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콘서트>의 일본진출, 그 의미  

<개그콘서트>의 일본공개공연을 앞두고 박준형은 “개그의 한류를 위해 일본 열도에서 무를 갈겠다”고 했다. 드라마와 가수에 이어 개그에서도 한류바람을 일으키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일본의 개그맨들이 우리네 프로에도 등장하고 있어 관심을 끈다. KBS의 <개그사냥>에 일본 니혼TV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활약하고 있는 개그지망생, 묘짱이 등장한 것이다. 그는 니혼TV에서 방영 중인 <아시아 개그를 정복하라>는 프로그램 출연자로, 일본이 아닌 해외 개그프로그램에서 데뷔하라는 프로그램의 미션을 수행 중에 있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인가. 아니면 본격적으로 시작된 개그의 한일전인가. 혹은 우리네 개그가 가진 한계를 넘기 위한 자구책인가.

우리는 일본에 민감하다. 한일전은 그 종목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무조건 이겨야 된다. 월드베이스볼 클래식에서 맞닥뜨린 일본을 일본 본토에서, 그리고 야구의 본고장 미국에서 연달아 이기는 것만으로, 그동안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던 WBC의 주가는 급상승했다. 경기는 한일전을 기점으로 국가전의 양상을 띠면서 전례 없는 야구거리응원까지 펼쳐졌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4강 위업을 달성했고, 우승은 우리가 두 번이나 꺾은 일본에 돌아갔으니 그들도 체면은 차린 셈이었다. 그럼 갖은 수모를 다 겪은 미국은 뭘 챙겨갔을까. 그들은 돈을 챙겨갔다. 비용 4500만∼5000만 달러, 순익은 1000만∼1500만 달러. 게다가 이 대회를 통해 당초 목표로 했던 메이저리그의 세계화도 이루어졌다고 하니 이건 주최측이 한일전을 조장한 건 아닌가하는 기분까지 든다. 한일전은 돈이 된다.

그렇다면 개그의 한일전은 벌어질 것인가. <개그콘서트>가 등장하면서 국내의 정통 개그 프로그램은(쇼 프로그램이 아닌) 모두 같은 색깔의 옷을 입게됐다. 공개방송. 스탠딩 개그, 무한정 투입되는 아이디어, 새로운 얼굴과 끝없는 물갈이... 그러나 끝없는 아이디어 산출이 가져온 것은 시청률 상승과 함께, 개그맨의 단명이다. <개그콘서트>는 한 마디로 엄청난 개그의 인해전술을 방불케 한다. 양이 많아지면 그만큼 주의력은 흩어지게 마련. 결과적으로 어느 정도 뜬 개그맨들은 하나둘 그 아이디어 전쟁에서 밀려나 새로운 분야(방송진행, 드라마, 영화, 연극, 뮤지컬 등을 보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개그콘서트>의 성공은 어찌 보면 개그맨들의 살을 깎는 경쟁과 대전을 통해 이룬 것이다. 그렇게 피를 말려온 개그맨들이 일본이라는 생소한 국제무대에 서서 당당히 일본인들을 웃기는 모습을 본다면 마음이 어떨까. 라면 먹고 한 개그에 눈물이라도 흘릴 것인가.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WBC가 끝나고 야구에 대한 우리들의 관심이 국내야구경기로 옮겨왔는가 하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국내경기를 마치 동네야구처럼 생각하게 되지는 않았는가. 야구하면 메이저리그라는 등식이 더 공식화된 건 아닐까. 탄탄한 지원이나 확실한 기반 없이 해외에서 한번 보여주는 선방은 분명 우리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구석이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통해 우리네 사정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마치 개그콘서트의 무대에서 주목을 끌었다고 해서 그 개그맨의 실제 사정이 그다지 나아지지 않는 것과 같다.

