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나도열들의 1인 시위

수퍼맨, 원더우먼, 배트맨, 스파이더맨, 엑스맨, 캣우먼, 엘렉트라... 헐리우드가 가진 수퍼 히어로들을 보면 주눅이 든다. 우리는 왜 저런 영웅이 없을까. 하지만 진짜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때 우리는 김청기 감독이라는 불세출의 천재에 의해 <로봇 태권 V>와 <똘이장군>, <수퍼 홍길동>을 가진 적이 있었다.

일본 만화가 온통 우리네 TV를 장악하던 시절, 우리의 캐릭터는 애국심이라는 지상가치와 함께 했던 것 같다. 특히 <똘이장군>은 당대 반공이라는 불행한 시대적 상황을 전적으로 보여주며 간첩을 잡거나(간첩잡는 똘이장군), 땅굴(똘이장군과 제3땅굴)을 발견하기도 한다.

탈냉전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는 영웅들과 결별했다.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려는 노력이 있었지만(이것 역시 김청기 감독이 주도한 것 같다. 그는 태권V를 부활시켰고, 박중훈 주연의 바이오맨이라는 영화도 만들었다.) 어찌 보면 시대착오적인 무모한 발상처럼 보이기도 했다.

점점 맹위를 떨치는 헐리우드 수퍼 히어로들
반공시대는 지났지만 여전히 헐리우드에서는 수퍼 히어로들이 맹위를 떨치고 있다. 그 종류도 점점 다양해지고 캐릭터도 좀더 복합적인 인물로 변신해갔다. 대표격인 수퍼맨이 바른 생활 사나이라면, 배트맨은 좀 더 어두운 면이 많은 영웅이며, 스파이더맨은 보다 인간적으로 고뇌하는 영웅이라는 탈을 썼다. 이 수퍼 히어로들은 만화에서 영화로 만들어져 블록버스터라는 이름에 걸맞게 세계 영화 시장을 박살냈다. 그들은 사라질만하면 계속 재생산되면서 미국의 정책과 힘을 전 세계에 과시했다.

반면 우리네 영화 속에서 수퍼 히어로들은 애초부터 만들어지지 않았다. 당시 자본이 일천하고 기술이 일천한 우리네 영화계에서 영웅들은 헐리우드 보다는 중국식 영웅을 따라갔다. 소위 이소룡, 성룡, 주윤발, 이연걸 하는 중국식의 히어로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도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그들은 초능력을 가진 무협영웅을 만들어 아시아 시장과 헐리우드 시장까지 파고들었지만, 우리네 영웅들은 하늘을 날아다니지도 않고 괴력을 갖고 있지도 않은 우리의 이웃 같은 인물들이었다. <돌아이>의 전영록이나 <인간시장>의 장총찬, <장군의 아들>의 김두한 같은 서민들이 사회 불의와 맞서 싸우는 정도였다. 그 계보는 최근의 류승완 감독까지 그다지 변하지 않은 우리네 영웅상이다. 세계를 대상으로 하기엔 스케일이 작았거나 그만큼 현실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열 받아야 힘을 쓰는 우리네 영웅
그런 면에서 보면 <흡혈형사 나도열>은 한국형 수퍼 히어로(?)의 그 첫 번째 타자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평범한 비리형사 나도열이 드라큘라의 피를 흡혈한 모기에게 물려 초인적인 능력을 갖게된다는 황당한 설정에 걸맞게, 영화는 애초부터 수퍼 히어로 영화의 전철을 밟지 않는다. 흥분해야 변신하는 안쓰러운 우리네 수퍼 히어로, 나도열은 적과 맞서 싸우기 위해 야한 여자를 보거나 심지어는 PMP에 저장해 갖고 다니는 포르노를 봐야 한다. 그러니 우아하고 멋진 등장 따위는 잊어야 한다.

