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수녀들’로 돌아온 송혜교, 더 멋있어졌다

검은 수녀들

2013년 대전에서 잠깐 배우 송혜교를 만난 적이 있다. 제2회 아시아태평양 스타 어워즈(APAN STAR AWARDS)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면서 갖게 된 기회다. 당시 송혜교는 <그 겨울, 바람이 분다>로 대상을 받았다. 그 해에는 <직장의 신>의 김혜수, <여왕의 교실>의 고현정, <내 딸 서영이>와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이보영이 후보로 올라 송혜교와 치열한 경합을 벌였는데 결국 심사위원 모두의 만장일치로 그녀가 대상으로 결정됐다. 당시 심사위원들은 심사기준이 오로지 연기력 하나라는데 입장을 같이 하면서 그 같은 결정을 내렸다. 송혜교는 대상 수상자로서 간소하게 준비된 애프터파티에 참여했다. 스타라는 틀에 가둬져 있었지만 배우가 되기 위해 몸부림을 쳐온 송혜교의 면면을 유심히 봐왔던 나로서는 그 날의 수상이 남달랐다. 그래서 할 말도 많았지만 막상 송혜교를 만났을 때는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건 그 상이 끝이 아니고 이제 배우로서의 시작에 해당될 것이어서, 샴폐인을 일찍 터트리는 괜한 상찬으로 혹여나 앞으로 가야할 길에 방해가 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가을동화(2000)>와 <올인(2003)>, <풀하우스(2004)>를 거쳐 톱스타의 반열에 올랐지만, 송혜교는 늘 갈증이 컸다. 반짝 스타가 아닌 롱런하는 배우로서의 길을 고민했던 거였다. 노희경 작가의 <그들이 사는 세상(2008)>을 거친 후, <그 겨울, 바람이 분다(2013)>에서는 깊고 쓸쓸한 내면이 느껴지는 그녀의 연기가 도드라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김은숙 작가와 만났던 <태양의 후예(2016)>를 통해 포텐셜이 터졌다. 멜로는 물론이고 액션부터 재난까지 다양한 장르가 겹쳐진 블록버스터였다. 도도하지만 뜨거운 가슴을 가진 강모연이라는 의사 역할로 송혜교는 <풀하우스>에 이어 또다시 아시아의 별로 떠올랐다. <풀하우스> 때와 달랐던 건, 그것이 그저 스타로서의 반짝임이 아니라 배우로서의 성장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송혜교의 갈증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았다. ‘멜로 퀸’이라는 수식어는 늘 따라다녔다. 실제로 멜로의 여주인공 역할을 대부분 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걸 단순히 ‘멜로 퀸’이라는 한 마디로 정리한 건 어딘가 송혜교에게는 억울한 일이다. 같은 멜로라도 그녀가 해온 작품들을 따라가보면 여성의 성장사가 보여질 정도로 다채로운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을동화>나 <풀하우스>가 동화처럼 풋풋했던 사랑을 표현했다면, <황진이>는 절절한 시대적 질곡 앞에 선 여성의 강단 있는 삶이 있었고, <그들이 사는 세상>과 <태양의 후예>에서는 일과 사랑의 영역을 모두 주도하고픈 여성의 삶과 사랑이 있었다. 이 과정을 거쳐 <지금, 헤어지는 중입니다>에서는 유한한 삶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사랑할 수 있을까를 묻는 한층 성숙해진 멜로 연기를 선보였다. 

 

이러한 성장 과정들을 묵살한 채, ‘멜로 퀸’이라는 말로 가둬버리는 세간의 시선 앞에 송혜교는 새로운 선택을 시도한다. 마침 김은숙 작가가 의기투합했다. 그녀 역시 ‘멜로 장인’이라는 수식어에 가둬져 갑갑함을 느끼던 차였다. 그래서 나온 작품이 <더 글로리(2022-2023)>였다. 학교폭력이 소재였고, 송혜교는 피해자인 문동은을 연기했다. 멜로는 저 뒤편으로 사라졌고 대신 그 자리를 처절하면서도 처연한 복수극이 채웠다. 대중들은 열광했다. 문동은이 보여주는 거침없는 말과 행보를, 송혜교가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그건 마치 억압된 자아가 드디어 바깥으로 나와 제 할 말을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학교폭력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문동은은 그렇게 부활하여 제 할 말을 했고, 그 문동은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송혜교는 또 한 번 깨어날 수 있었다. 

