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적인 미래, '그바보'가 전하는 현재의 긍정

"전 지금 벼랑 끝에 서 있어요." 톱스타 한지수(김아중)의 말대로 그녀는 벼랑 끝에 서 있다. 톱스타와 정치인의 스캔들을 피하기 위해 진짜 연인인 김강모(주상욱) 대신 구동백(황정민)과 가짜 결혼을 해야 하는 그녀. 그녀가 현재를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것은 김강모가 해준 미래에 대한 약속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녀의 착각이다. 미래는 늘 오지 않는 거리에서 보여질 뿐이고, 사실 우리는 늘 현재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를 벼랑 끝에 세운 것은 김강모가 아니라, 그렇게 늘 미래를 위해 현재를 포기하는 그녀 자신이다.

그런 그녀 앞에 현재로 서 있는 인물은 구동백이다. 그는 오지 않은 미래 때문에 현재를 절망적으로 살아가는 그녀에게 불쑥 배가 고프다며 밥을 먹으러 가자고 한다. 현재를 버텨내야 미래도 온다는 구동백의 전언이다. 그는 그녀가 들어주겠다는 세 가지 소원(이 동화적인 설정은 구동백이란 캐릭터와 너무나 잘 어울린다) 중 하나를 '그녀와 먹는 한 끼 밥'으로 쓴다. 이것은 구동백의 사랑법이 김강모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시제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김강모가 늘 '미래 그 언젠가'라면, 구동백은 늘 '지금 현재'에 서 있다.

그리고 그는 그 현재를 긍정한다. 한 때 '있으나 마나'였던 자신의 별명을 얘기하며 한지수 덕분에 '사람들 관심 속에서 살아가는 것' 또한 즐거움이라 긍정한다. '사람들 관심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한지수에게는 고통스런 현재 그 자체이지만 구동백은 "진짜 슬픈 인생은 살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바람에 날아가 바닷물에 빠진 한지수의 모자를 건져내며 정작 자신의 바지가 온통 젖었어도 "모자가 젖었네요"라고 말하는 구동백에게 한지수라는 존재는 그의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인생에 가장 큰 선물이 된다.

실로 우리네 삶은 미래의 불안 때문에 아무리 절망 속에 있어도 또 그 정반대의 상황에 있어도, 우연히 해파리에 다리를 쏘이면 아프고, 몇 끼를 굶으면 배가 고픈 현재에 붙박여 있다. 이것이 엉거주춤 걸어가는 구동백의 뒷모습을 보며 웃음이 터지는 한지수가 "이런 상황에도 웃음이 나오네요. 어떻게 이렇게 힘든데. 죽을 것처럼 힘든데 어떻게 웃음이 나올 수 있지?"라고 말하며 또 한편으로는 눈물을 흘리는 이유다.

'그저 바라보다가'가 구동백이라는 바보 같은 캐릭터를 통해 전하는 메시지는, 오지 않은 미래의 불안에 잠식되어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현재적 삶을 긍정하며 살아가는 법이다. 쉽게 미래를 예단하는 자들의 특징이란 그 예측 가능성을 통해 어떤 이득을 취하려는 삶의 태도다. 하지만 그 예단하는 습성은 결국 거꾸로 그 자신을 바보로 만들 뿐이다. 한지수가 "구동백씨는 명쾌해서 좋겠어요. 나 어떻게 해야되죠?"하고 묻는 건 그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그 부제처럼 불리는 '그바보'라는 제목처럼 시종일관 구동백을 바보로 만들려는 세상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 바보는 거꾸로 그런 세상을 바보로 드러내주는 거울 역할을 해준다.

따라서 막장과 자극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서 있는 이 바보스런 드라마는 그대로 구동백을 닮아있다. 그저 거기 바보처럼 서서 오히려 세상이 바보임을 증명하듯 말이다.

‘신데렐라맨’, 진품과 짝퉁 사이에 서다

제목만 놓고 보면 ‘신데렐라맨’은 누가 생각해도 요즘 한창 뜬다는 ‘남데렐라(남자 신데렐라)’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작품의 기획의도에 등장하는 첫 문구는 신데렐라가 아니라 ‘왕자와 거지’다. 얼굴이 닮은 두 사람이 서로 역할을 바꾼다는 점에서 현대판 ‘왕자와 거지’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신데렐라맨’이 다루는 이야기는 남데렐라일까 아니면 ‘왕자와 거지’일까.

