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박2일’ 야구장 해프닝이 말해주는 것

시청률 지상주의가 판치는 TV 세상에서 1등이란 의미는 두 가지다. 그것은 ‘최고’라는 의미와 더불어, 늘 비판의 전면에 노출된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절대 넘보기 힘들었던 드라마 시청률과의 대전에서조차 도전장을 내밀었던 예능의 지존, ‘무한도전’은 그 정상의 자리에 있을 때는 최고로 찬양(?)되었지만, 하하가 군복무로 빠지는 시점을 기해 하향곡선을 긋게 되자 가장 뭇매를 많이 맞았다. “식상하다”거나 “이제 한계”라는 비판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고, 리얼 버라이어티의 특성상 외부에 더 노출되는 팀원들의 행동들은 쉽게 구설수에 올랐다. 이런 뭇매는 시청률이 급락해 더 이상 논란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 상황에 이르러서야 겨우 잦아들었다.

이러한 1등이 순식간에 공공의 적(?)이 되는 상황은 지금 ‘1박2일’에서 반복되고 있다. ‘패밀리가 떴다’가 급부상하는 상황에 ‘1박2일’은 1주년 기념으로 간 백두산 여행을 기점으로 하락의 길을 걸었다. ‘무한도전’이 겪은 대로 ‘1박2일’에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비판들이 쏟아져 나왔다. ‘1박2일’의 경우 더 불리하게 된 것은 그간 언론에 의해 부풀려진 ‘무한도전’과의 대결구도 때문이다. ‘무한도전’의 지류로서 청출어람을 해온 ‘1박2일’의 그간의 승승장구는 ‘무한도전’의 하락과 어떤 연관을 갖는 것으로 오인되기에 충분했다. ‘1박2일’은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취지로 1년 전에 갔었던 충북 영동을 다시 갔지만 그렇다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태백의 ‘배추고도’, 귀네미 마을 편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간 ‘1박2일’이 보여준 재미를 거의 재연해냈지만, 결과적으로 나타난 시청률 하락에 대해 시청자들은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미 기울어진 대세는 ‘1박2일’의 어떤 노력도 먹히지 않게 만들었다. 여기에 결국 터질 게 또 터지고 말았다. 롯데 자이언츠와 두산 베어스의 경기장에서 촬영을 한 ‘1박2일’이 구설수에 오른 것이다. 리얼 버라이어티의 특성상 현장에서 일반인들과의 접촉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 접촉은 보는 시각에 따라 전혀 다르게 판단될 수 있다.

‘1박2일’이 승승장구했던 시기에 톡톡히 재미를 보게 해준 것은 다름 아닌 대민 접촉이었다. 독도 같은 오지를 직접 찾아가거나 ‘전국노래자랑’에 참여하고, 게릴라 콘서트를 하는 등의 대민 접촉은 ‘1박2일’ 멤버들의 서민적인 이미지를 오히려 더 부각시켰다. 연예인이라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존재가 대중들과 직접 호흡하는 장면들은, 멤버들의 겸손한 자세로 읽힐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미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이러한 대민 접촉은 정반대로 읽히게 된다. 물론 촬영과정에서의 문제점이 있을 수 있지만, 야구장에 투입된 멤버들에 쏟아지는 비난의 초점은 그 시점의 이동에서 발생한다.

2등이나 3등에 대해 이해하는 입장에 서 있던 대중들도 1등에 대해서는 좀더 비판적인 입장으로 선회한다. 특히 그 1등이 어떤 하락의 기미를 내보이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사실상 2등을 하던 리얼 버라이어티의 멤버들은 1등을 차지했다고 해서 그다지 태도가 달라진 것이 없지만 비춰지는 양상은 다르다. 이수근이 방송에서 언급한 “이제 1년 만에 막 입을 열려고 하는데 너무 나대지 말라”고 한 시청자게시판의 이야기는 의미심장하다. 주목받지 못한 상황에서 동정 어린 응원을 받았지만 이제 막 주목받는 상황에서 나대지 말라는 소리를 듣는 이 변화는 바로 ‘1박2일’이 지금 처한 상황이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이든 앞으로든 1등에 오를 리얼 버라이어티가 직면할 상황이기도 하다.

이렇게 된 것은 두말 할 것 없이 지나친 시청률 지상주의의 결과다. 모든 것을 시청률로 판단하게 될 때, 프로그램의 진짜 내용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순위에만 집중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언제까지 이 수직적인 순위 경쟁에만 매달릴 것인가. 1등, 2등이라는 숫자경쟁이 아니라 각 프로그램마다 다른 형식이나 내용, 아이템을 다양성의 관점에서 볼 수는 없는 것일까.

