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소문 탄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 삶을 꿰뚫는 멀티버스 가족코미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다니엘 콴과 다니엘 쉐이너트 감독의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는 일단 제목이 너무 길어 머릿속에 단번에 입력되지 않는다. 포스터만 봐도 머리가 복잡해진다. 마치 만다라를 들여다보는 것 같은 그 포스터에는 중심에 주인공 에블린(양자경)이 서 있는데 그 뒤로 눈알을 이마에 붙인 복면의 존재가 마치 그를 조종하는 듯 보인다. 그리고 양자경 주변으로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딸 조이(스테파니 수), 세무국 직원 디어드리(제이미 리 커티스), 남편 웨이먼드(키 호이 콴), 아버지(제임스 홍)가 원형으로 포진되어 있다. 

 

멀티버스를 소재로 한다는 것을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포스터만으로 그 세계의 복잡함이 느껴진다. 실제로 영화는 시작과 함께 세탁소를 운영하며 국세청 조사에 시달리게 된 에블린의 복잡한 상황을 보여준다. 세무조사 준비로 정신이 없지만, 몸이 불편한 아버지의 식사를 챙겨야 하고, 어딘지 현실성이 떨어지고 지나치게 감성적인 남편의 이혼 요구를 받는다. 하지만 가장 큰 골칫거리는 성 소수자로 여자친구를 인정해달라는 딸 조이다. 에블린의 정신은 마치 세계 하나가 붕괴되기 직전의 상태 같다. 

 

미국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이민자 가족의 가족드라마처럼 시작하던 영화는, 그러나 이렇게 붕괴되기 일보 직전에 놓은 에블린 앞에 ‘멀티버스’ 우주를 펼쳐놓는다. 알파 지구에서 온 알파 웨이먼드가 이 우주에 있는 웨이먼드에 접속해 들어와 에블린에게 이 멀티버스를 설명해준다. 무한한 우주가 있고 여러 선택을 통해 다른 에블린이 살아가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그라는 것. 반면 알파 지구의 에블린은 다른 우주와 접속하는 기술을 개발한 인물이다. 알파 웨이먼드는 그 기술을 통해 자신이 이 우주의 웨이먼드 속으로 들어와 그 능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이제 에블린도 다른 우주의 에블린과 접속해 그 능력을 불러올 수 있다고 말한다.

 

즉 갑자기 펼쳐지는 이 멀티버스는 영화를 B급 코미디가 가미된 SF 판타지 액션 장르로 만들어버리지만, 어찌 보면 어떤 삶의 위기에 봉착한 에블린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펼쳐놓은 상상이나 백일몽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멀티버스 안의 설정들은 마치 꿈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현실과 연결고리를 갖는 것처럼 연결되어 있는 지점들을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다른 우주의 자신과 접속하기 위해는 엉뚱한 행동들을 해야 한다는 설정이 등장하는데, 이를 테면 신발 양쪽을 바꿔 신거나 손가락 사이를 종이로 베기, 립밤 먹기, 심지어 항문에 트로피를 끼우기 같은 이상한 행동들이 그것이다. 즉 현재의 자신과 전혀 맥락이 없는 행동을 해야 다른 우주의 새로운 자신을 끌어들일 수 있다는 이 설정은, 에블린이 지금껏 해보지 않은 엉뚱한 행동들이나 가보지 않은 길로 나간 적이 별로 없다는 걸 말해준다. 결국 삶에 있어서 어떤 새로운 가능성은 현재까지 걸어온 길 바깥으로 슬쩍 빠져나가는 것에서부터 생겨날 수 있다는 걸 그 설정이 보여주고 있는 것. 즉 이런 지점은 가족드라마로 시작한 영화가 멀티버스의 판타지 액션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도 그 설정들 속에서 삶에 대한 어떤 통찰이 발견하게 해준다.

