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짱. ‘타짜’를 패러디해 화제를 모으고 있는 대전개그. 자칫 잘못하면 손목이 날아가는 영화 ‘타짜’에서 보여줬던 긴장감 넘치는 도박판에서, 긴장을 무색케 하는 포복절도의 몸 개그가 폭소유발자다. 독특한 가면개그로 타짱으로 등극한 양배추, 땅그지로 웃길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하는 임혁필, 뚱뚱한 몸과 돼지를 닮은 생김새가 가진 이점에도 불구하고 잘 무너지지 않는 변칙개그의 일인자 정형돈 그리고 여기에 매번 초대되는 새로운 타짱들로 터질 듯한 폭소의 긴박감이 이어진다. 그들은 폭소를 유발하기 위해 기꺼이 한 몸을 던지는 승부사로 몸 개그의 한계를 실험한다.

▶ 개그 레시피의 핵심 포인트
1. 테이블에 앉아 양 출전자들은 먼저 상대방의 얼굴에 뿌릴 밀가루, 김가루, 생크림 등을 배팅하고 경기에 들어간다. -> 배팅은 긴박감과 함께 그것이 터지는 순간의 폭소를 예감케 한다.
2. 카드로 먼저 선을 정한 후, 주심이 가운데 장막을 가리는 동안 공격자는 자신의 신체와 도구를 이용해 상대방을 웃길 준비를 한다. -> 준비과정이 상대방에게는 가려져 있지만 시청자에게는 보인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것은 방어자가 그걸 버틸 수 있을까 하는 호기심과 공격자의 호승심을 유발한다.
3. 주심이 장막을 치우고 방어자는 일정 시간 웃음을 참아야 한다. -> 웃음을 참는다는 요소가 오히려 웃음을 유발시킨다.
4. 상대방이 웃지 않으면 주심은 공격자의 머리를 쟁반으로 내려친다(그것밖에 못해!). -> 웃기지 않은 몸 개그의 썰렁함을 마무리해주는 센스!
5. 웃음을 참지 못하면 배팅했던 가루들과 크림들로 망가지고 게임에 지게된다. -> 카타르시스의 순간. 승리자에게는 축하를, 패배자에게는 굴욕을.

이 맛깔 나는 개그의 레시피는 출전자들이 전적으로 준비한다. 자신의 신체적인 특징 또는 개인적 이미지를 활용하면 더 효과적이다. 개그맨 윤성호는 자신의 빡빡 민머리에 생등심을 던져 붙임으로써, 또한 황기순은 과거 자신의 도박 이미지를 역이용해 웃음을 유발시킨 바 있다. 라스트맨 스탠딩 방식은 토너먼트로 진행되며 챔피언과 마지막 대전을 벌여 이긴 자가 살아남는다. 이 대전개그의 독특한 긴장감과 출연진들의 얼토당토않은 몸 동작으로 인해 생겨나는 간극 사이에서 웃음은 터질 수밖에 없다. 장점은 무한히 새로운 출전자들을 연기자든 가수든 제한 없이 출연시킬 수 있다는 점. 타짱의 무한 선전이 예상되는 이유이다.

추억의 유사품 : 알까기
‘타짱’과 유사한 대전개그로 지목할 수 있는 건 단연 ‘알까기’. 타짱이 타짜를 패러디했듯이 알까기는 바둑을 패러디했다. 테이블에 앉아 차례로 공격방어를 한다는 점, 바둑이 가진 특유의 긴장감을 개그로 끌어들인 점도 같다. 양 출전자들은 초기에 개그맨에서 시작해서 차차 그 한계가 없어졌으며, 누구나 웃으며 할 수 있는 국민스포츠의 이미지까지 얻었다. 바둑알을 튀기기 전에 하는 거만한 행동과 튀길 때 하는 독특한 동작, 그리고 튀긴 후의 마무리 동작 등으로 웃음을 준다는 점에서 몸 개그를 닮아 있다. 또한 김준호가 ‘타짱’의 주심이자 해설자로서 특유의 색깔을 가지듯, ‘알까기’의 최양락 역시 해설과 함께 특유의 목소리로 유명해졌다.

