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솔로> vs <크래쉬>

요즘 드라마나 영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것이 다중스토리 구조이다. 하나 혹은 둘의 주인공 캐릭터가 나와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전통적인 스토리 구조가 아닌, 여러 인물들이 똑같은 가치를 갖고 등장해 각자의 이야기를 해나가면서 전체적인 울림을 만들어내는 구조이다. 아마도 우리는 <러브 액추얼리>나 <숏컷> 같은 영화를 통해 그 구조를 친숙하게 느꼈을 것이다. 최근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굿바이 솔로>와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크래쉬>로, 이제 이 실험적인 구조는 더 이상 실험적이지 않은 하나의 관습이 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 이렇게 주인공들이 많은 걸까
이 구조가 하나의 관습이 되고있는 이유는 개인화되고 파편화되는 현대인들의 드라마 구조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전통적 스토리 구조가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가족 간의 고리마저 희미해진 현대인들은 각기 하나의 섬처럼 사회 속에 존재하는데 그들의 얇기 만한 관계를 그려내는데 있어 어느 한 캐릭터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는 것은 자칫 독선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등장하는 <시리아나>, <뮌헨> 등 일련의 영화들이 의도적인 드라마 엮기가 아니라, 인물들 간의 부딪침을 그저 보여주는 마치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을 주는 것 역시 의도적으로 작가의 손길을 배제함으로써 복잡다단한 사회를 그대로 보여주기 위한 노력에 기인한 것이다.
하지만 <크래쉬>와 <굿바이 솔로>가 같은 다중스토리 구조를 갖고 있으며 또 둘 다 현대인들의 문제를 다룬 것이지만, 이 두 스토리는(영화와 드라마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제작된 곳의 거리만큼 하고자하는 이야기의 거리도 멀다.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 <크래쉬>
<크래쉬>는 어느 교통사고 현장에서부터 시작한다. 왜 사고가 난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갖기 시작할 즈음, 영화는 하루를 되돌려 그 사고의 이유에 모든 주인공들이 어떤 역할을 했다는 것을 ‘집착적’으로 잡아낸다.

요로병에 걸린 아버지 때문에 신경이 잔뜩 날카로워 있는 라이언 경관은 흑인부부 카메론과 크리스틴에게 굴욕감을 안겨주고, 두 명의 흑인사내인 피터와 앤소니는 검사의 차를 강탈하고 도망치다 한국인 조진구를 치게 된다. 이란인 파라다는 가게가 털린 것을 열쇠수리공 대니얼의 탓으로 돌리고, 결국 가게를 지키기 위해 사들인 총으로 열쇠수리공 대니얼에게 들이댄다.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두려움에 떨면서 상대방에 대한 과잉방어로 일관한다. 그러다 이야기는 급반전을 하게 되는데 교통사고를 당한 크리스틴을 이번에는 라이언이 구하게 되고, 파라다가 열쇠수리공 대니얼에게 총을 쐈을 때, 그것을 막기 위해(?) 뛰어든 대니얼의 딸(딸은 대니얼의 말을 믿고 자신은 불사신이라 생각했다)을 파라다는 천사로 여기게 된다(본래 그 총의 총알은 공포탄이었다).

이 영화는 911테러 이후, 어떤 사고가 일어난 후 겪는 극도의 스트레스인,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에 시달리는 미국사회를 고스란히 보여주면서, 그 부딪침을 사실은 ‘서로에 대한 느낌이 그리워서, 서로를 느끼기 위해서’ 충돌하는 것이라고 화해시킨다. 이러한 강박적인 화해는 아마도 작가인 폴 해기스 스스로도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찌 보면 억지스런 화해와 관계(LA가 그렇게 좁은 동네인 지 몰랐다! 인물들이 그렇게 극적인 순간에 다 만나게 되다니!)를 받아들이고 이 작품에 아카데미 작품상을 준 미국은 아마도 똑같은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의 동병상련 속에서 그 이야기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섣부른 화해의 제스처가 가져올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인종차별주의자로 보여지는 라이언이 직권을 남용해 성폭력을 했던 크리스틴을 사고현장에서 구했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란인 파라다가 운 좋게도(?) 공포탄을 쏴서 대니얼의 딸을 살릴 수 있었고 그래서 그녀를 천사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의 살인미수가 덮어지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작가의 바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반전은 이미지적으로 관객들에게 이미 해결점을 보여주어 어떤 문제에 대한 논의를 덮어버리는 우를 범하고 만다. 사실은 뒷짐 지고 캐릭터들이 스스로 살아 움직이면서 부딪침을 만들도록 작가는 내버려두었어야 했다. 그러나 작가의 강박은 그걸 허용하지 못해 결국 인물들을 인형으로 만들어버렸다. 결국 이 좋은 소재의 스토리는 하나의 교훈적인 우화가 되고 말았다.