 

<더 글로리>로 송혜교는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을 거머쥐었다. 또 제2회 청룡시리즈어워즈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마침 백상예술대상을 심사하게 된 나는 감회가 새로웠다. 2013년 대전의 한 시상식 뒷풀이에서 잠깐 얼굴을 본 후 10년이 지난 송혜교는 그 때 꿈꿨던 배우, 아니 대배우의 길 위에 서 있었다. 

 

최근에 그녀는 <검은 수녀들>이라는 영화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찍은 영화였다. 사실 영화 자체로는 그다지 새로운 재미요소가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 작품이다. 하지만 오컬트 장르에서 구마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사제가 아니라, 수녀가 전면에 나선다는 것만으로도 남다른 의미를 가진 작품이다. 게다가 송혜교가 연기하는 유니아 수녀는 담배를 피우고 관습에만 머물러 있는 사제들에게 욕을 하며 마치 휘발유를 뿌리듯 성수를 통에 담아 부마자들에게 들이붓는 파격 그 자체를 보여주는 수녀다. 그런데 이 수녀는 절차나 규정보다 악마가 깃들어 죽을 위기에 처한 소년을 구하기 위해 뭐든 하는 그런 ‘열혈수녀’다. 사제들 중심으로 이뤄진 사회 속에서 소외된 구마하는 이 수녀는, 무병을 앓고 무속인이 될 운명이었지만 수녀가 되어 이를 거부하고 있던 미카엘라 수녀(전여빈)와 함께 소년을 구하기 위해 나선다. 모두 소외된 자들이고, 그래서 사회적 약자들처럼 보이는 이들의 연대가 오컬트 특유의 구마의식보다 더 전면에 나와 있는 듯한 작품이다. 

 

작품에 대한 평가는 호불호가 갈리지만, 적어도 송혜교의 이 작품 속 연기에 대한 이야기는 호평 일색이다. <더 글로리>에 이어 거침없는 수녀의 말과 행보를 보며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는 관객들이 적지 않다. 그저 반짝반짝 빛나는 별이 아니고, 또 그저 ‘멜로 퀸’이라는 수식어 하나에 가둬지지 않는 거침없는 송혜교의 연기 변신에서 느껴지는 시원함이다. 송혜교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빛을 내기보다는 차라리 그 빛을 떠나 다크해짐으로써 더욱 매력적인 ‘검은’ 언니가 되어 있었다. 혹여나 시상식장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번에도 입다물 생각이다. 그녀의 성장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니.(글:국방일보, 사진:영화'검은 수녀들')

‘스터디 그룹’, 입시 경쟁이 낳은 괴물을 통한 통쾌한 블랙코미디

스터디 그룹

모두가 대놓고 잠든 교실, 이런 애들 앞에서 수업을 하고 있다는 게 스스로도 한심스럽다며 푸념하는 선생님 앞에 유일하게 필기를 하며 공부하고 있는 인물. 윤가민(황민현)이다. 선생님이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필기하는, 누가 봐도 공부벌레로 보이는 인물이지만 그가 하는 첫 마디는 “믿기 힘들겠지만 난 공부를 못한다”다. 무언가 열심히 푼 듯 빼곡이 등식이 적혀 있는 시험지지만 연실 빗금이 그어진다. 

