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촉촉이 내리는 비, 창가에 앉아 기다리는 남자주인공, 따뜻한 가게의 조명, 예쁜 색감이 돋보이는 빨간 우산을 쓰고 다가오는 여자주인공 그리고 그 위로 잔잔히 흐르는 음악... tvN 토일드라마 ‘졸업’의 장면들은 어딘가 익숙하다. 거기에는 ‘안판석’이라는 감독의 아우라가 느껴진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봄밤’에 이어 ‘졸업’까지, 연달아 멜로에 뛰어듬으로써 이제는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는 안판석 감독표 로맨스물의 색깔이 그것이다. 

 

물론 안판석 감독의 로맨스에는 멜로 이외에도 디테일한 사회생활의 이야기가 담기곤 했는데, 이번 ‘졸업’은 대치동 학원가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막연히 수십 억 연봉의 스타 강사들의 이야기로만 알려져 있지만, ‘졸업’이 보여주는 건 그 수치 이면에 담긴 강사들의 치열한 경쟁과 노력이다. 서혜진(정려원)은 그 경쟁을 뚫고 대치동 학원가에서 인정받는 국어 일타강사다. 한 명 두 명 수강생들이 늘고 통장 잔고가 늘어가는 걸 보람으로 여기며 살던 그의 평탄한 삶에 갑자기 그의 첫 번째 제자 이준호(위하준)가 불쑥 들어온다. 8등급 꼴통이었지만 서혜진을 만나 기적의 1등급을 받고 명문대에 합격했고 졸업 후에는 모두가 선망하는 대기업에도 들어갔지만 그는 갑자기 회사에 사표를 내고 학원강사로의 길로 뛰어든다. 서혜진은 학원강사의 삶이 보기와는 다르다며 완강히 반대하지만 끝내 그가 일하는 학원으로 들어온 이준호는 함께 ‘사제출격’이라는 콘셉트로 공동강의를 시도한다. 

 

등급을 올려주기 위해 아이들 학교의 시험 출제 경향을 파악하고 대비해 나가야 하며, 때론 오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학교 국어선생님과 각을 세우기도 하고, 학생들을 빼가려는 경쟁 학원과의 전쟁 같은 대결을 벌이면서, 점점 높아진 위상에 자신을 견제하려는 학원 내부의 움직임과도 부딪쳐야 하는 치열한 대치동 학원가의 삶. 그 치열함 속으로 어느 날 불쑥 들어온 이준호는 서혜진의 잔잔했던 마음에 돌을 던진다. 

 

그것은 두 가지 차원에서의 돌이다. 하나가 첫 제자로만 알던 이준호가 ‘동료 선생님’으로 오면서 느끼게 되는 멜로 감정이라면, 다른 하나는 이준호로 인해 다시금 피어나게 된 잃어버렸던 열정 같은 것이다. 첫 제자였던 이준호를 가르칠 때 그저 문제 푸는 법만 알려준 게 아니라 국어를 사랑하게 만들었던 서혜진이었다. 스타 강사로 자리매김한 이후에는 그런 교육방식을 비효율적이라 생각하게 됐지만, 갑자기 나타난 이준호와 공동강의를 준비하면서 그 초심의 열정이 되살아난다. 

 

그래서 ‘졸업’은 서혜진과 이준호의 로맨스를 그리면서 동시에 변해버린 서혜진의 교육에 대한 진짜 열정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담는다. ‘졸업’이라는 제목은 그래서 다의적이다. “선생님.. 이라고 불러 보세요. 선생님이라고 불러 보시라고요. 꽤 기분 좋을 것 같은데.” 다시 나타난 이준호가 서혜진에게 그렇게 말하듯, ‘졸업’은 사제지간의 관계를 졸업하려는 이준호의 마음을 담은 제목이다. 하지만 동시에 서혜진이 스타 강사로 하루하루를 경쟁적으로 살아오면서 잃었던 것들을 이준호를 통해 되찾게 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으로부터 ‘졸업’하고 교육의 새 길을 찾아가겠다는 의미를 담은 제목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그 이야기의 틀거리는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와 유사해 보인다. 그저 가끔 만나 밥 사주는 예쁜 누나로 알고 지냈지만 서로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로 발전해가고, 그 과정에서는 직장에서 심지어 성추행을 당해도 그러려니 하며 살던 누나가 자신의 존재가치를 자꾸만 일깨워주는 남자를 통해 그 삶에 변화를 갖게 되는 이야기가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가 아니었던가. 마찬가지로 ‘졸업’도 선생님과 제자로만 지내던 사이에게 연인 관계로 변해가는 로맨스를 그리면서 동시에 그 과정에서 선생님의 삶이 변화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비슷한 틀이지만 대치동 학원가라는 디테일한 스토리들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지고, 거기서 만들어지는 다양한 감정들이 안판석 감독 특유의 차곡차곡 쌓아가는 서사에 의해 폭발력을 만든다. 빼놓을 수 없는 게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만들어낸 OST의 힘이다. 전곡에 참여한 뉴욕 출신 3인조 밴드 The Resless Age의 모던하면서도 노스탈직한 사운드는 한번 들으면 잊혀지지 않는 ‘졸업’만의 감성을 만들어낸다. (글:일간스포츠, 사진:tvN)