도저히 웃음이 나오지 않는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웃음을 만들어내는 개그맨들은 그 어느 정치인들보다, 경제인들보다, 의사보다, 더 존경받을 만하다(물론 가끔 개그맨들을 능가하는 정치인들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저 <왕의 남자>에서 조선시대 개그맨, 장생과 공길을 통해 보았듯이 그저 ‘웃기는 잡놈’이 아닌 예술가에 가깝다. 그네들의 건전한 살판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네 개그가 어느 한 권력에 잡혀 획일적으로 흐르지 않고, 다양한 정통 개그 프로그램의 시도를 통해 이미 발굴된 개그맨들을 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웃음을 찾는 사람들(개그맨들)은 많다. 그런데 그들이 설자리는 왜 장생이 섰던 외줄 밖에는 없는 걸까.

<넌 어느 별에서 왔니> vs <봄의 왈츠>

<넌 어느 별에서 왔니>를 보고 있으면 정말 묻고 싶어진다. “너희들 외계인이니?” <소림축구>에서 주성치가 만두가게 처녀 아매에게 했던 말을 빌려, “네 별로 돌아가”라고 농담이라도 걸고 싶어진다. 그리고 진짜 묻고 싶은 건 드라마 제목처럼 “도대체 넌 어느 별에서 온 거니?”하는 질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묻고 싶은 또 한 사람이 있으니 같은 별에서 왔으나 지금은 서로 다른 입장에 서서 경쟁하고 있는 다니엘 헤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이 핸섬가이는 떠듬떠듬 서투른 우리말 몇 마디로도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외계인으로 돌아간 정려원과는 정반대로 한국인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돌아왔다.

그들이 온 별은 어디?
정려원이 처음 그 몸을 숨긴 곳은 27살 유희진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맑게 웃는 모습이 아름다운 스마일페이스였지만, 그 속에는 끔찍스러운 아픔이 남아 있었다. 암으로 인해 위를 절제했던 것처럼 그의 첫사랑 진헌과의 관계도 도려내졌고, 다시 돌아온 자리에는 김삼순이라는 어마어마한 공력의 소유자가 떡 하니 앉아있었다. 김삼순의 엉뚱함과 서글서글함에 맞서는 인물로, 정려원은 다소 어울리지 않는 무거운 얼굴의 화장을 해야했다.

그때 그녀의 무거움을 덜어주는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같은 별에서 온 다니엘 헤니라는 인물이다. 김삼순과 진헌을 두고 경쟁한다는 절망적인 설정에서 그녀를 끄집어내준 다니엘 헤니는 여러모로 그녀와 같은 과였다. 유창한 외국어에, 이국적인 쿨한 이미지, 보고만 있어도 마냥 기분이 좋아지는 맑은 얼굴... 그들은 진헌을 두고 김삼순과 경쟁한다는 드라마 속 구도에서 자꾸만 벗어나 같은 별 출신 특유의 더 잘 어울리는 한 쌍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별에서 정려원은 본래 호주의 맑은 하늘같은 이미지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그녀가 나온 그리피스 대학이 있는 골드코스트의 파란 하늘과 따뜻한 햇볕, 그 볕에 적당히 달구어진 바다의 열정을 고스란히 갖고 있었다. 아무리 무거운 얼굴의 화장이라 해도 그걸 숨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두 번째로 그 몸을 숨긴 <가을 소나기>의 박연서라는 인물은, 유희진이었을 때보다 더 심각했다. 다니엘 헤니도 없던 그녀는 절친한 친구를 사랑하는 남자를 옆에서 짝사랑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 드라마를 통해 정려원은 그저 대책 없이 맑기 만한 것이 아닌 눈물을 펑펑 흘려도 잘 어울리는 새로운 이미지 하나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좀더 심플하면서도 강력한 명랑함, 그 명랑함의 뒤편에 남는 우수... 마치 찰리 채플린의 슬랩스틱에서 한껏 웃은 뒤에 남는 애잔한 감정 같은 그런 얼굴이었다. 다시 자기 별로 돌아가 망원경으로 새로운 얼굴을 찾던 정려원은 이제 제대로 된 얼굴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복실이의 얼굴이다.

