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없는 가수와 얼굴만 있는 가수

1997년 12월 저녁. 논현동의 한 스튜디오. 스텝들은 모두 녹음실 안쪽에서 열창하고 있는 한 가수에 집중되어 있었다. 반쯤은 넋이 빠진 듯한 그들은 가수의 노래가 끝나자 마치 멈춰졌던 시간이 다시 흐른 것처럼 멋쩍어했다. 전문가들이라는 사람들이 그 정도였으니 아마추어였던 내가 오죽했을까. 온몸에 감전을 당한 듯 소름이 돋은 나는 사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건 무조건 됩니다!” 이것이 내가 우연찮게 ‘사이버 가수 아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던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사이버 가수 아담은 탄생했다.

사이버 가수 아담의 멀티 플레이어 전략
사이버 가수 아담은 예상대로 잘 나갔다. 일본에 사이버 가수 1호 교코 다테가 있었지만 그것 역시 한일전 대결양상을 이루면서 오히려 아담에게 득이 되었다. 아담의 노래는 라디오를 타고 전국에 메아리쳤다. ‘세상엔 없는 사랑’은 가요톱텐에 올라갔고, 음반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당시 아담의 캐릭터와 스토리 제작 및 홍보를 전담했던 나로서는, 홍보마케팅에 있어서도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방송 3사의 연예프로그램은 물론이고 드라마(베스트 극장 등), 뉴스에서는 연일 아담을 소개했다. CF가 들어왔고 라디오 인터뷰는 물론이며 잡지 인터뷰가 쇄도했다. 아담은 가수이자, 연기자이자, 게임 캐릭터이자, CF 및 캐릭터 비즈니스의 모델이었다. 아담은 만들어진 존재였기 때문에 멀티 플레이(One source multi use)에 강했다. 그는 뭐든지 할 수 있었다. 이론적으로는 말이다.
하지만 이론이 현실의 장벽에 부딪힌 것은 아담의 입을 몇 번 놀리기 위해서는 무려 몇 일이나 걸리는 CG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만큼의 비용도 들어갔다. 방송출연 제의가 봇물을 이뤘지만 아담은 점점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아담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아담의 얼굴 없는 가수는 어떻게 됐을까
그는 잘 생긴 외모를 가진 얼굴만 있는 가수였다. 하지만 여전히 표정과 동작은 부자연스러웠다. 어설픈 아담의 동작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기를 든든히 받쳐준 것은 얼굴 없는 가수의 노래였다. 호소력 짙은 가사에, 뛰어난 가창력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녹음실에서 처음 가졌던 그 전율은 이제 라디오를 타고 전국의 청취자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도대체 가수가 누구냐”는 추측이 난무했고, 한 유명한 음악평론가는 “신승훈에 버금가는 가창력”이라고 아담의 얼굴 없는 가수를 추켜세웠다. 이제야 밝힐 수 있지만 아담의 목소리를 대신했던 친구는, 박성철이라는 이름의 학생이었다.

아담의 성공이 박성철에게도 성공적이었을까.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후에 그는 가요계에 데뷔하겠다고 했지만 아담의 매니저(당시 아담은 전담 매니저도 있었다)는 단칼에 그의 의욕을 꺾었다. 네가 나오면 너도 죽고 아담도 죽는다는 것이었다. 딱히 둘러댈 것이 없어서였는지 그 이유는 어처구니없게도 얼굴 때문이라고 했다(사실 내가 보기에 그는 아주 괜찮은 미소년의 얼굴을 갖고 있었다). 그렇게 박성철은 얼굴 없는 가수로 살아야 했다.

반면 얼굴만 있는 가수, 아담의 목적은 음악이 아닌 돈을 벌기 위한 것이었다. 어느 정도 돈을 번 회사는 더 이상 투자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것은 경제법칙, 투자대비 수익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아담의 프로젝트가 해체되면서 박성철과 만나 마지막으로 소주를 나누던 날, 그가 해준 이야기를 잊을 수 없다. “아예 노래를 못하는 가수들도 많아요. 몇 번 코러스로 불러준 적이 있는데 나중에 녹음돼서 나온 걸 들어보니까, 그 가수 목소리는 없더라구요.” 그것이 현실이었다.

