적인 설정들을 언급한다. 서연은 지형과 감히(?) 결혼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 드라마에 상투적으로 등장하는 빈부 격차에 의한 부모들의 결혼 반대 같은 걸 찍고 싶지 않아서라고 한다. 향기(정유미)와의 결혼날짜가 정해지자 지형이 그의 어머니인 수정(김해숙)에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며 이미 양가가 정해놓은 결혼을 되돌릴 수 없느냐고 물을 때도 드라마 얘기가 나온다. 수정은 자신이 서연에게 직접 전화하는 그런 '막장'까지는 하게 하지 말라고 지형에게 당부한다.

'천일의 약속' 그 자체가 드라마지만 이렇게 드라마 얘기를 끌어옴으로써 하려는 얘기는 명백하다. 많은 사람들이 상투적이라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라고 하는 그 얘기가 때로는 우리 삶의 진실을 말해주기도 한다는 것. 실제로 이 드라마의 설정은 지극히 상투적이다. 다른 빈부의 삶을 살아온 남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그걸 반대하는 부모들. 게다가 치매라는 병까지. 만일 이것이 김수현 드라마가 아니었다면 그 설정만으로 단박에 또 불륜에 불치냐 하는 비판을 받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천일의 약속'은 그런 상투적인 드라마가 아니다. 오히려 그 삶의 상투성을 '기억'이라는 차원으로 다시 보게 함으로써 그 상투성을 극복하려는 드라마다. 서연이 치매를 앓게 된다는 설정은 그저 신파를 강화하기 위한 설정이 아니라, 우리에게 기억이란 무엇인가를 탐구하기 위한 것이다.

서연과 지형이 헤어지려 만난 이 드라마의 첫 번째 시퀀스는 지극히 상투적인 장면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우리 삶의 한 자락이 압축되어 있다 여겨지는 건 바로 이 기억의 문제를 끌어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네 삶이 그러하듯이 서로 만나러 달려가며 설레고, 늦게 왔다며 투정하고 싸우고, 그러다가 이 짧은 시간이 아까워 사랑하고 열정적으로 불타오르다가 결국 끝이라는 걸 알고는 괴로워한다. 헤어지면 바로 그 기억을 싹 잊어버리고 새 삶을 살겠다는 서연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오열하고 만다.

헤어지는 이들에게 기억이란 그처럼 천형 같은 것이다. 그것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그 손에 잡을 수 없는 기억이란 오히려 지워버리고픈 고통이 되곤 한다. 그런데 이제 점점 기억을 잃어가게 될 서연은 과연 이 아픈 기억을 지워버리려 할까. 아니면 아무리 아파도 그 기억의 한 자락이 사실 가녀리기 그지없는 우리네 삶의 본질이었다며 끝끝내 부여잡으려 할까. 추억과 기억의 차이는 그리움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라는 작중인물의 얘기처럼 그녀는 이 아픈 기억조차 추억으로 간직하려 할까.

우리 삶을 기억의 한 조각으로 포착하려는 '천일의 약속'은 그래서 그만큼 아프고 슬픈 이야기다. 기억은 삶이고 기억을 잃는 것은 죽음이다. 하지만 기억이란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타인과의 문제이기도 하다. 사라지지만 누군가 자신을 어떻게 기억하는가가 중요한 삶의 문제인 건 그 때문이다. 그러니 이 짧고 가녀린 삶에서 자신의 삶을 저당 잡힌 채(그녀는 동생을 엄마처럼 키웠고,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책을 쓰고 있다) 살아온 세월은 또 얼마나 슬픈 일인가.

"우리 5년 후에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10년 뒤에는 어떨까. 우리 마음 어떤 식으로 변해갈까. 너는 나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할까. 나는 너를 언제쯤이면 내려놓을 수 있을까. 내려놓을 수는 있을까." - 지형

"5년 후 쯤이면 아빠가 되어 있겠지. 10년 뒤에는 40대 아저씨가 되어 있겠지. 그 때쯤이면 오늘이 누렇게 흐릿해진 사진이 되어 있겠지.... 겹겹이 날들이 쌓여가고 당신한테 나는 공룡시대의 화석이 되겠지." - 서연

그래서 이제 그들은 그 마지막 기억의 한 자락을 남기기 위해 안간힘을 쓸 것이다. 사랑할 것이다. 미워할 것이다. 힘겨워할 것이고 아파하면서 행복해할 것이다. 우리네 기억 속에 남겨지는 그 모든 상투적인 것들이 사실은 우리네 삶이었다고 슬프게 긍정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긍정은 우리를 어쩌면 영원하게 만들어줄 지도 모른다. 불멸을 피할 수 없는 삶이지만 누군가의 기억을 통해 우리는 불멸하는 존재가 될 지도 모를 일이니. '천일의 약속'은 그 지독히도 슬픈 기억의 이야기를 꺼내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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