웃겨야 산다
<넌 어느 별에서 왔니>에서 정려원은 먼저 혜수(김래원의 옛 애인)라는 과거의 이미지를 교통사고로 지워버린다. 그리고 복실로 태어난다. 착하게도 자신의 사고로 죽은, 과거 이미지를 가진 정려원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김래원은 차츰 복실로 다시 태어난 정려원의 이미지에 빠져든다. 처음 몇 번은 과거와 현재를 혼동하지만 이제 과거는 묻혀지고 현재의 모습에 더 빠져드는 것이다. 복실을 만난 정려원은 제 물 만난 고기처럼 거침없이 순수한 모습(심지어는 바보스러운)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사실 제 별에서 놀던 그 모습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모습은, 어른들의 세계인 도시에 와서 오히려 빛을 발한다. 그녀의 거칠 것 없이 터져 나오는 촌스러움에 그녀를 바라보는 이들은 웃음이 터진다. 하지만 그 웃음은 이상하게도 웃을수록 마음에 애잔함을 남기는데, 그것은 그녀가 비판하고 있는 대상, 그녀가 웃음을 만들어내는 원천이 바로 우리네 도시인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한참 웃다가 한숨이 나온다.

울어야 산다
한편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같은 과라는 것을 확인했던 또 다른 별에서 온 다니엘 헤니는 정려원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된다. 정려원은 시골소녀로 환골탈태, 웃다가 울리는 진정한 개그의 길을 가고 있는 반면, 다니엘 헤니는 <봄의 왈츠>를 통해 절대로 울 것 같지 않던 조각 같은 얼굴에 조금씩 슬픔을 담아낸다. 아직 그 얼굴이 완전히 드러난 건 아니지만 “이러다가 다니엘 헤니가 우는 걸 보게 되는 거 아냐?”하고 생각할 정도로 드라마의 분위기는 그의 아픔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다.

기구한 운명의 장난으로 정려원은 웃겨야 살고, 다니엘 헤니는 울려야 사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다니엘 헤니가 그 외계인의 이미지에서 점점 우리네 정서에 맞는 한국인의 모습(정스러운)으로 다가가는 반면, 정려원은 도대체가 종잡을 수 없는 외계인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그러자 드라마는 땅과 하늘의 모습으로 진전되었다. 땅에는 봄이 만연하고, 하늘에는 별이 반짝였다. 땅을 보나 하늘을 보나 쳐다보기만 해도 즐거운 그 얼굴들이 있기에 월화가 아름답다.

<봄의 왈츠> 상처에 대한 변주곡

한 사람의 마음 속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상처와 그 아문 흔적들이 있는 걸까. 지금 웃고 있는 저 얼굴 뒤에는 얼마나 많은 아픔들이 숨어있을까. 상처들에 의해 만들어진 나의 얼굴은 또 얼마나 많은 걸까. <봄의 왈츠>는 이제껏 보여줬던 트렌디한 등장인물들이 사실은 그렇게 단순한 인물들이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다. 긁을수록 점점 커져만가는 딱지처럼 이 치유가 도무지 불가능해 보이는 상처들은 윤재하, 박은영, 필립, 송이나는 물론이고 그 주변인물들, 윤재하의 어머니와 아버지, 박은영의 어머니와 필립의 어머니에게까지 번지고 있다. 이제 상처들은 조금씩 몸을 간질이며 봄을 예고하고 있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이 봄의 왈츠를 추기 전에 먼저 해야될 일이 있다. 마음 속 깊숙이 너무나 깊이 숨겨두어서 마치 애초부터 없었다고 믿고 있었던 과거의 상처, 그 상처와 마주하는 일이다.

윤재하, 나는 누구인가
윤재하가 가진 상처는 마치 인간 존재 깊숙이 내재된 원죄의식에 가깝다. 윤재하는 본래 이수호였다. 그런데 그 이수호의 아버지는 그의 삶은 물론이고 그가 사랑하는 박은영의 삶을 송두리째 뽑아버렸다. 이수호는 그 깊은 죄의 공모자라는 원죄의식과 함께, 그것이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였다는 것에서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게된다. 그는 박은영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죽이는 길을 선택한다. 그는 이수호를 죽이고 윤재하로 태어났다.

