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버라이어티라는 새장을 세운 ‘1박2일’

‘1박2일’은 리얼 버라이어티를 표방한 ‘무한도전’의 한 지류에서 시작했다. 하지만 1년 반 이상을 달려오면서 이 지류는 하나의 독립적인 강물을 형성하고 거침없이 바다로 흘러가고 있다. 물론 이미 신화가 되어버린 '무한도전'은 여전히 리얼 버라이어티의 맨 앞에서 어떤 길을 제시해내가고 있지만, '1박2일'이 여행 버라이어티라는 분화된 장르로 구축해온 새로운 장은 현재의 리얼 버라이어티쇼들이 무시할 수 없는 전범이 되고 있다. ‘1박2일’이 지나온 길은 어떤 것이었고, 거기서 발견한 가능성은 무엇이며 또 앞으로 가야할 길은 어떤 것일까.

복불복이라는 재미와 오지 조명의 의미 결합
‘준비됐어요’라는 프로그램에서 비롯되어 하나의 새로운 포맷을 구성하게 된 ‘1박2일’이 첫발을 디딘 곳은 한국의 알프스 영동이었다. 첫 회에서부터 ‘1박2일’이 내세운 것은 먹거리를 놓고 벌이는 복불복 게임. 음식을 얻기 위해 휴게소에서 즉석 사인회를 하는 장면은 ‘1박2일’만이 가진 복불복 게임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따라서 초창기 ‘1박2일’은 각종 복불복 게임들(요트와 통통배를 두고 벌이는 복불복이나 정차역에서 가락국수 먹기 같은)을 통해 그 기본적인 재미를 구성했다.

복불복 게임은 자칫 자극적으로만 흐를 수 있는 위험성이 있었다. 하지만 ‘1박2일’은 그 자극적인 재미와 우리네 국토를 여행하고 오지를 조명한다는 의미를 결합시켰다. 독도에서 섬을 지키는 경비대들에게 따뜻한 자장면을 대접한다거나, 최 서남단에 위치한 전남 신안군 가거도의 가거초등학교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고 식사를 하는 모습은 이 프로그램이 그저 자극적인 재미에만 치우친 것이 아니라는 이미지를 만들었다. 한편 복불복 게임은 점점 다채로워져 이외수 자택에서 벌어진 탁구게임이나 해운대 앞에서 벌인 배드민턴 경기는 저질 스포츠 자체로도 큰 웃음을 주었다.

최절정의 위치에서 내리막을 겪다
자극적인 복불복 게임의 재미와 지역주민들과 어우러지는 감동적인 의미를 통해 정상적인 궤도에 오른 ‘1박2일’에게 필요했던 건 역시 화제를 일으킬 수 있는 한 방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해준 것은 경남 거창에서 출연하게 된 ‘전국노래자랑’과 충주대에서 갑자기 벌어진 게릴라 콘서트, 그리고 백령도에서 강호동이 다시 샅바를 매게 한 해병대와의 씨름대회였다. 이때 프로그램은 최절정에 올랐고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백두산 원정’이라는 거대 프로젝트를 선보였다.

하지만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생기듯 ‘1박2일’은 백두산 원정을 정점으로 조금씩 매너리즘의 늪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즈음 모든 것들은 비판의 시선으로 바뀌었다. 복불복은 지나친 출연진 학대라는 비판을 받았고, 의미는 억지 감동이 되었으며 주민들과의 대민접촉은 민폐가 되었다. 높아진 기대치에도 불구하고 반복되는 형식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부산 사직구장에서 벌어진 논란은 ‘1박2일’이 당시 처한 위기를 가장 잘 드러내 보여준 사례다.

‘1박2일’에 대한 비판이 가중된 것은 타 방송사의 프로그램들의 약진과도 관련이 있다. 유재석을 내세워 맞불을 놓은 ‘패밀리가 떴다’는 ‘1박2일’이 가진 남성적이고 자극적인 리얼리티 콘셉트와는 정반대로 여성적이고 말랑말랑한 판타지 콘셉트로 주목을 끌었다. 여성 출연자로서 이효리와 박예진이 리얼 버라이어티에 투입된 결과는 많은 여성시청자들의 눈을 잡아끌기에 충분했다. ‘1박2일’도 그 바람에 편승해 강원도 너와집에서 매니저와 코디들의 리얼 러브버라이어티를 보이기도 했지만, 결국 뚝심 있게 리얼리티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선택은 옳았다.