“이거 사고 맞죠?” 이요섭 ‘설계자’

설계자

김은희 작가가 쓴 드라마 ‘지리산’은 산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사고들이 알고 보니 누군가 저지른 살인사건이었다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사고인 줄 알았더니 사건이었더라는 서사를 굳이 김은희 작가가 쓴 건, 그것이 주는 울림이 있어서다. 멀리는 삼풍백화점 붕괴부터 가깝게는 이태원 참사에 이르기까지 꽤 많은 대형참사들이 그저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의 방만함이 불러온 사건이었다는 대중적 공감이 그 울림의 정체다. 이요섭 감독의 ‘설계자’ 역시 바로 이 사고와 사건이라는 다른 관점이 만들어내는 갖가지 음모와 음모론을 영화적 소재로 끌어온다.

 

영일(강동원)은 사고로 위장해 살인청부를 대행하는 일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주영선(정은채)이 아버지인 검찰총장 후보자 주성직(김홍파)을 죽여달라는 의뢰를 하고, 그걸 수행하는 과정에서 동료들이 죽게 되면서 영일의 의심은 점점 커져간다. 자신들 뒤에 이 모든 걸 설계한 또 다른 인물이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급기야 동료들까지 의심하기 시작한다. 하나하나 의심가는 인물들을 추적해나가고, 그들이 설계자라는 걸 확신하면서 보복을 가하려한다. 결국 ‘설계자’는 설계하던 인물이 설계를 당하게 되면서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되는 혼돈의 상황을 그리고 있다. 

 

갑작스레 달려든 버스에 치여 영일의 눈앞에서 죽어가던 팀 막내가 끝까지 믿을 수 없다며 “이거 사고 맞죠?”라고 묻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사고로 위장해 사건을 벌여온 이들이 결국 그렇게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걸 의심하게 되는 처지에 놓인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들 스스로 만든 세상에 갇힌 꼴이랄까. 최근 들어 음모론들이 많아진 이유 역시 크게 다르진 않을 게다. 이젠 진짜 사고도 사건이라 여겨질 정도로 신뢰를 주지 못하는 사회가 온갖 음모론들의 원인일 테니.(글:동아일보, 사진:영화'설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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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식이 삼촌’으로 첫 드라마 데뷔한 송강호

삼식이 삼촌

“사랑과 존경의 의미로 다들 그렇게 불러요. 삼식이, 삼식이 형님, 삼식이 삼촌. 전 너무 좋아요. 제 별명이요.” 디즈니+ 오리지널 드라마 ‘삼식이 삼촌’은 이 작품의 주인공인 삼식이 삼촌 박두칠(송강호)이 하는 그 대사로 시작한다. 이 첫 대사는 16부작 ‘삼식이 삼촌’이라는 작품이 사실상 이 인물의 서사라는 걸 예감케 한다. 삼식이 삼촌을 연기하는 송강호는 특유의 힘을 쪽 빼서 과장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편안한 목소리로 자신을 그렇게 소개한다. 시청자들은 궁금해진다. 도대체 왜 ‘삼식이 삼촌’이라는 별명이 붙었을까. 

 

