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트콤의 끝없는 영역파괴, 어디까지?

‘크크섬의 비밀’이라는 시트콤이 걸쳐있는 영역은 드라마와 예능의 중간쯤 되는 위치다. 이 시트콤은 미드 ‘로스트’가 가진 미스테리와 서스펜스를 가져와 코믹하게 재구성한다. 무인도에 표류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신과장(신성우)이 하늘을 향해 장중하게 절규하는 그 장면은 ‘로스트’의 비장함을 담지만, 다음 순간 마침 지나가던 갈매기가 싼 똥이 신과장의 입으로 들어가는 장면은 그 비장함을 웃음으로 전화시킨다.

그러나 이 ‘크크섬의 비밀’은 또한 ‘1박2일’같은 야생 여행 버라이어티의 시트콤 버전으로 볼 수도 있다. 거기에는 똑같이 ‘야생에서의 생존’이 있으며, 한편으로는 여행에 대한 로망이 있다. ‘1박2일’이 개성적인 캐릭터들을 구축하고 있는 것처럼 ‘크크섬의 비밀’또한 아부하는 김과장(김광규), 어딘지 어리버리한 신과장, 소심한 윤대리(윤상현) 같이 웃음의 포인트를 갖춘 캐릭터들이 포진하고 있다. 물론 리얼리티냐 아니냐의 차이가 있겠지만 좀 과장되게 표현하면, 이 시트콤은 여름 시즌에 맞춰 무인도 특집으로 만들어진 ‘1박2일’같은 버라이어티를 매일 보여주는 셈이다.

이처럼 ‘크크섬의 비밀’이 ‘로스트’와 ‘1박2일’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그 시트콤이라는 장르의 속성 때문이다. 시추에이션 코미디의 준말인 시트콤은 말 그대로 풀어놓으면 콩트 코미디와 거의 유사한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시트콤은 그 분류가 애매하다. SBS는 시트콤을 드라마로 분류하는 반면, KBS는 예능과 드라마 사이를 왔다갔다하고, MBC는 아예 예능으로 분류한다. 시트콤을 예능으로 분류하는 것은 미국의 경우를 따른 것이다. 미국은 시트콤을 드라마가 아니라 쇼로 생각한다.

무엇보다 ‘크크섬의 비밀’이 다른 시트콤보다 드라마와 예능 사이에서 그 영역이 더 모호해 보이는 것은 세트를 탈피했다는 점에 있다. ‘코스비 가족’ 같은 전통적인 시트콤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듯이 시트콤하면 떠오르는 건, 세트다. 하지만 ‘크크섬의 비밀’은 거의 대부분이 야외촬영이다. 이것은 이 시트콤이 미국 드라마 ‘로스트’를 패러디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보면 최근의 트렌드가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최근의 프로그램들은 이제 세트가 갖는 인위적인 느낌을 배제하고 싶어한다.

이 야외라는 공간은 시트콤의 특징이었던 고정된 장소를 벗어났다는 점에서 좀더 드라마처럼 보이게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현재 예능 프로그램의 트렌드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처럼 ‘크크섬의 비밀’은 기존의 시트콤보다 더 드라마와 예능 사이의 영역을 모호하게 하는 점이 있다. 이것은 시트콤의 진화이면서, 현재 ‘우리 결혼했어요’같은 가상 버라이어티쇼(이것은 시추에이션 버라이어티쇼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드라마와 예능 사이의 영역 파괴를 징후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크크섬의 비밀’이 ‘로스트’가 될지, ‘1박2일’이 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시트콤이 현재 변화되고 있는 방송의 흐름을 정확히 파고들고 있기에 어떤 기대감을 갖게 만든다는 점이다. 어쨌든 덕분에 우리는 여름 내내 매일같이 ‘1박2일’같은 야생 버라이어티를 즐기게 됐다.

