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원표 액션 드라마, ‘해바라기

‘해바라기’는 말 그대로 딱 정해진 공식을 걸으며 조금치의 곁길을 넘보지 않는 전형적인 장르영화다. 과거에 엄청나게 악명 높았던, 그래서 감옥에 가야했던, 그리고 감옥에서 후회하고 나와서는 ‘술 마시지 않고, 싸우지 않고, 울지 않겠다’며 바보처럼 행세해야 했던, 그러나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가만두지 않는 현실 속에서 다시 과거의 그 길을 걸어가야 했던 한 사나이의 이야기. 이 정도면 영화 ‘해바라기’에 대한 대충의 설명은 끝이다.

하지만 그런 뻔한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눈물을 흘리거나, 어떤 뭉클함을 받았다면 그것은 오로지 김래원의 몫이다. 이 영화에서 김래원은 정말 김래원표의 드라마와 김래원표의 액션을 섞어 공식적인 신파 속에서 어떤 반짝거림을 발견하게 만든다.

감옥에서 나와 옛 동네로 돌아온 오태식을 연기하는 김래원의 모습에서는 노틀담의 꼽추가 떠오른다. 엄청난 괴력과 악마성을 그 속에 품고 있으나 그로 인해 주변사람들이 더 이상 상처받는 걸 원치 않는 내면. 자신 속으로 틀어박혀 누가 때리기라도 하면 그 속을 들킬까 더 움츠러드는 몸. 맞는 것이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죗값이나 되는 듯 무덤덤해지는 얼굴. 그것들은 저 노틀담의 꼽추의 비극적인 존재를 닮았다.

김래원의 눈빛은 늘 초조하게 상대방의 시선을 바라보지 못하고 몸짓 또한 잔뜩 상처 입은 짐승 마냥 위축되어 있다. 그가 왜 그런 상태를 보여주는지 영화가 설명하기도 전에 우리는 그 모습에서 알 수 없는 슬픔에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그저 동물적인 울림이지만 그것만으로 영화는 관객들을 그에게 이입시키는데 성공한다. 이제 김래원이 사회에서 받는 굴욕과 아픔은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되며 마지막 숨겨졌던 괴물의 분노가 드러나는 그 순간까지 관객의 마음 속에서 감정은 켜켜이 쌓여간다.

영화는 특별히 오태식이라는 괴물의 탄생과정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평범한 인간이 되려하는 오태식이라는 괴물을 다시 괴물로 만들어버리는 자가 조판수라는 두목이라는 것이다. ‘부동산 활극’이라 불리는 ‘짝패’, ‘비열한 거리’의 조폭들처럼 조판수 역시 바로 그 재개발에 뛰어든 작자다. 보통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밀어버리고 자신들의 건물을 올려 이권사업에 뛰어드는 그들이 최소한 오태식이란 괴물을 다시 불러낸 장본인이다.

‘해바라기 식당’과 그 식당 주변에 심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불도저에 사라져버린 해바라기들은 이 영화의 제목이 발원한 곳이기도 하고, 또한 영화가 말하려는 소박한 주제(사실 이 영화는 주제의식보다는 장르적 재미에 치중한다)이기도 하다. 그리고 영화 속의 해바라기들은 단지 그런 배경만이 아니다. 바로 김래원과 그의 엄마를 자청하는 덕자씨(김해숙 분), 그리고 그녀의 딸인 희주(허이재 분)가 바로 해바라기들이다. 단순해 보이지만 이 해바라기들을 짓밟아버린 그들에게 오태식이 괴물로 돌아오는 장면은 설득력을 얻는다.

폭발적인 라스트신에서의 김래원의 모습은 따라서 그간 숨겨온 악마성이 드러나는 장면이지만, 또한 관객들이 마음 속에 쌓아온 감정이 터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불길을 뒤로하고 한 걸음 한 걸음 야차처럼 걸어가며 주먹을 휘두르는 장면에서 우리는 또 한번 보게 된다. 노틀담의 꼽추. 그 비극적인 몸을 가진 존재를.