<굿솔>, 사회에 대한 비판과 인간에 대한 신뢰
반면 노희경 작가의 <굿바이 솔로>에는 이야기 흐름에 있어서 작가의 개입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그것은 작가가 드라마를 시작하기 전에 미리 인물 속에 자생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상처) 철저히 숨겨두었기 때문이다. 폭력남편으로부터 보호해주겠다고 한 딸과의 약속을 저버린 자책감에 말을 하지 않는 미영 할머니(나문희 분), 어린 시절 지긋지긋했던 가난으로 병져 누운 어머니를 죽게 만들었다는 자책감을 갖고 살아가는 영숙(배종옥 분), 뒤늦게 자신의 아버지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집을 뛰쳐나온 민호(천정명 분), 복수심으로 민호의 집으로 들어와 살면서 민호의 사정을 알게되고 괴로워하는 지안(이한 분), 장애가 된 한 여인에게 순정을 갖는 깡패 호철(이재룡 분) 등등 이 드라마의 인물들은 애초부터 문제를 갖고 출발한다.

이 인물들이 <크래쉬>에서와 다른 점은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명확히 알고 있으며 또 그 문제를 회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문제를 피해서 달아난 인물들로 드라마는 시작하지만, 결국 이들은 자신의 문제들을 직면하고 이겨낸다. 그들은 두려워하고 아파하지만 그렇다고 도망치지는 않는다. <크래쉬> 등장하는 인물들의 문제를 아는 것은 그 영화를 만든 작가와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지, 등장인물들이 아니다. 그러니 그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기대는 애초부터 가지지 못한다. 그들은 인형처럼 수동적인 반면 <굿바이 솔로>의 인물들은 대담할 정도로 능동적이다.

이러한 인물들의 능동성과 수동성은 작품의 방향성에 있어 커다란 차이를 만들어낸다. <크래쉬>에서는 모든 인물들이 ‘작가에 의해 주어진’ 한 방향성을 갖고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지만, <굿바이 솔로>에서는 능동적으로 각자의 문제에 부딪친다. 그들은 잃은 만큼 얻어간다. 작가의 작품과의 거리가 이러한 차이를 만든다. 이로써 <굿바이 솔로>는 <크래쉬>가 억지로 얻으려 했으나 얻지 못한, 다중스토리가 그 구조적으로 얻어야할 주제를 얻어낸다. 각자의 군상들이 어떤 아픔을 주는 사회적 구조 속에서 각자 다른 방법으로 해결을 모색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드라마가 보여주는 카메라 밖에서(사회) 상처를 입고 카메라 안으로 들어온 인물들은 서로 아파서 부둥켜안으면서 상처를 핥아준다. 이것은 치유라기보다는 위안이다. 대신 그 위안 뒤에 작가가 하는 말은 사회(혹은 제도)에 대한 강한 비판과 사람에 대한 강한 신뢰이다.

둘 다 다큐멘터리 같은 드라마를 보여주지만
다중 스토리가 얘기하는 세계는 수평적이다. 어느 한 인물에 의해 드라마가 움직이지 않는다. 사회는 수많은 인물들의 이야기들과 그 부딪침으로 움직인다. 그것은 어찌 보면 다큐멘터리 같다. 이런 수평적인 얘기를 하는데 있어서 작가가 해야할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관계에 개입하기보다는 사회의 문제를 대변하는 인물들을 창조하는 것이다. 창조된 인물들에게 생명을 넣어 사회라는 다큐멘터리의 세계 속으로 투입한 후 벌어지는 드라마를 관전하는 것이다. 물론 작가의 의도가 없을 수 없다. 하지만 그 의도는 억지로 짜진 스토리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물 속에 들어 있어야 한다.

