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조의 여왕'이 내조한 그들은?

취업의 벽을 간신히 통과해 겨우겨우 조직에 적응해나가고 있는 신입사원 달수씨(오지호),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다 했지만 결국 팽 당한 부장님 준혁씨(최철호), 모든 걸 다 가진 줄 알았지만 정작 자기 행복 한 자락 쥐지 못하고 살아온 사장님 태봉씨(윤상현). 드라마 '내조의 여왕'이 내조한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우리 시대 남성들의 한 전형을 만날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여도 안을 들여다보면 조직사회 속에서 받은 상처들로 가득하다. 어딘지 부족해보여서일까. 그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내조하고픈 마음이 소록소록 돋는 이들의 진짜 매력은 무엇일까. 그들이 표상하는 우리 시대 남성들의 얼굴을 들여다보자.

사회성 부족 신입사원 달수씨, 그 순수함의 양면성
온달수라는 이름은 온달과 백수의 합성어처럼 읽힌다. 취직을 못해 방구석을 전전하지만 좋은 아내를 얻어 그럭저럭 살아가는 모습이 그렇다. 그는 순진하게도 가난해도 사랑 하나만 가지면 충분히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믿어왔다. 또 직장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 갖은 아양 다 떨어가며, 손금이 없어져라 손바닥 비벼대지 않아도 실력 하나로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고 믿어왔다. 하지만 웬걸? 세상은 자신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움직인다. 능력 없어도 줄만 잘 서고 아부 잘 떨면 승진하고, 행복도 돈이 있어야 얻을 수 있는 게 세상이다.

'내조의 여왕'의 온달수는 바로 이 갓 사회에 나와 아직 때가 덜 묻은 새내기 샐러리맨의 자화상을 담고 있다. 순수함이 여전히 남아있지만 사회는 조금씩 그 순수함을 어리석은 것으로 치부하고, 사회적응이라는 이름으로 때를 묻힌다. 어딘지 가볍고 비굴해 보이는 선배사원들의 패배주의적인 적응기를 영웅담처럼 들어가며, 자신의 직장 내에서의 롤 모델을 찾게 된다. 그 모델은 당장의 눈앞에 가장 높은 존재인 한준혁 부장이다. 자신이 성공하면 앞으로 서 있게 될 그 모습. 하지만 온달수의 눈에도 아니 시청자의 눈에도 그 한준혁의 모습은 어딘지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조직에만 몰두하는 준혁씨, 그 치열함의 양면성
조직에서 초고속승진의 신화로 불리는 한준혁은 성공하기 위해 가정도 뒤로 접어 둔 채 앞만 보고 달려왔다. 자신의 성공 줄을 쥐고 있는 직장 상사를 위해 헌신해온 그는 상사의 정치적인 선택을 위해 동료를 짓밟고 회사의 이익을 저버리는 행위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다. 자신을 키워주는 건 회사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상사이기 때문. 그렇게 치열하게 살면 성공이 손아귀에 들어올 줄 알았다. 하지만 웬걸? 그토록 믿었던 직장상사는 어느 순간 쓸모없어진 자신을 가차 없이 내버린다. 뒤돌아보니 남은 건 피폐해진 가정뿐이다.

'내조의 여왕'의 한준혁은 치열하게 성공을 향해 달려왔지만 그 끝자락에서 IMF를 맞고 어이없게 퇴출당한 우리네 중년들을 닮았다. 그를 그 자리까지 이끌어준 것이 자신의 능력과 김홍식 이사(김창완)같은 회사에서의 줄 때문이라 생각했던 것은 이즈음 깨져버린다. 그리고 돌아보면 거기 자기 한 사람을 위해 똑같이 치열한 삶을 산 아내 양봉순(이혜영)이 있다. 지독히도 성공만을 바라보며 살았고, 그토록 자신을 지지해줄 것이라 믿어왔던 조직은 그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끝까지 남아준 것은 가족들뿐이다.

다 가진 것 같던 태봉씨, 그 물질적 풍요로움의 양면성
반면 조직 내에서 사실 상의 모든 권력을 손에 틀어쥐고 있는 허태준 사장(일명 태봉씨)은 모든 걸 다 가진 것 같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손에 쥔 것이 없는 인물이다. 경제적 원칙(?)에 따라 사랑 없는 결혼을 했고, 회사 바깥으로만 나돌았다. 무식해보이고 어딘지 허점이 많아 보이는 천지애(김남주)가 보여주는 가식 없는 모습에 마음이 끌린 건 아마도 그 모든 것이 가짜 같은 물질적 풍요로움의 세계 속에서 그것이 진짜 사람 냄새라고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물론 판타지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지만, 누구에게도 진심으로 내조 받지 못하면서도 숨어서 천지애의 수호천사가 되는 허태준 사장은 어찌 보면 이 드라마에서 가장 외로운 인물처럼 보인다. 게다가 감상에 빠져있을 때, 사장이라는 자리는 늘 그 자리를 노리는 자들로 인해 위태로워지기 마련이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이 가져온 위기 앞에서 그는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의 믿음을 저버리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을 떠올린다. 사람 냄새는 취하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저 스스로 그런 행동을 할 때 얻어지는 것이란 걸 이제야 그는 알아챈 듯하다.

