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를 탈피한 개그로 돌아온 웃음충전소

KBS에서 본격 코미디를 자처하며 새로 시작한 ‘웃음충전소’는 그간 개그의 대세로 자리잡은 공개무대개그의 시공간적 한계를 넘어서며 신선한 재미를 주. 무대개그의 장점은 즉석에서 관객들의 반응을 볼 수 있다는 것. 하지만 단점은 공간적 제약이 있어 연극적인 상황설정에 의한 개그가 주류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또한 정해진 시간 내에 개그를 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시간 흐름과 변화를 통한 개그에는 어려움이 있다. ‘웃음충전소’는 바로 그 어려움을 좀더 정교한 세트와 야외 촬영의 교차편집으로 넘어서면서 카메라가 자유로워진 지점에서 새로운 웃음을 유발한다.

화제를 모으고 있는 ‘타짱’은 긴박감 넘치는 영화 ‘타짜’의 분위기를 개그 속으로 끌어들인다. 화면은 긴박한 배경음악과 함께 마치 영화의 예고편 같은 카드판의 손동작들이 반복되다가 해설자로 나오는 김준호의 얼굴에서 멈춰 서며, 개그가 시작된다. 이러한 긴박감 넘치는 장면 후에 나오는 개그대전이 이 코너가 웃음을 주는 핵심요소이다. 대전은 자학적이라 할 만큼 자해적인 장면들을 보여주고 그걸 보고 ‘웃지 말라’는 대전의 법칙을 통해 웃음을 배가시킨다.

‘미스터 박’은 여러모로 ‘미스터 빈’을 떠올리게 하는 개그다. 무대를 벗어나 카메라는 미스터 박의 일상을 쫓아가며 벌어지는 해프닝을 담는다. 소시민적이고 약해 보이는 미스터 박이 좀더 강해 보이고 멋져 보이는 남자들과 경쟁하는 이 구도는, 미스터 빈이 같은 개그를 통해 사회의 위선들을 꼬집었던 바로 그것과 같다.

‘막무가내 중창단’은 세트와 야외 촬영을 절묘하게 교차시켜 웃음을 유발한다. 세트에서 노래를 하다가 그 중간 어느 소절에서 멈춰 서며 그 소절을 실제 행동으로 옮긴다는 설정이다. 일종의 행동개그라 볼 수 있는데 재미있는 건 그 행동이 무대라는 제한적 공간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점이다. ‘한낮의 찌는 더위는’을 행동으로 보이기 위해 진짜 찜질방에 들어가고, ‘벽에 걸린’을 연기하기 위해 실제로 담벼락에 몸을 건다. 심지어는 ‘늪에 빠진 거야’를 보여주기 위해 늪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 세트로 돌아온 그들의 망가진 몸은 또한 웃음을 유발한다.

‘지친다 지쳐’는 과거 유머일번지식의 세트 개그이다. 시골 풍경을 가끔 도입하지만 그것은 분위기를 나타내기 위한 도구이며 실제로는 세트에서 대부분의 개그가 이어진다. 약간은 모자란 듯 하면서도 정이 가는 촌사람들의 좌충우돌이 핵심이다.

여러모로 무대개그에서 가장 많이 탈피한 코너는 ‘정의의 따귀맨’이 될 것이다. 이 코너는 영상개그라 할만하다. 영화 ‘바람의 파이터’와 슈퍼맨과 같은 히어로, 액션이 엮어져 한 편의 개그가 완성된다. 화면연출의 즐거움을 또한 갖고 있는 이 개그는 다큐적인 요소까지 끌어들인다. 시장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를 괴롭히는 장면에서는 시사다큐프로그램의 모자이크처리와 흔들리는 카메라, 장중한 나레이션이 동원된다. 따귀맨이 나타나 악당들을 쫓아가는 장면에서는 들고 뛰어가며 찍는 카메라가 선보인다. 그리고 절정은 따귀맨이 악당들을 따귀로 물리치며 마치 매트릭스처럼 정지된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장중한 나레이션 장면이다. 이 개그는 전체적으로 진지함을 고수하는 영상에 단지 우스꽝스런 따귀맨이라는 캐릭터가 만나면서 놀라운 웃음의 폭발력을 보여준다.

