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사회와 러브 유어셀프

인사이드 아웃2

디즈니 픽사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2’의 누적관객수가 745만명(13일 기준)을 넘어섰다. 국내 개봉 픽사 애니메이션 최다 관객을 동원했던(724만 명) ‘엘리멘탈’의 기록을 깬 것이다. 업계에서는 이 흥행이 끝이 아니라고 예상한다. 800만 혹은 900만 관객 기록도 충분히 낼 수 있는 장기 흥행의 예감을 보이고 있어서다. 

 

사실 ‘인사이드 아웃2’는 처음 공개됐을 때만 해도 시즌1에 비해 아쉽다는 평단의 평가들이 나왔다. 라일리라는 인물의 내면에 존재하는 감정 캐릭터들의 모험을 다룬다는 기막힌 아이디어가 워낙 돋보였던 작품인데다, 기쁨이, 슬픔이는 물론이고 빙봉이 같은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마음을 사로잡았던 작품이었다. 그러니 워낙 신선했던 첫 충격의 잔상이 그만큼 커서 시즌2에 대한 아쉬움을 만들었을 게다. 게다가 어린 라일리에서 이제 사춘기에 접어든 라일리의 이야기를 담은 서사는 아이들 애니메이션치고는 조금 어렵다는 평가들도 나왔다. 인물의 내면 감정 캐릭터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아이들이 보기에 쉬운 내용이라 보긴 어렵다. 그런데 사춘기로 접어들면서 기존 감정들만이 아니라 새롭게 생겨난 불안, 부럽, 따분, 당황 같은 감정들이 등장하고, 그들 사이에 감정 제어 본부를 두고 벌어지는 쟁탈전은 더 복잡한 양상을 띠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사이드 아웃2’는 아이들 애니메이션이라기보다는 어른들에게 더 어울리는 작품에 가까웠다. 이러한 약점들에도 불구하고 ‘인사이드 아웃2’가 이처럼 열광적인 반응을 얻게 된 건, ‘불안’이라는 감정을 중심으로 그려낸 서사가 우리네 사회현실과 맞물리면서 생겨난 신드롬에 가깝다. 작품 내적인 힘만이 아니라, 작품 외적인 힘이 작용했다는 것인데, 이른바 ‘불안사회’라고 불러도 될 법한 한국사회의 현실이 이 작품에 대한 남다른 반응들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인사이드 아웃2’에서 라일리는 사춘기 소녀로 성장해 자신이 동경하는 고등학교 명문 하키팀에 들어가고 싶어하고 그 기회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이 성장통으로 등장하는 감정이 바로 ‘불안’이다. 혹여나 어렵게 얻은 기회를 놓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은 라일리를 더욱 노력하게 만드는 동력이 된다. 즉 이 불안이라는 감정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걸 이 영화는 보여준다. 하지만 문제는 불안이 과도해지면서 생겨나는 부작용들이다. 불안에 잠식당한 라일리는 자신의 성취를 위해 친했던 친구들을 등한시하거나 때로는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해버리는 부정적인 일들도 저지른다. 또한 불안과 함께 등장한 캐릭터인 부러움 같은 감정도 이러한 라일리의 불안을 더욱 부추긴다. 불안과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동경하고 부러워하는 건 자신을 성장시키는 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그 역시 과도해지면 시기나 좌절이 따라붙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 불안이나 부러움 같은 새로운 감정들이 야기하는 부정적인 느낌은 과거 기쁨이나 슬픔 같은 감정들이 만들어 놓았던 긍정적인 느낌들과 부딪쳐 내적 갈등을 만들어낸다. 기존 감정들이 만들었던 자아가 끊임없이 라일리에게 ‘나는 좋은 사람이야’라고 속삭일 때, 불안 같은 감정들이 만든 새로운 자아는 ‘난 아직 부족해’라고 말한다. 이 상반된 두 감정이 맞부딪치면서 결국 라일리는 패닉 상태에 빠져든다. 무엇 하나 제 감정을 추스를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서사는 우리네 사회의 기저에 깔려있는 불안 정서를 건드리면서 이 작품에 보다 깊게 공감하게 만든다. 패닉 상태에 빠진 불안이를 기쁨이 같은 다른 감정 캐릭터들이 꼭 껴안아주며 ‘괜찮다’고 보듬어주는 장면은 그래서 놀랍게도 우리네 관객들(특히 성인들)의 심금을 울린다. 그건 라일리의 상황이 바로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각자도생하기위해 고군분투하는 우리들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는 공감 때문이고, 무엇보다 우리가 그렇게 힘들고 외롭다고 여겨질 때 적어도 우리 안에는 우리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고마운 존재들인 감정들이 있었다는 뭉클한 인식 때문이다. 

