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경’, 운명을 알면서도 피하지 않는 자의 쓸쓸함

원경

차주영이 이토록 매력적인 배우였던가. tvN, 티빙 월화드라마 ‘원경’의 힘은 이 배우의 아우라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특히 우아함 속에 슬쩍 드러나는 쓸쓸한 눈빛은 작품 속 원경(차주영)이라는 인물의 깊은 내면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그 눈빛은 마치 앞으로 자신이 마주할 비극적인 운명을 알면서도 피하지 않는 자의 쓸쓸함을 담고 있다. 

 

‘원경’이 흥미로운 건 조선 초기의 혼돈기를 다루면서 이성계(이성민)와 이방원(이현욱)이 아닌 원경왕후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춘 점이다. 그 역사적 사실은 이미 여러 차례 사극으로 재현된 바 있어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이처럼 관점을 바꿔 놓으니 또 다른 서사가 가능해졌다. 지금껏 주목하지 않았던 원경이라는 인물이 재조명되었고, 조선의 역사에 이 인물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가가 새삼 주목되게 했기 때문이다.

 

이 사극에서 이방원은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인물이다. 자신만의 조선에 대한 야망이 있었고, 그걸 펼쳐내기 위해 형제들마저 죽이는 난을 일으켰다. 여기에 격분한 이성계는 계속 해서 자신의 세력들을 동원해 이방원을 위협했다. 그건 왕의 입장에서 보면 역모에 해당하는 일이지만, 그 주축이 아버지라는 점은 이방원을 복잡한 심경 속에 빠뜨린다. 야망과 불안감 그리고 분노와 회한이 뒤섞여 흔들리는 그런 인물. 

 

이 인물을 붙잡아 주는 이가 바로 원경이다. 이방원이 감정이 폭발하고 마구 흔들리고 있을 때 원경은 흔들림 없이 차분한 모습으로 그를 붙잡아준다. 결단이 필요할 때는 이방원을 결심하게 만들고, 지쳤을 때는 기대게 해준다. 이성계가 군사를 일으켜 이방원을 위협할 때도 원경은 부자 관계인 그들의 연을 끊어지지 않게 하면서도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묘안을 내놓는다. 이성계 앞에 이방원 홀로 다가가게 한 것이다. 

 

하지만 이방원과 이성계가 그 깊은 갈등을 풀어내고 같은 목표를 갖게 되면서, 원경이 오히려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될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예측된 일이다. 이방원은 이성계와 마찬가지로 권문세족들의 힘을 약화시켜 왕권을 강화하려 했고, 그래서 특히 원경의 외척세력인 민씨 일가들과 대립하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원경은 이 사실을 알고 동생들인 민무구(한승원), 민무질(김우담)은 물론이고 아버지인 민제(박지일)에게도 자중하라는 조언을 해왔다. 

 

또 권문세력들의 힘을 누르기 위해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후 이방원과 새 조선을 만들어가겠다는 의지를 드러내지만, 원경의 이 마음이 자신의 집안 사람들과 같을 리가 만무다. 민무구와 민무질이 야망을 드러내고 그래서 결국 이방원에 의해 숙청되는 일이 예고된 이유다. 대범하기 그지 없는 원경이 동생들의 숙청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이상의 위협이 다가올 때 과연 그것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원경이 매력적인 건, 바로 그렇게 흘러갈 운명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피하지 않고 걸어나가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 복잡한 내면을 차주영은 흔들리지 않는 차분한 어조와 어딘가 쓸쓸한 눈빛으로 표현해낸다. 이방원이 원경을 견제하기 위해 여러 후궁들을 들이고, 그들이 용종을 잉태해도 이 인물은 대담하고 대범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다. “왕자를 낳으면 내 아들로 알고 키우면 그만이네”라고 말하는 대범함이라니.

 

이토록 왕후로서의 대범함을 가진 인물이지만 남편 이방원에 대한 애증 또한 원경은 드러내는 인물이다. “그대는 결국 나의 사랑을 잃게 될 것이오”라고 말하는 이방원에게 원경은 “전하의 사랑을 잃는 것이 저를 잃을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사가로 떠난다. 그리고 그 곳에서 결국 원경이 보고싶어 찾아온 이방원을 맞이한다. 또 이성계와 일전을 벌이기 위해 떠나는 이방원에게 합방을 스스로 요청해 자신의 뜨거운 사랑을 드러낸다.

