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전설의 고향’, 그 재미요소와 관전 포인트

하얀 소복에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 그 속으로 핏빛 한으로 이글거리는 두 눈. 마치 TV에서 튀어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이불을 뒤집어쓰고 연실 “지나갔어?”하고 물어보던 그 귀신이 돌아왔다. 다름 아닌 ‘전설의 고향’의 재림이다. 77년부터 무려 12년 간 매주 570여 편을 방영했고, 96년부터 99년까지 70여 편이 방영되었으며 이제 2000년대 들어 다시 방영되고 있으니, 이 드라마는 세대를 뛰어넘는 고전 중의 고전인 셈이다.

‘전설의 고향’의 특별한 공포
이렇게 된 데는 ‘전설의 고향’이라는 형식이 가진 무궁무진한 이야기들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드라마는 각 지방마다 하나씩은 꼭 있게 마련인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傳說)를 극화한 것이다. 거기에는 특이한 자연물에 대한 유래나 인물에 얽힌 이야기들이 무궁무진하다. 이 이야기들은 기본적으로 재미있는데다가, 지방의 연원이나 특색을 담고 있고, 또한 적정한 교훈도 갖고 있기 때문에 드라마 컨텐츠로서 그만일 수밖에 없다.

‘전설의 고향’의 상징이 된 꼬리 아홉 달린 구미호나, “내 다리 내놔”란 유행어로 잘 알려진 ‘덕대골’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 이 드라마의 기본 힘은 공포에 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공포물이면서도 아이와 어른이 함께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아이들이 보기에는 끔찍한 피와 살점이 튀는 요즘의 공포물들과 비교해보면 ‘전설의 고향’의 영상은 그저 밋밋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뇌리 속에 오래도록 남는 그 공포감은 직접적인 장면의 잔혹함보다는 간접적으로 상상력을 자극하는 스토리의 무서움에서 비롯된다.

게다가 억울하게 죽은 귀신들의 한 속에는 저마다 복수의 이유들이 들어가 있다. 이것은 결국 이 스토리들이 권선징악의 보편 타당한 교훈들을 갖게 만든다. 따라서 마지막에 가서 “이 이야기는 ○○○에서 전해져오는 것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라는 정리 멘트로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퓨전사극 시대, ‘전설의 고향’은?
초창기의 ‘전설의 고향’이 이런 모든 장점들을 다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조악했던 특수효과와 영상기술 덕분이다. ‘전설의 고향’만이 갖는 공포에는 사실 어색한 분장이나 연출 같은 것에서 비롯되는 촌스러움의 미학이 숨겨져 있다. 그것은 마치 처음 봤을 때는 화들짝 놀라고 나서, 다음에는 ‘내가 이런 어설픈 것에 놀랐어?’하는 안도감으로 웃음을 짓게 만드는, 과거 조악했던 괴기전의 공포와 유사하다. 90년대에 새롭게 제작된 ‘전설의 고향’은 CG효과를 너무 쓰다가 오히려 이러한 ‘전설의 고향’만의 특별한 공포체험을 잃게 된 부분이 있다.

그렇다면 지금 새롭게 시작하는 ‘전설의 고향’은 어떨까. 일단 컨텐츠는 과거의 것들 속에서 나온 것이라 그다지 새로울 것은 없다. 하지만 본래 전설이란 그 화자의 이야기 방식에 따라 전혀 새로운 재미를 주게 마련. 공포와 액션과 스릴러와 해학까지 겸비한 ‘전설의 고향’의 새로운 버전에서 주목해야할 것은 과거와는 달라진 사극 그 자체다. 이제 사극은 좀더 현대적인 퓨전사극의 시대로 가고 있다. 이 새로운 사극을 주도한 ‘한성별곡-正’의 곽정한 PD(구미호 편 연출), ‘쾌도 홍길동’의 이정섭 PD(오구도령 편 연출)의 연출이 기대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한편 최수종, 안재모, 이덕화, 이민우 같은 걸출한 사극 연기자들이 등장하는 것도 새로운 볼거리 중의 하나이다.