 

첫 시퀀스가 보여주는 것처럼, 티빙 드라마 <스터디 그룹>은 예상을 빗겨가는 상황과 전개로 시청자들의 시선과 마음을 잡아끈다. 열심히 필기하고 학원도 다니고 과외도 했지만 늘 성적은 꼴찌에 가까운 윤가민의 어린 시절을 훑어내는 장면이 그렇다. 스스로 머리도 나쁘지 않고 모든 노력을 다하지만 늘 바닥인 그에게 과외선생님이 “너 설마 답안지 밀려 쓴 거 아니지?”하고 물을 때 피식피식 웃음이 피어난다.

 

이 정도면 아예 공부에는 길이 없고 대신 다른 길을 찾는 게 맞다 싶지만 윤가민은 진심으로 공부를 잘하고 싶다. 그래서 찾아낸 방법이라는 것이 유성공고다. 이른바 특성화고 특별 전형을 노려 볼 수 있다는 누군가 지나치며 하는 농담을 끝까지 듣지 않고 덜컥 믿어버린 것. 그러니 “아 대학가고 싶다”라고 혼잣말 하는 이 인물의 백치미에 가까운 생각과 선택 그리고 행동들이 웃음을 짓게 만든다. 

 

<스터디그룹>의 주인공 윤가민은 이처럼 그간 무수히 봐왔던 학원액션물과는 너무나 다른 위치에 서 있다. 보통의 학원액션물은 공부 잘 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를 구분하고 공부를 못하면 인성도 안좋거나 혹은 학교폭력 같은 불량한 짓을 하는 인물로 그려지곤 한다. 그런데 입만 열면 공부 공부를 외치는 모범생이지만 실제 공부를 잘할 것 같지는 않은 너드가 주인공이라니!

 

그런데 반전은 또 있다. 맑는 눈으로 공부를 외치는 이 인물이 상상을 초월하는 싸움실력의 소유자라는 점이다. 마치 ‘먼치킨’류의 주인공 같은 싸움실력을 보여주는데, 그렇게 된 이유도 빵 터지는 반전으로 뒷통수를 친다. “강한 몸에 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에 공부를 잘 하고 싶어서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도 운동을 쉰 적이 없다”는 게 그 이유다. 즉 공부 잘하려고 운동을 했는데 운동만 잘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윤가민이 유성공고에서 펼치는 시원시원한 학원액션의 전설들이 그려진다. 스터디그룹을 하면 공부를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그룹을 만들어가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방해자들(대부분 일진들이다)을 윤가민은 하나하나 무너뜨린다. 그 싸움의 이유는 온통 스터디그룹 때문이다. 그 그룹의 예비 회원을 보호하기 위해서거나, 선생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또 새로운 신규 회원을 확보하기 위해서 이 인물은 싸운다. 

 

도대체 이게 무슨 학원액션의 엉뚱한 전개인가 싶지만, 보다 보면 폭발하는 액션 신에 도파민이 폭발하는 카타르시스가 느껴지고, 윤가민이라는 ‘맑은 눈의 광인’이 보여주는 말과 행동으로 빵빵 터지는 웃음을 경험하게 된다. 그 짜릿함은 기존 학원액션물이 구축해 놓은 틀에 박힌 설정이나 이야기 전개를 뒤집는 반전에서 나온다. 공부를 하고 싶어 주먹을 든다는 윤가민이란 인물은 그래서 통념을 뒤집는 블랙코미디의 주인공처럼 보이게 만든다. 

 

모범생이지만 실제 성적 순은 일진들보다도 못한 꼴찌에 가깝고, 대신 싸움으로는 일진들은 물론이고 조직폭력배의 일원까지 흠씬 두들겨줄 정도로 우등생(?)인 인물. 그 정도면 재능 있는 운동 쪽을 하는 게 낫지 않냐는 극중 김세현(이종현)의 말처럼, 다른 선택을 하는 게 나을 듯 싶지만 어쩌다 ‘대학 가고 싶은’ 집념에 사로잡힌 이 인물은 그래서 오로지 대학만 가면 모든 게 될 것처럼 모두가 부추기는 입시경쟁의 현실을 우스꽝스럽게 희화화하는 캐릭터로 읽힌다. 도대체 대학이 뭐라고 이 지옥 같은 학교 폭력 속에서도 “우리 같이 공부할래?”라고 외칠까 싶은 것이다. 

