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몽의 인물론

영웅이라는 말은 시대와 나라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르다. 영웅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 신에 도전하는 인물로서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삼국지나 각종 전쟁에서 보여지듯 전쟁지도자나 정복자의 의미를 갖기도 했다. 또한 영웅이 포괄하는 범위는 넓어서 때로는 순교자, 과학자 혹은 예술가가 영웅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시대와 나라에 따라 다양한 의미가 존재하는 것은 당대에 살아가는 소시민들이 영웅이라는 ‘현실을 뛰어넘는 이상적 존재’에 투영하는 의미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이제 영웅이라는 말은 월드컵에 나간 축구선수일 수도 있고, 기술적 발견을 해낸 과학자가 되기도 한다. 그것은 심지어 연예인이 되기도 하며, 작게는 가족을 지키는 부모가 되기도 한다. 그만큼 영웅은 이제 저 멀리에서부터 우리 옆으로 찾아온 것이다.

‘주몽’이라는 드라마에 등장하는 주몽이라는 영웅은(본래 역사적 인물로서의 주몽과 드라마 속 주몽은 다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이 시대의 영웅이라 할만하다. 역사적 사료에 보다 충실한 정통사극이 아닌 퓨전사극을 표방한 ‘주몽’은 보다 더 폭넓게 현대인들의 욕망을 사극이라는 그릇 속에 담아 넣었다. 그러자 주몽이라는 역사적 인물은 역사와 민족이라는 무거운 갑옷을 벗어버리고 현대인들의 욕망을 대변하는 영웅으로서 재탄생되었다. 민족주의 영웅이 될 것 같았던 ‘주몽’은 현대인들의 욕망을 대변하는 인물이 되었다.

드라마는 완성된 영웅에서 시작하지 않고, 소시민이었으나 차츰 영웅이 되어가는 과정에 천착한다. 이것은 현대인들의 영웅관과 상당부분 맞닿아 있다. 과거의 영웅이라면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했지만, 지금은 보다 인간적이고 친근한 영웅을 희구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영웅이 손에 잡히지 않는 존경의 수직적인 대상이었다면, 현대의 영웅은 손에 잡힐 것 같은 그래서 때로는 질투가 나기도 하는 수평적인 대상이다. 드라마는 절묘하게 초기 해모수라는 과거 형태의 전형적 영웅을 등장시켜 안심시킨 다음, 주몽이라는 현대적 영웅을 그 테두리 안에 넣고 조금씩 키워나간다.

카리스마를 걷어내자 주몽은 이제 대화와 타협을 하는 이 시대의 인간경영자가 된다.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고 주변을 살피면서 조금씩 주변인물들을 끌어들여 일을 성사시킨다. 주몽의 이런 주도면밀함은 때론 그를 조금 소극적인 인물로 보게 만든다. 차라리 그의 어머니 유화부인이나 그를 돕는 소서노라는 여자 영웅들은 오히려 더 주체적이다. 그럼에도 주몽이 이들을 장악하는 이유는 우위에 있는 인간경영 능력 때문이다.

주몽은 이러한 능력을 가지고 역사적 영웅이 빠질 수 있는 민족주의적 환타지라는 함정을 피해나간다. 나라를 구원하는 영웅은 보기에 속시원할 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이루어낸 것 같은 환타지만 제공할 뿐이다. 드라마의 고구려 열풍이니, 영화 ‘한반도’니 하는 민족주의의 바람이 거센 요즘, 조금은 인간적인 영웅, 주몽이 주목받는 이유는 그가 오히려 그 민족주의의 환타지를 깨는 영웅이기 때문이다. <GQ>

괴물이 재난영화처럼 보이는 이유

개봉 전부터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그 영화가 베일을 벗었다. 괴물의 모습이 궁금한 것은 당연지사. 고질라 만큼 거대하지도 않고, 에일리언처럼 작지도 않은 그저 아담한 크기의 괴물은 무엇이든 삼켜버릴 수 있는 거대한 입과, 손처럼 자유롭게 움직이는 꼬리 그리고 뒤뚱뒤뚱 걸어갈 때나 사용될 법한 다리가 위협적일 뿐이다. 심지어 축축하게 젖은 눈과 조그마한 공간에 벽을 보고 웅크리고 앉아 있는 모습은 슬퍼 보이기까지 한다.