게스트 다변화로 활로 개척한 ‘1박2일’, 그 가야할 길
‘패밀리가 떴다’의 대본공개 논란으로 오히려 리얼리티에 대한 시청자들의 요구는 더 높아졌고 그것은 차츰 초창기의 모습을 회복하는 ‘1박2일’에게는 득이 되었다. ‘1박2일’도 새로운 변화를 모색했다. 충남 공주에서 ‘명사와 함께 하는 1박2일’이라는 타이틀로 박찬호를 게스트로 초청해 큰 호응을 얻은 ‘1박2일’은 ‘시청자와 함께하는 1박2일’로 새로운 활로를 찾았다. MC들이 친구들을 초청해 함께 여행을 떠난 ‘함께 가자 친구야’는 이제 ‘1박2일’이 좀 더 일반인들을 향해 다가가 그 속에서 리얼한 재미와 감동을 찾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경북영양 산골마을 기산리에 사시는 어르신들의 집을 찾아가 1박2일을 지내는 ‘집으로’편은 이제 ‘1박2일’이 갈 길을 확실히 보여준 셈이다. 거대한 프로젝트보다는 작고 세세한 이야기가 더 재미있고 의미도 있다는 것을 ‘집으로’편은 보여주었고, 이것은 ‘1박2일’이 앞으로 취해야할 방향성에 많은 것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1박2일’이 걸어온 길을 통해 리얼 버라이어티가 구축해놓은 것들은 꽤 많다. ‘1박2일’이 가지고 있는 여행 버라이어티의 요소들은 이제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기본처럼 자리하고 있다. 복불복 같은 게임적 요소가 그렇고, 특정 장소로 가서 1박을 하는 형식이 그렇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리얼 버라이어티가 대중들(특히 현지 지역주민들)과 어우러지는 방식일 것이다. 이것은 ‘1박2일’이 개척해놓은 가장 독특한 영역이 아닐 수 없다.

예능 프로그램은 물론 웃음을 주는 것이 제 일차 목표이겠지만 리얼 버라이어티는 야외로 나오는 카메라가 말해주듯이 어떤 대중들과 함께 호흡하고 공감할 수 있는 요소가 반드시 필요하다. 재미와 의미가 동시에 구축되어야 롱런이 가능해진다는 걸 ‘1박2일’은 그 걸어온 길을 통해 말해주고 있다. 또한 성공한 포맷이라고 하더라도 반복되다보면 오히려 그것이 독이 될 수 있다는 것도 ‘1박2일’을 통해 얻은 덕목이다. ‘1박2일’은 이제 ‘무한도전’이라는 리얼 버라이어티 지존의 그늘에서 벗어나 어떤 새로운 하나의 형식을 구축해놓은 프로그램이 되었다. 이제는 그 형식을 운용하는 정도에서 벗어나 좀 더 다채로운 형식과 실험적인 시도가 필요해진 시점이다.

