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의 후광을 받는 친구 혹은 스타가 되고자 하는 친구

스타가 TV 저 편에 존재하는 외계인이라면, 친구는 TV 이 편에 존재하는 보통사람이다. 그리고 그 중간지대에 ‘스타의 친구’가 있다. 즉 ‘스타의 친구’는 스타는 아니지만 그 스타의 후광을 받는 ‘특별한 보통사람’이다. 바로 이것은 ‘스타의 친구를 소개합니다(이하 스친소)’를 규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스타의 친구’라는 독특한 지점
짝짓기 프로그램들은 초기 ‘사랑의 스튜디오’의 일반인 짝짓기에서 시작해, 2000년대 들어 붐이 일었던 동거동락(2001), 천생연분(2002), 산장미팅-장미의 전쟁(2003), X맨(2005), 리얼 로망스 연애편지(2006) 등의 스타 짝짓기 프로그램들로 이어졌고, 최근에는 ‘우리 결혼했어요’, ‘골드미스 다이어리’, ‘꼬꼬관광 싱글♥싱글’같은 스타들의 짝짓기이면서도 그 일상을 포착하는 리얼리티 스타 짝짓기 프로그램으로 진화했다.

하지만 이 리얼리티 경향 속에서 여전히 과거의 틀, 즉 스튜디오나 특정 장소에서의 장기자랑과 게임, 그리고 선택이라는 전형적인 짝짓기 프로그램의 단순한 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건 ‘스친소’가 거의 유일하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스친소’만이 가진 ‘스타의 친구’라는 독특한 지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짝짓기 프로그램에 스타가 직접 등장했던 시기에는 그 ‘스스로 빛나는’ 그네들의 일거수 일투족과 언뜻언뜻 드러나는 아슬아슬한 속내가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이 형태의 짝짓기 프로그램이 비판을 받게 된 것은 우후죽순 생겨난 유사 프로그램들이 시청자들의 선택권을 앗아간 탓도 있지만 프로그램 자체가 지나치게 스타들 자신들의 홍보의 장이 되어버린 탓도 있다. TV 이편의 세계에 놓여진 시청자들은 저들끼리 웃고 떠드는 그 프로그램에서 재미를 느끼면서도 한편으로 소외되는 양가적 경험을 해야했다.

‘스타킹’과 ‘스친소’의 유사점
‘스타킹’은 이 상황을 뒤집어놓음으로써 소외된 시청자를 프로그램의 무대 위로 올렸다. 일반인들이 무대에서 자신들의 장기를 보이고, 스타들이 객석에 앉아 아낌없이 박수와 환호를 보내주는 이 프로그램은 누구나 영상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UCC 시대의 징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능 프로그램이 되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짝짓기 프로그램과 만나 탄생한 것이 ‘스친소’라 할 수 있다.