 

왕후로서의 면모와 더불어 한 여인으로서의 모습을 모두 가진 이 인물이 이토록 매력적으로 그려질 수 있었던 건 다름 아닌 차주영의 깊이 있은 내면연기 덕분이다. 특히 강인함 속에 언뜻 드러나는 쓸쓸한 눈빛은 이 인물에 대한 연민의 감정마저 느끼게 만든다. 흔들리지 않는 자에게서 언뜻 비쳐지는 감정만큼 보는 이들의 마음을 뒤흔드는 게 있을까. 차주영은 원경이라는 인물을 통해 그걸 꺼내 보여주고 있다. (사진:tvN)

‘나완비’의 이준혁, ‘옥씨부인전’의 추영우, 외조하는 남성 판타지에 쏠린 시선

나의 완벽한 비서

배우 이준혁과 추영우에 대해 쏠린 대중적 시선이 어딘가 예사롭지 않다. 이준혁은 최근 출연하고 있는 SBS 금토드라마 ‘나의 완벽한 비서’로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글로벌 OTT 라쿠텐 비키에 따르면 이 작품은 전 세계 123개국에서 시청자 수 1위를 기록하며 이준혁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을 만들어내고 있다. 한편 JTBC 토일드라마 ‘옥씨부인전’으로 추영우 역시 대세 배우로서 급부상중이다. 이 작품에 이어 올해 방영될 차기작 세 편(중증외상센터, 광장, 견우와 선녀) 또한 기대를 모으고 있는 것. 

 

이 두 배우가 주목되는 건 역시 이들이 출연하고 있는 작품 덕분이다. 올해 들어 시청률과 화제성에서 가파른 성장곡선을 그리고 있는 드라마는 단연 이들이 출연하고 있는 두 작품이다. 물론 두 작품은 성격이 다르다. 하나는 오피스 로맨스물이고 다른 하나는 사극이다. 하지만 이 두 작품에는 공통되는 지점이 하나 눈에 띤다. 그것이 외조하는 남성 판타지가 들어 있다는 점이다. 

 

‘나의 완벽한 비서’의 유은호(이준혁)는 딸을 홀로 키우는 싱글대디다. 딸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직장에서의 불이익까지 감수하고 육아휴직을 할 정도로 이 인물은 일단 가정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살림은 물론이고 가사까지 완벽하다. 아이를 위한 건강식은 물론이고 일정까지 착착 정리해 관리하는 프로 살림꾼이다. 그런데 이 완벽한 살림의 능력은 고스란히 비서로서의 능력으로도 발휘된다. 

 

엄청난 열정으로 스카우트라는 일에 뛰어들어 자수성가했지만 자기 관리는 도무지 하지 않는 강지윤(한지민)에게, 갑자기 나타난 비서 유은호는 그래서 구원의 존재가 된다. 보기만 해도 정신 사나워지는 사무실을 완벽하게 정리해주고, 처리해야 할 업무에 맞게 자료를 준비해주며, 실제 스카우트 업무에서도 전직 회사 인사팀에서 발휘했던 능력을 활용해 성과를 낸다. 그저 업무적인 도움만 주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강지윤이 기댈 수 있게 해주는 역할도 한다. 이러니 강지윤에게 유은호는 저 숱한 드라마 속 재벌2세보다 더 한 판타지가 아닐 수 없다. 

 

유은호가 보여주는 외조하는 남성 판타지는 현재 여성들의 달라진 욕망을 보여준다. 스스로 거둔 성취를 일의 영역에서도 느끼고 싶어하는 무수한 직장여성들은 이제 그저 돈많은 재벌3세가 판타지가 되지 못한다. 다른 세계의 저들과 어우러지는 것 자체가 피곤할뿐더러, 그것이 진정한 자아성취의 행복감을 주지도 못할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대신 자신이 하는 일을 묵묵히 한 발 뒤에서 밀어주고 응원해주는 그런 판타지가 훨씬 더 강력하다. 유은호 같은 남성 판타지가 단박에 여심을 사로잡은 이유다. 