1950년대말부터 이야기를 풀어가는 이 작품의 첫 회가 끝나갈 즈음, 이 대사의 의미는 삼식이 삼촌과 김산(변요한)이라는 인물이 던지는 ‘피자 이야기’로 분명해진다. “미국 사람들은 매일 그런 빵을 먹어. 심지어 먹다가 남겨. 우리도 공단만 완성이 되면 그런 빵을 먹다가 남기고 버릴 거야.” 삼식이 삼촌은 먹고 사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이다. 전후 피폐된 경제로 먹고 사는 일조차 힘들어진 현실에 제 권력을 잡겠다는 정치인들과 격동기에 외자를 유치해 공단을 건립함으로써 돈 벌 기회를 잡으려는 기업인들 속에서도 삼식이 삼촌이 주변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이유는 바로 이 먹고 사는 문제로 사람들을 설득하기 때문이다. 마침 국가 재건을 위해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믿는 김산이 등장하는데, 그 역시 피자 이야기를 한다. “피자 아세요? 드셔 보신 분? 의원님, 드셔 보셨습니까? 제가 유학시절에 피자집 다락방에서 살았습니다. 하루 한 끼 제대로 못 먹던 유학시절에 매일 피자 굽는 냄새에 밤잠을 설쳤습니다. 여러분 총칼이 아니라 경제입니다. 누구도 끼니 걱정하지 않는 나라. 하루 세끼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나라! 제가 유학시절에 가장 부러웠던 건 전투기도 항공모함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피자였습니다. 전 국민이 굶으면서 전쟁에 이기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쯤되면 알게 된다. 왜 ‘삼식이 삼촌’인지. 하루 세끼를 배불리 먹는 일이 가장 중요했던 50년대 말부터 60년대까지의 격동기를 이만큼 잘 설명하는 캐릭터가 없으니. 

 

삼식이 삼촌이라는 캐릭터는 그래서 그 시대의 한국인을 표상한다. 어찌 보면 먹고 살기 위해 누군가를 짓밟기도 하고 심지어 죽이기도 하는 살벌한 인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생계의 문제라 고개가 끄덕여지기고 또 ‘삼촌’ 같은 든든한 느낌마저 주는 인물. 그 먹고사니즘을 해결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았던 삶이 개발시대를 거쳐 지금의 풍요를 만들어냈지만, 그 과정에서의 부정이 만들어낸 후유증도 적지 않게 남긴 인물로 그 시대의 공기를 이 인물은 고스란히 그려낸다. 배우로서 어떤 시대의 한국인을 그려낸다는 건, 어렵고도 부담되는 일이지만 송강호는 이를 마치 피자 하나 꺼내 먹듯이 너무나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소화해낸다. 

 

박찬욱 감독은 일찍이 송강호의 이 자연스럽고 편안한 연기를 그의 라이벌로 꼽히는 최민식과 비교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최민식이 고전주의자라면 송강호는 자연주의자”라고. 그건 그가 주로 맡았던 배역들이 대부분 주역보다는 주역의 뒤편으로 한 발 물러서 있는 인물들이었다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물론 중심에 서서 작품 전체를 앞으로 끌고 나가는 역할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그렇지만 그가 돋보이는 건 다른 인물들과 함께 앙상블을 이루는 연기이고, 특히 상대 역할보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있을 때다.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로 대중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후 이를 눈여겨 본 송능한 감독의 ‘넘버3’에서 지금도 대중들에게 회자되는 인물은 바로 송강호다. ‘헝그리 정신’을 강조하며 그가 하는 일장연설 장면은 무수한 패러디가 될 정도로 화제가 됐다. 주인공보다 더 주목받는 장면을 인상적인 연기로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래서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에서는 이병헌만큼 송강호가 빛났고,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에서는 김상경만큼 송강호의 존재감이 두드러졌다. 이것은 박해일, 배두나, 변희봉, 고아성이 함께 한 ‘괴물’에서도, 이병헌, 정우성과 함께 했던 김지운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어딘가 한 발 물러서 있다. 그래서 작품이 그리고 있는 세계를 좀더 관망하면서 거기에 맞는 가장 자연스러운 연기들을 꺼내놓는다. 한 발 물러서 있어 오히려 도드라지는 역설이 가능해지는 이유다. 

 

송강호의 이런 면모가 가장 매력적으로 드러난 작품은 전도연에게 칸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겼던 이창동 감독의 ‘밀양’에서였다. 남편과 사별후 어린 아이와 함께 밀양에 오게 되지만 아이마저 유괴로 잃은 후 모든 게 무너져 버린 신애(전도연) 옆에서 그를 지켜보며 주변을 맴도는 종찬 역할을 연기했다. 사실상 ‘밀양(密陽)’ 즉 ‘Secret sunshine’ 같은 존재로, 어둠 속에 갇힌 신애에게 작은 빛을 주는 그런 역할을 역시 ‘한 발 물러서 있는’ 모습으로 송강호는 연기함으로써 전세계 평단의 극찬을 받았다. 