물론 이것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얘기다.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 그 모습은 관객들을 공포와 경악으로 몰고 가는 영락없는 괴물의 모습으로 돌변한다.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긴장 속에 스크린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영화가 끝나고 나면 괴물의 정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 불쌍한 괴물을 괴물답게(?) 만든 것은 사실 괴물 그 자신이 아니고, 괴물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봉준호 감독은 장르를 잘 활용하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여기서 잘 활용한다는 것은 장르가 가진 속성을 이용해서 그 장르를 파괴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으 통해 전혀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편의적으로 괴물을 구분한다면 어떤 장르가 적합할까. 괴물이 나왔으니 에일리언이니 고질라, 프레데터 등등의 괴수영화의 한 부류로 봐야 할까. 그러나 영화는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영화는 블랙코미디, 가족극, 정치극 등등 수많은 요소들을 끌어안고 있다.

아마도 이 영화가 칸느에서 상영되었을 때, 그것을 본 전 세계인들은 괴물에 저마다의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다. 괴물이 단순히 서스펜스와 스릴러, 공포를 곁들인 영화라면 불가능했을 이 의미부여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괴물이 하나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 상징은 전쟁이 되기도 하고, 폭력이 되기도 하며, 부패한 권력이 되기도 한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상영되고 있는 괴물이 재난영화처럼 보이는 것은 당장 수해로 인해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괴물의 영화 속 상황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수마가 할퀴고 간 도로는 마치 엿가락처럼 휘어있고, 자식처럼 키웠던 작물들은 하룻밤 새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무런 경고도 없이 갑자기 전기가 나가더니 벽이 무너지면서 토사가 집안으로 쓸려 내려왔다. 어제까지 함께 웃고 얘기하던 아들, 딸들은 강물처럼 도로를 질주하는 빗물에 쓸려 사라졌다. 몇 년 전 똑같은 수해를 입은 주민들은 당시 제대로 예방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분통을 터뜨렸다. 한번의 재해는 자연재해라고 해도 연달아 벌어지는 재해는 인재가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벌어진 수해처럼 괴물은 대낮에 버젓이 한가로운 한강변을 습격했다. 사람들은 밟히고 찢겨지고 잡아먹혔다. 그 가운데 우리의 소시민 박강두네 가족이 있었다. 강두는 자신의 눈에 집어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 현서를 괴물에게 빼앗겼다. 그러나 합동분향소에서 오열하는 사람들이 직면한 것은 바이러스 감염이 두려워 행해지는 격리조치이다. 저 많은 헐리우드 괴수영화들이 보여주려는 것처럼 괴물이라는 재해(물론 괴물은 탄생부터가 환경오염으로 인한 인재이다)와 그에 대한 대결은 이 영화가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는 이 재해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재해에 대한 대처는 미온적이거나 정치적이다. 실제 괴물을 찾아 나서거나 해치워야할 군 병력들은 오히려 사람들의 현장접근을 막기 위해 동원된다. 괴물의 실체는 분명 있지만, 그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그것이 가져올 사회적 파장이다. 그래서 그들이 취하는 제스추어는 있지도 않은 바이러스라는 새로운 공포를 주입하는 것이다. 박강두 가족은 괴물보다, 먼저 사건을 축소 왜곡하려는 정부와 맞닥뜨리게 된다. 이렇게 재해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려하는 동안에도 괴물은 한강변에 출몰하며 또 다른 재해를 일으킨다. 기물은 파괴되고 사람들은 죽어나간다.

