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의 기봉이>와 농민문제

KBS <인간극장>이 보통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평범한 사람들을 다루지는 않는다. 이 ‘인간’이라는 단어에 ‘극장’이 붙는 것은 그 출연자의 이야기가 드라마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평범하고 싶지만 평범할 수 없는 장애우라면 드라마는 2배의 강도를 가진다. 2002년 <인간극장>에 소개된 배형진 군의 이야기가 <말아톤>이라는 영화가 되어 대성공을 하고, 그 바톤을 이어받아 엄기봉씨의 이야기가 <맨발의 기봉이>로 영화화된 것은 바로 그런 인간드라마의 감동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이 장애우의 이야기가 정상인이 우리들에게 울림을 주는 것은, 이 땅에 몸은 성하지만 상황은 기봉이와 다를 것 없는 수많은 소외된 인물들이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바보는 어떤 의미일까
『바ː보[명사]. 1.지능이 부족하여 정상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 2.‘어리석고 멍청한 사람’을 얕잡아, 또는 욕으로 이르는 말. - 네이버 국어사전』
하지만 이 시대에 ‘바보’라는 단어는 아마도 한 가지 의미를 더 추가해야 할 것 같다. 그것은 ‘너무나 착한 사람’이다. 어려서 열병을 앓아 나이는 40살이지만 지능이 8살에 머문 한적한 시골마을의 기봉이는 ‘바보(1번 뜻의)’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바보(2번 뜻의)로 놀리면서 허드렛일을 시킨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일을 해주고 얻어오는 음식을 빨리 엄마에게 가져가고 싶은 마음에 맨발로 뛰어다닐 정도로 효자인 ‘너무나 착한 사람, 바보’이다.

약삭빠르고 이해득실을 따지는 현대인들에게 바보가 제 3의 의미를 추가하는 것은 ‘바보만도 못한’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인간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자기는 고급외제차를 끌고 골프에다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정작 자신의 노모는 산골 기도원에 버리는 작금의 상황은 기봉이의 ‘바보행각(?)’을 숭고하게까지 만든다. <맨발의 기봉이>가 가진 감동의 실체는 장애우라는 소외된 인물이 바보라고 불릴 정도로 착하다는 점에 있다.

왜 그들은 달리는가
<말아톤>에서 초원이가 그랬듯이 기봉이도 달린다. 평범한 사람들에게야 달리기란 누구나 맘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일 수도 있겠지만, 평범하지 못한 이들에게 달리기는 어찌 보면 무모한 도전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들을 보는 사람들은 생각한다. 사실 초원이가 달린 것은 엄마의 집착적인 노력 때문이며, 기봉이가 달린 것은 엄마의 틀니를 해주기 위한 효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혼자 서기 어려운 이들에게 엄마라는 존재는 그만큼 크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부에 가서는 알게된다. 이들이 달렸던 것은 사실 그 누구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자기 존재를 알리기 위한 스스로의 노력이었다는 것을.

초원이는 마지막 순간에 엄마가 마라톤 대회에서 늘 묻곤 하던 질문을 엄마에게 되던진다. “초원이 다리는?”이라는 질문이 초원이의 입에서 나왔을 때, 그것은 엄마의 힘이 아닌 자신 스스로 달리기를 선택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같은 의미로 “서라면 서고 달리라면 달리라”던 동네 이장님인 임하룡의 말을 무시하고, 달려나가는 기봉이의 모습은 스스로 서는 한 인간의 감동적인 모습을 잡아낸다. 그들이 달리는 이유는 명백하다.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일이며 한 인간으로서의 자기존재를 알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마라톤이라는 길 옆에 선 사람들
정상적이지 못한 몸을 갖고 있는 이들이 마라톤이라는 긴긴 인생길을 달려나갈 수 있게 하는 힘은 단지 엄마의 노력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편견도 존재하지만 그들 주위에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따뜻한 손길들이 있다. 초원이 옆에는 그를 믿어주고 이끌어주는 코치 선생이 있고, 기봉이 옆에는 아들처럼 그를 아끼는 이장님을 비롯한 마을 주민들이 있다. 상대적으로 기봉이 주변에 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은 아마도 그 살아가는 배경이 시골이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바보인 기봉이와 정상이지만 비뚤어진 마음의 탁재훈을 비교해나가면서 정상과 비정상의 문제를 꼬집는다. 모든 것을 다 가진 듯한 이장님댁 아들 탁재훈은 사실 모든 것을 기봉이에게 빼앗긴다. 아버지나 사진관 주인 김효진이 “기봉씨를 배우라”고 하는 말은 사실 탁재훈에게 하는 말이 아니고 관객에게 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탁재훈은 그 스스로도 소외된 인물이다. 작품에서는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그가 가진 상실감은 ‘시골 촌구석’이라는 답답한 현실과 일맥상통한다.