적이라고 해봐야 세계적인 악당이나 악의 무리들이 아닌 동네에서 성인오락실을 하는 조폭이다. 그러니 이들을 상대하는데 엄청난 괴력(지구를 거꾸로 돌리거나 날아다니는 등)은 필요 없다. 단지 싸움을 좀 잘하고, 힘이 남보다 조금 센 정도면 된다. 실제로 나도열이 가진 남다른 능력이라고 해봐야 천장에 붙는 정도가 아닌가. 그 정도 실력이면 K-1이나 프라이드에 나가도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러니 미국의 수퍼 히어로들, 액스맨이나 스파이더맨, 수퍼맨 등과 싸운다면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우리네 나도열이나 미국의 <헐크>나 똑같이 열 받아야 힘을 쓰는 건 마찬가지지만 나도열은 헐크가 가진 존재론적인 고민을 갖고 있지 않다. 가볍게 촐랑거리면서 기꺼이 변신하기 위해 야한 것들을 찾는다. 괜스레 존재론적 고민을 담는 척 하지만 사실은 돈을 벌어들이겠다는 목적을 가진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음흉함보다야 순수하지만, 그래도 “왜 우리네 수퍼 히어로는 이다지도 왜소한 걸까”하는 탄식은 남는다. 그것은 아마도 미국과 일본, 중국, 러시아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우리네 국제정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수퍼 히어로에 대한 풍자
힘이 곧 법인 세상. 현실적인 힘이 없으니 그 잘못된 세계에 대해 풍자라도 할밖에. 다행히도 <흡혈형사 나도열>은 코미디영화다. <나도열>은 잘난 체하고 폼잡는 수퍼 히어로들에 대한 강렬한 풍자 그 자체이다. 그 막강한 힘과 선인인 척 가장하는 얼굴 뒤에는 사실 힘의 논리가 들어있고, 이긴 자가 곧 선이라는 무언의 메시지가 숨어 있다. 여지없이 무너지는 나도열은 수퍼 히어로 이면에 숨은 속물근성을 고발한다.

블록버스터 헐리우드 영화들이 전 세계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려는 점에서 보면 그들 역시 미국이 만들어낸 수퍼 히어로의 행동과 다를 바가 없다. 수퍼 히어로들의 틈바구니에 낀 서민들은 언제까지 그들의 쇼를 보고만 있어야 할까. 서민들의 공격은 수퍼 히어로가 현실성 없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걸 폭로하는 것이다. 실로 블록버스터 속에서는 불가능한 미션(mission impossible)이 가능한 일이 되고, 얼굴만 인간으로 바꾼 수퍼맨과 배트맨이 즐비하게 등장한다. 그 우스꽝스런 이야기가 먹히는 것은 그 자극적인 롤러코스터 효과 때문이다. 영화라기보다는 놀이기구를 타는 듯한 기분, 그것이 블록버스터의 실체다.

수많은 나도열들의 1인 시위
지금 우리네 극장가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공격을 막아주던 스크린 쿼터라는 방패막이 뚫린 채, 미국산 수퍼 히어로들이 극장가를 공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션 임파서블3>가 연휴 극장가를 평정했고, 그 뒤를 <다빈치 코드>가 준비하고 있다. 이 절대절명의 시기에 <엑스맨 3>와 <수퍼맨 리턴즈>가 들어온다는 것은 실로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류 바람을 타고 조금씩 그 덩치를 키워가던 우리네 영화는 이제 우리만의 블록버스터를 키워야할 때다. 우리에게는 <올드보이>가 있고, <태극기 휘날리며>가 있으며, <왕의 남자>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각광받는 이 한류 영화가 우리네 블록버스터이다. 방패막이 없어졌다면 이제 우리도 저 적지로 파고들어야 한다.

하지만 걱정되는 것은 전 세계의 영화가 블록버스터들의 격전장이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이렇게 덩치 큰 영화들만 자꾸 극장에 걸리다가는 덩치는 작지만 보석 같은 영화들은 상대적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다. 특히 지금처럼 극장이 체인화되어가는 마당에는 잘 나가는 영화들만 대접받는 상황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왕 받은 열, 식히지나 말자
왜소하고 서민적인 영웅, <흡혈형사 나도열>은 우리네 영화계의 현실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 스크린 쿼터 일수가 축소되고 헐리우드의 블록버스터들이 일제히 융단폭격을 준비하고 있는 지금, 많은 영화인들의 1인 시위는 마치 <흡혈형사 나도열>을 보는 듯해 마음이 아프다. 끝없이 비판하고 풍자하고 있지만 정작 관객은 별로 없는 것 같아서 말이다.