물론 드라마가 가진 길이와 영화가 가진 길이의 차이가 이런 결과를 낳았을 수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2시간 남짓의 <크래쉬>라는 영화가 인종의 용광로로 상징화시킨 LA라는 거대한 지역을 배경으로 한 반면, 16부작에 걸친 <굿바이 솔로>의 배경은 서울의 어느 작은 한 동네라는 것이다. 보다 포괄적인 사회문제를 포착하기 위해 거대한 지역을 선택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오히려 많은 인물들을 억지로 얼기설기 엮는 부작용을 낳을 가망성이 높다. 반대로 축소판 속에서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한 <굿바이 솔로>는 깊이라는 선물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위의 비교는 그 이야기가 제공하는 사회문제의 심각성을 배제한 것이기 때문에 무엇이 낫고 무엇이 그르다고 하기 어렵다. <크래쉬>가 처한 미국의 현실은 <굿바이 솔로>가 보여주는 우리네 현실보다 더 심각할 수 있다. 어쩌면 <크래쉬>의 이 억압적이고 강박적인 드라마의 등장(과 그 적극적인 수용)은 미국 사회가 가진 병리적인 상태를 모두 말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웰메이드 드라마, <연애시대>

‘영화인들이 만든, 영화인들의 드라마’라는 타이틀이 걸렸을 때, ‘그래도 드라마라는 특성이 있는데’하는 의심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막상 <연애시대>를 ‘개봉’해보자 ‘이거 진짜 장난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TV 앞에서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서 자꾸만 팝콘과 콜라가 생각나는 건 그것 때문일까.

유치한 악역이 없다
‘드라마(drama)[명사] 1.극(劇). 연극. 2.방송극. 3.각본. 4.‘극적인 사건이나 상황’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 네이버 국어사전
뜻 그대로 드라마 속의 극적인 사건이나 상황은 극중 캐릭터들의 갈등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드라마 작가들은 갈등 없는 장면은 드라마에서는 쓸모 없는 설명이 된다고까지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갈등’이라는 말을 잘못 해석하면 마치 선악 같은, ‘마치 적이 있고 우리편이 있어서 서로 싸우는’ 그런 단순한 대결구도를 떠올리게 된다. 이것은 한편으로 헐리우드 영화들이 저 숱한 액션영화에서 답습한 결과, 시청자들의 눈을 멀게 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러한 선과 악이 분명한 단순한 대결구도는 이제 유치한 설정이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네 드라마들은 여전히 이 쉬운 방식에 사로잡히곤 하는 게 현실이다. 요는 그것이 재미가 있지는 않을 지라도 여전히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연애시대>가 재미있는 건 이러한 유치함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인물 하나하나에 정이 간다
<연애시대>에는 악역이 없다. 인물 하나하나 보면 볼수록 정이 간다. 능구렁이 같지만 자상한 면을 갖고 있는 감우성, 당차고 드센 듯 보이지만 여린 구석을 갖고 있는 손예진, 자신이 가장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지도 모르고 남 걱정만 하는 공형진, 다시 되살아난 김삼순 이하나, 재수 없는 황태자를 위장한 상처 많은 남자 이진욱, 섹시함 뒤에 숨겨진 모성애 오윤아, 늘 앙 다물고 있지만 한번 웃기만 하면 미소를 짓게 만드는 그녀의 딸 전지희, 과격한 프로레슬러지만 왠지 정이 가는 손예진의 친구 하재숙, 용서보다는 화를 내라는 엉뚱한 신부 김갑수... 그 누구하나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인물이 없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시종일관 우리를 웃게 만드는 것은 ‘공감’이다. 그 사랑스런 인물들의 진정성에 대한 이해는 보는 이들을 따뜻하게 또는 안타깝게 만드는 힘이다.

갈등은 밖이 아닌 안에서 생긴다
그렇다면 이런 인물들 간의 갈등은 어떻게 벌어질까. 그 갈등의 원인은 인물들 밖이 아닌 안에 있다. 그들이 화를 내는 건 상대방 때문이 아니고,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을 때이다. 왜 화가 났을까. 상대방의 의도하지 않은 말 몇 마디, 혹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상황이 내 속에 있던 상처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손예진의 상처는 어린 시절 엄마의 죽음과 최근 사산된 아이이다. 이로서 그녀는 스스로 ‘엄마와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그녀가 이혼한 진짜 이유이기도 하다. 손예진을 쫓아다니는 황태자, 이진욱 역시 엄마에 대한 아픈 기억이 있다. 오윤아는 남편의 폭력에 대한 상처(아이에 대한 것이 더 큰)가 있다. 그래서 엄마 자질이 없다며 스스로 자책하면서도 그런 자신을 붙들어줄 자상한 아빠를 희구한다.
이렇게 보면 이 드라마의 문제는 엄마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문제의 반일  뿐이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상처가 ‘불쌍한 엄마’때문이며, 그 불쌍한 엄마를 만든 이들은 ‘이해할 수 없는 아빠’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손예진은 엄마가 죽어가는데 기도만 하던 아빠를 이해할 수 없고, 이진욱은 버려져 아빠만을 기다려왔던 엄마를 한번도 찾아와 보지 않은 아빠를 증오한다. 오윤아는 스스로 엄마이기를 포기하게 만든 남편을 미워한다.