워킹맘은 없고 불량남편만 활약하는 ‘워킹맘’

‘워킹맘’에는 ‘불량남편 길들이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언뜻 보면 이 제목과 부제는 어떤 상관관계를 가진 것인다. 워킹맘, 최가영(염정아)이 불량남편 박재성(봉태규)에 의해 번번이 발목을 잡히는 상황은 실제로 이 상관관계가 더욱 신빙성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것은 드라마가 그려놓은 상관관계일 뿐이다. 현실에서 워킹맘의 문제와 불량한 남편의 문제가 겹쳐지는 부분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이 땅에 살아가는 워킹맘들의 고민은 남편이 불량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사회적인 시스템의 부재와 아줌마 직장인을 바라보는 편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 드라마가 워킹맘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하는 점은 기획의도를 들여다보면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기획의도에 들어가 있는 내용은 총 세 가지. 첫째는 워킹맘의 친정엄마 만들기이고 둘째는 짝퉁 친정엄마의 육아파업 선언, 셋째는 연하남편 인간개조 프로젝트다. 즉 워킹맘의 문제를 친정엄마가 없어서라고 상정하고, 그 친정엄마조차 파업을 선언하는 상황을 연출하며 이로써 육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철부지 연하남편을 개조한다는 내용을 풀어내겠다는 것이다. 작가는 워킹맘의 문제가 육아문제라는 건 인식하고 있지만, 그것의 해결책이 사회(직장 같은)와의 대결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작가는 육아를 대신해줄 그 누군가를 찾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이처럼 주제의식에서 한참 멀어져 보이는 ‘워킹맘’이 드라마를 끝까지 보게 만드는 어떤 힘이 있었다는 것은. 그 해답은 바로 코미디에 있다. 이 드라마의 진짜 힘은 워킹맘이라는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대한 따뜻한 시선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불량남편이 길들여지고, 없는 친정엄마가 생기고, 육아파업을 선언하는 친정엄마가 결국에는 자식을 맡게되는 그 복잡다단하지만 얽히고 설키는 코미디 상황에 있기 때문이다.

주제의식에서 멀어지는 대신, 코미디를 선택하면서 워킹맘 당사자인 최가영보다 더 중심에 서게 된 박재성과 고은지(차예련)는 매번 코믹한 상황 속에 던져져 시청자들을 포복절도하게 만들면서 이 드라마의 실제적인 주인공이 된다. 여기에 봉태규와 차예련의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는 김현희 작가 특유의 코미디에 제대로 살을 입힌다. 실로 이 작가의 재능은 사회적 문제를 극화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코믹한 상황을 연출해내는데서 반짝반짝 빛난다.

‘워킹맘’은 그다지 심각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꽤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드라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불량남편 길들이기’라는 부제에 해당하는 코미디를 지향하면서 이 드라마는 정작 제목인 ‘워킹맘’을 잃어버린다. 따라서 해외출장의 기회 앞에서 서둘러 최가영이 일보다는 가정을 선택하고 불량남편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이 드라마의 결말은 워킹맘으로서의 사회적 성공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길들여진 불량남편과의 재결합에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최가영에게 육아문제는 어떤 것도 해결된 것이 없는 반면, 불량남편은 확실히 길들여졌다. 차라리 워킹맘이라는 거창한 제목을 달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하지만 그렇게 했다면 이 드라마에 대한 화제성이나 주목도는 그만큼 떨어졌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의식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제목을 붙일 필요가 있었을까.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니 편하게 웃고 즐기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워킹맘’같은 사회적 문제를 정면으로 제시하는 제목을 달고 있는 드라마를 그저 즐기면서만 볼 수 있을까.

세상엔 실제 워킹맘들이 많고 그들은 이 드라마의 제목만 보고도 단박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삶이 피곤한 워킹맘들이니 그저 이 드라마를 보며 실컷 웃고 즐기면 되지 않겠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실컷 웃다가 끝에 가서 남는 어딘지 부족한 씁쓸함은 코미디로 전화하면서 이 사회적 문제가 결국은 내 가족이 감당하고 해결해야할 문제로 환원된 그 부분에서 비롯되는 것일 것이다. 이 시대 워킹맘들이 원하는 건, 박재성의 개과천선이 아니라, 최가영이 마음놓고 출장을 갈 수 있을 정도로 편견 없는 사회적 풍토다.