 

갑자기 알파 지구에서 접속해 들어온 웨이먼드가 조부 투파키라는 우주를 붕괴시킬 위기를 몰고온 존재에 대해 말하는 대목도 마찬가지다. 그 조부 투파키는 다름 아닌 알파 지구 에블린의 딸 조이가 흑화한 인물로 그를 그렇게 만든 건 바로 그 엄마다. 그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늘 윽박지르기만 하자, 조이는 멀티버스에 빠져들었고 그 곳에 있는 모든 조이들의 능력을 끌어와 뭐든 할 수 있고 파괴할 수 있는 존재가 됐다는 것. 웨이먼드가 들려 준 이 이야기에도 역시 이 세계에서 에블린이 딸 조이에게 느끼는 감정들이 녹아있다. 에블린은 성 소수자인 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함으로써 딸과 갈등하고 그건 마치 세계의 붕괴처럼 다가온다.

 

즉 이 멀티버스의 세계 속에서 펼쳐지는 에블린과 흑화한 딸 조부 투파키의 대결은 판타지 액션으로 펼쳐진다. 서로 다른 우주의 (다른 선택을 한) 또 다른 자신들의 능력을 서로 불러와 대결을 펼치는 것. 그 와중에 에블린은 다른 우주에서 화려한 영화배우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에블린과 접속한다. 그건 아버지가 반대했던 웨이먼드와 결혼하지 않는 선택을 했다면 살 수 있었던 지금과는 너무나 다른 화려한 삶이다.  

 

가족과의 갈등과 세무조사 같은 복잡한 주변 상황들 때문에 실패한 인생이라고 여기며 극단으로 몰렸던 에블린이 빠져보는 백일몽.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이것을 멀티버스 판타지 장르로 변환해 보여준다. 중요한 건 그 상상력이 단지 재미 차원이 아니라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깨달음의 차원으로까지 나간다는 점이다. 그건 마치 보리수 아래서 온갖 가능성의 세계들이 욕망과 맞물려 만들어내는 번민 속에서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싯다르타의 깨달음을 영화라는 영상을 통해 구현해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자신의 현재를 실패한 삶이라 규정하고, 그래서 과거에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과는 다른 화려하게 성공한 삶을 살았을 거라 말하는 것 같은 에블린의 멀티버스는 바로 그 번민의 근원이다. 그 세계는 지금을 초라하게 만들고 저편으로 자신을 자꾸만 끌어당긴다. 하지만 멀티버스 속에서 에블린과 맞서는 조부 투파키는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우주의 가능성과 능력들을 마음대로 끌어와 뭐든 할 수 있게 됨으로써 흑화된 인물이다. 뭐든 다 할 수 있는 세계란 결국 아무 것도 의미가 없는 공허와 허무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늘 최악의 선택을 해서 모든 것들이 엇나가버린 듯한 에블린과, 모든 걸 마음대로 다 선택할 수 있어서 지독한 공허와 허무에 빠져버린 조이. 에블린은 깨닫게 된다. 마음대로 다 되지 않는 어떤 선택들로 만들어진 삶이기 때문에 그 하나하나가 소중한 것이고, 다만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기준에 맞춰 평가하기 때문에 성공이니 실패니 하는 것으로 그 삶을 재단하게 된다는 것을. 

 

갈등하고 부딪치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서로 상처주기도 하는 삶이지만, 그 삶을 살 수 있게 해주는 건 그래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다정하게’ 대하는 그 소소한 친절에 있다는 걸 에블린은 깨닫는다. 그건 마치 돌이나 행성처럼 도무지 합쳐질 수 없을 것 같은 두 세계가 부딪쳐 빅뱅을 일으키는 정도의 깨달음이다. 이 다정함이 공허와 허무로 가득한 세계와 싸우는 장면은 그래서 우습고, 통쾌하면서도 가슴 뭉클한 감동을 준다. 