김래원은 광기와 감성의 양면을 적절히 가진 배우다. 어떨 때는 한없이 소년 같다가도(청춘, ...ing, 어린 신부) 어느 순간에는 악마 같은 눈빛을 뿜어낸다(미스터 소크라테스). 이런 감성이 잘 맞아떨어진 것이 ‘해바라기’의 오태식이란 인물이다. 김래원은 소박한 일상이 어색하기만 한 상처받은 짐승이 작은 행복을 찾았을 때 보여주는 순진무구한 얼굴(심지어는 바보 같은)을 보여주면서도 그 이면의 야수성을 연기한다. 아마도 김래원은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의 각본과 연출을 맡았으며, <투사부일체>의 각본을 쓴 강석범 감독이 찾던 바로 그 인물이었을 것이다. 두 작품이 보여준 가족애를 찾는 드라마성과 액션물이 모두 가능한 그 인물.

다소 장르 관습적인 장면들의 과다와, 신파적 구도, 몰입을 방해하는 장르의 혼선 등이 눈에 거슬리지만 이 영화는 김래원의 그 굵직한 연기를 통해 액션 너머의 드라마성과 드라마 이상의 강렬한 액션을 보여준다. 언뜻 보이는 김래원의 쓸쓸한 얼굴 속에서는 심지어 ‘희망노트’에 작은 소망을 적어가며 살아가는 소박한 우리네 서민들의 신산함마저 느껴진다.

시대적 트라우마를 찾아 나선 멜로들

2006년 가을을 시작으로 우리네 멜로는 한 가지 흥미로운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하 우행시)’에서 슬쩍 그 감성을 내보이더니, ‘가을로’에서는 얼굴을 드러냈고, 이제 ‘그해 여름’에 와서는 그것을 완성해내고 있다. 그것은 바로 멜로드라마가 사회적인 문제와 만나는 지점, 멜로라는 개인적인 사건이 사회라는 거대담론 속에서 파괴되는 지점, 아픔을 안고 있는 현재가 그 아픔의 진원지인 과거를 쫓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멜로 영화들은 왜 그 사회적인 문제를 혹은 그 아팠던 시대를 찾아가고 있는 것일까.

당신을 울린 것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사랑하고 이별하고 아파하는 기본적인 멜로의 틀은 부단히도 실험을 거듭했다. 눈물을 빼기 위한 최루성 멜로를 그려냈던 우리 식의 신파들이 비판에 직면했을 때, 우리에게 일본식의 멜로드라마는 그 자체로 참신함을 주었다. ‘러브레터’로 대변되는 이 일본식 멜로드라마는 이른바 ‘가면을 쓴 멜로’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일본식 정서에 부합하는 ‘감정 숨기기’를 보여주었다. 이것은 토로식의 신파 멜로에 식상해진 관객들에게는 세련된 멜로로 보여졌다. 물론 최루성 멜로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또 한 갈래가 헐리우드식의 로맨틱 코미디이지만 이것은 궁극적으로 눈물보다는 웃음에 방점을 찍는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들 멜로드라마들은 사회극과의 퓨전을 통해 전혀 새로운 형식을 도출해내고 있다. ‘우행시’에서 보여주었던 신파와 사회극 사이에서의 줄타기는 ‘가을로’에 와서는 절제된 멜로드라마와 사회극 사이에서 벌어진다. 그리고 ‘그해 여름’에 와서는 다시 신파와 사회극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우행시’에서의 실험을 좀더 멜로로 완성시킨다. 사회적인 아픔과 개인적인 아픔이 교차되면서 발생한 것은 눈물의 층위가 다양해졌다는 것이다. 우리는 개인적인 멜로드라마 속에서 눈물을 흘리다가 갑자기 시대의 아픔 같은 것을 공유하는 눈물을 흘리게 된다.