소외된 자들의 대표주자, 기봉이
기봉이가 마라톤 대회에 출전하는 날, 기봉이의 엄마를 엎고 달리는 탁재훈은 저 스스로도 그리 잘난 것 없는 소외된 인물이라고 느꼈을 지도 모른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게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상경한 시골사람들이 기봉이가 이기길 바라는 것은 어찌 보면 이 시대의 소외된 계층의 한 면을 보는 것만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기봉이와 정상인들의 마라톤 대회는 마치 힘없는 시골사람들과 늘 기득권을 갖고 살아가는 도시인들과의 대결처럼 쓸쓸하다. 무장한 전경들을 향해 보잘 것 없는 무기를 들고 달려드는 농민들처럼 무모해 보인다.

그러나 소박하고 따뜻한 시골사람들이 맨발인 그에게 운동화를 준 것처럼 영화는 따뜻한 시선으로 소외된 이들의 맨발에 운동화를 신겨준다. 사진관 주인으로 나온 김효진은 기봉이의 신발끈을 매주면서 말한다. “달리다가 힘들면 걸어도 된다”고. 그 말은 마치 “말은 안 했지만 당신의 힘겨운 노력을 알고 있다. 빨리 가지 못해도 가기만 하면 된다.”는 말처럼 들린다. 지금은 힘들지만 언젠가는 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들린다.

물론 이 영화는 실제 사실을 극화했기 때문에 이런 보다 확장된 의미망을 갖추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웃다가 울리는 휴먼 드라마에서 굳이 저 농민들과 같은 소외된 계층의 모습을 떠올리는 건, 그만큼 삶이 팍팍하기 때문일까. 수많은 이 땅의 ‘기봉이’들은 왜 여전히 맨발인가.

수많은 나도열들의 1인 시위

수퍼맨, 원더우먼, 배트맨, 스파이더맨, 엑스맨, 캣우먼, 엘렉트라... 헐리우드가 가진 수퍼 히어로들을 보면 주눅이 든다. 우리는 왜 저런 영웅이 없을까. 하지만 진짜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때 우리는 김청기 감독이라는 불세출의 천재에 의해 <로봇 태권 V>와 <똘이장군>, <수퍼 홍길동>을 가진 적이 있었다.

일본 만화가 온통 우리네 TV를 장악하던 시절, 우리의 캐릭터는 애국심이라는 지상가치와 함께 했던 것 같다. 특히 <똘이장군>은 당대 반공이라는 불행한 시대적 상황을 전적으로 보여주며 간첩을 잡거나(간첩잡는 똘이장군), 땅굴(똘이장군과 제3땅굴)을 발견하기도 한다.

탈냉전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는 영웅들과 결별했다.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려는 노력이 있었지만(이것 역시 김청기 감독이 주도한 것 같다. 그는 태권V를 부활시켰고, 박중훈 주연의 바이오맨이라는 영화도 만들었다.) 어찌 보면 시대착오적인 무모한 발상처럼 보이기도 했다.

점점 맹위를 떨치는 헐리우드 수퍼 히어로들
반공시대는 지났지만 여전히 헐리우드에서는 수퍼 히어로들이 맹위를 떨치고 있다. 그 종류도 점점 다양해지고 캐릭터도 좀더 복합적인 인물로 변신해갔다. 대표격인 수퍼맨이 바른 생활 사나이라면, 배트맨은 좀 더 어두운 면이 많은 영웅이며, 스파이더맨은 보다 인간적으로 고뇌하는 영웅이라는 탈을 썼다. 이 수퍼 히어로들은 만화에서 영화로 만들어져 블록버스터라는 이름에 걸맞게 세계 영화 시장을 박살냈다. 그들은 사라질만하면 계속 재생산되면서 미국의 정책과 힘을 전 세계에 과시했다.

