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와 월드컵

요즘 월드컵 특수로 TV는 이른바 월드컵과 드라마의 양극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TV들이 온통 월드컵에 올인하는 상황에서 드라마들은 슬금슬금 옆으로 빠지거나, 빼내진다. 2002년의 월드컵이라는 ‘각본 없는 드라마’가 이룩한 성과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4년이란 긴 시간을 거친 지금에까지 그 맹위를 발휘하고 있다.

2002년에 월드컵 4강 신화에 비견되는 문화적 사건이 있었는데 그 주역은 바로 우리네 드라마들이었다. <겨울연가>를 필두로 당시 일본에 수출된 드라마는 1300편이 넘으며 수출액만도 100만 달러를 넘어섰다. 우리네 드라마들은 한류바람을 일으키며 일본으로 중국으로 수출됐다.

그런데 작금의 드라마들을 보면 어떤가. 모든 드라마들을 천편일률적으로 재단할 수는 없겠지만 늘 비슷비슷한 설정과 스토리의 드라마들이 시청자들을 식상하게 만들고 있다. 조폭 아니면 멜로라는 소재의 획일화, 비비꼬인 인물관계, 한 꺼풀 벗겨내면 도저히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설정, TV방송에는 어울리지 않는 선정적인 장면들, 툭하면 남매, 툭하면 혈연인 코드 중심의 드라마들이 매일 전파를 타고 있다. 일단 제목과 첫 회를 보면 전체를 대충 감 잡을 수 있는 이런 드라마로는 더 이상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잡아놓지 못한다. 이것이 ‘각본 없는 드라마’ 월드컵에서 드라마가 배워야할 점이다.

각본 없는 드라마 vs 드러나는 각본
우리가 흔히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말하지만 월드컵의 재미는 그 의외성에 있다. 전력으로는 누가 봐도 승산 없는 경기에서 이변이 속출하는 것. 그래서 공은 둥글며 어디로 튈지 모른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 드라마들은 어떤 상황 전개를 함에 있어서 의도가 쉽게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예민한 시청자들은 지금 이 장면으로 인해 잠시 후엔 이런 전개가 될 것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한다. 심지어는 앞의 몇몇 장면으로 결말까지 알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그것을 실제로 시청하는 순간 극은 긴장감을 잃고 이른바 김이 빠지게 된다.

예를 들면 ‘소문난 칠공주’는 그 제목에서부터 벌써 이 드라마의 내용과 결말 주제까지를 모두 도출해낼 수 있다. ‘딸 부잣집 이야기’라는 전통적인 드라마 구조를 그대로 가져온 탓이다. 이런 드라마에는 늘 등장하는 것이 가부장적인 아버지고 핍박받는 가족들이다. 이런 트렌디한 방식을 시청자들이 좋아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건 이미 한번 사용되었을 때 신선함을 잃은 방식이다.

최근 이런 드라마들이 꽤 많은 이유는 아마도 이제 드라마를 하나의 작품으로 보고 창작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내려는 노력보다는, 상업적인 성공을 목적으로 자극적이고 트렌디한 몇몇 설정들을 끌어다 이야기를 붙여 기획한 작품들이 많기 때문인 것 같다. 아무래도 선 기획된 작품에 살을 붙이는 작업에는 잘 쓰이는 드라마 문법에 먼저 손이 가기 때문이다.

스스로 움직이게 하는 감독 vs 작가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드라마
경기가 다 끝나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누가 골을 넣을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건 시청자도 마찬가지고, 경기를 뛰는 선수들도 마찬가지며, 그들을 조련한 코치나, 위치를 지정해준 감독도 모른다. 작가라는 감독은 캐릭터들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힘에 귀기울여야 하고, 필요할 경우엔 방향성을 지정해줘야 하지만, 조종해서는 안 된다. 그들을 조종하는 순간, 그들은 자율성을 잃고 창의적인 게임을 하지 못하게 된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긴장감을 잃지 않는 드라마 진행을 위해 먼저 필요한 것은 작가가 극중 캐릭터들에게 겸손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때로 어떤 드라마는 작가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실제로 작가는 자신이 만들어내는 창작의 공간에서는 신의 권위를 부여받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작가가 모든 걸 조정하기 시작하면 살아있던 캐릭터는 죽고 인형들만 난무하는 드라마가 나온다. 대표적인 것이 요즘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라는 오명을 얻고 있는 ‘하늘이시여’나 ‘소문난 칠공주’다. 최근 ‘하늘이시여’에서 벌어진 공포의 캐릭터 사망 해프닝(소피아의 급사)은 작가가 신이라는 걸 명백히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것은 작가가 자극적인 설정을 위해 캐릭터 몇 죽이는 것은 예사로도 할 수 있다는 섬뜩한 현실을 보여준 것은 아닐까. ‘소문난 칠공주’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 현실에서는 벌어지기 어려운(예를 들면 임신한 딸을 질질 끌고 다니는 식의)사건들이 벌어지는 것은 작가에 따라 캐릭터들은 어떤 상황도 감수해야만 한다는 걸 말하는 것 같아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이렇게 작가의 의도가 과잉된 드라마는 늘 문제와 논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것은 작품이라기보다는 지독한 상업주의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그 논란마저도 마케팅의 한 방법으로 활용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우리는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라는 괴물을 만들었다. 작가라는 감독은 선수(캐릭터)들 독려하고 방향성을 줘서 스스로 살아 움직이도록 해야 한다. 선수가 살아있지 않은 드라마는 더 이상 드라마로서의 가치를 잃는다.