이 상황은 중국식 무협영웅들처럼 이런 사태가 오기 전에 미리 준비해왔다든가, 미국식 수퍼 히어로들처럼 본래부터 힘이 세거나 특별한 약을 먹었다든가 하는 것 없이, ‘열 받아야’ 그제서야 힘을 쓰는 우리네 정서하고도 어쩌면 그리 닮아있는가. 부디 받은 열이라도 쉬 식혀 잊혀지는 사태는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부디 1위 시위하는 나도열들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 못할망정, 지네들 밥그릇 찾기라는 오명을 씌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은 신문사 국장으로 하여금 스파이더맨과 수퍼맨을 악당으로 몰아가게 했던 저네들의 전술에 말리는 격이 될테니까.

<도마뱀> 저주받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

깊은 상처를 겪어본 사람들은 말한다. 상처 없이 사랑할 수는 없을까. 하지만 그들 스스로 알고 있다. 상처 그 자체가 사랑이라는 것을.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안전했던 경계를 포기하고 침범을 허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계를 포기했기에 사랑할 수 있지만, 또한 그 사랑은 상처를 전제로 한다. 결국은 헤어질 수밖에 없는(사람은 누구나 홀로 죽는다) 운명을 타고난 우리들은 그래서 꿈꾼다. 저 멀리 있는 저 별에, 사라진 내 님이 살고 있다고.

저주받은 인간
불치병이나 시한부 인생에 대한 영화 드라마가 관심을 받는 것은 그것이 바로 유한한 우리 인간들의 운명을 다룬 것이기 때문이다. 길거나 짧은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우리는 짧은 생애를 마감하고 저 세상으로 떠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사랑에는 반드시 이별이 따른다는 말은 어디에나 해당된다.

<도마뱀>은 바로 그 헤어질 수밖에 없는 저주받은 인간의 사랑과 운명에 대한 이야기다. 노란 우비를 보호막처럼 입고 다니는 저 맹랑한 아이, 아리가 저 스스로를 ‘저주받은 아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저 ‘저주받은 인간’의 운명과 같은 맥락의 이야기다.

보호막 치기, 혹은 경계 긋기
날카로운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처럼 아리는 자기 주변에 보호막을 친다. 노란 우비가 그렇고 입만 열면 쏟아내는 거짓말이 그렇다. 땅바닥에 금을 그어놓고 그 선을 넘지 말라는 것 역시 마찬가지의 보호막 치기이다.

그런데 그런 아리의 보호막을 넘어오는 소년이 있다. 조강. 이름에서부터 풍겨나듯 그는 아리의 ‘조강지부’같은 인물이다. 노란 우비를 넘어서 살갗을 마주 대고, 아리의 거짓말을 진짜로 받아들이며, 바닥에 그어놓은 금을 어느새 넘어버린다.

그러자 자신을 보호하려던 아리의 보호막은 이제는 그녀를 사랑하는 조강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한 경계가 된다. 금 하나를 넘어오는 그 순간, 위협을 느끼면 꼬리를 자르고 사라져버리는 도마뱀처럼 그녀는 종적을 감춘다. 그녀가 느끼는 위협은 다름 아닌 누군가를 영원히 사랑할 수 없는 저주받은 자신이 조강을 사랑하게 될까 하는 점이며, 자신이 이미 사랑하는 조강이 사랑 받을 수 없는 저주받은 몸의 자신을 사랑하게 될까 하는 점이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꼬리를 잘랐던 도마뱀은 이제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보호하기 위해 꼬리를 자른다.

죽음을 앞둔 연인, 별을 꿈꾸다
경계를 확실히 긋기 위한 몸부림으로 아리는 외계인이 된다. 외계에서 왔으니 저 별로 돌아가야 한다. 그 거짓말은 그러나 이제 다 큰 조강이 믿기엔 너무나 허황된 것이다. 하지만 절박한 연인의 죽음을 눈앞에 둔 인간에게 믿지 못할 것이 어디 있을까. ‘그녀는 죽은 것이 아니고 저 별에 잠시 먼저 간 것이다. 언젠가 돌아올 것이다.’