헤어져봐야 안다
이 상처 많은 이들은 이제 드라마에서 서로 중첩되면서 서로를 보듬는다. 같은 엄마에 대한 아픈 기억이 있는 손예진과 이진욱은 그 기억 앞에서 서로 몸을 기댄다. 오윤아가 남편에게 당하는 모습을 본 감우성은 그녀를 위해 남편에게 ‘애인’이라고 말한다. 이건 연애일까, 동정일까, 혹은 동감일까.
재미있는 것은 이 드라마 상에서 헤어져봤던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간의 대비이다. 즉 엄마 아빠가 됐었던(혹은 됐을 뻔했던)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간에는 사랑을 보는 시각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진욱의 아빠는 사실 찾으려 해도 아내를 찾아갈 수 없었던 것이고, 아내의 죽음 앞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기도했던 김갑수는 사실 가장 큰 상처를 입었던 인물이었다는 것이다(여기서 오윤아는 예외적인 인물인데, 그것은 스스로 헤어지는 걸 원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래서 모두 자식들의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고 진짜 사랑을 보여주려 한다. 반면 이진욱의 손예진에 대한 사랑은 사실은 아빠에 대한 보복심리가 더 크며, 오윤아의 감우성에 대한 사랑은 모성애가 더 강하다. 감우성과 손예진은 그 중간에 서서 갈등하게 된다. 엄마 아빠가 되어 현실을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인정하지 않고 살아갈 것인가.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복잡해진 드라마 관계 속에서 자꾸만 발견되는 것은 감우성과 손예진의 사랑이다. 헤어짐(아픔)을 경험했던 그들은 인간으로서의 사랑 혹은 동감과, 남녀로서의 사랑(연애)을 동시에 다 아우른다. 그들은 아픈 만큼 조금씩 성숙해간다. 마음 속에 남겨진 앙금이 걷히는 과정이 이 드라마가 보여주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헤어진 후에 다시 만나는’ 이들은 ‘성숙된 남녀’로서 서로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웰메이드 드라마의 전형될 듯
이 드라마는 연기자나 연출, 촬영 어느 모로 보나 웰메이드 드라마의 전형이 될 가능성이 높다. 수많은 스쳐 지나가는 인물들과 장면들이 사실은 그냥 들어가는 것이 없을 정도로, 꽉 짜진 이 드라마는 보면 볼수록 ‘아 그 때 그랬었지’하는 동감을 이끌어낸다. 드라마 처음부터 등장했던 물 속에 들어가 허우적대던 한 사내(서태화 분)는 전혀 쓸모 없는 인물처럼 느껴졌지만 6회분에 와서야 그 진면목을 드러낼 때 우리는 그 한 번의 출연을 위한 충분한 사전포석에 놀라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손예진의 상처를 치유해줄 비법을 전수해주는 중요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로써 매번 출근길에 감우성이 확인하는 손예진의 자전거, 청혼과 이혼 선언을 했던 단골 카페 등등 계속 스쳐 지나가는 장면들은 후에 벌어질 어떤 사건 같은 것을 기대하게 만든다.
좋은 영화는 함부로 버리는 것이 없다. 이것은 거꾸로 얘기해 슬쩍 들이민 캐릭터도 다 분명한 용도가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경제적이라는 뜻도 되지만, 진짜 의미는 군더더기가 없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드라마들은 시청률과 맞물려 갑작스런 캐릭터의 등장과 퇴진 등의 소모적인 방식을 취했던 것이 사실이다.
영화인들이 흔히 하는 말로 “덜컥거린다”는 말이 있다. 이건 드라마의 흐름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끼워 넣은 듯한 느낌을 준다는 말이다. <연애시대>, 이 덜컥거림 없으면서도, 뻥튀기된 근육질도 아니고, 그렇다고 비쩍 마른 앙상함도 아닌, 숨은 근육들이 잘 균형 잡힌 드라마를 보면서 팝콘이 먹고 싶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닐까.