 

이건 그간 웹툰으로 저변을 만들어내고 OTT와 함께 개화했던 학원액션물의 색다른 진화를 보여준다. 학교폭력이 가진 사회적 무게감 때문에 지나치게 진지했던 <인간수업>, <돼지의 왕>, <3인칭 복수> 같은 작품에서 <약한 영웅>처럼 조금씩 가벼워지며 장르화의 경향을 보이던 학원액션물이 이제는 블랙코미디를 할 수 있을 만큼 경쾌해졌다는 걸 <스터디그룹>은 보여준다. 

 

물론 여기에는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들답게 그 만화적 색깔을 살려내는 다소 과장된 연출기법들이 더해져 학교폭력이라는 현실의 무게감을 가볍게 해주는 장치가 들어가 있다. 그래서 <스터디그룹>은 학교폭력의 참담함을 그려낸 작품이라기보다는 입시경쟁이 만들어낸 공부에 대한 강박을 액션과 코미디로 비틀어낸 성장드라마처럼 보인다. 윤가민과 그를 지지하는 선생님 이한경이 ‘스터디그룹’을 하게 되면서 도무지 학교라고 보긴 어려웠던 유성공고를 변화시키고 나아가 그들도 성장할 수 있을까를 기대하게 만든다. 

 

공부에 미친 맑은 눈의 광인 윤가민 역할을 마치 만화에서 튀어나온 인물처럼 연기해낸 황민현의 성장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환혼>에서 액션과 멜로 연기를 통해 그 가능성을 보였던 황민현은 이번 작품을 통해 확실히 대중들의 뇌리에 각인될만한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를 중심으로 스터디그룹에 합류하는 김세현 역할의 이종현, 이지우 역할의 신수현, 최희원 역할의 윤상정, 이준 역할의 공도유도 이 작품을 통해 주목될 새내기 배우들이다. (사진:티빙)

‘중증외상센터’, 의학드라마가 활극을 더해 얻게된 것들

중증외상센터

이거 의학드라마 맞아? 넷플릭스 드라마 <중증외상센터>의 첫 시퀀스를 보고는 많은 시청자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척 봐도 국내가 아닌 풍광이고,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는 백강혁(주지훈) 위로 전투기가 날아가며 미사일을 쏴대는 장면이 등장한다. 폭탄이 터지며 난장판이 된 분쟁지역의 도시를 질주하던 오토바이는 결국 폭격에 날아가고 간신히 살아남은 백강혁은 무사히 병원에 혈액을 전달한다... 이건 급박한 수술 장면이 채워지곤 하던 의학드라마의 오프닝 시퀀스와는 너무나 다르다. 국제 분쟁지구를 배경으로 하는 액션활극이다. 

 

하지만 이건 <중증외상센터>가 아예 내걸고 있는 ‘활극 의학드라마’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잘 보여주는 오프닝이다. 백강혁이라는 인물은 실제로 병원보다 야전이 더 잘 어울리고, 그래서 수술만큼 활극에 더 적합해보이는 외상외과의다. 이런 인물이 서울 한복판에 있는 한강대학교 중증외상팀과 어울리게 되는 건 이 골든타임에 따라 삶과 죽음이 오가는 환자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응급실의 정경이 저 전쟁의 한 가운데 있는 분쟁지역의 그것과 그다지 달라보이지 않어서다. 이 지점에서 활극은 의학드라마와 어색하지 않게 봉합된다. 

 

그리고 백강혁 교수가 1호 제자라고 할 수 있는 양재원(추영우)와 처음 손발을 맞추는 북한산 등산로 실족사고 부상자를 치료하는 과정은 이 활극과 의학드라마의 접합이 제대로 됐다는 걸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백강혁은 고소공포증이 있는 양재원을 헬기로 태우고 절벽까지 날아가(심지어 안개 때문에 접근하지 못하자 헬기 조종까지 한다) 위급환자가 있는 절벽 아래로 레펠을 하는 광경을 연출한다. 심지어 양재원을 안고 뛰어내리는 레펠이다. 

