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된 욕망을 투사할 악역이 필요해

'로열 패밀리'(사진출처:MBC)

'짝패'의 막순(윤유선)은 자신을 겁탈해 아이까지 갖게 한 양반집 주인을 찾아가 그 임종을 함께 해준다. 물론 선한 의도는 없다. 유산 때문이다. 죽음에 임박한 사내를 종용해 막순은 5만 냥의 유산을 받아낸다. 이 과정에서 그 죽은 사내의 아들로 둔갑한 착한 천둥(천정명)은 막순의 쇼를 괴로워한다. 유산으로 벼락부자가 된 막순은 자신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순박한 쇠돌(정인기)에게 한 몫을 떼어주려 하지만 그는 "그런 것 필요없다"며 "너만 바라볼 수 있게 해달라"고 말한다.

서민들의 질박한 삶에 천착하는 '짝패'의 인물들은 대부분 선하다. 하지만 이 사극에서 막순만은 예외적인 존재다. 그녀는 적극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인물로 자신의 아들을 양반으로 둔갑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아들이 된 천둥을 이용해 그 아버지의 유산마저 노리는 인물이다. '짝패'는 이른바 착한 사극으로 긍정적인 인물들의 따뜻한 이야기들이 넘쳐나지만 그만큼 소소한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 강한 극성을 부여하는 인물은 역시 막순 같은 악역이다.

'마이더스'의 유인혜(김희애) 대표와 그 라이벌로 등장하는 유성준(윤제문) 역시 이 드라마의 극성을 만들어내는 인물들이다. 유인혜 대표는 겉으로는 멀쩡해보여도 속으로는 욕망을 위해 뭐든 할 수 있는 악녀다. 유성준은 뭐든 갖고 싶을 걸 갖지 못하면 미쳐버릴 것 같다고 말하는 인물이다. 그 머니 게임 틈바구니에 끼여 있는 김도현(장혁)은 상대적으로 약하게 느껴진다. 물론 이 드라마의 주제의식이자 착한 캐릭터인 이정연(이민정)은 너무 존재감이 약하다. 현실적인 욕망에서 벗어나 있는 듯한 느낌마저 준다.

악역의 존재감이 더 뚜렷하기 때문에 월화 드라마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주인공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천정명과 한지혜의 연기력 논란은 일정부분 어딘지 욕망이 거세된 캐릭터가 갖는 희미한 존재감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은 이민정이 연기하는 이정연이라는 캐릭터가 어딘지 답답하고 수동적으로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악역이 주목받는 상황은 수목극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로열 패밀리'가 인기를 끄는 이유는 그 주인공이 그저 착한 캐릭터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괴물 같은 야누스적 면모를 보이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욕망을 향해 질주하는 김인숙(염정아)이 뚜렷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반면, 한지훈(지성) 같은 캐릭터가 보조적인 느낌을 주는 건 그 욕망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욕망에 몸을 던지는 정가원의 여인들의 암투가 재미의 근간을 이룬다.

반면 시작부터 관심을 끌었으나 어딘지 소소한 느낌에 머물고 있는 '49일' 역시 이른바 착한 드라마다. 물론 신지현(남규리)이 사고 뒤 연인이라고 생각했던 민호(배수빈)와 친구라 여겼던 인정(서지혜)이 사실은 재산을 노리고 자신에게 접근했다는 실상이 드러나고 신지현은 분개하지만 이 드라마는 결과적으로 복수가 아니라 '진실된 눈물 세 방울'을 찾아가는 스토리를 갖고 있다. 주인공인 신지현의 현실적인 욕망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선한 인물들의 선한 이야기에 대중들은 더 이상 관심을 갖지 못하게 된 것일까. 어떤 강렬한 욕망을 드러내고 그것을 실현시켜 나가려 심지어는 어떤 선을 넘는 그런 캐릭터들에 대중들은 열광하고 있다. 반면 아무리 힘들어도 참고 견디며 착하게 살아가는 캐릭터들을 대중들은 비현실적으로 여긴다. 왜 그럴까. 드라마의 키가 악역으로 넘어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핵심은 '욕망'이다. 욕망 추구가 윤리나 정의의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는 얘기는 그만큼 욕망이 좌절되는 현실을 말해주기도 한다. 드라마를 통해서나마 비록 탈선한다고 하더라도 그 욕망의 질주를 해보고 싶은 욕구.