'신데렐라맨', 신데렐라인가 왕자와 거지인가

먼저 '신데렐라'와 '왕자와 거지'의 몇 가지 차이를 보자. '신데렐라'는 알다시피 신분 상승 욕구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다. 반면 '왕자와 거지'는 신분의 이야기보다는 입장 바꿔보기가 그 중심 모티브다. 즉 신데렐라는 계모의 딸이 왕자와 결혼하는 이야기지만, '왕자와 거지'는 거지보다는 왕자의 시선을 따라가며 거지가 되어본 왕자의 눈에 비친 세상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그려낸 이야기다. 여기서 왕자는 제자리를 찾아가려 노력할 뿐이지, 신분상승을 욕망하는 존재는 아니다.

드라마 '신데렐라맨'은 '왕자와 거지'의 이야기로 치면 왕자에 해당하는 이준희(권상우)의 이야기라기보다는 거지인 오대산의 이야기에 가깝다. 따라서 본래 '왕자와 거지' 이야기가 갖는 세태 풍자적인 요소는 발견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입만 열면 대박을 외치는 오대산의 입장에 드라마가 주력하고 있다고 해도 이 드라마를 신데렐라 이야기로 단정하기도 어렵다. 오대산이 사랑하는 인물은 같이 낮은 곳에 내려와 있는 서유진(윤아)이지, 자신을 간택해 상류사회로 끌어줄 능력을 가진 장세은(한은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똑같은 얼굴 때문에 이준희의 역할을 연기하는 오대산이 그 부를 부러워하거나 즐기는 것 같지도 않다. 오대산은 그저 돈 몇 푼에 억지로 그 연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오대산의 관심은 그 스스로도 밝혔듯이 '100억 대박'과 서유진뿐이다. 그리고 그 100억 대박은 신데렐라처럼 누군가에 의해 간택되어 얻는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을 통해 얻어내려는 것이다. 그러니 '신데렐라맨'의 주인공을 오대산 혹은 이준희에 맞춰놓고 보면 이 이야기는 신데렐라 이야기도 왕자와 거지 이야기도 아닌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패션계의 이야기까지 뒤섞여 복잡해 보이는 이 '신데렐라맨'은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그저 부유한 남녀(이재민과 장세은)와 가난한 남녀(오대산과 서유진)가 서로 얽히고설키며 성장하는 그저 그런 사각 멜로드라마? 현재로서는 그 혐의가 짙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중반을 향해가는 이 드라마에 대한 평가로 이건 너무 속단일 수 있다. 적어도 남은 분량에서의 어떤 가능성만은 여전히 존재하니까.

진품과 짝퉁의 기로에 선 '신데렐라맨'
그 가능성은 이 드라마가 가진 '진품과 짝퉁'에 대한 시선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오대산은 말 그대로 짝퉁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인생이고, 이준희는 진품, 그것도 명품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인생이다. 그 둘이 닮았고 서로 역할을 바꾸어 남을 속인다는 설정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상품으로서의) 진품과 짝퉁을 떠올리게 한다. 이것은 철저히 상업적인, 경제적인 측면에 있어서의 진품과 짝퉁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진품과 짝퉁' 인생을 가르는 잣대에 경제적인 측면만을 부각시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삶의 질적인 잣대로 보여지는 '진품과 짝퉁' 인생을 밑바닥에 깔고 있다. 즉삶의 양적인(경제적인) 잣대로는 이준희가 진품이고 오대산이 짝퉁 같지만, 삶의 질적인 잣대로는 오대산이 진품이고 이준희가 짝퉁처럼 보인다. 이 역전된 상황은 드라마가 가진 틀에 박힌 사각 멜로 구도 이야기가 가진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이다.

만일 오대산과 서유진이 삶의 양적인 가치가 아닌 질적인 가치로서 서로 맺어지고, 이러한 새로운 가치를 그 관계 속에서 그려낼 수 있다면 그것은 이 시대에 공감할 수 있는 새로운 신데렐라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여전히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다. 만일 이러한 하나의 가능성도 발견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이 드라마는, 신데렐라 이야기도, 왕자와 거지 이야기도 끌어들였지만 그 어느 이야기도 되지 못하는 짝퉁드라마가 될 수도 있다. 어느 쪽의 길을 가게 될 지는 앞으로의 행보에 달려있다.

