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해도 주로 남자들이 울었다. ‘왕의 남자’의 이준기, 감우성이 그랬고, ‘라디오 스타’의 박중훈이 그랬다. ‘도마뱀’의 조승우’, ‘가을로’의 유지태, ‘그 해 여름’의 이병헌이 그랬으며 ‘비열한 거리’의 조인성,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강동원, ‘해바라기’의 김래원이 그랬다. 이제 멜로 드라마 속 눈물의 주체는 여성에서 남성으로 자리 잡아가는 중이다.

이러한 징후는 이미 예고되었던 일이다. 과거 여성 잔혹사적 관점의 내러티브를 갖고 주로 여성 관객의 눈물을 쏙 빼게 만들었던 신파는 이제 달라진 환경에서는 더 이상 카타르시스를 주지 못한다. 신파에 반발해 나왔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남성 중심적 권위주의로 늘 회귀했던 로맨틱 코미디(예를 들면 결혼이야기나 미스터 맘마 같은) 역시 마찬가지다. 이것은 멜로드라마의 주 소비계층인 여성 관객들의 사회적 위치와 의식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로써 90년대 후반부터 등장한 ‘남성 주인공의 눈물(접속, 약속, 편지, 8월의 크리스마스 등등)’은 여전히 그 힘을 발휘하고 있다. 심지어 여성에서 남성으로 순치된 이 내러티브는 이제 과거적인 신파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주는데, 그 신호탄은 ‘파이란’과 ‘너는 내 운명’일 것이다.

올해 누가 누가 더 잘 울었을까
먼저 ‘왕의 남자’. 제목에서부터 느껴지지만 이 영화는 남자들에 의해 그 눈물의 카타르시스가 만들어진다. 여성으로 등장하는 강성연(장녹수 역)이 있지만 영화 속에서 그녀는 그다지 비중 있게 다루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준기, 감우성, 정진영의 남성 삼각관계에 더 집중되어 있다. 이런 경향은 이준익 감독의 다음 작품이었던 ‘라디오 스타’에도 이어진다. 물론 여기서는 남성들의 우정을 그리고 있지만 여전히 두 남성의 드라마가 눈물의 진원지이다.

‘도마뱀’의 조승우는 20년 동안 제 자리에서 그녀(강혜정, 아리역)를 기다린다. 그녀를 붙잡으려는 순간, 그녀는 영원히 그를 떠난다. ‘가을로’의 유지태는 한 순간의 사고로 사랑하는 연인(김지수, 민주역)을 잃고 10년 째 그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 그는 10년 후 뜻하지 않은 여행 속에서 이미 떠나버린 연인의 사랑을 느끼며 눈물을 흘리게 된다. ‘그 해 여름’의 이병헌은 시대가 허락하지 않은 사랑을 가슴으로만 묻고 살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기적처럼 자작나무가지를 타고 날아온 그녀의 사랑에 그는 오열한다. 재미있는 건 이들 남성들이 모두 제 자리에서 떠난 여인을 기다리거나 그리워한다는 사실. 과거의 능동적 남성 - 수동적 여성의 틀은 이제 거꾸로 뒤집어졌다.

한편 남자들은 그 고단한 삶 속에서 눈물을 터뜨렸다. ‘비열한 거리’의 조인성은 영화 속에서 조폭으로 그려지지만 사실 평범한 샐러리맨의 모습을 그대로 닮았다. 그는 결국 샐러리맨이 소모되는 그 시스템 속에서 눈물의 최후를 맞이한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강동원은 가난 속에서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사는 게 지옥 같았던 그가 한 여인을 만나 살고 싶어졌을 때 그는 사회의 단죄를 받는다. ‘해바라기’의 김래원은 가족 하나 없이 자란 인물로 살인을 저지르고 감옥에 들어간다. 감옥에서 나와 드디어 자신도 가족을 갖게 되었을 때, 그것은 폭력으로 파괴되고 그는 울부짖는다.

여자들은 웃고, 남자들은 울다
멜로 드라마 속에서 남자들은 저들끼리 사랑하고 우정을 나누며, 떠나간 연인을 기다리고 그리워하거나, 고단한 현실 속에서 무너져 내렸다. 그들은 울었다. 반면 로맨틱 코미디 속에서 여자들은 달콤 살벌하게 남자를 괴롭히거나(달콤 살벌한 연인), 작업의 정석을 보여주거나(작업의 정석, 2005년 12월작), 로빈을 꼬신다(미스터 로빈 꼬시기). 이제 로맨틱 코미디는 여자들의 웃음을, 멜로 드라마는 남자들의 눈물을 먹고 자라나고 있다.