퓨전사극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역사를 날 것 그대로 꺼내 보여준다면 재미있을까. 예상은 부정적이다. 그래서일까. 역사에 상상력의 날개를 달고 퓨전사극이 각광받는 시대가 됐다. 퓨전사극의 계보는 과거 ‘다모’, ‘대장금’, ‘해신’ 등에서부터 내려오고 있지만 최근 열풍의 진원지는 역시 ‘주몽’이다. 그것은 아무래도 ‘주몽’이라는 강력한 민족적 자긍심을 자극하는 소재에, 역사라는 무거운 갑옷을 벗고 더 전개가 자유로워진 퓨전사극이라는 형식이 맞물린 결과다.

결과적으로 시청률면에서 승승장구한 주몽은, 최근 연장방영에 대한 논란들마저 연착륙시켰다. 이례적으로 MBC 신종인 부사장은 인터뷰를 통해 “그간 거듭돼온 방송사의 고무줄편성에 대한 시청자들의 우려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며, “주몽 만큼은 끝까지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각인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인터뷰가 나온 지 채 1주일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이른바 ‘신물 3종 세트’가 논란이 되면서 ‘주몽’은 “이러려고 연장했냐”는 누리꾼들의 비판에 직면해있다.

드라마 ‘주몽’은 시청률에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이미 스케일 문제나, 단편적이고 자극적인 억지설정, 고구려 건국보다는 부여패망에 더 집중되어 있는 듯한 전개구성 등등 완성도에 있어서 수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그런데 이번 이 문제로 인해 ‘주몽’은 완성도의 비판 위에 그 정체성까지 의심받게 되었다. 그것은 과연 이 드라마를 더 이상 사극으로 봐야하는가의 문제다.

환타지 같은 전개와 환타지 그 자체는 다르다
‘주몽’이 시작과 함께 호평을 받은 것 중 하나는 그것의 전개가 게임이나 환타지에 익숙한 시청자들에게 유사한 재미를 준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주몽’은 그 배치된 인물과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 거의 롤플레잉게임을 닮았다. 시작부터 완성된 영웅이 아닌 단계적으로 미션을 완수하면서 업그레이드되는 영웅, 점점 강한 아이템을 얻어 가는 과정, 반지의 제왕을 연상케 하는 갑옷들 등등 그런 것들은 실제 게임과 환타지를 즐기는 젊은 시청자들의 입맛을 잡아당겼다. 그런데 그것이 과도했던 걸까.

최근 비금선 신녀의 갑작스런 출연과 그 출연과정에서 보여준, 사극이라 하기엔 과도한 환타지적인 요소, 게다가 그녀가 주몽에게 제시한 “다물활 이외의 남은 두 개의 신물” 발언은 지금까지 위태롭게 유지해왔던 사극의 틀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과거 ‘주몽’의 환타지적인 요소를 굳건히 사극의 틀로 붙잡아두고 있던 인물들은 여미을을 중심으로 한 신녀들이었다. 그것은 과거 신권과 왕권이 혼재된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역사 속 실재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과거 왕자들간의 경합에서 나온 다물활 에피소드는 여미을 신녀의 신탁만 있었을 뿐, 실제로 다물활의 어떤 환타지적인 능력을 보여준 바는 없다. 이것은 전부 여미을 신녀가 하는 말을 통해 그 상징적 의미가 전달되었던 것이다. 또한 일식이 일어나는 에피소드에서 역시 자연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사건 위에 여미을의 예언이 힘을 발휘했기 때문에 여전히 환타지가 아닌 사극의 범주 안에 놓일 수 있었다. 그러나 여미을이 죽고 사라져버린 예언의 힘 때문일까. 비금선 신녀의 갑작스런 등장(그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빛과 연무에 휩싸인 화려한(?) 등장)은 그 선을 넘어버렸다. 게다가 그 신녀의 목적은 새로운 신물을 찾으라는 퀘스트의 제시이다. 이로써 ‘주몽’은 환타지적인 전개와 환타지 사이에서 하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넘어버린 격이 됐다.