 

아마도 영화를 보고 나오는 관객들은 이 소소하고 자잘한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을 때 비로소 그 가치를 느낄 수 있다는 이 작품의 이야기에 놀라워할 것이다. 또한 이 통찰의 과정을 거대한 멀티 버스의 소동 속으로 끌어들였다가 어느 순간 깨달음으로까지 이어가게 만들면서도 그것이 전하는 위로에 뭉클해질 것이다. 그걸 결국 이 거대한 우주 속 자잘한 우리의 존재 하나하나가 모두가 소중하고 결코 잘못된 선택이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니까. (사진: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소지섭, 김윤진, 나나가 ‘자백’을 통해 보여준 것들

자백

시작과 함께 부감으로 보이는 끝없이 펼쳐진 산세가 마치 앞으로 이 영화가 펼쳐놓을 만만찮은 이야기를 예감케 한다. 서로 겹쳐져 있는 산들은 이야기 뒤에 숨겨진 또 다른 이야기를 말해준다. 그 산세들이 그림으로 변하고 그려진 그림 위에 붓칠이 계속 채워지는 오프닝 신도 마찬가지다. <자백>은 그런 영화다. 진실인 것처럼 보이던 사건이 한 꺼풀을 벗겨내면 거짓으로 바뀌고 또 다른 진실을 드러내는 그런 영화. 그래서 이 시작점에 시선이 포획되면 끝점까지 시선을 돌리기가 어려운 극강의 몰입감을 주는 작품이다.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던 유민호(소지섭)는 불륜 사실을 폭로하겠다는 협박에 돈 가방을 챙겨들고 호텔을 찾아가고, 거기서 엉뚱하게도 불륜 상대인 김세희(나나)를 마주한다. 세희 역시 협박을 받았다 생각한 민호는 함께 호텔에서 그 인물을 기다리다 경찰차들이 들어서는 걸 보고는 방을 빠져나오려 한다. 그 때 누군가 민호를 때려 정신을 잃게 만들었고 깨어나 보니 세희는 살해됐다. 문도 창문도 모두 잠겨 있는 호텔방. 그래서 밀실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용의자는 바로 민호가 된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민호는 자신이 간간히 찾던 별장에서 승률 100% 변호사 양신애(김윤진)와 함께 무죄를 입증할 방법을 고민한다. 

 

변호에 있어서 ‘창의력’과 ‘논리’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양신애는 민호에게 진실을 말해줄 것을 요구하고, 민호는 세희와 출장을 핑계로 별장에서 지냈던 날 겪었던 사건을 들려준다. 돌아오는 길에 고라니를 피하다 발생한 사고. 차끼리의 충돌도 없었지만 마주 오던 차량은 피하려다 사고가 나고 운전자는 사망한다. 불륜이 탄로 날까 두려운 나머지 그들은 이를 은폐하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는 전적으로 민호의 진술일 뿐,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가 없다. 양신애는 민호의 진술에 담긴 허점을 논리적으로 파고들고 또 다른 가능성의 시나리오를 이야기한다. 그 시나리오는 민호가 처한 밀실살인에서 그를 용의선상에서 빼내줄 수 있는 이야기다. 즉 <자백>은 이처럼 벌어진 두 개의 사건(밀실살인과 사고사체유기)을 두고 변호사와 용의자가 진실 공방과 더불어 변론을 위한 시나리오를 그려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따라서 영화는 어떤 ‘창의적’이고 ‘논리적’인 시나리오에 의한 진술인가에 따라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고 새로운 가해자가 용의자로 세워지는 반전의 반전을 보여준다. 마치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처럼 진술과 관점에 따라 사건이 전혀 다르게 해석되고 전개되는 서사를 보여주는 것. 앞서 시작점에 보여준 산세와 덧칠되는 그림처럼 영화는 이렇게 중첩되고 바뀌어가는 서사의 변화 속으로 관객들을 밀어 넣는다. 그래서 어느 순간 관객은 이 논리와 이야기로 꾸며진 산 속 깊숙이 들어와 빠져나가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작품이 인상적인 건, 배우들이다. 어떤 논리의 진술을 하느냐에 따라 배우들은 그 캐릭터의 성격도 변화한다. 즉 피해자였던 인물이 어떤 진술 속에서는 가해자로 돌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계속 전개를 바꿔나가는 영화는 마치 배우들이 얼마나 다양한 결의 연기를 하고 있는가를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무대가 되어준다. 누명을 쓴 인물로 그려질 때의 소지섭은 그 억울함이 느껴지지만 다른 서사 속에서 가해자로 세워지는 소지섭에게서는 광기가 느껴진다. 유혹적이고 대담해 보였던 나나는 한없이 가녀린 존재로 변화하기도 하고, 김윤진은 의뢰인의 무죄를 변호하면서도 끝없이 의심하고 흔들리는 이중적인 면면을 소화한다. 