특이한 점은 이 악역들에 단연 악녀들이 부쩍 눈에 띈다는 점이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바락바락 소리 지르고 심지어 속내를 숨긴 채 십여 년을 칼을 갈고 욕망을 쟁취하기 위해서 누군가를 서슴지 않고 밟고 올라서는 그 악녀들은 지금 대중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 풍경에서 엿보이는 것은 현실에서 겪고 있는 여성들(로 대변되는 약자들)의 좌절된 욕망이다. 착하게 모든 걸 감내하고 견디는 삶이 더 이상 현실적인 보상이나 혜택으로 돌아오지 않는 현실. 그 누가 이들 악역에 매료되는 대중들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그녀는 과거를 극복할 수 있을까

'로열 패밀리'(사진출처:MBC)

거침없이 질주하던 '로열 패밀리'의 김인숙(염정아)은 과거에 발목을 붙잡히고 있다. JK클럽의 사장으로 취임하는 그 순간, 그녀 앞에 그 숨기고 싶은 과거처럼 죠니가 등장한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JK그룹을 손아귀에 쥐려는 그녀는 이제 정가원 사람들과의 경쟁을 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아킬레스건인 과거를 은폐해야 한다.

김인숙의 과거가 전면에 조금씩 드러나면서 '로열 패밀리'의 스토리는 국면 전환을 했다. 재벌가에서 핍박받으며 '저거'로 불리던 며느리 K가 남편이 죽은 후, 자신의 입지를 세우고 김인숙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서는 그 상승의 스토리가 전면을 채웠다면, 이제부터는 그 상승에 제동을 거는 과거들과의 사투가 벌어지고 있다.

김인숙의 욕망의 질주에 쾌감을 느끼며 동승했던 시청자분들이라면 이 변화가 마뜩찮게 여겨질 수도 있다. 드라마가 플래시백을 타고 자꾸 과거로 빠져들고, 점점 미스테리에 천착할수록 질주감은 점점 떨어지기 마련이다. 드라마의 속도는 오히려 더 빨라졌지만, 김인숙이라는 캐릭터가 펼쳐나가는 그 욕망의 속도는 과거라는 제동장치에 의해 느려졌다.

시청률이 떨어지는 건 당연한 결과다. 드라마의 속성상 미스테리와 반전에 빠져들기 시작하면 새로운 시청자층의 유입을 기대하기가 쉽지 않다. 드라마 전편의 이야기들을 온전히 이해해야 그 미스테리와 반전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 '로열 패밀리'를 보는 시청자라면 사실 짤막한 플래시백으로 많은 숨겨진 과거를 유추해나가는 이 드라마의 스토리가 이해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당연한 시청률 하락을 예상하면서도 굳이 과거의 이야기로 현재의 발목을 잡았을까. 물론 이 죠니의 의문사에 얽힌 이야기는 본래 이 드라마의 원작인 '인간의 증명'의 첫 시작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김인숙의 과거사가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 드라마가 그려내는 세계는 '로열 패밀리'라는 태생적으로 규정되어 있어 좀체 보통 사람이 뚫고 들어갈 수 없는 혈연집단 속으로 어떻게든 들어가 제 입지를 세우려는 김인숙이라는 캐릭터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