사회는 그들의 사랑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 영화 속 주인공들이 엮어 가는 사랑의 특징은 그것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 사회적인 문제로 인해 장벽을 맞이한다는 데 있다. ‘우행시’에서 그것은 가난과 사형제도의 얼굴을 하고 나타났고, ‘가을로’에서 그것은 재난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해 여름’은 이제 60년대 말 사회적 상황을 그 장벽으로 끌어들인다. 그들은 사랑하지만 사회는 그들의 사랑을 용납하지 않는다(이것도 역시 넓게 보면 신파의 한 틀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되자 관객들이 가지는 감정은 단순한 슬픔의 차원을 뛰어넘는다. 이제 우리는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데서 오는 눈물 속으로 울컥 치솟아 오르는 무언가를 느낀다. 바로 분노이다. 분노의 감정과 슬픔이 교차하면서 멜로가 주는 눈물의 강도는 높아진다. 특히 시대적 아픔을 함께 살아왔던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들은 아팠던 과거를 쫓는다
영화는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그 아팠던 시간으로의 동행을 시작한다. 현재의 나는 과거 그 시간 속에서 잠시 잊고자했던 기억들을 다시 끄집어낸다. ‘우행시’에서의 과거가 달동네와 가난 같은 것에 있었다면, ‘가을로’는 구체적인 사건, 삼풍백화점 붕괴(이것은 단지 삼풍백화점뿐이 아니다. 당대 있었던 각종 재난사건들로 인한 사회적 분위기를 총체적으로 상징한다)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그것은 또한 ‘그해 여름’에 와서는 간첩사건과 학생운동이 치열했던 60대 말의 시간으로 이어진다.

시대적 아픔은 그 자체로 눈물의 원천이 된다. 따라서 영화가 일단 시대상황을 살짝 보인 후에 그것을 더욱 극적으로 하는 방법은 최대한 시대적 상황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우행시’는 보다 신파쪽에 무게를 둠으로써 이런 방식을 채택하지 않지만, ‘가을로’와 ‘그해 여름’은 바로 이런 ‘가리는 방식’으로 멜로를 극대화시킨다. ‘가을로’가 백화점 붕괴사건이라는 충격적인 장면이 잠깐 나온 연후에 바로 로드무비 형식으로 그 사건을 빠져나와 아픔을 얘기하는 방식을 채택한 반면, ‘그해 여름’에 와서는 첫사랑이라는 이야기로 흘러가다가 시대적 아픔이라는 장벽을 맞닥뜨리게 하는 방식을 채택한다. 이렇게 해서 두 영화는 모두 무거운 사회극이라는 외피를 벗고 멜로의 옷을 입는다. 그러나 이것은 겉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감정 선을 따라가는 멜로 영화의 특성상 이 영화들 내내 지속되는 감정의 힘은 바로 그 사회적 상황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돌아보기만 해도 눈물이 난다
이 영화들이 과거(혹은 현재도 지속되는 과거)를 다루고 있지만 이 영화를 보는 이들은 현재에 있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보면서 어떤 감정에 휩싸이게 되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알게 모르게 깊이 각인된 시대적 트라우마가 있다는 걸 말해준다. 그 누구도 닦아주지 않았던 그 아픔을 누군가 끄집어내 주었을 때 우리는 그것만으로도 감정에 젖게 된다.

아픔을 겪었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트라우마에 대한 강한 거부감은 멜로라는 외피를 입었을 때는 느슨해지기 마련이다. 그 느슨함 속으로 불쑥 얼굴을 들이미는 상처를 다시 보면서 눈물 흘리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이들 영화들이 취하는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멜로적인 접근(사회문제의 개인화)은 비판의 소지가 있지만, 또한 그것은 최소한 외면했던 트라우마를 마주보게 하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기능을 하기도 한다. 문득 돌아보면 쏟아질 것만 같은 눈물에, 앞만 보고 달려오면서 점점 표정 없는 얼굴이 되어버린 우리들에게 이 영화들은 잠깐 돌아보라고 말한다. 그해 여름의 아픔이 지워버린 아름다운 추억까지 다시 돌아보라고 한다.

만화적 감수성과 드라마의 만남

‘풀 하우스’, ‘궁’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만화와 드라마와의 공생 관계는 이제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올드 보이’, ‘타짜’, ‘아파트’, ‘다세포소녀’, ‘데스 노트’ 등의 성공은 만화가 가진 상상력의 힘과 탄탄한 드라마성, 그리고 캐릭터에다가 그 자체로서 영상화가 가능한 비주얼의 힘이 더해져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원작 만화의 매니아들이라면 이러한 작품들이 원작만 못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화를 보지 못한 대부분의 시청자, 혹은 관객들은 영화, 드라마를 통해 그 존재를 알게 되고 만화를 찾아보기까지 한다. 그런데 이런 작품들의 성공이 단순히 만화가 가진 그런 장점들 때문만일까. 더 중요한 것은 이제 우리에게 만화적 감수성이 하나의 장르적 틀로서 자리잡았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원작 만화를 드라마화 한 게 아니지만, 만화만큼 재미있는 ‘환상의 커플’의 성공이 그 단초를 제공해준다.