윤재하는 피아노를 닮아버렸다. 어쩌면 그가 피아노를 두드리며 자라온 그 세월은 이수호의 흔적을 지우고 윤재하라는 새로운 인물을 자신 속으로 박아 넣는 아픔의 세월이었다. 그리고 20년이 흘렀다. 그런데 자신이 스스로 죽였다고 생각했던 이수호가 깨어난다. 그의 눈앞에 박은영의 실루엣이 자꾸만 어른거리는 것이다. 그가 다시 대면하게된 상처에서 그는 머뭇거린다. 박은영을 사랑하지만 그녀에게 지워질 수 없는 상처를 입힌 이수호로 돌아갈 것이냐, 아니면 그 상처를 덮고 자신을 윤재하로 믿고 사랑하는 송이나를 받아들일 것이냐.

자꾸만 거울 앞이나 유리창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볼 때의 애잔함, 피아노 건반 위에서가 아니라 가끔씩 허공을 두드리는 그의 손가락의 절망감, 마치 어떤 얘기도 꺼낼 수 없다는 듯이 악다문 입술, 고개를 가로젓거나 방을 뛰쳐나갈 때의 쓸쓸한 어깨... 그것들은 모두 그의 속에서 꿈틀대고 있는 이수호의 그림자를 보이지 않기 위한 위장술이다. 박은영이 과거의 박은영으로 드러나는 그 지점이 윤재하 속의 이수호가 깨어나는 날이다. 그것이 봄의 왈츠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박은영과 필립, 그 대책 없는 미소 뒤의 아픔
도무지 참아낼 수 없는 깊은 상처는 오히려 얼굴에 행복의 가면을 씌우는가. 참기 어려운 충격적인 사건들을 겪은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밝다못해 맑기까지 한 대책 없이 발랄하고 명랑한 현재의 얼굴을 한 그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우는’ 캔디와, 씩씩함의 대명사 김삼순의 캐릭터가 반쯤 섞인 박은영의 얼굴은 그래서인지 웃는 순간, 한숨을 내쉬는 순간에 저릿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자신이 사랑했던 이수호의 아버지로 인해 죽게된 자신의 어머니, 그리고 자신의 병 때문에 스스로의 존재를 포기해야 했던 그녀가 사랑한 이수호, 그럼에도 다시 나타난 이수호의 아버지의 꾀임에 넘어가 겪게되는(그녀는 어느 여관에 버려진 것이다. 혹은 팔렸거나.) 지울 수 없는 상처... 윤재하가 그녀 앞에 다시 나타남으로 해서 그 묻어두었던 상처들이 다시 떠오른다. 저 외딴 섬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던 소녀는 이제 낯선 서울까지 너무나 멀리 오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과거와 어떻게 화해할 것인가.

그녀 옆에 강력한 환상, 행복에로의 몰핀이 자리하고 있으니 그가 바로 필립이다. 이 유쾌한 친구는 드라마 전체의 무거움을 일순간 날려버릴 만큼 가볍다. 하지만 저 밀란 쿤데라가 말했듯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그 자체로 무거움을 내포한다. 그의 과거는 철저히 가려져 있으나 그가 은영 모의 무덤가에서 자신의 어머니도 돌아가셨다는 말을 할 때 그 어둠이 얼핏 드러난다. 굳이 혼혈의 아픔 운운하지 않더라도 그 쾌활한 웃음이 어린 시절의 어떤 상상하기 어려운 아픔을 예고하게 한다. 그는 과거보다는 현재와 미래를 보려고만 한다. 그런 그가 은영을 사랑한다. 윤재하(과거)와 필립(현재와 미래) 사이에서 은영은 갈등한다. 아프지만 진정한 사랑인 과거로 갈 것인가, 환상일지도 모르지만 아름답고 행복하기 만한 현재와 미래로 갈 것인가. 허공에 발이 1센티 정도 떠 있는 듯한 필립과 은영의 만남, 사랑의 드라마는 그래서 유쾌하면서도 아련한 여운을 남기는 것이다.