- 1박2일이 지나온 길

1. 한국의 알프스 영동 : 휴게소 즉석 사인회. 먹기 위한 복불복
2. 한국의 나폴리 통영-죽도 : 요트냐 통통배냐 복불복. 배멀미
3. 예향 전주 한옥마을 : 전주 KBS에서 생방송 도전기, 밥상 앞의 복불복
4. 강원도 정선 : 정차역에서 가락국수 먹기. 김종민 낙오 사건, 야생 삼종경기
5. 울릉도 독도를 가다 : 독도 경비대 식사대접
6. 경남 밀양 팜스테이 : 김C 출연
7. 평창. 혹한기 대비캠프 : 이승기 출연, 김종민의 복수
8. 겨울바다. 해운대 : 겨울바다 다이빙
9. 최서남단 전남 신안군 가거도 : 오지 두번째. MC몽 합류. 가거초등학교 아이들과 한때
10. 겨울방학특집 : 자아 찾기 셀프 여행, 이외수집에서의 탁구경기
11. 경북 울진 : 칼바람 맞고 오픈카. 대게잡이 배드민턴 경기
12. 전남 영광 : 서해안 기름제거. 떡국대접. 동백마을 재롱잔치
13. 전남 구례 : 고택 체험. 복불복 게임
14. 제주도 : 배냐 비행기냐. 배타고 가는 제주도. 우도에 가다. 바다 뛰어들기
15. 자유여행 : 은초딩 맘대로 여행. 1박2일 파업(?)사태
16. 경남거창 : 전국노래자랑 출연
17. 한국의 마추픽추 완도군 여서도 : 집 야생에서 직접 지어 자기
18. 강원도 정선 운치분교 : 사진 속 학교 찾아가기. 운치분교 아이들과 동강 나들이
19. 문경 : 경차로 떠나는 무전여행, 충주대 게릴라 콘서트
20. 경기도 일주 윷놀이 투어 : 김C의 번지점프
21. 서해 최북단 백령도 : 대청도에 버려진 MC몽, 해병대와 씨름
22. 백두산에 가다 : 동포와 아리랑, 천지에 오르다
23. 전북 장수군 농촌체험마을 : 4인 가족 20만원으로 여름휴가를, 복불복 마라톤
24. 인제 내린천 : 우정여행, 래프팅
25. 올림픽 특집 : 올림픽 스타와의 저질경기
26. 충복영동 : 1박2일 1주년. 초심여행
27. 전남 신안군 신의도 : 개매기 작업
28. 배추고도 귀네미 마을 : 추석맞이 공연
29. 부산 : 초저가 패키지투어. 사직구장 논란
30. 강원도 너와집 : 매니저와 코디들의 리얼 러브 버라이어티, 저질독서퀴즈
31. 강촌 : MT여행
32. 강원도 산골집 2회 혹한기 대비캠프
33. 충남 예산 예당저수지 : 밤낚시 투어. 지상렬, 좌대에서 나오려면 10마리를
34. 외연도 : 녹도에 버려진 승기, 민박집 주인아주머니와 고스톱
35. 전남 해남 유선관 : 눈 오는 날 얼음물 입수 복불복
36. 충남 공주 : 명사와 함께 하는 1박2일. 박찬호 출연
37. 전남 벌교 : 용돈 쓴 만큼 꼬막 채취하기. 이수근의 밤샘 꼬막 작업
38. 전남 담양 : 승기연못, 떡갈비 놓고 벌이는 6종 경기
39. 시청자와 함께 하는 1박2일
40. 신춘특집 제주도에 가다 : 날씨로 영종도 1박. 제주도 초저가 패키지. 올레길 체험
41. 광양 매화마을 : 섬진강 레이스, 광양불고기 아침 복불복
42. 대이작도 : 비바크 체험. 은지원 사승봉도에 버려지다
43. 정선 : 같이 가자 친구야
44. 경북영양 산골마을 기산리 : 집으로

모성애 그리고 희망을 버리지 않게 하는 힘, 가족

(아직도 어제 보았던 최정미씨의 젖은 눈과 앙다문 입, 그리고 고통 속에서도 여전히 아이들을 보며 짓던 미소와, 은서의 그 작은 손과 초롱초롱한 눈, 엄마를 온 몸으로 감싸안는 그 행동들이 눈에 선합니다. 좀더 많은 분들이 그 가녀린 손짓들과 몸짓들이 전하는 인간에 대한 희망을 느끼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미 칼럼으로 쓴 글을 블로거 뉴스로 다시 발행합니다.)

저 작은 고사리 손이 얼마나 많이 엄마의 발을 주물렀을까. 말기암으로 투병 중인 두 아이의 싱글맘, 최정미씨의 발을 매만지는 맏딸 은서의 손은 제법 야무지다. 이 일곱 살 아이의 손은 엄마가 잠시라도 누워있으라며 대신 설거지를 하고, 동생 홍현이의 목욕을 시켜주고 밥을 차려준다. 주중 동안 엄마와 떨어져 어린이집에서 지내야 하는 동안, 은서의 손은 엄마의 손을 대신해 동생을 살뜰이도 돌본다. 그렇게 엄마의 손을 대신하면서도 아이는 엄마한테 잘 해준 게 없다고 한다. 애들이 잘 때 그래서 아이는 그 고사리 손을 모아 매일 기도를 한다. 엄마를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그래서 함께 지내게 해달라고.

'휴먼다큐 사랑'의 풀빵 엄마 최정미씨는 은서의 그 야무진 손을 볼 때마다 마음이 저리다. 아이가 너무 빨리 커버린 것만 같고, 자기가 해야할 몫을 자꾸 아이한테 하나씩 짐을 지우는 것 같아서다. 하지만 암 투병에 생계를 위해 해야 하는 풀빵 장사만으로도 최정미씨의 몸은 천근만근이다. 사실 어떤 사람들은 독한 항암제를 맞느니 치료를 포기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 수가 없다. 자신은 두 아이의 엄마니까. 그녀는 입만 열면 자신이 '아이들의 그늘막'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한다. 자신은 없어져도 되는데, 아이들의 그늘 되어줄 사람이 없어지는 건 상상하는 것만으로 암의 고통보다 더한 고통이라고 한다.

