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몽, 연개소문, 대조영의 재미가 서 있는 지점

고구려 사극이 지금까지의 사극과 다른 점은 그 시대상이 고구려라는 것이다. 명명백백한 역사적 사료가 존재하는 상황이라면 이렇게 같은 소재의 드라마가 거의 동시대에 방영될 수 있었을까. 역사적 사료의 빈곤함으로 인해 생겨난 고구려라는 미지의 세계는 많은 작가들의 상상력을 매혹시키는 구석이 있다. 게다가 고구려는 우리 민족의 태생과 맞닿아 있다. 그러니 전 세계적인 경향으로 등장하고 있는 민족주의에 대한 유혹과 바람은 우리에게 있어 고구려 사극이라는 지점에서 맞닿게 된다. 그러므로 지금의 ‘고구려 사극 삼국지’라 일컬어지는 ‘주몽’, ‘연개소문’, ‘대조영’은 고구려라는 ‘역사’와 그 역사의 빈자리를 채워야 하는 ‘상상력’이라는 양날의 칼을 쥐고 탄생한 셈이다.

주몽 - 상상력을 취해 인물을 살리다
40%대의 시청률을 유지하는 ‘주몽’의 힘은 바로 퓨전사극이라는 데 있었다. 상상력이 갖는 아기자기한 재미, 멜로드라마 못지 않은 멜로라인의 형성, 과거의 역사를 다루지만 현재적 의미로 재해석되어 그 코드가 맞는다는 점, 그래서 현재의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게임이나 판타지와도 연결될 수 있다는 점 등등 퓨전사극의 장점은 지금의 ‘주몽’을 만든 장본인이다. 물론 과거에도 퓨전사극은 있었다. 하지만 과거의 퓨전사극이라 하면 ‘해신’이나 ‘다모’ 같은 비교적 규모가 작은 소품들이었다. 퓨전사극이 갖는 장점에 ‘주몽’이라는 민족적 영웅이 만나자 ‘퓨전대하사극’의 기대감이 높아졌다. 엄청난 스케일과 동시에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아기자기한 퓨전의 맛을 시청자들은 기대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몽에서 대하사극을 기대한 것은 ‘주몽’이라는 제목이 주는 막연한 스케일과 민족주의적 욕구 탓이었다. ‘주몽’은 국가 간의 전쟁 같은 당대의 국제분쟁을 다루기보다는 인물의 탄생에 방점을 찍었다. 주몽이 비판받고 있는 ‘역사왜곡’과 ‘작은 스케일’ 문제는 주몽이 가려는 사극의 방향과 시청자들의 욕구가 부딪치는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역사왜곡’ 문제는 퓨전사극의 기치를 내걸었을 때 이미 예견된 일이었고, ‘작은 스케일’은 전쟁 자체보다는 인물들 간의 갈등에 방점을 찍었을 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여기에 타 사극들이 등장하면서 비판의 강도는 높아졌다. ‘연개소문’은 시작부터 안시성 전투에 엄청난 물량을 퍼부었다. 하지만 ‘주몽’의 시작은 국가 간의 전쟁이 아닌 다물군의 게릴라식 전투, 그것도 한나라가 아닌 한나라의 대표성을 띄는 현토성과의 전투였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는 ‘연개소문’이 가려는 방향과 ‘주몽’의 방향이 달랐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다. ‘연개소문’이 이미 성숙된 고구려라는 국가의 외세에 대한 자주적 대응, 국제정세, 정치상황 등을 다루고 있다면 ‘주몽’은 이제 저 신화 속에 가리워져 있던 주몽을 살아있는 인물로 만들어내는데 더 주안점을 두고 있다.

주몽’은 한 인물과 국가의 탄생을 그리는 드라마이지 국가 간의 전면적인 전쟁(물론 소소한 전투들은 있지만)을 그리는 드라마는 아니다. 주둔하고 있는 한나라군을 몰아내는 것이지, 한나라와 전면전을 벌이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그보다는 국가를 세우려는 주몽과 그걸 막으려는 인물들간의 시소게임이 이 드라마의 진짜 재미이다.
주몽에 대한(혹은 연개소문에 대한) 비판은 그만큼 각자의 드라마들을 보는 시청자들의 충성도가 높다는 것의 반증일 뿐이다. 세 편의 사극이 모두 같은 지점에 방점을 찍어야 할 이유는 없다(또 그래서도 안된다). ‘주몽’의 재미는 인물간에 벌어지는 아기자기한 에피소드들에 있다. 그것이 타 드라마와의 차별점이며 주몽만의 힘이다.