평준화된 TV 프로그램, 그 생존법과 한계

지금처럼 방송사간의 프로그램 경쟁이 치열했던 적이 있을까. 월화수목의 드라마 전쟁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해졌고, 주말의 예능 전쟁은 그 판도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엎치락뒤치락 하고 있다. 최근에는 ‘주중 드라마, 주말 예능’ 같은 틀조차 무색해지고 있는 상황. 월요일 밤의 예능 전쟁과 주말 드라마 경쟁은 점점 전 요일로 확산되면서 전방위적인 방송사간의 프로그램 대전을 예고하고 있다.

소재나 완성도에서 평준화된 TV
그런데 경쟁구도를 벗어나 각각의 프로그램들을 중심으로 이 가을의 TV를 바라보면 우위를 따질 수 있기보다는 각각의 개성들이 강하고, 나름대로의 완성도를 답보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에덴의 동쪽’이 대작으로서의 완성도 높은 시대극을 그리고, ‘타짜’는 부동의 소재인 허영만 원작을 각색했으며, ‘베토벤 바이러스’는 김명민 포스와 클래식소재라는 개성이 강하다. 반면 ‘바람의 나라’는 ‘주몽’과는 또 다른 고민하는 왕을 그릴 새로운 고구려 사극이며, ‘바람의 화원’은 김홍도, 신윤복 같은 이름만 들어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퓨전사극을 기대하게 만든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 드라마들은 소재나 완성도면에서 어느 것의 우위를 따지기 어려울 정도로 평준화되었다.

이것은 이미 여러 차례의 진화 단계를 거치며 다양해진 주말의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른바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들은 어떤 계보를 형성하면서도 즉각적으로 서로의 프로그램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진화를 거듭해왔다. ‘무한도전’에서 비롯된 여행 컨셉트가 ‘1박2일’의 야생을 거쳐, ‘패밀리가 떴다’의 심리게임으로 이어졌고, ‘무한도전’의 리얼 버라이어티와 짝짓기 프로그램이 이종교배되면서 등장한 ‘우리 결혼했어요’의 연애모드는 거꾸로 ‘무한도전’과 ‘패밀리가 떴다’의 프로그램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이들 프로그램들은 동시간대 경쟁하지만 모두 각각 한번씩은 수위에 올랐던 적이 있을 만큼 각각의 완성도를 구축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

치열해진 편성전쟁과 새로움에 대한 강박
치열한 경쟁이 만들어낸 결과지만 이제 TV의 드라마와 예능은 선뜻 부동의 우위를 논할 수 없을 정도로 평준화되었다. 이 완성도나 소재면에서 승패를 판가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그 수위를 결정하는 것은 두 가지다. 그 하나는 편성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움이다. 드라마가 시작할 때마다 벌어지는 편성전쟁이나, 하루에 2회분을 방영하거나 스페셜을 앞뒤로 배치하는 등의 변칙 편성이 일반화되고 있는 건 그 때문이다.

예능에 있어서 치열해진 건 시간대 경쟁이다. ‘1박2일’과 ‘우리 결혼했어요’, 그리고 ‘패밀리가 떴다’는 각각 ‘해피선데이’, ‘일요일 일요일 밤에’, ‘일요일이 좋다’라는 프로그램 속에 존재하면서 다양한 시간대 공략으로 시청률에 영향을 주었다. 초반 ‘1박2일’이 강력한 힘을 발휘할 때는 다른 프로그램들이 같은 시간대를 피하기 위한 전략을 썼다. 하지만, 이제 그 힘이 약화되는 느낌을 보이자 ‘우리 결혼했어요’는 ‘1박2일’과 같은 시간대로 이동해 전면전을 예고하고 있다.

한편 편성 전쟁만큼 치열해진 건, 새로움에 대한 강박이다. 드라마에서 이제는 단순한 멜로나 트렌디가 통하지 않는 건 그 새로움이 없기 때문이다. 올 가을 드라마 대전이 볼만한 것은 거의 모든 드라마들이 소재면에서나 스타일면에서 새로움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예능 프로그램의 상황은 더 절실하다. 기본적인 리얼 버라이어티의 형식이나 스타일이 정착되고 또 성공한 코드들이 곧바로 다른 프로그램에 소비되는 상황에서 프로그램 자체가 가진 생명력은 그만큼 짧아질 수밖에 없다. 이 상황에서는 새로움이 추가되면 그 자체로 전세는 역전될 가능성이 높다. ‘패밀리가 떴다’가 성공한 것은 ‘1박2일’에 없던 새로움 (예를 들면 여성 출연자라거나 심리게임 같은)에 기댄 바가 크다. ‘우리 결혼했어요’가 새로운 멤버로 변화를 시도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치열한 시청률 경쟁, 시청자들에게 좋기만 할까
물론 시청률 경쟁은 어떤 면에서는 시청자들에게 반가운 상황이다. 그만큼 질적으로 완성도 높은 작품이 아니면 경쟁에서 밀려날 수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좋은 프로그램을 시청자들은 더 많이 즐길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방영시간이 조정되는 상황이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그다지 반가운 일은 아닐 것이다. 또한 한 프로그램에서 봤던 성공한 소재들이 여기저기서 똑같이 베껴지는 상황 역시 시청자 입장에서 좋을 리가 없다. 이것은 끝없이 새로운 소재나 스타일을 발굴해낸 그 원본의 아우라를 무한복제를 통해 순식간에 사라지게 만든다.