스타는 자신의 친구를 자랑하고, 그 친구가 이 짝짓기에서 성공하게 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다. 친구는 거기에 맞춰 자신의 끼를 한껏 발휘한다. 그런데 ‘스타킹’에 출연하는 보통사람들이 그저 보통이 아닌 특별한 능력과 재주를 가진 것처럼, ‘스타의 친구’들 역시 보통 사람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끼와 재능을 가지고 있다. 이 ‘특별한 친구’는 프로그램의 재미를 위해서도 필수적인 것이지만, 또한 친구를 소개하는 스타 자신의 이미지를 업그레이드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이 프로그램에는 스타 중의 스타가 존재하는 ‘스타킹’처럼, ‘스타’ 그 이상의 ‘스타의 친구’가 존재한다. 붐의 친구인 장마철은 이 프로그램이 만든 스타 중의 스타다. 특유의 끼로 똘똘 뭉친 그는 출연하는 스타들을 모두 포복절도하게 하는 재미를 줌으로써 거꾸로 그 친구인 붐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까지 해낸다. 또 MC몽의 친구로 등장한 박장근은 프로그램에서 만든 ‘전국민 러브송’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준연예인이라는 비판과 주목도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스타의 친구’가 이처럼 스타 이상으로 주목받고, 또 그럼으로써 이 프로그램이 유지될 수 있기 위해서는 따라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섭외되는 ‘스타의 친구’가 스타도 보통사람도 아닌 그 중간지대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과거 연예인 지망생들이 데뷔의 수순처럼 스타와 함께 출연해 비판받았던 짝짓기 프로그램들(예를 들면 ‘장미의 전쟁’ 같은)과 아무런 차별성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장마철은 본래 문웅기라는 이름의 영화배우로 ‘고사’에 출연했고, 서인영의 친구 이세미는 MBC ‘섹션TV 연예통신’의 리포터로 등장했다. 이밖에도 ‘스타의 친구’로 소개된 친구들은 대부분이 연예계 종사자이다. 이것은 물론 스타가 가진 직업과 연관이 있는 친구들이 소개되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시청자들이 생각하는 ‘스타의 친구’와는 거리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프로그램의 성격상, 즉 ‘스타의 친구’라는 스타의 후광을 받는 인물로서의 친구가 갖는 기대감을 충족시키는 인물을 연예계와는 거리가 먼 보통의 직장인에서 찾기가 사실상 어렵다는데 딜레마가 있다. 방송을 알고 그만큼 방송출연에 부담이 적은 데다가 특유의 끼로 무장한 인물은 아무래도 연예계 가까운 곳이 더 많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비판의 소지는 있지만 장마철 같은 재기 넘치고 발랄한 준 연예인이 등장했을 때 그 주목도는 높아진다. ‘스친소’에서 특집으로 방영한 ‘스타의 매니저를 소개합니다’는 어쩌면 이런 고민들이 작용한 결과는 아니었을까. ‘스친소’는 지금 준연예인이라는 그 비판과 주목도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중이다.

법정드라마는 어떻게 우리 식 정서와 만났을까

법정드라마에는 반드시 피해자와 가해자 그리고 그 피해자를 돕는 법조인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신의 저울’에서도 다르지 않다. 거기에는 사랑하던 여자친구가 살해당하고 그 살인범으로 누명까지 썼으며, 그를 대신해 범인을 자청해 교도소에 들어간 동생을 둔 피해자 장준하(송창의)가 있고, 과실치사지만 그 사실을 은폐함으로써 장준하의 가족이 불행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만든 가해자 김우빈(이상윤)이 있다.

신의 저울은 공평하지 않다는 전제
하지만 ‘신의 저울’이 평범한 법정드라마의 공식을 따르는 건 여기까지다. 이 피해자가 어떻게 법으로써 구원을 받는가의 문제라든가, 가해자가 어떻게 그것을 은폐하려 하는가의 문제는 공식을 벗어나 있다. 피해자인 장준하가 선택하는 것은 법조인, 즉 검사가 되는 것이다. 즉 ‘신의 저울’은 피해자가 법조인의 도움을 받는 드라마가 아니라 피해자 스스로 법조인이 돼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드라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가해자인 김우빈(이상윤) 역시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선택하는 것이 법조인으로서의 권력과 지식이라는 사실이다. 법을 통해 한 명은 진실을 밝히려하고 다른 한 명은 진실을 은폐하려 한다. 이것이 말해주는 건 법이 멀쩡한 사람을 살인자로 둔갑시키기도 하고 또 정반대로 만들기도 한다는 것이다. 굳이 장준하의 가족이 겪는 고통을 들지 않더라도 이러한 법을 사이에 두고 벌이는 대결구도 자체는 ‘신의 저울’이 공평하지 않다는 이 드라마의 전제를 말해준다. 이것은 이 드라마가 법을 통해 보는 현실의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신의 저울 위에 얹어지는 관계라는 무게의 추
‘신의 저울’이 독특한 것은 법정 드라마에 우리네 멜로나 가족드라마의 관계 코드를 연결시켰다는 점이다. 장용하의 사건을 두고 벌어진 모의법정에서 유죄냐 무죄냐를 두고 갈라진 김우빈과 장준하 사이에서 판결을 내려야 하는 영주(김유미)는 갈등한다. 김우빈은 간교하게도 영주의 환심을 사기 위해 결혼 이야기를 꺼내고, 그런 사실을 다 알고 있는 김우빈의 어머니인 송여사(김서라) 역시 이를 부추긴다.