연개소문 - 멜로를 버리고 정치드라마를 살리라
‘연개소문’은 좀 안타까운 상황에 직면해 있다. 시작은 엄청난 물량공세였으나 그만한 주목을 받지 못했고, 멜로 라인이 가미되었지만 어설펐다. 이러한 상황이 만들어진 것에는 아마도 먼저 시작해 퓨전사극으로서 주목받은 ‘주몽’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연개소문’은 정통사극을 내걸었다. 하지만 그것은 퓨전사극의 ‘주몽’을 의식한 결과일 뿐이었다. 역사왜곡의 무리수를 가지면서도 ‘연개소문’을 안시성 전투에 끌어들였고, 전투라고 말하기 무색할 정도의 전쟁 신을 잡아냈다. 또한 이어진 요하와 요택에서의 전쟁 신은 그 스케일에 있어서 보는 이들을 압도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됐다.

‘전쟁구경’은 있었지만 ‘인물의 탄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쟁에서 전투영웅을 탄생시키고 그 영웅을 통해 인물의 탄생으로 연결시켜 드라마적 긴장감을 이어갔던 ‘주몽’과는 달리, ‘연개소문’은 교묘한 전략과 전술에 더 많이 시선을 잡아두었다. 초기 전쟁의 영웅은 연개소문의 아버지인 막리지, 을지문덕, 영양왕, 영류왕 고건무 등이 분명하지만 드라마 전체를 이끌어가야 할 연개소문과 이들 간에는 연결고리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당대의 국제정세 속에서 고구려의 위치를 보여주는 민족주의적 가치는 있었을지 몰라도 ‘연개소문’이라는 인물에 힘을 실어주는 드라마적 가치는 별로 없었다. 게다가 초기에 너무 많은 걸 보여준 탓에 앞으로 보여줘야 할 전쟁신의 부담감만 더 높여놓았다.

막상 그 국제정세 속의 중심에 서 있어야할 연개소문은 신라에 있었다. ‘연개소문’은 정통사극의 기치를 걸었지만 결국 퓨전을 채용했다. 연개소문은 김유신의 시종이 되고 거기서 김유신의 동생과 사랑에 빠진다. ‘주몽’에서 비롯된 멜로에 대한 강박이다. 게다가 그 사랑은 전혀 현대인들의 가슴에 전달이 되지 않는 구태의연한 멜로 신파를 답습한다. 그러면서 또 한번 연개소문이라는 인물의 힘을 약화시켜놓는다. 하지만 주목해야할 것은 이 즈음 ‘연개소문’이 본래부터 추구했어야할 재미라는 바람이 조금씩 중국에서 불어왔다는 것이다. 그것은 독고황후(정동숙 분)와 수양제(김갑수 분)라는 인물의 탄생이다. 본래 멜로가 약하고 선 굵은 사극에 강점을 가진 이환경 작가의 힘이 발휘되는 순간이다.

드라마 상으로 주인공인 ‘연개소문’이 약화되고 중국의 인물들이 살아난 것은 작가의 강점이 어디에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다. 바로 이 지점이 ‘연개소문’이 앞으로 나가야할 방향이 아닐까. ‘연개소문’이 상상력을 발휘해야하는 지점은 ‘주몽’이 했던 아기자기한 인물 관계가 아니고 국제정치드라마 속에서 이전투구하는 인물들이다. 그것이 ‘연개소문’을 보는 진짜 재미를 살릴 수 있는 길이다.