아픈 아리를 위해 미스테리 서클을 그리며 UFO를 부르는 조강의 마음 속에는 꼿꼿이 세워진 아리의 가시까지 껴안으려는 안간힘이 있다. 영원한 이별을 앞둔 연인에게 UFO가 나타난들 대수일까. 죽음 앞에서 우리는 유령을 만나기도 하고, 들꽃으로 별로 다시 살아난 연인을 만나기도 하지 않는가. UFO와 우주인은 이 시대의 들꽃이며 별이고 유령이다.

멜로인가, 미스테리인가
영화는 강혜정, 조승우라는 연기파 배우들의 힘으로 움직인다. 아이디어는 여기저기 번뜩이지만 유기적인 구성은 조금 산만한 편이다. 황인호씨의 원작, <아리조강 납치사건>과 <도마뱀>을 비교해보면 감독은 약간은 만화적인 이 시나리오를 영화화하면서, 그 만화적 색채를 최대한 줄이고 영화적인 공감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아리조강 납치사건>은 저 코엔 형제의 <아리조나 납치사건>처럼 훨씬 더 비현실적이다. 멜로를 추구하고 있지만 이야기의 흐름은 공감을 일으킬 만큼 충분히 그럴 듯하지 못하다. 하지만 <도마뱀>에 와서 그런 색채들은 많이 줄어들었다. 굳이 붙이자면 ‘미스테리 멜로’를 어느 정도 완성한 셈이다.

하지만 공감은 단순히 남녀간 사랑의 이야기나 최루성 신파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보다 깊은 공감을 만들려면 저 셰익스피어의 비극이 그렇듯이 그 안에 인간의 운명이나 존재 같은 깊은 통찰력이 깔려 있어야 했다.

<도마뱀>은 좋은 소재에 좋은 아이디어에 훌륭한 연출까지 모두 괜찮은 영화의 틀을 갖추었다. 아쉬운 것은 ‘도마뱀’이라는 철학적인 제목을 가진 이 영화가, 그런 깊은 울림까지는 획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미스테리와 멜로가 만나 휴먼 드라마로 연결됐더라면 오래두고 감동할 수 있는 영화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돋보이는 것은 기존 멜로 영화들의 천편일률적인 스토리와 모범답안 같은 연출을 조금은 벗어나 있다는 점이다.

인간인 우리들은 누구나 마음 속에 도마뱀 하나씩을 가지고 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혹은 사랑하는 이에게 상처주지 않기 위해, 도마뱀은 번번이 꼬리를 잘라왔다. 영화 <도마뱀>은 우리 생애에서 자르고 도망쳤던, 그래서 기억 속에 서서히 버려진 그 꼬리를 기억하게 만든다. 혹은 그렇게 영원히 잘라내려 했지만 계속 돋아나기만 하는 꼬리를 가진 인간의 운명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말 퀴즈 프로그램 참여기

우여곡절 끝에 <우리말 겨루기>에 출연했다. 무려 스무 번도 넘게 낙방한 끝에 올라간 자리였지만 실력이 부족했는지 1단계에서 맨 꼴찌로 떨어졌다. 기분이 좋았던 것은 방송을 만드는 분들의 진지함 때문이었다. 그 진지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어줍잖은 방송출연의 경험 때문이었을까. 필자는 우리말에 대한 시청자들의 관심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래서 TV속 네모난 세상을 둘러보니, 요즘 방송에는 ‘말이 올라야 시청률이 오른다’고 해야할 만큼 우리말에 대한 프로그램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걸 감지할 수 있었다. 영상의 물결이 봇물을 이루는 이 시대에 우리말과 우리글에 대한 프로그램이 많아지는 이유는 도대체 왜일까.