송이나와 현지숙, 자기기만이 불러오는 아픔
어느 날 사랑했던 이가 떠났을 때,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랑하는 이가 돌아올까. 송이나와 현지숙이 잡고 있는 과거 한 자락의 추억은 그래서 안타깝다. 그 둘은 똑같이 과거의 윤재하(죽은 실제 윤재하)의 영혼을 붙들고 놓지 않는다. 그러나 과연 그들은 모르고 있는가. 송이나는 다시 오스트리아에서 윤재하를 만났을 때부터 그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너 어딘가 달라 보여. 하지만 그게 더 좋아”라고 말하는 송이나 속에는 자신이 그리워했던 그가 아니지만, 그를 지금 눈앞의 윤재하와 묶어두려는 강력한 소망이 자리하고 있다. 송이나가 그럴진대 윤재하의 어머니인 현지숙은 오죽할까. 20년의 세월을 살면서 그녀의 환상은 과연 한번도 깨지지 않았을까. 그는 진짜로 지금의 윤재하를 죽은 자신의 아들로 생각하고 있을까.

송이나와 현지숙이 붙들고 있는 윤재하의 영혼은 그러나 박은영이 나타남으로 해서 조금씩 위기를 맞고 있다. 그들은 절망적으로 윤재하의 영혼에 매달리지만 그것은 사실 끝없는 자기기만일 뿐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윤재하의 존재론적 고민의 끝은 그들에게 끝없는 절망이 될 수도 있다. 윤재하가 윤재하를 포기하고 이수호가 되는 순간, 그들이 잡고 살아왔던 20여 년의 세월은 무화되고 마는 것이다. 온통 윤재하로 채워왔던 그 나날들 속에서 그가 빠져나간 후, 남게되는 커다란 공백을 그들은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매달림은 처절하기까지 하다.

아픔과 치유의 변주곡
피아노는 자신을 두드림으로 해서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우리 모두가 살아가면서 겪는 아픔은 그래서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피아노곡으로 흐르는 ‘클레멘타인’이 아프면서도 승화와 치유로 변주되는 것처럼, <봄의 왈츠>는 인물들이 부딪치면서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소리들의 변주곡이다. 작고 가녀린 영혼들이 내는 작지만 반짝이는 그 소리들을 들어보자. 혹 우리들 삶 속에서 숨겨왔던 우리네 상처들을 거기서 만날지도 모르니까.

시청률이라는 이름의 파시즘

흔히들 “예술영화는 졸리다”는 자조적인 농담처럼, 잘 만들어진 드라마와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는 항상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최근 <봄의 왈츠>, <굿바이 솔로> 같은 뚜렷한 메시지를 갖고 ‘생각하게 만드는’ 웰 메이드 드라마의 낮은 시청률은, ‘TV는 바보상자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꺼내게 만드는 씁쓸함이 있다.

조기 종영되거나 연장 방영되는 드라마가 나오는, 시청률이 지고선이 된 작금의 현실은 한편으로 ‘한류의 종주국’이라는 호칭을 무색케 한다. ‘시청률이 몇%’라는 애매한 잣대로 작품을 난도질하는 대부분의 연예기사들도 시청률이라는 바벨탑을 쌓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이것이 과연 한류라는 힘으로 전 세계 컨텐츠 비즈니스의 중심에 서겠다는 포부에 맞는 일일까.

물론 시청자들은 아무런 죄가 없다. 문제는 시청률에 올인 하는 방송사와 그런 시류에 밀착하는 제작자들,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수많은 매체들이 문제다. 그저 재밌으면 됐지. 뭐가 그리 거창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지금 우리네 드라마가 문화계 전체에서 갖는 비중을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는 얘기일 것이다. 드라마는 이제 그냥 드라마가 아닌, 우리네 문화의 견인차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지적인 시청률과 범아시아적 시청률
한류는 모든 상황들을 바꾸어 놓았는데 그 중심에 있는 것은 바로 드라마였다. 한류의 성공은 드라마 제작에 범아시아적인 투자자들을 끌어 모았다. 드라마 제작은 붐을 이루었다. 게다가 케이블을 비롯해 위성방송, DMB 등 다양한 채널들은 더 많은 컨텐츠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과거 방송사에서 하던 드라마 제작은 대부분 외주 프로덕션으로 넘어갔다. 그것이 경쟁력도 있고 비용측면에서도 유리했기 때문이다. 성공한 제작사들의 위상은 높아졌다. 드라마 제작이 활기를 띄면서, 웰 메이드 드라마에 대한 수요도 높아졌다. 쪽대본으로 상징되는 기존 드라마제작 관행은 사전제작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쪽대본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영화 제작인력들은 사전제작에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영화를 찍는 날보다 찍지 않는 날들이 많았다. 게다가 HDTV라는 환경변화에서 드라마 제작에 영화용 카메라를 사용하는 것 역시 영화 제작인력들에게 유인이 되었다.