기획된 가수들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에 음반 기획사들은 시장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그것도 몇 백만 장씩 소비되는)을 보았다. 가창력이나, 좋은 노래를 가진 가수들이 중심이 되어 흘러가던 가요계에 기획사들의 바람이 일었다. 기획사들은 모든 것을 기획하기 시작했다. 시장을 분석하고 거기에 맞는 상품을 고르듯, 가수를 골라내고(어떨 때는 조합을 하기도 한다), 노래를 붙이고, 댄스를 붙여서 음반을 찍어냈다.

사이버 가수 아담이 나왔던 시점은 바로 음반 기획사들이 태동하던 그 시기로 가수로는 HOT가 활동하던 시기였다. 기획사들은 그만큼 리스크를 줄이고 판매유인을 더 많이 끌어냄으로써 승승장구했다. 이미 소비자들은 영상세대로 불리는 젊은이들로 가득했다. 가수의 노래도 중요했지만 거기에 곁들여진 댄스와 무엇보다도 잘 생긴 외모가 더 중요했다. 그러자 기획사들은 얼굴과 춤을 먼저 보았다. 노래는 점점 그 다음 문제가 되었다. 노래는 몇 달간의 합숙과 연습, 그것도 안되면 녹음 과정에서 코러스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면 됐다.

가수로서의 어떤 포부라든가, 꿈이 있다기보다는 성공하기 위해서 어떤 것이든 감수한다는 이 얼굴만 있는 가수들 뒤에는 역시 얼굴 없는 가수들이 있었다. 그게 많아지자 얼굴 없는 가수도 기획사에서 끌어안고 하나의 전략처럼 사용되었다. 이른바 신비주의 전략이었다. 진짜 얼굴 없는 가수들은 이제 조용히 스포트라이트 밖에서 자신의 음악세계만을 묵묵히 해나가야 했다. 아티스트들은 더러운 세상 뒤로하고 청산으로 들었고(사실은 등 떠밀린 것 같지만), 경박한 얼굴과 몸짓들만 세상을 가득 메웠다. 요는 돈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과연 돈이 되었을까
물론 기획사들은 돈을 챙겼을지 모른다. 또 그 한 때를 함께 풍미했던 가수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국내에 잘 나간다는 연예기획사들을 차린 이들은 대부분이 가수 출신이라는 것이다. 음악성으로 당당히 ‘넘버1이 되었던’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연예경험을 살려 ‘넘버1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들도 가수이니 가수들이 돈을 벌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은 가수로서 벌어들인 수익이 아니다. 그 수익은 연예기획사의 사장으로서 벌어들인 것이다. 가수들은? 끊임없이 시류에 맞게 재생산되었다. 아마도 그들 본인이 실감했을 것이다. 돈을 버는 것과 음악을 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을.

뒤늦게 생각하게된 일이지만 기획사에서 기획되어진 많은 가수들은, 사이버 가수와 다를 게 별로 없었다. 합성하지 않아도 성형을 통해 얼굴은 완벽해졌다. 노래는? 여기저기 시류에 맞게 다른 곡에서 샘플링된 상품으로 짜진 노래들을 죽어라 연습해 소화해내면 되는 것이었다. 춤은? 완벽하게 짜진 안무대로 움직이면 됐다. 춤추며 노래하기? 립싱크가 있으니까 문제될 것이 없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노래 못하는 가수는 용서해도, 얼굴 못생긴 가수는 용서가 되지 않았다.

당연히 양적인 팽창이 일어났다. 너도나도 가수 명함을 내밀었다. 기획사는 더 많은 재원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재료들이 많으니 다양한 조합이 가능하고, 전보다 더 좋은 상품들을 시장에 내보낼 수 있었다. 그렇게 포화된 시장은 스스로 제 무덤을 파고 있었다. 많다보니 특별한 상품에 대한 집중도가 떨어졌고, 좋은 상품을 가려내기도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업친 데 덥친 격으로 디지털 시대가 가져온 MP3 열풍은 음반 판매고에 치명타를 먹였다.

얼굴만 있는 가수들
음반판매는 되지 않았다. 가수는 음반이 팔리지 않으면 다른 노래를 부르던가, 아니면 자신의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면 된다. 그러나 기획사들은 다르다. 회사는 당연히 이윤추구가 제 1의 목표이다. 그들은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했고, 적어도 본전을 챙겨야 했다. 가수들은 쇼프로가 아닌 각종 예능 프로그램을 장식했다. 토요일, 일요일 저녁만 되면 수많은 이름 모를 가수들이 시청자들을 웃기려고 갖은 노력을 다한다. 그리고 중간 중간 장기자랑 하듯이 노래와 춤을 홍보한다. 가끔씩 보는 사람들은 그들이 가수인지, 개그맨인지, 탤런트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런 지경이니 노래는 더더욱 잘 떠오르지 않는다.