스크린 속 이야기지만 이것은 또한 현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IMF 이후부터 위축되기 시작한 우리네 남성들의 어깨와, 동시에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진 것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대변한다. 재미있는 건 남자들이 울거나 여자들이 웃거나 그 주 관객층이 여성이라는 점이다. 여성들은 이제 구질구질하게 눈물 흘리는 여성들보다는 상큼 발랄한 여성을 원하며, 만일 눈물을 흘리는 여성들이라 하더라도 그 옆에 더 펑펑 울어주는 남성을 원하는 것 같다.

복수시리즈 3부작 이후, 박찬욱 감독이 들고 나온 영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박찬욱표 로맨틱 코미디’라는 상표가 붙은 이 영화에 대해 “괜찮다”, “괜찮지 않다”는 말들이 분분하다. 그 이유인즉슨 정지훈, 임수정 같은 이름만 들어도 기분좋은 상큼발랄한 연기자들이 캐스팅된 데다, 누가 봐도 이목을 잡아끄는 포스터와 제목, 게다가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의 적시 등으로 톡톡 튀는 영화의 이미지를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박찬욱이라는 이름이 떡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지만 괜찮아
이 영화는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듯 ‘∼지만 괜찮아’라는 의미에 걸맞게 두 가지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들을 뒤집어놓는다. 영군(임수정 분)은 스스로를 싸이보그라고 생각하지만 따뜻한 관심과 애정을 희구하는 인간이며, 그녀와 일순(정지훈 분)이 생활하는 신세계 정신병원은 우리가 관습적으로 생각하는 폐쇄적인 공간이 아니라 보다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 같은 환타지의 세계다. 그 곳에서 생활하는 싸이코들 역시 히치코크의 영화 ‘싸이코’에 나오는 그런 인물들이 아니고, 어린이의 세계 속에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영화의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은 복잡하고 낯선 영상들 역시 어떤 중압감으로 관객들을 억누르는 게 사실이지만 거기에 익숙해지다 보면 어느새 좀더 자유로운 상상을 가능하게 해준다.








박찬욱표 복수는 어떻게 변용되었나
그렇다면 박찬욱표라면 빠질 수 없는 복수의 내러티브는 어떨까. 아무리 로맨틱 코미디라고 우겨도 그 모티브는 바뀌지 않는 법. 타란티노식의 사고방식에서 자주 보이는 인체와 무기의 만남은 영군의 손가락이 총구로 바뀌는 것으로 나타나며, 그녀가 흰옷 입은 사람(의사, 간호사)에 대해 갖는 복수심 역시 저 복수3부작과 궤를 같이 한다. 막연히 흰옷 입은 사람이라 나오지만 사실 그들은 소중한 사람(할머니)을 데려간 사람으로 어떤 공권력처럼 읽히며, 영군이 스스로를 싸이보그라 생각하며 단식을 하는 장면 역시 박찬욱 특유의 사회에 대한 풍자처럼 읽힌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이러한 복수를 생각하는 인물의 사고수준이 동화적 세계에 놓여있다는 것. 프로이트식의 해석을 굳이 늘어놓지 않더라도 영군은 어린이가 갖는 적개심과 분노, 복수심을 가진 존재이다. 그러니 복수를 해도 영화는 경쾌해진다. 도망치는 의사들을 쫓아 다니며 무차별 난사하는 장면들은 마치 즐거운 오락게임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이 위악적으로까지 보이는 영상들 속으로 영군과 일순의 박찬욱식 사랑이야기(사이보그의 사랑?)가 들어가면서 영화는 깜찍해진다.

박찬욱 감독은 정지훈과 임수정이 갖고 있는 본연의 이미지를 영화적으로 잘 활용했다. 저 드라마 ‘풀하우스’에 나왔던 정지훈의 이미지와 임수정 본연의 소녀 같은 이미지는 감독에 의해 창조적으로 파괴되었다. 이로써 무언가 차가우면서도 귀엽고, 섬뜩하면서도 앙징맞은 박찬욱 냄새가 물씬 나는 영군과 일순의 캐릭터로 만들어졌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 영화는 전적으로 두 연기자의 이미지가 없었다면 박찬욱 단독으로는 만들어내지 못했을 캐릭터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즉 박찬욱이지만 그의 로맨틱 코미디가 괜찮은 것은 이들 연기자들의 몫이 크다는 것이다.