TV매체와 인터넷 세대
인터넷이라는 쌍방향 미디어의 탄생은 TV의 전망을 불투명하게 할거라는 막연한 추측과는 정반대로, 최근 TV와 인터넷 사이는 신혼부부처럼 따끈따끈하다. TV가 가진 영향력과 인터넷의 양방향성이 만나면서 그 폭발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SBS <야심만만>은 MSN의 사용자 ‘만 명에게 물었습니다’를 통해 그 소재를 발굴해내고 있고, 최근 인기가도를 달리고 있는 KBS <상상플러스> 역시 포털사이트 네이트의 설문조사 및 검색을 활용하고 있다. 이것은 수동적인 시청자가 아니라 직접 참여하는 인터넷 세대들을 적극 끌어들이려는 TV의 노력과, TV라는 거대매체에 자사의 간접광고효과를 노리는 인터넷 매체간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은 또한 실생활에 깊게 들어와 있는 ‘TV와 인터넷(요즘은 이 말을 거의 한 단어처럼 같이 사용하는 것 같다)’의 영향력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 젊은이들이 나누는 대화의 대부분은 TV 프로그램인 경우가 많고, 그 TV프로그램에 대해 가장 격렬한 말이 오고가는 곳이 바로 인터넷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니 ‘의견을 받아들여 방송을 한다’는 형식은 여러모로 유용한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이 있다. 네티즌들이 알게 모르게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해 의견을 개진하면서 민감해진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언어’이다. 소위 말하는 댓글, 악플, 노플 등은 네티즌들에게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 양식(糧食)인가 하는 것을 말해준다.

영상세대들은 글을 멀리할거라고?
한때 영상세대니 뭐니 하면서 이제 그들에 의해 문자는 버려지고 영상만 남을 거라는 오해를 심어줄 만한 신문사설들이 줄을 이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이건 매체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처사다. 매체는 신문 같은 문자매체와, 방송의 영상매체, 그리고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전자매체가 있는데 당시에 죽게된 것은 문자매체였을 뿐, 문자 그 자체는 아니었다. 글, 말, 문자는 고스란히 영상매체 속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전에 없는 수많은 글들을 읽어가며 영상을 보게 되었다. 신문의 기능은 그대로 인터넷 신문으로 넘어오면서 보다 역동적(interactive)으로 변모했다. 오히려 영상세대들은 문자에 더 민감해졌다. 신문이 일방적으로 문자를 던졌을 뿐이라면 이들은 그 문자가 던져지는 동시에 수많은 다른 이들의 의견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영상세대들이 문자를 멀리할 거라는 기존의 통념을 뒤엎고 오히려 문자에 민감하게 된(문자메시지의 범람을 보라!) 전후 사정이다.

말이 오르는 프로그램이 잘 나갈밖에
그러니 언어를 다루는 프로그램은 초미의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말 겨루기>는 KBS가 아마도 공영방송이라는 취지를 갖고 시작한 프로그램이었던 것 같다. 2003년 정재환이 진행하던 이 프로그램은 이제 한석준 아나운서로 바톤을 이어가고 있다. 초창기에 이 프로그램이 그렇게 인기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최근 들어 우리말에 대한 비상한 관심들은 그대로 이 프로그램의 인기에 불을 붙였다. 같은 월요일 연예오락프로그램인 <야심만만>이 16% 정도의 시청률을 기록하는데, 시사교양프로그램인 <우리말 겨루기>가 14%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하는 것은 경이적인 일이다. 이 프로그램의 인기비결은 첫째 인터넷을 통해 시청자들이 직접 참여하는(방송까지) 프로그램으로 매니아층이 두텁다는 것이고, 둘째는 정통 퀴즈프로그램이 갖는 긴박감이 시청자들에게 손에 땀을 쥐는 재미를 준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특정한 지식이 아닌 우리말 겨루기라는 특성이 있어 누구나 참여가 가능하고, 거기서 잘만 하면 꽤 많은 상금을 얻을 수도 있다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말에 대한 정보냐? 오락이냐?
하지만 <우리말 겨루기>와는 다른 <상상 플러스>의 ‘올드&뉴’와, 이러한 추세에 발맞춰 MBC에서 야심 차게 기획한 사투리 퀴즈쇼 <말 달리자>는 시청률 상승의 요인이 조금 다른 곳에 있다. 당연한 것이지만 연예 오락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우리말 겨루기>가 추구하는 정보의 즐거움보다 오락에 더 치중한다는 것이다.