 

우리네 사회의 압축성장 과정을 들여다 보면, 바로 이 불안을 부추기는 경쟁사회가 만들어낸 강력한 동력을 발견하게 된다. 누군가와 경쟁해야 하고, 경쟁에서 떨어지면 낙오하게 된다는 불안감은 우리를 끊임없이 채찍질함으로써 그 짧은 기간 안에 그 놀라운 경제 성장을 이뤄낸 힘을 만들었던 거였다. 물론 그 과정에서는 결국 스스로를 부족하다 여기고 채찍질하는 자기 희생들이 담보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제 어느 정도 경제적 발전을 이뤄냈지만, 그 만만찮은 후유증들이 우리 앞에 놓였다. 그 중에서 가장 심각한 건 양극화로 인해 누군가는 부유해졌지만 여전히 그렇지 못한 이들이 갖는 불안과 좌절의 감정들이다. 그건 비뚤어진 사회 시스템이 만들어낸 결과지만, 사회는 자꾸만 그걸 개인의 부족함으로 밀어낸다. 당신이 성장하지 못하는 건 당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난 아직 부족해’라는 라일리 내면의 목소리는 그래서 지금도 우리 안에서 계속 울려퍼지고 있다. 

 

‘토닥토닥! 너무 애쓰지 않아도 돼!’ 최근 픽사에서 한국관객들을 위해 제작 공개한 스페셜 아트에는 ‘인사이드 아웃2’에 등장했던 캐릭터들인 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 당황, 따분, 부럽이 불안 캐릭터를 꼭 껴안아주는 장면과 함께 그런 카피가 더해졌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 애쓰거나, 성공하기 위해 끊없이 나의 부족을 찾아내고 채찍질해온 우리들에게 그 카피는 말하고 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너로 충분하다고. 

 

방탄소년단이 전 세계의 청춘들을 공감시켰던 메시지가 바로 ‘러브 유어셀프(Love Yourself)’였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그것 역시 우리네 불안사회가 야기한 우리 스스로를 그냥 놔두지 않게 된 현실과 맞물려 자연스럽게 나온 목소리가 아니었을까. 불안사회를 넘어서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사회로 나가는 길. 그건 어쩌면 압축성장 이후 지금껏 이어지고 있는 우리 사회의 후유증이 해결해야할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아닐까 싶다. (글:이데일리, 사진:영화'인사이드 아웃2')

“가라, 가서 마음껏 실패하라.” 이종필 ‘탈주’

탈주

북한의 최전방 군부대에서 10년 만기 제대를 앞두고 있는 규남(이제훈)은 탈북을 꿈꾼다.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고, 제대 후에도 그의 출신성분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하급 노동’뿐이다. 이미 미래가 결정되어 그 어떤 선택들도 가능하지 않은 삶. 규남이 철책을 넘어 지뢰지대를 뚫고 남으로 가려는 이유다. 하지만 규남의 탈북을 어떻게든 막으려는 현상(구교환) 역시 그 상황이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귀족에 해당하는 출신성분으로 러시아 유학까지 다녀와 보위부 소좌로 권력을 누리고 있지만, 그 역시 피아노에 대한 꿈을 접었다. 무엇 하나 선택할 수 없고 정해진 운명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삶. 이종필 감독의 ‘탈주’는 그 감옥 같은 삶으로부터 탈주하려는 청춘들의 사투와 고뇌를 그린 작품이다. 

 

왜 갑자기 북한 청년들의 이야기인가 싶지만, 규남이 남으로 가고픈 욕망을 드러내는 모티브로, 남측으로부터 라디오로 들려오는 자이언티의 ‘양화대교’가 흐를 때 이 영화가 진짜 하려는 이야기는 따로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택시운전수 아버지의 삶을 나이 들어 양화대교를 건너며 이해하게 되는 화자의 이야기를 담은 이 노래는 부모의 삶이 다음 세대로 유전되는 우리네 현실을 표현한 곡이다. 즉 우리의 상황도 북한처럼 극단화되진 않았지만 그 공고한 시스템에 청춘들을 가둬놓은 건 마찬가지라는 현실인식이 이 작품에는 담겨있다. 

