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은지심의 드라마, ‘내 사랑 못난이’

‘내 사랑 못난이’에서 신동주(박상민 분)는 잠깐동안의 인연을 맺고 헤어진(쫓아냈다는 말이 맞겠다) 진차연(김지영 분)이 자꾸 신경 쓰인다. 지지리 궁상으로 살아가는 그녀를 차마 무시하지 못하고  “넌 평생 그렇게 남 뒷바라지나 하며 살거다”라고 독설을 퍼붓는다. 그건 아직 관심이 있다는 얘기다.

신동주의 동생, 신동현(경준 분)은 레지던트다. 그는 경계성 인격장애를 겪고 있는 최은우(박다안 분)에 자꾸 신경이 쓰인다. 그녀의 병은 전부가 아니면 오히려 고통만을 겪을 뿐이라는 걸 잘 아는 신동현은, 그녀와 헤어지려 하지만 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그녀를 어쩌지 못한다.

사랑 없이 신동주와 결혼했다 이혼해 엔터테인먼트 사장으로 변신한 정승혜(왕빛나 분). 그녀는 스캔들을 일으키고 결국 이혼을 하게 만든 장본인인 진차연을 미워해야 할 것이지만 왠지 그녀에게 자꾸 신경이 쓰인다. 도저히 되지도 않는 진차연을 가수로 만들려한다. 그녀는 진차연을 저 가난과 불행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내고픈 욕구를 어쩔 수 없다.

자꾸 신경이 쓰이는 드라마
그들은 어찌 보면 전혀 관계가 없는(혹은 없어진) 이들에게 왜 그리도 신경을 쓰는 걸까. 물론 여기서 “신경이 쓰인다”는 말은 “관심 있다”, “사랑한다”는 말의 우회적 표현, 요즘식으로 하면 쿨한 표현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사랑인가. 물론 이 드라마는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듯이 사랑얘기임에 틀림없다. 잘 나가는 남자와 지지리 복도 없는 아줌마의 사랑, 로맨스, 환타지는 이 드라마의 주된 골격이다. 그것은 금요드라마의 전통과 잘 맞닿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단지 이 드라마가 갖는 힘을 사랑타령으로만 볼 수 있을까. 과거의 여타 금요드라마들처럼 자극적인 상황이나 불륜 코드가 나오는 것도 아닌데, 30대 이상 아줌마 시청자들은 물론이고 젊은층까지 끌어 모으는 이 드라마 속에는 혹시 아줌마의 사랑, 그 이상의 어떤 것이 있는 건 아닐까. 그저 그런 사랑얘기일거야 하면서도 시청자들을 자꾸 신경 쓰이게 만드는 이 드라마의 진짜 힘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연애드라마치고는 수상한 구조
이 드라마는 먼저 잘난 이들과 못난이들을 나누어놓는다. 잘난 이들의 대표주자가 신동주, 정승혜 같은 인물이고 못난이들의 대표주자가 진차연이다. 그들은 각자의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신동주와 진차연이 계약결혼을 하면서부터 이 전혀 다른 세상사람들의 인생은 하나둘 엮이게 된다.

이렇게 보면 신데렐라의 아줌마 버전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설정에 지나지 않는다. 이 드라마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살던 캐릭터들의 부딪침이다. 희귀병을 앓고 있는 아들 두리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한다’는 진차연으로 대표되는 ‘못난이들’의 현실은 각박하고 눈물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대척점에 있는 신동주, 정승혜처럼 부족한 것 없어 보이는 인물들이 그리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부유한 사회적으로 ‘잘난 이들’은 놀랍게도 가난한 ‘못난이들’의 행복에 끌린다.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자신들이 성공의 꼭대기에 올라오면서 잃었던 어떤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 대척점의 맨 앞을 신동주와 진차연이 차지하고 있다면 그 맨 뒤쪽은 진차연의 아들 두리와 신동주의 할머니, 조옥자(여운계 분)가 차지한다. 그 둘은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한 인물들이다. 어찌 보면 가장 약자로 보이는 이들은 그러나 드라마 상에서 주인공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동인으로 작용한다. 진차연을 비롯한 ‘못난이들’은 두리를 위해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는다. 때론 비굴하기도 하고 때론 굴욕을 당하면서도 그들은 두리를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것에 행복을 느낀다. 한편 신동주가 유일하게 애정을 쏟는 인물은 치매를 앓고 있는 조옥자다. 그는 결혼의 조건에서조차 상대가 조옥자를 위해 헌신할 인물인가를 먼저 살핀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조옥자가 다른 사람이 아닌 진차연만을 찾는다는 것이다. “진가년이 뭐가 그리 좋냐”는 신동주의 물음에 조옥자는 말한다. “그년에게서는 사람 냄새가 난다”고.