그들은 어떻게 방송3사 모두의 대표MC가 됐을까

현재 예능 프로그램의 대표MC를 말하라면 누구나 유재석과 강호동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이미 방송3사의 대표적 예능 프로그램을 장악했다. 강호동이 MBC ‘무릎팍 도사’, KBS ‘1박2일’, SBS ‘스타킹’의 메인MC라면, 유재석은 MBC ‘무한도전’, KBS ‘해피투게더’ 그리고 SBS ‘패밀리가 떴다’의 메인MC로 둘 다 방송3사 예능의 그랜드 슬럼을 달성한 셈이다. 이들의 이런 놀라운 성공비결을 알고싶다면 먼저 이 방송3사의 예능 프로그램 별로 이들의 캐릭터 설정이 조금씩 다르다는 점을 주목해서 봐야 한다.

뚝심의 강호동, 까칠하게, 친형처럼, 머슴처럼
강호동이 가진 기본 캐릭터는 거의 대개가 씨름선수 시절에서부터 가져온 것들로 그것은 힘과 순발력이다. 때론 뚝심 있게 밀어붙이는 힘의 승부사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대단히 섬세한 순발력이 자리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무릎팍 도사’가 극대화시킨 부분은 ‘까칠함’이다. 이 도발적인 토크쇼에서 강호동은 특유의 힘있는 말을 구사하면서 섬세하게 상대방의 허점(?)을 노리는 캐릭터로 자신을 설정한다.

반면 ‘1박2일’에서 극대화된 것은 ‘친형 같은’ 이미지다. 여기서는 순발력보다는 힘이 더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활용된다. 때론 무모하리 만치 바보스럽게 고집을 피우지만 그로 인해 저 스스로 당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우직하게 동생들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한편 ‘스타킹’에서는 노련하지만 ‘머슴처럼’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이미지를 구사한다. 프로그램 특성상 출연한 일반인들의 재미요소를 순발력 있게 잡아내면서, 그 재미요소에 대해 힘있는 리액션을 보여주는 모습은 이 프로그램에서의 강호동의 입지를 공고히 하게 만든다.

균형감각의 유재석, 1인자, 2인자, 3인자
탁월한 순발력의 소유자이자 프로그램 전체를 조율하는 특별한 균형감각을 지닌 유재석은 바로 그 빠른 상황판단을 바탕으로 프로그램의 특징을 잘 살리는 MC다. ‘무한도전’에서 그가 구축한 이미지는 1인자다. 물론 여기서 이 1인자는 흔히 생각하는 수직적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1인자가 아니다. ‘무한도전’에서 유재석이 보여준 탁월한 점은 수평적 카리스마를 구사하면서 1인자 같지 않은 1인자의 캐릭터를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 ‘해피투게더’에서의 유재석은 2인자 이미지가 더 강하다. 이 프로그램에서 유재석은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출연진들의 재미요소를 잡아내고 극대화시키는 버팀목 역할에 더 치중한다. ‘해피투게더’가 한때 고전하다 최근 다시 정상의 궤도에 오른 것은 바로 이 유재석의 버팀목 역할로 주변인물들, 예를 들면 박미선이나 신봉선 같은 고정 출연자나 게스트들의 캐릭터가 살아났기 때문이다. 반면 새로 시작한 ‘패밀리가 떴다’에서 유재석은 3인자의 이미지를 자처한다. 늘 지고 깨지는 역할을 자청하는 이유는 대개의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초반부가 그러하듯이 그 힘든 과정 속에서 캐릭터가 더 잘 구축된다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라고 해도 방송3사의 그것도 대표 예능 프로그램을 동시다발적으로 해나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중 가장 어려운 점은 아마도 이미지 관리일 것이다. 같은 이미지를 반복해서 활용한다면 그만큼 빠르게 캐릭터가 소진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러니 이 도전에 맞서 이들이 구사하는 것은 프로그램 성격에 맞는 캐릭터의 변신이다. 이제 우후죽순 많아지는 예능 프로그램들 속에서 연기자의 연기변신처럼 예능인의 캐릭터변신(혹은 설정 변신)은 필수적인 것이 될 지도 모른다.