다시 돌아온 ‘전설의 고향’은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한 여름의 킬러 컨텐츠가 분명하다. 거기에는 우리 식의 토속적인 공포와 해학이 있고, 권선징악의 보편타당한 정서가 있다. 이 기본 골격 위에 새로운 뉴웨이브 사극 감독들이 펼치는 연출의 묘미와 걸출한 사극 지존들의 연기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관전 포인트가 된다. 어쩌면 ‘전설의 고향’ 같은 컨텐츠는 스토리에 목말라하면서, 사극에서조차 고증보다는 상상력을 더 요하게 만드는 지금 같은 시대에 더 잘 맞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설의 고향’이 다시 전설이 될 것인지, 아니면 그저 과거의 전설로만 남게 될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대장장이 경철, 정형사 강편수, 치매할머니 그리고 꽃순이

경남 하동에서 만난 치매할머니(김지영)와 며느리간의 보이지 않는 끈끈한 정을 녹차김치를 통해 풀어내는 이야기 속에서(거의 2회에 걸쳐 방영되었다) 진짜 주인공은 누구일까. 간간이 성찬(김래원)과 진수(남상미)의 애정모드가 연출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봉주(권오중)와의 대결구도가 존재하지만 적어도 이 에피소드에서 본래 주인공들은 뒤편으로 물러나 있다. 치매할머니가 김치를 담그기 위해 이것저것 심부름을 시키는 것처럼 이 에피소드 속에서 성찬과 진수는 보조적인 역할만을 하고 있을 뿐이다.

‘식객’의 조연들이 중심에 온 이유
이것은 치매할머니의 경우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위암에 걸린 채, 교도소에 있는 아들을 위해 게장을 가져다주는 대장장이 경철(유순철)의 에피소드에서도 그렇고, 백정이라는 편견으로 가족들과 멀어지게 된 정형사 강편수(조상구)의 에피소드에서도 그러하며, 심지어 최고의 조연(?)이라 찬사를 받았던 꽃순이라는 소의 에피소드에서도 그렇다. 이들이 등장했을 때, 주연들은 아낌없이 자리를 비워주었고, 그 빈자리는 그들의 몫이 되었다.

이 한 순간씩 주연이 뒤로 물러나는 장면들은 ‘식객’이 가진 색다른 구조를 말해준다. 물론 ‘식객’에도 드라마라면 늘 등장하기 마련인 삼각관계(성찬-주희-봉주)와 대결구도(성찬-봉주)가 있어 이것이 드라마를 이끌어 가는 주된 힘인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에서 그쳤다면 ‘식객’은 그저 앙상한 드라마에서 끝났을 것이다. 이 드라마의 클리쉐에 해당되는 기본구조가 ‘식객’의 뼈대를 만든다면, 그 뼈대 위에 붙어있는 먹음직스런 살들은 조연들이 만들어가는 철학적이고 감동적인 에피소드에 의해 구성된다.

이런 구조를 가지게 되자 ‘식객’은 누구나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대중적인 뼈대를 가지면서도 동시에 그 위에 깊이를 더하게 된다. 이렇게 된 것은 ‘식객’의 원작이 이미 충분히 곰삭은 에피소드들을 거의 무한정 많이 갖추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허영만 화백의 원작만화 ‘식객’은 사실상 에피소드별로 나눠지게 되어있어, 드라마나 영화로 극화했을 때 점차적으로 쌓여져 가는 이야기 구성이 쉽지 않다. 너무 감동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에피소드에 치중하면 극의 추진력이 떨어지게 된다. ‘식객’의 드라마가 영화보다 나은 점은 감동적인 에피소드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인물간의 경합을 통해 추진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식객’의 맛이 깊어질 수 있었던 이유, 그들
물론 이러한 이중구조(성찬과 봉주의 대결구도와 서민들의 이야기)가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게 된 것은 이 두 요소를 성찬과 봉주라는 캐릭터 속에 구현함으로서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닌 하나의 이야기로 잘 묶어두었기 때문이다. 서민적인 맛 속에서의 위대함을 찾는 성찬은 자연스럽게 이들 서민들 속으로 들어가 에피소드들을 들으면서 성장하고, 동시에 맛의 세계화를 추구하는 봉주와 부딪치게 된다. 대결구도가 만들어질 때, 성찬이 서민들의 삶 속에서 해답을 찾아내는 것은 이 이중구조의 정교한 접합지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연이 정작 자리를 내줬을 때, 그 자리를 온당히 차지하는 조연의 힘이다. 주연들이 상대적으로 짧은 연기경력에 젊고 잘 생긴 배우들로 캐릭터가 서서히 구현되면서 차차 시선을 잡아끌었다면, 조연들은 오랜 연기경력의 힘으로 단번에 배역을 장악해버린다. 노인 역할이라면 이력이 난 국민 할아버지 유순철의, 얼굴만 봐도 느껴지는 세월의 흔적이나 아픔은 자잘한 설명 없이도 대장장이 경철의 사연을 전해주기에 부족하지 않으며, 시라소니 조상구는 그 포스 그대로 정형사 강편수가 되었고, 대사 한두 마디로도 가장 인상깊게 보는 이의 마음을 파고드는 김지영의 치매할머니 연기는 김치 담그는 손끝하나로도 정을 느끼게 만들었다.