그런데 이러한 시간대 경쟁은 지금 시대에 얼마나 유용한 것일까. 하드웨어의 변화가 곧바로 소프트웨어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는 것처럼 작금의 디지털화된 방송환경의 변화에도 시청 패턴의 변화는 아직까지 아날로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실상 시간대를 무너뜨린 디지털 환경에서 동시간대의 시청률 경쟁은 무색해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그 변화의 속도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는 점이다. 대중화된 IPTV와 HDTV의 보급은 이 변화를 이끄는 주동력이다. 이 하드웨어의 변화가 말해주는 건 이제 경쟁의 시각보다는 다양성의 시각으로 프로그램을 바라봐야 한다는 점이다. 이제 시청자들은 ‘베토벤 바이러스’와 ‘바람의 나라’, 그리고 ‘바람의 화원’을, 그리고 ‘1박2일’과 ‘우리 결혼했어요’ 그리고 ‘패밀리가 떴다’중 하나를 선택하게 강요받길 원하지 않는다. 원한다면 모든 프로그램을 볼 수 있는 시대가 아닌가.

‘에덴의 동쪽’, 붕괴된 가족을 복기하다

형 동철(김범)이 동생 동욱이 저지른 방화를 대신 뒤집어쓰고 소년원에 들어간다거나, 그 진실을 어머니에게 비밀로 숨긴다거나, “목숨걸고 공부해라”던 형과의 약속을 지키고 동욱이 서울대 법대 수석으로 합격을 한다거나 하는 ‘에덴의 동쪽’의 에피소드들은 옛 드라마들이 가지고 있던 가치관들을 그대로 재연한다. 거기에는 우리가 흔히 구태의연한 드라마들이라 비난하던 가난, 원한, 복수, 출생의 비밀, 재벌과 얽히는 삼각관계 같은 신파의 코드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이 70년대에나 어울릴 법한 코드들 앞에 21세기를 살고 있는 시청자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시간을 되돌려 가족을 복기하다
‘에덴의 동쪽’에서 어린 동철(신동우)은 아버지를 만난 자리에서 하늘을 향해 손을 벌렸다가 가슴을 툭툭 치고 입가로 손을 가져간 뒤 엄지손가락을 앞으로 쭉 내민다. 그 수신호는 자신이 아버지를 “하늘만큼 사랑한다”는 뜻. 이 수신호는 이 드라마에서 어떤 대사보다 더 강렬하게 가족 간의 애정을 표현하는 장치다.

죽은 아버지의 무덤가에서 너무 놀라 말조차 잊어버린 동철은 마지막 가는 길에 이 수신호로 대신 마음을 전한다. 동생이 홧김에 저지른 방화를 대신 뒤집어쓰고 마을을 떠날 때, 열차 위에 오른 동철이 따라오는 동생 동욱에게 이 수신호를 보낸다. 그리고 그는 외친다. “너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내 동생이다!”라고.

만일 이 드라마의 시대가 현재라면 어떨까. 아마도 가족 간의 사랑은커녕 따뜻한 눈길조차 어색해져 버린 작금의 상황에 이 수신호는 코미디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다행스럽게도 그 시대가 70년대인데다 장소도 태백 황지의 막장 탄광촌이다. 시간을 과거로 되돌려놓자 지금 시대라면 촌스러울 수도 있는 노골적인 가족애의 표현들은 진정성을 갖게 된다.

무엇이 이 가족을 붕괴시켰나
이 드라마는 처음부터 끝까지 가족을 그 중심에 세우고 있다. 즉 신태환(조민기)이라는 한 인물에 의해 붕괴되고 해체된 가족이 복수심과 가족애를 무기로 세상과 맞서는 이야기다. 신태환이라는 인물을 악역으로 세우면서 최초로 내세운 에피소드가 그의 애인이었던 미애(신은정)의 아기를 강제로 지우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로써 신태환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가족을 붕괴시키는 자로서 자리매김한다.