이들 괴물과 싸우는 소시민, 박강두네 가족의 이야기는, 최근 피해가 가장 심했던 인제 지역에 나타난 8명의 산악인을 연상시킨다. 당시 고립된 주민들은 헬기를 보내달라고 했지만 비 때문에 헬기는 뜰 수 없었다. 도저히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길을 뚫고 들어온 산악인 8명은 2박3일 동안 무려 50여 명의 주민들을 구하고 영웅 대접하는 주민들에게 오히려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일상생활로 돌아갔다고 한다.

영화 속 박강두 가족이 괴물과 싸우는 이유 역시 소시민에 무슨 영웅이 되고 싶어하는 일이 아니다. 단지 자신들의 손주이자, 딸이자, 조카가 괴물에게 잡혀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 소시민들은 도대체 무얼 갖고 싸울 것인가. 저 산악인들이 자신들이 평소 쓰던 등산장비를 사용했던 것처럼(어떨 때는 이것이 헬기보다 더 유용하다) 가족들이 사용하는 무기도 그런 것들이다.

그것은 돈을 주고 구입한 총은 예비군 훈련장에도 사용하지 않을 것 같은 낡은 총이며, 양궁선수로 등장하는 박남주(배두나 분)가 쓰는 활, 그리고 운동권 출신이었던 박남일(박해일 분)이 사용하는 화염병이다. 이걸로 어떻게 괴물을 이기겠나 싶다. 그런데도 이 무기들은 괴물과의 사투에 아주 유용하다. 사실은 괴물 자체가 그다지 위협적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로써 결국 박강두 가족이 싸워야 했던 것의 실체가 드러난다. 탱크 한 대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정부와 해결책을 주는 듯 접근해 괜한 내정간섭과 실험만 일삼는 미국이 그들이 싸웠던 진짜 괴물이었던 것이다.

영화는 수많은 우리 사회의 모습을 비춰낸다. 현장에 들어가기 위해 공무원에게 돈을 집어줘야 하는 상황이라든지, 격리되어 있는 병원에서 이유도 말하지 않고 검사를 해야하니 아무 것도 먹지 말라는 모습이라든지, 조사랍시고 행해지는 고문이라든지, 휴대폰 강국에 맞게 괴물의 은신처에서 제대로 된 휴대폰을 기다리는 현서나 통신회사에 있는 친구 빽으로 통화기록을 빼내는 장면 등등... ‘괴물’이라는 제목을 갖고 있기에 이런 장면들이 정작 괴물보다 더 많이 등장하는 면면을 보면서 관객들은 진짜 괴물을 보는 듯한 묘한 카타르시스를 얻기도 했을 것이다.

최근 반환된 미군기지의 심각한 오염 사태 또한 영화 속 괴물의 탄생과 맥락을 같이 하면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미8군에서 버린 맹독성 포르말린이 한강으로 스며들면서 탄생하는 괴물처럼, 사건은 이미 터졌거나 진행중이지만 이에 대한 대처는 항상 뒷전이다. 백화점이 무너지고, 다리가 무너지고, 가스가 폭발하는 재난의 발생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잉태되어 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재난이 터졌을 때, 이 땅의 정치인들은 어떻게 대처했던가. 혹여 사태를 축소하거나 오히려 사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는 않았던가. 봉준호 감독의 작은 ‘괴물’이 더 무섭고, 더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우리 사회라는 한강에서 잉태되고 있는 괴물의 존재 때문이다. 이것은 저 영화 속 괴물처럼 가상이 아니고,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 몸서리쳐지기 때문이다.