 

의학드라마에 ‘활극’이라는 장르적 요소가 더해졌으니 다분히 <중증외상센터>는 허구적인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 슈퍼히어로에 가까운 백강혁 교수가 보여주는 액션(?)들은 묘하게도 중증외상센터라는 우리에게는 이국종 교수로 잘 알려진 현실적인 소재와 정서적으로 연결된다. 즉 환자들에게는 생사를 가를 수도 있는 중증외상센터라는 곳이 경영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병원에 의해 소외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오로지 환자의 생명만을 구하기 위해 절벽으로 뛰어내리는 일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하는 이 의사의 판타지가 허용되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의 답답함 속에서 시청자들은 이 슈퍼히어로를 암묵적으로 응원하게 된다. ‘백강혁, 하고 싶은 거 다 해.’ 라고.

 

여기에 너무나 힘들어 아무도 오지 않아 ‘사명감 있는 또라이’나 간다는 외상외과에 어쩌다 슬금슬금 합류하게 된 양재원이나 특유의 낙천적인 데다 똘끼까지 있는 간호사 천장미(하영) 그리고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흘리는 박경원(정재광) 같은 성장캐들이 팀을 이룬다. 백강혁의 말도 안되는 수술을 함께 해나가면서 이들도 조금씩 성장한다. 환자를 살리면 살릴수록 누적되는 적자 때문에 병원측에서 갖가지 정치와 언론 공작으로 방해를 하려 하지만 그 때마다 백강혁은 언론을 역이용해 국민들을 중증외상센터편으로 돌림으로서 문제를 해결한다. 한 마디로 고구마를 느끼기 어려울 정도의 시원시원한 사이다 활극이 넘쳐나는 의학드라마가 그려진다. 

 

그런데 이 작품이 거의 활극에 가까운 허구적 캐릭터와 서사들에 중증외상센터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가 더해지고, 특히 다양한 수술 케이스들이 소재로 등장할 수 있었던 그 힘은 어디서 생겨난 걸까. 그건 현실과 허구가 적절히 이어지고 그것이 영상으로 현실화하게 되는 독특한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중증외상센터>는 이국종 교수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으로 실제 이비인후과 의사인 한산이가(이낙준) 작가가 쓴 웹소설이 그 원작이다. 그래서 다양한 수술사례들이 가능해졌고 아덴만 여명 작전으로 부상당한 석해균 선장을 치료했던 이국종 교수의 실제 사례를 담은 에피소드도 등장한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 기반의 서사는 웹소설과 웹툰이라는 장르를 만나면서 특유의 허구성이 가미됐을 것으로 보인다. 백강혁이 활극의 주인공처럼 그려지고, 나아가 ‘신의 손’에 가까운 외과 천재의로 그려지게 된 것이 이만한 허구들을 요구하고 허락하는 웹소설과 웹툰 특유의 색깔이 가미됐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여기서 더 흥미로운 건 이 현실에서 소재를 가져왔지만 활극에 가깝게 그려진 작품이 넷플릭스라는 제작을 통과하면서 갖게 된 블록버스터와한 장르적 색깔이다. 좀더 그럴듯한 허구가 장르적 완성도로 가능해진 것이다. 

 

그래서 <중증외상센터>를 보면 최근 드라마의 새로운 경향과 색깔이 어떻게 생겨나고 있는가가 엿보인다. 실제 의사나 변호사 같은 현장인력들이 직접 작품의 원작을 쓰는 새로운 흐름과, 웹소설과 웹툰이라는 보다 상상력의 틈입을 넓혀주는 공간에 의해 생겨난 색다른 성격의 창작물들의 등장, 그리고 이들을 원작으로 삼아 리메이크되는 드라마라는 흐름(물론 여기에는 넷플릭스 같은 글로벌 성격의 서비스가 갖는 특징도 더해진다)이 더해지면서 만들어지는 경향과 색깔이다. 