대조영 - 정석대로 가다
아직 드라마가 정착되지 않은 상태에서 섣부른 판단일지 모르지만 ‘대조영’은 ‘연개소문’이 주창했던 정통사극의 진정한 길을 보여줄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군의 요동침략과 여기에 대항하는 양만춘(임동진 분), 대조영의 아버지인 대중상(임 혁 분)의 활약이 보인 요동성 전투 신을 보면, 스케일과 인물 양자를 꼼꼼히 잡아내는 힘이 엿보인다. 거대한 전쟁신 속에서 디테일있는 전투 신까지 엮어내면서 영웅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 힘은 아무래도 중견연기자들 몫이 가장 클 것이다. 그들은 얼굴 한 번 잠깐 들이미는 것만으로도 드라마의 집중도를 높여놓는다.

‘주몽’과 ‘연개소문’이 앞서 있어 막내의 이점을 톡톡히 보고 있는 ‘대조영’은 양 드라마의 장점을 하나로 모아놓은 듯한 느낌이다. ‘대조영’은 ‘주몽’처럼 저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는 인물이다. 시작은 ‘연개소문’이 보여줬던 전쟁(물론 세밀한 전투신을 가진)이지만 이제 패망하는 고구려와 함께 ‘대조영’은 ‘주몽’이 했던 건국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대조영’의 이런 후발주자가 갖는 장점은 또한 단점이 되기도 한다. 같은 고구려사가 반복되고 있다는 점에서 참신함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연개소문’에서 보여주었던 안시성 전투를 앞으로 ‘대조영’이 어떤 모습으로 그려낼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분명한 것은 ‘주몽’과 ‘연개소문’이 나름대로의 목적에 의해 정통 사극에서 한발씩 발을 떼고 있다는 점에서 ‘대조영’의 차별화는 바로 그 정석으로 가는 지점에 있다는 것이다. 물론 부족한 사료를 충분히 ‘가능성 있는 상상력’으로 채워 넣어간다면 말이다.

고구려사, 역사와 상상력으로 복원하라
현재의 고구려 사극들은 모두 부족한 사료를 채워 넣어야 할 상상력과 역사적 개연성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 그 고민에는 위아래가 없다. 다만 방식에 있어서, 강점과 약점에 있어서 그 차이가 있을 뿐이다. ‘주몽’을 통해 고구려의 탄생을, ‘연개소문’을 통해 고구려의 전성기를, 그리고 ‘대조영’을 통해 고구려의 패망과 그 후에도 이어지는 정신을 읽을 수 있다면 고구려 사극들의 고민은 충분히 보답 받을 수 있을 것이다.
OSEN(www.osen.co.kr)

<발칙한 여자들>에 나타난 아줌마상

‘발칙한 여자들’이 꿈꾸는 세상은 끈적임 없는 상큼 발랄 경쾌한 세상이다. 우리네 드라마 세상에서 아줌마들이란 ‘불륜’과 ‘신파’를 오가며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 구질구질한 관계도 궁상맞은 눈물도 안녕이다. 과거 아줌마 이미지에서 기름기와 물기를 쪽 빼내자 이제 ‘여자’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간에 잘 보이지 않던 새로운 아줌마들의 등장이다. 이름하여 ‘발칙한 여자들’이다.

드라마 속에서 여성의 이미지는 시대에 따라 변신을 거듭했다. 1970년대에는 말 잘 듣고 시어머니에게 구박받는 며느리가 대부분이었다. 요즘 같은 시면 바보스러울 정도로 착한 며느리는 심지어 다른 남자와 바람났다고 모함 받기까지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평 한 마디 없을 정도다(1972년 드라마 ‘여로’에서). 이러한 경향은 1980년대까지 계속 이어졌다. 강인하고 착하게 보이긴 했지만 남성 권위주의 사회 속에서 책임과 의무에만 절어있는 그들에게서 ‘발칙한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자 여자들은 이제 신데렐라를 꿈꾸기 시작했다. 물론 아줌마들이 나오는 드라마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트렌디 드라마들이 등장하면서 보다 환타지를 자극하는 젊은 미혼의 여자들이 브라운관을 가득 메웠다. 상대적으로 아줌마들의 문제가 소외되고 있을 때, 등장한 MBC의 ‘아줌마’라는 드라마는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킬 정도로 기존 아줌마 상에 반기를 들고 나왔다. 권위주의적인 남편과 당당히 이혼하는 원미경의 모습에서 시청자들은 충격을 넘어서 박수를 쳐주었다. ‘발칙한 여자들’의 태동을 알리는 현상이었다.

