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하숙’, 별거 없어도 충분히 행복한 건

 

“짐은 두려움이다. 두려움을 버려라.” tvN 예능 프로그램 <스페인 하숙>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온 한 청년은 불쑥 이런 이야기를 꺼낸다. 저녁을 먹는 그들 옆에 앉아 그들이 겪은 순례길에 대한 이야기를 듣던 유해진은 그 말에 반색한다. 늘 아재개그식의 유쾌한 말장난이 입에 붙은 유해진이어서였을까. 그 청년이 툭 던진 유머가 섞여 있지만 의미심장한 그 말에 특히 반색한다.

 

그 청년이 그 말을 꺼낸 건, 또 다른 순례자가 “가져왔던 패딩을 버렸다”는 얘기를 해서다. 길을 걷기 위해서 배낭을 꾸리고,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알 수 없어 배낭 가득 이런 짐 저런 짐들을 채워왔지만, 그것이 어느 순간 앞으로 걸어 나가는 걸 힘들게 하는 버거움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건 어쩌면 우리의 삶의 모양일 게다. “너무 많은 두려움을 들고” 살아가기 때문에 더 많은 짐에 버거워지는 우리의 삶.

 

유해진에게 형이라 부르며 순례길 도전을 해볼 생각은 안 해봤냐는 한 청년의 질문에 유해진은 “늘 생각했지만 용기를 못내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결단을 하고 해야 되는데 그걸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가 결단을 못 내리는 것이나, 용기가 필요하다 말하는 건 그만큼 내려놓아야할 짐이 많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그러자 이 순례길을 걸어온 청년들이 한 마디씩 그의 용기를 북돋는 이야기를 건넨다. 순례길을 걷는 분들 중 연세가 많으신 분들도 많다고 하고, 어느 방명록에서는 ‘60살에 왜 사서 고생이냐고? 니들이 이 맛을 알아?’라고 적힌 글을 봤다며 “진짜 멋있었다”고 말해준다. 또 한 분은 ‘익숙해진 고통’을 이야기한다. 처음 길을 나섰다 3일 만에 이건 아니라고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것. 하지만 차츰 고통이 익숙해지고 ‘조그만 걸어볼까’하던 것이 20일 째 걷고 있다는 것.

 

어쩌면 우리는 고통이 삶의 또 한 부분이라는 것을 쉽게 인정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고통을 겪을 일을 지레 짐작하며 두려워하고 그 두려움은 역시 짐이 되어 우리네 삶 자체를 버겁게 만든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적응을 하면서 앞으로 계속 걸어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이들은 순례길을 걷는 것만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스페인 하숙>은 지금껏 나영석 사단이 만든 예능 프로그램들 속에서 우연히 조우하는 출연자들의 사연이나 리액션을 그다지 많이 담지 않는 프로그램이다. 물론 오랜만에 먹는 한식이 주는 감동은 자연스럽게 묻어나 있지만, 그렇다고 순례길을 걷는 이들이 왜 그 길을 걷게 되었는가 같은 저마다의 사연은 애써 담으려 하지 않는다. 제작발표회에서 나영석 PD가 유해진에게 왜 그런 걸 묻지 않냐고 했을 때 유해진이 했다는 말이 걸작이다. “누구나 고민이 있어서 오는데 물어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했다는 것.

 

유해진의 답변에 담긴 바로 이 지점은 <스페인 하숙>이 가진 편안한 거리감과 그래서 그 길을 걷지 않아도 이 프로그램을 보는 시청자들이 저마다 자신의 상황을 투영할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한다. 그것은 순례길을 걷는다는 행위를 그대로 닮았다. 그 길을 걷는 이들은 그 속사정을 굳이 다 이야기하지 않아도 그 걷는다는 같은 행위 속에서 누구나 서로를 공감하게 된다고 한다. 심지어 나라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다고 해도. 배낭 하나 달랑 매고 걷는 길. 그 하나에 우리의 삶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듯이.

 

그래서 <스페인 하숙>은 그 곳을 찾는 순례자들의 사연과 리액션에 집중하기보다는,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온전히 하루를 준비하는 유해진과 차승원 그리고 배정남의 그 정성이 가득한 마음에 집중한다. 비록 10인분을 준비해놓고도 세 분만 찾아와 음식이 남더라도, 그렇게 누군가를 위해 마음을 쓴다는 그 행위 자체가 어쩌면 우리가 삶에서 느끼는 중요한 행복감이 아니겠나.