김인숙은 정가원에서 '저거'로 불리는 K로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지만 자신의 능력만으로 태생적인 한계를 넘어서려는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상류층에의 편입 혹은 그들에 대한 복수. 괴물 같은 이중성을 보이며 김인숙이 K가 아닌 인간임을 그들에 의해 인정받으려 하지만, 결국 태생이라 불리는 과거가 그녀의 앞을 막아서는 것이다. 그녀는 과연 이 과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흥미로운 것은 그 과정에서 김인숙 역시 점점 정가원 사람들처럼 되어간다는 점이다. 흔한 말로 '괴물과 싸우면서 가장 조심해야 될 것은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이야기. 현재를 발목 잡는 과거는,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지금 현재가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김인숙의 이 이야기는 그래서 태생적으로 규정되고 나눠지는 운명 앞에서 그것을 거부하고 새로운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물론 그 과거가 현재의 발목을 잡고, 그래서 드라마에 있어서도 현재의 역동성을 플래시백이 가로막아 시청률이 떨어지고 있지만, '로열 패밀리'의 이런 행보는 작품의 완결성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김인숙 그녀는 과연 이 과거와 현재가 벌이는 운명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그래서 어떤 식으로 자신이 인간임을 증명할 수 있을까. 미스테리보다 더 흥미로운 부분이다.


'강심장'은 귀가 없고 '승승장구'는 입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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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심장'(사진출처:SBS)

'강심장'은 화려하다. 일단 MC가 강호동과 이승기다. 누가 뭐래도 현재 대세임에는 틀림없다. 여기에 매번 달라지는 게스트들이 10여 명에 달하고, 이른바 바람잡이처럼 게스트 속에 앉아 추임새를 넣거나 이야기를 들춰내는 역할을 하는 고정 출연자도 이특, 신동, 김영철, 김효진, 정주리 등 다수다. 게다가 집단으로 출연해 이른바 토크 배틀을 하기 때문에 이야기의 수위도 상당히 높다. 또 중간 중간에는 출연진들이 보여주는 춤과 끼의 경연도 곁들여진다.

반면 '승승장구'는 '강심장'과 비교하면 밋밋하다. 최근 제목에서 김승우라는 이름을 떼고 형식에도 변화를 주었지만 이 변화된 형식은 과거의 것들, 예를 들면 '우리 빨리 물어'나 '우리 지금 만나'와 비교해보면 오히려 밋밋한 것들이다. 스타의 특별한 인생을 담은 단어를 통해 이야기를 나누는 '당신의 사전'이나 궁금증에 대한 네티즌들의 댓글을 읽는 '당신은 왜' 같은 코너는 굳이 형식이라고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미미한 것들이다.

사실 겉으로만 보면 단연 화려한 '강심장'이 주목된다. 실제로 시청률에 있어서도 '강심장'이 늘 '승승장구'를 앞서있다. 물론 최근 들어 그 격차는 많이 줄었다. 20% 가까운 시청률을 기록하던 '강심장'이 10%대 초반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고, '승승장구'는 게스트에 따라 진폭은 있지만 거의 10% 시청률에 근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청률은 '강심장'이 앞서 있지만 호감도 측면에서 보면 '승승장구'의 선전이 눈에 띈다. '강심장'이 정체된 느낌을 주는 반면, '승승장구'는 조용하지만 시청자들의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왜 시청률과 호감도가 비례하지 않고 차이를 보이는 것일까.

'강심장'의 매력은 그 '말하는 입'에 있다. 그것은 바로 방송 후 쏟아지는 기사들 같은 화제성으로 가늠할 수 있다. '누가 어떤 이야기를 했다더라'는 기사들은 실제로도 꽤 희소성 있는 토크들인 경우가 많다. 토크 경쟁이 과열되는 경우도 있지만, 바로 이런 장치 덕분에 평상시에는 듣기 힘들었던 연예인들의 뒷얘기가 술술 풀어져 나오게 되는 건 '강심장'의 강점이다. 여기에 강호동은 특유의 순발력으로 토크 밀당을 하며 게스트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말 그대로 쏙쏙 뽑아 먹는다.