‘대안제국’은 마치 ‘개그콘서트’에서의 ‘봉숭아학당’과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차이라면 대신 세트라는 점이며, 과거라면 개그맨으로서 가장 중심으로 놓여야할 왕의 자리에 이계인이라는 연기자가 앉아 있다는 것이다. 이 이계인이라는 인물의 개그 프로그램 등장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다. 그것은 개그가 무대 위에서의 순간적이고 단발적인 웃음보다 어떤 개그맨의 캐릭터 형성을 통한 웃음이 가능하다는 점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주몽’의 모팔모에서 얻어진 이계인의 캐릭터는 이 개그에서 왕이라는 자리에 앉혀지면서 자연스럽게 웃음을 유발한다. 또한 저 연예오락 프로그램에서 그 중심을 잡는 인물에 개그맨이 아닌 아나운서가 자리하는 것처럼, 탤런트 이계인이 주는 편안함이 개그에 대한 어떤 압박감을 줄여주는 효과가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웃음충전소’는 대사보다는 몸에 의지한 개그가 더 많다. 이것은 자학적인 개그라는 비판의 소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상의 힘을 얻어서 더 강력해진다. ‘웃음충전소’는 좀더 자유로운 촬영을 통해 무대개그가 갖는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자유로움은 개그의 영역을 확장시킬 수 있는 좋은 무기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웃음충전소’의 미덕은 이제 저 칼바람 넘치는 무대개그에서 어느 정도 발굴된 캐릭터들을 온전히 지속시킬 수 있는 프로그램이 생겼다는 점이다. 이러한 정통 코미디 프로그램으로의 회귀는 현재적인 상황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라면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김지수에서 배종옥과 박진희, 그리고 한효주까지

이윤기 감독의 카메라는 늘 여자와 그녀의 일상을 따라간다. 그것이 여자의 섬세한 감정을 포착해 켜켜이 쌓아놓는 것으로 영화적인 성취를 이루어내는 감독의 능력 때문인지, 아니면 감독이 다룬 영화의 이야기가 여자 주인공들의 감정변화를 따라갔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이윤기 감독은 지금까지 찍은 영화 세 편에서 모두 여자 주인공들의 섬세한 감정선을 잘 잡아냈고, 그것이 성공적이었다는 점이다. 그 여자 주인공들의 계보는 ‘여자 정혜’의 김지수에서, ‘러브 토크’의 배종옥과 박진희로 이어져 이번 ‘아주 특별한 손님’에서 한효주로 이어진다.

그의 카메라에 잡히면 여성 캐릭터들은 전에 보지 못했던 혹은 숨겨져 있던 독특한 페르소나를 보여준다. ‘여자 정혜’에서 그전까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김지수의 페르소나가 생겨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녀는 영화 속에서 ‘신비로운 식물’ 혹은 ‘깨질 듯 투명하고 아름다운 유리조각’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극중 여자 정혜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녀는 반짝거림과 동시에 외로움, 따뜻함을 숨겨놓은 차가움 같은 외면과 내면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긴장감 있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이윤기의 카메라와 연출력 때문이다. 그의 카메라는 늘 주인공 옆에서 서성댄다. ‘여자 정혜’는 영화 전체를 핸드 핼드 카메라로 찍어 고정된 화면을 볼 수가 없다. 이 서성대는 시선이 관객들로 하여금 정혜라는 여자의 외면뿐만 아니라 내면까지 들여다보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그 불안하지만 친근한 시선에 관객의 시선이 맞춰지는 순간이 생기는 것이다.

여기에 일상적인 소소함을 지루할 정도로 잡아내는 이윤기의 연출력은 영화 속 캐릭터인 여자 정혜의 내면은 물론이고 심지어 연기자 김지수 속에 존재하는 여자 정혜를 끄집어내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윤기라는 감독이 연출한 ‘여자 정혜’라는 접신의 영화를 통해 김지수라는 연기자를 새롭게 만나게 되는 것이다.