가족 드라마에 나타난 성향들

요즘 드라마들이 때아닌 가족 열풍에 휩싸이고 있다. <별난 여자 별난 남자>, <하늘이시여>, <소문난 칠공주>, <불량가족>, <연애시대>, <굿바이 솔로> 등 가족의 문제를 다룬 드라마들이 TV시청률을 장악하다시피 하고 있다. 이렇게 가족이 화두가 된 것은, 아마도 파편화되고 해체되어가는 가족들이 늘고 있는 현실 때문일 것이다. 삶을 버겁고 힘들게 만드는 것도, 또 그 힘든 걸 견디고 이겨내게 만드는 것도 가족이라는 점에서 많은 시청자들은 드라마 세상 속의 가족을 꿈꾼다. 그래서일까. 가족을 다루는 드라마들은 그 시각에 있어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사회의 기본 단위는 가족이고, 따라서 그 가족들을 보는 시각은 보수든, 중도든, 진보든 정치적 색채를 띨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저 집구석은 어떻게 살아가나, <별女별男>, <소문난 칠공주>
주간시청률 부동의 1위를 기록하고 있는 <별난 여자, 별난 남자>가 보여주는 가족은 과연 현실적일까. 매일 매일 지친 일상 속에서 집으로 돌아온 시청자들은 이 드라마를 엿보며 자신들만의 가족을 꿈꾼다. ‘도대체 저 집구석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채널을 고정시키게 만드는 요인이다. 물론 그 집구석을 바라보는 시각은 시청자들에 따라 다르다. 함께 모여 단란한 저녁식사를 하며 드라마를 시청하는 가족은 아마도 “저 집구석도 우리랑 참 비슷하네”하는 공감을 가질 것이다. 그렇지 못하고 이미 해체된 가족들은 과거의 단란했던 기억들을 떠올릴 지도 모른다. “그 땐 툭탁거리면서도 모두 함께 있었는데...”하며 순간 드라마가 주는 달콤한 최면에 빠질 것이다.

최근 시작된 주말드라마 <소문난 칠공주>도 이러한 보수적인 중산층의 시각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 전통적인 ‘딸 부잣집’이야기는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의 고전적인 연애담을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다. ‘곡절도 많고 사건도 많은 딸 부잣집’은 일단 그 이야기가 풍부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이 많은 딸을 ‘어떻게 좋은 배필을 만나게 해서 결혼시키는가’ 하는 연애담으로 집중된다. 여기서 딸들은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면서 가족 간의 드라마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삶은 힘들어도 가족이 있어 좋다구?
이들 드라마는 어찌 보면 바람잘 날 없는 많은 가족 간의 사건들을 다루고 있어, 마치 ‘세대간의 부딪침’으로 그 이야기를 오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들 드라마가 다루는 가족이라는 의미이다. 그 의미는 전통적인 시각, ‘아무리 힘들어도 역시 가족은 가장 중요하다’는 보수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들 드라마가 지향하는 바 역시 가족 구성원을 만드는 ‘결혼’에 집중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회적인 문제 같은 것들은 가족 바깥의 일로 다루어지지 않으며, 가족 안에서도 그 징후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이런 드라마들이 요즘 시청률이 좋은 이유는 강력한 환상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거기 만들어져있는 여러 군상으로 이루어진 가짜 가족구성원들은 시청자들에게 투망식 감정이입의 그물을 펼쳐든다. 왠만한 사람은 그 드라마 인물들 속에 자신을 투영하게 되고, 그는 30분에서 1시간 정도 되는 시간 동안 현실을 잊고 빠져드는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매일 기다려지는 몇 분이 갖는 의미이다. 몇 분간의 환상은 사람들을 현실사회의 모순에 저항하기보다는, 잊고 버티게 하는 태도를 만든다. “삶은 힘들지만, 그래도 가족이 있어 좋다”는 말속에는 삶을 힘들게 하는 사회의 부조리를 무화시키고 “가족이 있기 때문에 힘들어도 살아가야 한다”는 체념이 숨어 있다. 이것은 그 문제를 제공한 자들이 줄곧 내세우며 참으라는 논리와 다르지 않다.

아예 한 발 더 나가버린 <하늘이시여>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하늘이시여>에 비교하면 순진하기까지 하다. <하늘이시여>가 갖는 보수성은 가족 논리를 넘어서 혈연, 피의 논리까지 다다른다. 행복을 위해 자신의 친딸과, 재혼해 갖게 된 아들을 결혼시킨다는 이 비상식적인 구도가 대대적인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그 속에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혈연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이든 했던 우리네 어머니들과, 그런 어머니들에 의해 그건 당연한 것으로 길들여진 우리네 자식들은, 이 놀라운 조합의 드라마 속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이왕지사 혈연을 드러낸 바에야, 드라마의 쿨함 같은 것은 애초부터 기대하기가 어렵게 된다. 우리는 쿨한 가족들의 침묵이 갖는 그 여운을 읽기보다는, 머리끄댕이 잡아당기고, 뺨을 올려부치는 장면 속에서 낯설지 않은 풍경을 잡아낸다. 어머니의 과도한 사랑과 그로 인해 만들어진 비정상적 애증을 확인하며 부르르 몸을 떨게 되는 것이다.