하지만 바로 이런 출연진들의 입담이 마치 경연장처럼 펼쳐지는 형식은 프로그램을 피로하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저마다 무기가 될 수 있는 강한 이야기 하나쯤은 속에 품고 있기 마련인 그들은 뭔가 주목받기 위해 자신은 물론이고 타인의 사생활까지 드러낼 수 있는 쇼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있다. 대개의 집단 토크쇼들이 그러하듯이 여러 명이 앉아있어 마치 진열대 위의 상품처럼 보여지는 게스트들의 모습은 토크쇼가 이른바 '대화'의 목적을 갖고 있다고 볼 때, 어딘지 부자연스럽게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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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승장구'(사진출처:KBS)

'강심장'의 토크가 인공적인 느낌이 많이 드는 것은 이 형식의 부자연스러움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은 모두 진열대 같은 스튜디오 공간에 앉아 앞을 보고 있고 저마다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보여지는 리액션은 한 프레임에 들어오기보다는 편집된 형태로 보여진다. 편집된 리액션 영상의 인위적인 개입은 물론 짧은 순간이지만 대화로서는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주게 된다. 이것은 사실 대부분의 집단 토크쇼들이 갖는 특징이기도 하다. 집단 토크쇼는 토크쇼라고 불리지만 사실은 버라이어티쇼에 가깝다. 토크보다는 쇼에 더 집중한다는 얘기다.

'강심장'이 입이라면, '승승장구'는 귀다. '승승장구' 특유의 편안한 분위기는 거기 앉아 있는 MC들의 경청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이경규가 출연해 MC들을 일일이 거론하며 각자의 단점들을 지적했던 것처럼, 이들은 뭔가 특별한 끼나 순발력을 보여주지 못한다. 하지만 '승승장구'의 MC들은 이경규의 지적을 자연스럽게 끌어낼 정도로 게스트의 이야기를 들어줄 줄 안다. 무언가 제동을 걸지 않고 마음껏 얘기하게 만드는 그 분위기만큼은 '강심장'에 없는 '승승장구'만의 미덕인 셈이다. 심지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있는 듯한 MC들은 그러나 그 충실히 귀가 되는 자세를 통해 게스트의 자연스러운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이것은 사실 토크쇼의 본질에 가까운 모습이다.

'승승장구'의 형식이 밋밋하고 시청률도 떨어지지만 호감을 갖게 만드는 이유가 바로 이 '들어주는 귀'에 있다. 한편 '강심장'이 어딘지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면서도 자꾸 보게 만드는 이유는 바로 그 '말하는 입'에 있다. 이것을 거꾸로 말하면 '승승장구'는 입이 없고(?), '강심장'은 귀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같은 시간대의 토크쇼지만 너무나 다른 성향을 보이는 '강심장'과 '승승장구'. 그것이 그 프로그램만의 특성이 되겠지만, 어떤 면으로 보면 상대방의 장점을 눈여겨볼 필요도 있다고 여겨진다.

히틀러와 라디오로 한 판 붙은 말더듬이 왕, '킹스 스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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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 스피치'

말더듬이가 연설을 했다. 만일 이런 스토리라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말더듬이가 한 국가의 왕이라면? 흥미를 느낄만하지만 그다지 확 끌만한 매력적인 스토리라고 말하기는 그렇다. 하지만 그 말더듬이 왕이 전쟁을 맞아 라디오로 대국민 연설을 해야 한다면? 이만큼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없을 듯하다. 말이 가진 힘이 라디오라는 매체를 통해 증폭되기 때문이다.

이미 많은 히틀러를 다룬 저술들이 말해주듯이 라디오는 나치즘을 말해주는 가장 대표적인 매체다. 만일 라디오가 없었다면 히틀러의 나치즘도 없었을 것이라 말해질 정도로. 라디오는 전형적인 일방향적인 매체다. 한쪽에서만 말을 한다. 그것은 당연히 듣는 다수를 상정한다. 한쪽이 입이면 다른 한쪽은 무수히 많은 귀가 있다. 선전도구로서 히틀러가 이만한 도구가 없다고 여긴 건 당연한 일이었을 게다.