 

대단할 것 없다. 산다는 건. 저마다 배낭 하나 짊어지고 길을 나선 것이고, 무거우면 버리고 가면 되는 것이다. 고통은 피할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분이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나면 우린 앞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다. 그러다 우연히 만난 어느 집에서 작지만 누군가의 정성어린 식탁에 초대하게 되면 느껴지는 행복감. 화려한 음식의 포만감이 아니라 투박해도 거기 얹어진 따뜻한 마음이 주는 엄마 뱃속 같은 편안함과 풍족함. 그리고 누군가에게 밥 한 끼와 따뜻한 잠자리를 대접하기 위해 그렇게 온전히 마음을 쓰는 일. 그게 삶의 행복이 아니냐고 <스페인 하숙>은 말하고 있는 듯하다.(사진:tvN)

어찌 보면 악당 같다, ‘닥터 프리즈너’ 남궁민은 어쩌다가

 

“자기 손에 피 안 묻히고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있을까요?” 태강병원 정신과 의사 한소금(권나라)이 “왜 이렇게까지 하려고 하냐”고 묻자 나이제(남궁민)는 그렇게 말한다. 그는 JH철강 김회장의 아들인 잔혹한 사이코패스 김석우(이주승)를 윌슨병이라 주장해 양극성 장애로 만듦으로써 형 집행 정지를 만들어주려 했다.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한소금에게 나이제는 만일 그의 동생 한빛이 죽었다면 어떻겠냐고 반문한다. 가난한 장애부부가 아이를 잉태한 채 죽음을 맞이하고, 어머니마저 수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죽었던 걸 경험한 나이제는 “그 놈들이 있는 곳이라면 지옥 끝까지” 갈 거라고 말한다. 

 

이것은 KBS 수목드라마 <닥터 프리즈너>가 갖고 있는 이야기의 특징이면서, 나이제라는 독특한 주인공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나이제는 한 여성에게 정신적인 충격을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폭력을 행사한 사이코패스 김석우를 형 집행 정지시켜주려 하는 인물이다. 주인공이지만 악당에 가까운 인물이 아닌가. 

 

실제로 <닥터 프리즈너>가 흥미진진한 건 나이제와 선민식(김병철) 서서울교도소 의료과장이 교도소 내에서의 권좌를 차지하기 위해 치고 받는 대결 때문이다. 이들은 대놓고 서로가 적임을 드러낸다. 그리고 앞에서는 웃으면서 뒤통수를 치는 방식으로 상대방을 제압한 후, 비웃음을 날림으로써 약을 올린다. 

 

선민식은 김석우를 형 집행 정지로 만들어내려는 나이제를 겉으로는 가만히 내버려둔다. 하지만 실은 이를 조사하려는 이가 정의식 검사(장현성)라는 걸 알고는 나이제를 전면에 내세워 곤궁에 빠뜨리려는 심산을 갖고 있다. 실제로 나이제가 김석우로 하여금 윌슨병 증상을 만들어 임검을 통과하게 되자, 선민식은 김석우의 피해자에게 김석우가 풀려나게 되었다며 그렇게 만든 인물이 한소금이라 이야기를 전하게 한다. 결국 피해자가 한소금을 찾아와 김석우가 풀려나는 것에 대한 분노와 공포를 드러내자, 한소금은 재검을 요청하게 된다. 나이제에게는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격이 되었다. 

 

나이제와 선민식의 대결은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니라 악과 악의 대결처럼 보인다. 나이제라는 인물이 이기기 위해서는 어떤 짓이든지 하는 그런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누군가를 서슴없이 이용하고, 재소자들을 위협하며 때론 회유하기도 한다. 심지어 나이제는 복수를 위해서는 제 손에 피가 묻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 정도면 악당에 가까운 인물인데 어째서 우리는 나이제에게 빠져드는 걸까. 그건 아마도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결코 이겨낼 수 없는 적들이 존재하기 때문일 게다. 실종된 동생을 찾기 위해 교도소 봉사까지 들어와 조사를 했던 한소금이 김석우 같은 사이코패스를 풀어줄 수 없다며 갑자기 정의를 이야기하지만, 이런 순수하고 어찌 보면 순진한 방식으로는 결코 뜻을 이룰 수 없는 살벌한 현실이라는 것. 