사실은 머리끄댕이를 잡아당길 때, 그 머리는 자경의 머리가 아닌 시청자의 머리였고, 뺨을 맞았을 때, 그 뺨은 한혜숙의 뺨이 아닌 시청자들의 뺨이었던 것이다. 시청자들은 자신의 어머니와 자신이 성장하면서 가져왔던 애증을 이 드라마를 통해 다시 떠올린다. 따라서 이 드라마는 어떤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그런 이야기를 무화시키는 혈연과 애증의 틀이다. 도대체 현실에서 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유아적인 분노를 끄집어내서 뭘 하겠다는 건가. 특별한 이야기를 전달하기보다는 자극적 설정으로 시청자와 애증적 관계를 추구하는 이 드라마는 애초부터 끝없는 연장방영이 예고된 것이었다. 이것은 마치 평상시에는 바꿔야 한다고 소리치다가도 매번 선거 때만 되면 연장 방영되는 지역 색과 닮아있다.

가족에 대한 불온하지만 참신한 생각들
최근 시작된 <불량가족>과 <연애시대>는 가족에 대한 불온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다. <불량가족>은 제목에서부터 암시되듯 우리네 해체된 가족을 블랙코미디 형식으로 묶어낸다. 가족이 모이는 것은 돈 때문이며, 유지되는 것 역시 돈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억지로 엮인 가족을 보여주고 있지만 사실은 TV밖의 세상을 더 많이 보여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억지로 엮인 가족들도 한 집안에 담기면서 제법 가족 같은 분위기를 낸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해체된 가족을 보여주면서도, 또 그 가족이라는 패러다임이 얼마나 부조리한가를 보여준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지면 생겨나는 이기주의와 유사애정 등이 우리에게 끝없이 웃음을 만들어내지만 그 웃음 끝에는 단란한 가족이라는 허구에 대한 통렬한 풍자가 달려있다.

‘헤어지고 시작된 이상한 연애’라는 카피로 소개된 <연애시대>는 마치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보는 것처럼 발랄하면서도 그 깊은 내막 속에 결혼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담아내고 있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가진 틈바구니 속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연애감정을 이혼 후에 느끼게 되는 이 드라마에서는 가족이라는 무게가 빠져버린 중년 남녀들이 출연한다. 그들은 결혼을 했다가 이혼했거나, 이제껏 결혼을 하지 못했거나, 이제 결혼을 앞두고 있는 이들이다. 이들이 꿈꾸는 것은 결혼이 아닌 연애이다. 또다시 결혼이라는 늪으로 빠져들지 않으려 애쓰는 그들은 서로를 미워해 이혼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결혼이라는 틀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니 헤어진 후에 다시 만날 밖에. 그들은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 이로써 사랑=결혼이라는 등식은 자연스럽게 깨져버리면서 드라마를 연애담에서 사회극으로 끌어올린다. 능동적인 연애와 수동적인 결혼이라는 양자구도 속에서 이 이야기의 도발은 가족이라는 사회적 구성을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해야하는 결혼과 반드시 하지 말아야할 이혼을 거꾸로 뒤집어보게 만든다는 데 있다.

집밖으로 나온 그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굿바이 솔로>
<굿바이 솔로>는 여기서 한 차원 더 나아가 해체된 그 후의 세계, 혹은 대안을 다루고 있다. 기존 드라마와는 다르게 7∼8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고 했을 때부터 이 드라마는 이미 해체된 가족을 전면에 드러낸 셈이다. 여기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모두 가족이 해체되어 홀로 살아가는 솔로들이다. 그들은 각자 자신들만의 상처를 안고 홀로 살아간다. 그 상처는 다름 아닌 가족의 해체의 원인이기도 하며, 혹은 결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집밖으로 나온 그들은 어떻게 됐을까.