<상상 플러스>의 ‘올드&뉴’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 사람들은 ‘바로 이거다!’ 하고 손뼉을 쳤을 것이다. ‘세대간의 벽을 허문다’는 취지에 많은 사람들이 동감했고, 그 재미있는 진행에 빠져들었다. 노현정이라는 재치 있는 아나운서의 전격기용은 프로그램의 균형(재미와 정보)을 유지하는 역할을 해주었다(적어도 처음에는). 하지만 ‘혹시나’는 ‘역시나’로 흐르고 있다. 명분을 어느 정도 쌓고 시청률이 본 궤도에 오르자 본격적으로 재미를 추구하게 됐고 그러자 정보성은 퇴색되었다. 그러자 올바른 말을 추구한다던 이 프로그램의 취지가 무색하게도, 출연자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바로 네티즌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최근에 시작한 MBC의 <말 달리자>는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주는, 사투리를 알자는 좋은 취지로 일단 초기의 합격점을 받은 듯 하다. 사투리로 일반인이 설명하고, 그 문제를 푸는 연예인들의 답답함은 웃음을 자아내게 하면서도 우리 사투리를 다시 보게 하는 힘이 있다. 이 프로그램에는 연예인들(가수, 배우, 개그맨을 망라한)은 물론, 아나운서, 국립국어원에서 나온 전문가까지 실로 종합선물세트라고 할 만큼 각계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것은 역시 재미와 함께 정보성(교육성)을 최대한 가미하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하지만 저 <상상플러스>가 초기의 뜻과는 달리, 개봉하는 영화나 신보의 홍보마당이 되는 현상을 보면서, 그 뜻이 얼마나 갈지 귀추가 주목된다.

소통부재의 세상, 유쾌한 웃음의 장이 되길
우리말에 관련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등장해 호응을 얻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소통부재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세대간의 언어장벽은 그렇지 않아도 깊은 세대간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어 버린다. 사투리는 이제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지만 이 아름다운 지역색은 상호간의 깊은 이해가 없이는 정치적으로 이용될 소지가 다분하다. 따라서 서로의 사투리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이 그 지역 간의 골을 없애는 길이다.

굳이 ‘말이 올라야 나라가 오른다’하고 거창하게 말할 필요는 없다. 단지 우리말을 가지고, 지역을 불문하고 남녀노소가 함께 웃고 즐길 수 있는 장이 펼쳐지길 기대할 뿐이다. 아쉬운 것은 시사교양 프로그램으로서 당연한 것이지만, <우리말 겨루기>가 그나마 세대간의 장벽을 넘어서 누구나 쉽게 즐기는 프로그램인 반면, 다른 오락 프로그램들은 젊은 세대들만 공감하는 프로그램인 것 같다는 점이다. 부디 이 좋은 ‘말의 잔치’가 그들만의 ‘말잔치’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굿바이 솔로> vs <크래쉬>

요즘 드라마나 영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것이 다중스토리 구조이다. 하나 혹은 둘의 주인공 캐릭터가 나와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전통적인 스토리 구조가 아닌, 여러 인물들이 똑같은 가치를 갖고 등장해 각자의 이야기를 해나가면서 전체적인 울림을 만들어내는 구조이다. 아마도 우리는 <러브 액추얼리>나 <숏컷> 같은 영화를 통해 그 구조를 친숙하게 느꼈을 것이다. 최근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굿바이 솔로>와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크래쉬>로, 이제 이 실험적인 구조는 더 이상 실험적이지 않은 하나의 관습이 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 이렇게 주인공들이 많은 걸까
이 구조가 하나의 관습이 되고있는 이유는 개인화되고 파편화되는 현대인들의 드라마 구조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전통적 스토리 구조가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가족 간의 고리마저 희미해진 현대인들은 각기 하나의 섬처럼 사회 속에 존재하는데 그들의 얇기 만한 관계를 그려내는데 있어 어느 한 캐릭터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는 것은 자칫 독선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등장하는 <시리아나>, <뮌헨> 등 일련의 영화들이 의도적인 드라마 엮기가 아니라, 인물들 간의 부딪침을 그저 보여주는 마치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을 주는 것 역시 의도적으로 작가의 손길을 배제함으로써 복잡다단한 사회를 그대로 보여주기 위한 노력에 기인한 것이다.
하지만 <크래쉬>와 <굿바이 솔로>가 같은 다중스토리 구조를 갖고 있으며 또 둘 다 현대인들의 문제를 다룬 것이지만, 이 두 스토리는(영화와 드라마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제작된 곳의 거리만큼 하고자하는 이야기의 거리도 멀다.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 <크래쉬>
<크래쉬>는 어느 교통사고 현장에서부터 시작한다. 왜 사고가 난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갖기 시작할 즈음, 영화는 하루를 되돌려 그 사고의 이유에 모든 주인공들이 어떤 역할을 했다는 것을 ‘집착적’으로 잡아낸다.