사람냄새 나는 드라마
이 할머니의 한 마디는 이 드라마의 구조를 빈부나 ‘잘난 이와 못난이’가 아닌 ‘사람 냄새 나는 이’와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누어놓는다. 신동주는 이제 알아차린다. 왜 자신이 자꾸 진차연이 신경 쓰이는지. 그것은 바로 그녀에게서 나는 사람냄새다. 그가 할머니에게 이끌리던 그 묘한 힘을 진차연에게서도 똑같이 느낀 것이다.

이 이야기는 비단 진차연과 신동주간의 얘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동생 신동현와 최은우의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신동현은 우리가 흔히 현실에서 보는 이성적인 인간의 전형을 보여준다. ‘한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전부가 될 수 있는가’하고 그는 의문을 갖는다. 반면 최은우는 물론 병으로 포장되어있지만, ‘이것저것 따지지 않는 전부의 사랑’을 하는 인물로 극단화되어 있다. 신동현은 이성이니 사랑이니 하는 허울에 갈팡질팡하고 있는 반면, 최은우는 온몸을 던져(해줄 수 있는 게 안보는 거라면 그거라도 해주겠다는 식의) 사랑을 해나간다. 병자이지만 우리에게 보다 인간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정승혜는 진차연과 그의 단짝 친구인 이호태를 만나면서 ‘행복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질문한다. 그녀는 진차연에게 어떤 외면할 수 없는 인간의 예의를 발견하는 한편, 이호태를 통해 자신의 삶이 허울뿐이었다는 것을 알게된다. ‘인간적인 삶과 행복’을 처음으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측은지심’의 드라마
작가는 아마도 양끝에 자리한 두 약자(두리와 조옥자)를 세워놓고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당신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드라마를 보면서 우리들은 막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보는 것 같은 안타까움과 불쌍한 마음을 갖게 된다. 아픈 사람을 보며 자신도 아파하는 것, 불쌍한 사람을 보면 도우려는 마음이 생기는 것, 즉 맹자가 말한 측은지심을 우리는 이 드라마를 통해 경험한다.

물론 이 드라마는 사회적 양극화의 문제를 구조적인 문제로 보지 않고 쉽게 개인적인 문제로 환원시키고는, 사랑이란 허울로 해결하려 한 혐의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하지만 드라마에서 그걸 다룬다면 시청률 제로에 도전하는 꼴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가 반짝반짝 빛나는 것은 허위의식으로 가득한 세상에 쓰러지지 않고 당당하게 맞장을 뜨는 진차연의 ‘인간적인 모습’이 소중하게 보여지기 때문이다.

변화하고 있는 우리네 드라마들

최근 미국 시즌드라마들의 영향은 우리네 드라마에 양으로 음으로 많은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젊은 시청자들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시즌드라마를 접하면서 ‘신파’와 ‘트렌디’로 일관하는 우리네 드라마를 ‘구리다’며 외면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종영한 ‘발칙한 여자들’은 아쉬움도 많이 남는 드라마였으나 그만큼 새로운 면모들과 가능성을 많이 보여준 드라마였다.

‘뒷바라지로 10여 년을 헌신했지만 헌신짝 버리듯 다른 여자에게 가버린 전 남편에 대한 복수극’. 몇 년 전만 해도 이런 소재라면 끔찍한 공포, 처절한 복수극 아니면 최루성 신파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 괴상한 드라마는 ‘깜찍 발랄한 코믹’에 ‘휴먼 드라마’적인 속성까지 갖춘 어떤 새로움을 보여주었다. 또한 우리의 선입관에 박혀있던 아줌마(생활력의 상징 혹은 가부장제의 희생자)의 이미지를 깨준 드라마이기도 했다.