하지만 순수한 사람들에게만 보인다는 거
이러한 이질적인 이미지들의 결합으로 탄생한 이 영화는 그래서 또한 위험성도 존재한다. 어차피 결합을 통한 탄생이란 성공했을 때는 독특하고 새로운 작품이 되지만, 성공하지 못했을 경우엔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되기 때문이다. 과거 박찬욱의 이미지를 갖고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아마도 어떤 아쉬움 같은 걸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또 전혀 그런 이미지와 상관없이 ‘열린 마음으로’ 본 사람이라면 그 안에서 무언가 새로운 미덕을 발견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박찬욱 감독은 인터뷰를 했다. 그 요지는 “논리를 들이대면 사랑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편안하게 아이들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영군과 일순이 하는 행동들과 말을 따라가다 보면 거기 사랑이 보일 거라는 말이다. 이로써 이 영화는 순수한 사람들에게만 보이는 영화가 되었다. 그게 안 보인다고 말하면 순수하지 않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 되니 서둘러 말해야겠다. “사랑이 보여요!”라고. 그런데 그런 얘기하지 않아도 충분히 괜찮은 이 영화에 왜 그런 사족을 붙여놓았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기자들의 궁금증이 너무나 증폭되어 생긴 결과겠지만, 영화라는 게 꼭 감독의 의도대로 볼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싸이보그지만, 박찬욱이지만 괜찮은지 아닌지는 관객들 각자의 몫이다.

일주일 내내 한밤의 TV는 과거로 흐른다. 월화는 고구려 건국 직전인 ‘주몽’의 시대로, 수목은 ‘황진이’의 조선시대로, 다시 주말이면 ‘연개소문’, ‘대조영’의 삼국시대로 돌아간다. 사극천하의 뒤안길에 서 있기 때문일까. 같은 시간대의 현대물들은 병원으로 달려가고 있다. 월화극 ‘눈꽃’의 이강애(김희애 분)는 췌장암 판정을 받았다. 수목극 ‘90일 사랑할 시간’의 현지석(강지환 분) 역시 췌장암 말기로 90일 시한부인생 판정을 받았고, 주말극 ‘기적’의 장영철(장용 분)은 폐암 판정을 받았다.

현대물, 나 상태 안좋아
작년부터 있어온 트렌디 드라마의 퇴조는 좀체 반등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것은 ‘트렌디 드라마’라는 지칭이 마치 구태의연함과 상투성의 상징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은 온당한 평가도 받지 못한 새로운 현대물들에게는 억울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사극들의 대약진은 그 명예회복을 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니 그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은 몇몇 현대물들, 예를 들면 ‘연애시대’나 ‘여우야 뭐하니’그리고 ‘환상의 커플’ 같은 드라마는 과거에 비해 엄청난 성과를 거둔 드라마들이다.

그렇다면 지금 사극의 뒤안길에서 투병중인 현대물들은 좀더 강력한 드라마성을 얻기 위해 과거로 퇴행하는 것일까. 전통적인 소재인 ‘불치병’이 갖는 드라마코드는 실제로 구태의연하면서도 강력하다. 그것이 갖고 있는 한정된 시간이란 설정이 드라마의 갈등이나 감정을 더 첨예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이 코드가 갖는 최루성 눈물의 이미지다. 과거와는 달리 최근에는 눈물보다는 상큼 발랄 모드가 더 인기를 얻기 때문이다(이것은 높은 연령대의 시청자들도 마찬가지다).

불치병이라도 괜찮아
그렇다고 이들 드라마들은 모두 ‘불치병’드라마로 싸잡아 말하는 건 온당하지 않은 것 같다. 김수현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하는 월화극의 ‘눈꽃’은 단순히 자극적인 최루성 드라마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진지하다. 심지어 그 진지함이 지루함을 유발할 정도인데, 이 정도면 이 작품은 단지 불치병 소재의 드라마라기보다는 인간 삶에 대한 관조를 시한부 인생이라는 코드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김수현 작가 본인의 자전소설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인지 그 섬세한 감정선을 잘 살려낸 ‘눈꽃’은 김희애, 이재룡, 고아라의 호연 또한 기대감을 키우기에 충분하다. 이것은 4부작이지만 노희경이란 굵직한 작가에 의해 쓰여지고 있는 주말극 ‘기적’도 마찬가지다. 이 드라마 역시 소재보다는 그 접근방식이 중요한 작품이다.

무엇보다 억울함을 많이 느낄 드라마는 ‘90일 사랑할 시간’이 아닐까. 이 드라마는 불치병의 코드에 근친상간, 게다가 불륜의 코드까지 뒤범벅되어 직접 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우리나라 드라마 속에서 문제가 된 코드의 종합선물세트로 생각될 것이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이 드라마가 그런 코드들을 모두 담고 있지만 그 결과물은 전혀 새로운 것이란 사실이다. 이 드라마는 불륜이나, 불치병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사람의 ‘사랑과 욕망’에 대한 이야기가 맞다.