퓨전사극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과거에 이런 문제가 나올 때마다 드라마 제작자들이 숨는 지점은, ‘이 드라마는 퓨전사극’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퓨전사극의 한계는 어디까지를 두고 봐야 하는 것일까. 퓨전사극이 주목받는 시대라 마치 정통사극은 역사, 그 자체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다. 하지만 물론 사극 역시 역사가 아니다. 말 그대로 역사를 극화한 것이 사극이기 때문이다.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왜곡이 아닌 이상 대세에 지장이 없다면 사극으로 수용되어진다. 그런데 여기서 한 발 더 나가 퓨전사극으로 넘어가면 이건 좀더 복잡해진다. 그 한계를 어디까지 두어야 사극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점 때문이다. 아직까지 여기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잣대는 상식뿐이다.

상식적으로 우리는 ‘삼국지’를 창작물로 생각하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역사 자체가 상상의 산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수호지’의 경우에는 조금 다를 수 있다. 대부분의 인물들이 가상으로 설정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역사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을 법한 개연성을 갖고 있다는 데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서유기’는 다르다. 이것은 역사를 넘어서 완벽한 가상의 세계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삼국지’와 ‘수호지’가 역사소설에 가깝다면 ‘서유기’는 환타지에 가깝다. 이 역사소설과 환타지 사이가, ‘주몽’이 지금까지의 여타 사극들과 다르게 위치한 지점이다.

과거에도 ‘소금산 에피소드’에서 ‘주몽’은 이 서유기적인 면모를 보인 바가 있다. 드라마 인물들의 유기적인 전개가 이루어진 결과가 아닌, 신탁에 의해 준비되어진 결과는 시청자들을 실망시킨다. ‘주몽’의 사극제작에 있어서‘사료가 없다’는 것은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상식을 넘어서는 공상이나 환상이 필요하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저 무협영화에서 주인공들이 날아다니는 것을 볼 때 처음엔 즐거웠으나, 차츰 ‘날아다니지 못하면 바보 되는 주인공들’에 식상해진 경험이 있다. 퓨전사극은 여전히 사극이며 환타지가 아니다. 그러므로 사극으로 기대하고 있던 드라마가 그 경계를 넘어버릴 때 시청자들은 사극의 땅에 발을 딛지 못하고 허공에 붕 뜨게 된다. 퓨전사극처럼 그것이 땅이 아닌 허공에 매달린 줄이라고 해도, 떠오른 몸은 다시 줄로 내려앉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저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 한 판 줄타기의 소재가 어느 시대나 한두 번쯤 나올 수 있는 그런 인물의 이야기가 아니라는데 있다. 이건 우리 모두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오던 그 신화적 인물, 주몽에 대한 이야기다.

환상 속의 커플이 환상적인 커플이 되다

‘환상의 커플’은 웃음이 드라마에서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가를 보여주었다. 드라마의 완성도나 리얼리티 같은 걸 잠시 접어두고 우리는 드라마 내내 웃음을 터트리다가 어느새 종영을 맞았다. 어찌 보면 조금은 허탈할 수 있는 이 웃음폭탄은 그러나 마지막에 와서 1%의 눈물을 보여주면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 공감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 한예슬이라는 연기자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나상실 혹은 조안나라는 캐릭터이다.

환상적인 커플, 환상 속의 커플
드라마 종영의 시점에 와서 ‘환상의 커플’이란 드라마 제목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는 걸 알게된다. 그것은 만나기만 하면 서로를 못 잡아먹어 으르렁거리면서도 차츰 마음을 열게되는 나상실과 장철수(오지호 분), 이 안 어울리는 듯 잘 어울리는 커플을 ‘환상적인 커플’이라는 의미로 지칭하는 ‘환상의 커플’이다. 그런데 후반부로 가면서 이 ‘환상의 커플’은 현실이 아닌 ‘환상 속의 커플’이란 의미가 하나 더 덧붙여졌다.