옥씨부인전

외조하는 남성 판타지는 ‘옥씨부인전’의 송서인(추영우)이었지만 천승휘로 또 성윤겸으로 정체를 바꿔가며 살아가는 인물에서도 똑같이 드러나는 모습이다. 본래는 송씨 집안의 자제인 줄 알았지만 기녀에게서 난 서자라는 사실을 알고 이 인물은 천승휘라는 전기수로서 살아간다. 송서인 시절부터 마음에 뒀던 노비 구덕이(임지연)를 변함없이 사랑하지만 이 인물의 사랑법이 독특하다. 물론 구덕이가 옥태영이라는 양반집 딸로 정체를 바꿔 성윤겸이라는 인물과 혼례를 이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천승휘의 사랑은 전면에 나서는 게 아니라 한 발 뒤로 물러나 도와주는 사랑이다. 

 

집 나간 성윤겸이 사망했다며 과부로서의 삶을 강요받을 위기 상황에 몰리자 천승휘는 성윤겸인 척 연기를 해 옥태영을 구해낸다. 얼굴이 비슷하게 생긴데다 천승휘가 타고난 연기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렇게 옥태영과 부부처럼 살게 된 천승휘는 집안 일을 도맡아 하며 외지부로 일하는 아내를 돕는다. 사극이라는 외형을 갖고 있지만 일하는 여성으로서의 옥태영을 외조하는 천승휘의 남성 판타지가 도드라지는 지점이다. 

 

‘나의 완벽한 비서’의 유은호나 ‘옥씨부인전’의 천승휘를 통해 드러나는 외조하는 남성 판타지가 예사롭지 않게 보이는 건, 이 두 작품의 강력한 힘이 바로 이 판타지에서 나오고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이 판타지를 실감하게 만드는 이준혁과 추영우의 호연이 바탕이 된 것이지만, 이렇게 연기와 역할이 맞아 만들어내는 판타지의 동력에는 현실적인 욕망이 공조하기 마련이다. 

 

일하는 여성들의 자기 성취에 대한 욕망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요즘이다. 물론 그 욕망은 육아나 가사 같은 여전히 힘겨운 현실에 부딪쳐 좌절되거나 꺾이는 일이 적지 않다. 그래서 생겨난 외조하는 남성 판타지는 아마도 향후에도 드라마의 중요한 동력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준혁과 추영우의 급부상이 단지 좋은 배역을 잘 소화해낸 것에 머물지 않고 신드롬적인 느낌을 주는 건 이런 현실이 밑그림에 깔려 있어서다. (사진:SBS,JTBC)

‘하얼빈’의 안중근 의사로 돌아온 현빈의 어른이 되는 과정

하얼빈

영화 ‘하얼빈’은 끝없이 펼쳐진 꽁꽁 얼어붙은 강 위를 걸어나가는 안중근(현빈)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영화 ‘듄’을 촬영했던 카메라 ARRI 65에 담겨진 광활한 압도적인 광경 속에 홀로 걸어가는 안중근의 모습은 너무나 외롭고 고독하며 힘겨워 보인다. 영화 속에서 안중근은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큰 정신적인 고통을 감내하는 중이다. 신아산 전투에서 ‘만국공법’을 지켜야 한다며 풀어준 적장 때문에 동료들이 희생되는 사건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기하고픈 마음에 얼음바닥에 눕기도 하지만, 그는 끝내 일어나 다시 그 얼음 위를 걸어나간다. 그 때 내레이션으로 흘러나오는 안중근의 목소리는 그가 무엇 때문에 포기하지 않았는가를 드러낸다. “그 순간에 깨달았습니다. 나는 죽은 동지들의 목숨을 대신하여 살고 있다는 것을.” 바로 먼저 간 동지들이 그를 계속 걷게 만들었던 거였다. 