눈을 가린 채 ‘신의 저울’을 들고 있는 정의의 여신처럼 공평해야할 영주에게 그 가린 헝겊을 벗겨내고 자신 쪽을 바라보게 만드는 김우빈이라는 캐릭터는 어쩌면 지금 우리의 법 현실을 말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형적인 삼각관계의 멜로 드라마와, 어울리지 않는 양가의 결혼을 중심테마로 하는 우리네 가족드라마의 틀은 ‘신의 저울’로 들어와서 이처럼 전혀 다른 수단으로 활용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사회가 법이라는 잣대보다는 관계와 지위, 권력 등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세련되지는 않지만 우리의 법 현실을 고민한 흔적
‘신의 저울’이 할리우드의 법정드라마처럼 쿨하게 보이지 않는 건, 바로 이런 법 집행에 있어서의 관계의 문제를 멜로드라마와 가족드라마의 틀 안에서 풀어내기 때문이다. 자식의 죄를 덮기 위해 힘있는 로펌과 사돈을 맺으려는 빗나간 모정, 사랑하는 연인의 애정공세 앞에 흐려지는 판단력, 무엇보다도 가난을 이겨내기 위해 고시를 준비하는 주인공과 그를 헌신적으로 돌보는 여자라는 설정 같은 것들은 법정드라마처럼 보다 전문적이고 세련될 것 같은 소재와는 사뭇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왕의 아들이 거지를 죽였을 때와 거지가 왕의 아들을 죽였을 때는 절대로 똑같을 수가 없다”는 노세라(전혜빈)의 말처럼 어쩌면 바로 이런 신파적이고 얼기설기 엮어진 관계망 속에서 허우적대는 것이 우리네 진짜 법 현실인지도 모른다. ‘신의 저울’이 의미가 있는 것은 그저 서구의 세련된 법정드라마를 흉내내기보다는 조금은 구닥다리라도 우리 식으로 그것을 풀어내려 했다는 점이다.

‘비몽’, 내가 꾸는 꿈이 누군가의 현실이라면

내가 꾸는 꿈이 누군가의 현실이라면. 김기덕 감독의 ‘비몽’은 이 단순한 가정에서부터 시작한다. 진(오다기리죠)이 꾸는 꿈은 란(이나영)의 현실이 된다. 즉 진이 꾸는 꿈을 란은 몽유병 상태에서 행동에 옮기는 것이 이 영화의 단순한 구조다. 하지만 이 단순한 구조는 그 안에 살아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만나면서 복잡해진다. 진은 꿈속에서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여자를 집착적으로 찾아가고, 바로 그 순간 란은 이미 헤어져 만나는 것조차 끔찍한 남자친구를 몽유병상태에서 찾아가게 된다.

의사인지 심령술사인지 모호한 여자(장미희)는 이 두 사람을 앉혀 놓고 한 사람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불행인 당신들은 ‘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바닥에 깔려있는 문양, 즉 하얀 색과 검정 색이 서로 선과 바탕으로 이어진 글씨를 보여주며 알쏭달쏭한 한 마디를 덧붙인다. “검은 색과 흰색은 같은 색입니다.” 문양을 하얀 색으로도 검정 색으로도 읽을 수 있는 것처럼, 음각과 양각이 요철의 차이일 뿐 같은 것인 것처럼, 진과 란은 그것이 꿈과 현실로 나뉘어 있지만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김기덕 감독이 ‘비몽’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이미 장자몽을 연상케 하는 나비와, 중간에 진과 란이 찾아가는 절에서 드러나는 불교의 연기설과의 조합이다. 란만 떼어내서 본다면 그녀의 현실은 자신의 현실이 아니라 누군가(진)의 꿈일 뿐이다. 연기설로 본다면 꿈꾸는 진은 어쩌면 란의 전생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버림받은 진은 또 다른 삶 속(란)에서는 누군가를 버리는 것으로 악연이 이어진다. 바로 이 연기설로 나타날 수 있는 하나이지만 반복적인 두 인물을 영화는 동시공간에 올려놓는다.

