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로망은 불륜이 아니라 자기생활이다

주말 밤 가족들의 때아닌 토론(?)이 벌어진다. 그간 엄마로서 희생하며 살아온 것은 이해하겠는데, 그렇다고 ‘1년 간 휴가’를 간다는 건 좀 아니라는 의견과 그간 희생해온 대가로 ‘1년도 적다’는 의견이 팽팽하다. 다름 아닌 ‘엄마가 뿔났다’ 이야기. 모든 가사활동에서의 해방을 주장한 뿔난 엄마, 김한자(김혜자)는 결국 집을 나오는 길에 남편의 차안에서 “너무 좋아!”하고 소리지른다. 그 장면은 마치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하던 모 회사 광고를 떠올리게 한다.

한편, ‘달콤한 나의 도시’의 은수엄마(김혜옥)는 늘 자신을 무시해온 권위적인 남편에게 “이제 헤어지자”고 말한다. 애써 차려준 밥상에서 곱게 먹어도 시원찮을 판에 늘 투덜투덜 반찬투정을 해대는 남편은 그 말마저 무시한다. 은수(최강희)는 그런 아빠를 잘 알기에 엄마의 심정을 이해한다. 심지어 엄마가 아빠 몰래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었다는 사실까지도. 하지만 은수는 여전히 엄마가 이혼까지 하겠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못한다. 이유는? 엄마니까.

은수나 김한자네 식구들이 엄마가 집을 나가겠다는데 동의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많은 시청자들도 어쩌면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굳이 저렇게까지 해야하나’, ‘다들 그렇게 사는데 유난 떠네’하면서. 하지만 이런 정서에는 무언가 엄마라는 존재에 대한 암묵적인 동의, 즉 엄마로써 당연히 해야하는 의무 같은 것에 대한 가족 구성원들의 뿌리깊은 정당화가 숨겨져 있다. 이런 엄마들을 이해는 하지만 동의하지 못하는 이유가 단순히 ‘엄마니까’라는 건 무언가 문제가 있다.

이틀이 지나서야 엄마의 생일이 지난 걸 알게된 자식들에게 “너희들 왜 날 무시해?”하고 김한자가 말하는 것은 단지 그 기억 못한 생일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일 년 중 하루, 생일날에 선물이나 용돈 챙겨주고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말하면서 나머지 364일을 엄마로서의 의무에 더 충실하라 강요받아온 그 숨막히는 세월 때문이다. 뒤늦게 하게된 생일 상에 선물들을 바리바리 싸 가지고 온 자식들은 그것으로 또 일 년을 넘겨보려 했지만, 김한자는 이미 알아버렸다. 그런 매년의 이벤트가 자신의 인생에서 자기만의 삶을 지워버리고 있었다는 걸.

매년 5월8일이면 떠들썩하게 어버이날이라 해서 이 땅의 자식들을 부모님께 카네이션을 달아드린다. 자식이 부모 공경하는 것이 무에 나쁠 것인가. 중요한 것은 그 하루의 이벤트가 아니라 평상시에 부모의 행복을 살뜰히 살피는 것이 아닐까. 이 어버이날의 전신으로 만들어졌던 ‘어머니날(1956)’이 사실은 전통적인 부모의 상(신사임당 같은)을 내세우며, 끊임없는 인내와 희생을 강요하는 역할을 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은수가 이혼을 결심한 엄마에게 “엄마로 남아 있었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도 늘 엄마는 자신의 이름이 거세된 엄마로만 불려지길 바랐던 건 아닐까. 엄마가 원하는 건, 생일이나 어버이날 같은 기념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탈법적인 불륜이나 탈선도 아니다. 그저 자기 생활을 갖고 싶을 뿐이다. 드라마가 보여주는 엄마들의 자기 주장은 그저 뿔난 엄마들의 반란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에서는 여전히 꿈꾸기 힘든 엄마들의 로망이다.

‘태양의 여자’, 그 뒷심 좋은 드라마의 조건

‘태양의 여자’의 뒷심이 무섭다. 이 드라마는 첫 회에 7.6%(AGB 닐슨 집계)의 저조한 시청률로 시작해지만 지속적인 시청률 상승곡선을 그리면서 이제 시청률 20%를 넘기는 놀라운 기록을 남겼다. 이러한 상승곡선은 정상적인 드라마의 시청률 추이다. 점증적으로 갈등이 고조되고 종영하기 직전에 최고조에 이르렀다가 끝나는 이야기의 구조는 특히 드라마 같은 연속성 있는 작품에서는 필수적이다.