 

그래서 나이제가 선민식을 찾아가 “나는 과장님을 이길 수밖에 없다”며 “과장님은 이기기 위해 남의 손에 피를 묻히지만, 나는 이기기 위해 내 손에 피를 묻힌다”고 한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태강병원이 교도소와 결탁해 해왔던 갖가지 비리들과 거기에 동조한 의사들과 경영진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기 위해 나이제는 제 손에 피를 묻히건 자신이 피를 흘리건 개의치 않고 이 싸움에 뛰어들었다는 것. 

 

실제로 태강그룹의 이재준 본부장(최원영)은 김석우의 형 집행정지를 이끌어낸다는 명목으로 허위 진단서를 만들어낸 태강병원 의사들이 사실은 선민식과 함께 해왔던 과장들이라는 걸 거론하며, 이 모든 게 어쩌면 나이제의 큰 그림일 수 있다는 걸 예고했다. 즉 김석우의 형 집행정지가 무산됨으로써 선민식에게 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본격화할 정의식 검사의 이전 사건들의 조사를 촉발시킨 거라는 것. “제 손에 피를 묻힌다”는 뜻은 아마도 이렇게 자신까지 포함해 선민식과 그 일당들을 모두 곤경에 빠뜨리겠다는 의미일 게다.

 

어찌 보면 악당 같은 주인공 나이제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바꿀 수 없는 ‘악의 시스템’이라는 점에서 그 일련의 선택들에 심지어 공감하게 된다. 그리고 이건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부정한 시스템의 현실이 갈수록 공고해져가고 있다는 뜻일 지도 모른다. 대중들은 더 이상 순진한 정의가 먹히지 않을 거라는 걸 어느새 공감하게 됐는지도.(사진:KBS)

솜씨에 인성까지, '골목식당' 백종원도 빠져들 정도라면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충남 서산 해미읍성 어느 골목길로 백종원이 우산을 들고 식당을 찾아간다. 이제 13번째 골목을 맞는 SBS <백종원의 골목식당>의 시그니처가 된 풍경. 본래 얼굴을 숨기려 마치 영화 <킹스맨>처럼 우산을 들게 됐던 것이지만, 봄비가 내리자 그 우산은 그 풍경에 딱 어울리는 자연스런 소품이 되었다. 이런 날이면 왠지 낮술이라도 한 잔 걸치고픈 마음이 인지상정. 백종원이 찾아간 돼지찌개집 역시 그런 마음에 딱 맞춘 음식들을 내놨다.

 

직접 찾아가보기 전까지 백종원은 반신반의했다. 일단 메뉴가 너무 많은 게 신뢰감이 가지 않은 이유였다. 소머리국밥 하나만 해도 제대로 하려면 전문점을 해야 될 터였지만 여기에 돼지찌개에 냉면부터 갖가지 다양한 계절메뉴까지 메뉴판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게다가 손님들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고 슬쩍 슬쩍 반말과 존칭을 넘나드는 사장님은 화면으로만 봤을 때는 섬세할 것 같지 않은 여장부 스타일이었다. ‘장금이’로 불린다는 별명 또한 어딘지 은근히 반발심을 만들 수밖에.

 

하지만 이 모든 건 선입견이자 편견이었다. 백종원이 가게 문을 들어서자 여장부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 수줍어하며 90도로 인사하는 사장님은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게다가 별 기대 없이 소머리국밥과 돼지찌개를 주문하는 백종원을 반색하게 만든 건 반찬으로 떡 하니 올라온 어리굴젓이었다. 비싸서 반찬으로 내놓기 어렵지 않냐는 백종원의 물음에 사장님은 “음식 장사하는 사람이 그러면(가격 따지면) 되냐?”고 반문했다. 그 한 마디에 사장님의 음식과 손님에 대한 생각이 모두 담겨 있었다. 백종원은 음식을 평가하기 전 어리굴젓 하나만 갖고도 밥 한 그릇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맛있다고 말했다.