달수씨, 준혁씨, 태봉씨.(그리고 이들과 정확히 짝패를 이루는 나머지 반쪽인 천지애, 양봉순, 은소현(선우선).) 그들이 이 드라마를 통해 그려내는 풍경에는 현재 우리네 조직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자화상이 담겨 있다. 아마도 이 수직적인 체계 속에 놓여있는 이들이 점차 경쟁자에서 동지로 바뀌어가는 것을 목격했다면 이 드라마가 보내는 우리네 사회의 남성들(여성들)에 대한 내조의 마음을 본 때문일 것이다. '내조의 여왕'이 내조한 그들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들이다.

'찬란한 유산', 우리 사회의 핏줄의식을 건드리다

"돈 안준다고 사랑하지 않는 건 아냐." 진성식품 대표이사이자 환(이승기)의 조모인 장숙자(반효정) 여사가 며느리와 손녀딸을 앞에 앉혀놓고 하는 이 말은 드라마 '찬란한 유산'의 핵심적인 키워드다. 이 말은 '유산'이라는 말과 어울려 오히려 "사랑하려면 돈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만큼 '찬란한 유산'이 다루는 이야기는 고전적이다. 그것은 저 찰스 디킨즈의 '위대한 유산'에서부터 시대를 거듭해 전해져 온 그 고전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그 메시지는 '진정한 유산이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전혀 새롭지 않은 메시지가 가진 고전적인 힘은 여전히 유효하다. 과거나 지금이나 태생, 핏줄로 이어져온 부와 가난의 세습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유산'을 염두에 두고 얘기한다면 가난을 유산 받은 이는 가난하고, 부를 유산 받은 이는 부유하다는 것은 시대의 흐름과 상관없이 흘러온 대체적인 정서다. 그러니 이를 뒤집어 버리는 드라마가 어찌 통쾌하지 않을까. '찬란한 유산'은 그 부와 가난의 태생적인 고리를 끊어버리는 인생유전의 매력적인 이야기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찬란한 유산'은 이처럼 그 고전적인 소재 선택에서 이미 반 이상의 성공을 일구었다고 할 수 있는 드라마다. 하지만 고전적인 스토리는 잘못된 해석과 진행을 만나면 식상한 얘기가 되고 만다. 따라서 '찬란한 유산'이 8회 만에 이미 30%에 육박하는 괴력적인 시청률을 기록한 진짜 이유는 바로 이 소재 이외의 요소들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 첫 번째는 이 드라마가 '위대한 유산'이 가진 고전적 스토리를 우리 식 버전으로 잘 녹여낸 것이다. 이 재벌집의 근간이 설렁탕집이라는 설정은 흥미롭다. 흔히들 욕쟁이 할머니가 고집스레 음식 맛을 고수하며 일궈낸 우리 식의 성공신화가 그 밑바탕에는 깔려 있다. 설렁탕집의 풍경은 여타의 재벌가를 다루는 드라마가 그렇듯이 펜대만 굴리는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거기에는 여전히 육체적인 노동이 주는 땀과 눈물이 배어있다.

설렁탕집은 장숙자라는 할머니의 인생관 자체가 스며있는 공간으로서, 그것을 싫어하면서도 거기서 벌어들이는 돈만을 바라는 가족들과 대조를 이룬다. 하루아침에 모든 지원을 끊어버린 장숙자 여사에 의해 일을 해야만 하는 가족들이 설렁탕집에서 무를 썰고 서빙을 하는 모습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육체노동 속에서 매일을 살아가는 서민들의 속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구석이 있다. 게다가 이 설렁탕집으로 대변되며 부딪치는 할머니와 자식들의 인생관에는 한때 가업을 이루었지만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는 어른들의 정서 또한 스며있다.