스피디한 전개 vs 연장방송
현대축구는 스피디한 전개의 공격축구가 대세라고 한다. 월드컵이 재미있는 것은 그 박진감 넘치는 경기에 있다. 만일 소극적이고 수비 중심의 경기를 양 팀이 한다면 그만큼 지루한 경기도 없을 것이다. 초반에 점수를 따냈다고 수비만 하고 있다면 오히려 역전의 빌미를 줄 수도 있고, 그렇게 이겼다고 하더라도 그건 감독으로서 선수로서 그리 떳떳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드라마에 있어서 박진감 넘치는 전개는 이제 대부분 드라마의 정석이다. 따라서 첫 회를 보면 그 속도감이 얼마나 빠르고 그 빠른 시간 내에 앞으로 전개될 드라마의 기대감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성공을 예감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어느 정도 진행되면서 드라마 자체의 끌림보다는 관성에 힘입어 흘러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여기에 만일 초반의 승기를 잡은 경우, 작가나 PD나 방송사는 ‘슬슬 경기를 하면서 점수나 지키는’ 연장방송의 유혹을 받게된다. 축구경기는 전후반 90분을 해야지 재미있다고 한없이 늘린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 것인가. 이때부터 드라마의 박진감은 사라진다. 결론이 궁금해 관성적으로 보는 시청자들에게 30회에 나와야 할 새로운 국면을 40회로 미뤄 시청률을 유지하는 데만 주력하는 것이다.

이렇게되면 이미 작가나 PD는 스스로 자기가 만든 작품을 죽인 셈이 된다. 마음대로 늘리고 줄이면서 어떻게 작품의 생명을 살릴 수 있을까. 어쩌면 애초부터 자신의 작품을 생명이 없는 피조물, 시청률에 앵벌이하는 인형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새로운 기량의 발굴 vs 잘생긴 얼굴의 활용
축구장안에서 종횡무진 뛰어다니는 박지성은 아름답다. 과감하게 상대편 진영을 파고들고 때로는 발에 걸려 넘어지고 때로는 슛으로 골을 선사하는 그는 아름답다. 하지만 축구장이 아닌 다른 곳이라면 어떨까.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진 얼굴이라 광고 속에서 그는 이제 자연스러워졌지만 처음 그의 광고 장면들은 너무나 어색하게만 보였다. 광고나 TV에 어울리는 얼굴은 아니기 때문이다. 축구선수는 축구를 잘하면 된다. 그것이 아름다운 축구선수다.

요즘 드라마에서는 ‘연기자 = 선남선녀’라는 등식이 많이 깨진 게 사실이다. 그것은 아마도 시대가 ‘잘 생긴 얼굴’보다는 ‘개성 있는 얼굴’쪽에 더 손을 들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몇몇 드라마에서는 연기의 기량이 좀체 나아지지 않는 잘 생긴 얼굴들을 보게 된다.

‘스마일 어게인’을 보다보면 이동건과 김희선 사이에 연기의 간극이 있다는 걸 감지하게 된다. 둘 다 ‘선남선녀’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연기자들이지만 이동건은 마치 무너지기 위해 총력을 다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반면, 김희선은 드라마 캐릭터 오단희에 아직 몰입되지 않은 것 같다. 우리가 보고싶은 건 축구장에서 넘어지고 깨지면서 뛰어다니는 박지성이지, 광고 속에서 폼잡는 박지성이 아니다.

다양한 캐릭터로 변신해야만 하는 연기자로서는 ‘잘 생긴 것’이 오히려 부담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걸 뛰어넘기 위해 부단히도 무너지고 자신을 깨는 연기를 선보이려 노력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기량을 가진 얼굴이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주몽’의 허준호와 송일국이다. ‘주몽’의 인기는 그 요인이 여러 가지가 되겠지만 그 중 연기자들의 몫이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허셀크로라는 닉네임을 얻을 정도로 카리스마 연기를 펼친 허준호, 그 카리스마 속에서도 오히려 더 빛나는 송일국은 이 드라마 초반부의 힘을 실어주었다. 경기 초반의 이런 활기는 전체 경기를 압도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이다.

과거 같으면 허준호같은 카리스마가 나오면 다른 연기자는 눈에 띄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송일국의 연기는 그 속에서도 살아났다. 허준호가 부러지지 않는 단단한 소나무였다면 송일국은 유연하게 휘면서도 카리스마를 잃지 않는 대나무 같은 차별점을 연기했기 때문이다. 허준호가 신적인 영웅이라면 송일국은 인간미 넘치는 영웅을 연기했기 때문이다. 이 두 기량이 잘 어우러져 8회만에 시청률 30%라는 골을 선사하게 된 것이다.