반면 우리네 영화 속에서 수퍼 히어로들은 애초부터 만들어지지 않았다. 당시 자본이 일천하고 기술이 일천한 우리네 영화계에서 영웅들은 헐리우드 보다는 중국식 영웅을 따라갔다. 소위 이소룡, 성룡, 주윤발, 이연걸 하는 중국식의 히어로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도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그들은 초능력을 가진 무협영웅을 만들어 아시아 시장과 헐리우드 시장까지 파고들었지만, 우리네 영웅들은 하늘을 날아다니지도 않고 괴력을 갖고 있지도 않은 우리의 이웃 같은 인물들이었다. <돌아이>의 전영록이나 <인간시장>의 장총찬, <장군의 아들>의 김두한 같은 서민들이 사회 불의와 맞서 싸우는 정도였다. 그 계보는 최근의 류승완 감독까지 그다지 변하지 않은 우리네 영웅상이다. 세계를 대상으로 하기엔 스케일이 작았거나 그만큼 현실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열 받아야 힘을 쓰는 우리네 영웅
그런 면에서 보면 <흡혈형사 나도열>은 한국형 수퍼 히어로(?)의 그 첫 번째 타자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평범한 비리형사 나도열이 드라큘라의 피를 흡혈한 모기에게 물려 초인적인 능력을 갖게된다는 황당한 설정에 걸맞게, 영화는 애초부터 수퍼 히어로 영화의 전철을 밟지 않는다. 흥분해야 변신하는 안쓰러운 우리네 수퍼 히어로, 나도열은 적과 맞서 싸우기 위해 야한 여자를 보거나 심지어는 PMP에 저장해 갖고 다니는 포르노를 봐야 한다. 그러니 우아하고 멋진 등장 따위는 잊어야 한다.

적이라고 해봐야 세계적인 악당이나 악의 무리들이 아닌 동네에서 성인오락실을 하는 조폭이다. 그러니 이들을 상대하는데 엄청난 괴력(지구를 거꾸로 돌리거나 날아다니는 등)은 필요 없다. 단지 싸움을 좀 잘하고, 힘이 남보다 조금 센 정도면 된다. 실제로 나도열이 가진 남다른 능력이라고 해봐야 천장에 붙는 정도가 아닌가. 그 정도 실력이면 K-1이나 프라이드에 나가도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러니 미국의 수퍼 히어로들, 액스맨이나 스파이더맨, 수퍼맨 등과 싸운다면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우리네 나도열이나 미국의 <헐크>나 똑같이 열 받아야 힘을 쓰는 건 마찬가지지만 나도열은 헐크가 가진 존재론적인 고민을 갖고 있지 않다. 가볍게 촐랑거리면서 기꺼이 변신하기 위해 야한 것들을 찾는다. 괜스레 존재론적 고민을 담는 척 하지만 사실은 돈을 벌어들이겠다는 목적을 가진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음흉함보다야 순수하지만, 그래도 “왜 우리네 수퍼 히어로는 이다지도 왜소한 걸까”하는 탄식은 남는다. 그것은 아마도 미국과 일본, 중국, 러시아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우리네 국제정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수퍼 히어로에 대한 풍자
힘이 곧 법인 세상. 현실적인 힘이 없으니 그 잘못된 세계에 대해 풍자라도 할밖에. 다행히도 <흡혈형사 나도열>은 코미디영화다. <나도열>은 잘난 체하고 폼잡는 수퍼 히어로들에 대한 강렬한 풍자 그 자체이다. 그 막강한 힘과 선인인 척 가장하는 얼굴 뒤에는 사실 힘의 논리가 들어있고, 이긴 자가 곧 선이라는 무언의 메시지가 숨어 있다. 여지없이 무너지는 나도열은 수퍼 히어로 이면에 숨은 속물근성을 고발한다.

블록버스터 헐리우드 영화들이 전 세계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려는 점에서 보면 그들 역시 미국이 만들어낸 수퍼 히어로의 행동과 다를 바가 없다. 수퍼 히어로들의 틈바구니에 낀 서민들은 언제까지 그들의 쇼를 보고만 있어야 할까. 서민들의 공격은 수퍼 히어로가 현실성 없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걸 폭로하는 것이다. 실로 블록버스터 속에서는 불가능한 미션(mission impossible)이 가능한 일이 되고, 얼굴만 인간으로 바꾼 수퍼맨과 배트맨이 즐비하게 등장한다. 그 우스꽝스런 이야기가 먹히는 것은 그 자극적인 롤러코스터 효과 때문이다. 영화라기보다는 놀이기구를 타는 듯한 기분, 그것이 블록버스터의 실체다.