신파 소재로 신파 깨기
‘발칙한 여자들’의 구도는 신파다. ‘뒷바라지 10년에 버려진 아내’, ‘홀로 아이를 키우며 치과의사가 된 여자’, ‘그녀의 복수극’. 이것은 과거 드라마에서는 신파의 공식으로 등장하던 소재들이었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송미주의 10년 고통의 삶이 구체적으로 보여지지 않는다. 그저 그렇게 살아왔다고 얘기할 뿐이다.

드라마는 대신 10년 후 성공해서 돌아온 송미주에서부터 시작한다. 복수의 일념으로 성공했다지만 성공한 그녀에게서는 여유가 느껴진다. 그녀가 아이를 키워내고 그녀의 목표였던 치과의사가 된 순간, 사실 그녀의 복수는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성공이 복수’라고 하지 않던가. 이러자 신파가 될 소재는 가벼운 날개를 달기 시작한다. 복수는 귀엽고 심지어는 너무나 가벼워 코믹시트콤 같은 느낌마저 준다.

아줌마로 아줌마 깨기
깜찍 발랄한 전개가 가능한 기본전제는 송미주라는 아줌마의 캐릭터 때문이다. 다 큰 아들을 둔 아줌마이지만 그녀에게서 우리가 과거 아줌마라면 선입견으로 갖고 있던 이미지는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만의 일을 갖고 있고 사랑에 있어서도 당당하다. 나이가 들고 결혼을 했고 이혼까지 했다는 사실은 과거의 아줌마들의 이미지에서는 부정적인 면이 더 부각되었지만 그녀에게 있어 이것들은 ‘풍부한 인생경험’이 된다.

루키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은 그녀가 스스로 이러한 자신의 장점들을 발산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부분에 있어서 아줌마들의 환타지를 자극하는 요소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과거의 아줌마 이미지를 깨주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이제 현대여성들은 자신의 일과 삶에 있어서 결혼을 했거나 미혼이거나에 상관없이 자신을 스스럼없이 펼쳐 보인다.

시즌드라마로서의 가능성
이러한 소재와 캐릭터의 참신성은 우리 식의 시즌드라마에 대한 가능성을 생각하게 한다. 최근 미국 시즌드라마들은 우리네 드라마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케이블 채널들에 의해 소개된 미국 시즌드라마들은 이제 ‘미드족(미국드라마에 열광하는 사람들)’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고 있다.

시즌드라마들은 많은 시청자들에게 새로운 드라마의 맛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것이 현재 우리네 트렌디 드라마들의 퇴조와도 연관을 갖고 있는 게 사실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 완성도 높은 드라마에 길들여지면, ‘한류’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그 언저리에서 과거의 영광만을 논하는 우리의 트렌디 드라마는 ‘너무 뻔하고 재미없다’는 것이다. ‘발칙한 여자들’의 시즌드라마로서의 가능성은 바로 그런 트렌디 드라마의 뻔하고 재미없는 설정을 깬 그 지점에 있다.

그래도 남는 아쉬운 점들
하지만 이 드라마에도 역시 아쉬운 점들이 많다. 그것은 고상미, 양다림, 양지환, 백억년 같은 다양한 인물들이 포진해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그 중심 축이 송미주와 그 주변인물들에 집중되었던 점이다. 이것은 (한 명의 주인공으로 집중되는) 과거 드라마 구도의 힘이 여전히 지금에도 미치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또한 여성들의 캐릭터에 비해 남성 캐릭터들이 너무 과장되게 그려져 있다는 점도 옥에 티다. 이 드라마의 남성상은 기혼자와 미혼자가 나누어진다. 어릴수록 더 성숙된 인물로 그려져 심지어는 준이가 가장 사려 깊고 이해심 많은(그는 결국 모두를 용서한다) 인물처럼 보인다. 또한 마지막에 가서 ‘남편의 참회’와 ‘그것에 대한 미주의 용서’라는 해피엔딩의 선택 역시 과거의 구도를 그대로 따라가는 느낌이다.