더 이상 부정적 의미가 아닌, ‘만화 같은 이야기’
과거 드라마 작가들이나 영화 감독, 시나리오 작가들에게는 조금 난감한 말이 있다. 그것은 ‘만화 같은 이야기’라는 말이다. 드라마나 영화에 대한 과도한 엄숙주의와 진지함이 배제하려 했던 이 말은 이제는 제작자나 기획자들에게는 적극적으로 발굴해야할 그 어떤 의미가 되었다.

과거 그들은 만화보다는 소설에서 그 모티브를 찾아왔던 것이 사실이며 이것은 현재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만화와 소설의 달라진 위상이다. 독자를 찾지 못하던 문단 중심의 소설들은 최근 독자를 찾아 나서면서 만화적인 가벼운 감성들이 무거운 주제로 엮어지는 실험적인 시도를 벌이고 있다. 하지만 만화의 상황은 정반대다. 가벼운 만화의 특성은 이제 진지함을 찾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만화의 진화와 소설의 독자 찾기는 어떤 접점을 만들어내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만화 같다’는 말은 부정적 의미가 아닌 긍정적 의미로 작용한다. 이제 그것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라든가, 완성도가 떨어진다든가 하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상상력과 캐릭터가 독특하며, 이야기 진행이 유쾌하면서도 나름대로의 진지성이 있는 긍정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만화 같은 드라마, ‘환상의 커플’
그런 면에서 ‘환상의 커플’은 정말 ‘만화 같은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이 드라마에 열광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만화 같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수용한 결과이다. 싸가지 귀족녀, 안나 조의 일거수 일투족과 그녀의 “맘에 안 들어”라는 말 한 마디에 확확 바뀌는 화면 구성은 의도된 만화적 설정들이다.

기억상실로 인해 나상실(이름 역시 만화적이다)이 되고 장철수의 집에서 살아간다는 설정 자체도 현실적인 선택이 아니다. 살짝 정신이 나간 강자나 빌리 박의 옆에서 나름 모사를 꾸미는 공실장 역시 현실에서 약간은 허공으로 들린 인물들이다. 이들의 연기는 과장되어 있고 대사는 말풍선만 달면 그대로 만화가 될 정도이다.

이 드라마가 선택한 코믹이란 장르는 이러한 만화적 설정들을 더 잘 공감하게 만드는 장치다. 우리는 그 대책 없는 유쾌함 속에 개연성이라든지, 진정성 같은 복잡한 생각들을 접어놓고 드라마에 빠지게 된다. 마치 잠깐 만화를 볼 때 그 만화적 재미에 푹 빠져드는 것처럼.

진지한 트렌디 드라마가 더 만화 같다
‘환상의 커플’은 그러므로 각각의 에피소드가 갖는 허구적인 놀이를 하면서 그 놀이 이면의 어떤 이야기를 포착하는 드라마다. 겉으로 드러난 이야기는 만화 같지만 그 만화적 전개 속에는 진짜 하려는 이야기가 숨어 있다는 말이다. 이 최악의 커플이 ‘환상의 커플’이라는 반어법으로 읽히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다툼과 부딪침이 아닌 그 이면에서 생기는 사랑의 감정 때문이다.

시청자들은 아마도 기존 트렌디 드라마들이 하는 진지한 척 하는 태도가 지겨워진 것 같다. 드라마 속의 사랑이라고 하면 무언가 운명적이고 비극적이며 진지한 것이라는 태도가 갖는 상투성이 전혀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때론 그런 트렌디 드라마가 더 만화 같다(과거의 부정적 의미로서의)고 생각되는 건, 그만큼 그들이 수많은 드라마를 보면서 더 이상 드라마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는데 있다. 드라마는 이제 하나의 게임이며 현실에서 잠깐 벗어나고픈 편안한 환상이기도 하다.

‘환상의 커플’은 이러한 만화적 편안함과 유쾌함을 안겨주었다. 시종일관 웃음을 유발하는 캐릭터들과 그들의 상황들, 그런 장면들을 역시 만화적 배치로 맛을 살린 연출은 누구나 한번 보면 빠져들지 않을 수 없는 재미를 유발한다. 한예슬을 스타덤에 올린 것은 기대 이상 보여준 그녀의 호연 때문이지만, 또한 이 드라마만이 갖는 만화적 캐릭터가 그녀에게 잘 어울렸던 탓도 있다. 이 드라마로써 우리의 주말 밤은 상큼 발랄 유쾌해졌다. 굳이 만화방에 가지 않고도 채널 하나만 돌리면 그 안에 만화보다 더 재미있는 드라마가 있으니.