유오성의 복합연기

유오성의 연기를 보면 참 복합적(?)이란 생각이 든다. 연기라는 것이 행복하면 웃고, 슬프면 울고, 화가 나면 화를 내면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유오성은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수많은 감정과 심리에 따라 표정과 손짓, 행동이 어찌 다 똑같을 수 있을까. 유오성의 섬세하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복합감정의 표현은 자칫 단순할 수 있는 드라마에 미묘한 힘을 실어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투명인간 최장수’는 유오성이 가진 이런 힘이 백분 발휘되고 있는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편의적인 것이지만 ‘투명인간 최장수’를 장르적으로 구분해보면 어떨까. 드라마 첫 회의 장면들은 이 드라마가 마치 조폭이 등장하는 형사액션물이라는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쇠파이프와 야구방망이를 든 일단의 조폭들과 대결을 벌이는 최장수의 모습은 과거 곽경택 감독의 영화, ‘친구’를 연상케 했다. 그런데 그 액션에는 무언가 다른 점이 있었다. 심각하다기 보다는 우스꽝스런 코믹이 있었다는 것이다. 늘 얻어터지고 깨지면서도 일상으로 돌아와서는 바가지를 긁히는 최장수의 모습에 시청자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좀더 드라마가 진행되자 장애를 겪고 있는 아이와 아버지로서의 사랑이 등장하며 휴먼드라마를 포함시키더니, 아내 오소영의 옛 남자친구 하준호가 등장하면서 멜로드라마로 연장된다. 물론 이 드라마의 기조는 휴먼드라마가 맞을 것이다. 하지만 이 속에는 액션과 코믹, 멜로가 복합적으로 녹아있는 게 사실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건 아무래도 유오성이 가진 연기의 힘이 아닐까.

오소영을 앞에 둔 최장수의 얼굴은 웃고 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앞에 두고 있기에 웃는 것이다. 그런데 오소영 옆에는 하준호가 있다. 그리고 오소영은 선언한다. “난 지금껏 단 한번도 당신과 행복했던 적이 없었다”고. 그러자 최장수의 얼굴은 순간적으로 찡그려지면서 폭발한다. 그는 애꿎은 하준호의 차를 부순다. 그리고는 다시 애원하는 얼굴로 바뀐다. “나 정신차리게 해주려고 그러는 거지? 거짓말이지?” 그렇게 다시 달래듯 대사를 건넨 유오성의 웃는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단 몇 분도 되지 않는 이 장면 속에서 유오성이 한 연기는 행복과 슬픔, 분노, 회유 같은 단 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심리의 표현이었다.

최장수가 여관방 욕조에 장미꽃잎을 뿌리는 장면은 섬뜩한 슬픔을 안겨주었다. 바보 같은 얼굴로 손에 피가 나는 지도 모르고 꽃잎을 따서 뿌리는 장면은 알츠하이머라는 막연한 병에 대한 실감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 장면에서도 유오성은 멍한 표정으로 바보처럼 웃다가 깨어나서는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슬픔에 빠지는 연기를 선보였다.

이것은 최장수가 오소영에게 위자료라며 돈을 건네주는 장면에서도 등장한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식사를 하자”는 최장수에게 오소영이 “약속이 있어서 가봐야 한다”고 하자, 실망스럽지만 그걸 숨기는 얼굴의 최장수가 봉투를 건넨다. 오소영은 “받지 않겠다”하고 최장수는 “단지 내가 미안해서”라고 말하며 봉투를 건네준다. 헤어지는 장면에서 횡단보도 건너편 오소영에게 최장수가 소리치는 장면은 아마도 다른 연기자가 했다면 실소가 나왔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찌 보면 간지러운 대사, “정말 나랑 결혼하면서부터 행복한 적이 없었어?”라는 그 외침 속에 그간 최장수가 속으로 웅크려 놓았던 수많은 감정들이 녹아들어 있었다. 고개를 가로젓는 오소영의 그 부정을 보기 위해 뛰고 또 뛰어야 하는 최장수의 모습에서 아마도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눈물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웃으면서 울거나, 울면서 웃거나 하는 연기가 시청자들에게 공감을 일으키는 것은 그것이 실제 인간관계에서의 진정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드러내놓고 그렇게 감정을 표현하지는 않겠지만 어떤 일을 겪었을 때 우리가 마음 속에 갖는 건 이러한 복합적인 것이지 단순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연기는 몸과 동작으로 그 감정들을 표현해내야 하는 것이기에, 실제로 웃으면서 울어야하는 것이다. 물론 그 장면을 통해 시청자들은 자신이 경험했던 유사한 상황에 공감하게 된다.