 

특히 이런 자연스러운 면들은 그가 표현한 인물들이 너무나 한국적인 초상들을 그려내게 한 이유가 됐다. ‘변호인’의 국선변호인, ‘밀정’의 독립운동가, ‘택시운전사’의 5.18 민주화운동의 증언자, ‘기생충’의 반지하 서민 등등 그는 다양한 시대적 인물들을 연기했지만 그 인물들에는 모두 송강호 특유의 한국적인 정감 같은 것들이 묻어난다. 이것은 우리가 그 시대를 떠올릴 때 연상될만한 당대 인물들의 초상 같은 느낌이 있다. 

 

‘삼식이 삼촌’ 역시 마찬가지다. 6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압축성장을 해온 그 시기를 막연히 어둠으로만 기억하고 있는 이들에게, ‘삼식이 삼촌’은 당대의 먹고 사는 일이 얼마나 사람들의 욕망을 건드렸던가를 한국적인 느와르로 보여준다. 물론 그 욕망이 비뚤어진 행동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만만찮은 후유증으로 남아 그가 연기했던 ‘택시운전사’의 비극과 ‘기생충’의 양극화로 훗날 돌아오게 되지만, 적어도 그의 설득력 있는 연기는 이 인물을 미워할 수만은 없게 만든다. 한 발 물러서 보면 다르게 보인다던가. 그것이 지나간 시대이건, 한 사람의 아픈 삶이건, 혹은 치열한 연기의 세계이건, 한 발 물러서 보면 보이는 게 다르고 그래서 그걸 더 잘 소화할 수 있다는 걸 송강호만큼 잘 보여주는 배우도 없을 듯 싶다. (글:국방일보, 사진:디즈니+)

‘엄마, 단둘이 여행 갈래?’, 이효리가 껴안은 건 엄마만이 아니었다

엄마, 단둘이 여행 갈래?

“이런 강도 보고 저런 산도 보고 들판도 보고 이러면서 힐링이 되는 거야. 여행이라는 건.” 이효리의 엄마 전기순씨가 그렇게 말할 때 그에게서는 순간 소녀 같은 설렘이 느껴졌다. “저런 산만 쳐다보면 산이 너무 좋은거야 엄마는. 저런 데서 막 누비고 다니며 버섯도 따고 고사리도 꺾고 도라지도 캐고...” 엄마는 그런 산 같은 자유로운 삶을 꿈꿨던 모양이었다. 

 

JTBC ‘엄마, 단둘이 여행 갈래?’를 통해 함께 경주로 여행을 떠난 이효리와 엄마는 어딘가 그런 일이 낯설고 어색해 보였다. 그런 여행이 그리 많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고, 취향도 너무나 달라 이효리가 뭘 하자고 해도 이런 저런 이유로 싫다고 말하는 엄마였다. 야경이 좋다며 보러가자고 하면 잠을 자야 한다고 하고, 찜질방에 가자고 하니 머리가 망가진다고 안된다고 한다. 네일아트라도 해보자고 하니 집에 가면 밭일할 걸 뭐하러 그걸 하냐고 하신다. 

 

대릉원에 관심이 있다고 가서는 해설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딘가 무관심해 보이고, 경주에 가면 봐야 한다며 첨성대 앞에 가서도 사진 몇 장 찍고는 다 했다고 돌아선다. 그런 엄마의 모습이 이효리는 우스우면서도 왜 그런 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다. 특히 여행 오면 남는 게 사진인데, 엄마는 사진을 찍을 때마다 싫어한다. 왜 찍느냐며 손사래를 치고, 애써 찍으려 하면 어색해한다. 

 

교복을 입고 소녀처럼 변신해 찍은 사진들 중에서 잘 나온 걸 고를 때도 엄마는 이효리에게 “너 사진빨 잘 받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모습은 보기 싫다 하신다. 귀엽다, 예쁘다, 잘 나왔다고 이효리가 계속 말하지만, 엄마는 부정한다. “늙어가지고 잘 나온 게 어딨어. 다 꼴보기 싫구만.” 웃는 모습이 예쁘다는 이효리의 말에도 “웃는 것보다 그냥 다물고 찍는 게 자연스럽다”고 하신다. 그런 엄마에게 이효리가 농담처럼 슬쩍 말을 얹는다. “자신의 모습이 맘에 들지 않아요? 사랑하도록 해봐요. 전여사님 우리 모두가 다 늙잖아요.”