개그 삼국지 정착이 가져온 개그맨의 어려움

‘개그 콘서트’의 간판 프로그램, ‘마빡이’는 그 설정이 단순하다. 그저 몇몇 개그맨들이 차례로 무대에 나와 이마를 치는 동작을 반복하는 것이다. 특별한 스토리도 없다. 있는 스토리라고는 고작 ‘그 이마를 치는 동작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가’에 대한 항변 정도다. 하지만 이 단순함이 가진 웃음의 파괴력은 크다. 그 공감의 기저에는 복잡다단한 우리네 삶에 대한 어려움을 단순화시키는 명쾌함이 자리잡고 있으며, 자학적 동작이 가진 우스꽝스런 모습을 통해 자신이 겪고 있던 힘겨움을 웃음으로 털어 버리게 하는 힘이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러한 현실에 공감을 느낄 이들이 있다. 바로 개그맨 자신들이다.

정착 단계에 들어간 공개 개그 프로그램
‘개그콘서트’로 촉발된 국내 개그 프로그램들의 변화는 이제 방송 3사가 모두 같은 색깔의 옷을 입음으로써 그 형식이 이 시대의 대세임을 증명했다. , 스탠딩 개그, 무한정 투입되는 아이디어, 새로운 얼굴들, 끊임없는 경쟁체제... 이 파고를 넘어 이제 이러한 형식의 개그 프로그램은 정착단계에 들어선 것 같다. KBS ‘개그콘서트’에 도전장을 내밀며 등장한 SBS의 ‘웃음을 찾는 사람들’이 양대 산맥으로 가르던 개그전쟁에 뒤늦게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MBC의 ‘개그야’가 등장해 ‘개그 삼국지’의 안정적인 형세를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 공개 방송류의 개그 프로그램들의 끝없는 경쟁와 아이디어 산출이 가져온 것은 시청률 상승과 함께, 개그맨의 단명이다. 이런 류의 프로그램들은 한 마디로 엄청난 개그의 인해전술을 방불케 한다. 양이 많아지면 그만큼 주의력은 흩어지게 마련. 결과적으로 어느 정도 뜬 개그맨들은 하나둘 그 아이디어 전쟁에서 밀려나 새로운 분야(방송진행, 드라마, 영화, 연극, 뮤지컬 등을 보라!)로 떠날 수밖에 없다. 이들 공개 개그 프로그램들의 성공은 어찌 보면 개그맨들의 살을 깎는 경쟁과 대전을 통해 이룬 것이다.

짧은 개그만큼 짧아지는 개그맨의 수명
‘개그 삼국지’가 전성기를 맞은 것은 이제 공개 개그 프로그램이 하나의 시스템을 온전히 갖추었다는 걸 의미한다. 그 시스템은 우리가 벗어나려 해도 벗어나기 힘든 이 사회의 경쟁 시스템과 유사하다. 제작자들에 의해 걸러진 개그가 바로 TV에 담기던 과거 가족 경영식의 개그시대는 지났다. 한번 방송사에 소속되면 평생직장이 보장되던 요순시절은 갔다. 이제 그들은 밀폐된 세트를 빠져나와 무대 위에 올려지고 그 즉시 관객들에게 판정을 받는다.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하면 그들은 자동 퇴출 된다. 편집에 의해 TV에 담기지 조차 못하는 것이다. 개그는 독해졌고 처절해졌다. 짧은 시간 내에 관객을 사로잡아야 하는 그들의 개그는 분명 촌철살인의 번뜩임과 아이디어로 충만한 것이 사실이었지만, 그만큼 웃음의 파장은 짧아졌다. 그들은 그 짧은 웃음을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만 되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러한 경쟁 시스템 속에서 부속화된 개그맨들은 스스로를 처절한 개그전쟁 속으로 몰아넣었다. 편집에서 살아남기 위해 개그맨들은 스스로를 한없이 무너뜨렸다. 갈갈이는 무를 갈았고, 옥동자는 바보짓을 했으며, 세바스찬은 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주워먹었다. 그렇게 생존하려 했지만 지금 그들의 형편이 나아졌을까. 여전히 갈갈이는 괴상한 복장의 옷을 입고 나와 스스로를 무너뜨리고, 옥동자는 마빡이로 등장해 시종일관 자신의 이마를 때리며, 세바스찬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 전쟁 속에서 처절하게 생존하거나 퇴출 되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다.