 

‘하얼빈’에서 안중근을 연기한 현빈은 그 두만강을 건너는 장면을 몽골의 홉스골이라는 호수에서 홀로 그 한복판으로 들어가 걷고 쓰러지고 누워버리다 다시 일어나 걷는 그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찍었다고 한다. 영화만 봐도 그 촬영이 얼마나 힘겨웠을지 느껴지는데 이에 대해 ‘유퀴즈 온 더 블럭’에 나왔던 현빈은 의외의 말을 꺼내놨다. 힘들기보다는 그 “고립되어 있고 외로이 있는 상황들이” 오히려 안중근 의사를 연기하는데 도움이 됐다는 거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얼음 위를 한 발 한 발 끊임없이 내디뎌야 되는 그 마음이 어땠을지 그 혹독한 촬영 현장 덕분에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얼빈’ 촬영 당시, 홉스골에서 있었던 이 이야기는 현빈이라는 배우의 현재를 잘 보여준다. 한때는 비현실적으로 잘 생긴 외모 이야기가 배우로서의 이야기보다 더 많았던 현빈이었다. 하지만 그의 필모를 잘 들여다보면 그가 배우로서 얼마나 노력해왔고, 그 결과 현재의 아우라를 갖게 됐다는 걸 실감할 수 있다. 실제로 그를 스타덤에 올린 ‘내 이름은 김삼순’을 보면 당시 그가 연기했던 현진헌이라는 인물이 가진 새로움이 느껴진다. 김삼순을 직원으로 둔 까칠한 연하남 사장이다. 그 까칠한 인물이 김삼순에게 점점 빠져들고 그래서 한라산 꼭대기에서 “누구 맘대로 김희진이야! 난 삼순이가 좋다고 그랬지?”하고 말하는 장면에서 시청자들이 울컥하게 된 건 현빈의 눌러주는 연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려 5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한 이 작품을 통해 현빈은 폭넓은 팬층을 확보한 배우가 된다. 

 

그리고 김은숙 작가의 ‘시크릿 가든’으로 현빈은 스타 배우로서의 정점을 찍는데 이 작품 역시 쉬운 역할은 아니었다. 백화점을 소유한 재벌3세 역할이었지만 스턴트우먼인 길라임(하지원)과 몸이 바뀌게 되고 사랑에 빠지게 되는 판타지가 들어 있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으로 백상예술대상에서 대상을 받은 현빈은 무수한 광고의 모델이 될 정도로 신드롬급의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현빈은 이러한 초절정의 인기 속에서도 그 순간에 깊숙이 빠져들지는 않았다. 그건 평소 부모님이 현빈에게 “큰 거에 빠져 심취해 있으면 작은 것의 감사함을 모를뿐더러, 그것이 없을 때의 상실감도 클 수 있다”고 말해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상의 이목이 다 집중되던 그 순간에 현빈은 해병대에 입대했고, 그래서 백상예술대상의 대상 수상소감도 군대에서 군복을 입고 찍은 영상으로 전해졌다.

 

‘유퀴즈 온 더 블럭’에서 그는 군대가 차분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해줬다고 말했다. “제 일과 현빈이라는 사람을 떨어져서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그 시기가 굉장히 좋았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내무반에서 TV를 보다가 다른 사람들의 작품이 나오면 그게 어느 순간 하고 싶은 거예요. 내 직업을 내가 이만큼 좋아하고 있고 이걸 놓지 않고 있구나 하는 걸 새삼 느끼게 된 좋은 시간이었죠.” 

 

이 시간들이 자양분이 되어 현빈은 전역 후 보다 성숙한 배우로서의 면모들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영화 ‘역린’으로 첫 사극을 찍었는데, 단 한 줄로 ‘세밀한 등 근육’이라고 써 있는 그 몸을 만들기 위해 헬스가 아닌 맨 몸 운동으로 잔근육을 만들 정도로 그는 연기에 진심이었다. 드라마 ‘하이드 지킬, 나’에서는 이중인격을 가진 인물을 연기했고, 영화 ‘공조’에서는 임무를 받고 남한으로 내려와 남한 형사와 공조 수사를 진행하는 북한 형사를 연기했다. ‘협상’에서는 처음으로 악역에 도전했고,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에서는 실제 게임 속으로 들어가는 판타지 설정의 드라마에 그의 연기가 현실감을 부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사랑의 불시착’으로 또 한 번의 신드롬을 불러 일으키며 함께 연기했던 손예진과 세기의 결혼에 골인해 가정을 이뤘다. 