해외영화제 수상과 국내 언론들의 호평 등, ‘여자 정혜’가 얻은 뜻밖의 성과는 이윤기 감독에게 어떤 변화를 요구했을까. 한 인물 주변에서 배회하던 카메라는 ‘러브 토크’로 와서는 굳건히 땅에 정착한다. 이것은 핸드 핼드 카메라가 갖는 단편영화 혹은 작가주의 영화적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대신 카메라는 장르영화처럼 더 세련되게 움직이며 인물들을 포착한다(특히 자동차의 움직임과 그 속의 인물을 포착하는 카메라는 발견이라고 할 정도로 세련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전작의 흐름을 그대로 타고 있는데 그것은 그 시선 속에 역시 배종옥과 박진희라는 여성 연기자들의 감정선을 태우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영화는 이들과 이들 주변의 남자친구 혹은 연인들에 대한 ‘러브 토크’로 이루어져 있지만 감독은 이 두 여자의 심리와 감정의 부딪힘 같은 것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여자 정혜’가 개인의 아픔과 상처를 좀 폐쇄적인 관점에서 다루었다면, ‘러브 토크’는 대화하는 두 여자를 통해 그 상처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다시 이윤기 감독은 ‘아주 특별한 손님’에서 다시 예전의 서성이는 카메라로 돌아간다. 그 카메라 속으로 들어온 인물은 한효주다. 우리에게는 윤석호 PD의 ‘봄의 왈츠’라는 드라마 속에서의 박은영이란 인물로 익숙한 한효주는 이 영화를 통해 자신 속에 숨겨진 아픈 영혼과 접신한다. 한효주는 어느 날 우연히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하룻밤동안 죽어 가는 한 남자의 딸 역할을 하게 되는 한 여자, 보경을 연기한다. ‘여자 정혜’가 폐쇄적인 상황에 놓인 한 여자의 아픔을 그려냈다면 ‘아주 특별한 손님’의 보경은 그 아픔과 화해하는 과정을 그려낸다. 따라서 보경을 연기한 한효주의 페르소나는 좀더 적극적이고 솔직하다.

아쉽게도 이윤기 감독의 영화는 대중적으로 그다지 성공하지는 못했고 저예산 영화의 성공작 정도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영화 속에 등장했던 여자 주인공들이 모두 성공적인 행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자 정혜’로 데뷔한 김지수는 ‘가을로’에서 그 돋보이는 연기를 보여주었고, ‘러브 토크’에서의 박진희는 드라마 ‘돌아와요 순애씨’를 통해 섹시 발랄한 캐릭터로의 변신에 성공했다. 이번 영화의 여주인공을 맡은 한효주는 또한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날지 귀추가 주목된다.

인물 주변의 일상들을 섬세하게 잡아내는 것으로 그 인물의 감정을 통해 영화를 끌어가는 이윤기 감독의 영화는 전체적으로 화면의 움직임이 적고, 파격적인 이야기가 별로 없어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기존 장르 영화적 관성에 싫증을 느끼는 관객이라면 이 영화는 독특한 여행을 제공해줄 지도 모른다. 새벽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차안에서 문득 자신의 아픔을 토로하며 눈물을 흘리는 이 여자의 마음에 알 수 없는 슬픔의 공감을 가질 지도 모른다. 거기서 우리는 한효주가 가진 감성의 속살을 살짝 엿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시대장소는 달라도 우리를 매료시키는 멘토들

요즘은 선생님, 스승이란 말 이외에 ‘멘토’라는 단어가 많이 쓰인다. 그것은 선생님이나 스승이란 말이 ‘먼저 나신 분’ 혹은 ‘가르쳐 인도하는 사람’의 의미를 갖는 반면, ‘멘토’는 친구이자 선생님, 상담자, 때로는 부모 같은 포괄적인 위치를 점하면서, 무언가를 가르치기보다는 ‘지혜와 신뢰로 인생을 이끌어주는 사람’이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단지 연장자란 의미도 아니고 학교에서 쓰이는 선생님의 의미 이상의 것이 들어 있기에 ‘멘토’는 보다 친근하며, 보다 삶에 밀착된 지혜를 가르쳐준다. 이러한 스승보다 더 가까워진 멘토는 영화나 TV 속 드라마에서도 마찬가지로 등장하고 있다.