‘식객’이라는 음식의 맛이 깊어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소소해 보일 수 있는 서민들의 역할에 아낌없는 조명을 비출 수 있게 만든 드라마의 구조와 그 구조 위에서 깊은 연기의 맛을 펼친 이들 배우들의 몫이다. 어쩌면 이 부분은 이 드라마가 하고자하는 이야기의 진짜 핵심을 이루기 때문에, ‘식객’이 가진 맛의 본질이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대장장이 경철, 정형사 강편수, 꽃순이, 치매할머니 같은 ‘식객’의 숨은 주역은 단지 이 드라마의 양념이 아니다. 그들이야말로 이 드라마의 진짜 맛이다.

‘무한도전’좀비편, 그 실패의 이유

몇 주 전부터 방영된 티저 영상만으로도 ‘무한도전’좀비편은 기대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일단 그 소재가 참신했다특집이면 통상적으로 등장하는 흉가체험 같은 틀에 박힌 소재들에서 벗어나 대니 보일 감독의 좀비영화 ‘28일 후’를 패러디 했다. 이 색다른 소재에 버라이어티쇼를 접목했다는 점은 실로 ‘무한도전’의 도전정신이 아니고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시도일 것이다. 다름 아닌 이러한 실험성이 ‘무한도전’의 신화를 만든 이유이기 때문이다.

‘나는 전설이다’로 최근 리메이크된 리차드 메드슨의 소설에서부터 비롯된 좀비 컨텐츠들은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을 만들었던 조지 로메로 감독에 의해 정착되었고, 80년대 들어서는 ‘이블 데드’같은 영화들로 변주되었으며, 한때 침체기를 겪다가 최근 들어 ‘레지던트 이블’, ‘28일 후’, ‘나는 전설이다’ 같은 영화들로 다시 각광을 받고 있다. 중요한 것은 공포 영화 자체가 영화의 주류는 아닌데다가 특히 좀비라는 소재는 그 중에서도 매니아적인 소재라는 점이다.

좀비 컨텐츠는 그 계보를 꿰뚫고 있던가, 적어도 좀비라는 존재의 탄생, 특징 같은 것들을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야 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반복되는 설정들, 예를 들면 특정한 바이러스의 유출과 그로 인한 변종의 탄생, 점점 불어가는 변종들, 이와 맞서는 몇 안 되는 생존자들 같은 상황들이 어느 정도는 정해져 있기 때문에 이 컨텐츠들은 계보 속에서의 패러디를 통한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즉 어떤 식으로든 재미를 느끼기 위해서는 사전 학습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무한도전’ 좀비편이 실험성은 뛰어나지만 시청률면에서 저조했던 이유는 당연하다. 그 소재 자체가 대중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바로 이 점 때문에 매니아들은 그 시도 자체에 열광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실험은 기획단계부터 무리한 점이 없잖아 있었다. 그것은 영화라는 장르와 리얼 버라이어티쇼라는 장르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영화는 허구이지만, 리얼 버라이어티쇼는 리얼리티를 추구한다. 좀비 컨텐츠는 만들어진 가상의 것으로 그것이 재미를 주기 위해서는 철저한 대본에 의한 구성이 필요하다. 좀비의 존재 그 이상으로 필요한 것은 그들에게 쫓기는 인물들의 내적 갈등(가까운 사람이 좀비가 된다든지 하는)이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리얼 버라이어티쇼에서 이것을 인위적으로 만들기란 불가능하다. PD가 계산한 함정 속에 인물들이 정확히 빠져 허우적댄다고 해도 그것은 너무 짜여진 느낌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무한도전’ 좀비편이 가진 한계가 있다. PD가 계산한대로 함께 움직이지 않고 이기적인 행동을 보인 박명수는 리얼 버라이어티쇼에서 자신이 해야될 역할을 정확히 한 것이지만, PD가 예상한 좀비 컨텐츠 속에서는 그것을 망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창대한 기획이 허무한 결과로 이어진 것은 바로 이런 리얼 버라이어티의 예측불가능성에서 비롯된다.