영화는 관념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영화가 돋보이는 건 바로 이 추상적인 메시지를 생생하게 구상화하는 영상 미학에 있다. 꿈을 통해 두 인물이 만나는 과정이나 서로를 이해하고 가까워지는 과정, 그리고 한 사람의 꿈에 의해 다른 사람이 파괴되는 과정, 이 끝없는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 취하는 일련의 노력들은 충분히 스토리텔링 그 자체로도 이 관념적 상상을 형상화해낸다. 김기덕 감독은 이 무거운 관념의 이야기를 풀어내면서도 곳곳에 특유의 유머를 곁들이는 여유를 보여준다. 진이 입고 나오는 검은 색 계열의 의상과 란이 입고 나오는 흰 색 계열의 의상은 저 의사가 말한 “검은 색과 흰색은 같은 색”이라는 관념적인 말을 색채의 어울림으로 보여준다.

불교적으로 보면 이 끝없는 환생은 덧없는 꿈이면서 동시에 끝없는 형벌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 고리를 끊기 위해(해탈) 정진하게 된다. 나무에 글씨를 새기는 목각을 하는 진이 수도자의 그것처럼 보이는 것은 이 영화가 가진 불교적 색채 때문이다. 그는 마치 생(生)이라는 나무토막에 어떤 집착적인 욕망을 가지고 글씨를 새겨 넣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잠자는 것을 이겨내기 위해 자신의 몸에 글씨를 새기는 장면은 이 끝없는 욕망으로 생에 글씨를 새겨 넣으려는 행위가 결국은 끝없는 자신의 고통(환생)으로 이어진다는 걸 표현한다.

그런데 한 가지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 있다. 그것은 일본어와 우리나라 말을 아무런 소통의 장치 없이 영화 속에 병치시켰다는 점이다. 진의 일본어를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 알아듣고, 또 우리의 한국말을 진도 다 알아듣는 것처럼 대화를 한다. 이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대목은 어쩌면 이 영화가 또한 김기덕 감독이 꾼 꿈이라는 걸 말해주는 게 아닐까. 김기덕 감독은 ‘비몽’을 통해 진이 그랬던 것처럼 이 끝없는 인연의 고리에서 벗어나기 위한 한바탕 나비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 꿈은 어쩌면 영화를 본 누군가에게는 현실이 될 지도 모른다. 그렇게 ‘비몽’은 당신이 꾸는 꿈(욕망)이 그 누군가에게는 현실이 되고, 그 현실은 또한 덧없는 슬픈 꿈이라는 걸 보여주는 영화다.

‘무릎팍 도사’와 ‘라디오스타’의 생존법

대화를 통해 재미를 이끌어내는 토크쇼는 시대에 따라 그 형태를 달리해왔다. 그것은 시대마다 토크의 방식 또한 변화했기 때문이다. 일방향적 미디어 시대에 주조를 이룬 것은 ‘주병진쇼’, ‘자니윤쇼’같은 1인 토크쇼였다. 하지만 쌍방향 미디어 시대에 1인 토크쇼는 시대착오가 되었다. 일방적인 토크가 갖는 홍보성향이 문제가 되었다. 어디서나 토론이 일어나고 중심 없는 지방방송(?)이 대화의 주류가 된 지금 시대에 홍보성향을 버리고 진정성을 담기 위해 토크쇼는 진화해왔다. ‘무릎팍 도사’와 ‘라디오 스타’는 이러한 대화방식의 변화 속에서 지금의 토크쇼가 어떻게 생존하는 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무릎팍 도사’, 대결 토크로 살아남기
대세로 자리한 집단 MC 체제의 토크쇼 속에서도 ‘무릎팍 도사’는 여전히 1인 체제(물론 유세윤과 올밴이 있지만 이들은 분명 보조자일 뿐이다)로 굳건히 버티고 있다. 하지만 ‘무릎팍 도사’가 버틸 수 있는 건 과거의 1인 토크쇼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무릎팍 도사’는 다른 토크쇼와는 차별된 구도를 갖추고 있다. 그것은 출연진들이 카메라를 향해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옆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대신 MC 강호동은 게스트와 마주보고 있으며 그것을 옆에서 찍는 카메라는 그 장면 자체를 자연스럽게 대결구도로 포착해낼 수 있다.