이렇게 얼굴만 있는 가수들이 TV를 채우는 것이 요즘의 일이다. 기획사들은 멀티 플레이어 전략을 제대로 썼다. 음반 판매가 어려운 가수들은 일찌감치 각종 프로그램과 드라마 속으로 투입되었다. 음반 기획사로 출발했던 엔터테인먼트 회사들이 이제 드라마나 영화 제작에 관심을 두고 있는 이유는 그 자체로도 돈이 되지만, 자신들이 양산한 가수들을 한류의 흐름에 계속 태우기 위함이다. 그들은 드라마가 가진 한류의 힘을 톡톡히 느낄 수 있었다. 드라마에 삽입된 곡들은 한류를 타고 잘 팔려나갔다.

그 한류의 언저리에서 박성철씨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이름이 아닌 ‘제로’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아담에서 제로라니 그의 가수생활이 그다지 쉽지 않았다는 것을 이름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재야에 있던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건, 최지우, 이병헌, 류시원이 출연한 드라마 <아름다운 날들>에서였다. 이 드라마는 일본에서 붐을 일으켰고, 이것이 박성철씨가 제로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활동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얼굴 없는 가수가 얼굴을 드러낸 곳은 그가 노래했던 이 땅이 아닌 이국땅이라는 점에서 그는 여전히 국내에서는 얼굴 없는 가수였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최근 들어 립싱크니 표절이니, 퍼포먼스니 하는 단어들이 부쩍 많이 늘었다. 여기에 우리네 음악계의 거장이라는 전영혁, 신중현씨의 쓴 소리가 떨어졌다. 전영혁씨는 “가수는 노래하고, 댄서는 춤추고, DJ는 음반을 틀면 된다”고 했고, 신중현씨는 “무대에 노래하러 나온 거냐 뛰어다니러 나온거냐”고 했다. 이걸 성철 스님식으로 표현하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가수는 가수고 댄서는 댄서고 DJ는 DJ다.

얼굴 없는 가수와 얼굴만 있는 가수는 어찌 보면 지금의 가요계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병적인 현상이다. 기획상품으로 만들어진 가수는 한 때 반짝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금세 잊혀진다. 기획이란 시류에 따라 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렇게들 빨리 모이고 빨리 은퇴하는 가보다. 그들은 사이버 가수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계속해서 양산되는 이 사이버 가수들은 노래는 뒷전이면서도, 가수는 노래만 잘 해서는 안 된다는 부담스런 이미지를 만들어놓았다. 여기서 한 발만 더 나가면 가수는 더 이상 가수가 아닌 탤런트가 된다. 탤런트가 낸 음반이 잘 팔리라는 기대는 아예 버리는 게 좋을 것이다. 기획상품이 아닌 신중현, 조용필, 서태지 등의 계보를 잇는 가요계의 진정한 아티스트들이 나오길 바란다. 그들의 열정이 음반을 사는 이들의 마음 한 켠을 온전히 설레임으로 채우길 바란다. 얼굴 없는 가수, 제로 아니 박성철씨를 비롯해 많은 재야에 묻혀있는 진정한 실력자들이 가요계에서 활동하는 날들을 기대해본다.

<개그콘서트>의 일본진출, 그 의미  

<개그콘서트>의 일본공개공연을 앞두고 박준형은 “개그의 한류를 위해 일본 열도에서 무를 갈겠다”고 했다. 드라마와 가수에 이어 개그에서도 한류바람을 일으키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일본의 개그맨들이 우리네 프로에도 등장하고 있어 관심을 끈다. KBS의 <개그사냥>에 일본 니혼TV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활약하고 있는 개그지망생, 묘짱이 등장한 것이다. 그는 니혼TV에서 방영 중인 <아시아 개그를 정복하라>는 프로그램 출연자로, 일본이 아닌 해외 개그프로그램에서 데뷔하라는 프로그램의 미션을 수행 중에 있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인가. 아니면 본격적으로 시작된 개그의 한일전인가. 혹은 우리네 개그가 가진 한계를 넘기 위한 자구책인가.