우리 식의 축구 vs U턴 하는 한류
힘이 넘치는 유럽축구와 화려한 개인기의 남미축구가 있었지만 2002년 월드컵을 치르기 전까지 우리는 우리 식의 축구라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히딩크라는 감독을 만나 우리는 우리 식의 축구를 갖게 됐다. 그것은 강인한 체력과 미드필드의 압박, 그리고 조직력이다. 그런데 이 우리 식의 축구는 이제 현대 축구의 흐름이 되었다. 그것은 히딩크라는 명장이 미리 현대 축구의 흐름을 읽고 거기에 우리의 장점을 접목해 그 성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우리 식의 드라마, 대중문화, 우리네 한류는 최근 역류하거나 혹은 U턴 중인 것 같다. 일류(日流)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많은 일본 원작들이 드라마화 되었거나 준비중이다. 대표적인 것이 ‘연애시대’와 ‘101번째 프로포즈’이다. 물론 원작은 일본에서 들어온 것이지만 드라마들은 상당한 해석을 통해 우리 것으로 바뀌었고 작품의 질도 높다. 그래서 이 드라마들은 다시 일본으로 역수출될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작품을 제작해서 유통하는 한 방법으로 잘못된 것은 없다. 하지만 이러한 성공사례가 하나의 전례로 흐름을 타는 것은 좀 문제가 있다. 여기저기 쉽게 원작을 사다가 각색해 만들어 되팔게 되다가는 자칫 원작 없는 명품 리메이크만 넘쳐나는 기형적인 상황이 도래할 수도 있다. 외국 것을 가져다 드라마로 성공시키면 드라마로서는 수입을 얻을 수 있겠지만 결국 그 원작을 돕는 꼴밖에는 안 된다.

문제는 우리 것에 대한 자신감이다. 말로만 떠드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네 정서를 보여줄 수 있는 우리 소재들을 찾아내고 그걸 전 세계가 공감할 수 있는 코드로 풀어내야 한다. 물론 과감한 작품과 작가의 발굴이 선행되어야 우리 것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을 끌어 모을 수 있는 다양한 등용문의 통로가 있어야 한다. 한편으로 이것은 드라마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드라마 이전에 소설과 만화, 연극 등 많은 원작이 나올 수 있는 풍토가 만들어져야 우리 드라마는 충분한 기초체력을 바탕으로 특유의 저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축구가 가능성과 저력을 보여줬듯이 우리 드라마는 이미 그 가능성을 한류로서 확인한 바 있다. 히딩크가 떠난 후 잠시 주춤했던 우리 축구는 다시 아드보카트라는 명장의 조련으로 다시 깨어나고 있다. 침체된 드라마를 되살릴 드라마의 아드보카트는 어디에 있는 걸까. 만일 그런 문화 콘텐츠가 등장한다면 한류의 붉은 물결이 ‘아시아의 호랑이’를 넘어 ‘문화 강국, 한국’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서울 1945>가 보여주는 이념의 문제

최근 KBS 드라마 ‘서울 1945’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재미있는 건 드라마 논쟁이라고 하면 드라마의 내용이나 출연자 등에 대한 것이 대부분인데 반해, 이 논쟁은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의 시각이 부딪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유족과 보수단체에서 제기했다. 극중 인물인 박창주의 대사를 통해 여운형 암살사건이 방영되면서 마치 그 배후에 이승만, 장택상이 연루됐을 거라고 암시된 부분, 친일파의 딸인 문석경이 이승만 전 대통령의 거처인 돈암장에 드나들었다는 설정, 이승만 전 대통령이 미군정과 밀착되었다고 묘사된 점, 정판사 위폐 사건 당시, “이승만은 친일파 돈을 맘대로 쓰는데 우리가 위폐 만드는 게 무슨 죄냐”는 대사 등에 대해 유족과 관련단체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그러자 보수언론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이런 드라마를 방영한 KBS를 난타하기 시작했다. 비판은 일파만파 도를 넘어서면서 ‘대한민국 건국의 원훈(元勳)들을 중상 모함하고 있다’, ‘마치 북한에서 대한민국을 헐뜯기 위해 제작한 드라마 같았다’ 같은 이야기가 나오더니, 결국 조선일보는 ‘KBS 왜 이렇게 대한민국 건국 헐뜯나’라는 사설에서 이 드라마가 “건국주역을 헐뜯고 좌 편향적 시각으로 해방전후사를 왜곡하고 있다”면서 급기야는 KBS가 “대통령 탄핵 때 광적으로 방송한 정권 편향 경력이 있다”는 이야기까지 끄집어냈다.