이 시대의 멘토, 백윤식
무언가를 배우고 싶지만 그것은 금지된 어떤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에게는 너무나 절실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찾아가는 멘토가 있다. 바로 백윤식이다. ‘파랑새는 있다’와 ‘서울의 달’에서 새롭게 주목받은 이 배우는 낮고 진중한 목소리로 밉지 않은 사기꾼 역할을 해내며 제 2의 전성기를 맞았다. ‘지구를 지켜라’에서 놀라운 연기력을 보여준 백윤식은 ‘범죄의 재구성’으로 과거 멘토 자리를 다시 꿰어찬다. 그는 사기꾼 역할을 맡았지만 사기꾼들로 득시글대는 영화 속에서 단연 한수 위의 모습을 보여주며 묘한 멘토의 냄새를 풍겼다(호칭마저도 김 선생이다).

그 후 그는 ‘싸움의 기술’에서 병태에게 싸움을 가르쳐주는 은둔 고수로 등장한다. 제목에서 보면 그가 단지 싸움의 기술만을 가르치는 것 같지만, 사실 이 은둔 고수는 병태에게 인생을 가르친다. 사실 병태가 더욱 이 고수에게 빠져드는 건 사실 부재하기까지 한 아버지의 존재를 거기서 찾아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백윤식은 또 한번 멘토 기질을 제대로 발휘한 셈이다. 그 후 그는 이제 자연스럽게 이 시대 멘토 자리를 차지한다. 영화가 있고, 멘토가 등장한다면 바로 백윤식이라는 공식이 만들어진다. ‘천하장사 마돈나’의 백윤식은 씨름감독으로 등장하지만 실상 씨름은 별로 가르치지 않는다. 대부분의 작전지시가 화장실에서 이루어질 정도로 이 엉뚱한 씨름감독은 마돈나가 되기 위해 천하장사대회에 나가려는 오동구의 든든한 멘토 역할을 해준다.

아무래도 그가 맡은 가장 빛나는 멘토 역할은 ‘타짜’의 평경장 역할일 것이다. 그는 우스꽝스럽고 장난끼 많은 도박꾼처럼 보이나 사실 그는 도박이란 중독적 세계 속에서 살아남는 법을 깨달은 현인에 가깝다. 우리네 삶의 축소판이 도박판이라는 지점에서 공감을 불러낸 이 영화 속에서 평경장은 바로 그 도박을 통해 삶을 이야기하는 멘토이다. 그가 고니에게 가르친 것은 단지 도박의 기술만이 아니다. 그는 살아가는 법과 살아남는 법을 가르친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것을 가르쳐준다는 점에서 백윤식은 확실히 우리 시대 젊은이들의 호감을 살만하다. 그 가르침이 단지 기술이 아닌 인생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황진이를 키워낸 멘토, 백무
드라마 ‘황진이’는 과거로 거슬로 올라가는 우회적 방법으로 이 시대의 멘토를 보여준다. 그 시대의 운명의 틀 속에서 금지된 것을 넘어서는 방법을 인물들이 하나씩 황진이에게 가르쳐줌으로써 현대여성들의 마음 속에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그 인물들은 황진이의 마음 속에 들어왔다가 하나씩 사랑과 상처를 남기고 감으로써 황진이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인간의 길’에 진한 깨달음을 남긴다.