조안나로 돌아온 나상실에게 빌리박은 말한다. “모든 걸 환상이라고 생각해.”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대꾸한다. “환상이라면 이렇게 아플 리가 없어.” 빌리박은 또 묻는다. “당신은 나상실이야? 조안나야?” 그러자 그녀가 말한다. “그 둘 다가 나야.” 이 일련의 대사들은 그녀 안에서 조안나와 나상실이 서로 공존하며 부딪치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그녀에게는 두 개의 현실이 있는 셈이고 빌리박은 조안나가 현실이며 나상실은 환상이라고 강변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건 이 두 인물의 공존이 웃음도 만들고 눈물도 만들었다는 점이다.

99%웃음의 주역, 조안나인 나상실
‘환상의 커플’이 그 특유의 톡톡 튀는 웃음을 시종일관 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나상실이라는 독특한 캐릭터에 있다. 어마어마한 부자에 싸가지녀였던 조안나가 기억상실과 함께 나상실이 되는 그 지점은 그 자체로 웃음의 진원지가 된다. 과거의 우아했던 영광은 사라지고 몸빼 바지에, 자장면, 막걸리를 먹으며, 소파에서 자야하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있는 조안나적인 도도함의 습성은 시청자들을 웃게 만들면서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었다.

자칫 동정의 대상이 될 수도 있었던 캐릭터가 도도함을 유지하면서 여전히 “꼬라지하고는”하고 툭툭 내뱉는 대사에 어찌 웃음이 터지지 않을 수 있을까. 그녀 자신의 꼬라지 역시 그다지 우아하지 않은 상황에서 말이다. 드라마의 만화적인 과장된 연출과 패러디, 그리고 교차편집은 이런 나상실의 캐릭터를 극대화시켜주었다. 막걸리에 취해 춤을 추는 장면과 연회 장면의 교차편집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면서 점점 서민들의 생활에 익숙해져가는 나상실에게서 우리는 이 도도녀의 내면 속에 숨겨진 따뜻한 정을 발견하게 된다. 처음 나상실이라는 이름과 캐릭터는 장철수에 의해 지어진 환상이었으나 점차 그녀는 자신 속에 숨겨진 나상실을 찾아내게 된 것이다.

1%눈물의 주역, 나상실인 조안나
그런데 점점 그녀가 나상실이 되면서부터 1%의 눈물이 시작된다. 나상실이란 이름을 지어준 장철수에게 그녀가 마음을 열게 되자, 문제는 복잡해진다. 사실 나상실은 환상이고 조안나라는 현실의 인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점점 다가오기 때문이다. 조안나로 돌아온 그녀는 그렇지만 과거의 조안나가 아니다. 그녀 속에 또 한 명의 인물, 나상실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안나로 돌아오고 나서도 그녀는 여전히 막걸리를 찾고 소파에서 잠이 들며 나상실이란 캐릭터의 언저리를 배회한다.

우연히 버스정류장에서 장철수를 만나게 된 나상실이 자신의 진짜 이름을 밝히려 하자 장철수가 듣지 않으려 하는 것은 그가 그녀를 영원히 나상실로 기억하고 싶기 때문이다. 장철수는 내민 그녀의 손을 잡지 않고 떠나며 “그 손을 잡으면 다시는 놓지 못할 것 같다”고 말하고, 그런 장철수를 뒤에서 꼭 껴안은 그녀는 “내 이름은 조안나”라고 말한다. 그 장면에서 뚝 떨어지는 장철수와 조안나의 눈물에 시청자들 역시 똑같은 공감을 가졌을 것이다. 그 이름은 장철수와의 이별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뒤집어진 환상으로 공감을 만들어낸 ‘환상의 커플’
우리는 누구나 현실에서 벗어나 무언가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 환상을 꿈꾼다. 그것은 대체로 ‘신데렐라 콤플렉스’같은 형태의 환상이다.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없고, 지위도 상승되는 그런 변신 말이다. 하지만 이 ‘환상의 커플’은 그 환상의 방향을 거꾸로 뒤집어 놓는다. 완벽하고 뭐하나 부족한 게 없는 인물 조안나가, 온통 부족한 것 투성이의 꼬라지인 나상실로 변하는 것이다.