 

자부심으로 좋은 재료만 쓴다는 이런 사장의 음식이 맛이 없을 리 만무했다. 소머리국밥도 미리 삶은 고기를 진공 포장해 잡내가 생기지 않게 준비해놓고 있었고, 국물도 제대로 였다. 이름이 특이한 돼지찌개는 돼지고기와 김치를 함께 끓여 찌개로 내놓는 것이었는데, 백종원은 이를 단박에 알아보고 “그럼 김치찌개 아니냐”고 물었다. 사장님은 부인하지 않았다. 다만 돼지고기가 많이 들어가서 돼지찌개라고 이름 붙였다고 설명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막상 나온 돼지찌개를 보니 그렇게 이름 붙여야 될 정도로 돼지고기가 많이 들어가 있었다. 그냥 대충 이름을 붙인 게 아니라 진짜로 음식에 좋은 재료를 아끼지 않았기에 붙여질 수 있는 이름이었다.

 

백종원은 어리굴젓에 반찬으로 나온 김치를 먹어보며 맛있다고 했고, 그 김치 맛 덕분에 돼지찌개에 별다른 재료가 들어가지 않아도 맛이 난다고 말했다. 마침 비도 내리고 있어 뜨끈한 국물에 소주 한 잔이 간절해진다는 백종원은 결국 ‘장금이’라는 별명을 인정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칭찬에 정작 이를 상황실에서 모니터로 보고 있는 사장님은 쑥스러워 했다. “괜히 그러시는 것 같다”고 말하는 사장님에게서 겸손함이 느껴졌다.

 

보통 조리실의 위생상태를 점검하며 뭐 잘못된 건 없나 찾곤 했던 백종원이지만, 엉뚱하게도 그는 이 집의 다른 반찬은 없나 찾고 있었다. 김치냉장고에서 찾아낸 도라지무침과 파김치를 먹어보고는 “왜 이 반찬은 안 내놓으셨냐?”고 투덜대기도 했다. 사장님은 그런 반찬들이 굉장히 많다고 말했다. 순간 사장님이 하는 장사의 철학이 언뜻 엿보였다. 그저 장사가 아니라 마치 자기 집에 찾아온 손님을 대접하듯 재료를 아끼지 않고 만든 음식과 반찬을 그 때 그 때 맞춰 내놓는 것. 아마도 이런 집이라면 손님들은 훨씬 더 편안한 정 같은 걸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준비된 집이라면 <백종원의 골목식당>이 함께 하는 것만으로 이미 솔루션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음식 맛있고 재료 아끼지 않으며 청결상태도 좋은 데다 사장님의 따뜻한 인성까지 있으니 손님이 오지 않는 건 알려지지 않아서일 뿐이니 말이다. 이미 봄비 내리는 날 백종원을 낮술 ‘땡기게’ 한 음식점으로 알려진 이상, 이제 잘 될 일만 남았다.(사진:SBS)

‘해치’가 말하는 정치, 법치, 이치

 

SBS 월화드라마 <해치>가 그리고 있는 영조의 청년시절 연잉군(정일우)은 우리가 사극에서 흔히 보던 그런 왕자(혹은 왕)나 신하와는 사뭇 다르다. 김이영 작가가 예전에 썼던 <이산>이나 <동이>와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이산>에서 정조는 끊임없는 암살 위협 속에서 생존해나가는 왕이었고, <동이>에서 숙종은 희빈 장씨로 인해 불어 닥치는 피바람 속에서 동이와 그 아들을 지켜내는 인물이었다. 그들은 모두 선악 구도에서 선의 역할을 자처했고, 반대세력들은 이들이 이겨내거나 제거해야할 절대 악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해치>는 다르다. 일단 연잉군이라는 인물이 그렇다. 훗날 영조가 되는 이 인물은 물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비전형 리더이긴 하다. 그의 주변에 박문수(권율)나 여지(고아라), 달문(박훈) 같은 인재들이 모여드는 이유다. 하지만 연잉군 또한 어좌에 대한 욕망을 부정하지 않는다. 무수리 출신 최숙빈의 아들로 태어나, 결코 어좌를 엿볼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그는 방탕하게 시간을 보낸 인물이다. 그 누구보다 왕재를 가진 인물이었기 때문에 태생으로 길이 막혀버린 그의 좌절감은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에게 아버지인 숙종(김갑수)은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는데 하지 않았다며 질책한다. 그 다른 선택이란 어좌에 대한 욕망을 말한다. 숙종 역시 연잉군을 왕재로 여겼다는 뜻이다. 