요로병에 걸린 아버지 때문에 신경이 잔뜩 날카로워 있는 라이언 경관은 흑인부부 카메론과 크리스틴에게 굴욕감을 안겨주고, 두 명의 흑인사내인 피터와 앤소니는 검사의 차를 강탈하고 도망치다 한국인 조진구를 치게 된다. 이란인 파라다는 가게가 털린 것을 열쇠수리공 대니얼의 탓으로 돌리고, 결국 가게를 지키기 위해 사들인 총으로 열쇠수리공 대니얼에게 들이댄다.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두려움에 떨면서 상대방에 대한 과잉방어로 일관한다. 그러다 이야기는 급반전을 하게 되는데 교통사고를 당한 크리스틴을 이번에는 라이언이 구하게 되고, 파라다가 열쇠수리공 대니얼에게 총을 쐈을 때, 그것을 막기 위해(?) 뛰어든 대니얼의 딸(딸은 대니얼의 말을 믿고 자신은 불사신이라 생각했다)을 파라다는 천사로 여기게 된다(본래 그 총의 총알은 공포탄이었다).

이 영화는 911테러 이후, 어떤 사고가 일어난 후 겪는 극도의 스트레스인,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에 시달리는 미국사회를 고스란히 보여주면서, 그 부딪침을 사실은 ‘서로에 대한 느낌이 그리워서, 서로를 느끼기 위해서’ 충돌하는 것이라고 화해시킨다. 이러한 강박적인 화해는 아마도 작가인 폴 해기스 스스로도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찌 보면 억지스런 화해와 관계(LA가 그렇게 좁은 동네인 지 몰랐다! 인물들이 그렇게 극적인 순간에 다 만나게 되다니!)를 받아들이고 이 작품에 아카데미 작품상을 준 미국은 아마도 똑같은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의 동병상련 속에서 그 이야기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섣부른 화해의 제스처가 가져올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인종차별주의자로 보여지는 라이언이 직권을 남용해 성폭력을 했던 크리스틴을 사고현장에서 구했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란인 파라다가 운 좋게도(?) 공포탄을 쏴서 대니얼의 딸을 살릴 수 있었고 그래서 그녀를 천사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의 살인미수가 덮어지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작가의 바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반전은 이미지적으로 관객들에게 이미 해결점을 보여주어 어떤 문제에 대한 논의를 덮어버리는 우를 범하고 만다. 사실은 뒷짐 지고 캐릭터들이 스스로 살아 움직이면서 부딪침을 만들도록 작가는 내버려두었어야 했다. 그러나 작가의 강박은 그걸 허용하지 못해 결국 인물들을 인형으로 만들어버렸다. 결국 이 좋은 소재의 스토리는 하나의 교훈적인 우화가 되고 말았다.

<굿솔>, 사회에 대한 비판과 인간에 대한 신뢰
반면 노희경 작가의 <굿바이 솔로>에는 이야기 흐름에 있어서 작가의 개입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그것은 작가가 드라마를 시작하기 전에 미리 인물 속에 자생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상처) 철저히 숨겨두었기 때문이다. 폭력남편으로부터 보호해주겠다고 한 딸과의 약속을 저버린 자책감에 말을 하지 않는 미영 할머니(나문희 분), 어린 시절 지긋지긋했던 가난으로 병져 누운 어머니를 죽게 만들었다는 자책감을 갖고 살아가는 영숙(배종옥 분), 뒤늦게 자신의 아버지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집을 뛰쳐나온 민호(천정명 분), 복수심으로 민호의 집으로 들어와 살면서 민호의 사정을 알게되고 괴로워하는 지안(이한 분), 장애가 된 한 여인에게 순정을 갖는 깡패 호철(이재룡 분) 등등 이 드라마의 인물들은 애초부터 문제를 갖고 출발한다.