제작진들의 입장은 확실하다. 이 드라마는 “이념드라마라기보다는 멜로드라마”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념드라마라는 것이 있는지 모르겠지만(과거 ‘배달의 기수’류의 반공드라마가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만일 이념드라마라고 해도 이 드라마를 꾸준히 보아온 필자로서는 도대체 이 드라마가 어떤 이념을 내세우고 있는가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좌익 편향이라고 하지만 그렇다면 보수언론들이 좌파의 대표격으로 몰아세우는 최운혁이라는 인물이 친일파의 딸인 문석경을 탈출시키는 얘기나, 문석경이 친일파인 아버지의 뜻과는 정반대로 최운혁을 찾아 러시아를 헤매던 얘기, 이승만 박사의 최 측근인 이동우가 최운혁의 탈출을 돕는 얘기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좌와 우(만일 그런 게 있다면)의 대결양상이라기보다는 이념 사이에 끼인 인물들이 겪는 시대의 고통과 사랑이 축이 아닐까. 드라마의 내용은 어떤 흐름 속에서 판단해야지 특정 부분만 떼어내 평하는 것은 자칫 부분으로 전체를 가리는 우를 범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가 소위 좌파적이라는 꼬리표를 달게된 것은 보수 언론의 덕이다. 실제로 이 드라마는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대부분의 드라마들에서는 보기 드문 시각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확실히 ‘서울 1945’는 과거라면 절대로 다루지 못했을 시각으로 당시의 상황을 그려내고 있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바대로라면 이승만 전 대통령은 위기에 처한 우리나라를 구해낸 민족지도자가 되어야 마땅한 일일 텐데, 이 드라마는 이승만이라는 인물을 그렇게 다루고 있지 않다. 드라마 속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은 민족을 생각하는 인물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입지를 지키는 것에 더 혈안이 되어있는 것 같다.

드라마 속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이 친일파라는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그의 주변으로 친일파를 포함해, 미군정이 모여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드라마가 이승만 전 대통령을 친일파로 매도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드라마 초기에는 미국에서 나라를 걱정하는 민족주의자 이승만 박사가 등장하는 것이 사실이며, 소극적인 몇몇 장면들로 그를 친일파로 몰아세우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봐도 이승만 전 대통령은 친일파라기보다는 없는 지지세력을 만들기 위해 친일파를 받아들인 인물에 가깝다. 지난해 발굴된 당대의 국무회의록 등의 실증자료들에는 실제로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해방 직후 친일파 처단을 위해 활동했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와해공작에 직접 개입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승만 전 대통령은 자신의 입지를 위해 역사바로세우기를 하지 않은 인물일 뿐, 보수단체의 말대로 분명 친일파는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그를 친일파로 생각하는 건, 그런 권력 집착적인 일련의 그의 행위들이 그가 했던 많은 공적을 가리기 때문이다. 후에 장기집권을 위해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는 것으로 보면, 이승만 전 대통령이 분명 초창기에는 민족주의자로서 시작했을지 모르지만 후에는 과도한 권력의 집착을 보였다는 과오를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따라서 그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리는 인물이다. 이는 1998년 대한민국정부수립 50주년을 맞이해 조선일보와 한국갤럽이 한 조사에서도 명백히 나타난다. 그 조사에서 이승만은 우리 역사상의 긍정적 인물 8위이면서 동시에 부정적 인물로 6위에 올랐다. 게다가 같은 여론조사의 전문가 집단 교수 50명에 의한 평가에서는 부정적 인물로 몇 단계 위인 4위에 올라 있었다. 그리고 그 평가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진행중이라는 걸 이번 ‘서울 1945’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드라마가 소위 좌파적이라고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빨갱이라고 배워왔던 좌파 성향의 지식인들을 민족지도자로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드라마를 보면서 정말 세상 많이 변했다는 생각을 누구나 할만한 시각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드라마 주인공으로 중도좌파의 인물을 내세운 것은 이 드라마가 최초가 아닐까. 그러니 이 드라마 시청자들은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대체로 시청자들은 드라마 주인공에 감정이입하며 보기 마련인데 중도좌파적 시각을 가진 인물에 감정이입하다 보면 그간 의식화되어 왔던 ‘좌파 = 친북 = 빨갱이’라는 괴물이 속에서 꿈틀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좌파라는 괴물은 정말 친북, 빨갱이일까. 본래 좌익은 진보, 혁신적 정파를 말하고 우익은 점진, 보수적 정파를 말한다. 하지만 진보라고 하면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던 것이 좌파라고 하면 무언가 큰 문제라도 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우리가 좌파라는 단어를 그만큼 곡해해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은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강조하는 입장이 보수이며, 민주 즉 평등을 강조하는 입장이 진보라고 분류되는데 우리나라에서의 보수와 진보라는 말은 마치 반공 반북과 친북 친공이라는 의미로 곡해되어 있다. 이것은 아무래도 남북 분단 상황의 영향 때문인 것 같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라는 미국과 영국에도 분명히 좌익이 있고 진보가 있다. 아무리 남북 분단 상황이라고는 하나 진보, 혁신은 없고 보수만 있는 나라를 상상할 수 있을까.

게다가 1990년 소련과 동구권이 붕괴하면서 탈냉전, 탈이념 시대가 도래한 상황에서 이러한 이념 논쟁은 진부한 것이 되어버렸다. 탈냉전 이후 우리가 사는 다원주의 사회에는 진보도 있고 보수도 있어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드라마 한 편에 유신독재 시절에나 어울릴 좌파 운운하는 단어를 끄집어내 좌우논쟁을 일으키는 건 너무 과한 것 같다. 물론 이 드라마는 이념드라마가 아니지만 만일 진보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비판받을 일일까. 보수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드라마들이 대부분인 마당에 한 편쯤 내버려둬도 되지 않았을까.