 

이 천출로서 소외됐던 왕자라는 위치는 <해치>가 연잉군이라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포착해내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 누구보다 어좌에 대한 욕망을 가진 인물이면서도 저잣거리에서 핍박받는 민초들의 사정을 잘 아는 인물. 그토록 힘겹게 살아가지만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갖은 수탈을 당하고, 심지어 죽게 되도 항변조차 하지 못하는 민초들의 심정은 어쩌면 연잉군의 ‘천출’로서 겪는 심정과 맞닿아 있었을 거라는 심증이 그것이다. 그래서 그가 양반들 앞에 나아가 “누가 누구 덕에 사는가”하는 질문을 던지는 건 민초들의 고충을 말하는 것이지만, 또한 거기에는 자신의 처지에서 우러나는 진심이 담겨있을 수 있었다. 

 

이처럼 <해치>가 그리는 연잉군은 이미 역사의 승자이기 때문에 모든 게 선인 그런 단순한 인물이 아니다. 어쩌면 왕 같은 인물은 그 자신의 노력 또한 당연히 필요하지만 시대의 공조가 만들어낸 선택의 결과라고 <해치>는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천출이었다는 그 신분이 오히려 당대의 어지러운 당파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피폐되어가던 민초들의 민심을 얻게 되는 기폭제로 작용하고, 소외됐던 만큼 커진 어좌에 대한 욕망은 그를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게 해주었다는 얘기다. 

 

<해치>는 연잉군의 이런 출신의 문제가 가진 이중적인 속성을 밑거름으로 삼아, 그 욕망이 실현될 수 있는 방법으로서 사헌부 같은 감찰기관의 개혁을 중심에 세운다. 즉 노론 같은 가진 자들이 수탈하고 핍박하고 심지어 살인까지 자행했던 그 많은 비리들이 가능했던 건 독립을 유지해야할 사헌부가 이들과 결탁했기 때문이었다. 드라마 첫 회 연잉군이 과거시험장에서의 비리를 드러내는 장면으로 등장하고, 그로 인해 박문수 같은 실력은 있지만 연줄이 없어 연거푸 낙방하게 된 인물을 알게 되는 에피소드로 시작하는 건 향후 사헌부 개혁의 이야기를 끌어가기 위한 밑그림인 셈이다. 

 

그리고 여기에 밀풍군(정문성)이나 위병주(한상진) 같은 인물들과의 대결이 시작된다. 이들은 물론 전형적인 악역으로 그려지지만 그들 역시 그런 악당이 된 것이 저마다의 사정에 의한 것임을 드라마는 외면하지 않는다.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소현세자의 후손으로서 밀풍군은 어좌가 본래 자신의 것이었으나 빼앗겼다 여기는 인물이고, 위병주는 몰락한 남인의 혈통으로 당시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있던 당파 속에서 완전히 소외되었던 인물이다. 

 

연잉군이 결국 행하는 정치는 그래서 사헌부 개혁이라는 법치를 먼저 세우는 일로 시작한다. 정치권력이 너무나 강해져 위법이 자행되는 시대에 이로써 죽어나가는 민초들을 위해(또 이들의 위법으로 인해 소외된 인물들을 위해) 법치를 세운다는 건 아무 것도 없던 연잉군이 새로운 지지 세력을 결집할 수 있는 힘이 된다. 사회 정의에 대한 요구가 그를 왕재로 만드는 중요한 기회요소가 된다는 것. 

 

게다가 이러한 정치와 법치를 뛰어넘어 민초들의 지지까지 얻게 되는 건 연잉군이라는 인물이 가진 신분을 바라보는 남다른 시선이다. 노론의 실질적인 우두머리인 민진헌(이경영)은 신분질서가 ‘세상의 이치’라고 말하지만, 연잉군이 생각하는 이치는 다르다. “누가 누구 덕에 사는가”라는 질문에 그 생각이 담겨있다. 

 

<해치>가 보기 드문 역사인식과 현실인식을 담고 있는 작품이라는 건, 이 작품이 연잉군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바라보는 현재적 시선의 날카로움 때문이다. 거기에는 지금 현재 우리에게도 갈급한 정치 이전에 법치, 아니 구체적으로 말하면 제대로 굴러가는 법 정의에 대한 현실인식이 고스란히 담겨있고, 그 밑바탕에는 결국 권력은 민심으로부터 나온다는 시대가 바뀌어도 변치 않는 ‘세상의 이치’가 그려져 있다.(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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