그 첫 번째 멘토는 바로 죽은 은호이다. 친구처럼 연인처럼 지내왔지만 도무지 현실적으로는 이어질 수 없는 운명을 깨닫게 해준 은호는 황진이가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제공한 인물이다. 그리고 앞으로 이 은호의 자리를 차지할 새로운 인물들이 준비하고 있다. 김정한(김재원 분)이 지금은 그 자리에 앉아 있으나 이것은 또 어떤 인물로 바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황진이의 진짜 멘토는 바로 백무(김영애 분)이다.

백무는 황진이를 예인으로 키워내기 위해 심지어 자신의 경쟁자인 매향의 수제자로 보내는 것도 마다치 않는다. 때론 자신을 적으로 세우고 자신을 넘어보라며 황진이를 도발하는 백무의 모습은 어찌 보면 더 강한 자식을 키워내기 위해 벼랑 아래로 새끼를 밀어내는 사자의 그것과 닮았다. 그녀는 때론 악의 구렁텅이에 황진이를 몰아넣는 악마처럼도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마치 부모 같은 안타까운 마음과 자애로움이 숨겨져 있다.

헐리우드에서 찾아낸 워킹우먼들의 멘토
악마처럼 보이지만 또 한 편으로는 지혜 같은 걸 깨닫게 해주는 인물을 우리는 저 헐리우드 영화 속에서도 발견한다. 바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미란다(메릴 스트립분)가 그 멘토이다. 촌닭 같은 앤드리아에게 자신이 하는 이 패션 일이 우스꽝스럽고 의미 없는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주는 미란다의 대사가 인상적이다. “넌 니가 꽤나 유식한 줄 알겠지만, 실상은 니가 뭘 입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어.” 미란다는 앤드리아가 입고 있는 옷의 색이 수많은 브랜드와 상점을 거쳐 지금 그녀가 입고 있는 것임을 깨닫게 해준다. 단 한 번의 멘트로 그녀의 사고방식을 뒤집어놓는 것이다.

미란다는 앤드리아에게는 악마 같은 존재지만 그걸 통해 앤드리아는 일과 성취에 대한 값진 교훈을 얻는다. 미란다는 앤드리아의 양면성(욕망과 함께 지켜내고 싶은 순수)을 거침없이 공격한다. 자신의 성공을 지켜내기 위해 자신의 지기까지도 버리는 그녀에게서 앤드리아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게되지만 거기에 대해 미란다는 이렇게 말한다. “웃기지마. 누구나 다 이런 삶을 원해.” 이 말은 앤드리아뿐만 아니라 여기 이 땅의 워킹우먼들에게도 꽂히는 말이었을 것이다.

백윤식 같은 금지된 것의 멘토이든, 오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다시 현재를 말해주는 백무같은 멘토이든, 저 바다 건너온 미란다 같은 멘토이든, 그들은 모두 이 시대 우리의 가슴 속에 남아있는 멘토들이다. 그들이 우리의 마음을 잡아끄는 이유는 과거적 의미의 스승들보다 친근하고, 보다 솔직하며, 핵심을 찌르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불안함 속에서 질문을 해대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가르치지 않으면서도 알게 해주는 이 시대의 멘토들이다.

달라진 방송환경과 붕괴되는 아나운서라는 직종

그들은 연예인인가, 아나운서인가. 혹은 아나운서 출신의 연예인인가, 혹은 연예인인 아나운서인가. 최근 들어 끊이지 않는 아나운서의 정체성 논란은 마치 겉으로 보기엔 아나운서 자신들만의 문제처럼 보인다. 대부분 아나운서들의 연예활동(물론 그 영역을 어디까지 봐야할지 알 수 없지만)에 대해 그것이 적절하냐 아니냐에서 논란이 야기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신력이라는 도덕적인 잣대만을 아나운서들에게 들이대는 이러한 접근방식으로는 지금 상황의 해결책을 제시하진 못한다. 사실 이 문제의 핵심은 아나운서들의 문제라기보다는 달라진 방송환경의 탓이 크기 때문이다.