하지만 고전적 이야기가 우리 식 버전으로 토착화된 이 드라마의 진짜 성공 이유는 그 진행의 묘미에 있다. 이 드라마는 드라마로서 가질 수 있는 대부분의 감정들을 거의 모두 껴안고 있다. 이 드라마가 웃기다가도 울리고 한편으로는 자극적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먹먹함을 줄 수 있는 것은 다채로운 캐릭터들을 스토리 진행 위에 잘 세워놓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부모가 자기 친 핏줄이 아니라고 자식을 내치는 이 비정하고 자극적인 이야기는 그 모든 절망적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밝게 살아가는 따뜻한 이야기와 균형을 이룬다. 이로써 적절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잔잔하고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주는 울림이 가능해진다.

모든 유산을 빼앗겼지만 '착한 심성'이라는 빼앗길 수 없는 유산을 가졌기에 성공하는 은성(한효주)의 인생유전은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보편적인 정서를 깔고 있지만 현실은 정반대인 경우가 많다. 현실과 보편적 정서 사이의 이 거리감(긴장감)은 이 드라마가 가진 공감의 힘을 증폭시키는 요인이다. 유산의 문제는 그만큼 가족(핏줄)에 집착적인 우리네 사회가 가진 딜레마이자 아킬레스건에 해당한다. '찬란한 유산'은 그 아킬레스건을 판타지로 부여잡고 고전과 현실을 연결시킨 드라마다.

굶겨서 웃기는 시대, 먹여서 웃긴 '무한도전' 그 의미

리얼 버라이어티쇼에서 가장 중요하고 효과적인 리얼리티의 재료는? 바로 음식이다. '무한도전'은 일찍이 이 음식이 주는 식욕과 굶주림 사이에서 리얼리티를 포착해 큰 웃음을 주었다. '1박2일'의 복불복에서 가장 많이 쓰인 조건은 먹음직한 음식 앞에서 굶는 것이었고, '패밀리가 떴다'는 프로그램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음식을 만들어먹는데 쓴다. 웃음의 포인트도 모두 이 음식과 관련된 것들이 가장 크다. 아무리 설정과 연기를 한다 해도 원초적인 본능을 자극하는 음식 앞에서는 리얼한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런데 주로 음식을 활용해 웃음을 주는 방식은 굶기는 쪽이 많았다. 이유는 아마도 여러 가지일 것이다. 과거 '무리한 도전' 시절, 정준하가 우동을 몇 그릇씩 먹어야 하는 미션도 있었지만 배부름이 주는 리얼리티는 어딘지 거북한 면이 있다. 굶주림의 정서가 주는 공감대가 서민들의 정서와 맞닿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배고픔이 주는 웃음은 풍요의 시대의 정반대 그림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더 큰 웃음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한도전-박명수의 기습공격'편이 선택한 것은 굶주림이 아니라 오히려 먹여서 웃기는 쪽이었다. '서민 경제 살리기'라는 기치를 내건 박명수와 무한도전 멤버들이 기습 공격한 것은 불황에 힘겨워하는 치킨집과 삼겹살집. 불황으로 늘어난 주름과 한숨을 한 방에 날려줄 프로젝트로서 최고 매상을 올려주기 위해 유도부원들과 축구부원들 그리고 개그맨들이 일정 매출 이상 음식을 먹는 미션을 수행했다.

그저 음식점을 찾아가 먹는다면 말 그대로 '서민 경제 살리기' 이벤트 프로그램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한도전'은 그 상황 자체를 웃음의 코드와 연결시킴으로써 리얼 버라이어티 쇼의 진수를 선보였다. 군사들을 출전시켜 전쟁을 치르는 설정극을 음식 먹어치우기와 연결시켰던 것. 미션을 실패하면 음식 값을 치러줘야 하는 박명수 장군(?)의 진두지휘 하에 음식점에 투입된 군사들(?)은 일사분란하게 치킨과 삼겹살을 먹어 치웠다. 설정극을 차용하자 이 단순할 수 있는 미션은, 배부름에 힘겨워하는 군사들을 독려하고 때때로 무와 음료수를 보급(?)해주는 장면들로 전화되면서 버라이어티한 웃음을 만들어냈다.

이것은 과거 정준하가 우동을 몇 그릇씩 먹던 '무리한 도전'이 주던 거북한 리얼리티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그것은 이 '많이 먹는 미션'이 '서민 경제 살리기'라는 의미를 만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많이 먹는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했을 때는 그 도전 자체가 무식하고 거북한 일이 되지만, 그것이 누군가를 돕는다는 차원이 되면 보람 있는 일로 바뀌어진다. 그런 면에서 '무한도전-박명수의 기습공격'편은 음식점에도, 운동부원들에게도, 또 '무한도전'에게도 모두 이득을 남겼다. 음식점은 음식을 팔았고, 운동부원은 실컷 음식을 먹었으며, '무한도전'은 그걸 통해 큰 웃음을 얻었다.