상향되는 변신이 어떤 로맨틱한 행복감을 예감케 하는 반면, 추락된 변신은 무언가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는 정반대의 유쾌한 캐릭터를 창출했다는 데서 큰 의미가 있다. 코믹으로 드라마를 전개했다는 것, 만화적인 설정들을 잘 활용했다는 점은 자칫 복잡해질 수 있는 이 나상실-조안나 캐릭터에 단순한 힘을 부여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런 하향적 변신에서도 유쾌한 캐릭터가 가능했던 것은 사실 조안나가 겉으로 보기엔 완벽해도 속으로는 부족함 투성이었다는 것이며, 그 부족함을 역시 부족해 보이기만 한 장철수와 그 주변사람들이 채워주었다는데 있다.

환상 속의 커플이 환상적인 커플이 되다
그 주변사람들 중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은 강자이다. 대부분의 드라마나 영화에서 바보들이 늘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었던 것처럼 그녀 역시 무거울 수 있는 나상실 주변을 맴돌며 그 무게를 가볍게 해주었다. 나상실로서 “사랑할 수도 없고” 조안나로서 “사랑 받을 수도 없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얼음’ 상태를 ‘땡’해주는 인물이 강자이다. 강자의 ‘땡’은 남해에 눈이 오는 기적(?)을 만들고, 떠나려는 조안나를 붙잡으며, 그녀 앞에 장철수를 데려다놓는다. 장철수는 이제 그녀를 조안나로도 나상실로도 받아들인다.

그녀가 조안나든 나상실이든 그 행복했고 행복한 만큼 아프기도 했던 것들은 모두 그녀에게 현실이다. 드라마를 보며 현실 속에서 환상을 꿈꾸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우리의 마음 속에서 일어난 행복감과 아픔이 모두 현실인 것처럼 말이다. ‘환상 속의 커플’이 ‘환상적인 커플’이 되는 이 어쩔 수 없는 유쾌함 앞에서 잠시 현실을 잊고 환상에 젖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닐까.

퓨전사극 속 사제간의 인생은 반복된다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는 퓨전사극, ‘황진이’와 ‘주몽’에서는 사제간의 반복되는 인생유전이 독특한 재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주인공에게 카리스마를 부여하고, 극의 대결구도를 만들어주며, 주인공이 성취해야할 일에 대한 목적의식을 부여하기도 한다.

황진이-백무 vs 부용-매향 : 모차르트와 살리에르의 관계
부용(왕빛나 분)은 황진이에 대해 칭찬을 하는 스승 매향(김보연 분)이 밉기만 하다. 그런 부용에게 매향은 말한다. “그렇게 명월이가 이기고 싶으냐? 내가 그 맘을 잘 안다. 천재는 늘 노력하는 준재를 가슴아프게 만드는 법이지.”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있다. 그것은 ‘황진이는 천재며 부용은 준재’라는 것과 ‘그런 마음을 매향은 잘 안다’는 것. 매향 역시 저 백무에게 같은 감정을 가졌었다는 말이다.

백무-황진이와 매향-부용의 사제관계는 천재와 준재라는 개념으로 반복된다. 이것은 마치 저 모차르트와 살리에르의 관계를 보는 것만 같다. 매향은 스승이 백무를 총애했다고 생각하면서 살리에르가 모차르트에게 가졌던 질투심과 증오심을 키우며 그것은 바로 부용에게도 이어진다. 재미있는 건 황진이가 백무에게 복수하려 매향의 수제자로 들어오면서다.

황진이를 통해 매향은 자신의 질투심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스승은 편애를 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어울리는 춤을 전수해주었던 것을 알게된 것이다. 그것을 알게 되자 매향은 부용의 질투심에 동병상련의 측은지심을 가지면서도 또한 그것이 부질없다는 걸 알게된다. 백무가 황진이를 매향에게 선뜻 보낸 것은 황진이에게 춤을 새로 추게 하려던 뜻도 있지만, 매향에게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한 뜻도 있었다는 말이다.

황진이-김정한 vs 백무-익환 : 사랑이 허락되지 않는 운명
황진이가 자신에게 가진 증오심을 이용해 춤을 추게 한다는 뜻이 있다 해도 어떻게 자신의 적이라 볼 수 있는 매향에게 백무는 선뜻 애제자를 보낼 수 있었을까. 그것은 황진이가 백무 자신의 분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백무는 시종일관 자신과 동일한 상황(기녀라는 상황)에서 기예의 길을 가는 황진이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황진이와 백무의 인생유전은 또한 황진이-김정한 그리고 백무-익환의 관계 속에서도 반복된다.