재미있는 건 이러한 논쟁이 불거져 나온 시점이다. 5.31 선거가 여당의 참패로 끝나고 불과 열흘 사이에 논란이 나온 것이다. 논란에서는 좌파 우파 하지만 사실은 진보와 보수의 대립이 맞을 것이다. 아마도 보수단체들은 이번 선거의 압승을 진보의 패배로 몰아가는 것 같다. 이런 시기에 진보 보수 논쟁은 그러한 편가르기에 능한 정치인들에게는 상당한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이번 선거의 이유를 진보의 패배로 몰기는 너무 성급한 것이 아닐까.

KBS 드라마 ‘서울 1945’에 대한 역사 왜곡 논란은 분명한 역사적 평가나 조사가 진행중이라는 점에서 과거 역사 자체에 대한 진위 논란이라기보다는 현재의 역사를 바라보는 두 시각 사이의 충돌이라고 볼 수 있다. 21세기 다원주의 사회에 들어서까지 좌니 우니 하는 논란이 나오는 것은 우리네 근현대사의 아픔이 여전하며, 그걸 뛰어넘으려는 어떤 노력보다는 오히려 그 한계를 이용해 정략적으로 활용해온 우리네 정치판을 반증하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어느 멋진 날>에 등장하는 오빠의 문제

오빠가 돌아왔다. 그가 돌아온 것은 다름 아닌 여동생 때문이다. 그는 여동생을 사랑한다. 그런데 여동생은 어린 시절 다른 집에 입양됐다. 그리고 지옥 같은 세월들을 살아왔다. 그 입양된 집의 의붓오빠가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오빠가 돌아왔으니 이제 시청자들은 안심한다. 여동생은 이제 친오빠의 보호아래 제대로 된 건실한 남자를 만나 결혼해 잘 살아갈 것이라고.

그런데 그게 아니다. 이 오빠는 남매관계로서가 아니라 여자로서 여동생을 사랑하는 것 같다. 그것은 여동생도 마찬가지다. 그 지옥 같은 세월들을 버티게 해준 것은 다름 아닌 오빠가 자신을 찾아와 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것은 분명 사랑이었다. 자세히 알고 보니 이 오빠도 여동생과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복남매였다. 오빠가 돌아온 것은 어린 시절 잃었던 가족을 찾기 위함인가, 아니면 사랑하던 여동생을 찾기 위함인가.

MBC 수목드라마 ‘어느 멋진 날’을 보고 있으면 그 복잡한 관계 속에서 ‘오빠’라는 단어에 대한 혼동이 온다. 저기서 오빠라고 부르는 것은 남매 관계에서의 오빠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연인관계에서 우리가 흔히 부르는 그 호칭을 말하는 것인가.

오빠와 오빠 사이 아슬아슬한 줄타기
이복남매의 사랑은 이제 이 시대 드라마의 한 트렌드가 된 것 같다. ‘가을동화’에서 저 은서(송혜교 분)에게 돌아온 오빠, 준서(송승헌 분)가 그랬고, ‘피아노’에서 수아(김하늘 분)에게 돌아온 오빠, 재수(고수 분)가 그랬다. 법적 남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다룬 ‘천국의 나무’에서는 여동생 하나(박신혜 분)를 사랑하는 윤서(이완 분)가 등장했다.

실제로 남매는 아니지만 유사한 뉘앙스를 풍기는 드라마들도 있다. ‘천국의 계단’에 나온 송주(권상우 분)와 정서(최지우 분)가 그렇고, 최근에 종영한 ‘봄의 왈츠’의 재하(서도영 분)와 은영(한효주 분)이 그렇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보면 ‘어느 멋진 날’의 건(공유 분)과 하늘(성유리 분)의 사랑이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왜 이다지도 우리네 드라마 여주인공들은 오빠와 사랑에 빠지는 걸까.

오빠, 나를 지켜주는 강한 남성
드라마를 보면 우리네 ‘오빠’라는 호칭은 참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 걸 알 수 있다. 남매 사이에 쓰이는 ‘친오빠’, 후배가 선배를 부를 때는 호칭으로의 ‘오빠’, 연인관계에서 부르는 ‘오빠’가 그것이다. 그중 연인관계에서 여성이 남성을 오빠라고 부르게 된 것은 90년대 이후부터라고 한다. 그 전에는 주로 ‘자기’라고 불렀다.

‘오빠부대’라는 말속에는 오빠라는 호칭에 대한 애착이 담겨져 있다. 오빠는 연인과 달리 무조건적으로 동생을 보호해주는 사람이라는 여성들의 환타지와, 자기를 오빠로 불러주는 사람을 반드시 지켜야한다는 남성들의 환타지가 잘 맞아떨어진 결과다. 또한 오빠라는 호칭은 남성들에게 아저씨로 대변되는 비호감의 반대 의미를 갖고 있기도 하다.