‘엄마가 뿔났다’, 역전된 가족 드라마를 보여주다

가족 드라마의 전형적인 구조 하나. 서로 다른 계층의 두 가족이 자식들 결혼 때문에 얽히고 설킨다. 서로 다른 생활습관과 빈부격차로 맘에 안 들지만 자식들이 사랑한다니 어쩌겠나. 어쩔 수 없이 결혼을 승낙해주고 사돈지간이 되면서 서로 부딪치게 되지만 결과적으로는 양가가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는 이야기.

‘엄마가 뿔났다’가 초반부에 보여준 구조도 이와 다르지 않다. 김한자(김혜자)의 자식들은 하나 같이 엄마의 바람을 무너뜨리고 어울리지 않는 상대방과 결혼한다. 첫째 딸은 애까지 딸린 이혼남과 결혼하고, 둘째 딸은 격차가 너무 많이 나는 상류층 자제와 결혼하며, 장남은 어느 날 불쑥 임신해 들어온 연상의 여자와 등 떠밀리듯 결혼한다.

이 정도면 제목에 걸맞게 엄마가 뿔이 날만도 하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자식들 때문에 뿔이 나는 그 엄마의 이야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 드라마가 진짜 하고 싶은 얘기는 어쩌면 그 뿔난 엄마의 다음 반응이었는지도 모른다. 뒤늦게 차려준 생일상을 받아놓고 김한자는 시아버지에게 폭탄선언을 한다. “아버지 저 집에서 나가고 싶어요.”

사실 이 폭탄선언이 있기 한참 전부터 이 드라마가 가족드라마의 새로운 방향을 보여줄 것이라는 전조가 있기는 했다. 그것은 김한자의 시아버지 나충복(이순재)의 로맨스 그레이가 시작되면서부터다. 팔순의 나이에 사랑에 빠진 나충복은 안 여사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도 심장병에 걸린 듯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한다.

자식 때문에 부모가 힘겨워하고 결국에는 희생하고 마는 전형적인 가족드라마의 구조 속에서 이 드라마는 그 상황을 뒤집어놓는다. “나이 들어 주책”이라 스스로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자신의 변화에 놀랍고 행복해하는 나충복과, 좀 과하다 싶은 ‘1년 간의 휴가’를 얻어내고 새로 얻은 원룸으로 가는 길에 “너무 좋아!”하고 소리치는 이 부모들 앞에서 이제는 거꾸로 자식들이 머리가 아파진다.

그렇다고 굳이 집까지 나갈 건 뭐가 있냐 생각할 수도 있지만, 김한자의 이 선택은 사실 이 땅에 사는 모든 주부들의 로망이 아닐까. 진짜 주부들의 로망은 불륜 같은 탈선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기 삶을 찾는 것이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며느리라는 이름으로, 혹은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정작 자신의 이름, 김한자와 나충복이라는 이름은 점점 잊혀져왔다는 것을 아는 순간 그들은 인생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엄마가 뿔났다’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드라마 속에서라도 한 평생을 이름 없이 살아온 주부들의 자기 이름을 찾아주겠다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 앞에 희생하던 기존의 가족드라마를 뒤집어 이제는 부모의 자기 삶 찾기에 자식들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 드라마는 강변하고 있는 듯 하다. “나이 들어 주책이라고? 우리에게도 인생은 있어!”라고.


칼보다 말을 선택한 정치사극, ‘대왕 세종’

대중들에게 사극이란 어떤 이미지로 자리하고 있을까. ‘조선왕조실록’으로 상징되는 과거의 정통사극은 그 중심이 대사에 있었다. 주로 편전에 모여 갑론을박을 하거나 누군가의 방에 모여 모의를 하고, 때로는 여인네들의 암투가 벌어지는 그 중심에는 늘 말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하사극, 퓨전사극들이 등장하면서 말의 자리만큼 위상이 높아진 건 볼거리다. 이런 시점에 ‘대왕 세종’같은 칼보다는 말의 힘을 더 믿은 성군을 다룬다는 것은 어찌 보면 도전이 아닐 수 없다.