 

그래서 진술에 따라 변화하는 그 스토리의 미로 속으로 관객을 인도하는 그 과정은, 다른 한 편에서 보면 소지섭이나 나나, 김윤진 같은 배우들이 가진 여러 연기의 결을 깊이 들여다보는 과정이 되어주기도 한다. 지금껏 봐왔던 어떤 고정된 이미지가 아니라, 특정 상황에 들어가면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연기자의 면면을 볼 수 있다는 것. 물론 런닝타임 105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빨려 들어가는 작품의 매력도 매력이지만, 배우들의 매력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사진:영화'자백')

‘20세기 소녀’, 넷플릭스가 꺼내놓은 K멜로 세계도 반응할까

20세기 소녀

첫 사랑이다. 간만에 다시 느껴보는 첫 사랑의 설렘과 두근거림 그리고 가슴 아픔까지.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20세기 소녀>는 간만에 보는 본격 멜로의 감성을 제대로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 

 

심장수술을 위해 외국으로 떠나는 연두(노윤서)를 위해 그의 둘도 없는 친구 보라(김유정)는 친구가 짝사랑하는 백현진(박정우)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해 알려주기로 한다. 그런데 백현진을 관찰하다 보니 그의 친구 풍운호(변우석)가 자꾸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보라는 풍운호와 가까워지지만 수술을 마치고 돌아온 연두가 짝사랑했던 인물이 백현진이 아니라 풍운호였다는 사실이 충격을 받는다. 

 

어찌 보면 전형적인 하이틴 로맨스 풍의 첫 사랑 서사다. 친구와의 우정과 이성과의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고 삼각, 사각으로 얽히는 관계 속에서 처음에는 설레다가 깊어지고 그래서 아파하게 되며 힘들어하는 그 저릿하지만 익숙한 이야기. 세기말의 레트로한 감성이 있는데다 풋풋한 청춘남녀들의 사랑과 우정이야기가 펼쳐져 있어 어딘가 종영한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를 떠올리게 만드는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익숙한 첫 사랑의 서사에 저도 모르게 빠져들게 되고, 과몰입하게 되더니 어느 순간 눈물을 훔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건 옛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20세기 소녀>의 풋풋한 사랑과 우정 이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화가 이 익숙한 스토리에 관객을 빠져들게 만드는 K멜로 특유의 섬세한 밀당을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공중전화, 삐삐 같은 지금과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는 20세기 연애의 매개체들은, 애타는 청춘남녀들의 마음이 곧바로 연결되지 않고 엇갈리기도 하는 중요한 장치들이 된다. 전화 한 통이나 혹은 문자 메시지 하나로 쉽게 연결되고 쉽게 끊어지는 21세기와는 전혀 다른 감성이 바로 이 20세기식 연애에는 자연스러운 밑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영화가 어른이 된 나보라에게 배달된 낡은 비디오테이프로부터 시작되는 것도 이런 감성을 말해준다. 

 

첫사랑 서사는 어딘가 현재의 나가 바라보는 그 때 그 시절의 서툴렀지만 순수하고 풋풋했던 우리 모두의 감성을 건드리는 힘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 <20세기 소녀>는 20세기와 21세기로 구분되는 달라진 시대적 감성을 또 다른 관점으로 붙여 놓는다. 그래서 21세기에 바라보는 20세기의 사랑이야기는 더 애틋하게 느껴진다. 

 

사실 우리네 영화에서 멜로 장르는 어느 순간부터 잘 보이지 않는 영역이 되어버린 게 현실이다. 비교적 최근 작품으로 떠오르는 건 2019년 방영됐던 <유열의 음악앨범> 정도다. <8월의 크리마스마스(1998)>, <봄날은 간다(2001)>, <행복(2007)>, <호우시절(2009)> 같은 레전드 멜로를 연출했던 허진호 감독이 본격 멜로에서 벗어나 <덕혜옹주(2016)>나 <천문:하늘에 묻는다(2019)> 같은 다른 장르의 영화를 만든 건 아무래도 극장이라는 공간에서의 멜로가 더 이상 관객들을 끌기 어렵다는 현실 인식 때문이 아니었을까. 대신 허진호 감독은 2021년 <인간실격>이라는 드라마를 통해 안방극장에 멜로를 그려 넣었다. 