‘발칙한 여자들’의 미주(유호정 분)는 지금까지의 드라마 속 여자들의 삶을 단번에 뛰어넘는다. 조강지처였던(1단계) 미주는 정석에게 버림받으면서 미국으로 건너가 갖은 고생을 다해가며 치과의사가 된다(2단계). 그리고 그녀는 귀국해 전 남편 정석에게 복수하기 위해 접근하고 그 과정에서 젊은 남자 루키는 그녀를 좋아하게 된다(3단계). 이 3단계의 변신을 보면 그녀가 저 조강지처의 70년대를 넘어서 전문직 종사자가 되고, 나중에는 아줌마지만 젊은 남자의 사랑을 받는 어엿한 여자가 되는 그 변신의 과정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드라마 속 여성상의 변화는 그 반대 역인 악역을 들여다보면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과거의 드라마들에서 주인공 여성들을 억압하고 핍박하는 자는 남성일까, 여성일까. 언뜻 가부장적인 사회가 그네들을 핍박했다는 생각에 남성을 떠올리겠지만 그건 사실과 다르다. 아이러니하게도 여성의 적은 여성이었다. 70년대 착한 며느리의 대척점에는 악한 시어머니가 있었고, 90년대 이후의 신데렐라를 꿈꾸는 여성의 대척점에는 일과 사랑 둘 다를 쟁취해야하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커리어 우먼들이 있었다. 이렇게 억압의 주체는 드라마 상에서 정면으로 주인공과 부딪치지 않고 오히려 여성을 내세워 대리전을 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직격탄을 날린 게 1999년 방영된 ‘아줌마’다. 그리고 ‘발칙한 여자들’의 대척점에 선 이들은 물어볼 것도 없이 상처를 준 남성이다. 이 드라마에 나오는 가정에서는 부부만 있을 뿐, 모실 부모들은 없으며, 직장에서는 각각 인정받는 전문직 종사자만 있을 뿐 라이벌 관계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이 발칙한 여자의 복수극이 유혈이 낭자하지도 않고, 눈물이 철철 넘치지도 않는 귀여운 장난 같다는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이전의 드라마 속 여자들처럼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다. 사실 처절하고 질척질척한 복수극의 이면에는 아직도 남은 미련과 집착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알고 경제적으로도 독립했고, 혼자서도 충분히 행복한 이 발칙한 여자는 복수조차도 즐길 줄 아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알게된 여자는 이제 다른 남자들에게 사랑 받을 자격이 갖춰진 셈이다. 이로써 ‘아줌마의 사랑 = 불륜’이라는 악의적인 등식은 깨지고 당당한 ‘중년여성의 사랑’이 등장하게 된다.

경제력이 있고, 자신감이 넘치며, 인생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이들의 사랑과 삶은 여유가 있다. 아마도 ‘발칙한 여자들’이 보여주는 여성상은 과거 결혼 전과 확연히 달라지는 결혼 후의 여성에서, 이제는 결혼 후에도 당당하게 직업을 갖고 살아가는 요즘의 여성들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희화화된 남성과 어떤 면에서는 지나치게 아줌마들의 환타지를 자극하는 면모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것 역시 어찌 보면 그간 불륜과 신파의 대상으로서 핍박받아온 아줌마상을 염두에 둘 때 고개가 끄덕여지는 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이제 막 태동하기 시작한 신 아줌마상, ‘발칙한 여자들’이 앞으로 드라마 속에서 꿈꿀 세상들이 궁금해진다.

<천하장사 마돈나>와 소수자의 문제

천하장사와 마돈나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거리가 존재할까.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두 이미지는 그러나 오동구라는 한 뚱보 소년 속으로 들어온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생각하지만 영화는 그것이 우리가 근거 없이 가졌던 편견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천하장사 마돈나는 천하장사와 마돈나, 남성성과 여성성, 소년과 기성세대, 꿈과 현실, 소수자와 다수자 등등. 전혀 한 테두리 안에 존재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대결구도를 보여 전혀 결합될 수 없다고 여겨지는 것이 사실은 우리의 편견에 의한 것이라는 걸 꼬집는다.