'휴먼다큐 사랑'이 늘 같은 감동적인 얼굴로 우리들에게 다시 돌아왔다. 다큐가 가진 진정성의 힘을 온전히 인간이라는 존재에 조명해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똑같은 깊은 울림을 전해주는 제목 그대로의 휴먼다큐. 풀빵 엄마 최정미씨의 이야기는 인간의 사랑이라면 가장 먼저 지목될 모성애를 그려냈다.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아 한쪽 다리를 저는데다, 아빠 없이 두 아이를 키워야 하는 싱글맘으로도 충분히 힘겨운 삶에, 위암 말기라는 극한 상황에 내몰리면서도(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최정미씨는 더 절절한 모성애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모성애는 가족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얼마나 큰 희망과 힘이 되는지를 또한 말해준다. 한겨울 풀빵 장사를 위해 손이 꽁꽁 어는 길가에 서 있다가도 저 멀리서 다가오는 아이들을 볼 때면 마스크 쓴 얼굴 너머로 환하게 웃게 만드는 그 힘은 바로 그 가족이 준 힘이다. 위를 잘라내 잘 먹지 못하는 엄마에게 자꾸만 "엄마 밥 먹었어?"하고 묻는 딸 은서 때문에 그녀는 힘겨워도, 억지로라도 조금씩 음식을 넘기려 노력한다. 도저히 넘어가지 않는 설날 떡국을 그 고사리 손이 챙겨 입에 밀어 넣어주었을 때도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받아 넘기다가는 울컥하는 감정에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가 더 이상 눈물 흘릴 수 없었던 것은 아마도 그 와중에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도 휴지를 챙겨다주는 은서의 그 작고도 야무진 손 때문이 아니었을까.

"엄마 우리 키워주셔서 고맙습니다." 재롱잔치에서 엄마에게 한 마디 하라는 말에 이렇게 말하고 훌쩍이는 은서 앞에서 엄마는 절대로 희망을 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사진 속에서 늘 웃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포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을 돌볼 때면 말기 암 환자라는 것도 잊는다고 한다. 엄마가 얼마나 살기 위해 노력했고, 또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이라고 말하는 최정미씨는 이미 아이들에게 영원히 죽지 않는 그런 존재로 남아있을 것이다. '휴먼다큐 사랑'의 풀빵엄마 최정미씨의 이야기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가족을 새삼 되돌아보게 한다. 가족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이며 기적인가.

- 늘 낮은 곳에 계신 분들의 아름다운 삶이 평범한 우리들의 삶을 보다 값지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이제 길가에서 지나다 우연히 마주하게 되는 풀빵 장수 아주머니를 볼 때마다 님을 떠올리게 될 것 같습니다.

바보가 헛똑똑이들에게 전하는 이야기, '그바보'

불황이어서인지 세상은 더 무례해졌다. 그 세상을 담는 드라마 역시 마찬가지. 어떤 마음을 담기보다는 당장의 자극을 담아 시청률이라는 수치 올리기에 바쁘기 일쑤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그저 바라보다가(이하 그바보)'는 요즘 세상에 어울리지 않게 예의를 아는 드라마다. 그저 키득대며 보다보면 어느 순간, 이 바보 같이 웃고만 있는 드라마가 전하는 뭉클한 메시지에 마음까지 먹먹해지는 때가 있다. 구동백(황정민)이라는 이름의 그 바보는 좀 안다는 헛똑똑이들의 무례에도 오히려 그들을 가슴으로 끌어안는다. 그리고 그 헛똑똑이들은 어쩌면 우리들의 또 다른 얼굴인지도 모른다.