이것은 모두 매회의 에피소드가 하나씩 끝나면서도 계속 연결성을 갖는 시즌 드라마와 ‘다음 회에 계속’으로 이어지는 우리 식의 드라마 구도 사이에 이 드라마가 서 있었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이다. 좀 실험적일 수 있지만 애초부터 시즌드라마 형식을 취했다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가 여전히 참신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제 막 변화하고 있는 우리네 드라마들의 신호탄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네 드라마들은 이제 좀더 참신하고 좀더 새로우며 좀더 파격적인 그 어떤 것을 요구한다.

서민적이고 친근한 캐릭터, 시대의 요구

요즘 고현정의 변신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쌍소리는 물론이고 망가지는 연기에서부터 거친 대사를 천연덕스럽게 소화해내는 새로운 면모들까지 고현정은 싹 달라졌다. 과거 우리의 머릿속에 남아있던 우아하고, 청순했던 이미지는 보이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고현정 스스로 그런 이미지를 깨려고 작정한 듯 하다.

‘봄날’ 이후 1년여의 장고 끝에 선택한 홍상수 감독의 ‘해변의 여인’ 역시 무엇보다 화제가 된 것은 고현정의 변신이다. 영화 속에서 고현정은 그간의 공백기간을 단 몇 마디의 꾸미지 않은 말과 거침없는 행동으로 채워버렸다. “차가 귀엽네요”라는 말에 “똥차예요”라고 답변하고,  “키가 크다”는 말에 “잘라버리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그녀에게서는 신선한 충격마저 느껴졌다. 기자시사회에서 그녀의 변신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그런 건 일상용어 아니냐”고 되받아 칠 정도로 그녀는 자신의 맨 얼굴을 드러내고 싶어했다. 이러한 고현정의 변신은 ‘해변의 여인’이 주는 영화적 재미에서 상당부분을 차지하면서 동시에 영화가 전하려는 메시지에 일조했다. 홍상수 감독은 본인이 이 영화를 통해 전달하려고 했던 ‘상투적인 이미지에 대한 전복’을 고현정이라는 연기자가 가진 이미지의 파괴를 통해서도 보여주었다.

‘해변의 여인’의 이미지가 채 가시기도 전에, 그녀는 ‘여우야 뭐하니’로 다시 맨 얼굴을 내밀었다. 영화 속의 털털하고 화장기 없는 고현정이 이제는 TV로 들어온 것이다. 드라마 속에서의 고현정은 ‘해변의 여인’과 마찬가지의 파격을 보여주었다(아마도 영화를 보지 않았던 시청자라면 그 느낌은 배가 됐을 것이다). 그녀의 이러한 연속적인 행보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보인다. ‘해변의 여인’에서 작품에 딱 맞는 연기자가 고현정이라는 인물이었듯이, 고현정에게도 ‘해변의 여인’은 자신의 이미지 변신에 딱 어울리는 작품이 분명하다.

지금 고현정이 하고 있는 작업은 귀족적이고 우아하며 청순한 과거의 이미지에서 보다 서민적인 이미지로의 귀환이다. 그것은 고현정 개인에게 의미 있는 일이다. 10년 전 정상의 자리에서 은퇴하고, 재벌가 며느리로의 변신한 그녀는 언론과의 끊임없는 숨바꼭질 끝에 결국 이혼하고 본업으로 돌아왔다. 그 10년 간 연기자가 아닌 고현정 개인으로서의 이미지는 서민과는 거리가 먼 상류층의 그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그녀가 만든 것이 아니다. 그녀를 보는 대중들의 막연한 상상으로부터 생긴 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연기라는 친정으로 귀환하면서 먼저 이러한 자신의 이미지부터 부수기로 작정한 듯 하다.