수많은 나도열들의 1인 시위
지금 우리네 극장가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공격을 막아주던 스크린 쿼터라는 방패막이 뚫린 채, 미국산 수퍼 히어로들이 극장가를 공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션 임파서블3>가 연휴 극장가를 평정했고, 그 뒤를 <다빈치 코드>가 준비하고 있다. 이 절대절명의 시기에 <엑스맨 3>와 <수퍼맨 리턴즈>가 들어온다는 것은 실로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류 바람을 타고 조금씩 그 덩치를 키워가던 우리네 영화는 이제 우리만의 블록버스터를 키워야할 때다. 우리에게는 <올드보이>가 있고, <태극기 휘날리며>가 있으며, <왕의 남자>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각광받는 이 한류 영화가 우리네 블록버스터이다. 방패막이 없어졌다면 이제 우리도 저 적지로 파고들어야 한다.

하지만 걱정되는 것은 전 세계의 영화가 블록버스터들의 격전장이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이렇게 덩치 큰 영화들만 자꾸 극장에 걸리다가는 덩치는 작지만 보석 같은 영화들은 상대적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다. 특히 지금처럼 극장이 체인화되어가는 마당에는 잘 나가는 영화들만 대접받는 상황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왕 받은 열, 식히지나 말자
왜소하고 서민적인 영웅, <흡혈형사 나도열>은 우리네 영화계의 현실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 스크린 쿼터 일수가 축소되고 헐리우드의 블록버스터들이 일제히 융단폭격을 준비하고 있는 지금, 많은 영화인들의 1인 시위는 마치 <흡혈형사 나도열>을 보는 듯해 마음이 아프다. 끝없이 비판하고 풍자하고 있지만 정작 관객은 별로 없는 것 같아서 말이다.

이 상황은 중국식 무협영웅들처럼 이런 사태가 오기 전에 미리 준비해왔다든가, 미국식 수퍼 히어로들처럼 본래부터 힘이 세거나 특별한 약을 먹었다든가 하는 것 없이, ‘열 받아야’ 그제서야 힘을 쓰는 우리네 정서하고도 어쩌면 그리 닮아있는가. 부디 받은 열이라도 쉬 식혀 잊혀지는 사태는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부디 1위 시위하는 나도열들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 못할망정, 지네들 밥그릇 찾기라는 오명을 씌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은 신문사 국장으로 하여금 스파이더맨과 수퍼맨을 악당으로 몰아가게 했던 저네들의 전술에 말리는 격이 될테니까.

<도마뱀> 저주받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

깊은 상처를 겪어본 사람들은 말한다. 상처 없이 사랑할 수는 없을까. 하지만 그들 스스로 알고 있다. 상처 그 자체가 사랑이라는 것을.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안전했던 경계를 포기하고 침범을 허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계를 포기했기에 사랑할 수 있지만, 또한 그 사랑은 상처를 전제로 한다. 결국은 헤어질 수밖에 없는(사람은 누구나 홀로 죽는다) 운명을 타고난 우리들은 그래서 꿈꾼다. 저 멀리 있는 저 별에, 사라진 내 님이 살고 있다고.

저주받은 인간
불치병이나 시한부 인생에 대한 영화 드라마가 관심을 받는 것은 그것이 바로 유한한 우리 인간들의 운명을 다룬 것이기 때문이다. 길거나 짧은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우리는 짧은 생애를 마감하고 저 세상으로 떠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사랑에는 반드시 이별이 따른다는 말은 어디에나 해당된다.

<도마뱀>은 바로 그 헤어질 수밖에 없는 저주받은 인간의 사랑과 운명에 대한 이야기다. 노란 우비를 보호막처럼 입고 다니는 저 맹랑한 아이, 아리가 저 스스로를 ‘저주받은 아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저 ‘저주받은 인간’의 운명과 같은 맥락의 이야기다.