감독은 물론, 촬영감독, 의상, 조명 등등 영화계 현장인력들은 물론이고, 이제 드라마 제작 현장은 각계 각층의 문화계 인물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조악한 현실 여건 속에서 고군분투하던 만화가, 시나리오 작가, 소설가 등은 이런 분위기를 타고 드라마 제작이라는 뜨거운 용광로 속으로 들어가 새로운 활력을 얻고 있다. 드라마 홍보 역시 영화 홍보 대행사들이 나설 만큼 전문화되었고, 선 마케팅은 드라마가 제작되기 이전에 제작비를 모두 끌어 모았다. 유통 채널은 이제 전 세계를 향해 뻗어있다. 이것이 지금의 우리네 드라마가 갖는 힘이다. 그런데 힘에는 책임이 따른다. ‘좀더 잘 만들어진’,  ‘우리네 것이 분명하면서도 보편적인 정서를 담는’, 그래서 ‘누가 봐도 재미있으면서 의미도 있는’, 그런 드라마가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숨어서 복사된 일본 드라마를 보던 우리가, 일본 본토에서 한류 열풍을 일으키는 힘을 가지게 한데는 윤석호 PD라는 국제적 안목을 갖춘 연출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최근 인터뷰를 통해서 “한류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최근 한국 드라마나 영화들이 자극적으로 흘러가는데 반해 정작 해외에서 인기를 얻는 작품들은 <대장금>과 <겨울연가>처럼 건강하고 부드러운 작품”이라고 했다. <봄의 왈츠>에 대해 범아시아적인 시청률(?)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는 걸 말해주는 대목이다.

작가주의 드라마에 대한 이율배반적인 평가들
<봄의 왈츠>와 <굿바이 솔로>의 시청률이 그다지 높지 않은 것에는 이유가 있다. 소위 ‘작가주의’라고 하는 것에 대한 이율배반적인 평가가 그 첫 번째이다. 윤석호 PD나 노희경 작가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세계를 열어놓았다. 윤석호 PD의 작품들이 절제된 대사와 감성을 자극하는 뛰어난 영상으로 그 세계를 만들었다면, 노희경 작가는 직설적이면서도 역설적인 대사들, 인물에 대한 끝없는 탐구 혹은 애정, 러브스토리 같지만 한 꺼풀 들여다보면 그 속에 숨어있는 강한 사회적 메시지들로 굳건한 세계를 구축했다. 비평가들은 그들을 작가라고 호칭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작가주의라고 한다면 그들만의 독특한 세계를 인정하고 그 속에서 재미를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막상 새로운 드라마를 개봉하면 단 첫 회를 보고도 비평가들은 이렇게 말한다. “역시 작가적 면모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나 전작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이것은 다시 말해, 한껏 작가로서 추앙해서 풍선을 부풀려놓은 다음, 한번에 바람을 빼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영화가 한번 시작되면 끝날 때까지 어쨌든 다 보아야 뭐라 얘기할 수 있는 반면, 드라마는 몇 달에 걸쳐 방영되기 때문에 이러한 초기의 평가는 치명적일 수도 있다.

<봄의 왈츠>의 경우 초기의 설정과 흐름이 과거 윤PD의 드라마와 유사하다는 이유로, 아직 방영되지 않은 나머지 회의 드라마들까지 그럴 것이라는 짐작들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봄의 왈츠>는 사실 전반부 설정보다는 중반 이후에 드러나는 극중 인물들의 깊은 상처, 그리고 그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 중요한 부분이다. 이것이 윤PD가 이 드라마를 통해 새롭게 선보이려 했던 ‘휴머니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아직 본 게임에 들어가지도 않은 것이다.