 

“마음껏 선택하고 실패하는 삶을 살겠다”고 말하는 규남의 절실함을 마주한 후 현상은 그를 보내준다. 그러면서 “가라, 가서 마음껏 실패하라”고 말한다. 우리는 청춘들에게 마음껏 선택하고 실패할 수 있는 기회를 허용하는 사회일까. 곱씹어봐야 할 대목이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도 규남 같은 탈주하려는 청춘들이 적지 않을 테니 말이다. (글:동아일보, 사진:영화'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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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이네2’로 돌아온 이서진의 곰탕 같은 매력

서진이네2

“곰탕집 하나 할까봐요.” 10년 전 정선에서 처음 tvN 예능 ‘삼시세끼’가 문을 열었을 때 자급자족을 해먹으라는 제작진의 요구에 이서진은 커다란 솥단지에 소꼬리와 뼈를 넣어 오래도록 끓여낸 곰탕을 만들었다. 손님으로 찾아와 그 맛을 본 신구, 백일섭 할배들이 유명한 곰탕집보다 낫다는 평가를 내놓자 이서진은 특유의 보조개로 환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은 10년 후 현실이 됐다. ‘서진이네2’로 아이슬란드에서 열게 된 한식점 ‘서진뚝배기’의 메인 요리가 바로 이서진이 끓여내는 꼬리곰탕이 됐기 때문이다. 나라 이름만 들어도 한기가 느껴지는 아이슬란드와 뜨끈한 우리의 정이 느껴지는 꼬리곰탕의 만남. 그 사이에는 10년의 세월을 거쳐 진국으로 우러난 이서진이라는 인물이 서 있다. 배우지만 나영석 PD와 만나 예능에서도 일가를 이룬 오래도록 끓여 굳이 뭘 넣지 않아도 그 자체로 맛을 내는 곰탕 같은 매력의 소유자가 바로 그다. 

 

나와는 오랜 인연이 있는 나영석 PD가 처음 ‘삼시세끼’를 찍고 막 돌아왔을 때 했던 이야기가 있다. 그는 대뜸 “이번에는 진짜 망할 것 같다”고 말했다. 제목을 ‘삼시세끼’라 짓고 정말 하루 세 끼 챙겨먹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미션도 없는 예능을 시도했는데, 진짜로 출연자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더란다. 그런데 이러한 우려와는 정반대로 ‘삼시세끼’는 대박을 냈다. 그건 당시 이미 미션 같은 인위적 설정에 물린 시청자들이 더 리얼한 걸 요구하기 시작했던 변화와 맞물린 덕분이기도 했지만, 그 아무 것도 하지 않는데도 계속 보게 만드는 매력의 소유자 이서진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영석 PD는 이서진의 매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방송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진짜로 다 해요.”

 

이런 모습은 ‘서진이네2’의 출연자들이 처음 아이슬란드에 내려 차를 타고 서진뚝배기를 향해 가는 길에서도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이서진과는 상반되게 대놓고 방송 분량을 만들겠다고 나서며 흐린 날씨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와 멋있다 진짜”라고 일부러 말하는 최우식에게 단박에 “거짓말 하지 마”라고 웃으며 선을 긋는 모습이 그것이다. 그의 이런 진솔한 모습은 일찍이 ‘1박2일’ 시절부터 나영석 PD의 눈에 들어왔고, ‘꽃보다 할배’의 짐꾼을 거치면서 요리왕을 꿈꾸던 것이 ‘삼시세끼’로 또 이어졌다. 그리고 ‘윤식당’과 ‘윤스테이’를 거쳐 ‘서진이네’로 성장했다. 나영석 PD가 일부러 그렇게 한 건 아니지만, 이 과정을 보면 마치 이서진이라는 인물의 자수성가 성장담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처음에는 그저 할배들 밥을 챙기다가 해외와 국내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한식당 경영을 해보더니 드디어 해외에 자기 한식당을 열게 된 사장이랄까. 

 

‘서진이네2’에서도 오랜 시간을 거쳐 매력적인 캐릭터로 자리잡은 이서진의 겉은 차갑지만 속은 따뜻한 면모들이 돋보인다. 매일 메인셰프를 정해 운영하겠다는 새로운 방침에 따라 누구를 첫 날 세울 것인가를 고민하던 이서진은 최우식을 스타트로 세우면서 그 이유로 분명 첫날은 손님이 별로 없을 거라는 합리적인 추론을 내세웠다. 나영석 PD가 “버리는 카드냐”고 묻자 이서진은 웃음기 없는 진지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아니 버리는 게 아니라 그래서 얘가 데뷔하기 좋은 기회라는 거지.” 그 말에 붙은 ‘따뜻한 속마음도 차갑게 표현하라’는 자막은 이서진이 가진 솔직하면서도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잘 드러낸다. 어찌 보면 간지러운(?) 말이나 상황들을 견디지 못하는 것 같은 이 인물은 요리를 하다가 최우식이 살짝 엄지손가락을 데이자 무심한 척 걱정하는 목소리를 내다가도, 상처부위를 들여다 보고는 자신도 과거에 그런 일을 겪었다며 네 상처는 별거 아니라고 ‘자기 식’의 위로를 덧붙인다. 