이것은 이 드라마의 키를 쥐고 있는 권상우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이야기다. 잇따른 흥행 실패로 인해 잣은 구설수와 연기력 논란을 일으켜온 권상우에게 어쩌면 이 작품은 기회가 될 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1인2역이라는 새로운 도전은 권상우의 연기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가능하게 하고 실제로도 그런 조짐들이 보여지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진품의 연기를 선보이려고 노력한 흔적들이 역력하다. 문제는 다시 작품이다. 배우의 이미지를 만드는 대부분이 제대로 된 캐릭터를 어떻게 만나느냐에 달려있다고 볼 때, 이 작품이 진품이 되느냐 짝퉁이 되느냐는 갈림길은 권상우에게도 절실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권상우는 과연 이 작품을 통해 신데렐라맨으로 거듭날 것인가.

나이를 숫자에 불과한 것으로 만드는 그들

햇수로 19년이 흘렀지만 한결 같이 저녁 6시면 들려오던 그 털털한 목소리는 변함이 없는 것 같다. 7000회를 맞은 '배철수의 음악캠프'의 배철수는 7000이라는 숫자에 그다지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저 오늘도 방송을 할 뿐"이라는 것. 하지만 2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유행과 트렌드에 민감한 팝 음악을 소개하는 라디오 DJ로 같은 자리를 지킨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일까. 만일 당대 스무 살로 처음 '배철수의 음악캠프'의 청취자가 됐던 분이라면 지금 불혹의 나이가 되어 있을 터(필자가 그렇다). 따라서 이 프로그램은 그 자체적으로 20년 터울의 세대가 갖는 차이 따위는 넘어서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역시 배철수라는 청년정신의 소유자 덕분이다.

이 라디오 방송을 듣다보면 배철수가 가진 세대를 넘는 흡인력에 놀라게 된다. 그는 때론 사뭇 진지하게 세상 돌아가는 꼴에 대해 거침없이 쓴 소리를 해대다가도 특유의 어눌한 목소리로 자신 역시 그 비판의 도마 위에 올려놓는다. 젠 채 하지 않고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는 이 화법 속에는 자신 또한 한 명의 샐러리맨이라는 동류의식이 담겨 있다. 젊은 청춘들의 이야기에 대해 배울 것은 배우는 자세로 듣다가도 할 얘기는 따끔하게 하는 그 모습은 선생의 목소리가 아니라 친구의 목소리로 친근하게 다가간다. 배철수를 들으며 우리가 느끼는 것은 세월이라는 어찌 보면 잔인한 시간의 흐름에 대한 편안한 마음이다. 시간이 지나도 우리는 여전히 청년일 수 있다는 그 편안함.

이런 한결 같은 청년정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또 한 인물은 김창완이다. '아니 벌써'로 1977년 산울림으로 데뷔한 그는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며" 인디 밴드들과 나란히 소극장에서 노래를 부른다. 동생의 죽음으로 산울림을 해체하고 작년 김창완 밴드를 재조직한 그는 인디 정신을 통해 청년을 수혈 받은 듯, 초창기 산울림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무엇보다 가치를 인정받아야 할 것은 그의 현재가 단지 산울림을 추억하는 모습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여전히 진행형이고 여전히 도전적이다.

김창완은 또한 연기라는 영역에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열어놓았다. 김창완은 드라마의 조역으로 늘 푸근한 인상의 아저씨 역할을 해오다가, '하얀거탑'을 통해 자신만의 색깔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우용길 부원장이라는 정치적인 인물을 연기하며 그는 조직 내에 늘 있게 마련인 직장 상사의 또 하나의 전형을 만들어냈다. 능글능글할 정도로 능수능란한 편안함에서 나오는 그의 연기는 '커피 프린스 1호점'의 귀차니스트 홍에서도 빛을 발했다. 그리고 그의 연기는 현재 인기리에 방영 중인 '내조의 여왕'에서 김홍식 이사 역할로 진행 중이다.