 

이효리의 엄마지만 보다보니 자꾸만 우리네 엄마들이 겹쳐진다. 어렵게 살았고 그 어려움을 벗어나기 위해 여유도 없이 일하며 살아오면서, 이제 좀 여유가 생겼어도 여전히 과거처럼 ‘실용적인 선택’이 삶의 습관이 되어 살아가시는 엄마들. 그래서 나이들고 눈가에 주름이 생기고 하는 일들을, 애써 숨기면서 살고픈 마음이 더 많은 엄마들이다. 캠코더로 엄마를 찍던 이효리가 “엄마 팔자걸음이다”라고 말하자 금세 ‘일자걸음’으로 고쳐 걷는 모습에서 엄마들의 그런 마음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있으면서도 “눈가 주름도 쫙 펴졌으면 좋겠어. 쫙 다리미로 다린 것처럼.”이라고 딸이 말하자 엄마는 욕심은 한도 끝도 없다며 그걸로 만족하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슬쩍 딸 자랑을 한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다 예쁘다고 난리들인데 뭐. 예쁘고 착하고 얼마나 너그럽고 착한 딸이냐 엄마한테 그래.” 그러면서 “한번 겪어봐라. 한번 부딪쳐봐라.”라는 말로 남들 이야기가 기쁘면서도 자신에게는 좀 소원한 것 같은 마음의 아쉬움도 드러낸다. 

 

가난했던 삶. 당신이 어려서 사랑을 못받아 자식들에게는 사랑을 듬뿍 주면서 키우려 했지만 막상 아빠를 만나고 나서 여유도 틈도 없었다는 말을 꺼내며 엄마는 슬쩍 눈물을 훔친다. “울어?”하고 묻는 이효리에게 “뜨거운 거 먹으니까 눈물이 난다”고 했지만 아마도 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왔을 테다. 이효리는 쉽지 않은 이야기를 꺼낸다. “나는 엄마랑 아빠랑 같이 있으면 지금도 약간 긴장이 계속 되는 거 같아. 무슨 일이 벌어질까봐. 하도 일이 벌어지니까. 둘이 따로따로 있으면은 괜찮은데 같이만 있으면...”

 

“그런 점에서 너희들한테 미안하다. 엄마로서.” 그렇게 말하는 엄마에게 이효리는 엄마가 사과할 건 없다며 늘 아빠가 먼저 시작했고 그래서 자신이 신랑을 순한 사람으로 골랐다는 이야기도 꺼내놓는다. 이효리는 자꾸만 그 아픈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놓으려 하지만 엄마는 그걸 꺼내놓고 싶지 않다. 그 과거를 부정하고 싶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엄마가 “좋은 얘기만 하자”고 할 때 이효리가 하는 답변이 가슴에 와닿는다. “좋은 얘기 나쁜 얘기가 어딨어? 다 지난 얘기지.”

 

누구나 가족사에 아픔 하나쯤은 다 있게 마련이다. 특히 치열하게 살 수밖에 없었던 시대를 부모님들과 겪어온 현 세대들이라면 이효리와 엄마의 이런 여행이 남일처럼 느껴지지 않을 게다. 하지만 그런 아픈 과거들은 애써 부정한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지 않을까. 이효리는 있는 그대로를 직시하려 한다. 나이들어 잔주름이 생기면 생기는 거고, 본래 팔자걸음을 걷는 건 숨길 일도 아니다. 그러나 아픈 가족사 역시 애써 부정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새로운 삶의 길이 열릴 수 있다고 이효리는 말하고 있다. 

 

“너무 사랑하는 엄마가 힘들 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었던 그 시간이 나에겐 너무 고통스러운 시간으로 평생 가슴에 남아 있고, 그래서 더 잘해야 됐는데 반대로 이상하게 그것 때문에 더 엄마를 피하게 되는 안보고 싶은 그런 마음이 좀 있었던 것 같았어요. 그게 미안함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나의 무기력한 모습을 다시 확인하는 게 너무 두려워서였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그런 마음을 좀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그런 마음들이 엄마하고 나의 사랑을 확인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그런 마음들을 용감하게 물리쳐 보고 싶어요.” 

 

‘엄마, 단둘이 여행 갈래?’ 같은 제목에는 사실 부모와 조금 소원해진 자식들에게는 필요한 ‘용기’ 같은 게 느껴진다. ‘단둘’이 여행을 가는 일은 가족의 일상을 벗어나는 일이고, 그래서 한 걸음 떨어져 그 살아왔던 삶을 좀더 직시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이효리와 그 엄마의 지극히 사적인 여행처럼 보이는 이 프로그램이 그들의 이야기를 넘어 우리들의 이야기처럼 다가오는 건 그래서다. 한때는 피하고 부정하고 싶었던 과거를 솔직하게 꺼내놓고 마주하는 이효리의 용감한 마음은, 우리도 갖고 싶고 또 가져야될 것 같지만 용기를 내지 못했던 그 마음이기 때문이다. (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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