우리는 일본에 민감하다. 한일전은 그 종목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무조건 이겨야 된다. 월드베이스볼 클래식에서 맞닥뜨린 일본을 일본 본토에서, 그리고 야구의 본고장 미국에서 연달아 이기는 것만으로, 그동안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던 WBC의 주가는 급상승했다. 경기는 한일전을 기점으로 국가전의 양상을 띠면서 전례 없는 야구거리응원까지 펼쳐졌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4강 위업을 달성했고, 우승은 우리가 두 번이나 꺾은 일본에 돌아갔으니 그들도 체면은 차린 셈이었다. 그럼 갖은 수모를 다 겪은 미국은 뭘 챙겨갔을까. 그들은 돈을 챙겨갔다. 비용 4500만∼5000만 달러, 순익은 1000만∼1500만 달러. 게다가 이 대회를 통해 당초 목표로 했던 메이저리그의 세계화도 이루어졌다고 하니 이건 주최측이 한일전을 조장한 건 아닌가하는 기분까지 든다. 한일전은 돈이 된다.

그렇다면 개그의 한일전은 벌어질 것인가. <개그콘서트>가 등장하면서 국내의 정통 개그 프로그램은(쇼 프로그램이 아닌) 모두 같은 색깔의 옷을 입게됐다. 공개방송. 스탠딩 개그, 무한정 투입되는 아이디어, 새로운 얼굴과 끝없는 물갈이... 그러나 끝없는 아이디어 산출이 가져온 것은 시청률 상승과 함께, 개그맨의 단명이다. <개그콘서트>는 한 마디로 엄청난 개그의 인해전술을 방불케 한다. 양이 많아지면 그만큼 주의력은 흩어지게 마련. 결과적으로 어느 정도 뜬 개그맨들은 하나둘 그 아이디어 전쟁에서 밀려나 새로운 분야(방송진행, 드라마, 영화, 연극, 뮤지컬 등을 보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개그콘서트>의 성공은 어찌 보면 개그맨들의 살을 깎는 경쟁과 대전을 통해 이룬 것이다. 그렇게 피를 말려온 개그맨들이 일본이라는 생소한 국제무대에 서서 당당히 일본인들을 웃기는 모습을 본다면 마음이 어떨까. 라면 먹고 한 개그에 눈물이라도 흘릴 것인가.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WBC가 끝나고 야구에 대한 우리들의 관심이 국내야구경기로 옮겨왔는가 하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국내경기를 마치 동네야구처럼 생각하게 되지는 않았는가. 야구하면 메이저리그라는 등식이 더 공식화된 건 아닐까. 탄탄한 지원이나 확실한 기반 없이 해외에서 한번 보여주는 선방은 분명 우리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구석이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통해 우리네 사정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마치 개그콘서트의 무대에서 주목을 끌었다고 해서 그 개그맨의 실제 사정이 그다지 나아지지 않는 것과 같다.

도저히 웃음이 나오지 않는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웃음을 만들어내는 개그맨들은 그 어느 정치인들보다, 경제인들보다, 의사보다, 더 존경받을 만하다(물론 가끔 개그맨들을 능가하는 정치인들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저 <왕의 남자>에서 조선시대 개그맨, 장생과 공길을 통해 보았듯이 그저 ‘웃기는 잡놈’이 아닌 예술가에 가깝다. 그네들의 건전한 살판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네 개그가 어느 한 권력에 잡혀 획일적으로 흐르지 않고, 다양한 정통 개그 프로그램의 시도를 통해 이미 발굴된 개그맨들을 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웃음을 찾는 사람들(개그맨들)은 많다. 그런데 그들이 설자리는 왜 장생이 섰던 외줄 밖에는 없는 걸까.

<넌 어느 별에서 왔니> vs <봄의 왈츠>

<넌 어느 별에서 왔니>를 보고 있으면 정말 묻고 싶어진다. “너희들 외계인이니?” <소림축구>에서 주성치가 만두가게 처녀 아매에게 했던 말을 빌려, “네 별로 돌아가”라고 농담이라도 걸고 싶어진다. 그리고 진짜 묻고 싶은 건 드라마 제목처럼 “도대체 넌 어느 별에서 온 거니?”하는 질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묻고 싶은 또 한 사람이 있으니 같은 별에서 왔으나 지금은 서로 다른 입장에 서서 경쟁하고 있는 다니엘 헤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이 핸섬가이는 떠듬떠듬 서투른 우리말 몇 마디로도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외계인으로 돌아간 정려원과는 정반대로 한국인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돌아왔다.