마돈나와 동구 사이
영화는 어린 동구의 허밍으로 시작된다. 도대체 무슨 노래를 하는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아무렇게나 불러대는 그 노래는 마돈나의 ‘like a virg다. 그의 귀에는 헤드셋이 끼워져 있다. 그가 듣는 마돈나의 노래와 자신이 따라 부르는 ‘like a virgin’ 사이에는 이만큼의 거리가 있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마돈나가 되어 노래를 부르는 꿈을 꾸는 동구의 작은 방 한 켠으로 화려한 조명이 환상처럼 돌아간다. 동구는 꿈을 계속 꾸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런데 동구는 마돈나가 되기에는 너무 뚱보다. 살이 쪄 가슴이 나왔다는 것과 젖꽃판이 크다는 것 외에 동구가 마돈나와 닮은 점은 없다. 그저 평범한 여자가 된다고 해도 어울리지 않을 몸을 갖고 있다. 게다가 동구는 마돈나처럼 가녀린 여자가 아니다. 인천항 하역장에서 남들은 두 개씩만 올려도 힘겨워하는 짐을 다섯 개씩 올려도 끄덕하지 않는 괴력의 소유자다. 이렇게 우리가 가진 마돈나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동구를 앞에 세워놓고 의아해하는 관객에게 영화는 “그래서 뭐가 어쨌는데?”하고 반문하는 것만 같다.

영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오동구의 힘을 앞세워 그의 마돈나가 되고픈 꿈을 포기하지 않게 만든다. 오동구는 여자가 되기 위한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상금이 걸린 씨름대회에 나가게된다. 도무지 그의 꿈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그의 괴력(남성성) 또한 그의 꿈을 위해 사용하게 하는 것이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오동구의 마돈나가 되려는 노력을 보면서 그 거리만큼 그의 강렬한 욕구를 읽게된다. 그런데 그것은 막상 동구에게는 그다지 거창한 꿈이 아니다. ‘무언가가 되고 싶다’며 여기저기를 전전하는 단짝친구 종만에게 동구는 말한다. 나는 뭐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살고 싶은 거라고.

동구와 아버지 사이
그랬다. 동구에게 여자가 되는 것은 욕망이 아닌 생존이었다. 이야기가 존재의 문제로 확장되자 주변인물들이 여기에 호응하듯 자신들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영화 초반부 거대한 포크레인의 등장과 그 앞에 선 동구는 이 영화가 얘기하고자 하는 또 다른 측면을 말해준다. 동구의 아버지는 동구에게는 앞으로 그가 살아가야 할 현실과 같다. 그것은 무시무시한 포크레인이며, “가드 올리고 상대를 주시하면서” 싸워야 버텨낼 수 있는 현실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현실 역시 동구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아버지가 동구에게 휘두르는 폭력은 사실 꿈을 포기하고 뛰어든 저 노동현장에서부터 가져온 것이다. 편안한 가족의 품을 제공해줘야 할 집은 아버지가 밖에서 가져온 현실로 동구를 압박한다. 아버지의 훈계와 폭력은 사실 자신이 처한 현실을 대물림하지 않으려는 안간힘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아버지와 동구가 현실에 대응하는 방식은 사뭇 다르다. 아버지는 권투의 꿈이 꺾이는 순간부터 더러운 현실과 마주한다. 주먹은 꿈을 위해 링 안에서 휘둘렀을 때에만 그 가치를 발휘한다. 현실은 주먹이 아닌 때론 교활하고 때론 비겁한 처세를 요구한다. 피해의식에 가득 찬 그의 주먹은 애꿎은 동구에게까지 향한다.
하지만 동구는 포기(그것은 생존이기에 포기할 수도 없다)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편안한 현실보다 힘겨운 꿈을 선택한다. 여장을 하고 아버지 앞에 선 동구에게 아버지는 현실을 요구한다. 아버지의 주먹을 온몸으로 받아내던 동구는 결정적인 순간, 아버지를 들어 날려버린다. 꿈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그는 모래판 위에 남을 수 있었고, 따라서 그의 괴력은 꿈을 위해 건강하게 사용된다.