시스템 밖으로 나온 개그맨들은 나을까
이러한 시스템에서 벗어난 개그맨들은 버라이어티쇼, 토크쇼 같은 예능프로그램으로 편입되었다. 몇몇 개그맨들은 그 프로그램의 MC로서 자리잡았으나 게스트도 아니고 MC도 아닌 장기출연자들(그들은 그렇게 고정되어 있지 않기에 고정출연자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의 상황은 저 시스템 속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 프리랜서의 어려움은 그것이 안정적이지 않으며, 자칫 소속 밖에서 섭외가 안 들어오는 고립의 위험성이 존재한다는 데 있다.

또한 이들 버라이어티쇼나 토크쇼 자체가 가진 ‘출연자 중심의 방송’ 특성상 개그맨들은 자신들의 입지를 넓히기가 쉽지 않다. 그들이 부여받은 임무는 출연자를 띄워주면서 쇼를 재밌게 만들라는 것이다. 이 상황은 ‘무너지기 개그’의 기본 전제를 깔아준다. 초기 상상플러스 고정출연자들의 ‘바보놀음(?)’이나, 각종 짝짓기 프로그램에서 개그맨들의 무너지기 설정은 바로 거기서 비롯된다. 유재석의 성공은 바로 스스로를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는 프로그램의 특성과 자신의 개그스타일이 잘 맞아떨어진 결과이다. 이것은 진화에 진화를 거쳐 ‘무한도전’까지 오게 되는데 이 상황이 되면 이제는 시청자와 출연자 사이의 암묵적인 동의 하에 ‘누가 더 심하게 무너지며, 심지어 굴욕을 느끼는가’의 재미를 추구한다.

이렇게 점점 제 살을 깎아야 타인을 웃길 수 있는 상황에 몰리는 개그맨들에게, 그들 보다 더 웃기는 가수, 영화배우, 탤런트들의 출연은 심지어 위기의식까지 느끼게 만든다. 쇼 프로그램의 특성이 그들 출연자에게 맞춰져 있다는 점에서 개그맨들은 스스로의 입지를 좁혀 가는 작업을 하고 있는 셈이 된다. 이 좁혀진 입지 속에서 저 시스템 밖으로 나와 쇼 프로그램에 편입된 개그맨들은 똑같은 시스템에 직면한다. 자신에게 오는 짧은 순간 순간의 촌철살인의 순발력이 없다면 역시 마찬가지의 편집이란 칼에 난자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차마 쳐다보기 민망한 처절함
가끔 예능프로그램을 보면서 너무나 보기가 껄끄러워 고개를 돌리곤 하는 것은 그 처절함을 순간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개그맨들은 슬프다. 무너지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나, 그것이 여러 갈래길 중 하나가 아닌 오직 한 가지 길일 때 비극이 발생한다. ‘개그콘서트’와 ‘웃음을 찾는 사람들’ 그리고 ‘개그야’의 정착은 프로그램 제작자나 방송사의 입장에서는 환영할 일이나, 개그맨들에게 더 많은 어려움을 예고한다. 개그 코너와 개그 프로그램은 남아도 개그맨은 남지 않는 시스템 속에서, 그들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다. 시스템이 강화되면 개인들의 자유는 줄어들 수밖에 없듯이 말이다.

도저히 웃음이 나오지 않는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웃음을 만들어내는 개그맨들은 그 어느 정치인들보다, 경제인들보다, 의사보다, 더 존경받을 만하다(물론 가끔 개그맨들을 능가하는 정치인들이 나오기도 하지만). 마빡이의 고단함이 마치 개그맨들을 위한 퍼포먼스처럼 느껴지는 요즘의 개그계에, 그네들의 건전한 살판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처절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은 개그맨들을 안정적으로 포용할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이 요구된다. 그것은 또한 신인 개그맨의 발굴보다 이미 발굴된 개그맨의 보다 효과적인 활용이 경제적이라는 측면에서도 방송사에 결국 유리한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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