이러한 고현정의 변신, 즉 청순하고 우아한 이미지의 파괴는 극중 캐릭터의 진정성이 잘 살아있는 작품 하에서만 가능하다. 다행히도 홍상수 감독의 ‘해변의 여인’은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공감이 가는 작품 속 이야기에서 우리는 고현정의 파격을 ‘리얼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것은 드라마 ‘여우야 뭐하니’에서도 마찬가지다. 과거 ‘내 이름은 김삼순’이란 드라마에서 파티쉐라는 익숙하지 않은 직업을 리얼하게 드러냈듯이 ‘여우야 뭐하니’에서도 곳곳에 이런 리얼함이 엿보인다(잡지사, 산부인과 등등). ‘성담론’이라는 자칫 오해될 소지가 많은 소재가 오히려 당당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리얼함에서 오는 진정성’이 확보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고현정이 거침없이 얘기하는 속내는 마치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를 보는 듯 하다. 성 칼럼니스트로서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가 당당하고 적극적이면서도 귀엽고 발랄한 현대미국여성들이 요구하는 이미지를 잘 소화해냈듯이, 고현정이 연기하는 고병희는 우리 식의 적극적인 여성상을 통해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보다 서민적이고 친근한 캐릭터는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스타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과거 ‘선망’의 대상이었던 스타는 이제 ‘질투’의 대상이 될 정도로 시청자와 수평적인 관계를 요구한다. ‘비호감 연예인들의 인기’와 ‘연예인 생얼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바로 스타와 시청자간의 새로운 관계를 말해주는 징후들이다. 이것은 ‘솔직함’ 혹은 ‘털털함’에 대한 시청자들의 요구와 연예인 스스로의 ‘자신감’이 잘 맞아떨어진 결과이다. 시청자들은 더 이상 연예인에게 ‘인형 같은 카리스마 혹은 신비감’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바로 내 주변에서 살아있으면서도 여전히 아름다운 인간’을 요구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고현정의 서민으로의 귀환은 당연하고도 잘 된 선택임에 분명하다. 그녀는 한없이 망가질 것이나 여전히 귀엽고 바로 내 옆집에 사는 여자 같으면서도 여전히 선망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슬픈 이유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하 우행시)’은 세 번 자살을 시도한 대학교수 유정과 살인죄를 저지른 사형수 윤수의 만남을 다룬다. 학생시절 용서할 수 없는 일을 당한 유정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안고 살아간다. 그녀는 분노를 밖이 아닌 안으로 터뜨리는 중이다. 스스로를 파괴하는 것이다. 한편 용서될 수 없는 일을 저지른 윤수 또한 빨리 사형이 집행되기만을 기다린다. 한쪽은 피해자고 다른 한쪽은 가해자다. 그런데 그 둘은 모두 소통의 창을 닫고 죽기만을 바라고 있다. 우행시는 그런 둘이 만나 닫았던 창을 열고 소통하면서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이야기다. 스타일은 휴먼드라마이고 진행은 전형적인 멜로 신파를 따라간다. 관습적인 장면들과 상투적인 사건전개가 대부분이지만 ‘울고 싶어’ 극장을 찾은 관객이라면 100% 이상의 만족을 주는 영화다. 그런데 이 한 영화 속에 여러 층위의 눈물이 있어 주목을 끈다.

첫 번째 눈물 - 멜로
‘우행시’의 설정이 사회극이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이 영화는 그저 남녀가 만나는 것이 아니고, 사형수 남자와 자살을 꿈꾸는 여자가 만나는 것이다. 그 어느 한 캐릭터만을 선택해도 하나씩의 사회극이 탄생할 정도의 인물들이다. 그런데 영화는 중반을 넘어가면서부터 사회극을 포기하고 멜로 라인을 따라간다. 물론 그 멜로에는 인간에 대한 사랑, 연민 같은 요소가 포함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사형대에서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사랑을 얘기하는 그 장면들이 이 영화가 멜로와 사회극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했는가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의 눈물샘이 마르지 않았던 것은 바로 그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이었을까. 강동원이라는 존재감 있는 배우가 “사는 게 지옥 같았는데 이젠 살고싶어졌습니다”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눈물이 나왔던가. 아니면 사형대에서 “유정씨 내 얼굴 까먹으면 안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부분이었던가. 굳이 사형대 시퀀스를 일일이 보여준 것은 ‘사형제에 대한 부당성’ 혹은 ‘인간을 죽이는 사회의 시스템에 대한 고발’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극적인 멜로를 위한 장치로서 사형대라는 공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것은 마치 불치병이라는 신파 멜로의 틀을 사형대라는 장치로 변용한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이 클라이막스에서의 눈물은 어딘지 깊은 울림이 없다.