달라지지 않은 것과 달라진 것
먼저 아나운서의 위치에 있어 과거와 비교해 달라지지 않은 것과 달라진 것을 구분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흔히 아나운서를 뉴스진행자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그 활동영역을 터무니없이 축소시킨 착각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아나운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쇼 프로그램에도 나왔고, 교양프로그램에도 나왔으며, 오락 프로그램에도 나왔다. 오래도록 ‘가요무대’를 진행했던 김동건 아나운서, 오랜 세월 ‘아침마당’을 이끌어온 이상벽 아나운서, ‘명랑운동회’로 유명한 변웅전 아나운서 같은 이들이 그들이다. 아나운서의 연예오락 프로그램 출연은 최근에 있었던 일이 아니고 이미 과거부터 죽 진행되어 왔던 일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또한 달라진 것이 있다. 진행자로서의 아나운서가 프로그램에 미치는 영향력이 좁아졌다는 점이다. 아나운서는 이제 프로그램 전체를 장악하고 조정하는 역할보다는 프로그램의 한 부분으로서 기능한다. 심지어는 진행자가 아닌 출연자로서 프로그램에 나오기도 한다. 이 현상은 마치 아나운서들의 활동영역이 더 넓어졌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만 같다. 더 많은 분야에 투입되고 그 분야에서 성공할 가능성도 있다는 점에서 그건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만도 않다. 이것은 아나운서가 특정 분야에 전문적인 진행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나운서들은 여기저기에서 등장하지만 그들의 이미지가 과거 김동건이나 이상벽, 변웅전 만큼 명료하지 못한 것은 이러한 일관된 이미지 구축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퓨전 프로그램으로 비롯된 정체성의 혼란
그들이 전문 진행자가 될 수 없는 환경을 제공한 것은 달라진 프로그램의 정체성 때문이기도 하다. 요즘은 프로그램들이 융복합을 통해 다양한 퓨전의 양식을 만들어내고 있다. ‘느낌표’는 연예오락 프로그램 같지만, 다분히 교양 프로그램의 성격을 갖고 있고 ‘비타민’은 교양 프로그램 같지만, 다분히 연예오락 프로그램의 성격을 갖고 있다. 또한 ‘상상 플러스’의 ‘올드 앤 뉴’나 ‘말달리자’, ‘스펀지’, ‘도전 골든벨’ 등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교양과 오락의 중간 지점에 방점을 찍고 어느 순간에는 오락쪽으로 어느 순간에는 교양쪽으로 손을 뻗는다.

이러한 인포테인먼트 경향의 프로그램들이 야기한 것은 아나운서의 연예인화이며, 동시에 연예인들의 아나운서화이다. 이 중간지대는 이제 치열한 아나운서와 연예인들의 각축장이 된다. 그러면서 생겨나는 것은 아나운서가 가진 이미지의 혼란이다. 과거 전문화된 아나운서들이 특유의 공신력을 바탕으로 프로그램을 장악했던 것에 비교하면 지금의 아나운서들은 연예인과 동격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것은 과거 김동건 아나운서가 ‘가요무대’를 진행하던 모습과, 노현정 아나운서가 ‘올드 앤 뉴’를 진행하는 모습을 비교해보면 명확히 드러난다.

연예인화된 아나운서들은 어떻게 해야하나
방송사들은 분명 이렇게 달라진 방송환경에 연예인과 같이 끼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끼가 있는 아나운서를 필요로 한다. 엄청난 경쟁률이 말해주듯 이들 아나운서들은 말 그대로 팔방미인이다. (실제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외모와 지성과 교양을 두루두루 갖춘 이들은 이렇게 달라진 방송환경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선택을 해야 한다. 시청자들에게 믿음을 주는 공신력 있는 아나운서의 길로 갈 것인가, 아니면 시청자들을 즐겁게 해주는 연예인 같은 아나운서로 갈 것인가.