 

<건축학개론(2012)> 같은 첫사랑 서사를 담은 멜로가 극장에서 열풍을 일으키던 시대는 서서히 저물고 있다. 여기에 OTT 같은 안방극장이 본격화되면서 멀티플렉스 극장은 그만큼 블록버스터화한 영화들을 전면에 내세워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래서일까. 넷플릭스에서 만나는 첫사랑 서사를 담은 본격 멜로 영화 <20세기 소녀>는 더더욱 반갑게 느껴진다. 극장의 변화로 인해 설 자리를 잃어가던 멜로 영화가 다시금 설 자리를 마련한 듯한 반가움이다. 

 

이 작품은 특히 최근 들어 넷플릭스 같은 글로벌 플랫폼에 의해 <연모>, <스물다섯 스물하나>, <갯마을 차차차>, <사내맞선> 등등 전 세계에 저변이 만들어지고 있는 K멜로의 저력을 드러내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향후 글로벌 반응이 궁금해진다. 서구의 멜로에서는 보기 어려운, 피부가 아니라 가슴을 간지럽게 하고 뛰게 만들어 사람을 미치게 하는 K멜로의 힘이 이 작품 안에 녹아 있다. 빨갛게 익어가는 가을 저마다 가슴 한 편의 첫 사랑을 끄집어내게 만드는 시간 속에 빠져보기를.(사진:넷플릭스)

‘위기의 X’가 꺼낸 웨이브 오리지널의 가능성

위기의 X

잘 나가던 대기업 차장 a저씨(권상우). 권고사직을 당한 후 부정하고 분노하다 타협하고 우울해지다가 수용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친 이 웃픈 a저씨는 퇴직금마저 홀라당 주식과 코인에 말아먹고 발기부전에 원형탈모까지 겪는다. <위기의 X>라는 제목이 딱 어울리는 인물이고 그래서 이를 코믹하게 연기해내는 권상우의 면면에 빵빵 웃음이 터지지만 어딘가 보면 볼수록 짠한 마음이 깊어진다. 

 

에세이 <아재니까 아프다>가 원작으로 이를 코미디로 풀어낸 웨이브 오리지널 시리즈 <위기의 X>의 이야기는 어딘가 낯설지가 않다. 그건 어디선가 이런 작품을 봤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런 이야기를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해왔다는 의미다. 중년의 아저씨들이 권고사직을 당하는 일이나, 그래서 주식에 투자했다가 떡락의 지옥을 경험하고 육체적이고 심리적인 충격이 겹쳐 발기부전으로 병원을 찾는 경험들은 아저씨들의 술자리에는 늘상 농반진반의 안주거리로 올라오는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술자리 농담이 그러하듯이, 자신들의 위기를 호기롭게 웃음을 풀어내며 빵빵 터지는 이야기들이 <위기의 X>에는 가득 채워져 있지만, 그렇게 웃고 나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얼큰하게 취한 마음 한 구석에 헛헛한 쓸쓸함이나 슬픔 같은 것들이 남는 것처럼 이 작품에는 짙은 페이소스가 밑바닥에 깔려 있다. 

 

특히 지난 대선을 요동치게 만들었던 부동산 관련 정책들과 그로 인해 분양을 받고도 대출을 받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이 아저씨네 부부의 이야기는 ‘눈물 나게’ 웃기는 면이 있다. 수치적으로는 청약에 ‘당첨(?)’된 것만으로도 시세차익으로 10억대가 넘는 돈을 번 것처럼 여겨지지만, 그것이 현실이 되려면 그만한 현금을 넣을 수 있는 여력이 되어야 하는 현실. 그래서 분양 사무실 앞에서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까 포기할까를 고민하며 우왕좌왕하는 부부의 모습은 빵빵 터지면서도 슬프다. 