그들은 이웃을 만나고 가족보다도 더 따뜻한 정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들은 모두 해체된 가족으로 인해 상처받은 이들이기에 그 이해는 남다르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인물들이 서로 부딪치고 그러면서 거기에 따스한 온기를 만든다. 그들을 여전히 괴롭히는 것은 자신이 도망쳐 나왔던 바로 그 가족이다. 가족의 망령이 그들의 아물려 했던 상처를 뜯어낼 때 강한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쿨한 척 했던 그들은 울부짖는다. 그러나 그 울부짖음의 옆에는 항상 자신과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웃이 있다. 그들은 어떤 조언도 해주지 않으나 홀로 남은 그들에게 위안이 된다. 상처 입은 짐승이 이웃을 찾았을 때 그들이 해주는 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고(이건 가능하지도 않다) 단지 얘기를 들어주며 안아주는 것뿐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노희경 작가는 말한다.

노희경 작가가 보여주는 이 솔로들의 상처 보듬기는 차라리 아나키즘적이고 히피적인 냄새까지 풍긴다. 그 안에는 지위의 높고 낮음도 없고, 빈부의 격차도 없다. 온통 상처뿐인 사람들만이 있을 뿐이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복수하러 갔는데 그 사람도 역시 상처를 갖고 있더라”는 식의 드라마 구조는 묘한 감동의 골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격렬한 부딪침 속에, 침묵 속에, 스쳐지나가듯 던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말 한 마디에 촌철살인의 감동이 묻어난다. 그들이 가족 밖으로 뛰쳐나왔을 때, 비로소 이웃의 존재를 깨닫고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듯이, 이 낯선 드라마가 전통적인 가족 중심 드라마의 틀 밖으로 뛰쳐나왔을 때, 우리는 드라마가 가진 환상의 틀을 벗어나 가족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다.  카메라 앵글 바깥쪽에서 상처받고, 카메라 앵글 안쪽으로 들어온 솔로들은 이웃들과 만나 ‘솔로’를 ‘굿바이’한다. 카메라 안에서 연실 저 바깥에서 받은 상처를 핥고 보듬는 인물들을 보다보면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상처 입게 했나 하는 의문이 들게 만드는 것. 그것이 이 드라마가 가진 가장 큰 사회적인 메시지다.

현실은 멀고 환상은 가깝다
이들 드라마들을 편의상 보수와 혁신의 잣대로 나눈다면, <하늘이시여(극보수)>-<별난 여자 별난 남자, 소문난 칠공주(보수)>-<불량가족(중도보수)>-<연애시대(중도혁신)>-<굿바이 솔로(혁신)>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가족에 대한 시선이 보수로 가까이 갈수록 시청률이 높아지고 혁신으로 갈수록 시청률이 낮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적어도 TV에서는 피곤한 하루의 끝에 현실을 보기보다는 강력한 진통제로서의 환상을 요구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시청률이 드라마의 질을 답보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드라마의 질은 정반대의 순서로 흘러간다. 이 시청률과 드라마 품질의 반비례 현상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왜 좋은 드라마가 좋은 시청률을 기록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 답은 아무래도 TV라는 매체 스스로 사회적 영향력을 낮춤으로써(대신 시청률을 얻었다) 자초한 결과이거나, 가족이라는 품으로 돌아와서는 다시는 보고싶지 않을 정도로 답답하고 울화통 터지는 사회에서 그 책임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TV 스스로 정치적 목적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봄의 왈츠> 그 인물의 변화

봄은 왔다. 드라마 초반부 청산도에서 얼핏 보였던 봄의 기억은 오스트리아의 긴 겨울의 터널을 거쳐 서울 한 복판으로 그 기운을 조금씩 퍼뜨리고 있다. 겨우내 꽁꽁 얼었던 마음들이 그 봄의 기억에 조금씩 녹아 내리면서 <봄의 왈츠>는 눈물 방울방울들이 모여 봄비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자 얼음처럼 쿨했던 그들의 얼굴에는 이제 어색하지만 낯설지 않은 미소와 말라버린 줄 알았던 눈물의 샘이 솟아나고 있다. 그들의 얼굴에도 봄이 오고 있는 것이다.