 

이러한 ‘겉차속따’의 면모는 이서진이 변화하는 예능 환경 속에서 도드라지는 인물로 성장하게 된 중요한 이유다. 과거 연예인들은 방송에서 정반대로 ‘겉따속차’의 모습을 보이는 걸 일종의 이미지 관리로 해왔던 경향이 있었다. 실제로는 차갑지만 인간적인 면모들을 방송에 나올 때만 강조하는 것이 연예인들의 관리된 이미지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서진은 그 틀을 깨고 나와 있는 그대로의 툴툴거리고 때론 투덜대는 자신의 면모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꽃보다 할배’에서 어르신들을 챙기는 짐꾼 역할을 누구보다 성실하게 하지만, 나영석 PD와 앉아 뒷풀이로 술을 마시거나 할 때는 한없이 푸념을 늘어놓는 모습을 보여준 것. 그것은 거짓이 아닌 진실된 면모로 시청자들에게 다가왔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힘들어 투덜대는 것일 뿐, 어르신들에 대한 배려는 진심이라는 걸 드러냈다. 즉 인간은 두 가지 감정이 공존할 수 있다는 걸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점점 리얼함을 요구하게 된 방송 환경 속에서 이서진이 주목된 이유다. 

 

물론 이서진의 본업은 배우다. 그래서 최근에도 ‘조폭인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에 김득팔이라는 조폭으로 특별출연해 존재감을 드러낸 바 있고, ‘연예인 매니저로 살아남기’에서는 메쏘드엔터 총괄이사인 마태오 역할을 또 ‘내과 박원장’에서는 대머리 내과의사 박원장 역할로 파격적인 연기 변신을 보여주기도 했다. 물론 ‘트랩’이나 ‘타임즈’ 같은 작품에서 진지한 역할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워낙 예능 이미지가 강해지다보니 조금은 희화화된 캐릭터로 소비되는 경향이 생겼다. 하지만 그의 과거를 들여다보면 그 유명한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는 명대사를 남긴 ‘다모’의 주인공이었고 ‘연인’에서 김정은과 호흡을 맞춘 멜로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이기도 했다. 즉 현재의 흐름대로 예능에서 얻은 이미지로 배역 또한 소비되고 있지만 언제든 또다른 변신이 가능한 배우라는 점이다. 

 

중요한 건 물 흐르듯 변화하는 상황에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서 나오는 다양한 감정들을 이서진은 대중들에게 그대로 납득시켜주는 면이 있다는 점이다. 투덜대도 그 밑에 깔린 따뜻함이 느껴지고, 따뜻한 목소리에도 장난기를 숨기는 그런 다양한 감정의 공존이 그는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건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며 누군가의 감정을 일면으로만 파악하긴 어렵고 그것이 결국 인간적인 매력이라는 것을 에둘러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끓이고 끓여야 비로소 진국의 맛이 우러나는 곰탕처럼.(글:국방일보, 사진:tvN)