드라마에서 오빠에 대한 이러한 환타지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남성’보다 편안하면서도 헌신적인 ‘오빠’에게 여성 시청자들은 쉽게 빠져든다. 남성 시청자들은 ‘오빠’라는 말을 듣는 순간 무언가 가슴속에서 꿈틀대는 ‘동생보호욕구’에 사로잡힐 것이다. 이렇게 오빠라는 호칭을 하나의 환타지로 보면, 사실상 대부분의 드라마의 관계들은 많은 유사 오빠와 여동생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환타지와 금기가 만나는 순간
그런데 이 환타지가 부닥치는 지점이 있다. 그것은 근친간의 사랑이라는 금기이다. 과거 같으면 도저히 드라마 소재로 나오기 어려웠던 이 금기는 ‘이루어질 수 없는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가면을 쓰고 보여진다. ‘이루어질 수 없다’고 했으니 금기를 넘어선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아름다운 사랑’이라 했으니 어쩌면 금기를 넘어선 것인지도 모른다.

드라마가 현실에서 할 수 없는 어떤 환타지를 충족시키는 것이라는 점에서 드라마 속 금기의 실현은 이중의 안전망을 갖게된다. 그 첫 번째는 드라마라는 대체물이 주는 안전망이고 두 번째는 드라마가 제공하는 자기합리화라는 안전망이다. 아슬아슬한 환타지와 금기가 만나는 순간, 시청자들은 이것은 드라마일 뿐이야 하는 안전망을 갖고, 그 주인공들에 자신을 투사하면서 금기를 넘는 아찔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는 비극적 결말을 보면서(근친간의 사랑은 비극적일 수밖에 없다) 시청자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 안심하게 되는 것이다. “알고 보니 이복남매였다더라”는 설정은 현실로의 무사안착을 위해 얼마나 고민하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그것은 장치일 뿐이다. 이복남매기 때문에 사랑해도 된다는 논리는 바람일 뿐이지 실제로 그렇다는 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 근친간의 사랑에는 혈연과 가족으로 대변되는 우리네 정서 또한 깔려있다. 혈연 드라마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하늘이시여’가 많은 구설수에도 불구하고 인기를 구가했던 것은 바로 이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혈연, 가족 코드 때문이다. 흩어진 가족의 귀환 또는 재건은 그 방법이 어떻든 대부분 허용된다는 것을 우리는 ‘하늘이시여’를 통해 알게됐다. 근친간의 사랑에서 반드시 등장하는 입양의 문제는 금기에 대한 안전핀이기도 하지만 흩어진 가족의 재건을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어느 멋진 날’은 어느 길을 갈까
‘어느 멋진 날’에서 하늘은 완벽해 보이지만 전부가 가짜인 유사가족들의 어항 속에 갇혀 있다. 엄마와 아빠는 하늘을 죽은 딸로만 대하고 있고, 오빠는 금기의 사랑에 집착하고 있다. 건은 불량해 보이지만 진짜 가족 같은 구경택(이기열 분)과 그 자식들과 함께 새로운 가족을 꾸리려 하고 있다. 이 새로운 가족의 재건이 아마도 이 드라마의 주제가 될 것이다.

이제 남은 건 저 유사가족의 어항 속에 갇혀 있는 하늘을 구해오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가족을 꾸리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일까. 하늘이 건을 향해 “오빠는 날 버리지 않았어. 꼭 다시 날 찾아올거야”라고 말할 때, “오빠 고마워. 잊지 말고 찾아와 줘서”라고 말할 때 가슴이 뭉클한 것은. 하늘이 호칭하는 오빠가 그 오빠가 아닌 것 같은 느낌에 아찔한 것은 왜일까. 그것은 금기를 넘어선 아찔함일까, 아니면 저 가증스러운 유사가족으로부터 동생을 지켜내는 든든한 오빠에 대한 환타지 때문일까. 오빠가 돌아왔다.

드라마의 새지평을 연 <연애시대> 그 이유

<연애시대>가 끝났다. 벌써부터 사람들은 <연애시대> 금단증상을 얘기한다. 과거의 드라마들에 비하면 스토리면 스토리, 연기면 연기, 연출이면 연출 어느 하나 흠잡기 어려운 이 명품 드라마의 종영으로 다른 드라마가 어딘지 시시해 보인다는 것이다.