불황에 아끼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쓰는 것이다. 경제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소비가 살아나야 한다. '무한도전'의 공격 대상이었던 치킨집과 삼겹살집이 우리네 서민 경제처럼 보이고, 그들이 먹어치우는 엄청난 양의 치킨과 삼겹살과의 전쟁이 불황과의 전쟁처럼 읽혀지는 것은 왜일까. 굶겨서 웃기는 시대, 먹여서 웃긴 '무한도전'의 웃음이 값지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로봇다리 보다 든든한 가족을 가진 세진이의 희망가

세진이는 참 없는 것투성이다. 먼저 두 다리가 없고 오른손 손가락이 없다. 태어났을 때는 가족도 없었다. 남들 다 가는 유치원도 34번이나 퇴짜를 맞았고, 초등학교에 처음 들어갔을 때는 친구도 없었다. 아니 없는 정도가 아니라 왕따에 심한 놀림을 받기 일쑤여서 차라리 학교가 없었으면 했을 정도였다. 수영을 배우려 했지만 수영할 수영장이 없었고, 가르쳐줄 코치 선생님이 없었다. 외국에 수영대회를 나갈 때면 동행해주는 코치나 감독도 없어서 현지 적응하는데 애를 먹곤 했다.

하지만 그렇게 가진 것 없는 세진이가 가진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어느 날 그의 앞에 나타나 그를 안아준 엄마였다. 엄마를 만나고 나서부터 두 다리도 생겼고 손가락도 생겼다. 그리고 가족이 생겼다. 학교도 다닐 수 있었고 친구도 사귈 수 있었다. 춤도 배우고 스키도 타고 볼링도 치고 마라톤도 완주하고 록키산맥도 등반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영을 배울 수 있었다. 엄마는 없는 수영장도 만들어주었고, 가르쳐줄 코치 선생님도 찾아주었다. 외국에 수영대회를 나갈 때도 늘 엄마가 옆에 있었다. '거위의 꿈'과 '나는 문제없어'를 응원가처럼 부르는 엄마는 세상 그 누구보다 뛰어난 코치이자 감독이었다.

'휴먼다큐 사랑-로봇다리 세진이'편에서는 저 스스로를 무서운 엄마, 나쁜 엄마라고 부르는 양정숙씨와, 그 엄마를 세상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세진이의 희망가를 들려주었다. "병신자식 데려다가 앵벌이 시킨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엄마는 세진이 앞에 저 스스로 모진 현실이 되어야 했다. 남들 일어나서 걷기 시작할 때, 먼저 넘어지는 법을 가르쳤고, 한창 예쁜 말들을 배워야할 때, 병신, 등신, 장애인 같은 나쁜 말을 가르쳐야 했다. 그만큼 혹독한 현실 앞에 세진이를 당당하게 서게 하기 위해서였다. 세상은 세진이 같은 장애를 가진 아이가 넘기에는 너무나 모질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없는 두 다리를 만들기 위해 쓰러진 아이를 끊임없이 일으켜 세워야 했고, 병신소리에 가둬놓고 때리고 온갖 모욕을 주는 학교에 가기 싫다 우는 세진이를 "오늘은 아닐 거라고 매일 달래서" 학교에 보내야 했다. 없는 친구를 사귀기 위해 세진이는 안간힘을 써야 했고, 밤마다 자기 전에 보통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수없이 기도를 해야 했다. 수영장 물 더러워진다고 소독해놓고 가라는 수모를 받으면서도 엄마는 하루 여섯 시간을 수영장 청소를 해가며 세진이에게 수영장을 마련해주었고, 그렇게 만날 손이 부르터가지고 오는 엄마를 보며 세진이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원한 것은 세진이가 애기였을 때 말했던 것처럼 그저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었다.

한 번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엄마에게 세진이는 이제 제법 어른스럽게 말한다. "그냥 우리들 앞에서 울어. 가족이 있는 한 가족 앞에서 풀어야 돼. 그게 가장 좋은 약이야." 엄마와 함께 '거위의 꿈'을 노래하던 세진이는 이미 그 엄마 뱃속 같은 물속에서 자유로이 하늘을 나는 꿈을 꾸었는지도 모른다. 거위가 날아오르는 그 꿈을 말이다. '휴먼다큐 사랑-로봇다리 세진이'편은 아무 것도 갖지 못한 채 태어났지만 모든 것을 갖게 된 세진이를 통해,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자칫 소중함을 잊고 지내왔던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주었다. 어떤 시련 앞에서도 절대로 쓰러지지 않는 가족이란 실로 그 어떤 로봇다리보다도 든든한 존재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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