 

그 당첨된 아파트를 손에 쥐려면 남편은 이사급으로 스카웃되어야 하고, 아내는 상위 5프로 웹소설 작가가 되어야 한다. 그건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인생 역전의 욕망 앞에서 이들은 이들은 스스로를 그 지옥의 레이스 위에 밀어 넣는다. 하지만 현실은 너무나 요원하다. 남편은 재취업을 위해 얼마나 자신이 젊은 마인드를 갖고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면접자들 앞에서 되도 않는 랩을 선보이고, 아내는 어떻게든 웹소설 작가로 성공하기 위해 19금을 쓰기 시작하다 덜컥 임신을 하게 되면서 흥분만 하면 입덧을 하는 통에 19금 소설을 포기하는 상황을 맞이한다. 

 

어쩌다 남편은 부사장으로 스타트업 회사에 틀어가지만 수평적인 관계를 강조한다며 툭하면 회의 중 욕설에 멱살잡이를 하는 회사 분위기에 절망한다. 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차량 세척 관련 관리 회사라는 점에 마음을 다잡고 몸과 영혼을 갈아 넣는 이 아저씨와 그 회사 젊은 사무직 여직원 김대리(박진주)가 나누는 대화는 일과 미래에 대한 너무나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담배 한 개비도 아껴 피우며 돈을 모아 ‘파이어’를 꿈꾼다는 김대리는 물불 안 가리고 일에 몰두하는 아저씨에게 쉬엄쉬엄 하라며 그러다 번아웃 온다고 말해주지만, 이 아저씨가 “우리 때 번아웃은 과로사”였다는 말은 너무나 웃프다. 과로사를 해야 겨우 번아웃이라고 인정해줬던 노동 착취의 시대를 꼬집는 말이다. 하지만 김대리는 회사가 이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마당에도 자신이 계획한대로 목표금액 8억을 모았다며 곧 퇴사할 거라고 말한다. 

 

애써 퇴사를 막기 위해 설득하려는 이 아저씨에게 김대리가 하는 말은 반박불가의 설득력으로 다가온다. “부사장님. 저 이거 오랫동안 생각하고 준비한 거예요. 그건 노는 걸로 폄훼하시면 곤란해요. 그리고 저는 대리든 과장이든 10년 뒤에 제가 서 있을 위치 같은 거는 중요치 않아요.” 대신 그는 그 “10년”이 중요하다고 한다. “10년이라는 시간 그 자체”가. “인생의 모든 시간을 오로지 나만을 위해 쓸 수 있다면 얼마나 가치 있어요?” 그 말에 아저씨는 할 말을 잃는다. 

 

<위기의 X>는 어찌 보면 가벼운 터치의 코미디처럼 보이지만, 그 무엇보다 깊은 현실 공감과 세태 풍자의 맛이 ‘거침없이 강렬하게 느껴지는’ OTT 특유의 색깔이 묻어나는 작품이다. 거기에는 40대 중년 부부가 마주한 경제적 상황에서부터 부부관계 같은 성담론에 이르기까지 주저하지 않고 풀어내는 시원시원함이 있고, 무엇보다 이 무거운 이야기를 빵빵 터지는 풍자와 코미디로 밝게 끌고 나가는 힘이 있다. 

 

2021년에 웨이브 오리지널의 진수를 보여줬던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라는 작품이 있었던 것처럼 2022년작 <위기의 X>가 그 계보를 잇는 느낌이다. 지극히 한국적이면서 거침없는 풍자와 코미디의 맛. 웨이브라는 토종OTT의 색깔이 뭐냐고 물었을 때 아직까지 선명하게 다가오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를 대표하는 콘텐츠로서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를 잇는 <위기의 X>를 떠올리는 건 그래서 자연스러울 것 같다. 

 

권상우는 물론이고 임세미, 성동일 같은 이 코미디의 페이소스를 제대로 만들어낸 배우들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권상우나 성동일이야 웃픈 코미디 연기로 이미 정평이 나 있지만, 아내 역할로 나온 임세미는 기대 이상의 코미디 연기를 보여준다. 여기에 신현수, 박진주. 이이경, 조한철 같은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도 빼놓을 수 없다. 6부작으로 끝났지만 못내 시즌2가 궁금하고 기다려지게 만든 건 이들 배우들의 매력이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사진:웨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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