윤재하, 얼음왕자에서 스위트 보이로
상처가 속살이 되어버린 윤재하. 또 다른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잔뜩 보호막을 치고 있는 이 가녀린 짐승에게 던져지는 박은영의 미소는 봄의 햇볕 그것이다. “그녀를 보면 왠지 마음이 아픈” 그는 그것 때문에 박은영의 존재가 자신의 가슴속에 서서히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작은 바늘 같은 그 봄의 전령은 그러나 순식간에 얼어붙은 윤재하의 마음을 녹여낸다. 누군가를 새롭게 그리워할까 봐 숨어들었던 피아노. 상처를 보듬고 이겨내기 위해 그의 손은 늘 피아노 위에서 고통스런 연주를 거듭했다. <클레멘타인>은 늘 그의 손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상처를 지우기 위해 대신 상처를 짊어진 그의 손은 어느 다른 사람의 손을 잡지 못하고 늘 혼자였다. 건반 위에서도, 허공을 두드리는 손짓에서도.
그런 그의 손이 박은영의 손을 찾는다. 박은영의 손과 함께 피아노 건반을 두드린다. 오랜만에 온기를 느낀 손은 마법이 풀리듯 그의 몸과 마음을 풀어낸다. 웃음이 피어난다. 모든 걸 다 걸어도 좋을 봄의 기억을 그는 어렴풋이 찾았다. 박은영의 존재가 그 어린 시절 그의 마음 속에 들어왔던 소녀였다는 것이 밝혀지는 그 순간, 그는 이 거대한 운명의 흐름을 그제서야 알아차릴 것이다.

박은영, 캔디의 실체를 드러내다
본래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라는 캔디의 노랫말 속에는, 외롭고, 슬프고, 울고싶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박은영의 명랑 쾌활한 얼굴이 가능했던 것은 끝없이 상처뿐인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힘든 건 꿈일 거야. 깨어나기만 하면 난 특별한 사람이 되어 있을 거야.’ 그녀는 이렇게 생각함으로 해서 도저히 견딜 수 없던 삶을 견뎌낼 수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현실이 다가온다. 꿈속에서 던졌던 그녀의 미소는 윤재하의 얼음을 녹였다. 얼음왕자와 캔디의 만남은 얼음왕자가 현실로 돌아옴으로 해서, 캔디 스스로도 변화를 요구한다. 그러나 그 현실은 그녀에게 가시밭길의 연속이다.
그녀는 이제 초라한 자기 자신을 인정해야 한다. 사랑하는 한 사람 윤재하, 아니 어린 시절의 이수호를 위해서. 그것은 그녀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그녀가 버텨낼 수 있었던 힘은 어린 시절 아무도 찾지 않는 그녀에게 불현듯 찾아와 봄의 기억을 남기고 떠나버린 이수호가 준 것이다. 그녀가 현실을 부정하면서까지 현재를 살아가는 이유도 언젠가 수호천사가 나타날 거라는 막연한 꿈 때문이다. 그녀는 이제 꿈이 아닌 현실 속에서 그를 만날 것이다.

필립, 쿨가이에서 자상한 남자로
상처 같은 것은 절대 받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은 사실은 가장 많은 상처를 받기 마련이다. 그것은 그가 실제로 상처를 받는다해도 그 쿨함으로 인해 스스로 상처를 보듬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을 부정하고 싶을 정도로 아픈 어린 기억, 윤재하라는 천재를 만나 스스로 피아노를 접었던 기억, 그의 그림자로서 살아왔던 기억들은 그를 더욱 쿨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그가 윤재하의 그림자로 기꺼이 살아온 것은 그들이 어떤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필립은 윤재하가 모든 걸 다 가졌다고 하지만, 이수호로서의 윤재하는 모든 걸 다 잃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이 모두 박은영의 잃어버린 미소에 집착하는 것은 그들 삶 모두 추운 겨울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은 꼭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사랑인 것은 아니다. 그는 박은영이 “친구로 돌아가자”는 말에 “친구가 아닌 좋은 사람”으로 남길 원한다. 키다리 아저씨처럼 필립의 사랑은 숨어서 할 수밖에 없다.

봄은 왔지만 꽃샘추위는 거세지고
윤재하와 박은영, 필립은 이렇게 이제 봄을 맞으며 변화하고 있다. 겨우내 나지 않을 것 같던 싹이 돋아나고 꽃이 피어나고 있다. 하지만 그 변화의 봄바람 속에 굳건히 겨울을 지키고 있는 이들이 있다. 송이나와 윤재하의 어머니 현지숙, 그리고 아버지인 윤명훈(정동환 분)이 그들이다. 그들이 붙잡고 있는 과거, 겨울의 기억은 봄볕 속에 거세지는 꽃샘추위를 예고한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어차피 겨울이 가면 봄이 오는 것을. 저 에스진이 부른 <수호천사>의 가사처럼.
‘내겐 슬픈 겨울이 너를 만난 뒤 꿈처럼 사라져 / 나에게도 봄이 아주 천천히 / 내 가슴속으로 스며들고 있어 / 마음에 새겼던 사랑의 기억을 줄게’
<봄의 왈츠>는 이제 축축한 봄비를 재촉하고 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