그 한 가운데 놓여진 줄 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로 인기를 끌고는 일찌감치 줄에서 내려온 아나운서가 바로 노현정이다. 노현정은 과감하게도 저 연예오락 프로그램이라는 공신력을 잡아먹는 호랑이 굴속으로 들어가 연예인 같은 인기를 끌면서도, 끝끝내 아나운서의 줄을 놓지 않고 동시에 뉴스 프로그램도 진행한 아나운서다. 방송사는 그가 연예인이든 아나운서든 시청자들이 좋아하는 인물을 최대한 시청자들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내보낼 의무(?)가 있으므로, 스타 골든벨에 유사한 방식으로 노현정을 출연시켰다. 노현정의 줄타기는 점점 더 위험해졌지만 그럴수록 그녀의 인기는 더 높아갔다. 최정점에서 줄을 내려온 노현정은 시청자들을 위해서나 그녀를 위해서나 잘된 일이었다.

프리랜서 아나운서, 어떻게 봐야 하나
그러나 모두가 그렇게 행운아인 것은 아니다. 이미 공신력의 선을 넘어 연예인화 되어버린 아나운서들은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다. 아나운서의 생명이 공신력에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방송사에 소속되어 아나운서로서 계속 있어야할 명분을 무색하게 만든다. 아나운서는 급격한 인기를 얻지 못하더라도 공신력을 바탕으로 좀더 오래 생명을 유지할 수 있지만, 연예인은 그 생명력이 더 짧아질 수밖에 없다. 강수정 아나운서나 임성민 아나운서의 프리 선언은 그들이 이제 아나운서의 길보다는 연예인의 길로 들어섰다는 걸 말해준다. 따라서 이들을 아나운서로 부르기에는 어색한 감이 있다. 성경환 문화방송 아나운서국장의 말대로 그들은 ‘방송인’이라는 어정쩡한 호칭으로 불리는 것이 더 어울린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건 이들의 전직 아나운서라는 꼬리표는 그들의 이미지로서 연예인이 되어도 고스란히 남는다는 것이다. 시청자들은 착각에 빠져들기 쉽다. 쇼 프로그램의 게스트로 출연하는 그들을 보며 “어 아나운서가 이젠 연예인 다 됐구만”하는 오해를 하게되는 것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변화의 바람을 보고 아나운서의 길을 선택한 후배 아나운서들이다. 그들은 달라진 방송환경에 아나운서도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다양한 시도를 추구한다. 문화방송 이정민, 한국방송 김경란, SBS 김지연 아나운서의 남성잡지 모델 출연이나, SBS 김주희 아나운서의 미스 유니버스대회 참가 등은 이렇게 달라진 아나운서들의 인식을 말해준다.

떨어지는 공신력, 생존경쟁의 시작
이것은 또한 아나운서들의 생존경쟁이 시작되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나운서’는 누가 어떤 일을 하든 그 개인의 문제가 아닌 ‘아나운서’라는 이름으로 싸잡아 말이 나오는 직종이다. 한 아나운서의 행동이 전체 아나운서의 위상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말이다. 이것은 심지어 전직 아나운서로서 현재는 연예인의 길을 걷는 이들에 의해서도 그러하다. 이로써 원하든 원치 않든 이미 아나운서들의 공신력은 떨어지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몇몇 뉴스 프로그램에 남은 아나운서들을 제외하고는 이제 연예인들과 똑같이 아나운서들도 생존경쟁을 해야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쇼 진행자가 되기도 하고, 교양 프로 진행자가 되기도 하며 때론 연예인이 되기도 하는 모습에서 아나운서의 길이 넓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거꾸로 아나운서라는 본래의 직업이 점차 붕괴되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개그맨이나 가수가 프로그램 진행자가 되고, 아나운서가 연예인이 되는 상황은, 아나운서만의 고유영역이 가진 공신력이라는 힘이 점점 약화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아나운서들은 이제 ‘좀더 넓어져 보이는 길 위에서 점점 좁아지는 자신의 입지’라는 딜레마에 처해 있다.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점점 아나운서들의 선택을 강요하는 방송환경, 기회처럼도 보이고 위기처럼도 보이는 이 달라진 방송환경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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