구동백은 가진 것 없고 여자 친구도 없으며 영업실적도 제로인 평범한 우체국 영업과 말단직원. 그런 그가 톱스타 한지수(김아중)와 시장후보 아들 김강모(주상욱)보다 돋보이는 건 왜일까. 우연한 사건으로 터진 연애스캔들이자 정치스캔들을 무마하기 위해 김강모 대신 연인 역할을 하게 된 구동백에게 한지수는 사례금을 챙겨주려 한다. 하지만 평소 한지수의 팬이었던 구동백은 도와주고픈 순수한 마음으로 그 일을 하는 것이라며 한사코 그 돈을 받지 않는다. 이것은 어찌 보면 단순한 행동처럼 보이지만, 구동백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행동이자 그가 그들보다 돋보이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지수와 김강모가 사는 세계는 거래의 세계다. 모든 것이 돈과 권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그 곳에서는 심지어 연인 관계까지 돈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니 거래를 거부하고 관계를 희망하는 구동백은 이들에게는 당혹스런 존재가 아닐 수 없다. 한지수가 억지로라도 사례를 해 관계를 거래로 바꾸려 구동백에게 차를 선물하려 했을 때, 구동백이 대신 요구한 것은 회사 단합대회에 와달라는 것이었다. 한지수와 그녀의 매니저 차연경(전미선)은 그렇게 돈을 건네려는 자신의 손이 점차 부끄러워진다. 한지수가 점점 구동백에게 무례하게 행동하는 것은 그 당혹감의 표현이다.

마치 돈만을 가진 자와 마음만을 가진 자의 대결구도처럼 한지수와 구동백 사이에 벌어지는 미묘한 감정의 변화가 그저 연애담 이상을 전하는 건 그 때문이다. 이것은 돈과 명예를 통해 모든 것을 다 가진 줄 아는 헛똑똑이들에게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그 누구도 갖지 못한 것을 갖고 있는 바보가 전하는 경고다. 따라서 이 드라마는 저 '스타의 연인' 같은 남성 신데렐라 이야기와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구동백이라는 바보의 순수한 세계가, 한 때는 자신도 그런 세계에 있었으나 어느새 그 세계를 떠나버린 한지수를 일깨워주는 이야기가 그 진짜다.

구동백과 한지수의 결혼발표(일은 점점 커져 결국 위장결혼까지 하게 된다)로 귀국한 한지수의 동생, 상철(백성현)은 그녀가 떠나버린 세계에 아직까지 발을 디디고 있는 인물로 구동백과 결을 같이 한다. 그는 한지수가 자신 때문에 외국에 보내졌다는 자책감에 부쳐준 돈보다는, 어린 시절 자전거를 사주기 위해 몇 달을 걸어 다녔던 누나를 더 그리는 인물이다. 그 돈으로 구동백이 수십 대의 자전거를 구입해 아이들에게 자선행사를 하는 장면은 돈이 때로는 거래가 아닌 마음으로 전화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지수의 눈물은 거래의 세계 속에서 잊었던 그 마음을 되찾게 해준데 대한 고마움의 발로이다.

'그바보'는 돈이면 뭐든 다 된다는 이 무례한 세상에 예의를 전하는 드라마다. 그리고 이것은 작금의 불황을 맞아 자극적으로만 치닫는 드라마 세상에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불황에 시청률 같은 수치적 집착은 더욱 심해졌고, 드라마들은 그 와중에 감정 또한 거래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여기는 것만 같다. 이야기의 맥락과는 상관없이 막장으로 치달으면서 공분을 일으켰다가 또 어느 순간 적당히 풀어내는 것을 반복하며 시청자들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려는 드라마들이 그렇다. 하지만 어디 시청자의 마음이 그리 호락호락할까. 한지수 같은 자본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어도 구동백 같은 변치 않는 순수한 마음은 언제나 남아있게 마련이다. 이것이 '그바보'의 구동백을 보면서 느껴지는 감동과 부끄러움의 이유다.

무엇이 그녀들을 희생하게 만들었나

‘내조의 여왕’이 그리고 있는 세계는 퀸즈푸드라고 하는 치열한 생존경쟁의 공간이다. 어디에서나 정치적인 선택이 이루어지는 그 곳은 온전히 실력만으로는 버티기 힘든 곳이며, 막후협상과 로비와 줄서기가 횡행하는 곳이다. 남편이 이사면 그 아내도 이사고, 남편이 부장이면 그 아내도 부장이며, 남편이 인턴사원이면 아내도 인턴사원인 곳이 그 곳이다. 부부는 하나의 짝패를 이루어 안팎으로 뛰어야 하는 상황. ‘내조의 여왕’이 그려내는 내조의 세계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 마련인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의 내조’를 뛰어넘는다.