장악원의 부제조 영감 익환(현석 분)이 황진이를 시켜, 떠나려는 예판 김정한(김재원 분)을 잡으라고 한 사실을 알게된 백무(김영애 분)는 익환을 나무란다. 그러다 또다시 마음의 병을 앓을까 걱정되는 마음 때문이다. 그러자 익환이 백무에게 말한다. “명월이는 자네를 여러모로 닮았어. 내가 자네보고 기예의 길을 버리고 오라면 자네가 왔겠나?” 이 말에도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황진이 역시 백무처럼 기예의 길을 버리지 못할 것’이라는 점과 ‘익환 역시 정한처럼 백무를 사모했으나 그녀가 거절했다는 것’이다.

주몽과 해모수 vs 금와 : 동료와 경쟁자의 관계
드라마 ‘주몽’에서도 이러한 사제간의 인생유전이 드러나 보인다. 주몽의 스승은 다름 아닌 아버지 해모수. 해모수가 초기에 부여의 왕자, 금와와 다물군을 함께 이끌다, 후에 부득불의 함정으로 위기에 처하고 감금되는 상황은, 최근 주몽의 행적과 유사하다. 아버지의 유지를 받아들여 다물군을 이끈다는 점과, 아버지가 어머니와 떨어져 지낸 것처럼 자신도 예소야와 떨어져 지내는 점, 또한 가까웠던 금와와 적이 되어버리는 상황 등은 정확히 해모수와 주몽 그리고 금와 사이에서 벌어지는 반복이다.

이러한 반복이 되는 이유는 바로 과거부터 현재까지 계속 살아있는 금와의 존재 때문이다. 금와는 복합적인 성격의 캐릭터다. 명분상으로는 해모수와 함께 다물군을 이끌고 한나라를 치고 싶지만 부여가 처한 상황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겉으로 해모수 장군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 여미을이 말한 대로 오히려 그것을 바라는 경쟁자로서의 마음도 갖고 있다. 해모수가 새로운 나라를 새우는 것은 부여에게 위험이 되기 때문이다. 그 역시 해모수에 대해 저 살리에르와 같은 질투심을 속으로 갖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고스란히 주몽에게도 연결된다. 사실 금와는 주몽을 보호하고 키웠다기보다는 그 잠재성을 부여라는 감옥 안에 가두고 있었던 셈이다. 주몽이 해모수를 따라 대업을 이루려고 나서자 상황이 반복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전설적인 존재의 카리스마를 이어받다
이러한 퓨전 사극에서 사제간의 반복되는 인생유전이 보이는 것은 드라마 상의 주인공에게 강력한 카리스마를 부여하기 위한 장치이다. 철부지였던 ‘주몽’에게 카리스마를 부여하는 건 그의 아버지가 전설적인 존재인 해모수였다는 점이다. 그의 예사롭지 않은 탄생은 ‘지금은 저렇지만 앞으로는 대단한 일을 할 것’이란 기대감을 갖게 만든다. 또한 ‘황진이’라는 인물의 카리스마는 전설적인 무보, 학춤을 물려받은 백무가 그녀를 유일한 수제자로 지목하는데서 비롯된다. 황진이는 여기서 더 나아가 백무의 라이벌이었던 매향의 군무까지 이어받으면서 독무와 군무 양쪽의 재능을 인정받는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주인공이 이어받는 건 재능만이 아니다. 그들의 경쟁자까지 똑같은 인생유전을 통해 주인공 앞에 나타난다. 1회전보다 2회전이 더 치열할 수밖에 없는 경쟁의 생리 상, 2회전을 치르는 주인공들의 대결구도는 강화될 수밖에 없다. 그 치열한 대결구도 속에서 그들은 또한 대업 혹은 운명을 이어받는다. 그렇기에 반복되면서도 그 반복 속에서 스승을 뛰어넘어 큰 일을 이루어내는 주인공의 길은 더 드라마틱하게 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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