상황과 감정을 단선적으로 이끌어 가는 트렌디 드라마들은 이제 점점 설득력을 잃고 있다. 대신 사랑하면서도 미워하고, 분노하면서도 굴종하고, 군림하면서도 고뇌하는 복합적인 감정으로 진정성에 호소하는 드라마들은 설득력을 얻고 있다. ‘돌아와요 순애씨’에서 섹시하면서도 푼수 같고, 털털해 보이면서도 섬세한 연기를 펼치고 있는 박진희에 대한 극찬 역시 그 리얼함 이면에 ‘그 상황이라면 충분히 그랬을만한’ 진정성에 있었던 건 아닐까. ‘투명인간 최장수’라는 제목에서 풍기듯이 유오성이 가진 힘은 비극을 희극으로도 끌어안는, 그럼으로 해서 비극을 더 강력한 비극으로 만드는 데 있을 것이

<긴급출동 SOS24>가 경계해야 할 TV의 만용

폭력은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법은 너무 멀다. 그래서 이제 방송사가 나선다. 카메라는 이제 폭력이 은밀히 자행되고 있는 사생활 속으로 몰래 들어간다. 그 장면들은 충격적이다. 가족관계에서의 상식의 선은 넘어선 지 오래고, 그것은 상식을 넘었기에 비정상으로 다뤄진다. 21세기에도 불구하고 노예 할아버지, 노예청년, 노예 며느리... 왜 그리도 ‘노예들’은 많은지. 정신적인 문제를 가진 이들을 위해 ‘긴급출동 SOS24’는 이른바 솔루션 위원회를 결성해 각종 해결책을 제시해준다. 그런데 여기서 한번 짚어보아야 할 것이 있다. 과연 TV가 이렇듯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TV는 이 시대에 남은 마지막 정의의 기사인 것 같다. 심지어 이런 개개인의 문제들까지 일일이 방송이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는 점에서는 감동마저 온다. 프로그램을 보면서 수도 없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방송마저 없었다면 저들의 삶을 누가 알고 도와줄 수 있었을까.’ ‘저 모래알처럼 구분하기 힘든 그래서 더더욱 보이지 않는 음지의 삶을 비추는 카메라는 이 시대 TV가 해야할 진정한 일이 아닐까.’ 실제로 이 프로그램에서 그런 순기능이 있는 건 사실이다. 시청자들은 바로 그 순기능에 보기에도 괴로운 장면들을 참아내고 그 문제의 해결을 보면서, 안도하게 된다. 저런 프로그램이 있어 여전히 세상은 살만하다고.