이제 막 이 세계에 들어간 온달수(오지호)의 아내 천지애(김남주)는 퀸즈푸드 사모님들(?)의 내조 정치의 세계로 뛰어든다. 그녀는 갖은 수모를 당하면서도 오로지 남편을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한다. 한편 젊은 시절 그녀를 졸졸 따라다녔던 양봉순(이혜영)은 일찌감치 이 진흙탕의 세계로 들어선다. 그것은 이미 천지애와 사귀던 한준혁(최철호)을 중간에서 가로채 남편으로 만들었을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양봉순의 삶이 오로지 남편을 내조하는 삶이 된 것은 그 때문이다. 양봉순은 그런 남편이 여전히 잊지 못하는 천지애와 이 처절한 정치의 세계 속에서 부딪칠 수밖에 없다.

똑같은 내조라고 보이지만, 천지애와 양봉순의 내조는 사뭇 다르다. 천지애의 표현대로 하자면 그녀의 내조는 사랑이지만, 양봉순의 내조는 안간힘이다. 즉 천지애는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에(또 남편이 전폭적으로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그 처절한 진흙탕 속에서 뒹굴지만, 양봉순은 자신을 돌아봐주지 않는 남편 한준혁을 향한 사랑의 갈증이 거의 비서 같은 그녀의 삶을 만들어낸 것이다. 물론 코미디이기 때문에 모든 상황들은 과장되어 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한다 해도 이들의 내조는 비정상적이다. 우리가 흔히 ‘치맛바람’이라 부르는 바로 이 비정상적인 내조는 거꾸로 사회의 비정상적인 구조를 풍자하기 위함이지만.

따라서 양봉순의 내조가 사실은 내조라기보다는 거의 집착에 가까운 것이었다는 걸, 천지애의 출연으로 알게된 것처럼, 천지애의 내조 역시 남편 온달수가 사장 부인인 은소현(선우선)에게 흔들렸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본질을 드러내게 된다. 물론 온달수의 흔들림은 의도한 것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의 삶을 뒤로 접어두고 남편만을 내조하는 천지애의 삶이 가진 허망함을 깨닫게 하기엔 충분했던 것. 어찌 보면 천지애와 양봉순은 근본적으로 같은 위치에 처해있는 인물들로 볼 수 있다.

남편이 결국 토사구팽 당할 위기에 처하자 심한 스트레스로 수술을 받아야 하는 양봉순을 병원에 데려다 주고 그녀의 남편을 불러 화해를 시켜주며 나오는 천지애의 눈에 미소와 눈물이 섞이는 것은 그녀가 양봉순과 이제는 어떤 공감의 틀을 갖게 되었다는 걸 의미한다. 바로 이런 내조의 진면목을 깨닫는 존재로서 양봉순과 천지애는 겉으로 으르렁대면서도 경쟁자가 아닌 동지의식을 가질 가능성이 높다. 결국 그들이 적으로 상정해야 할 인물은 당사자들이 아니라 그들을 그런 상황 속에 빠뜨린 시스템을 쥐고 있는 인물, 즉 이사부인인 오영숙(나영희)이다.

천지애가 취업전선의 벼랑 끝에서 남편을 위한 내조를 위해 발 벗고 나섰듯이, 또 남편의 퇴출 위기 속에서 양봉순이 자신을 희생하면서 남편을 내조하려 했듯이, 진짜 내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위기상황에서만 등장하기 마련이다. 위기가 지나고 어떤 안정기에 접어들었을 때, 그 내조는 얼굴을 바꿔 치맛바람으로 돌변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 내조 또한 자신의 행복한 삶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희생을 통해 가족과 배우자를 행복하게 해주려는 것이기에 허망한 것일 수밖에 없다.

이 드라마는 따라서 ‘내조의 여왕’을 그리고 있지만 그 여왕의 진정한 행복이 스스로를 내조한다는 것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천지애와 허태준(윤상현), 그리고 온달수와 은소현의 관계가 여전히 아슬아슬한 불륜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 구조가 가진 신데렐라(혹은 남데렐라) 설정의 힘 때문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불륜적인 관계가 가장 극적으로 그 자신만의 삶을 표현해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것이 불륜이든 아니든 더 중요한 것은 이 코미디가 풍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놓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내조라는 이름으로 줄서기와 로비에 우리네 주부들까지 뛰어들게 만드는 퀸즈푸드라는 이름의 뒤틀린 우리 사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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