동구와 아버지의 이야기에는 ‘아버지를 넘어선다’는 전통적인 통과의례적 의미도 담고 있다. 아버지가 가진 권위에 맞섬으로서 동구는 저 스스로 성인의 길로 들어선다. 그의 앞에는 아버지가 싸워왔던 현실이 놓여지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가드 올리고 상대를 주시하라”는 정도밖에 없다는 것에 안타까워한다. 이 지점이 꿈과 현실에 대해 아무런 소통도 되지 않을 것 같은 아버지와 동구가 서로 만나는 지점이다.

동구와 씨름부 사이
아버지도, 사랑하는 일어선생님도, 가장 가깝다고 믿었던 단짝친구 종만조차 동민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철저히 소수자로서 혼자 살아가야 될 삶을 감지한다. 하지만 동구가 꿈을 이루기 위해 씨름부에 들어서는 순간, 그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씨름부원들과 감독을 만난 동구는 거기서 일종의 ‘소수자의 연대’를 느낀다. 말만 번지르르 하고 씨름은 뒷전에다 오히려 동구에게 춤을 배우려는 친구, 겨드랑이가 너무 민감해 경기를 치르기도 전에 쓰러지는 친구는 물론이고, 설명은 없어도 출세와는 비껴있는 감독, 손이 터져라 연습해도 늘 지는 주장까지 모두 ‘다수자의 지지’에서 비껴난 소외된 인물들이다.

씨름부라는 남성적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동구가 쉽게 그들과 어우러지는 것은 그들이 이 같은 소수자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덩치 큰 동구가 회식자리에서 날렵하게 춤을 추며 렉시의 ‘애송이’를 부를 때부터 예견된 일이다. 특히 덩치 트리오 중 문세윤이 연기한 덩치는 동구와 같은 여성적 감수성을 소유하고 있다. 그는 오히려 동구를 통해 자신의 감성을 하나하나 발견해나가는 듯 하다. 춤을 배우고 ‘요즘 내가 너 때문에 헷갈린다’고 할 정도로. 이 무거운 주제의 영화가 전체적으로 밝고 시종일관 웃음을 주는 이유는 바로 이 소수자들의 유쾌한 연대가 있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만큼 먼 거리를 한 몸에 안은
영화가 말하려는 남성성과 여성성, 현실과 꿈, 소수자와 다수자의 거리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멀게 느껴진다. 그것은 영화의 배경이 되고 있는 인천이라는 공간성에도 나타난다. 동구가 하역작업을 하는 노동의 현장인 땅과, 그 위로 어디론가 날아가는 비행기가 떠있는 하늘, 그리고 동구가 소주를 마시는 차이나타운의 계단과 저 멀리 보이는, 어디론가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 배들 사이에는 가늠할 수 없는 거리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영화는 동구가 그랬던 것처럼 그것을 하나로 쓸어 담는다(이것은 류덕환이라는 놀라운 연기자에 의해 가능해졌다).

그리고 영화 끝에 우리는 무대 위에서 ‘like a virgin’을 부르는 동구를 만나게 된다. 이제 동구는 어린 시절 그 때처럼 혼자가 아니다. 객석을 가득 메운 사람들 중에는 씨름부원들도 있고 어머니도 있다. 영화는 여성이 되려는 동구의 문제부터 시작해서 차츰차츰 그 영역을 아버지가 맞닥뜨린 현실로 그리고 소수자들이 서 있는 현실로 확장시킨다. 이렇게 함으로써 영화는 성적 소수자들을 위한 이야기를 넘어서 우리 일상으로 파고든다. 남성성과 여성성, 소수자와 다수자 같은 양자의 대결구도는 무장해제 된다. 그리고 그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 우리는 깨닫게 된다. 그들은 타인이 아닌 바로 내 자신이라는 것을. (ohmynews.co.kr)

비뚤어진 시각으로 각설탕 보기

‘각설탕’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달리는 천둥이일까, 아니면 그 말 위에 있는 시은이일까. 반려동물영화라면 당연히 그 포커스는 천둥이와 시은 양쪽에  맞춰졌어야 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된 드라마 흐름은 그 포커스를 시은쪽에 주고 있다. 이렇게 해서 빚어지는 결과는 참혹하다. ‘동물과 인간의 우정’은 퇴색되고 ‘우정을 빙자한 동물 학대’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렇게되자 이 영화는 본래의 의도를 벗어나 인간의 추악한 욕망을 드러내는 사회극처럼 보여진다. 눈물을 나오지 않고 대신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리고 달콤한 이미지의 ‘각설탕’이라는 제목은 슬프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영화적 맥락 속에서 그 제목은 ‘주는 주인’과 ‘받아먹는 동물’의 주종관계로 읽히기 때문이다.