게다가 라디오가 사용하는 청각이라는 감각은 시각보다 훨씬 강력하다. 본다는 행위는 능동적인 주의집중을 더 필요로 하지만, 듣는다는 건 굳이 집중하지 않아도 그 메시지가 전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 말이 가진 청각적인 특징은 종교적인 힘으로까지 발휘되기도 한다. '성서'에 그토록 많은 메시지들을 우리는 '말씀'의 형태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가.

'킹스 스피치'는 바로 이 라디오라는 매체가 말을 만나던 그 시대에 벌어지는 정치적인 변화의 상황들을 절묘하게 포착해낸다. 앨버트 왕자를 차기 왕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말더듬이 때문에 고민에 빠진 영국의 왕 조지 5세는 그에게 시대가 바뀌었다고 말한다. 이제 왕들은 국민들을 이끌기 위해 전장에 나가는 것보다 라디오 앞에서 연기를 해야 한다고. 앨버트 왕자의 말더듬이를 고치는 인물이 학위나 자격을 가지지 못한 연기자인 로그(제프리 러쉬)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왕이 연기를 해야 하는 시대. 미디어 정치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조지 6세가 된 앨버트 왕자가 히틀러의 대중을 휘어잡는 연설을 보면서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말은 청산유수네"라고 하는 말은 그 라디오라는 매체가 가진 힘을 이제 앨버트가 인정하면서 거기에 맞서 말로서 승부해야 될 시점이 다가온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영화는 이 라디오라는 매체에 대한 흥미로운 관점들을 보여주고 있지만, 또한 앨버트가 말더듬이가 된 내적인 문제들, 즉 왕실의 억압을 벗어나는 그 성장의 과정을 담아냄으로서 스토리에 힘을 부여한다. 누구에게도 밝히지 못하는 그 내면을 평민인 로그에게 차츰 열어가는 그 치유의 과정은 두 사람이 친구가 되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데 조지 6세가 말더듬이를 극복하고 연설을 하는 그 장면이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단지 그 개인적인 성장이나 극복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여기에는 히틀러로 대변되는 라디오 독재에 맞서는 자가 다름 아닌 말더듬이 왕이라는 사실이 숨겨져 있다. 연설문 내용은 통상적인 것일 수 있겠지만, 영화는 그 연설문의 한 줄 한 줄을 읽어가는 과정을 마치 말더듬이 왕이 벌이는 힘겨운 전투의 한 장면처럼 그려놓는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조지 6세 앞에 서 있는 로그라는 평민의 존재다. 라디오라는 매체가 가진 힘은 그 후에도 루즈벨트에 의해 활용된 적이 있었고, 그로부터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선전에 악용될 소지가 다분하다. 굳이 맥루언의 '미디어는 메시지'라는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것은 라디오라는 매체의 속성 자체(일방향적, 청각적)가 가진 운명이다. '킹스 스피치'에서 히틀러와 다르게 조지 6세의 라디오 활용이 그려진 것은 거기 로그가 앞에 서 있기 때문이었다. 로그는 조지 6세가 연설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렇게 말한다. "저를 보고 얘기하는 것처럼" 얘기하라고. 즉 친구로 상정되는 듣는 대상이 서 있었기 때문에 같은 국민들의 눈높이에서 조지 6세는 진심을 담아 연설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물론 영화는 낭만적이다. 로그와 조지 6세는 그 후로도 친구처럼 나머지 생을 지냈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라디오 권력자들이 조지 6세처럼 로그 같은 친구가 있는 건 아닐 것이다. 물론 매체는 또 변화를 겪었다. 그리고 이른바 미디어 정치 시대는 활짝 열렸다. 이미 라디오의 그 일방향적 속성은 인터넷의 쌍방향과 만나고 SNS와 연결되어 어느 쪽으로든 정보가 흘러가는 시대다. 따라서 이 시대에 라디오 같은 미디어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겠다면, 이제 말더듬이 같은 외형적 장애를 극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해진 건 그 말이 갖는 진심일 것이다. 과연 지금 그 진심은 우리 대중들에게 닿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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