 

이러한 변화된 환경 속에서 최근 <중증외상센터>같은 현실과 허구가 장르적 틀 안에서 적절히 봉합되어 개연성을 넘어서도 그럴 듯하게 보이는 작품들이 탄생하기 시작했다. 전문성이 더해지지만 동시에 상상력도 끝까지 밀어붙이는 기묘한 작품들이 그것이다. 물론 이런 시도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이질적인 요소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연출과 대본, 연기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직업군이 대본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웹툰과 웹소설을 통해 기상천외한 상상력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이제 저 백강혁 같은 천재적인 봉합술이 요구되는 시대에 들어왔다.(사진:넷플릭스)

‘트리거’의 열혈 탐사보도 팀장, 사이다 캐릭터의 귀환

트리거

“야 임마! 넌 사내새끼가 기집X 밑에서 일하냐, 쪽팔리게!” 다짜고짜 총부터 들이대는 사이비 종교 교주가 탐사보도 프로그램 ‘트리거’의 팀장 오소룡(김혜수)이 여자인 걸 알고는 남자 팀원에게 영 감수성 떨어지는 시대착오적 발언을 던진다. 그러자 오소룡이 여유있게 웃으며 말한다. “제가 또 보통 기집X은 아니거든요.” 디즈니+ 드라마 ‘트리거’의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이 장면은 오소룡이라는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은 인물에 대한 기대감을 세워 놓는다. 그건 바로 이 진실을 알리는 탐사보도를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는 캐릭터의 매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역할을 연기하는 김혜수에 대한 기대감도 빼놓을 수 없다. 똑같은 역할을 해도 김혜수가 하면 어딘가 다르다. 대체불가의 호방함이 캐릭터에 묻어난다. 그 인물이 시원시원한 사이다 캐릭터라면 그 청량감과 폭발력은 그래서 더 강력해진다. 

 

실제로 ‘트리거’의 첫 번째 에피소드로 등장하는 사이비 종교 단체와의 일전이 그렇다. 보도를 위해 패러글라이딩을 타고 높은 사이비 종교 집단의 벽을 넘어들어가는 장면은 현실성이 없지만, 김혜수가 연기하니 어딘가 그럴 듯해 보인다. 장전된 총구 앞에서도 “쏴봐”라고 외치며 눈 하나 까닥하지 않는 모습에서부터 시청자들은 이미 설득 당했다. 그러니 사실상 진실 보도에 대한 판타지적 욕망을 담은 ‘트리거’에서 시청자들의 마음은 오소룡이라는 인물을 입은 김혜수를 보자마자 마음을 정하게 된다. 하고 싶은 거 다 하라고. 

 

김혜수 특유의 이 호방한 느낌은 처음부터 생겨난 게 아니다. 물론 어려서부터 태권도 유단자로 사범님 앞에 “태권!”하고 거수경례를 했던 시절부터 그 호방함은 내면에 장전되어 있었던 게 분명하다. 열여섯의 어린 나이에 광고모델로 주목받아 영화 ‘깜보’로 연기자를 시작했을 때부터 그 어린 나이에 성인연기까지 맡는 대범함이 그냥 생겼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혜수가 처음 대중적인 배우로서 자리매김한 건 이런 호방함과는 사뭇 거리가 있는 청순 가련한 역할을 통해서였다. 바로 이명세 감독의 영화 ‘첫사랑’에서의 박영신이라는 인물이다. 이 역할로 김혜수는 최연소 청룡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첫사랑’의 아이콘으로 급부상했다. 물론 그런 이미지가 김혜수는 부담스러웠다고 한다. 그래서 드라마 ‘한지붕 세가족’에서 젊은 미시족 연기로 변신을 시도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때부터 김혜수는 ‘섹시 이미지’로 주로 소비되는 성장통을 겪었다. 백상연기대상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던 영화 ‘얼굴 없는 미녀(2004)’가 대표적인 그 사례다.