볼거리의 시대에 말의 사극이 갖는 한계
그렇지 않아도 현실에서의 정치는 마치 탁상공론처럼 허망하게만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러니 가뜩이나 정치인들의 정치에 대한 혐오와 무관심이 팽배한 상황에서 본격적인 정치사극이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은 많지 않다. 오히려 정치사극을 표방하면서 정치에 대한 환타지를 심어주는 ‘이산’같은 선택이 성공 확률은 더 높을 것이다. 거기에는 적어도 현실에서 정치를 혐오하게 만드는 명명백백한 진실의 승리나 선한 선택의 존중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왕 세종’이 선택한 진짜 정치의 세계 속에서 이런 배려는 나약함과 동일시된다.

‘대왕 세종’에서 선악구도는 순진한 어린아이들의 장난처럼 취급된다. 세종(김상경)은 오히려 자신을 견제하라며 정적이었던 박은(박영지)을 집현전의 수장으로 세우고, 양녕대군(박상민)을 왕재로 세우려했던 황희(김갑수)를 최측근으로 끌어들인다. 때론 적으로 판단되었던 허조(김하균)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으면서 세종에게 유리한 입장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이 ‘대왕 세종’이라는 드라마의 판은 칼 하나로 반을 나눌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각자 자신들의 입장을 가진 정치인들이 존재하면서, 특정한 사안에 대해 각자의 입장을 갖는데 이 미묘한 입장 차가 정치사극의 묘미를 만들어낸다.

인물의 선악구도가 아닌 정치의 대결구도
이 사극의 진짜 재미는 그 독특한 구도에 있다. 주인공인 세종의 마음은 늘 민심을 향해 있으나 아군이든 적군이든 자신의 밑에서 실제적인 정치를 수행하는 신하들은 민심 자체보다는 정책의 명분에 더 휩싸인다. 조선만의 역법을 갖겠다는 세종의 마음은 그것이 민초들의 궁핍한 삶을 해결해줄 것이라 믿는 반면, 이를 반대하는 조말생(정동환)은 ‘조선의 하늘은 조선인의 것’이라는 그 발상이 중국의 반발을 일으켜 결과적으로 망국으로 가는 길이라 판단한다. 한편 세종을 지지하는 신하들은 세종의 이상을 실현시켜줄 현실적인 명분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이 구도는 또한 르네상스맨으로서의 세종이 가진 과학에 근거한 민생정치와 신하들이 가진 비과학에 근거한 명분정치의 대결구도이기도 하다. ‘대왕 세종’에서 장영실(이천희)이 갖는 존재감은 바로 이 인물이 세종이 꿈꾸는 정치세계의 밑거름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르네상스가 중세의 비이성의 어둠을 물리치는 이성의 빛이 되었던 것처럼, 세종은 물난리로 인한 자연재해를 하늘에 제를 올리는 것보다는 과학의 힘으로 이겨내려 한다.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은 입장 차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반대하는 신하들이 이 말을 ‘민심처럼 하늘마저 등을 돌렸다’고 결과론적으로 활용하는 반면, 세종은 바로 그 ‘민심을 잡기 위해 천심을 바꾸겠다’는 보다 적극적인 인간중심의 철학을 내보인다.

‘대왕 세종’은 칼의 현란함을 추구하는 시대에 말의 대결을 보여주는 정치사극이다. 이 사극이 그다지 시청률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시간대와 방송사를 옮겼다는 것에 이유가 있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 이유는 이 사극이 정치의 너무 적나라한 부분을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현실 정치가 우리가 생각한대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면 이 진창을 그대로 보여주는 정치사극의 묘미는 더욱 깊었을 지도 모른다. 반대로 현실 정치가 진창으로 비춰지고 있었기에 이 본격적인 정치사극은 그 반복으로 느껴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실제 정치의 세계에서든, 아니면 정치사극 속에서든 그 본질은 말(대사, 대화, 협상)이지 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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