‘영화인들에 의한 영화인들의 드라마’여서 그랬을까. 불륜과 신파, 상투적인 설정으로 점철된 기존 드라마 세상에 영화의 내공을 가지고 홀연히 나타난 <연애시대>는 황망한 사막에 내린 한줄기 비와 같았다. 드라마는 그저 드라마겠지 하고 자조하듯 <연애시대>를 본 시청자들은 ‘이거 좀 다르네’하고 느꼈을 것이다. 시청률이 그다지 높은 것도 아니면서 누구나 <연애시대>를 두고 ‘웰메이드 드라마’라고 서슴없이 말하게 만들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1. 물오른 캐릭터들의 전시장
<왕의 남자> 장생역에서 굵직한 카리스마를 보여줬던 감우성은 <연애시대> 동진역으로 돌아와 섬세한 연기를 선보였다. 과장된 동작도 없고 대사 역시 차분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가 하는 연기는 간단한 손동작 하나, 다리를 떠는 동작, 멍한 표정, 눈빛, 찡그림 하나에서도 감정을 전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는 불만이 가득한 소년 같다. 어찌 보면 작은 일에 좋아하고 화를 내고 삐치고 투덜대는 그의 모습은 바로 우리네 샐러리맨의 자화상 같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그 흔한 샐러리맨들의 소년 같은 투덜거림 뒤에는 보이지 않는 일상과 시간의 공격에 대한 처절한 아픔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물론 드라마의 극적인 요소를 위해 ‘유산된 아기’라는 비극이 그들을 덮지만, 그걸 빼내더라도 그에게서 결혼 후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네 샐러리맨의 근원을 알 수 없는 힘겨움을 찾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작업의 정석>의 작업녀에서 <연애시대>의 당차지만 아픔이 있는 은호로 돌아온 손예진 역시 꿋꿋이 현실을 살아가는 현대여성을 잘 대변해주었다. 그다지 재미있어 보이지 않는 일들 속에 파묻혀 하루 하루를 버텨나가는 그녀가 우울에 매몰되지 않고 행복을 찾으려는 모습에서 우리는 감동을 느꼈다. 그녀가 노래를 할 때나 술에 취할 때나 잠이 들 때나 우리는 그 모습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곤 했다. “모두들 자기를 떠나간다”며 눈물을 흘릴 때는 우리도 떠나간 그 누군가(혹은 젊은 시절 내 마음 속을 채워줬던, 하지만 지금은 시간 속에서 사라져버린 그 무엇)를 떠올리며 눈물 흘렸다.

무엇보다 이 드라마의 연기자들이 기존 드라마와 달랐던 것은 넘치거나 모자라는 연기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 스토리에 철저히 동진과 은호가 된 그들은 마치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듯 자연스러운 연기를 선보였다. 우리가 캐릭터에 대한 몰입이 잘 되는 이유는 바로 그 자연스러움에 있었다.

2. 조연들이 살아있다
하지만 그들 주연 옆에는 주연만큼 빛나는 조연들이 있었다. 이야기의 핵심축을 이루는 공준표와 유지호의 웃음을 터뜨릴 만큼 풋풋한 사랑이야기는 그것만 따로 떼어놓아도 하나의 드라마로 충분했다. 처음 동진을 사랑하게 되는 이혼녀 김미연(오윤아 분)의 유혹적이면서도 푼수같고 그러면서도 눈물 많던 정감과,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로 있다가 한번 웃어줄 때마다 시청자들 마음까지 밝게 만들어주었던 그녀의 딸, 조은솔 역시 우리를 행복하게 했다.

짧은 시간 출연했지만 엉뚱하면서도 강한 인상을 남긴 은호 아버지역의 김갑수, 전형적인 소심남이지만 따뜻한 배려가 몸에 밴 정윤수(서태화 분)와 푸근한 맏며느리 같지만 또한 당찬 현대여성의 모습을 보여준 정유경(문정희 분) 역시 드라마에 빛을 더해줬다. 이밖에 아픔을 안은 재벌집 아들 역의 민현중(이진욱 분), 칼날처럼 다가와 서슬파란 아픔을 보여준 최영인(조혜영 분), 푸근하면서도 귀여운 전직 레슬러 나유리(하재숙 분), 헬스클럽과 서점에서 간간이 등장해 즐거움을 주었던 연기자들까지 버릴 조연이 없었다.

기존 드라마에서 조연은 주연을 돋보이게 하거나, 주연의 드라마를 끌고 가기 위해 소모품으로 쓰여지기 마련이던 점을 생각해보면, 이렇게 다양한 인물들이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 <연애시대>만이 갖는 힘을 만들어준 것임에 분명하다.

3. 악역이 없다
이들 캐릭터들은 수많은 부딪침을 만들지만 <연애시대>에서 타 드라마들과 다른 점은 눈에 띄는 악역이 없다는 것이다. 드라마는 그 자체가 갈등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전형적인 드라마에서는 좋은 악역이 드라마를 성공시킨다고까지 말하곤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이런 단순한 대결구도의 드라마에 지쳤다. 한 사람을 악으로 만들어 가는 방식은 드라마를 너무 게임같이 몰아간다.

악역이 없다고 해서 <연애시대>에 드라마가 없을까. 한지승 감독이 생각하는 갈등은 어느 누가 옳고 누가 그른 문제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부족하고 그 부족함이 서로 다른 타인을 만나게 하며, 그 부족함 때문에 서로 부딪치게 된다는 것이 한 감독이 생각하는 드라마인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연애시대>를 보면서 드라마 속의 대결구도 속에 몰입되기보다는 좀더 관조적으로 갈등을 일으키는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들여다보게 된다. 이 편에 서면 그쪽이 이해되고, 저 편에 서면 저쪽이 이해되는 그 상황에서 악역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타 드라마에서 시청자들이 악역으로 인한 감정 소모를 하는 시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현실을 돌아볼 시간을 갖는다.

훌륭한 연기자들의 캐릭터에 동화(同化)되면서 동시에 악역이 없어 계속 상황을 관조하게 만드는 이화(異化)의 장치를 만든 것은, 분명 이 드라마가 단지 인물들의 짝짓기 같은 연애방정식 이상의 메시지를 담으려 했다는 걸 명백하게 보여준다.