사극의 연속되는 펀치로 응급실에 실려간 현대물들, 그 작품들은 그러나 그곳에 있기에는 아까운 것들이다. 막연한 선입견으로 피해왔던 시청자라면 한번쯤 문병을 가보는 건 어떨까.

유난히 눈물이 많은 두 카리스마

사극전성시대. 금요일을 빼곤 일주일 내내 사극이 TV 천하의 주인이 되었다. 그 중 ‘사극은 역시 KBS’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주목받고 있는 사극이 ‘황진이’와 ‘대조영’. 이 두 사극은 특히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어 흥미를 끈다. 주인공들은 무엇 때문인지 독기 어린 카리스마를 보이다가도 눈물을 펑펑 흘리는데 그것이 시청자들의 맘을 짠하게 만든다. 여자의 눈물과 남자의 눈물, 그 진가를 보여준 황진이와 대조영,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카리스마의 눈물은 더 짠하다
백무로 인해 정인을 잃은 황진이는 신분의 높은 벽과 벗어날 수 없는 운명 속에서 시대와 맞선다. 그녀의 카리스마는 우리가 도저히 넘을 수 없다 여겼던 백무를 능가할 정도로 강력하다. 그런데 앙다문 입과 빛이 나갈 정도로 노려보는 눈빛, 입만 열면 가시가 뻗어나가는 독설을 보이던 그녀. 그러나 예판 김정한 앞에서 잠시 또르르 떨어뜨리는 눈물 한 방울은 시청자들의 애간장을 녹여버린다. 그토록 몰아세우던 백무의 죽음 앞에 넋 나간 황진이의 눈물은 말할 것도 없다.

대조영 역시 마찬가지. 그는 유난히도 눈물이 많은 영웅이다. 같은 고구려 사극이지만 저 ‘주몽’과 ‘연개소문’에서 그렇게 많은 눈물을 보지는 못했다 자식처럼 키웠으나 종으로 대하던 연개소문 앞에서 울었고, 생사의 기로에서 만난 어머니 앞에서 울었으며, 뒤늦게 만나게된 아버지 앞에서 울었고, 죽기 직전 아버지라 불러보라던 연개소문 앞에서 또 울었다. 그러나 대조영은 그렇게 유약한 인물이 아니다. 심지어 시청자들로부터 슈퍼맨이라 비판받을 정도로 모든 일을 해결하는 카리스마의 절정. 그의 눈물은 보통 인물의 눈물보다 더 짠할 수밖에 없다.

눈물의 원천은 태생적 한계
황진이의 눈물은 기녀라는 운명적 삶에서 비롯된다. 예인으로서 당대의 여느 여성들보다 몇 배의 자유로움을 구가하지만, 또한 어느 누구의 마음도 받을 수 없는 기녀라는 삶이 주는 기막힘은 황진이라는 한 인물이 왜 이다지도 매력이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녀는 태생적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인물이면서, 그 위에서 모든 걸 해나가는 삶을 보여준다. 속으로는 멍투성이, 상처투성이지만 겉으로는 세상과 맞서는 그녀에게 어찌 공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저 세상이라는 전쟁터에서 돌아와 가끔씩 피곤한 듯 눈물을 흘리는 그녀 앞에서는 아무리 굳은 갑옷을 마음에 걸친 자도 무장해제되게 마련이다.

대조영 역시 그 눈물의 원천은 태생의 문제이다. 제왕지운이라는 역모의 주홍글씨를 갖고 태어난 그는 개동이라 불리며 연개소문의 하인으로 자라난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는 천하를 태우고도 남을 야망이 숨겨져 있으니, 이렇게 추락한 인물이 하나하나 제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은 눈물겨운 화해의 과정이 된다. 게다가 대조영의 눈물 속에는 가장 원초적인 부모자식간의 정이 숨겨져 있다. 특히 대중상과 카리스마의 눈빛을 나누며 스테레오로 울어버리는 장면에서는 남자의 눈물, 그 힘을 느낄 수밖에 없지 않을까.

재미있는 건, 이 사극들 속에서 이것은 비단 황진이와 대조영만의 눈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드라마 ‘황진이’는, 황진이를 비롯하여 백무, 매향, 기방사람들 모두가 여자의 눈물을 보여주고, 드라마 ‘대조영’ 역시 대조영을 비롯해 연개소문, 양만춘, 대중상 같은 걸출한 장수들이 남자의 눈물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여자의 눈물이든, 남자의 눈물이든 카리스마 넘치는 그들의 눈물 바다는 지금 사극폐인들의 눈을 즐겁게 적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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