보호막 치기, 혹은 경계 긋기
날카로운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처럼 아리는 자기 주변에 보호막을 친다. 노란 우비가 그렇고 입만 열면 쏟아내는 거짓말이 그렇다. 땅바닥에 금을 그어놓고 그 선을 넘지 말라는 것 역시 마찬가지의 보호막 치기이다.

그런데 그런 아리의 보호막을 넘어오는 소년이 있다. 조강. 이름에서부터 풍겨나듯 그는 아리의 ‘조강지부’같은 인물이다. 노란 우비를 넘어서 살갗을 마주 대고, 아리의 거짓말을 진짜로 받아들이며, 바닥에 그어놓은 금을 어느새 넘어버린다.

그러자 자신을 보호하려던 아리의 보호막은 이제는 그녀를 사랑하는 조강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한 경계가 된다. 금 하나를 넘어오는 그 순간, 위협을 느끼면 꼬리를 자르고 사라져버리는 도마뱀처럼 그녀는 종적을 감춘다. 그녀가 느끼는 위협은 다름 아닌 누군가를 영원히 사랑할 수 없는 저주받은 자신이 조강을 사랑하게 될까 하는 점이며, 자신이 이미 사랑하는 조강이 사랑 받을 수 없는 저주받은 몸의 자신을 사랑하게 될까 하는 점이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꼬리를 잘랐던 도마뱀은 이제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보호하기 위해 꼬리를 자른다.

죽음을 앞둔 연인, 별을 꿈꾸다
경계를 확실히 긋기 위한 몸부림으로 아리는 외계인이 된다. 외계에서 왔으니 저 별로 돌아가야 한다. 그 거짓말은 그러나 이제 다 큰 조강이 믿기엔 너무나 허황된 것이다. 하지만 절박한 연인의 죽음을 눈앞에 둔 인간에게 믿지 못할 것이 어디 있을까. ‘그녀는 죽은 것이 아니고 저 별에 잠시 먼저 간 것이다. 언젠가 돌아올 것이다.’

아픈 아리를 위해 미스테리 서클을 그리며 UFO를 부르는 조강의 마음 속에는 꼿꼿이 세워진 아리의 가시까지 껴안으려는 안간힘이 있다. 영원한 이별을 앞둔 연인에게 UFO가 나타난들 대수일까. 죽음 앞에서 우리는 유령을 만나기도 하고, 들꽃으로 별로 다시 살아난 연인을 만나기도 하지 않는가. UFO와 우주인은 이 시대의 들꽃이며 별이고 유령이다.

멜로인가, 미스테리인가
영화는 강혜정, 조승우라는 연기파 배우들의 힘으로 움직인다. 아이디어는 여기저기 번뜩이지만 유기적인 구성은 조금 산만한 편이다. 황인호씨의 원작, <아리조강 납치사건>과 <도마뱀>을 비교해보면 감독은 약간은 만화적인 이 시나리오를 영화화하면서, 그 만화적 색채를 최대한 줄이고 영화적인 공감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아리조강 납치사건>은 저 코엔 형제의 <아리조나 납치사건>처럼 훨씬 더 비현실적이다. 멜로를 추구하고 있지만 이야기의 흐름은 공감을 일으킬 만큼 충분히 그럴 듯하지 못하다. 하지만 <도마뱀>에 와서 그런 색채들은 많이 줄어들었다. 굳이 붙이자면 ‘미스테리 멜로’를 어느 정도 완성한 셈이다.

하지만 공감은 단순히 남녀간 사랑의 이야기나 최루성 신파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보다 깊은 공감을 만들려면 저 셰익스피어의 비극이 그렇듯이 그 안에 인간의 운명이나 존재 같은 깊은 통찰력이 깔려 있어야 했다.

<도마뱀>은 좋은 소재에 좋은 아이디어에 훌륭한 연출까지 모두 괜찮은 영화의 틀을 갖추었다. 아쉬운 것은 ‘도마뱀’이라는 철학적인 제목을 가진 이 영화가, 그런 깊은 울림까지는 획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미스테리와 멜로가 만나 휴먼 드라마로 연결됐더라면 오래두고 감동할 수 있는 영화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돋보이는 것은 기존 멜로 영화들의 천편일률적인 스토리와 모범답안 같은 연출을 조금은 벗어나 있다는 점이다.