‘돌풍’은 왜 정치드라마가 아닌 정치 활극을 선택했을까

돌풍

2010년 방영된 드라마 ‘대물’에서 선거 유세 중 서혜림(고현정)이 테러를 당하고 병원에 누워 있다 깨어나 “유세장은요?”라고 했던 대사는 당시 큰 화제가 됐다. 그 대사는 비슷한 상황을 겪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 했다는 “대전은요?”와 너무나 유사했기 때문이다. ‘대물’은 이외에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소재로 내세웠다는 점이나, 대통령 탄핵, 잠수함 침몰, 아랍지역에서의 피랍사건 같은 소재들로부터 멀지 않은 과거 정치사의 한 장면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외압이 있었던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이 작품은 초기에 작가와 PD까지 교체되는 일이 벌어졌고 그것이 정치라는 소재의 민감한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실제 박근혜 전 대통령의 모습과 드라마 속 서혜림은 여성이라는 점을 빼고 닮은 구석이 거의 없었고, 또 극중의 그가 보여주는 행동들 속에는 다른 정치인들의 이미지가 더해져 있었던 게 사실이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표적인 그 정치인 중 한 명이다. 탄핵 정국은 물론이고 TV토론 연설에서 서혜림이 이른바 “회초리를 들어주십시오”라고 했던 대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통령의 어버이는 국민입니다. 잘하면 칭찬과 격려를 해주고 잘못하면 회초리를 듭니다”라고 했던 내용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대물’의 사례는 정치드라마가 왜 우리네 현실에서 쉽지 않은가를 잘 보여준다. 그만큼 민감한 사안이고, 때로는 전혀 의도치 않게 현실 정치에서 작품을 끌어다 자기 진영에 유리하게 해석하는 ‘아전인수’가 벌어지기도 한다. 실제로 당시 ‘대물’에 대해 친박계 의원들은 대놓고 서혜림이 박근혜를 닮았다는 이야기를 공공연히 꺼내놓기도 했다. 실로 닮은 구석은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생각해보면 2007년 대션 때 방영되어 당시 이명박 후보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던 드라마 ‘영웅시대’가 준 잔상이 분명히 우리네 정치드라마에는 그림자처럼 남아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니 넷플릭스 시리즈 ‘돌풍’의 도전은 그 자체로 만만찮다고 여겨진다. 정치에 관심이 좀 있는 분들이라면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소재들은 어딘가 현실 정치에서 너무나 익숙한 것들이다. 정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때가 되면 당적으로 옮기는 철새 정치인의 이야기나, 시대가 한참 지났어도 여전히 태극기부대를 동원해 북풍 공작을 일삼는 수구 정치인 이야기, 탄핵 정국과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벌어지는 상황이나, 들불처럼 번지는 촛불 시위 같은 사건들이 그것이다. 게다가 노벨평화상을 받은 대통령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대통령의 이야기는 누구나 선명하게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만일 총선 전에 방영되기라도 했다면(아마 이건 의도적으로 피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돌풍’의 화제성은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더 높았을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에서 드라마 속 내용들을 조목조목 잘라다가 제 입장에 유리한 방향으로 활용했을 가능성이 높으니 말이다. 그런 우려들을 염두에 뒀던 것일까. ‘돌풍’은 시작부터 파격적인 전개로 현실성보다는 허구성을 더 드러낸다. 대통령을 시해하는 국무총리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대통령의 경호가 그렇게 허술할 수 없다는 개연성의 허점을 감수하고라도 이런 전개를 선보인 건 이건 그저 드라마일뿐이라는 걸 강변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판을 열어 놓고 ‘돌풍’은 박동호(설경구)와 정수진(김희애)의 끝없는 대결구도로 드라마롤 몰아간다. 판세가 뒤집히고 또 뒤집히는 그 과정은 과거 박경수 작가의 ‘펀치’를 그대로 닮았다. 그래서 드라마는 마치 게임처럼 흘러간다. 서로 한 대씩 펀치를 날리는 게임. 흥미로운 건 서로 판세를 바꾸기 위해 쓰는 카드들이 현실 정치에서 우리가 많이 봐왔던 소재들(이를 테면 북풍이라든가)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시청자들은 ‘돌풍’이 철저히 허구로 재구성된 드라마라는 걸 인식하면서도 그걸 통해 순간순간 틈입하는 현실 정치의 요소들을 느끼게 된다. 

 

물론 이렇게 함으로써 ‘돌풍’은 정치드라마로서의 복잡미묘한 과정들을 담아내지 못한다. 빠른 속도감으로 치고받는 이야기를 펼치게 되면서 개연성도 상당부분 허술해지고, 대사들은 마치 구호처럼 작가의 목소리를 담는다. 그래서 드라마로 보면 결코 완성도가 높다고 평가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작가가 갖고 있는 현실 정치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된 극단적인 허무주의가 던지는 메시지만은 더 선명해진다. 어느 쪽도 희망을 발견하기 어려운 정치를 모두 쓸어버리고 싶다는 간절한 욕망이 그 메시지로 등장한다. 

 

아쉬움이 적지 않지만 적어도 현실 정치에 답답함을 느끼는 분들에게는 잠시나마 ‘돌풍’ 같은 시원함을 안겨줄 수 있는 드라마다. 물론 지나치게 현실과 연관지어 사건들을 들여다보게 되면 불편함도 생겨날 수 있다. 그러니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 속도감과 몰입감을 즐기는 방식으로 보는 편이 낫다. 그러다 보면 끝내 작가가 절규하듯 외친 진짜 메시지를 여운처럼 느낄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사진: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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