<굿바이 솔로>는 마치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노희경 매니아’라는 한 단어로 집약된다. ‘좋은 드라마지만 매니아들이나 보는’, 이라는 평가는 우리네 드라마계가 가진 보수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기계적인 설정과 판에 박은 대사, 선남선녀의 주인공들에 화려한 외관을 씌우는 과거의 방식만으로도 예상할 수 있는 20% 이상의 시청률을 확보할 수 있는 마당에, 주인공들이 무려 7명이나 되는 이런 형식 파괴적인 드라마는 도발이 아닐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과거를 답습하며 연장방영에 들어간 드라마들은 30%대의 시청률을 끌어 모으며 잘 나가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여기에 시청률 놀음이 가진 함정이 있다. 윤PD가 말했듯 ‘자극적인 설정’은 눈앞의 시청률을 높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보편적인 정서를 말해주지는 않으며, 또한 ‘끊임없이 좀더 자극적인 설정’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앞으로 나가야할 드라마가 땅을 파고 들어가는 형국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한류라는 거대한 흐름으로 우리네 드라마계가 확고한 문화의 견인차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작가들의 ‘새로운 시도’로서 가능했던 것이지, ‘전통적인 드라마들의 답습’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청률에 연연하지는 않는다고 했으나
윤석호 PD나 노희경 작가의 작품들이 그다지 시청률이 대단했던 것은 아니다. 대체로 윤석호 PD의 작품은 초기에 10%대의 시청률에서 시작해서 끝에 가서 30%에 도달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전체적으로는 그다지 높은 시청률이 아니었다. 일본에서는 마의 시청률이라는 3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달성했다지만 그것이 국내에서도 그랬던 것은 아니다. 또한 노희경 작가는 알다시피 시청률 안나오기로 유명한 작가이다. 가장 시청률이 높았던 것이 <꽃보다 아름다워>로 약 27% 정도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윤PD나 노희경 작가나 모두 “시청률에는 연연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드라마를 방영하는 방송국과 드라마를 만드는 프로덕션이 이원화된 상황에서 시청률은 미묘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직ㆍ간접적인 압력을 받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 잣대로 방송국은 시청률이란 카드를 내밀 것이다. 안 본다는 데야 어찌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한편으로는 시청률이란 것이 정말 그렇게 공정한 것이고, 의미가 있는 것인지 반문해보고 싶다.

드라마 시청률은 현재 10대와 4, 50대가 주축이라고 한다. 얼핏 생각해도 가벼운 만화 같은 드라마와 전통적인 문법의 드라마들이 현재 시청률 1, 2위를 다투고 있는 걸 보면 이해가 된다. 그렇다면 그 중간에 있는 20대 30대 시청자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TV 이외의 다른 매체들이 많이 생겨서 그렇다고 하는 건 핑계일 뿐이다. 혹시 그들을 위한 드라마들은 ‘시도조차 되지’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청률이라는 이름의 파시즘
과거에 TV가 국민들의 눈과 귀를 멀게 하는 바보상자의 역할을 했을지 모르지만, 이제 TV는 더 이상 바보상자가 아니다. 인터넷이라는 창을 통해 시청자들은 끊임없이 TV에 의견을 전한다. 이러한 다양한 의견들은 건강한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밑거름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 의견들이 파시즘이 돼서는 안 된다. 자칫 이러한 파시즘은 제작자들의 마음 속에 ‘이건 되고 저건 안 되는 식의’ 자기검열의 족쇄를 채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의견들을 이용해 파시즘으로 활용하려는 어떠한 시도들이다. 시청률이 지고선이 됐다는 것은 마치 그것이 인터랙티브한 사회를 보여주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그 지고선이 된 시청률에 동참하라는 심리적인 압박일 수도 있다.

시청률이라는 순위경쟁의 껍데기를 벗어내야 다채로운 드라마들의 스펙트럼이 TV를 장식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방송국의 입장에서는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묶어두고 싶겠지만 어느 한 드라마의 독식보다는 골라먹는 재미가 있는 TV가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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