인간인 우리들은 누구나 마음 속에 도마뱀 하나씩을 가지고 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혹은 사랑하는 이에게 상처주지 않기 위해, 도마뱀은 번번이 꼬리를 잘라왔다. 영화 <도마뱀>은 우리 생애에서 자르고 도망쳤던, 그래서 기억 속에 서서히 버려진 그 꼬리를 기억하게 만든다. 혹은 그렇게 영원히 잘라내려 했지만 계속 돋아나기만 하는 꼬리를 가진 인간의 운명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말 퀴즈 프로그램 참여기

우여곡절 끝에 <우리말 겨루기>에 출연했다. 무려 스무 번도 넘게 낙방한 끝에 올라간 자리였지만 실력이 부족했는지 1단계에서 맨 꼴찌로 떨어졌다. 기분이 좋았던 것은 방송을 만드는 분들의 진지함 때문이었다. 그 진지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어줍잖은 방송출연의 경험 때문이었을까. 필자는 우리말에 대한 시청자들의 관심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래서 TV속 네모난 세상을 둘러보니, 요즘 방송에는 ‘말이 올라야 시청률이 오른다’고 해야할 만큼 우리말에 대한 프로그램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걸 감지할 수 있었다. 영상의 물결이 봇물을 이루는 이 시대에 우리말과 우리글에 대한 프로그램이 많아지는 이유는 도대체 왜일까.

TV매체와 인터넷 세대
인터넷이라는 쌍방향 미디어의 탄생은 TV의 전망을 불투명하게 할거라는 막연한 추측과는 정반대로, 최근 TV와 인터넷 사이는 신혼부부처럼 따끈따끈하다. TV가 가진 영향력과 인터넷의 양방향성이 만나면서 그 폭발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SBS <야심만만>은 MSN의 사용자 ‘만 명에게 물었습니다’를 통해 그 소재를 발굴해내고 있고, 최근 인기가도를 달리고 있는 KBS <상상플러스> 역시 포털사이트 네이트의 설문조사 및 검색을 활용하고 있다. 이것은 수동적인 시청자가 아니라 직접 참여하는 인터넷 세대들을 적극 끌어들이려는 TV의 노력과, TV라는 거대매체에 자사의 간접광고효과를 노리는 인터넷 매체간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은 또한 실생활에 깊게 들어와 있는 ‘TV와 인터넷(요즘은 이 말을 거의 한 단어처럼 같이 사용하는 것 같다)’의 영향력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 젊은이들이 나누는 대화의 대부분은 TV 프로그램인 경우가 많고, 그 TV프로그램에 대해 가장 격렬한 말이 오고가는 곳이 바로 인터넷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니 ‘의견을 받아들여 방송을 한다’는 형식은 여러모로 유용한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이 있다. 네티즌들이 알게 모르게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해 의견을 개진하면서 민감해진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언어’이다. 소위 말하는 댓글, 악플, 노플 등은 네티즌들에게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 양식(糧食)인가 하는 것을 말해준다.

영상세대들은 글을 멀리할거라고?
한때 영상세대니 뭐니 하면서 이제 그들에 의해 문자는 버려지고 영상만 남을 거라는 오해를 심어줄 만한 신문사설들이 줄을 이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이건 매체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처사다. 매체는 신문 같은 문자매체와, 방송의 영상매체, 그리고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전자매체가 있는데 당시에 죽게된 것은 문자매체였을 뿐, 문자 그 자체는 아니었다. 글, 말, 문자는 고스란히 영상매체 속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전에 없는 수많은 글들을 읽어가며 영상을 보게 되었다. 신문의 기능은 그대로 인터넷 신문으로 넘어오면서 보다 역동적(interactive)으로 변모했다. 오히려 영상세대들은 문자에 더 민감해졌다. 신문이 일방적으로 문자를 던졌을 뿐이라면 이들은 그 문자가 던져지는 동시에 수많은 다른 이들의 의견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영상세대들이 문자를 멀리할 거라는 기존의 통념을 뒤엎고 오히려 문자에 민감하게 된(문자메시지의 범람을 보라!) 전후 사정이다.