두 번째 눈물 - 관습적 장면들
영화가 멜로에 무게중심을 두면서 좀더 사회적인 접근을 요하는 장면들은 관습적인 장면들로 채워졌다. 영화가 중요하게 말하는 것은 두 사람간의 미묘한 감정의 변화이지 그들이 왜 그렇게 됐는가 하는 사회적인 고민이 아니다. 그들의 대화 속에 소개되는 장면들은 너무나 상투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다. 우리는 굳이 그 상세한 전후사정을 몰라도 눈먼 동생을 데리고 추운 거리를 떠도는 어린 윤수의 모습, 그 자체만으로 슬픔을 느낀다. 아니 눈먼 동생의 때에 절은 무표정한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 슬픔은 영화가 준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관습적으로 가졌던 슬픔을 영화는 슬쩍 가져온 것뿐이다. 폭력 아버지에 매맞는 엄마로 대변되는 윤수 형제가 처한 상황 역시 관습적이다. 앵벌이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도 그렇고,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고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는 장면 또한 그렇다. 이러한 눈물은 영화 자체의 힘이라기보다는 영화를 보는 관객의 환기능력, 혹은 이 불합리한 사회가 준 눈물이다. 사회적 문제에서 끌어온 눈물이지만 이 영화는 거기에 대해 어떤 문제제기까지는 하지 못한다. 게다가 ‘가난한 삶이 범죄를 불렀다’는 가난과 범죄의 운명적 도식을 단순화해놓는다.

세 번째 눈물 - 인간에 대한 용서
멜로도 관습적인 장면들도 깊은 울림을 주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가슴을 먹먹하게 한 것은 무엇일까. 무언가 다른 눈물이 있지는 않았을까. 이 영화가 상투적이고 신파적인 장면들을 계속 내보내는 중간, 단 한 시퀀스가 시선을 끈다. 그것은 바로 윤수가 돌발적으로 살해한 파출부의 어머니인 박 할머니(김지영 분)에 관한 이야기이다. 자신의 딸을 살해한 살인범을 고통스러워하면서 용서하는 이 어머니의 장면은 가장 리얼하면서도 독창적이며 영화의 주제에 단숨에 접근하는 힘이 있다. 인간적인 조건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상황을 뛰어넘는, 모성애적인 용서는 이 영화가 진정으로 말하려했던 것이다. “내가 널 용서할 수 있을 때까지 오마... 제발 살아있어라”라는 박 할머니의 말 한 마디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멜로 신파를 선택했지만 그것이 아쉬운 것은 이 영화가 ‘인간에 대한 용서’라는 좀더 깊은 감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본래 하려던 이야기는 바로 ‘용서’였다. 박 할머니의 이야기는 멜로에 가려진 몇몇 시퀀스를 떠올리게 한다. 유정이 윤수에게 자신이 학생시절 당했던 이야기를 했을 때, 윤수가 “미안하다” 고 말하는 장면은 용서와 사랑이 남녀관계를 넘어서 모든 인간의 차원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인다. 박 할머니의 이야기는 좀더 영화 뒤쪽으로 밀어둘 필요가 있었다. 영화 중반부에 이미 하려는 이야기를 다한 영화는 이후부터 멜로 라인을 향해 달려간다.

세 종류의 눈물이 말해주는 것
그것이 멜로이든, 관습적 장면이든, 용서든 간에 ‘우행시’는 분명히 사회의 불합리함을 꼬집는다. 결국 이 영화 속에서 우리는 사회가 한 사람에게 어떻게 고통을 주고 그를 죽이는가를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윤수를 고통스럽게 했던 아무런 안전망 조차 없는 사회에 대한 질타와 유정을 세 번 자살 시도하게 만든 가해자에 대한 처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그 사회적 문제를 개인적 차원으로 해결하려 한다. 그게 사랑이던 종교이던 용서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 작은 존재들이 서로의 상처를 핥으며 위로하는 장면들은 슬프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라는 역설적 제목에는 사회의 책임의식에 대한 비판과 체념이 모두 들어 있다. 사회는 그들을 행복하게 하지 않지만 그들은 그런 사회에 보복하듯이 (그래도)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잊지 말아야할 건 그 “행복하다”고 말하는 많은 그들의 눈에 눈물이 흐르고 있으며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www.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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