이것은 물론 과거 1인 토크쇼 중에서도 보이던 장면이다. 하지만 그 과거의 구도에서 MC와 게스트는 기본적으로 카메라를 정면으로 향해 보고 말한다. 즉 시청자에게 직접 토로하는 이 방식 속에서 MC는 게스트가 하고 싶은 얘기를 끄집어내게 하는 보조자의 역할을 맡는다. 하지만 ‘무릎팍 도사’는 시청자에게 직접 토로하려는 게스트의 시선을 MC 강호동이 붙잡아두고는 그가 원하는 방식의 대화로 이끌어간다.

무언가 숨겨져 있던 비화를 끄집어내거나 평소에 보이지 않았던 진솔한 모습을 끄집어내는 방식으로서 이 대결구도의 토크는 과거의 그것과 비교해 신선하다. 대화방식도 공격적이어서 물의를 일으킨 연예인의 경우 바로 그 아픈 이야기가 거침없이 끄집어내진다. 홍보의 느낌이 상쇄되고 진정성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물론 이것은 또한 고도로 우회된 홍보의 방식이기도 하다. 물의 연예인은 이 적나라한 이야기 끝에 가서 결국 면죄부를 받게 된다. ‘무릎팍 도사’가 무당 같은 도사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건 이 한바탕 토크의 굿판을 통해 그 연예인의 이미지가 새롭게 태어나게 되기 때문이다.

‘라디오스타’, 중심 없는 대화로 살아남기
‘무릎팍 도사’가 1인 토크쇼가 가진 홍보성향을 대결 구도의 토크로 넘어섰다면, ‘라디오스타’는 중심이 없는 토크로 그 한계를 뛰어넘고 있다. ‘라디오 스타’는 모두 카메라 정면을 보고 빙 둘러앉아 있지만 중요한 것은 메인 MC가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토크가 어떤 중심을 갖고 흘러가기보다는 산발적으로 쏟아대는 말들의 상찬을 그대로 여과 없이 보여준다는 장점이 있다.

이러한 방식은 고정 MC는 물론이고 게스트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고정 MC들은 게스트를 초대해놓고도 저들끼리 서로 자신이 메인 MC라고 다투면서 게스트를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게스트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하면 가차없이 잘라내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라디오스타’만의 독특한 대화방식이다.

혹자는 이런 방식이 게스트를 배려하지 않는다 하여 비판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대화방식은 이제 디지털 세대들에게 일상적인 것이 되고 있다. 대화방에 들어가 손가락에 불이 나게 타자를 쳐본 적이 있거나,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지는 메신저 대화를 해본 경험이 있다면 이 대화방식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것인지 알 것이다.

1인 토크쇼가 대세였던 시대를 ‘집중’의 시대였다면, 집단 토크쇼가 대세를 이루는 지금 시대는 ‘정신분산’의 시대다. 수많은 정보들 속에서 어느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은 오히려 위험하다. 이것은 마치 모니터에 수없이 많은 창들을 띄워놓고 어느 하나에 집중하지는 않지만 모든 창을 통제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표상한다. 토크쇼는 그 달라지는 담화방식을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프로그램 형식이며 ‘황금어장’은 바로 그 변화양상을 가장 잘 보이고 있는 토크쇼다.
(본 원고는 청강문화산업대학 사보 100도씨(100C)에 게재된 원고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