말이 오르는 프로그램이 잘 나갈밖에
그러니 언어를 다루는 프로그램은 초미의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말 겨루기>는 KBS가 아마도 공영방송이라는 취지를 갖고 시작한 프로그램이었던 것 같다. 2003년 정재환이 진행하던 이 프로그램은 이제 한석준 아나운서로 바톤을 이어가고 있다. 초창기에 이 프로그램이 그렇게 인기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최근 들어 우리말에 대한 비상한 관심들은 그대로 이 프로그램의 인기에 불을 붙였다. 같은 월요일 연예오락프로그램인 <야심만만>이 16% 정도의 시청률을 기록하는데, 시사교양프로그램인 <우리말 겨루기>가 14%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하는 것은 경이적인 일이다. 이 프로그램의 인기비결은 첫째 인터넷을 통해 시청자들이 직접 참여하는(방송까지) 프로그램으로 매니아층이 두텁다는 것이고, 둘째는 정통 퀴즈프로그램이 갖는 긴박감이 시청자들에게 손에 땀을 쥐는 재미를 준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특정한 지식이 아닌 우리말 겨루기라는 특성이 있어 누구나 참여가 가능하고, 거기서 잘만 하면 꽤 많은 상금을 얻을 수도 있다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말에 대한 정보냐? 오락이냐?
하지만 <우리말 겨루기>와는 다른 <상상 플러스>의 ‘올드&뉴’와, 이러한 추세에 발맞춰 MBC에서 야심 차게 기획한 사투리 퀴즈쇼 <말 달리자>는 시청률 상승의 요인이 조금 다른 곳에 있다. 당연한 것이지만 연예 오락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우리말 겨루기>가 추구하는 정보의 즐거움보다 오락에 더 치중한다는 것이다.

<상상 플러스>의 ‘올드&뉴’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 사람들은 ‘바로 이거다!’ 하고 손뼉을 쳤을 것이다. ‘세대간의 벽을 허문다’는 취지에 많은 사람들이 동감했고, 그 재미있는 진행에 빠져들었다. 노현정이라는 재치 있는 아나운서의 전격기용은 프로그램의 균형(재미와 정보)을 유지하는 역할을 해주었다(적어도 처음에는). 하지만 ‘혹시나’는 ‘역시나’로 흐르고 있다. 명분을 어느 정도 쌓고 시청률이 본 궤도에 오르자 본격적으로 재미를 추구하게 됐고 그러자 정보성은 퇴색되었다. 그러자 올바른 말을 추구한다던 이 프로그램의 취지가 무색하게도, 출연자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바로 네티즌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최근에 시작한 MBC의 <말 달리자>는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주는, 사투리를 알자는 좋은 취지로 일단 초기의 합격점을 받은 듯 하다. 사투리로 일반인이 설명하고, 그 문제를 푸는 연예인들의 답답함은 웃음을 자아내게 하면서도 우리 사투리를 다시 보게 하는 힘이 있다. 이 프로그램에는 연예인들(가수, 배우, 개그맨을 망라한)은 물론, 아나운서, 국립국어원에서 나온 전문가까지 실로 종합선물세트라고 할 만큼 각계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것은 역시 재미와 함께 정보성(교육성)을 최대한 가미하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하지만 저 <상상플러스>가 초기의 뜻과는 달리, 개봉하는 영화나 신보의 홍보마당이 되는 현상을 보면서, 그 뜻이 얼마나 갈지 귀추가 주목된다.

소통부재의 세상, 유쾌한 웃음의 장이 되길
우리말에 관련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등장해 호응을 얻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소통부재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세대간의 언어장벽은 그렇지 않아도 깊은 세대간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어 버린다. 사투리는 이제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지만 이 아름다운 지역색은 상호간의 깊은 이해가 없이는 정치적으로 이용될 소지가 다분하다. 따라서 서로의 사투리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이 그 지역 간의 골을 없애는 길이다.

굳이 ‘말이 올라야 나라가 오른다’하고 거창하게 말할 필요는 없다. 단지 우리말을 가지고, 지역을 불문하고 남녀노소가 함께 웃고 즐길 수 있는 장이 펼쳐지길 기대할 뿐이다. 아쉬운 것은 시사교양 프로그램으로서 당연한 것이지만, <우리말 겨루기>가 그나마 세대간의 장벽을 넘어서 누구나 쉽게 즐기는 프로그램인 반면, 다른 오락 프로그램들은 젊은 세대들만 공감하는 프로그램인 것 같다는 점이다. 부디 이 좋은 ‘말의 잔치’가 그들만의 ‘말잔치’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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