 

하지만 김혜수 본연의 호방함의 본색은 ‘타짜(2006)’를 통해 드디어 대중들을 매료시키기 시작한다.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는 유행어까지 만든 김혜수는 이 때부터 맡는 역할마다 자신만이 가진 스타일을 더함으로써 대체불가의 배우로 서게 된다. 드라마 ‘직장의 신(2013)’은 김혜수가 가진 시원시원한 여걸의 면모와 더불어, 코믹함과 카리스마를 넘나드는 다채로운 모습들을 미스김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보여줬다. 영화 ‘차이나타운(2015)’에서는 사채업자 대모로서 조직 보스 역할을 김혜수만의 느와르적 카리스마를 더해 꺼내 놓았고, 드라마 ‘시그널’에서는 차수현이라는 인물의 과거 젊은 시절의 신출내기 형사와 현재의 베테랑 형사팀장을 오가는 연기를 선보여 백상예술대상 여자 부문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했다. 이처럼 김혜수는 청순함에서부터 코믹함과 더불어 관능미, 카리스마까지 소화해내면서도 어느 하나의 이미지에 고착되지 않는 연기자가 됐다. 무엇보다 김혜수에게서 주목되는 건 10대 시절부터 현재의 50대까지 하이틴부터 시작해 청년과 중년을 넘어오는 그 모든 과정들 속에서 대중들과 그 성장사를 함께 했고 그 속에서 자신만이 가진 색깔을 분명히 찾아냈다는 점이다. 똑같은 역할을 해도 그만의 매력이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건 그래서다. 

 

성공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변호사(하이에나)나 근엄하고 냉철하면서도 속으로는 따뜻한 진심이 숨겨진 소년부 엘리트 판사(소년심판)도, 또 심지어 조선시대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을 자식들을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중전(슈룹)이나, 돈되는 거라면 뭐든 하는 팜므파탈의 밀수꾼(밀수)까지 김혜수여서 보다 매력적으로 그려진 인물들이 대중들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트리거’ 역시 이 흐름 그대로 김혜수표 열혈 탐사보도 팀장이 보여주는 매력이 강력한 기대감을 만들어낸다. 

 

본래 드라마나 영화가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당대의 갈증을 판타지로 채워주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 작품 속 인물들은 시대의 다양한 갈증들을 대변하기 마련이다. 김혜수가 시대의 아이콘처럼 보이는 건, 바로 그 갈증을 대변하는 인물들을 자기만의 색깔로 일관되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직장의 신’의 미스 김이라는 인물을 통해 비정규직 여성들의 억눌린 마음을 시원하게 풀어줬고, ‘차이나타운’ 같은 작품에서는 남성 전유물로 여겨져온 느와르가 여성을 통해서도 충분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시그널’이 포기하지 않는 베테랑 형사를 통해 미제사건의 피해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졌다면, ‘하이에나’ 같은 작품에서는 성공을 향해 질주하며 사랑도 쟁취하고픈 현대여성들의 마음을 대변했다. 그러면서 이 역할 하나하나에 본인이 갖고 있는 호방한 면모들을 더함으로써 더 톡 쏘고 시원한 사이다 캐릭터를 구현해냈다. 

 

많은 역할들 속에서 김혜수가 해온 연기의 면면을 보면 작은 것들에 연연하기보다는 보다 굵직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 눈에 띤다. 물론 그렇다고 세세한 디테일을 중요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그 세심함들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시원하게 뻗어 나간다는 뜻이다. 흔히들 ‘호방함’이란 작은 것들을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곤 하는데 김혜수를 보면 그것이 오해라는 걸 알게 된다. 디테일들을 갖고 있으면서도 목표를 향해 주저하지 않는 마음. 김혜수라는 대체불가 호방본색의 페르소나가 새해에 우리에게도 제안하는 매력이 아닐까.(글:국방일보, 사진:디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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