 

이러한 일련의 성장 과정들이 있어서일까. ‘하얼빈’으로 돌아온 현빈은 어딘가 달라보인다. 안중근이라는 인물의 내면을 보다 깊이있게 담아내고 있는데, 그건 그 서른 즈음에 죽을 걸 알면서도 그 길을 외면하지 않고 걸어간 안중근을 이해하려한 그의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또한 ‘하얼빈’에서 현빈은 다른 배우들과의 앙상블에 있어서도 도드라진 면모를 보인다. 물론 그가 주인공이지만 함께 독립 투쟁을 한 다른 인물들이 똑같이 주목될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하얼빈’은 안중근 한 사람만이 아니라 우덕순(박정민), 이창섭(이동욱), 김상현(조우진), 공부인(전여빈) 같은 여러 독립군의 면면이 살아있는 작품이 됐다. 

 

“내가 한발짝 뒤로 물러나면서 어른이 되는 것 같다.” ‘유퀴즈 온 더 블럭’에서 현빈은 가정을 꾸린 후의 변화를 그렇게 말했다. 자신이 점점 뒤로 가면서 이 상황들을 책임져가는 것. 내 중심에서 내가 중심이 아닌 사람이 점점 되어가는 것이 바로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아마도 현빈의 연기에서 느껴지는 깊이는 여기서 나오는 게 아닐까. 한발짝 뒤로 물러남으로써 생겨나는 여유는 깊이를 만든다. 연기에 있어서나 삶에 있어서나 현빈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글:국방일보, 사진:영화'하얼빈')

하얼빈

“모든 걸 포기하고 죽으려 했습니다. 죽은 동지들의 참담한 비명이 귓가를 맴돌고 눈앞을 떠돌았습니다. 그 순간에 깨달았습니다. 나는 죽은 동지들의 목숨을 대신하여 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해야할 일을 알았습니다. 대한제국을 유린하는 일본 늑대의 우두머리, 늙은 늑대를 반드시 죽여 없애자고.” 우민호 감독의 영화 ‘하얼빈’은 이러한 내레이션과 함께 죽은 줄 알았던 안중근(현빈)이 꽁꽁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살아돌아 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영화관에서 봐야 그 압도적인 스케일이 느껴질 법한 그 광경은 실제 두만강의 풍경은 아닐게다. 칼바람이 불어오는 얼음 위를 홀로 걸어나가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오한이 들 것 같은 느낌으로, 그 곳을 걷는 이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그 마음은 지옥이다. 

 

그는 신아산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일본군 장교 모리(박훈)를 ‘만국공법’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풀어줬다가 동료들이 희생되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었다. 내레이션으로 나온 그 말 그대로 그는 ‘모든 걸 포기하고 죽으려는’ 마음까지 있었을 게다. 꽁꽁 얼어붙은 두만강 위를 걷다가 그 차디찬 얼음바닥에 누워버린 그는 그러나 끝내 일어나 다시 그 얼음 위를 걸어나간다. ‘길을 잃고’ 방황하던 그를 붙잡아준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절망하게 만든 먼저 간 동지들이었다. ‘하얼빈’은 이 일로 목표를 분명히 알게 된 안중근이 늙은 늑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 위해 계속 앞으로 나가는 이야기다. 그 끝이 결국 자신의 죽음이라는 걸 알면서도. 

 

사실 안중근의 이 이야기를 모르는 한국인들은 없을 게다. 누구나 역사책을 통해서 그 이야기를 접한 바 있고, 역사 다큐멘터리나 심지어 예능 프로그램에서조차 그 이야기는 자주 등장했다. 뮤지컬과 영화로도 제작된 ‘영웅’이 있었고, 종교적으로 그려낸 영화 ‘도마 안중근’도 있었으며, 보다 인간적인 안중근의 면면을 따라간 김훈 작가의 소설 ‘하얼빈’도 있었다. 이 정도면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를 굳이 영화로 왜 만들었을까 싶지만, 본래 역사를 소재로 하는 작품들은 시대에 따른 재해석이 담기기 마련이다. 우민호 감독의 ‘하얼빈’은 저 두만강을 건너는 장면이나, 사막을 건너가는 장면처럼 마치 지옥도 같은 압도적인 풍광으로 펼쳐진 절망적인 심리적 상황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나아가는 위대한 인간의 모습으로 안중근을 재해석했다. 그래서 안중근을 비롯한 독립투사들이 은거지에 모여 대화를 나누는 장면들은 마치 램브란트의 그림을 보는 듯한 음영이 분명한 영상으로 담겼는데, 그것 역시 이들의 내면이 투영된 것처럼 표현된다. 어둠이 금세라도 이들 잡아먹을 것처럼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지만, 그 어둠은 오히려 이들의 굳은 의지가 드러나는 얼굴을 빛나게 한다. 