하지만 모든 드라마가 이 곡선을 그리는 것은 아니다. 단적인 예로 이미 종영한 ‘스포트라이트’는 초반 8% 대에서 시작했지만 3회만에 10%를 넘기고 5회까지 시청률이 급상승했다. 하지만 어쩐 일이지 6회부터 떨어지기 시작한 시청률은 갈수록 하락해 결국 10%대 이하까지 떨어졌고, 결국 9.3%의 시청률로 종영했다. 이렇게 된 것은 이 드라마가 초반부에 너무 많은 힘을 실은 에피소드를 배치한데다, 느슨해진 이야기의 연결고리 탓에 각각의 에피소드가 점층적인 시청률 상승을 이끌지 못하고 편편으로 끊어졌기 때문이다.

반면 ‘태양의 여자’는 초반부 조금은 느린 템포지만 앞으로 이어질 갈등의 구도를 세우는데 좀더 몰두했다. 이 드라마가 뒷심이 좋게된 이유는 그 특유의 이야기구조 덕이다. ‘태양의 여자’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드라마는 정상에 선 여인, 도영(김지수)과 어린 시절 버려져 바닥에 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사월(이하나)이 그려내는 빛과 어둠의 희비쌍곡선을 다루고 있다. 도영이 진실이 밝혀지면서 그 꼭대기에서 점점 바닥으로 내려오는 반면, 사월은 자신을 버리고 모든 걸 앗아간 도영에게 복수하며 바닥에서 점점 정상으로 올라간다.

하지만 이 복수극이 단순한 선악구도에 머물지 않는 것은 초반부 죄를 저지르게 되는 도영에게 그만한 근거와 이유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도영을 그렇게 만든 것은 도영의 친모가 이미 얘기했듯이 어린 시절 그녀를 버린 친모의 죄이다. 드라마 초반에 이 친모가 등장해 도영에게 사죄하며 “모든 죄는 자신이 가져가겠다”고 말한 후 죽게되는 에피소드는 도영을 이제는 돌아갈 곳 없는 상황으로 몰아넣는다. 사월의 복수가 정당하다고 느끼면서도 그것을 당하기만 하고, 정작 자신을 그렇게 만든 엄마에게 하소연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은 도영에 대한 동정심을 갖게 만든다.

대부분의 복수극이 후반으로 갈수록 탄력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숨겨졌던 진실이 밝혀지고 그동안 억울하게 살아왔던 삶을 복수를 통해 전복시키려는 그 욕망은 그대로 드라마의 갈등을 최고조로 만들기 때문이다. ‘조강지처클럽’이 초반 30여 회에 걸쳐 20% 이하의 시청률을 기록하다가 서서히 복수가 시작되는 그 이후부터 꾸준한 시청률 상승을 그린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점증적인 상승곡선이 드라마가 흘러가는 정상적인 궤도임을 알면서도 초반에 무리수를 두게 되는 것은 초반 마케팅에 따른 광고 수주와 관련이 있다. 초반에 확실한 이미지를 세우기 위해 드라마의 핵심부분을 모두 노출하는 전략은 그러나 마케팅에는 유리할지 모르지만 드라마 자체로 보면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작품의 완성도는 초반이 아니라 작품이 끝나는 후반부가 얼마나 잘 마무리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작만 좋은 드라마로 끝낼 것인가 혹은 뒷심 좋은 드라마로 끝낼 것인가 하는 질문은, 마케팅에 우위를 두느냐, 작품에 우위를 두느냐는 질문과 거의 유사해졌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좋은 작품의 드라마가 마케팅에서도 성공한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고 있다.


‘일지매’, 우리식으로 해석한 가면 영웅담

현대식으로 재해석된 갑의와 가면, 그리고 일지매(이준기)의 은신처가 연상시키는 것은 배트맨이다. 깊은 지하에 숨어 그만큼의 깊은 고독을 가진 존재로, 밤에 주로 활동하고, 이중생활을 하며 슈퍼맨처럼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것이 아니라 과학의 힘을 빌려 활용한다는 점에서 일지매는 배트맨을 닮았다. 그래서일까. 변식(이원종) 대감이 습관적으로 붙여버린 ‘박쥐새끼’라는 별명 또한 우연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배트맨을 닮았지만 무언가 다른 일지매
하지만 ‘일지매’가 사극이라는 점은 이 외국산 슈퍼히어로물의 답습을 허락하지 않는다. 비록 사극 속에서이지만 ‘일지매’가 가진 현대적인 스타일은 물론 지금의 젊은 층들이 열광하는 세련된 슈퍼히어로를 닮은 것이 분명하지만, 일지매는 전형적인 한국적 정서를 그 안에 담고 있다. 이것이 주로 발견되는 것은 일지매가 쓴 그 가면을 활용하는 지점에서다. 대부분의 슈퍼히어로들이 신분을 노출하지 않기 위해 가면을 쓰지만, 일지매는 그 목적이외에도 가면이 활용된다.