이 인물들이 <크래쉬>에서와 다른 점은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명확히 알고 있으며 또 그 문제를 회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문제를 피해서 달아난 인물들로 드라마는 시작하지만, 결국 이들은 자신의 문제들을 직면하고 이겨낸다. 그들은 두려워하고 아파하지만 그렇다고 도망치지는 않는다. <크래쉬> 등장하는 인물들의 문제를 아는 것은 그 영화를 만든 작가와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지, 등장인물들이 아니다. 그러니 그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기대는 애초부터 가지지 못한다. 그들은 인형처럼 수동적인 반면 <굿바이 솔로>의 인물들은 대담할 정도로 능동적이다.

이러한 인물들의 능동성과 수동성은 작품의 방향성에 있어 커다란 차이를 만들어낸다. <크래쉬>에서는 모든 인물들이 ‘작가에 의해 주어진’ 한 방향성을 갖고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지만, <굿바이 솔로>에서는 능동적으로 각자의 문제에 부딪친다. 그들은 잃은 만큼 얻어간다. 작가의 작품과의 거리가 이러한 차이를 만든다. 이로써 <굿바이 솔로>는 <크래쉬>가 억지로 얻으려 했으나 얻지 못한, 다중스토리가 그 구조적으로 얻어야할 주제를 얻어낸다. 각자의 군상들이 어떤 아픔을 주는 사회적 구조 속에서 각자 다른 방법으로 해결을 모색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드라마가 보여주는 카메라 밖에서(사회) 상처를 입고 카메라 안으로 들어온 인물들은 서로 아파서 부둥켜안으면서 상처를 핥아준다. 이것은 치유라기보다는 위안이다. 대신 그 위안 뒤에 작가가 하는 말은 사회(혹은 제도)에 대한 강한 비판과 사람에 대한 강한 신뢰이다.

둘 다 다큐멘터리 같은 드라마를 보여주지만
다중 스토리가 얘기하는 세계는 수평적이다. 어느 한 인물에 의해 드라마가 움직이지 않는다. 사회는 수많은 인물들의 이야기들과 그 부딪침으로 움직인다. 그것은 어찌 보면 다큐멘터리 같다. 이런 수평적인 얘기를 하는데 있어서 작가가 해야할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관계에 개입하기보다는 사회의 문제를 대변하는 인물들을 창조하는 것이다. 창조된 인물들에게 생명을 넣어 사회라는 다큐멘터리의 세계 속으로 투입한 후 벌어지는 드라마를 관전하는 것이다. 물론 작가의 의도가 없을 수 없다. 하지만 그 의도는 억지로 짜진 스토리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물 속에 들어 있어야 한다.

물론 드라마가 가진 길이와 영화가 가진 길이의 차이가 이런 결과를 낳았을 수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2시간 남짓의 <크래쉬>라는 영화가 인종의 용광로로 상징화시킨 LA라는 거대한 지역을 배경으로 한 반면, 16부작에 걸친 <굿바이 솔로>의 배경은 서울의 어느 작은 한 동네라는 것이다. 보다 포괄적인 사회문제를 포착하기 위해 거대한 지역을 선택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오히려 많은 인물들을 억지로 얼기설기 엮는 부작용을 낳을 가망성이 높다. 반대로 축소판 속에서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한 <굿바이 솔로>는 깊이라는 선물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위의 비교는 그 이야기가 제공하는 사회문제의 심각성을 배제한 것이기 때문에 무엇이 낫고 무엇이 그르다고 하기 어렵다. <크래쉬>가 처한 미국의 현실은 <굿바이 솔로>가 보여주는 우리네 현실보다 더 심각할 수 있다. 어쩌면 <크래쉬>의 이 억압적이고 강박적인 드라마의 등장(과 그 적극적인 수용)은 미국 사회가 가진 병리적인 상태를 모두 말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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