 

결코 ‘하얼빈’은 편안하거나 유쾌하게 즐길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절망의 어둠 속을 들여다보는 일이고, 꽁꽁 얼은 길을 함께 걸어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요즘처럼 어려운 극장가에서 400만 관객을 돌파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영화의 힘을 만들어내고 있는 걸까. 

 

혹자는 ‘국뽕’을 이야기하지만, ‘하얼빈’은 결코 감정에 호소하는 작품은 아니다. 이는 마지막에 사형대에 오르는 안중근의 모습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영웅’에서 그 장면은 비장하게 그려지며 관객들의 감정을 끌어올리지만, ‘하얼빈’에서는 무감하게 처형되는 장면으로 간단히 연출된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의 흥행은 여러모로 그 누구도 예상 못했던 현 시국의 영향을 얘기할 수밖에 없다. 이런 시국이 아니라면 그저 평범한 대사 한 줄로 여겨졌을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인에 대해 말하는 대사가 이토록 큰 화제가 됐을 리 없기 때문이다. “조선이란 나라는 어리석은 왕과 부패한 유생들이 지배해 온 나라지만 저 나라 백성들이 제일 골칫거리야. 받은 것도 없으면서 국난이 있을 때마다 이상한 힘을 발휘한단 말이지.” 메인 예고편에도 고스란히 들어간 이 장면에서 관객들 대부분은 현재 벌어진 탄핵 정국을 떠올렸을 게다. 비상 계엄 선포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 국회로 달려가 이를 저지했고, 탄핵안 통과를 위해 국회의사당 앞에 구름 같이 모여 응원봉을 들었던 시민들을 떠올렸을 게다.

 

우민호 감독이 한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이 장면에 대해 꺼내놓은 이야기 역시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이토 히로부미가 실제로 한 말이에요. 유생들이나 왕은 하나도 두렵지 않은데, 마차 타고 총독부를 갈 때마다 자신을 쏘아보는 민초들의 눈빛이 너무 서늘했다고요. 민초들에겐 두려움을 느낀 거죠. 그런데 지금 시대가 이렇다 보니 그게 또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게 돼 참 아이러니하고 서글프기도 하네요.” 당대의 민초들의 눈빛처럼 현재의 관객들도 같은 눈빛으로 이 영화를 쏘아보며 현 시국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얼빈’은 그래서 그 절망적인 시국을 외면하지 않는 눈빛들이 모여든 영화처럼 보인다. 물론 이건 우민호 감독이 의도한 바는 아니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에 무능한 기득권자들에 의해 비극에 내몰린 민초들이 그 절망을 뚫고 나오는 그 과정들이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는 건 감독의 말처럼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영화는 풀 한 포기 자라날 것 같지 않은 얼음 위를 걸어가는 안중근의 모습으로 시작하지만, 그가 사형대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에서 화면을 전환해 하늘을 향해 뻗어있는 나뭇가지들을 보여준다. 꽁꽁 얼어붙은 겨울의 절망이 꽃이 피어나는 봄으로의 희망을 꿈꾸는 장면이다. 그런데 그 봄은 그냥 오는 게 아니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누군가 포기하지 않고 가야할 길을 꿋꿋이 걸어간 이들이 있어 그 봄이 오는 것이라고. “어둠은 짙어오고 바람은 더욱 세차게 불어올 것이다. 불을 밝혀야 한다. 사람들이 모일 것이다. 사람들이 모이면 우리는 불을 들고 함께 어둠 속을 걸어갈 것이다.” 안중근의 외침이 가슴에 와닿는 꽁꽁 얼어붙은 시국이다. (글:이데일리, 사진:영화'하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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