대부분의 가면 영웅들이 그러하듯이 가면을 쓰느냐 안 쓰느냐에 따라 일지매도 두 인물로 분화된다. 그 하나는 용이고 다른 하나는 겸이다. 일지매라는 가면의 영웅은 겸이로서 과거 아버지의 죽음을 해명하고 복수하려는 인물이며, 용이는 현재의 쇠돌(이문식)과 단이(김성령)의 아들로서 조금은 불량기가 있는 청년이다. 따라서 가면을 쓴 상태의 일지매는 과거의 아픔을 가진 슬픈 존재며, 벗은 상태의 용이는 이와는 정반대의 인물로 생각 없이 건들대는 그런 존재다.

이 두 인물이 공존하는 일지매는 그 가면이 주는 간극 속에서 서로의 내심을 숨겨야만 한다. 용이는 늘 그런 거들먹대는 사람처럼 연기해야 하고, 겸이는 가면 아래 자신의 과거와 슬픔을 철저히 숨겨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도 얼굴을 보여줄 수 없고, 자신을 키워준 쇠돌과 단이에게마저 불량아로 취급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이미 어린 시절, 어머니를 부정해야 자신이 살 수 있었던 그 순간부터 일지매에게 예정되었던 불행이다.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수십 년이 지나 다시 어머니를 만난 그 순간에도 반복된다.

가면 속의 슬픈 정서, 서민들의 얼굴
따라서 일지매라는 슈퍼히어로가 가진 정서는 가면으로 가려지면서 더욱 배가되는 슬픔이다. 가면의 영웅이 영웅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주변사람들이 가면 속의 진짜 얼굴을 보지 못했을 때까지다. 따라서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 영웅이 계속 존속하기 위해서는 그 얼굴을 본 자가 사라지거나 죽거나 혹은 영원히 비밀로 간직할 수 있을 만큼의 사랑으로 엮이는 것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가면 영웅들이 가진 공식이다. 하지만 이 양상이 ‘일지매’로 와서는 그 특유의 슬픔의 정서와 만나면서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흘러간다. 그것은 얼굴을 본 자가 일지매를 위해 저 스스로 죽음의 길을 기꺼이 달려간다는 것이다.

쇠돌이 일지매의 은신처를 찾아내는 순간 사실 그의 죽음은 예고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쇠돌이 용이의 불쌍한 삶을 이해하게 되고 기꺼이 일지매 가면을 쓰고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관계에 열광하는 우리네 정서를 잘 활용한 가면의 활용법이다. 이러한 선택은 봉순(이영아)에게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가면이 이런 슬픈 정서에 활용된 것일까. 그 이유는 ‘일지매’ 특유의 서민에 대한 따뜻한 시선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잘 생각해보면 이 사극에서 가면을 쓴 자는 일지매만이 아니다. 일지매는 그것이 상징적으로 도드라지게 표현된 것뿐이지, 드라마 상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민초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어린 시절 오빠가 살해당하는 아픔을 겪은 봉순이, 그 살인을 저지르고 죄의식을 숨기며 살아가는 공갈아제(안길강), 자신의 출생을 모른 채 얼자로서의 온갖 설움을 받고 자란 시후(박시후), 친 혈육 한 점 없는 극단의 고독을 숨기며 살아온 쇠돌(이문식), 그리고 첩으로서 버려지고 아들마저 버릴 수밖에 없었던 단이까지 모두가 겉으로 보기에 때론 유쾌하고 때론 아무 일도 없어 보이는 얼굴의 가면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아무 일 없어 보이는 가면의 얼굴은 우리네 서민들의 얼굴이기도 하다. 늘 웃고 있지만 그 안에 힘겨움과 아픔과 고통을 숨기고 있는 서민들의 얼굴 말이다. 일지매가 보여주는 가면의 슬픈 정서는 바로 이 현재를 살아가는 서민들의 슬픈 자화상을 그대로 담고 있다. 진정한 의미로 일지매가 의적으로서 서민들의 영웅이 되는 것은 바로 이 슬픔의 정서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놈놈놈’의 남성성 vs ‘님은 먼곳에’의 여성성

여름시장에 등장한 ‘놈’과 ‘님’은 그간의 부진을 씻고 한국영화의 부활을 알릴 것인가. 지금 극장가를 달구고 있는 김지운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과 이준익 감독의 ‘님은 먼곳에’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미 ‘놈놈놈’은 개봉 첫 주에만 219만의 관객을 올리면서 벌써부터 올 최고 기록인 550만의 ‘추격자’를 따돌리는 것이 시간문제라는 예상이 나오고 있다. 이어 개봉한 ‘님은 먼곳에’ 역시 여름 극장가의 최대 관심작으로 떠오르며 매년 반복되어왔던 여름시장 쌍끌이 흥행을 기대하게 만들고 있다. 주목해야할 점은 이 두 작품이 모두 대작이지만 완전히 상반된 특징을 가진 영화들이란 점이다.