이제 제대로 포커스를 받지 못한 천둥이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천둥이는 자신의 부모, 장군이가 그랬던 것처럼 나면서부터 인간들의 굴레 속에 평생을 견뎌내야 할 운명을 부여받는다. 자신이 태어나는 날, 부모를 저 세상으로 보낸 천둥이는 단지 일어서지 못한다는, 그래서 달릴 수 없을 거라는 기능적인 이유(자본주의적 시각으로 읽자면 노동력이 없다는 이유)로 부모를 따라갈 위기에 처한다(달리지 못하면 말이 아니라는 사고는 얼마나 인간 중심적인 사고인가!). 그런데 천둥이를 구해내 달리게 만드는 건 다름 아닌 시은이다. 하지만 살았다 해도 앞으로 인간들의 굴레 속에 살아갈 천둥이의 운명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천둥이는 주인에게 버림받고 나이트클럽에서 학대받는다. 그런 천둥이를 다시 만난 시은은 이제 자신이 받는 억압을 천둥이를 통해 풀어내려 한다. 천둥이를 인간의 욕망이 꿈틀대는 경마장, 그 인간들의 순위 경쟁 속에 내세우는 것이다. 천둥이는 경마장에서 달리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는 저 인간 없는 초원 위에서 자유롭게 뛰어 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천둥이의 죽음은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 영화에서 어떤 슬픔을 느낀다면 그것은 자신의 삶이 저 천둥이와 비슷하다는 사회적 맥락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본질을 알아주지 않고 나이트클럽에서 굴욕적인 삶을 살아가는 천둥이의 모습은 우리네 샐러리맨들의 삶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또한 경마장이라는 서기 싫었던 생존경쟁의 장에서(그것도 내가 아닌 저들의 머니게임을 위해) 매일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닮아있다. 천둥이의 죽음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이 어떻게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모는가 하는 얘기를 닮아있다. 그렇다면 누가 천둥이를 죽음으로 내몰았는가.

시은에게 포커스를 더 주고 있는 이 영화 속에는 그 악역이 명백하다. 시은과 윤 조교사의 대척점에 있는 철이와 김 조교사가 그들이다. 그들은 과도한 경쟁에 경도되어 있는 인물들이다. 악역만으로 보면 이 영화가 말하려는 것은 경쟁사회에서의 페어플레이 정신과 채찍이 아닌 각설탕으로 살아가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누구를 위한 경쟁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순간, 이런 이야기들은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한다. 채찍이든 각설탕이든 그것은 게임의 룰을 쥐고 있는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다루는 방법의 문제일 뿐, 근본적인 지배-피지배 구조에 대한 논의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단순화된 채찍보다 은근히 본질을 숨기는 각설탕이 더 무서운 것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주체적으로 살아가려는 사회의 구성원들을 달콤한 중독으로 사로잡는 현대적 의미의 또 다른 채찍이 되기 때문이다. 천둥이는 왜 마지막 순간에 수술을 받고 더 오래 사는 방식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사실 이 부분은 모호하다. 수술을 받지 않으려는 천둥이의 의지가 무엇 때문이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은 인간의 눈으로 그렇게 해석된다. 그 자의적 해석은 천둥이의 비극을 가져온다.

영화가 진정으로 ‘인간과 동물의 우정’을 다루고 있었다면 마지막 순간 순위 경쟁으로 다시 내몰아 1등으로 골인점을 통과하고는 죽는 천둥이와 그 앞에서 오열하는 시은을 그리기보다는, 이 경쟁사회의 경마장에서 탈출하는 천둥이와 시은의 모습이 그려졌어야 옳다. 천둥이의 죽음은 현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네 비극적인 운명과 닮았다는 맥락에서 슬프지만, 천둥이의 죽음 앞에 눈물짓는 시은의 모습에서 전혀 슬픔을 느낄 수 없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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