그럼에도 이 소재가 강행된 것은 ‘무한도전’만이 가진 특성을 드러내준다. 그것은 특유의 실험정신이 가진 이중적인 모습이다. 좀비편이 보여준 것은 ‘무한도전’만이 갖고 있는 국민예능다운 면모의 선구적인 실험성과, 또한 한편으로 그 낯설음이 가져오는 매니아적 속성의 이중성이다. 이것은 그 실험적인 정신이 때론 ‘무한도전’을 ‘무모한 도전’으로 만들어버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국민예능으로의 길과 매니아예능으로의 길 그 어느 것도 포기하기 어려운 것, 이것이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전설을 꿈꾸는‘무한도전’이 가진 딜레마이자 넘어야할 산이다.

님의 질문이 님에게 다시 되돌아간 이유

[한 장면으로 읽기] 순이(수애)는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남편을 꼬박꼬박 면회 갑니다. 달거리에 맞춰 보내는 시어머니의 마음은 아마도 삼대독자의 대를 이어보자는 심산이겠죠. 여인숙에 어색하게 앉은 순이는 상관조차 하지 않고, 남편 상길(엄태웅)은 소주를 마십니다. 상길은 사실 따로 사랑하던 여자가 있었죠. 가만히 앉아있는 순이에게 넌 모를 거라는 식으로 묻습니다. “니 사랑이 뭔지 아나?” 그리고 혼자 돌아 누워버리죠.

사실 이렇게 사랑 받지 못했던 순이가 이역만리 전쟁통인 베트남까지 남편을 찾아 나선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저 남편이기 때문에? 혹은 남편은 사랑을 주지 않았지만 자신은 깊이 사랑했기 때문에? 시어머니가 시켜서? 시집에서도 쫓겨나고 그렇다고 받아주지 않는 집 때문에 갈 데가 없어서? 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대해서 순이는 아무런 속시원한 말도 해주지 않습니다. 본래 순이는 그런 사람인가 봅니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뭔가를 말해주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반면 행동은 별로 영양가가 없으면서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건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남자들입니다. 정만(정진영)은 베트남만 가면 모든 게 다 잘될 거라 밴드들에게 장밋빛 미래를 얘기했지만, 그것이 깨지는 건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건 아마도 이 전쟁통에 젊은 장병들을 내보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 ‘남자들’은 모두 호언장담하며 일을 저지릅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 저지른 일을 수습하고 껴안는 건 오히려 순이입니다. 순이는 기꺼이 청소도 하고,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속살도 내보입니다.

전쟁으로 상징되는 남성성과 베트남의 자연으로 상징되는 여성성도 영화와 마찬가지의 구도가 아닐까요. 잘 알다시피 베트남 전쟁은 자연(여성성)과 인간(남성성)의 싸움의 성격이 강하죠. 미국이 전쟁에서 진 것은 자연에게 진 것입니다. 온몸을 잡아끄는 촘촘하게 자란 나무들과,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날씨와 지형들은 화력이 우세한 미국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죠. 정글에 불을 지르고, 고엽제를 뿌리고, 융단폭격을 해대면서 미국은 결국 자신들이 싸우고 있는 것이 자연이란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한편 자연은 베트남 사람들을 숨겨주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그려진 그들의 지하땅굴 생활 속에서의 평온함이 마치 어머니의 자궁 속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일 저지르는 남성성(전쟁, 남자)과 그것을 통째로 끌어안는 여성성(자연, 여성)은 이 영화를 통해 대비적으로 그려집니다. 수많은 전투로 피폐해진 정신의 남성들 속으로 뛰어든 한 여자의 육탄공세로 한 때의 편안함을 느끼게 되는 위문공연 장면들도 그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통해 이뤄졌다고 해도 그 본질은 남성성을 끌어안으며 장악해버리는 여성성의 힘에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처음 남편이 질문했던 “니 사랑이 뭔지 아나?”하는 그 질문이 이역땅 전장의 한가운데 서 있는 순이에 의해 말이 아닌 행동으로 다시 남편에게 질문되어지는 그 장면입니다. 남편의 말만 번지르르한 사랑과, 순이의 행동으로 보여준 사랑은 극적인 대비를 이루면서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이것이 여성성의 시선으로 그리겠다면서 정작 남성적 시각을 가끔씩 드러내는 이 영화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유입니다. 아마도 이 질문은 영화관을 나오는 많은 관객들에게도 되돌려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심지어 섹시한 차림으로 춤추고 노래하는 순이를 성적 대상으로 바라봤던 분들까지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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