공교롭게도 배철수나 김창완은 모두 한 시대를 풍미했던(물론 현재도 김창완은 활동중이지만), 음악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배철수가 송골매라는 그룹사운드로 한국적인 록의 세계에 한 획을 그었다면, 김창완은 포크 록의 신화라 할 수 있는 산울림을 통해 때론 동요적이고 때론 우울하며 때론 반항적인 록의 자유분방함을 구가해왔다. 아마도 이들이 지금껏 청년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록이 갖는 도전정신이 그 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앞으로 이들 청년(?)의 행보가 우리 문화에 어떤 궤적으로 남을 지 자못 기대되는 대목이다.

냉소의 시대, '1박2일'이 준 따뜻한 웃음의 가치

얼마 만에 경험하는 따뜻한 웃음일까. 불황으로 웃음이 성공 키워드로 뜬다지만 그 웃음의 대부분은 냉소거나, 조금은 자극에 길들여진 웃음 같은 그런 것들은 아니었던가. '1박2일-집으로'편이 보여준 웃음을 접하고 나서야 비로소 잊고 있었던, 혹은 없다고 생각해왔던 그 따뜻한 웃음이 있었다는 걸 확인하게 됐다.

'1박2일' 팀의 경북영양 산골마을 기산리에 사시는 어르신들을 찾아가는 길은 프로그램 말미에 다시 생각해보면, 도시생활에 지친 자식들이 자신이 떠나왔던 고향집에서의 하룻밤을 통해 온전히 힘을 얻고 돌아가는 그 귀향길의 서막이었다. 산골 외딴 집에서 외롭게 사시는 어르신들에게 웃음을 주러간 그들은 오히려 그 어르신들로 인해 맘껏 웃었고, 하루 동안이지만 자식의 기쁨을 선사하러간 그들은 오히려 부모님의 사랑을 한껏 얻었다.

이 상황의 역전이 주는 당혹감에 가까운 감동은 '1박2일' 멤버들뿐만 아니라 그걸 바라보던 시청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1박2일' 출연진들에게서 웃음을 기대했던 우리들은 오히려 그 출연진들에게 웃음을 주시는 어르신들로 인해 웃고 있었고, 그걸 알아차린 순간 웃음은 감동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찾아간 그들을 자식처럼 따뜻하게 대해주신 어르신들의 사랑을 그 웃음 속에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1박2일'의 시간을 통해 어르신들은 어느새 친근한 우리네 부모님, 조부님이 되어 있었다. 당황스러울 때마다 머리를 긁으시고 헤어짐의 아쉬움에 눈물을 숨기지 못한 할아버지, '사랑'이라는 단어가 끝내 쑥스러워 스피드 퀴즈의 정답을 말하지 못한 순박한 어머니, 몸 개그면 몸 개그, 노래면 노래 어떤 것이든 열심히 하시던 아버지, 손주들의 재롱에 밤잠을 설치시다가 문득 매일같이 힘겹게 농사를 지어야 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셨던 할머니...

그 분들의 순박한 웃음과 아쉬움에 흘린 눈물은 늘 힘겨울 때마다 자신의 힘겨움은 뒤로 접어둔 채 등을 두드려주시던 우리네 부모님, 조부님의 얼굴들이었다. 그렇게 거의 모든 것을 다 내주시고도 당신들이 원하는 것은 고작 피자 몇 조각과 영상 편지, 허리띠가 전부인 것은 우리를 한편으론 부끄럽게 했다. 잘난 우리들은 용돈 몇 푼 쥐어주고 돌아서면서, 바리바리 싸주시던 투박한 음식들에 담겨진 그 마음들을 혹 지나쳤던 건 아니었을까.

'1박2일-집으로'편은 리얼리티를 그토록 강조하던 '1박2일'이 드디어 그 리얼리티를 진정성으로 전화시킨 사례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그 진정성이 묻어난 곳에서의 웃음은 그토록 자연스럽고, 그토록 배꼽을 잡게 만들며, 한편으로는 그토록 가슴을 훈훈하게도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냉소의 시대, 따뜻한 웃음을 전해준 '1박2일'은 또한 이로써 여행 버라이어티로서의 확고한 또 하나의 선구적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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