그들이 온 별은 어디?
정려원이 처음 그 몸을 숨긴 곳은 27살 유희진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맑게 웃는 모습이 아름다운 스마일페이스였지만, 그 속에는 끔찍스러운 아픔이 남아 있었다. 암으로 인해 위를 절제했던 것처럼 그의 첫사랑 진헌과의 관계도 도려내졌고, 다시 돌아온 자리에는 김삼순이라는 어마어마한 공력의 소유자가 떡 하니 앉아있었다. 김삼순의 엉뚱함과 서글서글함에 맞서는 인물로, 정려원은 다소 어울리지 않는 무거운 얼굴의 화장을 해야했다.

그때 그녀의 무거움을 덜어주는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같은 별에서 온 다니엘 헤니라는 인물이다. 김삼순과 진헌을 두고 경쟁한다는 절망적인 설정에서 그녀를 끄집어내준 다니엘 헤니는 여러모로 그녀와 같은 과였다. 유창한 외국어에, 이국적인 쿨한 이미지, 보고만 있어도 마냥 기분이 좋아지는 맑은 얼굴... 그들은 진헌을 두고 김삼순과 경쟁한다는 드라마 속 구도에서 자꾸만 벗어나 같은 별 출신 특유의 더 잘 어울리는 한 쌍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별에서 정려원은 본래 호주의 맑은 하늘같은 이미지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그녀가 나온 그리피스 대학이 있는 골드코스트의 파란 하늘과 따뜻한 햇볕, 그 볕에 적당히 달구어진 바다의 열정을 고스란히 갖고 있었다. 아무리 무거운 얼굴의 화장이라 해도 그걸 숨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두 번째로 그 몸을 숨긴 <가을 소나기>의 박연서라는 인물은, 유희진이었을 때보다 더 심각했다. 다니엘 헤니도 없던 그녀는 절친한 친구를 사랑하는 남자를 옆에서 짝사랑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 드라마를 통해 정려원은 그저 대책 없이 맑기 만한 것이 아닌 눈물을 펑펑 흘려도 잘 어울리는 새로운 이미지 하나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좀더 심플하면서도 강력한 명랑함, 그 명랑함의 뒤편에 남는 우수... 마치 찰리 채플린의 슬랩스틱에서 한껏 웃은 뒤에 남는 애잔한 감정 같은 그런 얼굴이었다. 다시 자기 별로 돌아가 망원경으로 새로운 얼굴을 찾던 정려원은 이제 제대로 된 얼굴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복실이의 얼굴이다.

웃겨야 산다
<넌 어느 별에서 왔니>에서 정려원은 먼저 혜수(김래원의 옛 애인)라는 과거의 이미지를 교통사고로 지워버린다. 그리고 복실로 태어난다. 착하게도 자신의 사고로 죽은, 과거 이미지를 가진 정려원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김래원은 차츰 복실로 다시 태어난 정려원의 이미지에 빠져든다. 처음 몇 번은 과거와 현재를 혼동하지만 이제 과거는 묻혀지고 현재의 모습에 더 빠져드는 것이다. 복실을 만난 정려원은 제 물 만난 고기처럼 거침없이 순수한 모습(심지어는 바보스러운)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사실 제 별에서 놀던 그 모습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모습은, 어른들의 세계인 도시에 와서 오히려 빛을 발한다. 그녀의 거칠 것 없이 터져 나오는 촌스러움에 그녀를 바라보는 이들은 웃음이 터진다. 하지만 그 웃음은 이상하게도 웃을수록 마음에 애잔함을 남기는데, 그것은 그녀가 비판하고 있는 대상, 그녀가 웃음을 만들어내는 원천이 바로 우리네 도시인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한참 웃다가 한숨이 나온다.

울어야 산다
한편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같은 과라는 것을 확인했던 또 다른 별에서 온 다니엘 헤니는 정려원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된다. 정려원은 시골소녀로 환골탈태, 웃다가 울리는 진정한 개그의 길을 가고 있는 반면, 다니엘 헤니는 <봄의 왈츠>를 통해 절대로 울 것 같지 않던 조각 같은 얼굴에 조금씩 슬픔을 담아낸다. 아직 그 얼굴이 완전히 드러난 건 아니지만 “이러다가 다니엘 헤니가 우는 걸 보게 되는 거 아냐?”하고 생각할 정도로 드라마의 분위기는 그의 아픔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다.