이 반대편에 선 인물은 동철이다. 그는 신태환이 붕괴시키려는 가족을 어떻게든 일으켜 세우고 묶어두려고 노력한다. 이역만리 마카오로 챙(박찬환)에게 억지로 끌려가면서 “가족을 버리고 못가요! 난 죽어도 돌아가야 해요.”라고 외치는 동철은 가족을 지키는 자, 즉 가장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낸다. 이렇게 동철과 동철의 가족들이 서로를 절절히 생각하게 된 것은 모두 아버지의 부재와 관련이 있다.

가족을 위해 매일 땅속을 파고 들어가는 막장의 노동을 짊어져야 했던 아버지에게 동철이 건네던 새장이 망가져 버렸을 때, 그것은 단지 아버지의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탄광일로 늘 어깨에 훈장처럼 달고 다니던 아버지의 멍 자국이, 달동네로 연탄을 나르며 공부를 하던 동욱의 어깨에도 똑같이 대물림되는 것은 이 젊은이들에게 아버지의 부재가 만들어낸 굴레이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부재는 단순히 신태환과 이기철(이종원)의 사사로운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의 현재를 만든 개발과 노동의 대립에서 비롯된 시대의 아픔이다.

붕괴된 가족이 세상과 맞서는 방법
이 드라마에서 동철의 어머니가 둘이라는 점은 이채롭다. 아버지 부재의 시간을 버텨내기 위해 두 명의 어머니가 필요했다는 점이다. 하나는 세상과 직접적으로 맞서고(양춘희-이미숙), 다른 하나(정자-전미선)는 아이들을 보듬는다. 또 그들은 힘겨울 때 서로를 돕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을 그렇게 한 울타리에 묶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이기철이라는 이미 사라져버린 가장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유독 아버지에 대한 집착이 끈질기게 그려진다. 칼에 맞은 챙을 구해준 동철에게 “네가 날 업고 뛸 때 애비 짓이라도 할 생각이었다”고 하는 챙의 진술은 인상적이다. “형이 있다죠?”하고 혜린(이다혜)이 동욱에게 물었을 때, 동욱이 “네 내겐 아버지 같은 존재죠”라고 말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동철이 돈을 벌기 위해 세상을 전전하는 것은 그 부재한 가장을 메우려는 몸부림이고, 동철의 서울대 법대 수석입학은 그것에 대한 자식 같은 동생의 화답이다. 아버지는 늘 가족을 위해 떨어져 있고(죽었거나 도망중이거나), 가족들은 늘 그 아버지의 귀환을 기다린다. 그리고 그것은 떨어져 있어도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이역만리에서도 신문에 난 법대 수석 기사를 통해, 전화 한 통화를 통해 더 절절해지는 관계다.

70년대 개발시대를 살았던 원죄의식
드라마가 어떤 복수극의 틀을 가져왔다면 지금 가족들이 기다리는 건 아버지가 부재한 자리를 채워줄 동철의 귀환이다. 법대에 수석 입학한 동욱이 “형 만한 아우 없어요”라고 말하고, 합격 환영식장에 가는 동욱에게 춘희가 “네 형도 같이 간다고 생각혀”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들의 동철에 대한 그리움은 없어도 있는 자로서 자리할 정도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시청자들은 이미 이 운명의 쌍곡선을 보아버렸다. 복수를 위해 미애가 아기를 바꾸는 장면을. 그러니까 우리는 이미 이 절절한 형제애와 가족애로 똘똘 뭉친 이들이 사실은 철천지 원수지간이라는 것을 안다. 이것은 거꾸로 신태환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붕괴시키려 했던 것이 사실은 자신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은 이 끈끈한 혈연을 전면에 내세운 드라마 속에서 어떤 파란을 예고한다.

이것은 70년대 개발시대를 살아냈던 이들의 원죄의식을 끌어낸다. 개발시대, 그 어깨에 지워질 날 없는 멍 자국을 훈장으로 만들었던 건 가족이라는 우선적인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던 그 때, 누군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가족이 터전을 잃고 피눈물이 흘린 자리에 울타리를 세우고 살고 있었다. 개발이란 이처럼 자원의 파헤침(파괴)을 전제하는 것이다.

이 흔하디 흔한 출생의 비밀이란 코드가 이 드라마에서 기능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가족의 역할 바꾸기, 혹은 상황 뒤집어보기를 간단하고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에덴의 동쪽’은 먼저 70년대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현재 점점 해체되어만가는 가족을 복기해 놓는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그 가족에 대한 향수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끈끈하게 만들어버린 시대의 아픔을 거기서 들여다보고는, 이내 가족을 넘어 인간애를 바라다본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이 지금 이 21세기에도 이 70년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유효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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