4. 이야기 전개에 무리함이 없다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면 방법의 문제가 남는다. 메시지는 강변한다고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잘 짜여진 이야기 속에서만 공감을 통해 전달된다. ‘이혼 후에 시작된 연애’라는 도발적인 소재를 탄탄히 만들어준 것은 충분한 복선이다.

후에 와서 얘기지만 정윤수(서태화 분)는 은호와의 만남을 준비하기 위해 거의 5회 분량을 수영장 속에 허우적대야 했다. 마지막 회에서 라디오를 통해 은호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그 결정적인 순간을 위해 은호의 아버지역을 맡은 김갑수는 매회 엉뚱한 상담을 해야했다. 동진과의 헤어짐을 미리 예견한 듯 정유경은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봐야했다. 은호가 유산했을 때 동진이 유산한 아기와 함께 있었다는 얘기를 하기 위해 공준표는 산부인과 의사가 애 낳는 걸 두려워하는 이 웃지 못할 상황을 연기해야 했다.

이렇게 미리미리 복선을 충분한 시간 동안 깔아놓을 수 있었던 것은 이 드라마가 기존 드라마와는 달리 쪽대본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전제작(물론 100% 사전제작은 아니지만 적어도 완성된 대본을 가지고 제작)된 드라마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5. 처음 노선으로 끝까지 간다
아무리 사전 제작된 것이라 해도 요즘처럼 네티즌의 의견이 절대적인 상황에서 꿋꿋이 노선을 바꾸지 않고 끝까지 간다는 것은 보통 용기가 아니다. 영화계에서 수많은 어려움을 겪어본 노장의 뚝심 때문이었을까. <연애시대>는 그 변함 없는 노선이 완성도를 높였다.

처음 몇 회분의 드라마를 보면서 놀란 것은 오윤아라는 캐릭터를 과감히 버리는 장면에서였다. 초창기 시청률을 견인하는데 있어서 오윤아라는 연기자는 상당한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녀의 푼수 같으면서도 섹시하고 또 정이 넘치는 모습에 많은 시청자들은 공감을 일으켰다. 하지만 드라마는 예정대로 흘러 역할이 끝난 오윤아를 TV에서 내렸다.

후반부 결혼식을 하는 장면 또한 마찬가지다. 동진과 은호가 다시 이어지기를 애타게 바라는 시청자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드라마는 예정대로 동진을 유경과 결혼시켰다. 물론 마지막 부분에 가서 다시 동진과 은호를 연결시키지만 그 과감한 시도는 놀랍기까지 한 것이었다.

6. 시간의 씨줄과 날줄을 엮는 연출력
과감한 인생의 역전과 재역전이 무리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은 이 드라마가 갖는 독특한 연출 덕분이다. 기존 드라마들이 주인공들이 엮어가는 스토리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에 반해 이 드라마는 시간의 씨줄과 날줄을 엮어 그 속에 인물들의 변화 과정을 보여주었다.

반복되는 장면 위에는 그러나 달라진 인물들이 있다. 그들은 똑같이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지만 시청자들은 시간의 흐름 속(드라마 속)에서 그들의 감정상태가 다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시간의 흐름은 기본적으로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기에 그 속에서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인간들을 포근하게 끌어안는다.

이 드라마의 관조적인 측면은 바로 이 시간을 잡아내는 감독의 연출력에서 나온다. 그 속에서 웃고 울고 하는 인물들을 보면서 우리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여유를 갖는 것이다.

7. <연애시대> 연애 이상을 다뤘다
감독이 만들어준 관조 속에서 <연애시대>는 연애에서 시작했지만 연애 이상의 삶의 문제를 파고들었다. 산다는 것의 문제, 삶의 지루함, 일상과 연애의 문제, 인간 존재의 문제까지 보여주었다. 강변하지 않으면서 잔잔하게 우리의 가슴속에 그런 문제들에 대한 질문들을 던져놓았다.

<연애시대>의 마지막 편에 가면 우리는 이 <연애시대>의 이야기에서 점점 확장되어 가는 이야기의 파장을 볼 수 있다. 드라마 속 캐릭터들의 후일담이 등장하다가 난데없이, 일상의 아이들과 사람들이 등장하는 장면에 가서는, 이것이 우리들 삶의 문제라는 관조를 하게된다. 하지만 어찌 보면 아포리즘에 가까운 그 긴 장면들이 지난 후, 드라마는 다시 본연의 자세로 돌아와 동진과 은호의 행복한 일상을 잡는다.

시청자들이 해피엔딩이라고 미소짓는 순간, 은호의 나레이션이 말한다. 아직 우리 앞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이건 해피엔딩이 아닐 수도 있다고. 해피엔딩이면서 해피엔딩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하는 이 부분이 바로 <연애시대>가 연애 이상을 다루고 있다는 증거이다.

드라마는 끝났고 이제 우리는 새로운 제2의 <연애시대>를 꿈꾼다. 무리하지 않고 잘 짜여지고 완성도가 높은, 재미있으면서도 삶의 비의를 담은 그런 드라마를 꿈꾼다. ‘이혼 후 시작된 연애’이야기, <연애시대>는 식상한 기존 드라마들과 이혼한 시청자들이, 그 후에 새롭게 연애를 시작하게 만든 드라마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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