기구한 운명의 장난으로 정려원은 웃겨야 살고, 다니엘 헤니는 울려야 사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다니엘 헤니가 그 외계인의 이미지에서 점점 우리네 정서에 맞는 한국인의 모습(정스러운)으로 다가가는 반면, 정려원은 도대체가 종잡을 수 없는 외계인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그러자 드라마는 땅과 하늘의 모습으로 진전되었다. 땅에는 봄이 만연하고, 하늘에는 별이 반짝였다. 땅을 보나 하늘을 보나 쳐다보기만 해도 즐거운 그 얼굴들이 있기에 월화가 아름답다.

<봄의 왈츠> 상처에 대한 변주곡

한 사람의 마음 속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상처와 그 아문 흔적들이 있는 걸까. 지금 웃고 있는 저 얼굴 뒤에는 얼마나 많은 아픔들이 숨어있을까. 상처들에 의해 만들어진 나의 얼굴은 또 얼마나 많은 걸까. <봄의 왈츠>는 이제껏 보여줬던 트렌디한 등장인물들이 사실은 그렇게 단순한 인물들이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다. 긁을수록 점점 커져만가는 딱지처럼 이 치유가 도무지 불가능해 보이는 상처들은 윤재하, 박은영, 필립, 송이나는 물론이고 그 주변인물들, 윤재하의 어머니와 아버지, 박은영의 어머니와 필립의 어머니에게까지 번지고 있다. 이제 상처들은 조금씩 몸을 간질이며 봄을 예고하고 있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이 봄의 왈츠를 추기 전에 먼저 해야될 일이 있다. 마음 속 깊숙이 너무나 깊이 숨겨두어서 마치 애초부터 없었다고 믿고 있었던 과거의 상처, 그 상처와 마주하는 일이다.

윤재하, 나는 누구인가
윤재하가 가진 상처는 마치 인간 존재 깊숙이 내재된 원죄의식에 가깝다. 윤재하는 본래 이수호였다. 그런데 그 이수호의 아버지는 그의 삶은 물론이고 그가 사랑하는 박은영의 삶을 송두리째 뽑아버렸다. 이수호는 그 깊은 죄의 공모자라는 원죄의식과 함께, 그것이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였다는 것에서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게된다. 그는 박은영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죽이는 길을 선택한다. 그는 이수호를 죽이고 윤재하로 태어났다.

윤재하는 피아노를 닮아버렸다. 어쩌면 그가 피아노를 두드리며 자라온 그 세월은 이수호의 흔적을 지우고 윤재하라는 새로운 인물을 자신 속으로 박아 넣는 아픔의 세월이었다. 그리고 20년이 흘렀다. 그런데 자신이 스스로 죽였다고 생각했던 이수호가 깨어난다. 그의 눈앞에 박은영의 실루엣이 자꾸만 어른거리는 것이다. 그가 다시 대면하게된 상처에서 그는 머뭇거린다. 박은영을 사랑하지만 그녀에게 지워질 수 없는 상처를 입힌 이수호로 돌아갈 것이냐, 아니면 그 상처를 덮고 자신을 윤재하로 믿고 사랑하는 송이나를 받아들일 것이냐.

자꾸만 거울 앞이나 유리창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볼 때의 애잔함, 피아노 건반 위에서가 아니라 가끔씩 허공을 두드리는 그의 손가락의 절망감, 마치 어떤 얘기도 꺼낼 수 없다는 듯이 악다문 입술, 고개를 가로젓거나 방을 뛰쳐나갈 때의 쓸쓸한 어깨... 그것들은 모두 그의 속에서 꿈틀대고 있는 이수호의 그림자를 보이지 않기 위한 위장술이다. 박은영이 과거의 박은영으로 드러나는 그 지점이 윤재하 속의 이수호가 깨어나는 날이다. 그것이 봄의 왈츠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박은영과 필립, 그 대책 없는 미소 뒤의 아픔
도무지 참아낼 수 없는 깊은 상처는 오히려 얼굴에 행복의 가면을 씌우는가. 참기 어려운 충격적인 사건들을 겪은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밝다못해 맑기까지 한 대책 없이 발랄하고 명랑한 현재의 얼굴을 한 그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우는’ 캔디와, 씩씩함의 대명사 김삼순의 캐릭터가 반쯤 섞인 박은영의 얼굴은 그래서인지 웃는 순간, 한숨을 내쉬는 순간에 저릿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자신이 사랑했던 이수호의 아버지로 인해 죽게된 자신의 어머니, 그리고 자신의 병 때문에 스스로의 존재를 포기해야 했던 그녀가 사랑한 이수호, 그럼에도 다시 나타난 이수호의 아버지의 꾀임에 넘어가 겪게되는(그녀는 어느 여관에 버려진 것이다. 혹은 팔렸거나.) 지울 수 없는 상처... 윤재하가 그녀 앞에 다시 나타남으로 해서 그 묻어두었던 상처들이 다시 떠오른다. 저 외딴 섬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던 소녀는 이제 낯선 서울까지 너무나 멀리 오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과거와 어떻게 화해할 것인가.