남성적인 ‘놈놈놈’, 스토리보다는 볼거리
마카로니 웨스턴과 우리나라에서 60년대 유행처럼 등장했던 만주 웨스턴을 오마주한 ‘놈놈놈’은 웨스턴이라는 장르가 그러하듯이 그 정서가 지극히 남성적이다. 광활한 만주 대륙을 횡단하는 열차와 그 열차를 가로막고 벌어지는 총격전 그리고 모래바람 속을 달리는 추격전이 압권인 ‘놈놈놈’은 철저히 남성적인 스타일을 구사한다. 인정사정 보지 않는 세 캐릭터들이 나누는 대화는 최소화되고 대신 살과 살이 부딪치고 총알이 날아다니는 액션은 김지운 감독 특유의 스타일리쉬한 카메라에 거칠면서도 강력하게 표현된다.

이 남성적인 영상 속에서 늘어지는 대사나 감정의 머뭇거림은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감정 라인을 바탕으로 삼아 끌어가는 스토리의 묘미는 이 영화 속에서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듯 시종일관 달리고 쏘고 칼을 던지는 화려한 볼거리를 즐기다 보면 어느새 잘 만들어진 오락영화 한 편을 본 느낌을 가질 것이다. 유난히 스토리에 매료되는 우리네 관객들을 배려한 좀더 아기자기한 드라마가 아쉽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식의 호쾌한 활극을 우리 영화에서 발견한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깊게 생각하지 말고 즐기는 마음으로 본다면 여기서 우리 영화의 새로운 길 하나를 발견하게 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여성적인 ‘님은 먼곳에’, 볼거리만큼 섬세한 감성
반면 이준익 감독의 ‘님은 먼곳에’는 월남전이라는 전쟁을 다루지만 지극히 시선은 여성적인 영화다. 월남에 파병된 남편을 찾아 베트남에 와서 밴드활동을 하게 되는 이야기를 순이(수애)의 시선으로 보여주는 이 영화는 전투 장면과 공연 장면 같은 볼거리도 풍성하지만, 그것보다 더 주목되는 것은 인물들의 섬세한 감정처리다. 바로 이 부분 때문에 이 영화의 스토리가 가진 비약은 그다지 단점으로 부각되지 않는다. 카메라는 외부적인 사건에 머물기보다는 그 사건을 맞이하는 인물의 감정에 몰입함으로써 감독이 말하려는 남성성(전쟁)과 여성성(모성)의 대결을 여성의 시점으로 극대화한다.

영화 속 대부분 남성들은 일을 저지르는 존재들이며, 순이로 대변되는 여성성은 늘 그 저지른 일을 덮어주고 감싸주는 존재로 그려진다. 시커먼 남자들이 떼로 모여서 치열한 전쟁을 치르는 장면은 따라서 이 순이의 시선으로 보면 때론 낯설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그것을 비판하기보다는 마치 철없는 어린아이를 보듬듯 끌어안는 순이의 모습은 마치 총을 쏘고 불을 지르는 인간들을 그대로 품에 안는 베트남의 대자연과 오버랩 된다. 게다가 미군이든, 베트공이든, 또 한국군이든 순이의 노래에 순간 전쟁을 잊어버리는 장면들은 이 영화만이 가진 독특한 여성의 시선을 감지하게 한다. 스토리의 인과관계에 주목하기보다는 그 인물의 감성에 맞춘다면 영화 내내 깊은 감동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영화가 부딪치는 이 여름 시장 속에서 이처럼 기대작 두 편이 서로 상반된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실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놈’이 그 말처럼 남성적이듯, ‘님’ 역시 그 어감처럼 여성적이다. ‘놈’은 시종일관 부딪치고 싸우며, ‘님’은 아련한 그리움을 가슴속에 먹먹하게 흩뿌려놓는다. 뜨거운 여름, 호쾌한 액션과 깊은 감동이 있는 이 두 편의 영화 속으로 푹 빠져보는 건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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