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프로그램에 왜 논란이 일고 있을까. ‘아들의 벽’ 편에서 패륜아로 그려진 김재현(33·가명)씨는 왜 게시판에 SBS가 편파방송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는가. 혹 이 사건은 이 프로그램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주고 있는 건 아닐까.
사회적 문제를 잡아내는 프로그램은 ‘긴급출동 SOS24’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장수 프로그램으로 ‘추적60분’, ‘그것이 알고싶다’, ‘PD 수첩’ 등 역시 사회문제에 메스를 댄다. 그들 프로그램들 역시 간간이 잘못된 취재로 인해 곤욕을 겪기도 했다. 그런데 유독 ‘긴급출동 SOS24’에 그 화살이 집중되는 이유는 뭘까. 그건 아무래도 이 프로그램이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치부되어 온 사생활에 카메라를 들이댔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긴급 출동 SOS24’의 문제 접근 방식은 타 프로그램과 비교했을 때 더 직접적이다. 타 프로그램들은 개인의 문제보다는 거기서 도출되는 사회적 의미 또는 문제를 다룬다. 따라서 사회적 문제를 상정하고 다양한 사람들의 문제들을 취재해 문제의 양면을 때로는 긍정적으로 때로는 부정적으로 보여준다. 똑같은 충격적인 장면이 있다 해도 어느 정도 균형점을 찾으려 하는 노력(실제로 그것이 성공하는 지는 별개의 문제다)이 보인다. 하지만 ‘긴급 출동 SOS24’는 바로 개인의 문제로 접근한다. 그것을 통해 사회적 문제를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쪽을 선택한다. 그러다 보니 방안에 CCTV가 설치되고 마치 몰래카메라 같은 선정적인 폭력의 장면들이 고스란히 방영된다. 카메라는 놀라울 정도로 어느 한 방향성을 갖고 접근한다. 거기 등장하는 문제는 악으로서 그려진다. 그것은 절대악이기에 균형 운운하는 잣대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그런데 TV의 이런 방향성 있는(?) 방송에는 반드시 선의의 피해자가 생기게 마련이다. 특히 이 프로그램은 개인의 사생활을 파고든다는 점에서 만일의 사태가 가져올 파장은 더욱 커진다. 그 위험성은 방송이 가진 편집과 구성에 있다. 방송은 똑같은 내용을 다루더라도 편집과 구성에 따라 그 논지가 180도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상황을 호도할 수 있는 위험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방영된 내용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방송은 균형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또한 TV라는 매체가 가진 일 방향성으로 인해 한 개인에게는 또 다른 폭력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죽어야만 죄를 씻을 수 있는 사형수라고 하더라도 변호의 권리는 주어진다. 하지만 지금껏 이 프로그램이 다룬 수많은 가해자들은 아무런 말이 없다. 그들은 대부분 어떤 주장을 펼만한 능력이 없는 알코올중독자, 정신질환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희생자라고 주장하는 김재현(33·가명)씨는 달랐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는 들어보지도 않은 채 일방적으로 방송이 보여주고 싶은 대로 자신을 패륜아로 몰고 갔다고 주장한다. 김재현(33·가명)씨의 편파방송 주장은 그 진위여부를 떠나 이 프로그램이 침묵하는 가해자들에게 가해하는 폭력의 힘을 은연중에 보여주고 있다. 해결책으로 제시된 방송에 노출되는 그 순간부터 사생활은 파괴되는 것이다. 그간 잘못한 게 있으니 당연히 이 정도 폭력은 정당화되는 것 아니냐는 투의 방송편집은 폭력을 근절하겠다는 애초의 기획의도와도 상반되는 것이다.

방송이 해야될 역할은 문제제기가 되어야지 섣부른 결정과 해결책 제시가 돼서는 안 된다. 방송은 양면의 칼날과 같아서,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줄 때, 다른 한쪽의 그림자가 생기게 마련이다. 또한 방송은 수많은 개인들의 문제를 일일이 해결해줄 수 없다. 그 중 뽑혀진 몇몇 개인들만 수혜를 입을 뿐이다(그게 진정한 수혜인지는 모르는 일이며 받고 싶지 않은 것을 받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폭력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개인의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이 프로그램의 거창한 기획의도가 말하는 것처럼 실질적인 문제해결을 해주지는 않는다. 아들이 아버지를 폭행하고, 장애인을 노예처럼 부리고, 동생을 오빠가 앵벌이시키는 이러한 현상은 정상적인 사회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해놓으면 얻어질 수 있는 건, 마치 문제가 해결된 것 같은 착각뿐이다. 방송은 개인이 아닌 사회적인 시각으로 문제제기를 하고 그 해결은 정부가 떠 안는 것이 진정한 해결책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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