그녀 옆에 강력한 환상, 행복에로의 몰핀이 자리하고 있으니 그가 바로 필립이다. 이 유쾌한 친구는 드라마 전체의 무거움을 일순간 날려버릴 만큼 가볍다. 하지만 저 밀란 쿤데라가 말했듯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그 자체로 무거움을 내포한다. 그의 과거는 철저히 가려져 있으나 그가 은영 모의 무덤가에서 자신의 어머니도 돌아가셨다는 말을 할 때 그 어둠이 얼핏 드러난다. 굳이 혼혈의 아픔 운운하지 않더라도 그 쾌활한 웃음이 어린 시절의 어떤 상상하기 어려운 아픔을 예고하게 한다. 그는 과거보다는 현재와 미래를 보려고만 한다. 그런 그가 은영을 사랑한다. 윤재하(과거)와 필립(현재와 미래) 사이에서 은영은 갈등한다. 아프지만 진정한 사랑인 과거로 갈 것인가, 환상일지도 모르지만 아름답고 행복하기 만한 현재와 미래로 갈 것인가. 허공에 발이 1센티 정도 떠 있는 듯한 필립과 은영의 만남, 사랑의 드라마는 그래서 유쾌하면서도 아련한 여운을 남기는 것이다.

송이나와 현지숙, 자기기만이 불러오는 아픔
어느 날 사랑했던 이가 떠났을 때,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랑하는 이가 돌아올까. 송이나와 현지숙이 잡고 있는 과거 한 자락의 추억은 그래서 안타깝다. 그 둘은 똑같이 과거의 윤재하(죽은 실제 윤재하)의 영혼을 붙들고 놓지 않는다. 그러나 과연 그들은 모르고 있는가. 송이나는 다시 오스트리아에서 윤재하를 만났을 때부터 그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너 어딘가 달라 보여. 하지만 그게 더 좋아”라고 말하는 송이나 속에는 자신이 그리워했던 그가 아니지만, 그를 지금 눈앞의 윤재하와 묶어두려는 강력한 소망이 자리하고 있다. 송이나가 그럴진대 윤재하의 어머니인 현지숙은 오죽할까. 20년의 세월을 살면서 그녀의 환상은 과연 한번도 깨지지 않았을까. 그는 진짜로 지금의 윤재하를 죽은 자신의 아들로 생각하고 있을까.

송이나와 현지숙이 붙들고 있는 윤재하의 영혼은 그러나 박은영이 나타남으로 해서 조금씩 위기를 맞고 있다. 그들은 절망적으로 윤재하의 영혼에 매달리지만 그것은 사실 끝없는 자기기만일 뿐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윤재하의 존재론적 고민의 끝은 그들에게 끝없는 절망이 될 수도 있다. 윤재하가 윤재하를 포기하고 이수호가 되는 순간, 그들이 잡고 살아왔던 20여 년의 세월은 무화되고 마는 것이다. 온통 윤재하로 채워왔던 그 나날들 속에서 그가 빠져나간 후, 남게되는 커다란 공백을 그들은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매달림은 처절하기까지 하다.

아픔과 치유의 변주곡
피아노는 자신을 두드림으로 해서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우리 모두가 살아가면서 겪는 아픔은 그래서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피아노곡으로 흐르는 ‘클레멘타인’이 아프면서도 승화와 치유로 변주되는 것처럼, <봄의 왈츠>는 인물들이 부딪치면서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소리들의 변주곡이다. 작고 가녀린 영혼들이 내는 작지만 반짝이는 그 소리들을 들어보자. 혹 우리들 삶 속에서 숨겨왔던 우리네 상처들을 거기서 만날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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